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랑

보관함 17번

by 윤담

사람은 잃어버린 물건보다 잃어버린 이름을 더 오래 찾는다고, 서인은 가끔 생각하곤 했다.
물건은 손에 잡히는 모양이 있어서라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지만, 이름은 아니었다. 이름은 너무 오래 불리지 않으면 바람에 닳은 종이처럼 얇아졌고, 결국에는 제 주인을 잊어버린 채 세상 어딘가를 떠돌았다. 어떤 이름들은 누군가의 입 안에서만 겨우 살아남았다가, 그 사람마저 사라지는 순간 아무 흔적도 없이 꺼져 버렸다.
서인은 오래된 책을 고치는 일을 했다. 낡은 제본을 풀고, 물 먹은 종이를 말리고, 찢어진 책등을 다시 붙여 주는 일. 그녀는 그 일이 좋았다. 사람이 아닌 것들은 덜 거짓말을 했다. 오래 망가진 것일수록 오히려 어디가 상했는지 정직하게 드러냈다. 습기 먹은 종이는 물결처럼 울고, 오래 접힌 자리는 빛을 비추면 그 주름을 숨기지 못했다. 사람 마음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금이 갔는데도 멀쩡한 척했고, 이미 젖어 문드러졌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가게는 을지로 뒤편 골목에 있었다. 간판도 크지 않은 복원 공방 겸 중고서점. 오후 다섯 시쯤이면 맞은편 분식집에서 기름 냄새가 날아왔고, 비 오는 날이면 창틀 아래로 눅눅한 먼지 냄새가 번졌다. 서인은 해가 지는 시간의 골목을 좋아했다.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갔다는 안도와, 아직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는 여백이 함께 떠도는 시간. 가게 문을 반쯤 닫아 둔 채 스탠드 조명 아래 앉아 있으면 세상이 아주 천천히 식어 가는 것 같았다.
그날도 그랬다. 삼월의 마지막 주, 낮에는 봄인 척하다가 저녁만 되면 다시 겨울의 잔기침을 꺼내는 날씨였다. 서인은 축축하게 젖은 소설책 몇 권을 펼쳐 말리고 있었다. 누군가 욕조에 빠뜨린 책들이었다. 소설 속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망가지고 전쟁 때문에 떠났지만, 현실의 책은 대개 물이나 커피 때문에 상했다. 그 단순함이 조금 우스워서 서인은 혼자 웃었다.
휴대전화가 울린 건 그때였다.
낯선 번호였다.
서인은 평소처럼 한 번 울리다 끊기겠거니 했지만, 전화는 길게 이어졌다. 그녀는 비닐장갑을 벗고 전화를 받았다.
“네.”
잠시 정적이 있었다. 병원 특유의 웅웅 거리는 소음이 먼저 들렸다. 멀리서 바퀴 달린 침대가 지나가는 듯한 쇳소리,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희미한 목소리, 공조기에서 나오는 마른바람 소리.
“혹시… 김서인 씨 맞으신가요?”
“네, 맞는데요.”
“여기는 새빛요양병원입니다. 박정우 환자 보호자분 맞으실까요?”
서인은 순간 말을 잃었다.
“아니요.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상대는 당황한 듯 종이를 뒤적였다.
“그런데 환자분 비상연락처에 이 번호만 남아 있어서요. 며칠째 계속 같은 분을 찾으셔서… 혹시 아시는 분 아니신가 해서요.”
“모르는 분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끊어야 하는데, 간호사는 어쩐지 망설이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근데 환자분이 계속 ‘십칠 번 열쇠, 우리 애기한테 줘야 돼’라고 하셔서요. 혹시라도…”
17번 열쇠.
그 말이 서인의 귀에 걸렸다. 아주 작은 갈고리처럼, 설명할 수 없는 곳에.
“열쇠요?”
“네. 오래된 보관함 열쇠 같은 걸 계속 찾으세요. 김서인 씨 번호를 적어 두셨고요. 제가 괜히 실례를…”
“아닙니다.”
전화를 끊고도 서인은 한참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17번 열쇠.
그녀의 방 서랍 맨 뒤에도 오래된 열쇠 하나가 있었다. 녹이 슨,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작은 금속. 동그란 번호표에는 흐릿하게 17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유일한 ‘이전의 것’이었다. 보육원에 들어올 때 목에 실에 꿰어 걸고 있었다고, 그녀를 키운 윤희는 말해 준 적이 있다.
“처음 너를 봤을 때, 열쇠를 꼭 쥐고 울고 있었어.”
그 말은 오래전부터 서인의 몸 어딘가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열쇠가 무엇을 여는지, 누구 손에서 넘어왔는지 알지 못했다. 보육원 기록엔 그저 ‘서울역 인근 발견, 보호자 미상, 소지품: 열쇠 1점’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날 밤, 서인은 집에 돌아와 서랍을 열었다. 천 조각에 감싸 둔 열쇠를 펼쳐 보았다. 금속은 오래된 겨울처럼 차가웠다. 17이라는 숫자는 닳아 거의 지워질 듯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다. 숫자란 이상했다. 이름보다 더 오래 남고, 기억보다 더 무심하게 진실에 닿곤 했다.
