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랑

조용하게 젖어간다.

by 윤담

윤서가 죽은 뒤에도 교실은 너무 환했다.
형광등은 어제와 똑같은 밝기로 켜졌고, 칠판 위에는 날짜가 적혔고, 분필가루는 손끝에 묻으면 늘 그렇듯 보송보송하게 부서졌다. 창문 바깥으로는 운동장이 있었고, 운동장에는 발자국이 있었고, 발자국 사이로 마르다 만 흙이 회색으로 들러붙어 있었다. 봄이 아직 완전히 오지 못한 아침이었다. 바람은 찼고, 햇빛은 얇았고, 교실 안쪽 공기는 아이들의 체온과 지우개 가루와 급식실에서 미리 끓여놓은 국 냄새가 섞여 묘하게 답답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이 정상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정상의 표정이, 사람을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들 때가 있다.
맨 뒤 창가 쪽 세 번째 자리. 윤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었다. 사람 하나가 사라진 자리는, 남아 있는 사물들을 모조리 증언으로 바꿔놓는다. 책상 위의 작고 옅은 긁힌 자국, 서랍 안에 끼어 있던 구겨진 종이, 의자 다리 끝의 검은 고무 마개, 책상 옆에 붙여둔 시간표의 반쯤 떨어진 모서리. 평소에는 아무도 보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꼭 물이 빠진 뒤 드러나는 강바닥처럼. 그 바닥에는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진흙과 뒤엉킨 풀뿌리와 썩은 잔가지와 누가 버렸는지 모를 투명한 비닐이 있었다. 윤서의 빈자리도 그랬다. 너무 늦게 드러난, 사람들의 무심함이 퇴적된 자리.
담임은 교실 문 앞에서 한동안 들어오지 못했다. 문틀을 짚은 손끝이 창백했다. 평소보다 곧게 선 척했지만, 어깨는 아주 조금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한 번 헛기침을 했고, 아이들은 이미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그 조용함 속에는 애도도 있었고, 공포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기들은 몰랐다는 얼굴을 하려는 서툰 계산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런 계산을 너무 일찍 배운다. 어떤 순간에는 울어야 하고, 어떤 순간에는 입을 다물어야 하고, 어떤 순간에는 놀란 표정을 해야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오늘은…” 담임이 입을 열었다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는 교사였고, 어른이었고, 아이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무너지지 않는 척해야 했다. 그러나 그날 그의 목소리에는, 깨지지 않으려 너무 힘을 준 유리잔 같은 떨림이 있었다. “오늘은 수업 전에… 잠깐 이야기하겠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학교는 사고를 설명할 때 늘 이상할 만큼 짧은 문장을 쓴다. 학생의 안타까운 소식. 비통한 마음. 추측성 발언 자제. 애도와 침착. 필요한 지원. 상담. 외부 유포 금지. 문장은 모두 매끈했고, 감정은 미리 닦여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 매끈한 문장들이 실제의 거친 표면을 가릴 뿐이라는 것을.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죽었다. 윤서가 죽었다. 어제까지 교복을 입고 여기 앉아 있던 아이가, 이제는 영영 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보다 더 끔찍한 것은, 교실이 그 아이를 기억하는 방식이 너무 빠르게 정리된다는 점이었다.
첫날은 울음이 있었고, 둘째 날은 침묵이 있었고, 셋째 날쯤부터는 소문이 생겼다. 사람의 비극은 늘 사실보다 소문으로 먼저 굳는다. 누가 그러는데 원래 우울했다고 하더라. 집안이 힘들었다더라. 성적 때문에 그랬다더라. 원래 성격이 좀 그랬다더라. 누군가는 윤서를 이해하려는 척했고, 누군가는 자기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이유를 개인의 안쪽에서만 찾으려 했다. 원래 약한 애였다고 말하면 세상은 훨씬 편해진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책임을 덜 느껴도 되니까. 교실의 공기, 방관의 웃음, 쓸데없이 가벼운 장난들, 선생의 늦은 눈치, 부모의 피곤한 침묵, 그런 것들은 모두 배경으로 밀려난다. 배경은 늘 무죄를 주장하기 쉽다. 배경은 자기 손으로 목을 조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이는 대체로 배경 속에서 죽는다.
