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나기 전에
운동장의 흙은 햇빛을 오래 기억했다.
아침 조회가 끝난 뒤에도 야구장 쪽 흙은 이미 바싹 마른 빛을 띠고 있었고, 스파이크가 스치면 고운 먼지가 얇게 들렸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막 그어놓은 흰 선은 한낮도 오기 전에 눈이 시릴 만큼 환했고, 백네트의 철망은 멀리서 보면 그저 검은 금속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비와 바람을 오래 견딘 푸른 기척이 군데군데 서려 있었다. 공은 아직 던져지지 않았는데도 운동장에는 이미 경기의 냄새가 났다. 마른 흙냄새, 그 위에 얹힌 풀냄새, 쇠배트가 배트통에 부딪힐 때 나는 얇은 금속음, 멀리서 브라스밴드가 응원가를 맞춰보는 소리까지.
가나가와 현 외곽의 그 공립고등학교에서 여름은 늘 그렇게 야구장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교무실 앞 게시판에 예선표가 붙고, 점심시간마다 누가 1번 타자인지 누가 마운드에 오를지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교실마다 넘쳐흐르고, 브라스밴드가 같은 응원가를 몇 번이고 반복하기 시작하면 계절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학교 뒤로는 강이 흐르고, 강 건너편에는 낮은 아파트 단지와 자전거포, 오래된 문방구와 편의점이 있었고, 철교 위를 지나가는 전철이 하루에도 몇 번씩 쇳소리를 끌고 교실 창문까지 건너왔다.
김유현은 그 여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를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온 것은 6월이 막 깊어지려던 무렵이었다. 아버지의 발령 때문이었다. 전학 첫날, 그는 자신이 이미 완성된 풍경에 한 박자 늦게 들어온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교실의 웃음에는 이미 순서가 있었고, 친구들끼리 부르는 별명에는 오래된 시간이 배어 있었다. 누군가는 친절하게 말을 걸었고, 누군가는 점심시간에 같이 먹자고 했다. 그 친절은 분명 고마웠다. 다만 그럴수록 자신이 여기에 원래부터 있던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도 더 또렷해졌다.
그는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오래 생각하고, 그래서 말이 늦는 쪽에 가까웠다. 하고 싶은 말이 아예 없는 사람이 아니라, 말이 자기 안에서 모양을 다 갖출 때까지 쉽게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야구를 할 때만 예외였다.
유현은 타자였다.
키가 특별히 큰 것도, 체격이 눈에 띄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타석에만 들어서면 몸 전체가 다른 모양이 되었다. 왼손으로 배트 손잡이 끝을 한 번 눌러보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그립이 제대로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투수 쪽을 보는 순간부터 눈빛이 아주 조용하게 날카로워졌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타자는 아니었다. 공을 오래 보는 타자였다. 투수 손을 떠난 공이 자기 앞을 어떻게 지나갈지 몸이 먼저 알아채는 쪽. 그래서 그의 스윙은 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잘 맞았다. 공이 배트에 닿을 때 나는 소리도 남달랐다. 무언가를 세게 때려 부수는 둔탁한 소리가 아니라, 가장 얇은 지점을 정확하게 건드렸을 때 나는 맑은 소리였다.
다만 너무 오래 보는 탓에, 아주 드물게는 칠 수 있는 공도 흘려보내곤 했다.
감독은 그것을 신중함이라고 불렀고, 3학년 주장 구보타는 가끔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유현 자신도 그 버릇을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덜 생각하면 닿을 수 있는데, 꼭 마지막 반 박자까지 보느라 타이밍이 늦어질 때가 있었다.
그를 처음 오래 본 사람은 미즈노 사에였다.
사에는 야구부 매니저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신문부였고, 비공식적으로는 야구부의 거의 모든 타석을 기억하는 아이였다. 점수만 적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카운트에서 숨을 멈추는지, 투수가 위기 때 모자를 벗고 이마를 닦는지, 타자가 타석에 들어가기 전 어느 손으로 헬멧을 만지는지까지 함께 보는 아이였다. 그녀의 서랍에는 오래된 스코어북과 고교야구 기사 스크랩이 여러 장 겹쳐 있었고, 여름만 되면 그 종이들에서 먼지와 햇빛 냄새가 함께 났다.
아버지가 고교야구를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사에의 여름에는 경기 중계가 배경음처럼 깔려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보리차 잔 가장자리의 물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해설, 텔레비전 화면 속 흰 유니폼과 붉은 흙. 그래서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야구는 숫자만으로는 다 기록되지 않는 경기라는 것을. 경기의 절반은 점수판에 남고, 나머지 절반은 사람 얼굴에 남는다는 것을.