다음 날 오전, 병원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서인이 먼저 물었다.
“환자분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가요?”
간호사는 안도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네, 간암 말기이신데 치매도 좀 있으셔서요. 의식이 왔다 갔다 하세요. 어젯밤에도 계속 ‘서인아, 열쇠’라고…”
서인은 창밖을 보았다. 골목을 따라 택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햇빛은 있었지만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제가 퇴근하고 가 볼게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고, 오래 붙들어 온 결핍의 한쪽이 불쑥 몸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떤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손이 먼저 손잡이를 잡는다. 인간의 외로움은 종종 이성보다 빠르다.
새빛요양병원은 도시 외곽에 있었다. 지하철 끝역에서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한참 더 들어가야 했다. 창밖으로 낮은 산등성이와 낡은 주택가가 지나갔다. 병원 건물은 회색이었다. 너무 깨끗하지도, 너무 낡지도 않은, 사람의 마지막을 견디기 위한 무표정한 색.
서인은 안내를 받아 5층 병실로 갔다. 복도에는 삶은 감자 같은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디선가 낮은 신음 소리가 났고, 창가 쪽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창밖만 보고 있었다. 생의 끝에 가까워진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몸은 여기 있고 시선만 어딘가 멀리 가 있는 자세.
박정우는 창가에서 두 번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서인은 이상하게도 사람이 이렇게까지 작아질 수 있구나 생각했다. 노인은 마른 가지처럼 가늘었다. 이불 위로 드러난 손등에는 푸른 핏줄이 실뿌리처럼 얽혀 있었고, 쇄골은 옷 안에서 작은 새 두 마리가 서로 등을 맞댄 것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얼굴은 깎인 나무처럼 메말랐지만 눈만은 이상할 만큼 살아 있었다. 그 눈은 누군가를 아주 오래 기다린 사람의 눈이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버리지 못해서 끝내 닳아 버린 눈.
간호사가 다가가 말했다.
“환자분, 오셨어요. 김서인 씨.”
노인은 잠시 아무 반응이 없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게 말했다.
“애기야.”
그 한마디에 서인의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처음 듣는 노인의 목소리였는데도, 그 부름은 낯설기보다 오래 잊고 있던 겨울 냄새처럼 마음 어딘가를 스쳤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노인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아니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나. 우리 애기는 더 작았는데.”
간호사는 익숙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어요. 누가 오면 자꾸 따님이랑 헷갈리세요.”
서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따님이 계셨어요?”
“실종이요.” 간호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주 어릴 때 잃어버리셨대요. 그 뒤로 평생 찾으셨고요.”
노인은 베개 아래를 더듬더니 낡은 봉투 뭉치를 꺼냈다. 편지들이었다. 각각 날짜가 적혀 있었고, 봉투 앞면엔 같은 이름이 반복되어 있었다.
정수연에게.
정수연.
서인은 손끝이 서늘해졌다. 그 이름은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오래된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는 느낌. 분명 내 얼굴인데 내 것 같지 않은 묘한 이질감.
“읽어 줄래?”
노인이 말했다.
“오늘은 내가… 글씨가 자꾸 흔들려서.”
서인은 망설이다가 봉투 하나를 열었다. 종이는 여러 번 접혔다 펴져 모서리가 해어져 있었다.
수연아. 아버지는 오늘도 서울역에 다녀왔다. 사람들 틈에 서 있으면 가끔 네가 빨간 털모자를 쓰고 뛰어올 것 같다. 그날 네 손을 놓친 건 눈 때문이 아니라 내 잘못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다 못 갚을 만큼. 그래도 나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찾을 거다. 네가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 거라고, 누군가 밥은 먹이고 이불은 덮여 주고 있을 거라고 믿으며 산다…
서인은 거기서 읽는 것을 멈췄다. 가슴 한복판이 누가 손끝으로 오래 누른 자리처럼 아파 왔다. 단지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종이의 감촉, 글씨의 눌림, ‘밥은 먹이고 이불은 덮여 주고’라는 문장에 묻어 있는 생활의 절박함. 그것은 형식적인 죄책감이 아니라, 누군가 매년 같은 상처의 자리로 돌아와 거기 아직도 피가 나는지 확인하는 사람의 문장이었다.
“더 읽어 줄까?”
서인이 묻자 노인은 눈을 감았다.
“됐어. 네 목소리로 들으니까… 오늘은 그만 아파도 될 것 같다.”
그 말이 어쩐지 너무 늙고 너무 순해서, 서인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 병원에 갔다.
처음엔 정말 열쇠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이 노인과 자신 사이에 어떤 설명되지 않은 연결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우스우면서도 버리기 어려운 호기심. 그러나 몇 번 병실을 오가고 나자 이유는 조금씩 달라졌다. 박정우는 서인을 자꾸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면서도, 이상할 만큼 그녀가 오는 날을 기억했다. 월요일엔 “오늘은 네가 오는 날이지”라고 말했고, 목요일엔 “바람이 차다, 목도리 해라”라고 했다. 치매는 사람의 기억을 불규칙하게 허물었지만, 어떤 감각만큼은 끝까지 남겨 두는 것 같았다. 기다리는 일, 잃어버린 이름을 부르는 일, 목소리를 구별하는 일.