칼날 같은 한마디 하나가 아니라, 매일 쌓이는 사소한 무심함 속에서. 누군가의 웃음, 누군가의 외면, 누군가의 “애들끼리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 누군가의 “네가 먼저 다가가 봤니”라는 권고, 누군가의 “요즘 왜 이렇게 예민하니”라는 피로한 한숨 속에서. 사람은 단번에 부러지지 않는다. 특히 아이는 더 그렇다. 아이는 오래 휜다. 오래 참는다. 어른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금이 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남은 사람들만 뒤늦게 묻게 된다. 왜.
왜.
그 질문은 너무 늦게 도착한 구급차 같았다.
윤서의 어머니는 처음 며칠 동안 거의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깊은 충격을 받으면 우는 것도 뒤로 밀린다. 먼저 오는 것은 비어버린 표정이다. 빈 그릇 같은 얼굴.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얼굴. 그는 집 안을 걸어 다닐 때마다 문턱에 몇 번이고 발을 걸렸고, 냉장고를 열어놓은 채 한참 서 있었고, 컵에 물을 따르다가 컵을 가득 넘치게 만들었다. 주방 싱크대 아래로 흘러내린 물이 발등을 적셔도 한동안 모를 때가 있었다. 마치 감각이 먼저 꺼진 사람처럼.
윤서의 방은 그대로였다. 책상 위에 연필꽂이가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반쯤 읽다 만 책이 엎어져 있었다. 커튼은 끝까지 치지 않아 오후 햇빛이 한 줄로 들어왔다. 먼지가 떠다녔다. 먼지는 너무 가벼워 보였고, 그래서 더 잔인했다. 이렇게 가벼운 것들만 방 안에 떠 있는데, 왜 이 방에는 그 아이가 없는가. 왜 무게가 있어야 할 존재가 사라지고, 먼지와 빛과 오래된 공기만 남았는가.
어머니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닫는 일조차 오래 망설였다. 누군가의 유품을 정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더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손으로 인정하는 일과 비슷했다. 손끝이 서랍 손잡이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 서랍 안에는 흔한 것들이 있었다. 지우개, 샤프심 통, 시험지, 과목별 프린트, 접어둔 작은 종이들. 너무 흔해서 오히려 눈물이 나는 것들. 사람은 특별한 순간보다 평범한 흔적 앞에서 더 쉽게 무너진다.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너무 당연해서 지나쳤을 물건들. 그 물건들이 갑자기 전부 마지막이 되어버리는 순간, 세계는 순식간에 견딜 수 없는 밀도로 변한다.
그 가운데 얇은 공책 한 권이 있었다.
표지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맨 앞장 몇 장은 찢겨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펼쳤다. 첫 장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날짜도 불분명했고, 낙서처럼 짧은 문장 몇 개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중간쯤 넘겼을 때, 글씨가 갑자기 달라졌다. 눌러 쓴 글씨. 삐뚤고, 흔들리고, 종이를 찢을 만큼 힘이 들어간 획.
나는 요즘 자꾸 물속에 있는 것 같다.
아무도 내가 젖어 있는 걸 모른다.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도 이제 창피하다.
말하면 내가 더 이상한 사람이 된다.
내가 없어지면 다 편해질 것 같다.
어머니는 거기서 숨을 들이마시는 법을 잊었다.
누군가 가슴 한가운데에 차가운 돌을 욱여넣는 것 같았다. 눈앞의 글자가 갑자기 너무 선명해져서 오히려 읽히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앉으려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손에 들린 공책이 무릎 위로 미끄러졌다. “아무도 내가 젖어 있는 걸 모른다.” 그 문장이 주방과 거실과 복도와 욕실 타일 위를 다니며 집 안의 모든 표면에 들러붙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며칠 전, 아니 몇 달 전, 윤서가 비를 맞고 돌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젖은 머리카락, 축축한 교복 소매, “우산을 안 가져가서”라고 말하던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 그때 왜 더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좀 챙겨 다녀” 같은 생활의 문장으로 그 순간을 덮어버렸을까. 왜 엄마는 항상 저녁 반찬과 세탁기와 다음 날 출근 준비에 먼저 붙들려 있었을까. 왜 아이가 조용해질수록 그것을 성장이나 사춘기로 오해했을까.