사에는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에는 예쁘다기보다 먼저 살아 있다는 말이 어울렸다. 검은 머리는 늘 단정하게 묶고 다녔지만 습한 날이면 귀 옆 잔머리가 몇 가닥씩 풀려나와 뺨 가까이를 맴돌았고, 웃을 때는 입보다 눈이 먼저 환하게 열렸다. 감정은 대체로 숨기지 못했다. 기분이 좋으면 말이 빨라졌고, 화가 나면 목소리보다 눈빛이 먼저 뜨거워졌다. 손을 많이 써서 말하는 버릇이 있어 멀리서 봐도 그녀가 지금 무슨 기분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유현을 처음 제대로 눈에 담은 건 연습경기 날이었다.
백네트 뒤의 그늘, 햇빛이 철망에 걸려 운동장 위로 사선 무늬를 만들고 있던 오후. 사에는 기록지를 들고 서 있다가 이 전학생이 타석에 들어서는 걸 봤다. 검게 그을린 목, 눈에 띄게 큰 체격은 아니지만 단정하게 잡힌 어깨, 그리고 투수 쪽을 보는 지나치게 차분한 눈.
초구는 바깥쪽 높은 공이었다.
그는 치지 않았다.
다음 공이 비슷한 궤도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때 배트가 짧게 돌아갔다. 타구는 요란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잘 뻗었다. 좌중간, 야수 둘이 서로 눈치만 보다 놓칠 자리로 낮고 빠르게 날아갔다.
사에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야, 저거.”
옆에 있던 매니저가 돌아봤다.
“왜?”
“스윙은 작은데 공이 이상하게 살아 나가.”
“전학생이래. 한국에서 왔다던데.”
사에는 다시 타석 쪽을 봤다.
그는 타격을 마친 뒤 벤치로 돌아오며 헬멧 위를 두 손가락으로 톡, 한 번 건드렸다. 아주 작고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사에는 이유를 모르면서도 그 장면이 오래 남았다.
며칠 뒤, 그녀는 복도에서 그를 붙잡았다.
수업이 끝난 뒤 복도는 늦은 오후의 빛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커튼 밑단이 천천히 부풀었다가 가라앉았고, 운동장에서는 러닝하는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유현은 사물함 앞에서 배팅장갑을 꺼내고 있었다.
“김유현 군.”
그가 돌아봤다.
유현이 가까이서 본 사에는 생각보다 더 생기 있었다. 이마 가까이에 짧은 잔머리가 몇 가닥 붙어 있었고, 교복 리본은 다른 아이들보다 아주 조금 느슨했다. 그녀는 노트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네.”
“나는 미즈노 사에. 신문부.”
“알아요.”
사에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벌써?”
“자주 보여서요.”
“그건 내가 눈에 띈다는 뜻이야?”
유현은 잠깐 그녀를 보았다가 아주 조금 시선을 내렸다.
“조금요.”
사에는 웃을 뻔하다가 참았다.
“그 ‘조금’이 제일 이상해.”
“왜요.”
“더 궁금하게 만들어서.”
유현은 손에 쥔 배팅장갑을 한 번 접었다 폈다. 그리고 사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에는 모르는 척을 잘 못 하는 것 같아요.”
“뭘.”
“궁금한 거.”
사에는 노트를 펼쳤다.
그 안에는 이미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좋아. 그럼 바로 물어볼게.”
“네.”
“너, 타격할 때 뭘 보는 거야?”
“공이요.”
“그건 누구나 그래.”
“그럼 손.”
“투수 손?”
“네.”
“그 다음은?”
유현은 잠시 운동장 쪽을 보았다. 멀리서 누군가 스윙하는 소리가 날아와 복도 끝에서 한 번 흩어졌다.
“타석에 있으면,” 그가 천천히 말했다. “조용해져요.”
사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었다.
“사람들 소리도 멀어지고. 공 말고는 다 조금 느려져요.”
“그리고?”
“그때 보이는 게 있어요.”
사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아주 낮게,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상해.”
“자주 듣는 말이에요.”
“싫은 뜻은 아니야.”
그녀는 노트를 덮었다.
“그럼 나도 볼래.”
“뭘요.”
“네가 보는 거.”
유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웃었다. 한쪽 입꼬리부터 먼저 올라가는 웃음. 사에는 그 웃음을 보고 순간 목 안쪽이 조금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날 이후 둘은 서로를 자주 찾게 되었다.
점심시간이면 사에는 종종 우유 팩 하나를 그의 책상에 올려두었다.
“유현 군, 오늘 아침 세 번째 공, 일부러 흘렸지?”
“네.”
“왜?”
“치면 파울 될 것 같아서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요.”
사에는 곧바로 얼굴을 구겼다.
“난 그 말 싫어.”
“왜요.”
“그냥 포기하는 것 같아서.”
유현은 빨대를 꽂으며 말했다.
“설명 안 되는 것도 있잖아요.”
“그래도 해보려는 척은 해야지.”
“예를 들면요?”
사에는 우유 팩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말했다.
“음. 좋아하는 거라면?”
