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죽은 것들
남편이 나간 것은 비가 오던 목요일 저녁이었다.
장마라기엔 계절이 아직 덜 익었고, 소나기라기엔 비가 너무 오래 머물렀다. 젖은 아파트 외벽이 창밖에서 번들거렸다. 부엌 형광등은 이상할 만큼 희었고, 식탁 위 미역국에서는 김이 한 차례 올랐다가 힘없이 사그라졌다. 국 표면에 얇은 기름막이 깔리는 동안, 여자는 남편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들을 듣고 있었다. 귀로는 분명히 들었는데, 마음이 그것을 제 일로 받아 적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이렇게는 더 못 살겠다는 말.
말들은 짧았다. 짧은데도 오래 걸렸다. 스물다섯 해를 건너와 겨우 세 마디가 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다는 사실이, 그날은 유난히 잔인했다. 여자는 식탁 모서리를 짚고 서 있었다. 손끝 아래로 나뭇결이 만져졌다. 딸은 방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방문 아래로 노란 불빛이 얇게 새어 나왔다. 그 빛을 보며 여자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다. 지금 저 방 안에서는 여전히 수학 문제가 있고, 지우개 가루가 있고, 연필심이 부러지고 있을 텐데. 세상은 저렇게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한 집 안에서만 이렇게 다른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걸까.
남편은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나갔다.
비에 덜 젖으려는 사람처럼 어깨를 조금 웅크리고, 현관 앞에서 슬리퍼를 밀어놓고 운동화를 신었다. 여자는 그가 운동화 끈을 묶는 손등을 보고 있었다. 스물다섯 해 동안 수도 없이 봐온 손이었다. 아이를 안던 손, 밥상을 들던 손, 운전대를 오래 잡아 마디가 두툼해진 손, 난초 잎을 닦던 손, 낚싯대 줄을 매만지던 손. 한 집의 생활을 오래 붙들고 있던 손이, 그날은 너무 익숙한 움직임으로 집 밖으로 향하는 매듭을 만들고 있었다.
문이 닫혔다.
그 뒤에도 여자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집은 그대로였는데, 먼저 속이 빠져나간 껍질 같았다. 냉장고 모터 소리가 커졌고, 벽시계 초침은 못질을 하듯 또박또박 울렸다. 사소한 소리들이 갑자기 너무 선명해지는 저녁이 있다. 무언가가 끝났다는 것을 집안의 물건들이 먼저 알아차리는 저녁.
방문이 열리고 딸이 나왔다.
“엄마.”
그 한마디에 여자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딸은 이미 알아버린 얼굴이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아이였지만, 어떤 표정은 나이보다 먼저 사람을 늙게 만든다. 아이는 식탁 쪽과 현관 쪽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엄마 얼굴을 다시 보았다.
“아빠 갔어?”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자 딸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조용히 우는 얼굴이 아니었다. 입안 가득 차오른 것을 끝내 삼키지 못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이는 의자 등받이를 붙들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될 만큼 세게. 그러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진짜로?”
“엄마 두고?”
“나 두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뒤로는 울음이 터졌다. 슬퍼서 우는 울음이라기보다 분해서 우는 울음이었다. 자존심이 먼저 다쳐버렸을 때 나는 울음. 아이는 바닥에 손을 짚고 울었다. 아빠라는 말과 왜라는 말이 뒤섞여 입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저래….”
“엄마한테 어떻게 그래.”
“우릴 두고 어떻게 저렇게 가.”
여자는 그 곁에 서 있었지만, 바로 손을 얹지는 못했다. 자기 몸 안은 이상하리만치 비어 있어서, 위로라는 것이 거기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딸이 울면서 말했다.
“아빠가 죽은 것도 아니잖아.”
“살아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없어져.”
그 말에 여자는 눈을 감았다.
사람은 죽어서만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배신하면 사라진다. 더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가 먼저 사라진다. 밥을 같이 먹고 같은 이불을 덮고 같은 날씨를 건너오던 사이가, 어느 날 문득 이름만 남기고 먼저 죽는다. 몸은 살아서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데, 함께 살던 시간의 쪽은 그 자리에서 숨이 멎는다.
딸은 한참을 울다가 부엌으로 가 미역국 냄비의 뚜껑을 덮었다. 밥솥 전원을 끄고, 식탁 위에 남편이 쓰던 컵을 들어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컵 바닥이 개수대에 닿는 소리가 짧고 차갑게 울렸다. 그 작은 소리가 이상하게 길었다. 아주 사소한 소리인데도, 그 집에서 하나의 생이 끝났다는 신호처럼 들렸다.