왜.
그 한 음절이 방 안에서 썩어 가는 과일처럼 진한 냄새를 풍겼다.
어머니는 그날 밤 처음으로 윤서가 남긴 종이들을 하나하나 펼쳐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단순한 낙서였고, 어떤 것은 숙제 메모였고, 어떤 것은 찢어버린 줄 알았는지 구겨 넣은 쪽지였다. 그중에는 누군가가 휘갈겨 쓴 짧은 욕설도 있었다. 꺼져. 찐따. 말 좀 하지 마. 그런 말들. 아이들이 장난처럼 썼을 것이고, 쓰는 순간에는 별 무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이에 남은 말은 이상하게 오래 산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폭력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척하면서, 사실은 종이와 기억과 몸 어딘가에 조금씩 붙어 남는다.
어머니는 구겨진 쪽지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아주 작았고, 하찮았고, 누구라도 “애들 장난”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유치했다. 그런데 바로 그 유치함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토록 작고 하찮은 것들이 한 아이를 끝내 밀어냈다는 사실. 거대한 악의도 아니고, 대단한 음모도 아니고, 겨우 이 수준의 말들, 이 수준의 웃음들, 이 수준의 방관들이 아이를 죽음까지 데려갔다는 사실. 인간의 존엄이 이렇게 하찮은 것들 앞에서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은 슬픔보다 모욕에 가까웠다.
학교는 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감, 상담사, 담임, 학년부장, 몇몇 교사들이 회의를 했고, 학부모들에게는 공지가 돌았다. 외부 상담기관 연계, 학생 정서 지원, 학교폭력 여부 확인, 생활지도 강화. 문서에는 해야 할 조치들이 빼곡했다. 종이는 늘 성실했다. 종이는 언제나 제 역할을 다하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문서가 아무리 성실해도, 이미 죽은 아이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더 끔찍한 것은, 그 문서들의 많은 문장이 윤서가 살아 있을 때 단 한 번만 제대로 사용되었어도 조금은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담임은 조사 과정에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정도로 힘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은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하다고 해서 덜 잔인한 것은 아니다. 모른다는 말은 때로 죄가 된다. 특히 볼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 보지 않은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는 윤서가 점심시간마다 혼자 앉는 것을 몇 번 보았고, 체육복에 낙서가 있었던 일도 기억했고, 교무실 앞에서 아이가 어색하게 서 있던 날도 떠올렸다. 윤서는 분명 입을 열었다. 아주 크게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그런데 담임은 그 작은 신호를, 일상 업무의 먼지 사이에 흘려보냈다. 생활지도, 수행평가, 학부모 전화, 행정서류, 수업 준비. 교사의 하루는 늘 바빴고, 그래서 작은 균열은 쉽게 “나중에 보자” 쪽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나중이 없다.
그는 그 사실을 윤서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알게 되었다.
수업 중 무심코 출석부를 넘기다가도, 손가락이 그 이름 위에서 잠깐 멈췄다. 점심시간 복도를 지나다가 창가에 혼자 서 있던 아이의 옆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다가갔어야 했다. 그때 좀 더 구체적으로 물었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니”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했니, 언제부터였니, 지금 제일 견디기 힘든 건 뭐니”라고. 아이는 보통 첫 질문에서 전부를 말하지 못한다. 어른이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을 제대로 건네야 겨우 자기 안쪽을 꺼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빨리 판단했고, 너무 쉽게 “예민한 면” 같은 말로 상황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평평한 말은 편리하다. 갈등을 관리하기 쉬우니까. 그러나 평평한 말은 자주 사람을 벼랑에서 밀어버린다.