그 말이 나온 뒤 둘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교실 뒤편에서 누군가 웃었고, 창밖에서는 매미 울음이 갑자기 더 커졌다.
유현이 먼저 말했다.
“사에는요.”
“응?”
“좋아하는 거 생기면 바로 다가가죠?”
사에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봤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보이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운동장 흙빛이 햇빛에 바래 거의 흰색처럼 보였다.
“유현 군, 너는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 하더라.”
유현이 물었다.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사에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아직은. 아직은 아닌 것 같아.”
나중에는 잘못된 말이 될지도 모른다고, 사에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말 뒤로도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가다듬었다.
야구 연습이 끝난 뒤 강변을 함께 걷는 일이 잦아졌다.
여름 저녁의 강은 시간마다 다른 색을 냈다. 해가 아직 높을 때는 물비늘이 은빛으로 부서졌고, 저녁이 내려앉을 무렵이면 검푸른 물 위로 철교를 지나는 전철 불빛이 길게 흔들렸다. 난간에 손을 얹으면 금속이 아직 낮의 열을 조금 품고 있었고, 바람이 불면 갈대 잎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눕다가 다시 일어났다.
“유현 군은 왜 그렇게 조용해?”
어느 날 사에가 물었다.
유현은 난간 아래 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에는 왜 그렇게 급해요?”
“난 급하지 않아!”
“급해요.”
사에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봤다.
“뭐가?”
“좋아하는 거 생기면 금방 가까이 가잖아요.”
바람이 불어와 사에의 치맛단이 무릎 뒤로 붙었다가 떨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강 쪽을 보았다.
“너,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왜요.”
“그냥 그래.”
유현은 웃지 않았다.
사에는 그게 더 곤란했다. 웃으며 넘기면 될 말을 이 애는 꼭 진지하게 받아서 더 오래 남게 만들었다.
그 사건은 소나기가 쏟아진 오후에 일어났다.
연습경기가 끝나고 장비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짙은 갈색으로 젖었고, 흙냄새가 비 냄새와 섞여 훨씬 진해졌다. 사에는 기록지를 가슴에 안고 창고 쪽으로 뛰다가 발이 미끄러졌다. 그 순간 손목이 잡혔다.
유현이었다.
둘은 함께 처마 밑으로 밀려들어왔다. 바로 앞에서 굵은 빗줄기가 떨어졌고, 그 너머 운동장은 회색 막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흐려졌다. 사에는 숨을 고르며 젖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려다 말았다. 유현이 아직도 손목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현 군, 이제 괜찮아.”
사에가 말했다.
“네.”
“근데 왜 계속 잡고 있어?”
유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빗소리 사이로 멀리서 누군가 공 바구니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사에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젖은 셔츠 깃 아래 목선이 진해져 있었고, 눈은 평소보다 더 어둡고 깊어 보였다.
“너 원래 이렇게 못된 애야?”
“내가요?”
“응. 꼭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사람 이상하게 만들고.”
유현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사에는 그 미세한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어떤 얼굴.”
“이상한 얼굴.”
유현은 한 번 숨을 삼켰다.
“사에.”
그가 이름을 부르자 사에는 잠깐 숨을 멈췄다.
“왜.”
“지금은… 아무 말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사에는 웃지 않고 말했다.
“그 말이 더 나빠.”
그리고 둘이 동시에 조금 움직였을 때 입술이 닿았다.
짧았다.
짧아서 더 분명했다. 비 오는 운동장보다, 젖은 흙보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던 물줄기보다 더 선명하게. 빗소리가 더 커진 느낌. 쏴아아.
먼저 뒤로 물러난 것은 사에였다.
“너는 진짜 나빠!”
화가 난 건지, 떨리는 건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유현이 낮게 물었다.
“싫어요?”
“그걸 지금 물어보는 거야?”
사에는 젖은 소매를 움켜쥐고 그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너랑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왜요.”
“내가 더 이상해질 것 같아서.”
비가 조금 가늘어졌을 때 사에는 먼저 처마 밖으로 뛰어나갔다.
유현은 그대로 남아 젖은 운동장을 보았다. 모든 선이 비 때문에 흐려졌는데도 방금 전 입술에 닿았던 열만큼은 더 또렷해졌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전처럼 굴지 못했다.
사에는 여전히 그를 찾았지만 더 사소한 일에 예민해졌다.
“유현, 아까 왜 2반 여자애랑 그렇게 오래 얘기했어?”
“글러브 끈 묶는 법 물어봐서요.”
“그걸 왜 네가 알려줘.”
“알고 있으니까.”
사에는 입술을 삐죽였다가 몇 초 뒤 다시 물었다.
“근데 진짜 어떻게 묶는 건데.”
유현이 작게 웃었다.
“궁금하면 보여줄게요.”