그는 자주 편지를 읽어 달라고 했다. 편지들은 날짜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오래전 것들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서울역을 헤매고, 보호시설을 찾고, 혹시 이미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사람의 편지. 그러나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문장들이 달라졌다. 여전히 만나지 못한 사람의 문장이었지만, 아주 멀리서라도 생존을 전해 들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으로.
네가 누군가의 딸로 잘 자라고 있어도 괜찮다. 아버지라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해도 괜찮다. 다만 네가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네 생일이다. 정확한 날을 아직도 틀리지 않았으면 한다. 미역국을 끓였다. 네 엄마가 살아 있었으면 웃었을 거다. 혼자 먹는 미역국은 자꾸 짜더라.
스물다섯이 되었을 너는 어떤 얼굴일까. 어릴 적 네 왼쪽 발목에 뜨거운 물 자국이 있었지. 네가 울다가도 종이배만 접어 주면 금방 그쳤다. 바닷물도 본 적 없는 아이가 왜 그렇게 배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왼쪽 발목의 화상 자국.
서인은 병실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멍하니 자기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왼쪽 발목 안쪽에도 아주 작은 흉터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있어 왔던 자국. 윤희는 그것에 대해 정확히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뜨거운 물에 덴 것 같더라”라고만 했다.
그날 밤, 서인은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눈이 왔다. 아주 많이.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고, 그녀는 어딘가 낮고 차가운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철 냄새, 젖은 옷 냄새, 누군가 울면서 부르는 소리. 그리고 아주 멀리서 누군가 “수연아!” 하고 외쳤다. 꿈속에서 그녀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이름이라는 것을. 그런데 깨어나고 나면 입 안에 남는 것은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이름은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은 돌처럼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는데 거울 속 얼굴이 유난히 낯설었다. 서인은 갑자기 윤희 생각이 났다. 반년 전 세상을 떠난 여자. 공식적으로는 그녀의 후견인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엄마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자신을 길러 낸 사람이었다.
윤희는 병원 청소 일을 오래 했고, 서인이 열세 살이 되던 해 위탁가정으로 데려와 길렀다. 서인은 어릴 적부터 윤희가 자기 친모 이야기가 나오면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지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 엄마 이야기가 TV에 나올 때면 윤희는 괜히 채널을 돌렸고, 서인의 생일 전날이면 늘 미역을 불려 놓고도 한참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술기운이 돌던 밤이면 윤희는 가끔 “네 엄마는 손이 참 고운 사람이었어” 같은 말을 하다가도 금세 입술을 다물었다. 그 문장은 늘 반쯤 열린 문처럼 남았다.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말을 아꼈다. 서인의 출생, 발견 당시의 상황, 열쇠의 의미. 묻고 또 물어도 윤희는 늘 비슷한 대답만 했다.
“그때는 나도 아는 게 많지 않았어.” “너는 그냥 살아 주면 됐어.” “모르는 게 때로는 덜 아픈 법이야.”
그 문장들은 다정했지만 동시에 문 같았다. 열려 있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들어오지 말라는.
서인은 그 주말, 윤희의 유품 상자를 다시 열었다. 옷가지와 병원비 영수증, 오래된 공과금 봉투들 사이에 낡은 과자 상자 하나가 있었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상자였다.
상자 겉면에는 흐린 매직으로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민정 씨 관련
윤희의 글씨였다.
서인은 한동안 상자를 바로 열지 못했다. 살아 있을 때는 본 적 없는 이름인데도, 이상하게 오래 알고 있던 이름처럼 가슴이 먼저 알아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윤희가 모른 척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끝내 말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뚜껑을 열자 서류 몇 장과 편지 묶음이 보였다.
맨 위에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서울역 플랫폼. 오래전 사진. 겨울. 한 남자가 어린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사진이 흔들려 얼굴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남자의 코끝과 눈매 어딘가가 이상하게 익숙했다. 아이는 빨간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사진 뒷면에 윤희의 글씨로 적혀 있었다.
정우 씨와 수연. 1998년 1월.
서인의 손에서 사진이 미끄러질 뻔했다.
그 밑에는 접힌 종이 몇 장이 더 있었다. 병원 로고가 찍힌 오래된 기록이었다. 그중 하나는 사고 당일 응급실 기록이었고, 다른 하나는 며칠 뒤 복지기관 인계서 사본이었다. 서류는 군데군데 닳아 있었지만, 몇 줄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했다.
‘보호자 박정우는 사고 및 음주 관련 조사 진행 중.’
‘동승 아동 1명은 응급실 혼선 중 일시 분리되었고, 이후 아동보호기관으로 인계됨.’
그리고 메모 하나가 클립으로 묶여 있었다. 윤희의 글씨였다.
그날 병원 복도에서 울던 아이가, 몇 년 뒤 혜성보육원 명단에 다시 올라와 있었다. 왼쪽 발목 자국을 보고 알아봤다. 한 번 놓친 아이를 두 번은 못 놓치겠어서, 그때부터 내가 보기 시작했다.