담임은 어느 날 상담실 의자에 앉아 윤서의 노트를 복사한 종이를 읽다가 울었다. 크게 운 것도 아니었다. 얼굴을 감싸 쥐고, 아주 낮게 흐느꼈다.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도 이제 창피하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는 자신이 교육받아 온 모든 직업윤리보다 더 원초적인 실패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는 분명 살려달라고 했는데, 어른들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무능과 방관은 때때로 아주 비슷한 얼굴을 한다.
아이들은 더 느리게 무너졌다.
처음 며칠은 다들 놀란 얼굴을 했다. 몇몇은 울었고, 몇몇은 상담실에 불려 갔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이들 안에서도 균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정말 우리가 그렇게까지 했나. 우린 그냥 좀 놀린 것뿐인데. 원래 걔도 이상했잖아. 저마다 자기 마음이 덜 찢어지는 쪽으로 이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을 가해자로 인정하는 일은 성인에게도 어렵다. 하물며 아직 자기 중심의 세계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진실보다 자기 보호를 택한다.
그중 지민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지민은 윤서를 가장 노골적으로 괴롭힌 아이는 아니었다. 그는 늘 한 걸음 옆에 있었다. 직접 때리지는 않았고, 대신 웃었다. 누군가 윤서를 흉보면 제일 빨리 낄낄거렸고, 점심시간 자리를 비울 때는 자기 가방을 옆자리에 두어 은근히 막았고, 단체 채팅방에서 윤서를 겨냥한 말을 보고도 이모티콘을 눌렀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있는 가벼운 잔인함. 그 가벼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윤서가 죽고 나서야 배웠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뒤 지민은 손을 오래 씻었다. 비누 거품을 몇 번이나 내고, 뜨거운 물에 손등이 붉어질 때까지 문질렀다. 그런데도 손이 깨끗해지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는 밤마다 휴대전화를 뒤져 예전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윤서를 직접 욕한 말은 별로 없었다. 대신 웃는 표시가 있었다. 침묵이 있었다. 누군가의 조롱이 더 커지도록 옆에서 부풀려준 미세한 반응들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 될 줄 몰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조차 자기 변명이라는 걸 알았다. 몰랐다는 말은 너무 편했다. 사실 그는 알았다. 적어도 윤서가 괴로워한다는 건 알았다. 눈빛으로, 몸을 움츠리는 방식으로, 말할 때 목소리가 더 작아지는 속도로. 다만 그 고통을 자기 즐거움보다 덜 중요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지민은 처음으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게 되었다.
밤이 되면 윤서의 표정이 떠올랐다. 웃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던 입가, 체육시간에 줄에 발이 걸렸을 때 잠깐 얼어붙던 얼굴, 교무실 앞에서 담임을 기다리며 벽을 보고 서 있던 옆모습. 그는 그 장면들을 그때는 왜 그냥 지나쳤을까. 왜 사람은 자기 눈앞의 고통을 사소한 풍경처럼 소비할 수 있을까. 왜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는 한 사람을 투명하게 만들어놓고도 아무 일 없이 종을 치고 급식을 먹고 시험을 볼 수 있을까.
지민은 어느 상담 시간에 결국 말했다. “제가… 막 심하게 그런 건 아닌데요.”
상담사는 잠깐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비난도 아니고 위로도 아니었다. 단지 너무 늦게 사실 앞에 서게 된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심하게라는 기준이 뭘까.”
그 한마디에 지민은 입을 다물었다.
심하게.
직접 밀치지 않으면 아닌가. 욕을 크게 하지 않으면 아닌가. 웃기만 하면 아닌가. 모른 척하면 아닌가. 장난이었다고 말하면 가벼워지는가. 아이는 죽었는데, 남은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 몫의 단어를 줄이느라 바빴다. 언어가 먼저 도망쳤다. 폭력을 장난이라 부르고, 방관을 중립이라 부르고, 침묵을 무지라 부르는 동안, 죽은 아이의 자리는 차갑게 비어 있었다.
윤서의 아버지는 가장 늦게 무너진 사람이었다.