그날 밤 여자는 잠들지 못했다.
침대 한쪽이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에는 아직 눌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베개에서는 남편이 쓰던 샴푸 냄새와 면도기 뒤에 남는 싸한 비누 냄새가 섞여 났다. 냄새는 무서운 것이어서, 얼굴보다 먼저 사람을 데려왔다. 말투보다 먼저 습관을 데려왔고, 습관보다 먼저 생활을 데려왔다. 여자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오래 누워 있었다. 정리라는 건 어쩌면 물건을 제자리에 넣는 일이 아니라, 이미 끝난 시간에게서 냄새를 거두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그날 밤 처음 생각했다.
아침이 오자 딸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밥도 거의 먹지 않았다. 대신 거실 창문을 모조리 열었다. 밤새 눅눅해진 공기가 밀려나가고, 바깥 바람이 천천히 들어왔다. 커튼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딸은 한동안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바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차오른 것을 식히는 사람처럼.
“엄마.”
딸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 치우자.”
“뭘.”
딸은 그제야 몸을 돌려 집 안을 둘러보았다.
소파 등받이에 걸린 카디건.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운동화.
베란다 창가의 난초들.
서재 문틈 사이로 보이는 책 등.
창고방 아래로 새어 나오는 비린 냄새.
“아빠 흔적.”
그 말은 낮고 마른데도 집 안 공기를 바꾸어 놓았다.
집 안에는 아직 남편이 살고 있었다. 사람은 나갔는데 흔적은 남아 있었다. 흔적은 사람보다 느렸다. 어떤 것은 끝내 떠나지 않고 벽지처럼 눌어붙기도 했다. 여자는 딸을 바라보았다. 밤사이 아이 얼굴에서는 어린 기운이 조금 빠져나간 것 같았다. 대신 울음 뒤에 마른 분노가 남아 있었다. 엄마가 공허 속에 가라앉아 있다면, 딸은 배신당했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버려졌다는 감각. 쉽게 밀려났다는 감각.
여자는 그 얼굴을 보고 알았다. 더 오래 쓰러져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날 정리는 옷장에서 시작되었다.
안방 붙박이장 오른쪽 칸은 남편의 자리였다. 셔츠들이 계절별로 걸려 있었고, 정장 재킷에는 비닐 커버가 씌워져 있었고, 넥타이 상자와 속옷 서랍이 아래로 반듯하게 나뉘어 있었다. 여자는 문을 연 채 한참 서 있었다. 그 안의 질서가 이상하리만치 모욕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버리는 사람일수록 물건은 잘 정리해 두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목 안에 마른 가시처럼 걸렸다.
딸이 맨 앞의 흰 셔츠를 꺼냈다.
“엄마, 이거 넣어?”
여자는 셔츠를 받아 들었다. 손끝에 좋은 면의 감촉이 닿았다. 칼라 안쪽에는 이름이 적힌 작은 라벨이 박혀 있었다. 이 셔츠를 입고 가족사진을 찍던 날이 떠올랐다. 결혼기념일 저녁, 케이크를 자르며 웃던 장면도 따라왔다. 흰 셔츠는 옷이 아니라 시간을 접어둔 봉투 같았다. 펴는 순간 장면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엄마.”
딸이 다시 불렀다.
“하나씩 하자.”
하나씩.
그 말이 이상하게 사람을 붙든다. 슬픔이 너무 크면 전체를 다룰 수 없게 된다. 대신 지금 손에 잡히는 것 하나씩. 셔츠 한 벌, 단추 하나, 먼지 한 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셔츠를 쓰레기봉투가 아니라 커다란 종이상자에 넣었다. 버리는 것과 내보내는 것은 조금 달랐다. 아직은 태워 없앨 수 없지만, 곁에 둘 수는 없는 것들.
두 사람은 옷을 접었다.
와이셔츠, 체크무늬 남방, 겨울 니트, 여름 린넨 재킷. 딸은 옷걸이에서 옷을 하나씩 빼고, 여자는 그것을 접었다. 팔꿈치에 남은 미세한 눌림, 소매 끝의 닳은 자리, 단추를 다시 달았던 흔적이 손끝에 걸렸다. 그때마다 과거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손이 자꾸 멈췄다. 그러나 옷의 수가 줄어들수록 멈춤도 줄어들었다. 빈 옷걸이끼리 부딪히며 딸각딸각 마른 소리를 냈다. 비워지는 소리였다.