사에는 일부러 무심한 척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유현도 달라졌다. 그는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사에 앞에서는 더 조심스러워졌다. 타석에서는 오히려 더 또렷해졌고, 사에는 그게 싫으면서도 좋았다. 자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 같다가도 결국 타석에서는 누구보다 정확해지는 그 얼굴이 질투 날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그리고 결승전이 왔다.
하늘은 지나치게 맑았다. 운동장 위로 떠 있는 빛이 너무 강해서 삼루 쪽 응원석의 금관 악기가 흰 불꽃처럼 번쩍였고, 흙은 바싹 말라 한 발 디딜 때마다 얇은 먼지가 떠올랐다. 브라스밴드의 북소리는 햇빛에 데워진 철제 스탠드를 타고 발바닥까지 전해졌다.
사에는 관중석 앞줄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스코어북 대신 작은 노트 하나만 무릎에 올려두고 있었다. 손에 땀이 차서 종이 모서리가 조금 말리고 있었다.
워밍업을 마친 유현이 철망 쪽으로 걸어왔을 때 사에는 먼저 일어나 섰다.
“유현 군.”
그가 멈췄다.
사에는 그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늘 칠 수 있을 거야!”
유현은 웃지 않고 물었다.
“근거는요?”
“없어!”
“그럼?”
사에는 노트를 가슴에 조금 더 끌어안았다.
“그냥 알아!”
유현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설명하기 어려운 말, 사에가 제일 싫어하잖아요.”
“오늘만 예외야.”
잠시 침묵이 있었다. 멀리서 감독이 선수들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사에는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네.”
“오늘 끝나고 강변에서 봐.”
그 말에 유현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에는 그걸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뭔가가 더 있다는 걸.
“유현 군?”
유현은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조금 시선을 피한 채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일 때문에… 한국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요.”
사에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눈가가 자꾸 아렸다.
“...언제?”
“아직 확정은 아닌데… 빠르면 이 여름이 끝나기 전에요.”
사에는 노트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손바닥에 종이 자국이 남을 만큼.
“그걸… 왜 이제 말해.”
“확실하지 않았으니까요.”
“넌 늘 그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일 중요한 건 끝까지 말을 안 해.”
유현은 뭔가 말하려 했지만 감독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왔다.
사에는 한 걸음 물러났다.
“가.”
“사에.”
“가서 이겨.”
사에가 통로를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유현은 그 모습을 보며 손을 뻗다가 힘없이 내렸다.
경기는 팽팽했다.
유현은 첫 타석에서 안타를 만들었고, 두 번째 타석에서는 깊은 외야 타구로 주자를 보냈다. 좋은 타자였다. 분명히. 그러나 사에는 알고 있었다. 그는 오늘 아주 조금 늦었다. 남들은 모를 만큼 미세한 반 박자. 사랑에 겁을 먹은 사람만이 내는 지연이었다.
마지막 이닝, 한 점 차로 뒤지고 있었다. 주자 둘이 나가 있었고 관중석의 북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유현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배트를 들어 올리고 투수를 보았다. 헬멧 안쪽으로 고인 땀이 관자놀이를 따라 흘렀다. 스파이크 밑창이 마른 흙을 얇게 갈았다. 삼루 쪽에서 한 번 바람이 불어 응원 깃발이 뒤집혔다. 그 모든 것이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소리는 멀어졌다.
초구 스트라이크.
2구째 볼.
3구째 파울.
그리고 4구째.
공이 손을 떠났다.
유현이 그것을 봤다.
이번에는 오래 보지 않았다.
끝나는 것이 무서워서 망설이던 마음을 그 순간 처음으로 넘어섰다. 이 공을 치면 여름이 끝날지도 몰랐다. 이 학교도, 이 나라에서의 시간도, 사에와 함께 걷던 강변도 다른 색이 될지 몰랐다. 하지만 치지 않는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놓친 것은 더 오래 남는다.
배트가 돌아갔다.
소리는 분명했다.
마른나무와 압축된 공이 완전히 맞닿는 짧고 단단한 소리.
타구는 높이 떴다.
햇빛 속으로 곧게 올라가더니 외야를 넘어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순간 운동장의 모든 소리가 비워졌다가, 그 다음 순간 한꺼번에 터졌다.
사에는 공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대신 타석을 빠져나오는 유현의 얼굴을 봤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경기는 끝났다.
학교는 결승전을 이겼고, 여름은 조금 더 앞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날 사에에게 오래 남은 것은 점수보다 타구음과 유현의 얼굴이었다.
경기 뒤 운동장 뒤편의 좁은 통로에서 둘은 다시 마주 섰다.
관중들은 아직 소란스러웠고 브라스밴드는 장비를 정리하며 웃고 있었지만, 통로 안쪽은 이상하게 고요했다. 저녁빛이 철망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와 둘의 어깨를 붉게 물들였다.
사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유현은 아직 숨이 조금 찬 얼굴로 그녀를 봤다.
“뭐가.”
사에는 웃으려다 웃지 못했다.
