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랑

멈춘 시간을 움직이는 법

by 윤담

비가 올 듯 말 듯한 저녁이었다.
서울의 하늘은 하루 종일 잿빛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끝내 비를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그 대신 공기만 조금 무거워졌다. 습기는 도시의 어깨 위에 얇고 축축한 천처럼 내려앉아 있었고, 사람들의 걸음은 평소보다 느려 보였다. 이런 날의 서울은 묘하게 솔직해진다. 맑은 날에는 모든 것이 제 빛을 너무 쉽게 믿는다. 유리창은 필요 이상으로 반짝이고, 간판은 자기 이름을 필요 이상으로 내민다. 그러나 비가 오지 못하고 골목 위에서 머뭇거리는 날에는 건물의 피로가 드러난다. 오래된 벽의 금과 금 사이에 눌어붙은 먼지, 배수구를 타고 올라오는 눅눅한 냄새, 닫힌 창문 안쪽에서 막 밥 짓는 냄새 같은 것들이 천천히 도시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정우는 그런 날씨를 좋아했다.
이유를 길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맑은 날의 도시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한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밝은 빛 아래서는 걸음도 가벼워야 할 것 같고, 표정도 괜찮아 보여야 할 것 같고, 오늘 하루쯤은 잘 버텨냈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흐린 날에는 조금 덜 애써도 되었다. 피곤한 표정을 하고 있어도 되고, 마음속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걸어도 되는 날이 있었다.
종로 안쪽 골목에 있는 그의 시계수리점도 그런 날이면 조금 더 조용해졌다.
간판에는 별다른 멋도 없이 정우시계수리라고 적혀 있었다. 글씨 가장자리의 페인트는 오래전에 벗겨지기 시작했고, 유리문 아래에는 “시계수리 합니다”라고 적힌 종이가 누렇게 바랜 채 붙어 있었다. 가게 안에는 늘 여러 개의 시간이 함께 떠다녔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 오래된 손목시계가 아주 미세하게 떨며 앞으로 가는 소리, 자동시계 내부의 태엽이 힘을 모으는 소리. 그 소리들은 서로 싸우지 않았다. 각자의 속도로 흘러갈 뿐이었다.
정우는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확대경 너머로 작은 톱니를 들여다보며 핀셋을 움직였다. 금속은 차가웠고, 핀셋 끝은 가볍게 떨렸다. 그는 그런 떨림을 오래 다뤄온 사람이었다. 눈앞의 작은 어긋남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어디를 먼저 건드려야 할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시계를 고치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했고,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어떤 시계는 먼지만 털어도 다시 움직였고, 어떤 시계는 뚜껑을 여는 순간 이미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많은 시계들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었다. 완전히 망가지진 않았지만, 제 힘으로는 더 가지 못하는 것들.
그는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세상에는 고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시계는 대개 고쳐졌다. 어디가 문제인지 손끝으로 찾을 수 있었고, 원인을 찾으면 대체로 방법이 있었다. 태엽이 늘어졌거나, 톱니가 닳았거나, 먼지가 들어갔거나, 누군가의 손목에서 너무 오래 열과 땀을 먹었거나. 이유는 대개 분명했다. 그 점이 좋았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어디가 닳았는지, 무엇이 먼지인지,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느려졌는지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장님.”
문이 열리며 단골 하나가 들어왔다.
예순은 조금 넘었을 남자였다. 셔츠 소매 끝이 닳아 있었고, 안경알에는 얇은 흠집이 몇 개 나 있었다. 그는 말하기 전에 늘 주머니를 한 번 뒤지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도 그랬다. 한참 뒤에야 손목시계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돌아가게만 해주세요.”
정우는 시계를 집어 들었다.
유리에는 얇은 금이 하나 있었고, 가죽 시곗줄에서는 오래된 서랍 냄새 같은 것이 났다.
“시간은 틀려도 괜찮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냥 돌아가기만 하면 돼요.”
정우는 시계를 뒤집어 보았다.
“누구 시계입니까.”
남자는 잠깐 웃었다. 웃음은 짧았지만 얼굴 전체가 조금 낡아 보이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아버지요.”
그 말 뒤로 가게 안 공기가 약간 가라앉았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걸립니다.”