그 한 줄로 오래 비어 있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윤희는 사고 직후 아이를 곁에 두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병원 복도 어디선가 울던 어린아이를 한 번 보았고, 훗날 보육원에서 다시 그 아이를 알아본 사람이었다. 민정과 같은 병원에서 오래 일했고, 민정이 생전에 가장 믿던 언니 같은 사이였기에 그 아이의 얼굴과 발목의 흉터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래에는 작은 쪽지가 하나 더 있었다.
윤희 언니, 애 낳으면 제일 먼저 언니한테 안겨 줄게요.
민정.
짧은 이름 하나가,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밑에는 봉투 몇 개가 더 있었다. 발신인은 모두 같았다.
박정우.
첫 편지는 아주 오래전 것이었다.
윤희 씨. 혹시라도 그 아이를 찾게 되면 꼭 알려 주십시오. 죽었는지 살았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그 다음 편지는 몇 년이 지나 있었다.
살아 있다는 소식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이가 내가 누군지 모른 채 자라도 괜찮습니다. 다만 춥지 않고, 밥 굶지 않고, 학교는 다니는지만 가끔 알려 주십시오.
또 몇 년 뒤의 편지.
중학교 입학 축하합니다.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도감 세트를 보냅니다. 보내는 이름은 적지 않겠습니다. 아이가 싫어할까 봐. 내가 그 애에게 아버지일 자격이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음 편지.
대학에 간다고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저는 여전히 역 근처 구두 수선집에서 일합니다. 혹시라도 지나가다 내 얼굴을 보게 되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그 애는 나를 몰라보겠지요. 몰라봐도 됩니다. 살아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병원비 영수증 사이에 카드 명세서가 한 장 끼어 있었다. 몇 년 동안 매년 같은 날짜에 한 케이크 가게로 결제된 기록. 서인의 생일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그 케이크들을 회사 동료들이 보내는 줄 알았고, 혹은 윤희가 몰래 주문한 줄 알았다. 윤희는 늘 웃으며 “네 생일인데 케이크 한 번은 있어야지”라고만 했다.
그 모든 것의 뒤에 박정우라는 남자가 있었다.
서인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 안은 햇빛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차가웠다. 진실은 대개 칼처럼 날카롭기보다 물처럼 스며든다. 처음엔 젖는 줄도 모르다가, 어느 순간 옷과 피부와 뼈 사이까지 다 차가워졌음을 깨닫게 되는 식으로.
윤희의 마지막 편지가 맨 아래 있었다. 봉투는 부치지 않은 채였다.
정우 씨, 이제는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너무 오래 숨겼습니다. 처음엔 아이가 너무 어렸고, 그다음엔 학교 문제였고, 그다음엔 당신이 교도소에 다녀온 전력 때문에 겁이 났고… 핑계는 많았습니다. 사실은 제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민정 씨가 없는 자리에 내가 너무 오래 서 있었습니다. 열이 나면 밤새 업고 다녔고, 생일이면 미역국을 끓였고, 엄마라고 부르지 않아도 엄마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는 진실을 말하는 일이 아이를 위한 일인지, 나를 위해 미루는 일인지 저도 알 수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이제 다 컸고, 나는 오래 못 살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알려야겠지요.
교도소.
그 단어에서 서인은 다시 멈췄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뒤편에 적힌 짧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당신이 취하지 않았더라면, 민정 씨도 죽지 않았을 테니까요. 나는 그 사실을 아직도 완전히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아버지는 하나뿐입니다.
민정 씨.
아마도, 박정우의 아내. 수연의 엄마.
서인은 편지를 쥔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저녁 바람이 종이를 살짝 흔들었다. 종이는 아주 가볍게 떨렸지만, 그녀의 안에서는 아주 무거운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있었다. 그녀를 찾은 아버지. 생일마다 케이크를 보낸 아버지.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를 죽게 만든 아버지. 윤희가 숨긴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용서할 수 없는 실수와, 그럼에도 끊어낼 수 없는 혈육 사이에서,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너무 오래 머뭇거렸다.
서인은 그날 밤 병원에 가지 않았다. 휴대전화로 간호사의 부재중 전화가 두 번 찍혔지만 받지 못했다. 아니, 받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너무 많은 얼굴이 서로 겹쳐 있었다. 편지를 쓰던 손,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았을지도 모를 손, 케이크를 주문하던 손, 병실에서 마른 이불 위에 누워 “애기야” 하고 부르던 손. 인간은 하나의 얼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미워하는 일도, 불쌍히 여기는 일도 자꾸만 꼬였다.
새벽 무렵에야 서인은 겨우 잠들었고, 아주 짧고 아주 선명한 꿈을 꾸었다.
어떤 남자가 구두끈을 매 주고 있었다. 어린 자신은 발을 가만히 내밀고 있었다. 손이 컸다. 손등이 거칠었고 따뜻했다. 남자는 구두끈을 묶은 뒤 종이 한 장을 접어 조그만 배를 만들어 주었다.
“수연아, 물 있는 데 띄우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꿈은 끊겼다.