“미워할 수가 없잖아.”
잠깐 침묵이 흐른 뒤, 유현이 낮게 말했다.
“미워했어요?”
사에는 고개를 기울였다.
“많이.”
“지금은요.”
“더 곤란해졌어.”
유현이 작게 웃었다. 사에는 그걸 보고 괜히 더 마음이 아팠다.
“너는 진짜 나빠. 정말… 정말 싫어.”
유현은 벽에 기대 선 채 대답했다.
“그래도 마음이 풀렸으면 됐어요.”
사에는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 안에서 아직 경기장의 북소리가 멈추지 않은 것 같았다.
“나 지금 심장이 이상해.”
“왜요.”
“유현이 친 공은 벌써 담장 밖에 떨어졌는데, 내 심장은 아직까지 두근거려.”
유현은 한참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나도요.”
사에는 고개를 들었다.
“뭐가.”
“두근거려요.”
경기 뒤의 흥분처럼 들리기도 했고, 전혀 다른 의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에는 그 둘 사이를 굳이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도망 안 가?”
유현은 거의 바로 대답했다.
“안 갈게.”
“정말?”
“사에 앞에서는.”
사에는 눈을 깜빡였다.
“그 말, 반칙인데.”
“알아요.”
“알면서 그렇게 말해?”
“네.”
사에는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금세 웃음이 흐려졌다. 그리고
“좋아해, 유현”
유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알아요.”
“거기서 끝이야?”
“아니요.”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나도 좋아해요.”
그 말은 소리 없이 그녀 안에 오래 머물렀다.
사에는 그가 왜 늘 이렇게 늦는지, 왜 늦게 와서도 결국 가장 정확한 자리에 닿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정말 늦어. 습관처럼.”
그녀가 중얼거렸다.
“알아요.”
“많이.”
“지금은 안 늦은 것 같은데요.”
사에는 잠깐 그를 보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입을 맞췄다.
햇빛과 흙먼지와 땀 냄새가 아직 남아 있는 저녁이었다. 유현의 입술은 생각보다 차분했고, 사에의 숨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키스는 길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는 기색만큼은 분명했다.
입술이 떨어진 뒤에도 둘은 바로 멀어지지 못했다.
사에가 아주 가까운 데서 속삭였다.
“홈런보다 이게 더 위험해.”
유현이 웃었다.
“왜요.”
“이건 진짜 오래 남을 것 같으니까.”
유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간직해요.”
유현은 결국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여름은 그렇게 지나치게 선명한 한순간을 남긴 채 끝났다.
연락은 처음엔 자주 오갔다. 사에는 지역대회 취재를 다녀온 사진을 보내왔고, 유현은 한국 대학 리그 구장 사진을 보내주었다. 메일은 문자로, 문자는 가끔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러다 각자의 시간이 조금씩 커졌다. 사에는 대학에서 문예와 스포츠기사를 함께 공부했고, 유현은 대학 진학과 군대와 취업 준비를 지나왔다. 연락은 예전처럼 자주 오가지 않았지만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 다만 둘 다 그 사이에 놓인 시간을 함부로 줄이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떤 것들은 남았다.
유현은 서랍 안에 그 야구공을 넣어두었다.
배트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공. 손안에 쥐면 강변의 바람과 사에의 목소리가 함께 떠오르는 물건이었다.
그 공은 원래 사에 아버지의 것이었다.
유현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사에는 강변에서 그 공을 꺼내 건넸다. 여름의 빛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강물 위에 전철 불빛만 가늘게 흔들리던 저녁이었다.
“이거, 원래 아버지 거야.”
사에가 말했다.
유현은 손을 내밀다 말고 그녀를 봤다.
“받아도 돼?”
사에는 강 쪽을 보며 대답했다.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어. 이건 진짜 중요한 사람한테 주는 물건이라고.”
그녀는 잠깐 웃다가, 곧 웃음을 거두고 그를 봤다.
“나 원래 더 나중에 주려고 했어.”
“왜.”
“네가 끝끝내 나를 밀어내는지 오래 지켜보다가, 이 마음을 더 늦게 내밀면 영영 닿지 못하겠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 주려고 했어.”
유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에는 손 안의 공을 한 번 굴렸다.
“그런데 지금 주는 이유는…”
그녀는 한 번 숨을 삼키고 낮게 말했다.
“너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때 유현은 그 공을 받았다.
너무 가볍고 너무 무거운 물건처럼.
그 뒤로 유현은 여름이 오면 꼭 한 번은 그 결승전 영상을 다시 봤다.
타구가 담장을 넘는 장면보다, 타격 직후 잠깐 멈춰 서 있던 자기 얼굴을 더 오래 보았다. 그 얼굴이 처음으로 무엇 하나를 끝까지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걸, 그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아보았다.
스물일곱의 봄, 유현은 회사의 일본 파견 프로젝트 후보로 뽑혔다.