그는 장례 절차를 치르는 동안 비정상적으로 침착했다. 연락을 돌리고, 문서를 정리하고, 조문객에게 인사하고, 상복 매무새를 고쳤다. 바쁜 손은 슬픔을 잠시 미루게 해준다. 움직여야 할 일이 많을수록 사람은 자기 심장을 뒤로 밀 수 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한 것이 아니라, 아직 닿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가 처음 무너진 것은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며칠 뒤, 거실 소파 아래에서 윤서의 실내화를 발견했을 때였다. 왜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씻어 말리려다 잠깐 밀어넣었거나, 누군가 치우다 그리되었을 것이다. 회색 고무 밑창, 뒤꿈치 쪽이 조금 닳은 작은 실내화. 그는 그것을 손에 들고 한참 서 있었다. 실내화는 너무 가벼웠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이런 걸 신고 다니던 아이가, 이 집 안에서 살아 있었고, 어느 날 학교로 갔다가, 그렇게까지 외로웠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충분히 말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는 것이 갑자기 현실의 질감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제야 주저앉아 울었다. 어깨를 접듯이, 사람이 아니라 무너진 가구처럼. “왜 말 안 했어”라고 중얼거리다가, 곧바로 그것이 잘못된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아마 말했을 것이다. 여러 번. 다만 어른들이 생활의 소음 속에서 그것을 말로 듣지 못했을 뿐.
그는 그날 이후 학교에 여러 차례 갔다. 교장실, 상담실, 교무실. 그는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스템인가, 특정 아이들인가, 담임인가, 자기 자신인가. 분노는 방향을 찾지 못하면 안쪽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그는 더 지쳐 보였다. 학교 측은 사과했고, 재발 방지를 말했고, 조사 중이라고 했다. 그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사후의 언어였다. 늦은 언어. 아이를 살려내지 못하는 언어.
어느 날 그는 담임과 마주 앉아 한참 침묵하다가 물었다. “우리 애가… 그렇게 이상했습니까.”
담임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그럼 왜 아무도…”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끝까지 말해버리면, 세상이 너무 분명하게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아무도. 왜 친구도. 왜 선생도. 왜 부모도. 왜 그렇게 늦었나. 왜 아이가 죽고 나서야 다들 문장을 길게 만들기 시작했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윤서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다른 방향으로 굳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윤서는 조용한 아이였다.
누군가에게 윤서는 예민한 아이였다.
누군가에게 윤서는 친구 관계가 서툰 아이였다.
누군가에게 윤서는 도움이 필요했던 아이였다.
누군가에게 윤서는 이미 고통의 신호를 보내고 있던 아이였다.
문제는 이 모든 말이 조금씩 사실이면서도, 동시에 결정적인 사실을 비켜간다는 점이었다. 윤서는 단지 조용한 아이가 아니었다. 예민한 아이도 아니었다. 친구 관계가 서툰 아이라는 설명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는 지속적으로 밀려난 아이였다. 교실에서 자리를 잃고, 말할 타이밍을 잃고, 웃을 권리를 잃고, 도움을 청했을 때도 신뢰를 잃은 아이였다. 세상이 한 사람을 파괴하는 방식은 흔히 직접적이지 않다. 조금씩 산소를 빼앗는다. 누구도 폭력을 행사했다고 생각하지 않게끔, 너무 일상적인 손놀림으로. 그래서 나중에 다들 묻는다. 그렇게까지 될 줄 몰랐다고. 그 말은 틀린 동시에 비겁하다. 왜냐하면 그렇게까지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은 결국 모두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윤서의 죽음 이후 학교 복도는 한동안 이상하게 조용했다. 아이들은 웃을 때도 주변을 살폈고, 교사들은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더 자주 돌았다. 상담실 예약은 늘어났고, 가정통신문에는 정서위기 신호에 대한 안내 문구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윤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조용함은 너무 늦게 도착한 예절에 가까웠다. 생전에 받지 못한 배려가 사후에 과잉으로 쏟아졌다. 사람은 종종 죽은 사람에게만 친절하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귀찮고 복잡하던 문제가, 죽고 나면 모두의 도덕성을 확인하는 장치가 된다. 그 위선의 매끈함이 윤서의 부모를 더 깊이 베었다.