아침에 깨자 베개가 젖어 있었다.
서인은 이틀 뒤 병원으로 갔다.
간호사는 그녀를 보자 안도하면서도 어딘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어젯밤에 섬망이 심하셨어요. 계속 역에 가야 한다고… 열쇠를 줘야 한다고…”
병실 문을 열었을 때, 박정우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날이 흐려 병실은 회색빛이었다. 그의 옆얼굴은 돌처럼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은 평온이라기보다 오래 깎여 남은 무늬 같았다.
서인이 다가가자 노인은 천천히 그녀를 보았다.
“왔구나.”
이번엔 ‘애기야’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또렷했다.
서인은 한동안 서 있었다.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당신이 내 아버지냐고 묻는 문장은 너무 날것이었고, 왜 이제야 나를 불렀냐고 묻기엔 이미 편지들이 너무 많은 대답을 해 버린 뒤였다.
결국 그녀는 가장 엉뚱한 질문부터 했다.
“왜… 술을 마셨어요?”
노인의 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는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한참 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 엄마가… 진통이 왔거든.”
서인은 숨을 삼켰다. 간호사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수연이는 세 살이었고. 집엔 돈이 없었고. 병원은 멀었고. 택시는 안 잡히고… 내가, 내가 술 한 잔만 마신 상태였는데 괜찮을 줄 알았다.”
그는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 손이 너무 말라 눈물조차 쉽게 닦이지 않을 것 같았다.
“사고가 크게 난 건 아니었어. 가로수 들이받았지. 근데 네 엄마가… 머리를… 나는 정신이 없었고, 너는 울고 있었고. 응급실로 옮기고 나니까 사람들이 날 말렸어. 애는 잠깐 다른 데로 옮긴다 하고, 피가 모자라다고 해서, 나는 동의서 쓰고, 경찰 오고, 술 냄새 난다고 조사받고… 그 사이에 너는 보호기관으로 넘어갔고, 나는 그걸 곧바로 붙잡을 힘도 머리도 없었다.”
그는 거기서 목소리를 잃었다. 서인은 편지에서 읽었던 문장들이, 꿈속의 눈 냄새가, 윤희의 편지가 하나로 겹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네 엄마 죽이고, 너까지 잃어버렸지.”
그 말은 자책이 아니라 판결 같았다. 스스로에게 수십 년째 반복해 온 선고.
“교도소도 갔다 왔다. 짧았어. 짧아서 더 지옥 같더라. 벌이 끝났다고 해서 죄가 끝나는 게 아니더구나.”
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목 안이 뜨겁고 차가웠다. 미워하고 싶었다. 너무 쉽게. 그런데 늙고 병든 사람 앞에서는 증오조차 제 모양을 다 갖추지 못했다. 감정은 칼이 아니라 모래처럼 흩어졌다.
“윤희 씨는 왜…” 그녀가 겨우 물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죠?”
“내가 부탁했어.”
“왜요?”
박정우는 웃으려다 실패했다. 그건 웃음이 아니라 오래 말라 버린 상처가 잠깐 벌어지는 모양에 가까웠다.
“너를 찾았을 때, 넌 이미 잘 살고 있었거든. 아니, 적어도… 나 없이도 자라고 있었어. 윤희 씨가 사진 한 장 보여 줬어. 네가 학예회에서 종이별 들고 있는 사진. 그 사진 보고 알았지. 나는 네 삶에서 없어도 되는 사람이구나. 아니, 없어야 하는 사람이구나.”
“그걸 누가 정했어요?”
“내가.”
그는 서인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비겁함과 사랑이 뒤엉켜 있었다. 인간의 가장 추한 선택과 가장 간절한 선택은 때때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용서받고 싶어서가 아니었어. 그냥… 네가 살아 있다는 것만 알면 됐어. 생일날 케이크 하나 보낼 수 있으면, 그걸로 한 해를 버틸 수 있었어.”
서인은 결국 울지 못했다. 눈물은 너무 많은 방향으로 갈라져 있었다. 어린 날의 자신이 울었고, 윤희가 울었고, 이 남자가 수십 년간 속으로 울었을 것이다. 그 많은 울음 사이에서 지금의 눈물은 나올 길을 잃은 듯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녹슨 금속이 병실 형광등 아래서 희미하게 빛났다.
박정우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이걸…” 그는 숨이 막힌 사람처럼 말했다. “네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받았다.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아주 느리게 흘렀다. 늙은 사람의 눈물은 젊은 사람의 그것보다 더 무거워 보였다. 얼굴의 주름마다 오래 묵은 소금기가 배어 있는 것 같아서.
“보관함 17번.”
그가 중얼거렸다.
“사고 나던 날, 네 털모자랑 인형 넣어 둔 데였어. 병원 갈 때 짐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 찾자고. 결국 그 열쇠만 남았구나.”
그 순간 서인은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사람은 기억을 완전히 잃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각들을 몸 어딘가에 남겨 둔다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 눈 오는 역의 공기, 누군가 자기 모자를 벗겨 주던 손. 그것들은 이름보다 오래 살아남아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삶의 어느 틈에서 빛을 받아 되살아나는 것이다.