“괜찮아요.”
남자가 나간 뒤에도 정우는 한동안 그 시계를 열지 않았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어떤 시계들은 바로 열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을 오래 타고, 마음을 오래 먹은 물건은 뚜껑을 여는 데도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그런 것들은 대개 부품보다 망설임부터 풀어야 하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박 사장에게 전화가 온 건 셔터를 내리기 직전이었다.
“정우 씨, 오늘 시간 돼요?”
“왜요.”
“사람 하나 소개할게. 술 한잔 합시다.”
“오늘은 좀…”
“금방 끝나요. 그리고 한빛자동차정비 김 사장도 와. 차 있는 사람이 정비소 하나 알아두면 나쁠 거 없잖아.”
박 사장의 금방은 늘 길었다. 그래도 정우는 거절하지 못했다. 거래처와의 관계는 멈춘 시계보다 훨씬 복잡하게 다뤄야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게다가 임대료가 오른다는 문자를 그날 오후에 받은 참이었다. 그는 작업등을 끄고 셔터를 내렸다. 셔터가 바닥에 닿는 둔탁한 쇳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술집은 부품상과 세탁소 사이에 끼어 있었다.
문을 열자 따뜻한 기름 냄새와 식은 소주 냄새가 동시에 얼굴을 덮쳤다. 안쪽은 이미 시끄러웠다.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 지나치게 큰 웃음, 김치전이 식어가는 냄새, 바닥에 굴러간 병뚜껑 소리. 술집이라는 장소는 늘 약간 과장되어 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하루를 씻어낼 수 있다는 얼굴로 술을 마시지만, 대개는 더 번지게 만들 뿐이다.
“여기.”
박 사장이 손을 흔들었다.
그의 얼굴은 벌써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옆자리에는 처음 보는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고, 작업복 점퍼 하나가 의자에 걸쳐 있었다. 그는 냅킨으로 손등을 닦고 있었는데 냅킨에 검은 얼룩이 묻었다.
“정우 씨, 이쪽은 한빛자동차정비 김 사장.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있는 데.”
정우는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김 사장은 웃을 때 한쪽 눈이 조금 더 접히는 사람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오래 밴 기름때가 옅게 남아 있었다.
“시계 고친다면서요?”
“네.”
“그럼 우리도 비슷하네. 멈춘 거 다시 움직이게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정우는 소주잔을 들었다.
술은 미지근했고, 잔 바깥에 맺힌 물이 손가락에 닿았다.
“요즘도 시계 맡기는 사람 많아요?” 김 사장이 물었다.
“생각보다 있습니다.”
“고장 나서 맡기는 것보다 못 버려서 맡기는 게 더 많겠네.”
그 말이 조금 마음에 남았다. 실제로 그랬다. 시계가 아니라 시간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죽은 아버지가 차던 시계, 군대 가기 전에 산 시계, 떠난 사람이 선물한 시계. 그런 물건들은 고장보다 이유가 더 중요했다.
소주를 두 잔쯤 마시고 나자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담배 좀 피우고 오겠습니다.”
“뒤편 나가면 덜 시끄러워요.” 박 사장이 말했다.
술집 뒤편 골목은 앞쪽과 완전히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벽 하나를 돌아 들어오자 소음이 한 겹 얇아졌다. 남은 것은 실외기 돌아가는 낮은 진동, 위층 창문이 닫히는 소리, 멀리서 버스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 나는 금속성 마찰음뿐이었다. 골목 바닥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축축한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통 옆 검은 비닐봉지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고, 담배꽁초 몇 개가 배수구 옆에 눅눅하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 벽에 등을 기대고 여자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작업복의 짙은 남색이 보였고, 그다음엔 담배 끝이 붉게 타는 불빛이 보였다. 얇은 셔츠를 걸친 위로 작업복이 드러났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머리는 대충 묶여 있었는데 몇 가닥이 풀려 목덜미에 붙어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 몸에서 하루를 조금 떼어내기 위해 잠깐 멈춰 있는 사람 같았다.
정우는 담배를 꺼냈다가 라이터가 없다는 걸 알았다.
“불… 있으세요?”
여자는 정우를 한 번 봤다.