처음엔 6개월짜리 단기 파견이었고, 도쿄 쪽 업체와 협업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메일을 받은 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한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서랍을 열어 야구공을 꺼내 손에 올려두었다. 가죽은 예전보다 더 누렇게 바래 있었지만 여전히 단단했다.
핸드폰을 몇 번 만지작거리던 끝에 그는 사에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다음 달부터 일본 가요.
답장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진짜? 어디?
도쿄. 아마 반년쯤.
한참 뒤 다시 답장이 도착했다.
나 보러 오는 거야?
유현은 문자를 보고 웃었다.
당연하지.
사에는 이모티콘 하나 없이 다시 보냈다.
도쿄로 갈게.
도쿄의 초여름은 고등학교 시절의 가나가와와는 또 다른 색을 갖고 있었다. 도시는 더 컸고, 전철은 더 빽빽했고, 밤은 더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그래도 비가 오기 직전의 공기 냄새나, 야구장 잔디 가장자리의 어두운 초록, 전광판 불빛이 젖은 바닥에 번지는 모양은 어딘가 비슷했다.
재회는 의외로 준비된 약속에서 시작되었다.
신궁구장 앞.
주말 저녁, 구장 바깥의 은행나무 잎은 짙게 푸르렀고 사람들은 유니폼과 응원 타월을 들고 웃으며 지나갔다. 사에는 흰 셔츠에 남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처럼 교복은 아니었지만, 머리를 한쪽으로 느슨하게 묶은 모습과 웃기 직전 눈꼬리가 아주 조금 흔들리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유현은 먼저 그녀를 알아봤다. 그리고 걸음을 잠깐 늦췄다. 오래 기억해 온 얼굴을 실제로 다시 볼 때 사람은 이상하게 바로 다가가지 못한다. 화면 속에서, 문장 속에서, 기억 속에서 수없이 떠올렸던 얼굴이 현실의 바람과 소음 속에 실제로 서 있다는 사실이 너무 선명해서.
사에가 먼저 손을 들었다.
“유현 군.”
그 부름 하나에 시간 사이의 공기가 한 번에 걷히는 것 같았다.
유현은 가까이 가며 웃었다.
“사에.”
사에는 그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여전히 그대로네. 이 남자.”
“거짓말.”
“응. 거짓말 조금.”
유현이 웃었다.
“그럼 뭐가 그대로인데.”
사에는 대답 대신 그의 눈을 잠깐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내가 좋아하던 너.”
그 말은 너무 가볍게,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와서 오히려 더 깊었다.
유현은 그 순간 이 도시가 조금 덜 낯설어졌다고 느꼈다.
경기 내내 둘은 예전처럼 야구를 이야기했다. 투수 리드가 어쨌느니, 오늘 3번 타자는 변화구 대처가 늦다느니, 외야수 첫걸음이 조금 무거웠다느니. 그러다가도 이닝 사이엔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사에는 스포츠 전문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고교야구와 아마추어야구를 취재했고, 때로는 선수보다 경기장 바깥 사람들 이야기를 더 오래 쓰기도 한다고 했다. 유현은 한국에서 일을 하다가 이번 프로젝트로 도쿄에 오게 됐고, 여전히 주말마다 사회인야구를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기다리지 않고 잘 치나 몰라?”
사에가 물었다.
“예전보단.”
“망설이지 않고?”
유현은 잠깐 웃었다.
“망설여도 쳐.”
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건.”
경기가 끝난 뒤 둘은 구장 밖으로 함께 걸어 나왔다.
비가 올 듯 말 듯한 밤이었다. 아스팔트는 낮의 열을 조금 남기고 있었고, 바람에는 잎 냄새와 아주 엷은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근처 찻집에 들어가 마주 앉자, 둘은 처음 몇 분 동안 말보다 웃음이 먼저 나왔다. 오래전 좋아했던 사람을 다시 마주했을 때의 웃음은 반가움과 당황이 반쯤 섞여 있어, 자꾸만 먼저 새어 나왔다.
사에가 먼저 물었다.
“내가 준 공, 아직 가지고 있어?”
“응.”
“버릴 줄 알았는데.”
“못 버렸어.”
“왜.”
유현은 찻잔 가장자리를 만지다가 말했다.
“버리면 너랑 진짜 끝나는 것 같아서.”
사에는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유현 군은 아직도 그런 데가 있네.”
“어떤 데.”
“끝난 걸 끝났다고 잘 못하는 데.”
유현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이번에는 고등학생 때처럼 늦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이번엔 다르게 하려고.”
사에는 손을 멈췄다.
“뭘.”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
그녀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유현은 천천히, 그러나 도망치지 않고 말했다.
“그때도 사랑했어. 그 뒤로도 계속.”
사에는 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 말,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유현이 웃었다.
“알아.”
사에도 웃었다.
눈가가 조금 젖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정말 늦네.”
“응.”
“그래도.”
