글로 승부하는 투명한 불완전
아침마다 손바닥으로 유리문을 밀면, 먼저 닿는 것은 온도였다.
차갑다가, 미세하게 미끄러지다가, 어느 순간 내 몸보다 먼저 하루로 들어가는 것 같은 그 감각.
도시의 속도는 늘 나보다 반 걸음 앞서 있었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잡으려 하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 채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
요즘은 세상이 점점 더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글보다 영상을 먼저 보고, 이미지를 먼저 믿는다.
어떤 이들은 한 컷의 그림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어떤 이들은 짧은 문장 하나로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세상은 가볍게 반짝이고 빠르게 지나간다.
그 속에서 나는 늘 조금 느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문장을 재빠르게 던져 사람을 사로잡는 재주도 없다.
어쩐지 나는 오래된 방식으로 세상을 읽는 사람 같았다.
화려하거나 극적인 장면보다, 유리문 표면의 차가운 감촉 같은 것에 더 오래 머무르는 사람.
그래서 ‘투명한 불완전’을 어떻게 보여줄까 생각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곤 했다.
세상은 시각적 증명을 원하고, 감각적 충격을 원한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었다.
그 문장이 때때로 너무 느리고, 너무 섬세해서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마치 투명한 실 같은 문장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만 바라보다 보니, 내가 이미 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 문장은 어떤 장면을 그리는 대신 장면을 향한 마음의 속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유리문을 밀 때 먼저 스며오는 온도,
도시보다 한 박자 늦게 움직이는 걸음,
세상과 나 사이에 생기는 작은 거리들.
그건 아무리 정확한 그림으로도, 아무리 감각적인 영상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문장은 느린 대신 깊이 스며든다.
이미지가 한 번에 보여주는 것을, 문장은 천천히 열어젖힌다.
독자는 그 느린 틈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을 끌어오게 되고,
내 문장이 그들의 마음속 장면을 깨워낸다.
그때 이해했다.
내 글이 ‘투명한’ 것은 부재 때문이 아니라, 독자에게 빈 공간을 건네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불완전’한 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스스로 완결되는 대신 읽는 사람의 세계와 섞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림은 보이는 것을 명확히 하고,
문장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한다.
나는 후자의 세계를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올드패션이고, 문장으로 승부하는 사람이고,
그 문장 속에서 내가 만든 세계는 느리지만 꾸준히 빛을 모은다.
투명한 불완전은
항상 빛나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결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닿으면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환해지는 세계다.
나는 그 세계를 그림 대신
문장으로 쌓아올리고 있다.
천천히, 그러나 내 방식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