지나치게 놀라지도, 경계하지도 않는 눈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라이터를 내밀었다.
불꽃이 짧게 튀었다.
정우가 몸을 조금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안, 그녀의 셔츠 깃 사이로 희미한 냄새가 났다. 담배 냄새와 기름 냄새 사이에, 막 씻고 나온 사람 피부에서만 나는 미지근한 비누 향 같은 것이 아주 옅게 섞여 있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도 잠깐 고개를 바로 들지 못했다. 겨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여자는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둘 사이에는 한동안 연기만 오갔다.
정우는 그녀의 손을 봤다. 손등에는 얇은 상처들이 있었고, 손톱 사이에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검은 기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가락 마디는 단단했고 손목은 가늘었다. 잘생긴 얼굴보다 먼저 사람의 손을 보게 되는 버릇은, 아마 시계를 오래 만져서 생긴 것인지도 몰랐다.
“일 끝나고 오신 겁니까.”
그가 물었다.
“네.”
짧은 대답이었다.
“늦게 끝나셨네요.”
“원래 좀 늦어요.”
그녀는 담배를 한 번 빨고, 연기를 천천히 내쉬며 말했다. 더 말할 생각이 없으면 거기서 끝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 하세요?”
여자는 재를 털었다.
“정비요.”
“자동차요?”
“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시계 고칩니다.”
여자는 그제야 정우를 조금 더 자세히 봤다. 셔츠 주머니, 담배를 쥔 손, 말을 하기 전에 잠깐 멈추는 얼굴.
“시계요?”
“네.”
그녀는 아주 잠깐 웃었다.
“잘 안 어울리네요.”
“어떤 쪽이요?”
“이런 데서 담배 피우는 얼굴은 아닌데.”
정우도 웃었다.
“원래 안 피웠습니다.”
“원래 안 하던 걸 하게 되는 때가 있죠.”
그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오래 남았다.
“그쪽도 원래는 안 피웠습니까.”
여자는 연기를 내쉬었다.
“네.”
“지금은요?”
“지금은 합니다.”
말은 거기서 끝났다.
정우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물었다.
“시계 고치면 시간도 좀 고쳐져요?”
질문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목소리는 농담만은 아니었다.
정우는 대답하기 전에 담배를 한 번 내려다봤다.
“시간은 못 고칩니다.”
“그럼?”
“멈춘 걸 다시 가게는 합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차도 비슷해요.”
“멈춘 걸 다시 가게 하는 거요?”
“네.”
그녀는 재를 털며 말했다.
“근데 사람들은 차만 고쳐달라는 얼굴로 안 와요.”
“어떤 얼굴입니까.”
“자기 인생까지 같이 고쳐질 거라고 믿는 얼굴.”
정우는 웃었다.
“시계 맡기는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고쳐집니까?”
“가끔은 시계만 돌아갑니다.”
여자는 소리를 내지 않고 웃었다. 눈가가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그게 더 잔인하네요.”
그때 술집 문이 열렸다.
“서희야!”
아까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 사장의 목소리였다.
“여기 와서 인사해. 아까 말한 시계 고치는 분.”
여자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고 정우를 돌아봤다.
“서희예요.”
“정우입니다.”
“네.”
김 사장은 문을 잡은 채 웃었다.
“우리 정비소에서 일해요. 둘이 하는 일은 비슷하네. 하나는 시계, 하나는 차.”
서희는 별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김 사장은 금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소음은 다시 벽 너머로 물러났다.
그날 둘은 번호를 교환하지 않았다.
그럴 사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서희는 이름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오늘 몫의 문을 충분히 연 사람 같았고, 정우 역시 거기서 한 발 더 나가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애매한 순간이면 그는 늘 조금 늦었다.
하지만 그 밤의 공기는 오래 남았다.
담배 연기, 젖지 못한 골목, 라이터 불빛, 그리고 기름과 비누가 섞인 희미한 냄새.
며칠 뒤, 정우는 일부러 한빛자동차정비 앞을 지나갔다.