“아버지.”
서인이 처음 그 말을 입 밖에 냈을 때, 병실 안 공기가 조용히 흔들리는 것 같았다.
박정우는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처럼. 아니, 너무 오래 믿어 온 것을 막상 들은 사람처럼.
“한 번만 더.”
그가 거의 아이처럼 말했다.
서인은 입술을 떨며 다시 말했다.
“아버지.”
그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소리 없이 울었다. 마른 어깨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창밖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가 꼭 누군가 오래 참아 온 말을 대신 흘려 보내는 것 같았다.
그 뒤 며칠은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
서인은 퇴근하면 병원에 갔다. 박정우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그 짧은 며칠 동안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했다. 마치 오랫동안 막혀 있던 강이 마지막으로 한 번 제 흐름을 되찾는 것처럼. 그는 수연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종이배를 좋아하던 아이, 미역국의 미역만 골라 먹던 아이, 잠들기 전엔 꼭 창문을 열어 달라던 아이. 서인은 그것들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어떤 기억은 그녀에게 없었지만, 이상하게 몸은 알아듣는 듯했다. “그때 네가 손등에 풀을 덕지덕지 묻혀 왔지” 하면 설명할 수 없는 끈적한 감촉이 손끝에 번졌고, “네 엄마가 부르던 자장가가 있었어” 하면 전혀 모르는 멜로디인데도 목이 먼저 뜨거워졌다.
그녀는 보관함 17번을 같이 열어 보자고 말했다. 박정우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보자. 네 엄마가 마지막으로 고른 털모자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그다음 주 월요일 새벽,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환자분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셨어요. 지금 바로 오실 수 있을까요?”
서인은 코트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집을 나섰다. 새벽의 도시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얼굴이었다. 가로등 불빛은 누운 채였고, 버스 창문은 어제의 비를 닦아 내지 못한 채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택시 뒷좌석에서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날 만큼.
병원에 도착했을 때, 박정우는 이미 말을 못 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의식은 흐릿했다. 간호사는 뇌 출혈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지금은 자극을 최소화해야 하고, 반응은 있어도 인지는 불확실할 수 있다고.
불확실할 수 있다.
그 말이 너무 잔인해서, 서인은 오히려 담담해졌다. 인간은 완전히 부서질 것 같을 때 가끔 기이할 만큼 차분해진다. 눈물도 뒤로 미뤄 두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의 순서만 세는 식으로.
그녀는 침대 곁에 앉았다. 박정우의 손을 잡았다. 손은 아직 따뜻했다. 다행인지 잔인한지 알 수 없는 따뜻함.
“아버지.”
반응은 없었다. 눈꺼풀이 아주 조금 떨린 것 같기도 했다.
“나 왔어요. 수연이 왔어.”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그 이름으로 불렀다. 수연. 입안에 넣어 보니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너무 오래 돌아온 이름이어서 오히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 같았다.
서인은 가방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아직 읽지 못한 마지막 편지였다. 봉투에는 날짜가 없었다. 대신 앞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언젠가 정말 만나게 되면
서인의 손이 떨렸다. 봉투를 열었다.
수연아. 이 편지는 네가 정말 내 앞에 다시 서게 되면 읽어 주려고 남겨 둔다. 아버지는 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 네 엄마 몫까지 사랑받아야 할 아이를, 나는 사랑보다 먼저 사고와 죄책감 속에 던져 버렸다. 그건 평생 돌이킬 수 없다. 다만 네가 세상 어디에선가 자라, 웃는 날이 하루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나를 전혀 모르는 채로 늙어 간다 해도 괜찮다. 사랑은 반드시 곁에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란 걸, 너를 찾으면서 배웠다. 어떤 사랑은 멀리 서서 네 겨울 외투 단추가 잠겼는지만 보고 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한 번만, 딱 한 번만 네가 ‘아버지’라고 불러 준다면, 나는 그 소리 하나로 내가 망쳐 놓은 생을 조금 덜 두려워하며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서인은 더 읽지 못했다. 종이가 눈물에 젖었다. 그녀는 박정우의 손을 자기 이마에 가져다 댔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정말 움직인 것인지, 그녀가 그렇게 느끼고 싶었던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작은 떨림.
“아버지.”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버지, 나 여기 있어. 수연이야. 늦어서 미안해.”
모니터의 파형이 가늘게 흔들렸다. 창밖에서는 아침이 오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이 가장자리부터 아주 천천히 밝아지는 중이었다. 세상은 늘 이런 식이었다. 누군가의 마지막과 상관없이, 어김없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래서 잔인하고, 그래서 또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박정우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서인은 귀를 가까이 댔다.
“…배…”
그것이 ‘배’였는지 ‘애’였는지, 혹은 아무 의미 없는 숨소리였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한 번, 공중에서 무언가를 접는 모양을 만들었다. 종이배를 접는 습관 같은 동작.
그리고 얼마 뒤, 파형은 아주 느리게 곧아졌다.