맨 안쪽에서는 낡은 운동복이 나왔다. 주말마다 하천을 걷겠다며 사두고 몇 번 입지 않은 상하의 세트였다. 딸이 그것을 들고 피식 웃었다.
“이건 거의 새 거네.”
비웃음은 아니었다. 허탈함이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 머물면 그 가장자리에 생기는 얇은 금 같은 웃음이었다. 여자는 딸과 함께 아주 조금 웃었다. 웃는다고 해서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슬픔의 표면에 금이 가고 그 틈으로 다른 공기가 잠깐 드는 순간이 있었다.
점심 무렵 옷장은 거의 비었다. 오른쪽 칸이 텅 비자 그 안은 이상할 만큼 차갑게 보였다. 사람 하나가 사라진 자리는 온도부터 먼저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여자는 한참 그 빈 칸을 보다가 딸의 겨울 코트를 가져와 그 자리에 걸었다. 계절이 아니어서 당장 입지도 않을 옷이었다. 그래도 무엇인가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상실은 빈칸으로 두면 자꾸 몸집을 불렸다.
딸도 자기 후드티 하나를 그 옆에 걸었다.
두 벌의 옷이 넓은 옷장 안에 어색하게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꼭 나쁘지는 않았다. 새로운 생활은 늘 처음엔 남의 집 가구처럼 어색한 얼굴을 하고 들어오는 법이니까.
오후에는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는 남편의 기척이 가장 짙게 밴 방이었다. 벽 한 면을 채운 책장, 큰 모니터, 반듯하게 꽂힌 필기구, 각 맞춘 서류 파일들. 여자는 오래전부터 이 방을 타인의 땅처럼 느껴왔다. 문은 늘 열려 있었지만, 발소리를 줄이게 되는 곳. 그런데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 질서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보자, 여자는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화가 났다. 삶은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데 왜 책등은 여전히 반듯한가. 왜 펜은 제자리에 있고, 왜 화면에는 먼지 하나 없나. 어떤 사람의 성실함과 비열함이 한 몸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그 방 안에서는 유난히 견딜 수 없었다.
딸이 책장 앞에 섰다.
“엄마, 이것도 다 치우자.”
이번에는 물음이 아니었다.
여자는 책상 서랍부터 열었다. 영수증, USB, 오래된 명함, 안경닦이, 약 봉투, 고무줄 몇 개. 그런 자잘한 것들이 먼저 나왔다. 버릴 것, 남길 것, 돌려야 할 것. 손은 차츰 빨라졌다. 그러다 명함 묶음 사이에서 낯선 여자 이름이 적힌 메모지 한 장이 나왔다. 전화번호 일부와, 짧은 문장 하나.
또 연락할게요.
딸이 먼저 그것을 봤다.
순간 아이 얼굴이 하얘졌다가 붉어졌다. 눈가가 금세 젖었다. 아까의 울음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처음의 울음이 관계가 무너지는 소리였다면, 이번 울음은 모욕을 눈으로 확인한 사람의 울음이었다.
“이런 것까지….”
딸은 메모지를 낚아채 찢으려다가 멈췄다. 손이 덜덜 떨렸다.
“엄마, 나 진짜… 너무 싫어.”
그 말 뒤에는 욕도 있었고 수치심도 있었고 사랑이 잘린 자리에 남는 피 같은 것도 있었다. 딸은 서재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여자는 곁에 쪼그려 앉았지만 섣불리 달래지 않았다. 배신당한 사람의 분노는 흘러나오게 두어야 했다. 막아두면 안에서 썩는다.
딸은 손등으로 눈물을 세게 문질렀다.
“죽었으면 내가 이렇게 안 화났어.”
“근데 이건… 살아서 우리를 버린 거잖아.”
그 말은 너무 정확해서, 여자는 잠시 숨을 멈췄다.
죽음은 사람을 데려가지만 배신은 사람을 남겨둔 채 관계만 데려간다. 그래서 더 비열하다. 장례를 치를 수도 없고, 검은 옷을 입고 문상객을 받을 수도 없다. 대신 밥을 해야 하고, 세탁기를 돌려야 하고, 아무 일 없는 얼굴로 아침을 지나야 한다. 관계의 시체를 안고 생활을 계속하는 일. 그게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었다.