정비소 앞에서는 늘 같은 냄새가 났다. 오래 달린 엔진이 식을 때 나는 금속 냄새, 타이어 고무 냄새, 따뜻한 기름 냄새. 정우는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술집 뒤편 골목이 떠올랐다. 정비소 안에서는 렌치가 바닥에 닿는 소리와 압축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셔터 반쯤 열린 틈으로 보니 서희가 차 보닛 안쪽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머리는 대충 묶여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얇게 맺혀 있었다.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셔츠 천이 등에 붙었다 떨어졌다 했다. 그는 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한동안은 그 손의 움직임만 보고 있었다. 멈춘 것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일주일 뒤, 그의 오래된 세단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몇 번 키를 돌려보다 그는 결국 차를 한빛자동차정비 앞으로 몰았다. 셔터는 반쯤 올라가 있었고, 안쪽에서는 라디오가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래된 발라드가 기름 냄새 사이를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서희가 나왔다.
작업복 위에 얇은 티셔츠만 입은 차림이었다. 손에는 장갑을 한 짝만 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녀는 보닛을 열었다. 둔탁한 금속 소리가 났다. 손전등을 켜고 안쪽을 들여다보더니, 배선을 한 번 만져보고 스타터 쪽을 툭툭 두드렸다. 그때 아주 짧게, 정말 순간적으로만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차 시동이 한 번에 안 걸리는 상황 앞에서 그녀는 늘 그랬다. 누가 눈치채지 않으면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아주 잠깐 숨을 멈추는 얼굴.
“언제부터 이래요?”
“아침엔 괜찮았는데, 방금 갑자기요.”
“시동 걸어보세요.”
정우가 운전석에 앉아 키를 돌렸다. 엔진은 두 번 헛돌고 멈췄다.
서희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안쪽으로 팔을 깊이 넣었다. 어깨가 아주 조금 당겨졌고, 셔츠 소매 끝에 묻은 기름이 손목까지 번져 있었다. 렌치를 돌릴 때마다 팔 안쪽의 근육이 잠깐씩 드러났다 사라졌다. 정우는 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한동안은 그 손의 움직임만 보고 있었다. 정교한 힘이라는 건 대개 그런 식으로 나타난다. 과장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스타터 모터네요.”
“심각합니까.”
“아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도 바로 웃지 않았다. 먼저 정말 괜찮은지 손으로 한 번 더 확인하는 사람 같았다.
잠시 뒤, 그녀가 턱으로 운전석 쪽을 가리켰다.
“다시 걸어보세요.”
정우가 키를 돌렸다. 이번에는 엔진이 낮게 울었다. 정비소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됐네요.”
정우는 차에서 내렸다.
“감사합니다.”
서희는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시계는 잘 돌아가요?”
정우는 웃었다.
“차보다 말 잘 듣습니다.”
“그럼 됐네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정우가 말했다.
“저녁… 같이 드실래요?”
서희는 걸레를 접던 손을 멈췄다.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먼저 정우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정비소 바닥 어딘가를 보고, 열린 셔터 밖 골목을 봤다.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단했다. 거절은 분명했지만 차갑지 않았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서희가 잠깐 망설이다 덧붙였다.
“대신… 커피 정도는 다음에.”
정우는 아주 조금 놀랐지만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입가가 조금 느슨해졌다.
“좋습니다.”
그 뒤로 둘은 몇 번 더 마주쳤다. 정비소 앞에서, 편의점에서, 골목 모퉁이에서. 그리고 몇 번 커피를 마셨다. 둘 사이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았다. 이상하게도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처음 같이 커피를 마신 날, 창밖에는 저녁빛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카페 안에서는 오래된 재즈가 아주 작게 흘러나왔다. 서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컵 벽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밀었다. 정우는 뜨거운 커피를 두 번쯤 불어 식혀 마셨다.
“손 안 다쳐요?”
그가 물었다.
서희는 컵에서 시선을 들었다.
“많이요.”
“그래도 계속하네요.”
“계속하니까 덜 다쳐요.”
그녀는 웃지 않았다. 농담으로 만들 생각이 없는 말투였다.
“차 시동 한 번에 안 걸리면 표정이 굳더라고요.”
정우가 말했다.
서희는 아주 잠깐 눈을 내렸다가 들었다.
“봤어요?”
“네.”
그녀는 물방울 맺힌 컵을 한 바퀴 돌렸다.