서인은 울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오히려 아무 감정도 없는 것처럼 멍했다. 오래 찾아 헤매던 문을 겨우 열었는데, 문 안쪽 방이 이미 텅 비어 있는 것을 본 사람처럼. 슬픔은 종종 즉시 오지 않는다. 너무 커다란 슬픔은 처음엔 형태도 없이 서 있기만 한다. 사람의 몸이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될 때까지, 문 앞의 짐처럼 조용히.
장례는 소박했다.
오랜 지인 몇 명, 병원 사회복지사, 역 근처 구두 수선집에서 일했다는 노인 둘. 그들은 박정우가 평생 서울역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구두를 고치면서도 눈은 늘 출입문 쪽에 가 있었고, 겨울이면 유난히 어린 여자아이들의 신발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고.
“혹시 내 딸이 신었을까 봐.”
누군가 그렇게 말하며 울었다.
서인은 조문객들 틈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상복 소매 안으로 손을 숨긴 채. 이제 그녀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김서인, 그리고 정수연. 하나는 자라오며 익힌 이름이었고, 하나는 잃어버렸다가 너무 늦게 되찾은 이름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 묻는 건 무의미해 보였다. 사람은 단 하나의 이름으로만 살아지지 않았다. 잃어버린 이름과 불려 온 이름, 타인이 붙인 이름과 스스로 받아들인 이름들이 층층이 쌓여 한 사람을 만든다.
장례를 마친 뒤, 그녀는 병원에서 받은 유품 상자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서인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은 한 번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너무 많은 어른들의 죄책감과 사랑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아이였다는 것을. 한 사람은 잘못 때문에 평생 뒤로 물러섰고, 한 사람은 사랑 때문에 진실을 끝내 미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녀는 다른 이름으로 자라났다.
다음 날, 그녀는 서울역으로 갔다.
역은 여전히 사람으로 가득했다. 캐리어 바퀴 소리, 방송 소리, 커피 냄새, 플랫폼을 스치는 바람. 수십 년 전의 서울역과 지금의 서울역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떠나보내고 기다리는 장소라는 점에서, 역은 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의 신발 밑창과 남는 사람의 눈빛을 함께 밟는 얼굴.
보관함 구역은 역 한편 구석에 있었다. 번호 배열은 바뀌었지만, 오래된 관리대장에 문의한 끝에 예전 번호 체계와 대조할 수 있었다. 17번은 지금도 같은 벽 쪽 두 번째 줄에 있었다. 물론 오래전부터 비어 있었을 거라고 직원은 말했다. 철거와 교체가 여러 번 있었으니 안에 남은 것은 없을 거라고.
서인은 녹슨 열쇠를 넣어 보았다. 당연히 맞지 않았다. 그래서 직원 도움을 받아 기록에 맞는 이전 열쇠 구멍을 찾고, 오래된 잠금장치를 따로 열어 보았다.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오래 기다린 문은 오히려 열릴 때 소리가 작다. 안에 든 공기가 먼저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안쪽에는 낡은 비닐봉지 하나가 남아 있었다.
정말로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직원도 놀란 얼굴이었다.
서인은 떨리는 손으로 봉지를 열었다. 안에는 붉은 털모자 하나와, 귀가 한쪽 떨어진 하얀 토끼 인형이 있었다. 털모자는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랬고, 인형은 눌려 납작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떤 어린 겨울의 중심을 붙들고 있었다. 눈 오는 날, 누군가 서둘러 넣어 두고 다시 찾으러 오려 했던 시간의 심장.
그 순간, 서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환하게 터졌다.
플랫폼 냄새. 차가운 철기둥. 아버지의 손. 엄마가 축 늘어진 채 실려 가던 들것의 흔들림. 누군가 “애는 여기 잠깐!” 하고 외치던 목소리. 그리고 빨간 털모자를 벗겨 인형과 함께 넣어 두던 남자의 급한 손놀림. 기억은 완전한 영상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한순간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것처럼, 아주 짧고 아프게 왔다가 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그날의 자신이 정말 존재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정말 사랑받던 아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인은 주저앉아 모자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울음이 왔다.
너무 늦게 온 울음이었다. 장례식장에서는 나오지 않던 것이, 역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에서, 바닥의 차가운 먼지 냄새를 맡으며 쏟아졌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었다. 목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도 몸 전체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사랑은 있었다. 정말로. 단지 너무 늦게 도착했을 뿐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지만, 서인은 고개만 저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찾지 못한 아버지를 너무 늦게 찾았고, 아버지는 평생 자신을 찾다가 바로 어제 죽었으며, 이제야 되찾은 어린 날의 모자와 인형 앞에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는 사정이 너무 길어 입 밖에 낼 수 없는 슬픔이 있다. 그런 슬픔은 결국 몸으로만 울게 된다.
한참 뒤, 그녀는 인형을 털고 모자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빈 보관함 안쪽 벽에 손을 넣어 보았다. 손끝에 종이 감촉이 닿았다.
아주 작은 메모였다. 누렇게 바랜.
수연아, 아버지 금방 올게. 무서워하지 마. 종이배 접어 줄게.
그 한 줄이 서인을 다시 무너뜨렸다.