여자는 메모지를 딸 손에서 조용히 가져왔다. 찢지 않았다. 구겨서 작은 봉투에 넣었다. 화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잠깐 붙들어두기 위해서.
책장은 천천히 비워졌다.
경제서, 역사책, 낚시 잡지, 식물 재배법, 자기계발서. 딸은 책 등을 읽으며 박스에 담았고, 여자는 박스 겉면에 적었다. 기증. 폐기. 보관. 처음에는 손글씨가 떨렸지만 점점 곧아졌다. 마음보다 먼저 손이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손으로 버티는 때가 있다.
오래된 책 한 권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바닷가였다. 남편이 딸을 목말 태우고 있었고, 여자는 웃고 있었다. 바람이 심해 세 사람의 머리카락이 한 방향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셋 다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서, 오히려 지금의 얼굴들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버릴까?”
딸이 물었다.
여자는 사진을 한참 보았다. 그 안에는 배신 이전의 날씨가 있었다. 그것까지 전부 거짓이라 말해버리면, 자기 인생의 한 덩어리를 통째로 쓰레기봉투에 넣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아니.”
“왜?”
여자는 사진 속 바다를 보며 말했다.
“그날 바다가 예뻤어.”
딸은 잠시 엄마를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았다. 그 말이 용서가 아니라는 것을 아이도 알았을 것이다. 지운다는 것은 전부를 부정하는 일만은 아니었다. 좋았던 날까지 남의 것이라고 내줄 필요는 없었다. 좋은 날은 그날의 빛과 바람이었고, 그건 누구에게도 끝내 완전히 빼앗기지 않는다.
해가 기울 무렵 서재는 놀라울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책장은 절반 이상 비었고, 책상 위에는 모니터만 남았다. 키보드를 들어 올리자 그 밑에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여자는 물티슈로 그것을 닦았다. 까맣게 묻어나온 먼지를 접은 휴지 안에 감췄다. 오래 숨어 있던 더러움이 마지막에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은 이상하게도 사람 마음과 닮아 있었다.
딸이 창문을 열었다. 오래 갇혀 있던 종이 냄새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빈 책장 사이로 저녁빛이 밀려들었다. 여자는 그 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 방을 자기 방으로 바꿀 수도 있겠구나. 딸의 공부방으로, 아니면 둘이 앉아 차를 마시는 조용한 방으로. 누군가 떠난 자리에는 끝만 오는 것이 아니라 용도 변경도 찾아온다. 생각은 뜻밖에도 위로와 닮아 있었다.
셋째 날에는 난초를 손댔다.
베란다에는 난초가 열두 개 있었다. 남편이 유난히 아끼던 것들이었다. 봄마다 새 촉이 올라오면 아이처럼 들떠했고, 잎에 먼지가 앉으면 마른 천으로 한 장 한 장 닦았다. 여자는 오랫동안 그 난초들을 멀리서만 보았다. 식물에게는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들이 남편의 성실한 취미를 닮아 있어서 마음이 얼얼했다. 가끔 사랑은 사람에게 가지 않고 물건과 취미에만 고루 나뉘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딸이 분무기를 들었다.
“이건 어떻게 할까.”
여자는 가장 큰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았다. 투명 화분 안에서는 뿌리들이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뒤엉켜 있었다. 잎을 만지자 서늘하고 단단한 감촉이 전해졌다. 살아 있는 것들은 늘 자기 질감이 있어 더 어렵다. 죽은 물건은 버릴 수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은 함부로 내던질 수가 없다.
“살릴 건 살리자.”
여자가 말했다.
“다 없애면 집이 너무 삭막할 것 같아.”
둘은 난초를 추렸다. 가장 큰 화분 둘은 경비실에 드리기로 했고, 꽃대가 말라버린 것들은 화원에 문의해 보기로 했다. 남길 것은 세 개뿐이었다. 여자는 그 셋을 베란다 구석이 아니라 거실 창가로 옮겼다. 남편의 식물이 아니라, 이제는 집의 식물로 두기 위해서였다. 화분 받침을 바꾸고, 마른 잎을 잘라내고, 딸은 흰 자갈을 씻어 새로 얹었다. 물을 주자 잎 끝에 맺힌 물방울이 한 번 떨리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여자는 그 물방울을 보며 생각했다. 상처 입었다고 해서 다 버리는 것은 아니구나. 살려둘 것을 골라내는 일도 살아남은 사람의 몫이구나.
낚시기구를 정리한 것은 그다음 주였다.