사에는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이번엔 듣고 싶었어.”
그날 밤 둘은 오래 걸었다.
신궁구장 근처에서부터 전철역까지, 역에서 다시 강변 산책로 같은 곳으로,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사 들고 또 조금. 걸으며 둘은 그동안 놓쳐버린 시간을 조금씩 메웠다. 군대 얘기, 취업의 피로, 마감 전날 사무실 냄새, 출장 호텔의 건조한 공기, 가족들의 안부, 대학 시절 한 번쯤은 서로에게 연락할까 말까 망설였던 밤들까지.
사에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를 봤다.
“유현 군.”
“응.”
“이번에도 갑자기 그렇게 사라지면 싫어할 거야.”
유현은 더는 웃지 않았다.
“안 그럴게.”
“이번엔 진짜?”
“응.”
사에는 잠시 그를 올려다봤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길게 번져 있었다.
“장거리 연애, 해본 적 있어?”
“없어.”
“나도.”
“해볼래요?”
사에는 그 말에 웃었다.
웃음 뒤에 아주 작은 떨림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바로 묻는 거야?”
“이번엔 늦지 않으려고요.”
사에는 대답 대신 한 발 가까이 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짧았지만 망설임이 없었다. 떨어진 뒤에도 그녀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다만 눈빛만 조금 흔들렸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해보자.”
그 뒤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고, 예상보다 더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유현은 도쿄에 머무는 동안 주말마다 사에를 만났다. 둘은 야구장을 갔고, 고교야구 예선 취재를 따라가기도 했고, 비 오는 날엔 책방에 들어가 오래 서 있기도 했다. 사에는 일 때문에 지방을 다녀오면 반드시 작은 기념품을 하나씩 사 왔다. 지역 이름이 적힌 엽서, 고시엔 기념 볼펜, 오래된 경기장을 그린 포스트카드 같은 것들. 유현은 한국 출장으로 잠깐 돌아갈 때마다 사에가 좋아할 만한 걸 들고 왔다. 서울 구장 응원 수건, 야구장 앞 떡볶이 소스, 한글로 적힌 스코어북.
둘은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좋아한다는 말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나이도 아니었다. 대신 현실적인 것들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나이였다. 파견이 끝나면 어떻게 할지, 한국과 일본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있는지, 누가 어느 시점에 움직일 수 있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사랑을 덜 낭만적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둘은 좋아하는 마음을 계절 속에만 두지 않고 생활 속으로 데려오고 있었다.
파견 5개월째 되던 어느 날, 유현은 회사에서 정식 제안을 받았다.
도쿄 지사 전환 배치 가능. 최소 2년.
그는 그 메일을 보고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가장 먼저 사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괜찮아요?”
사에의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
“응. 왜.”
“오늘 저녁에 볼래요?”
“무슨 일 있어?”
유현은 아주 조금 웃었다.
“좋은 쪽으로.”
사에는 한 박자쯤 멈췄다가 말했다.
“그럼 더 빨리 나갈게.”
그날 둘은 강변이 보이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았다.
도쿄의 강은 가나가와의 강보다 더 넓었고, 강 건너의 불빛도 훨씬 많았다. 그래도 밤바람이 물 냄새를 싣고 오는 방식은 비슷했다. 여름이 막 시작되는 공기였고, 물 위에는 도시의 불빛이 잘게 흔들렸다.
유현이 먼저 말했다.
“도쿄에 더 있을 수 있어요.”
사에는 처음엔 바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얼마나?”
“2년.”
그제야 그녀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진짜?”
“응.”
사에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다 웃음이 먼저 나왔다.
“와.”
그 짧은 탄성이 너무 사에다워서 유현도 웃었다.
“그게 다야?”
“아니, 나 지금… 너무 갑자기 기뻐서 말이 안 나와.”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정말?”
“응.”
“너 결정했어?”
유현은 바로 대답했다.
“응.”
“이유 안 물어봐도 돼?”
“물어봐도 돼.”
사에는 천천히 물었다.
“왜.”
유현은 잠깐 강물 쪽을 보았다가 다시 그녀를 봤다.
“이번엔 네가 있는 쪽으로 가고 싶어서.”
사에는 그 말을 듣고 오래 말이 없었다.
눈가가 조금 젖는 걸 스스로도 숨기지 않았다.
“그 말,”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다.”
유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천천히 작은 상자를 꺼냈다.
손바닥에 겨우 올라오는,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상자였다.
사에는 눈을 깜빡였다.
“설마.”
유현은 작게 말했다.
“야구공은 아니에요.”
사에는 웃다가 더는 웃지 못했다.
“그건 가보로 간직해야지. 이 남자야.”
“응.”
“그럼 뭐야?”
유현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내가 놓치면 안 되는 거니까.”
사에는 숨을 삼켰다.
유현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얇은 은빛 반지가 놓여 있었다. 불빛을 세게 튕기지 않고, 손 안에서 조용히 빛나는 반지였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정말 안 놓치려고.”