“사고차 들어오면 아직도 그래요. 손이 먼저 차가워져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예전에 친구가 있었어요.”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통사고였어요.”
서희는 창밖을 봤다. 저녁빛이 유리창에 묻어 있었다.
“그날도 차를 고치고 있었어요. 늦게 들어온 차 하나가 있었고, 금방 끝나겠지 했는데 전화가 왔어요.”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병원에 갔을 땐 이미…”
문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지만 더 이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계속 이 일을 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어디가 고장 났는지라도 보이잖아요. 차는. 사람은 그게 안 보이니까.”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합니다.”
“뭐가요.”
정우는 잠깐 창밖을 봤다. 겨울 버스 정류장, 떠나는 뒷모습, 주머니 속에서 늦게 움직이던 손이 떠올랐다.
“붙잡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계를 고쳐요?”
정우는 아주 잠깐 웃었다.
“멈춘 걸 그냥 두면 더 이상해지니까요.”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였다.
“멈춘 건… 다시 움직여야죠.”
그 말 뒤로 둘은 조금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가까워진다는 건 늘 직선으로만 오지 않았다. 좋아할수록 더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고, 가까워질수록 더 두려워지는 것도 있었다. 사람마다 오래된 습관과 상처의 모양이 있고,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꾸만 톱니처럼 맞물리거나 어긋났다.
갈등은 생각보다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정우가 가게를 접을 수도 있다는 말을 했을 때였다.
임대료가 한 번 더 오를 거라는 얘기가 있었고, 거래도 예전 같지 않았다. 정우는 저녁을 먹다가, 아주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안 되면 접을 수도 있죠.”
서희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접어요?”
“상황 봐서요.”
“그렇게 쉽게 말해요?”
정우는 그녀를 봤다. 서희의 얼굴은 놀란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쉽게 말한 건 아닌데.”
“정우 씨는 꼭 그래요.”
“뭘요.”
“중요한 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해요.”
정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방어할 때 더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안 되는 걸 붙잡고 있는다고 다 좋은 건 아니잖아요.”
서희는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물방울이 손끝에 묻었다.
“알아요. 그런데 정우 씨는 붙잡았다가 안 되는 걸 놓는 사람이 아니라, 놓아버리고 나서 괜찮은 척하는 사람 같아요.”
그 말은 아프게 정확했다.
식당 안에는 면 삶는 김이 올랐고, 텔레비전에서는 소리를 낮춘 뉴스가 흘렀다.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웃었고, 그 웃음은 너무 멀리서 들렸다.
정우가 결국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희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자기 말의 날을 느낀 얼굴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리고 조금 뒤, 아주 작게 덧붙였다.
“근데 적어도 중요한 걸 말할 땐, 정말 중요한 것처럼 말해야죠.”
그날 둘은 평소보다 일찍 헤어졌다.
며칠 동안 연락은 뜸했다.
정우는 가게 안에 앉아 분해한 시계를 고치면서도 자꾸 서희의 말을 떠올렸다. 중요한 걸 말할 땐 정말 중요한 것처럼.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늘 먼저 놓는 쪽으로 생각해왔다는 걸. 안 될 것 같으면 되기 전에 접는 쪽으로. 민서 때도, 인쇄소가 닫힐 때도, 지금도.
어느 오후, 김 사장이 손목시계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손님이 맡긴 건데, 이거 돌아가게만 해달래.”
오래된 자동시계였다. 용두가 빠져 있었다. 정우는 케이스를 열고, 휜 축을 바로잡고, 내부 먼지를 털고, 닳은 부품을 바꾸어 끼웠다. 작은 드라이버가 아주 작은 나사를 돌릴 때마다 미세한 금속 마찰음이 났다. 한참 뒤, 멈춰 있던 초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서희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공구를 내려놓고 손을 한 번 털었다. 가게 안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이 전과 조금 달랐다. 예전엔 조용함이 물러남과 비슷했는데, 그 순간엔 말하기 전의 숨처럼 느껴졌다.
그날 저녁, 정우는 정비소로 갔다.
