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불완전

사물의 관계-술잔

by 윤담

술잔은 묘하다.
손에 쥐면 권위가 생기고,
입에 대면 권위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잔을 들며 웃지만,
그 웃음 속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잔이 비워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본심을 말하지 않는다.

회식 자리는 늘 빛이 세다.
형광등 아래, 웃음이 과하게 반짝인다.
누군가는 상사의 눈치를 보고,
누군가는 뒤늦게 농담을 던진다.
잔이 돌고, 말이 따라 흐른다.
누가 진심으로 웃는지,
누가 의무로 웃는지는 곧 구분되지 않는다.
술은 결국 경계선을 흐리게 만든다.

나는 그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언제나 한 박자 느리다.
잔이 내 앞에 멈출 때,
이미 사람들의 온도는 달아올라 있다.
그때 나는 천천히 잔을 들고,
술의 냄새를 맡는다.
그 안에는 사람들의 하루가 섞여 있다.
분노, 체념, 피로, 체면 같은 것들.
술잔은 결국 말보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어느 날은 혼자 마셨다.
테이블 위에 잔 하나, 병 하나.
시계 초침이 잔의 표면에서 반사되어 흔들렸다.
그 진동이 내 안의 시간을 닮아 있었다.
그때 알았다.
술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과 마시는 것이라는 걸.
잔을 채운다는 건
흘러간 하루를 잠시 멈춰 세우는 일이다.

술잔은 비워야 채워진다.
그 단순한 원리를
사람은 자주 잊는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채우려 애쓸수록 무거워지고,
비워 둘 때 비로소 숨을 쉰다.
그래서 진짜 술자리는
소란한 곳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잔이 비어 있음을
알아주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술잔은 오늘도 테이블 위에 있다.
권위와 피로, 체면과 외로움이
맑은 액체 위에 번진다.
나는 그 잔을 바라본다.
그 안의 맑은 액체는 결국 나 자신이다.
취하지 않아도 흔들리는 존재,
비워야만 다시 채워지는 마음.

술잔은 늘 말이 없다.
대신 조용히 비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려는
우리의 서툰 온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