창고방 문을 열자 비린내에 가까운 묵은 냄새가 올라왔다. 낚싯대 케이스, 접이식 의자, 미끼통, 낚시복, 작은 공구함, 얼음박스. 남편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장비들을 정리하며 강과 바다 이야기를 하곤 했다.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았던 시간들이 그 물건들 사이에 눌어붙어 있었다.
여자는 마스크를 썼다.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래 묵은 냄새를 견디기 위해서였다.
딸이 낚싯대 케이스를 열었다. 긴 막대들과 반짝이는 릴, 줄감개와 작은 바늘통이 용도별로 나뉘어 들어 있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떠날 준비도 저렇게 오래, 저렇게 꼼꼼하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여자의 마음을 스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이 그녀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손은 오히려 더 단호해졌다. 미끼봉지는 버리고, 상태 좋은 장비는 중고로 내놓고, 나머지는 아파트 커뮤니티에 나눔 글을 올렸다.
정리는 이상했다. 처음에는 과거를 손대는 일 같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현실적인 판단의 연속이 되었다. 이건 얼마쯤 받을 수 있겠구나. 이건 누가 쓰면 좋겠구나. 이건 버려야 냄새가 빠지겠구나. 감정이 실무로 바뀌는 순간이 왔고, 그건 회복과 아주 멀리 있지 않았다. 울기만 하던 사람이 분류표를 만들고, 박스를 접고, 테이프를 붙이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단계로 가는 것. 삶은 그렇게 조금씩 자기 기능을 되찾았다.
운동화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현관 신발장 아래 칸과 베란다 수납장, 차 트렁크에까지 운동화가 흩어져 있었다. 러닝화, 골프화, 방수 운동화, 출근용 검은 스니커즈. 신발은 이상한 물건이었다. 사람의 체중과 걸음걸이를 오래 기억한다. 발등의 눌림, 안창의 모양, 뒤축의 비스듬한 마모. 옷은 접으면 납작해지고 책은 닫으면 조용해지는데, 신발은 비어 있어도 금방 누군가 걸어 나올 것 같은 모양을 유지한다.
딸이 검은 스니커즈를 들어 올렸다.
“이거, 아빠가 맨날 신던 거.”
여자는 대답 대신 상자를 가져왔다. 둘은 신발끈을 묶어 한 켤레씩 넣었다. 밑창에서 마른 흙이 떨어져 현관 바닥에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흩어졌다. 여자는 빗자루로 그것을 쓸어 담았다. 문득 그 장면이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함께 걸어온 세월이 결국 이런 가루와 먼지로 남는 걸까.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쳤다. 아니다. 남는 것은 먼지가 아니라, 먼지를 쓸 줄 아는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신발장을 다 비운 뒤, 딸은 자기 운동화 두 켤레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엄마 구두 옆자리를 조금 넓혀 두었다.
“엄마도 새 운동화 사.”
“갑자기?”
“걸어야지.”
딸은 진지했다. 걸어야지. 그 짧은 말 안에는 앞으로의 시간이 들어 있었다. 계속 살 거라는 뜻. 몸을 움직일 거라는 뜻. 집 안의 상실에만 웅크리고 있지 않겠다는 뜻.
집 안은 날이 갈수록 달라졌다.
거실에는 난초 세 개와 낮은 조명 하나만 남았다. 안방 옷장은 딸의 옷과 여자의 이불이 채웠고, 서재는 창가 쪽으로 책상을 돌려 머그잔 두 개와 노트북 하나를 올려둔 뒤 완전히 다른 방이 되었다. 창고방은 냄새가 빠졌고, 신발장은 가벼워졌다. 물건이 줄어든 만큼 집 안의 소리도 달라졌다. 발걸음이 또렷해졌고, 창문으로 드는 바람 소리가 선명해졌다. 공간이 비면 소리부터 제 목소리를 되찾는다.
물론 밤마다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칫솔꽂이에 칫솔이 둘만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띄는 순간, 식탁에 수저를 두 벌만 놓는 순간, 세탁기에서 더 이상 남자용 셔츠가 나오지 않는 날. 그럴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푹 꺼졌다. 정리한다고 해서 슬픔이 한 번에 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슬픔은 서랍 속 잔먼지처럼 닦아도 며칠 뒤 다시 앉았다. 다만 이제 여자는 안다. 다시 일어나 창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난초에 물을 주고, 빈 책장에 자기 책 한 권을 꽂고, 딸과 국을 끓여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늦은 오후, 딸이 학교에서 돌아와 서재 문턱에 섰다.