셔터는 반쯤 내려와 있었고, 안쪽에서 서희가 바닥에 떨어진 너트를 주워 공구함에 넣고 있었다. 정비소 안에는 하루 종일 달군 엔진들이 식으며 내는 금속 냄새가 가득했다. 그녀는 정우를 보자 잠깐 손을 멈췄다.
“무슨 일 있어요?”
정우는 문턱 바로 안쪽에 서 있었다.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는 사람처럼.
“얘기 좀 하려고요.”
“하세요.”
정우는 늘 그렇듯 바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끝내 입을 열었다.
“나는 자꾸 먼저 놓는 쪽으로 생각합니다. 안 될 것 같으면, 되기 전에 접는 쪽으로요.”
서희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인쇄소도 그랬고, 가게도 아마 그럴 겁니다.”
그는 아주 잠깐 웃었다. 자조와 체념의 중간쯤 되는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차분한 사람이 아니라,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압니다.”
정비소 안 어디선가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쇠판 위에 맺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작은 소리였다.
“가게를 접을지 말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근데 적어도 이번엔, 접게 되더라도 먼저 도망치듯 말하진 않으려고요.”
서희는 그를 오래 봤다. 얼굴은 단단했지만 눈은 전보다 부드러웠다.
“그 말을 하러 온 거예요?”
“네.”
“늦었네요.”
정우는 웃었다.
“원래 조금 늦습니다.”
그녀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래도 이번엔 용기내서 왔네요.”
가을이 오자 골목엔 바람이 늘었다. 은행잎이 배수구 쪽으로 몰리고, 저녁 냄새는 여름보다 얇고 높아졌다. 어느 날 저녁, 둘은 다시 그 술집 뒤편 골목에 서 있었다. 처음 만났던 자리였다. 이번엔 정말 비가 오고 있었다. 셔터 끝과 전선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골목 바닥에는 작은 물길이 생겨 담배꽁초를 밀고 갔다. 앞쪽 술집 안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웃고 있었지만, 벽 하나를 돌아 들어온 뒤편의 공기는 여전히 조금 조용했다.
서희가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불빛이 얼굴 아래쪽을 잠깐 밝혔다가 꺼졌다.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에 붙어 있었다.
“우리 잘 이어질 것 같아요?”
그녀가 물었다. 빗소리 때문인지, 원래 그런 목소리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정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셔츠 소매 끝이 젖어 손목에 붙어 있었다. 담배 연기는 비에 눌려 멀리 가지 못하고 둘 사이에서 천천히 흩어졌다. 그는 서희의 얼굴을 보았다. 젖은 셔츠 깃, 라이터를 쥔 손, 목 아래로 아주 천천히 내려가는 물기 같은 것들이 이상하게 또렷했다. 그는 그런 것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지만, 시선은 대개 마음보다 먼저 머무는 법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서희가 웃었다.
아주 잠깐, 입가만 움직이는 웃음이었다.
“솔직하네요.”
“대신.”
그가 말했다.
“같이 있으면, 제 오래 서 있던 자리가 조금씩 풀립니다.”
서희는 그를 오래 봤다.
이번에는 정말 오래.
“그거면 충분해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그런 게 제일 늦게 오니까.”
그 말 뒤로 둘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비 내리는 골목, 셔터 밑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 젖은 기름 냄새, 라이터 불빛, 서로의 어깨 높이, 담배를 쥔 손의 각도. 어떤 관계는 처음부터 이름을 갖지 못하고, 오래도록 공기의 모양으로 먼저 남는다. 그러나 공기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옷과 머리카락에 오래 스며드는 것이 있다.
도시는 여전히 거대했고,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복잡했다. 정우의 가게는 여전히 불안했고, 서희의 정비소에는 여전히 늦은 밤 들어오는 차가 있었고, 누군가는 계속 무언가를 놓치고 또 무언가를 고치며 살아갈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그 뒤편의 골목에서는, 오래된 시계와 오래된 엔진이 같은 속도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겹쳐 들리는 것 같았다.
완벽하게 맞물린 것은 아니었다.
아마 앞으로도 완벽하게 맞물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사랑은 수리와 다르니까.
그래도 조금은 앞으로였다.
천천히.
오래 멈춰 있던 자리가 아주 조금 풀린 쪽으로.
그리고 그날 밤에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