사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이 먼저 젖었다.
“유현 군…”
“그 공은 내가 계속 가지고 있을 거야.”
그는 아주 낮게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잊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붙잡은 거니까.”
사에는 입술을 다물었다.
울음과 웃음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얼굴이었다.
유현이 계속 말했다.
“이제부터는 같이 살고 싶어서 주는 거야.”
그 말은 예상보다 조용했는데, 그래서 더 깊게 닿았다. 사에는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눌렀다가 웃으면서 울었다.
“진짜 늦어.”
“알아.”
“많이.”
“응.”
잠깐의 침묵.
사에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그녀가 말했다.
“지금이면 돼.”
유현은 조심스럽게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사에는 그 떨림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반지가 제 자리에 닿자마자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도망 안 갈 거지.”
“안 갈게.”
“정말?”
“이번엔 같이 가니까.”
사에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럼…”
아주 조용히 웃었다.
“다음 계절도 같이 가.”
유현이 대답했다.
“좋아.”
그날 밤 둘은 같은 전철을 탔다.
각자 다른 집 방향으로 갈아타야 했지만, 일부러 몇 정거장 더 같이 갔다. 전철 창밖으로 강이 스쳐 지나갔고, 물 위에 길게 늘어진 불빛들이 흔들렸다. 사에는 유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지는 않았지만, 팔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유현 역시 손을 놓지 않았다.
몇 달 뒤, 사에는 작은 원룸에서 이사를 준비했다.
짐은 많지 않았지만 책과 노트와 스코어북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유현은 주말마다 와서 박스를 접고 테이프를 붙이고, 창가에 놓인 식물을 먼저 옮겼다. 새집은 유현의 회사와 사에의 편집부 중간쯤에 있었다. 넓지는 않았지만 창문이 컸고, 저녁이면 주황빛이 바닥에 길게 들어왔다. 베란다 끝에 서면 멀리 전철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날씨가 맑은 날엔 하늘이 조금 더 오래 붉었다.
짐을 다 옮긴 날 저녁, 둘은 바닥에 나란히 앉아 편의점 주먹밥을 먹었다.
아직 커튼도 달지 않았고, 박스는 절반밖에 안 풀려 있었다. 그런데도 사에는 그 방이 이상하게 꽉 차 있다고 느꼈다. 가구보다 먼저, 둘 사이에 쌓인 약속들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사에는 주먹밥 포장을 접으며 유현을 봤다.
“신기하다.”
“뭐가.”
“네가 여기 있는 거.”
유현은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
“나도.”
“가끔은 아직도 고등학생 때 꿈꾸는 것 같아.”
“어떤 꿈.”
“담장 넘는 공 보는 꿈.”
유현이 웃었다.
“그럼 깨지 마.”
사에는 그를 한참 보다가 말했다.
“유현 군.”
“응.”
“그때 네가 홈런 안 쳤으면 어땠을까?”
유현은 잠시 창밖을 보았다. 저녁빛이 유리창에 남아 있었다.
“모르겠어.”
“나는 알아.”
“뭔데.”
사에는 아주 천천히 웃었다.
“그래도 널 좋아했을 거야.”
유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보았다.
사에는 주먹밥 포장지를 무릎 위에 내려두고 덧붙였다.
“근데 지금처럼 이렇게까지 행복하진 않았을 것 같아.”
유현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나도 그래.”
사에는 살짝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러니까.”
“응.”
“잘 돌아왔어.”
유현은 그 말을 듣고 아주 오래 웃었다. 크게 웃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날의 웃음은 오래 남았다. 사에는 그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 처음 복도에서 이 아이를 붙잡았을 때부터 어쩌면 자기는 이런 얼굴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고.
바깥에서는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시는 여전히 바빴고, 계절은 계속 흘러갈 것이고, 둘의 생활에도 분명 피곤한 날과 엇갈리는 날과 사소한 다툼이 생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별개로 분명한 것도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끝난 뒤의 시간까지 함께 간다는 것.
여름이 끝나도, 그다음 계절도, 그다음 계절도.
사에는 몸을 조금 기울여 유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유현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창밖의 저녁빛이 천천히 식고 있었고, 새집 바닥 위로 길게 누운 주황빛이 아주 느리게 사라졌다.
사에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있잖아.”
“응.”
“이제는 안 무서워.”
유현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뭐가.”
사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끝나는 거.”
유현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
“나도.”
그리고 그 말은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었다.
한때 유현은 너무 오래 보다 놓치는 사람이었다.
칠 수 있는 공도 끝까지 보려다가 흘려보내고, 하고 싶은 말도 너무 오래 품었다가 늦게 건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떤 여름은 사람을 끝내 바꾸기도 한다.
그 여름, 담장 너머로 사라졌던 공은 아주 오래 돌아서 결국 두 사람의 현실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