창가로 돌려놓은 책상 앞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 노트를 펴고 무언가를 적는 중이었다. 방 안에는 새 종이 냄새와 난초 잎에서 올라오는 옅은 습기가 섞여 있었다.
“엄마, 뭐 해?”
“그냥.”
여자는 웃으며 펜 끝을 들었다.
“앞으로 필요한 거 적어 보려고.”
딸이 다가와 노트를 들여다봤다.
새 운동화.
소형 책장.
주말 산책.
난초 분갈이 흙.
딸이 좋아하는 파스타 재료.
그리고 맨 아래, 조금 망설인 흔적이 남은 글씨로
혼자서도 괜찮아지는 연습.
딸은 아무 말 없이 엄마 옆에 섰다. 여자는 딸의 손등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 손은 여전히 어렸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자신보다 먼저 자란 사람의 손 같기도 했다. 스물다섯 해의 허탈함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 여자는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잃은 시간이라고만 하지 않고, 지나온 시간이라고. 실패한 결혼이라고만 하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낸 생이라고. 그 안에서 딸이 자랐고, 자기도 견디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치우고 다시 놓는 법까지 배워가고 있다고.
며칠 뒤, 그녀는 정말로 운동화를 샀다.
밝은 회색 러닝화였다. 신발장에 그것을 넣는 순간 새 고무 냄새가 조용히 올라왔다. 닳아 없어지는 냄새가 아니라, 막 시작되는 냄새였다. 딸이 그것을 보고 웃었다.
“잘 어울려.”
여자는 괜히 한 번 신어 보았다. 발이 약간 낯설게 들떴다. 현관 거울 앞에 선 자기 얼굴은 예전과 완전히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망가진 얼굴도 아니었다. 많이 버리고, 많이 닦고, 많이 견딘 사람의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둘은 거실 바닥에 앉아 귤을 까먹었다.
창문 너머로 저녁빛이 느리게 가라앉고 있었다. 난초 잎은 매끈하게 빛났고, 베란다 쪽에서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조금 흔들었다. 집은 더 이상 누군가의 부재를 증명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부재를 지나온 두 사람이 오늘을 살아내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딸이 귤껍질을 그릇에 모으며 말했다.
“엄마.”
“응.”
“우리 이제 잘 살 수 있지?”
여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딸의 그릇에서 귤껍질 하나를 집어 자기 그릇으로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잘 살아질 거야.”
그 말은 예언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운 다짐이었다. 내일도 창문을 열고, 세탁기를 돌리고, 난초에 물을 주고, 새 운동화를 신고 동네를 한 바퀴 걸을 사람의 목소리. 그렇게 조금씩 잘 살아지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사람의 목소리.
집 안에는 더 이상 남편의 옷이 없었다. 책장에도, 창고방에도, 신발장에도 그의 자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흔적은 물건보다 오래 남는 법이다. 그래도 또한 사실이었다. 흔적 위로 생활은 다시 덮여 간다. 먼지가 내려앉듯 하루가 쌓이고, 사람은 그 먼지를 또 닦으며 앞으로 간다.
밤이 조금 더 깊어졌다. 거실 전등을 끄자 창가의 난초 잎들만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을 남겼다. 여자는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살아남은 것들, 남겨두기로 한 것들, 이제부터 자라게 할 것들.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도 조용히 자기 형체를 지키고 있었다.
배신은 사람을 한순간에 없애지 못한다. 대신 관계를 먼저 지운다. 관계가 지워진 자리에는 한동안 냄새와 습관과 그림자만 남는다. 그러나 그림자도 결국은 닦인다. 하루에 한 번씩, 손걸레로 바닥을 밀듯이. 그러면 언젠가 그 자리에 다시 빛이 눕는다. 빛은 누구의 편도 아니어서, 먼저 떠난 사람 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그저 창문이 열린 집 안으로 고르게 들어와 바닥을 비춘다.
여자는 마지막으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정리된 공간은 이상할 만큼 넓었고, 넓어진 만큼 숨 쉬기 좋았다. 허탈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제 그것이 집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한때는 상실이 전부였으나, 이제는 상실이 한 칸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다른 칸들에는 딸의 웃음, 새 운동화, 난초의 물기, 저녁밥 냄새, 아직 다 쓰지 않은 노트의 여백이 들어올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백은, 끝난 사람에게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에게 열리는 것임을, 그녀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