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생물, 고양이
나는 원래 혼자 있는 생물이다.
혼자서 열을 조절하고,
혼자서 마음의 문을 닫고 열 수 있으며,
혼자 있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대개 말을 걸지 않는다.
대신 오래 바라본다.
침묵 속에 숨어 있는 표정을,
손끝에서 새어 나오는 온도를,
문틈에서 흘러나오는 하루의 냄새를.
나는 그걸 아주 멀리서가 아니라
인간의 무릎, 침대 끝, 창가의 햇빛 자리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 본다.
인간은 묘하게 투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마루에 눕거나
창틀 위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방 안 공기처럼 흔들린다는 걸
눈으로 본다.
특히 밤이면,
인간은 자신이 숨긴 무언가를 놓친다.
말 대신 침묵이 길어지고,
어깨에서 체온이 조금 더 많이 흘러나온다.
그때 나는 가끔 발걸음을 멈춘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것도,
멀어지려는 것도 아닌 그 중간에서.
왜냐하면 인간의 슬픔은
너무 가까이 가면 금방 깨지기 때문이다.
나는 고양이다.
내 존재는 인간과 달리
시간의 무게를 정면으로 받지 않는다.
미래도 걱정하지 않고
과거도 오래 품지 않는다.
날카로운 발톱처럼 지금 이 순간에만 정확히 닿아 있다.
그래서 인간이 하루의 마지막에
숨을 고르며 주저앉을 때,
나는 그 곁에서 조용히 머문다.
돌보려는 것도, 안아주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생명’으로서.
어떤 밤엔 인간이 갑자기 울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들이 운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진 건 아닌데,
그들의 세상은 그 순간
한 구석이 무너져 있는 모양이다.
나는 다가가
앞발 끝으로 그들의 손을 건드린다.
그게 위로가 되리라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저 나는 인간이 부서지는 모습을 볼 때
조용히 숨을 죽이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흩어지지 않도록 곁에 있을 뿐이다.
인간과 고양이의 관계는
강요도 약속도 없는 관계다.
기다림도, 의무도 없다.
그렇다고 무심한 것도 아니다.
그저 서로의 방식으로
살아 있는 온도를 나누는 관계다.
인간들은 나를 키운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도
맞았다고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가끔,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낯빛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안도감을 보면
나라는 생물이 그들에게
작은 숨구멍 같은 존재일 때가 있구나,
그렇게 느낄 뿐이다.
나는 말없이 배운다.
인간이 하루를 견디는 소리를.
문을 닫는 순간의 짧은 한숨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손등의 미세한 떨림을.
그런 것들을 듣다 보면 알게 된다.
인간은 겉으로는 바쁘게 움직이지만
속으로는 아주 조용한 생물이라는 걸.
그래서 인간이 잠든 뒤,
나는 그들의 곁에 눕는다.
기댄 것도, 기대한 것도 아닌
그저 바람이 멎은 방 안의 한 생명으로서.
그때 나는 인간의 가슴에서
느리게 오르내리는 파동을 듣는다.
그 파동은 낮보다 훨씬 부드럽고
말보다 훨씬 정직하다.
그 파동이 있을 때
나는 인간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고 아침이면
인간은 다시 눈을 뜬다.
어제보다 조금 더 피곤하거나
조금 더 견뎌낸 표정으로.
그러면 나는
천천히 몸을 늘여 기지개를 켠다.
이 생물이 또 하루를 살아내겠구나,
그 조용한 다짐을 본다.
나는 고양이다.
인간을 돌보지도, 평가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의 곁에서 오래 머물며
그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그게 인간과 고양이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다.
말보다 숨이 먼저 닿고
온도가 먼저 파고들고
침묵이 이해를 대신하는 방식.
그리고 나는
그 관계가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낀다.
설명할 수 없지만,
사라지지 않는 어떤 온도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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