어머니는 어느 저녁, 윤서의 방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서늘한 공기와 함께 멀리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놀이터 쪽이었다. 그 웃음은 아무 잘못이 없었지만, 그는 한동안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떤 집에서는 아이가 아직 놀이터에서 뛰고 있고, 어떤 집에서는 숙제를 미루고 있고, 어떤 집에서는 엄마에게 배고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이 집에서는 한 아이의 시간이 아예 멈춰버렸다는 사실. 세상은 이렇게 불균형하게 계속된다는 사실. 그 불균형은 슬픔보다 분노에 가까웠다. 그는 창문을 닫지 못한 채 울었다. 바람이 방 안의 종이를 조금 흔들었다. 책상 위에 놓인 공책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꼭 아직도 누군가 작은 숨을 쉬는 것처럼.
윤서가 왜 죽었는지를 추적한다는 것은, 결국 윤서의 마지막 순간을 추적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었다. 아이가 처음 점심시간 자리를 잃던 날. 체육복에 낙서가 생기던 날. 교무실 앞에서 주저하며 입을 열던 날. 집에 돌아와 “그냥”이라는 한마디로 저녁을 넘기던 날. 비를 맞고 들어와도 아무도 더 묻지 않던 날. 단체 채팅방에서 자기 이름 옆에 웃는 표시가 연달아 찍히던 밤. 책상 서랍에 구겨진 쪽지를 한 장씩 숨겨 넣던 오후.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보며 왜 이렇게 생겼을까, 왜 이렇게 말할까,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고 스스로를 갉아먹던 시간들. 죽음은 마지막 날에만 있지 않았다. 이미 그 전부터 아이는 여러 번 안쪽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아이는 마지막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오래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문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편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그 죽음은 어느 한순간의 불행한 충동이 아니라, 너무 많은 사람이 조금씩 지분을 나눠 가진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 몇 명의 악의, 더 많은 아이들의 침묵, 담임의 오판, 학교의 둔감함, 부모의 늦은 눈치, 사회 전체가 “왕따”를 아직도 성장기의 통과의례쯤으로 축소해 말하는 습관. 그 모든 것이 고르게 섞여 한 아이의 폐를 천천히 물로 채웠다.
윤서의 어머니는 나중에 누군가에게 말했다. “우리 애는 혼자 죽은 게 아니에요.”
그 말은 복수의 선언도, 과장의 문장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 늦게 도달한 정확함이었다. 사람 하나를 벼랑 끝까지 밀어놓는 데는 늘 여러 손이 필요하다. 직접 떠민 손만이 아니라, 뒤에서 웃던 손, 본체만체하던 손, 바빠서 지나친 손, 곧 괜찮아질 거라 믿으며 등을 돌린 손. 그 많은 손들이 나중에는 모두 자기 손을 내려다보게 된다. 피는 묻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깨끗하지 않은 손.
계절이 조금 더 흘렀다.
윤서의 자리는 결국 다른 아이가 쓰게 되었다. 학교는 계속되어야 했고, 시간표는 움직여야 했고, 교실은 다시 꽉 차야 했다. 삶은 종종 잔인할 만큼 실용적이다. 빈자리를 영원히 비워둘 수는 없다는 이유는 맞다. 그러나 맞는 이유가 사람을 덜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새로 그 자리에 앉은 아이는 처음 며칠간 몹시 불편한 얼굴을 했다. 책상을 쓰다듬듯 조심히 앉았고, 서랍을 열 때마다 안을 확인했다. 마치 남의 슬픔 위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틀린 감각이 아니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슬픔 위에서 살아간다. 다만 평소에는 그것을 모를 뿐이다.
담임은 출석을 부를 때 더 천천히 이름을 읽게 되었다.
지민은 웃음이 나오려 할 때마다 한 번 더 입술을 깨물게 되었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실내화장을 열어두었다 닫는 버릇이 생겼다.