그것은 약속이었고, 실패한 약속이었고, 그러나 끝내 지켜지지 못했음에도 평생 살아남아 한 사람을 찾아온 약속이었다. 사람은 때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방식으로 평생을 살아 낸다. 실패한 하루를 만회하려고 남은 모든 날을 바치는 식으로.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서인은 공방 한쪽에 작은 나무 상자를 두었다. 그 안에는 빨간 털모자와 토끼 인형, 보관함 열쇠와 편지 몇 장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책을 고쳤다. 물 먹은 종이를 말리고, 떨어진 책등을 다시 세웠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그녀는 너무 망가진 것들을 보면 섣불리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찢어진 자국이 깊어도, 물이 번져 글씨가 지워져도, 아주 조금은 남아 있었다. 형태를 잃지 않은 섬유, 종이 속에 남은 눌림, 빛에 비추면 겨우 드러나는 문장. 인간의 삶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아도 아주 조금은 남는다. 그리고 때로 그 조금이 한 사람을 끝까지 살게 한다.
어느 저녁, 비가 왔다. 가게 셔터를 반쯤 내리고 스탠드를 켠 채, 서인은 박정우의 마지막 편지를 다시 읽었다. 문장들은 이제 덜 아프지 않았다. 여전히 아팠다. 다만 그 아픔의 모양이 달라졌다. 예전엔 버려진 자리의 통증이었다면, 지금은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랑의 무게였다.
그녀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천천히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 늦어서 미안해요. 나는 잘 자랐어요. 당신이 보낸 케이크도 매년 먹었고, 책도 많이 읽었고, 밥도 대체로 잘 먹었어요. 아주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불행하게만 살지도 않았어요. 윤희 씨는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며 자랐어요. 그 사실 때문에 당신을 덜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에요. 사랑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 조금 알아요.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빗소리가 가게 유리창을 얇게 두드렸다. 빗물은 밖의 네온사인을 번지게 했고, 그 빛은 꼭 오래된 기억이 다시 젖는 모양 같았다.
서인은 다시 썼다.
당신을 용서한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어요.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잃어버린 시간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알아요. 어떤 사람은 한 번의 잘못으로 평생을 망치고, 어떤 사랑은 그 망가진 생 전체를 걸고서도 다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당신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진 모르겠어요. 다만 당신이 정말로 나를 찾았다는 것, 정말로 사랑했다는 것, 그 사실만은 끝내 부정하지 않을게요.
여기까지 쓰고 나서야 그녀는 조용히 울었다. 예전처럼 무너지는 울음이 아니라, 비가 지붕을 오래 두드리다 결국 홈통으로 흘러내리는 식의 울음이었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몸 안에서 흐르는 길을 조금 배웠을 뿐이었다.
편지를 다 쓴 뒤, 서인은 그것을 접어 작은 종이배를 만들었다.
서툰 손놀림이었다. 어릴 적 배를 좋아했다는 말을 이제야 기억해 내는 사람의 손놀림. 종이는 몇 번 삐뚤어졌고, 끝이 조금 찢어졌다. 그래도 배는 배였다. 물 위에 띄우면 금방 젖어 가라앉을 것이 분명한, 아주 연약한 작은 것.
서인은 그 종이배를 창가에 올려두었다.
밖의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역과 병원과 장례식장과 공방 위로. 누군가를 잃은 사람의 지붕 위로, 누군가를 아직 찾는 사람의 어깨 위로. 비는 늘 공평하게 내렸고, 그래서 잔인하면서도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슬픔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는 소리로 알려 주었다.
가게 불을 끄기 전에 서인은 마지막으로 창가의 종이배를 보았다.
작고, 금방 젖을 것 같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구겨질 것 같은 모양.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연약한 것이 밤의 유리창 앞에 놓여 있으니, 마치 아주 오래 도착하지 못했던 마음 하나가 비로소 제 모양을 얻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끝내 약속한 시간 안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너무 늦게 도착했다. 하지만 어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평생 한 사람의 편지 속에 남고, 다른 한 사람의 발목 흉터 속에 남고, 역 구석 보관함의 먼지 속에 남는다. 그러다 언젠가, 너무 늦은 계절에라도 다시 발견되어 누군가를 울린다.
서인은 창문에 손을 대고 아주 작게 말했다.
“아버지, 나 여기 있어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빗물이 유리를 타고 내려오며, 마치 누군가 아주 오래 걸려 돌아와 이제야 창밖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고, 종이배는 아직 창가에 무너지지 않은 채 가만히 놓여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늦은 사랑은 결국 저런 모양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처럼. 조금만 젖어도 찢어질 만큼 약한데, 이상하게도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모양.
그리고 그 밤, 서인은 처음으로 알았다.
사람이 정말로 잃어버리는 것은 누군가가 떠난 사실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를 사랑했다는 증거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믿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이제 그녀에게는 증거가 있었다.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들.
녹슨 열쇠 하나.
귀가 떨어진 토끼 인형.
그리고 임종 직전, 공중에서 한 번 종이배를 접던 마른 손가락의 움직임.
그것이면, 살아가는 동안 아주 가끔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가끔은. 정말 아주 가끔은.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