어머니는 비 오는 날이면 여전히 창가에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 윤서는, 이제 어떤 현재형으로도 말할 수 없는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죽은 뒤에야 그 아이의 감정은 더 선명해졌다. 살아 있을 때는 “조용한 애” 한마디로 묻혔던 표정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하나하나 복원되었다. 점심시간 식판을 들고 서 있던 어색한 손. 웃음소리가 터질 때마다 아주 잠깐 굳어지던 눈동자. 무표정인 척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매시간 숨을 조이고 있었을 얼굴. 사람은 늘 너무 늦게 타인의 표정을 읽는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바쁘고, 죽고 나면 한가해진다. 그 늦음이 남은 사람들을 평생 따라다닌다.
어떤 죽음은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질문으로 남는다.
왜 못 봤나.
왜 가볍게 여겼나.
왜 그렇게 늦었나.
왜 아이가 죽고 나서야 모두가 정확한 문장을 배우나.
윤서의 이야기는 결국 한 아이의 연약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교실이 어떻게 한 사람을 천천히 공기 밖으로 밀어냈는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밀어냄은 거칠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모서리가 드러난 폭력은 누구나 경계한다. 그러나 일상의 표정을 한 폭력은 쉽게 통과한다. 웃음처럼, 장난처럼, 지도처럼, 훈육처럼, 피곤한 조언처럼. 아이는 그 틈 사이에서 점점 숨을 잃었다. 아무도 직접 목을 조르지 않았지만, 모두가 산소를 조금씩 덜어냈다.
그래서 윤서가 남긴 공책의 문장은 오래 남는다.
아무도 내가 젖어 있는 걸 모른다.
그 문장은 한 아이의 절망인 동시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고발이다. 너희는 보았으나 보지 않았고, 들었으나 듣지 않았고, 내가 젖는 동안 그것을 성장통이나 예민함이나 장난쯤으로 불렀다고. 그 고발은 조용해서 더 무섭다. 큰 소리로 비난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실을 말한다. 나는 젖고 있었고, 너희는 몰랐다. 아니, 모르기로 했다.
교실은 오늘도 환할 것이다.
형광등은 켜지고, 분필가루는 날리고, 아이들은 웃고, 급식 냄새는 복도 끝까지 번질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또 다른 빈자리가 아직 생기지 않은 채, 서서히 준비되고 있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이미 젖고 있는데, 주변은 그것을 그저 조용함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누군가는 이미 숨이 가쁜데, 어른들은 그것을 예민함이나 사춘기나 성적 스트레스로 잘못 번역할지 모른다.
누군가는 이미 살려달라고,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교실의 소음은 늘 그보다 크다.
윤서의 죽음은 끝났지만, 윤서가 남긴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그 질문은 남은 사람들 안에서 썩지 않고 계속 자란다.
그리고 아마 그래야만 한다.
어떤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 편이 낫다.
사라지지 않아야 다음 아이 앞에서 누군가 한 걸음 먼저 다가갈 수 있으니까.
사라지지 않아야 “애들끼리 그럴 수 있지” 같은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수 있으니까.
사라지지 않아야, 누군가의 조용함을 더 이상 성격으로만 읽지 않게 되니까.
아이 하나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어른들이 배워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세상은 자꾸 그렇게 배운다.
너무 늦게, 너무 비싸게, 너무 잔인하게.
윤서의 방에는 아직도 오후의 빛이 들어온다.
먼지가 뜨고, 책상은 그대로 있고, 공책은 닫혀 있다.
방 안은 조용하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묻지 못한 질문과, 듣지 못한 구조 신호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과, 영영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지층처럼.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게로.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그 무게 위를 조심조심 걸어간다.
어떤 날은 버티고, 어떤 날은 무너지고, 어떤 날은 또 다시 왜를 묻는다.
왜 그 아이였나가 아니라, 왜 우리는 그 아이를 끝내 놓쳤나를.
그 질문만은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그 질문만은 쉽게 매장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교실은 또다시 너무 환해질 것이고,
어떤 아이는 또 너무 조용히 젖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