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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Dec 17. 2021

내방가사 시인 은촌 조애영과 대구 항쟁

박정희 셋째 형 박상희



10월 폭동

경북일대 뒤집었다 폭동이요 민란이라

누구보다 큰피해를 이부자가 당했어라

큰집주인 찾는판에 낭군님이 나타나고

폭도들이 폭행할때 나도같이 당했어라

중구그날 아침부터 영천군수 타살한후

이부자집 습격해서 파괴하고 방화할때

부형대신 붙잡혀서 맞아죽을 변을했네

나아니면 영낙없이 황천으로 갔으리라

악몽같은 그날아침 이런욕을 보았나니

폭도에게 끌려나가 몽둥이로 매를맞고

개죽음을 당하는임 참아볼수 없는지라

이내목숨 내어놓고 가장목숨 구하려는

아녀자의 일편단심 천지신명 도우셨다

피투성이 가장머리 얼사안고 울부짖어

넘어지는 낭군님을 무릅위에 올려놓고

죽었다고 땅을치던 시월일일 십일사건

무서워라 무서워라 경북십일 폭동이라

불행이도 그날화를 이내혼자 당했으니

이씨가문 궂은일은 나혼자만 당할란가

남편목숨 건지려고 내목숨은 내던진날

요행이도 소낙비가 쏟아지고 천둥할때

폭도들이 난동하다 하나둘씩 헤어진 

(은촌 조애영, 내방가사집에서)


경북 영천군 이부자집 호주는 석와 이인석이었다.  조애영은 셋째 아들 이담의 부인이었다. 이인석은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 이활은 일본 와세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 하고 런던 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은 유명 인사 로 해방후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둘째 이홍은 강원도 산업 부장으로 바쁜 몸이었다. 넷째 이호는 검사로 서울 혜화동에 살고 있었다. 셋째 아들 이담도 서울에 살았는 데 일제 말기에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 영천에 내려와 있었다. 


1946년10월1일 대구에서 폭동이 일어 났다. 일자리가 없는 데다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 급등하는 물가를 당할 수가 없었다. 무엇 보다도 식량이 부족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질 까지 퍼졌다. 미군정은 대구를 봉쇄 했다. 이질이 만연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전 대구 시민이 굶어 죽을 판이 있다. 시민들의 불만은 머리 끝 까지 올 랐다.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총 동원 영이 내려진 일제말에는 경찰이 문전에 나타나서 애써 농사지어 수확한 곡물을 빼앗아 갔다. 이외에도 식기등 짐안에 있는 쉬붙이는 모두 거두어 갔다.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에 협조하지 않으면 경찰이 잡아 갔다. 경찰은 민중의 적이었다. 


미군정은 철천지 원수 였던 경찰을 처벌하기는 커녕 다시 등용 했다. 미군정은 나라에서 곡물을 거두어 들여 다시 배급하는 제도를 없애고 곡물을 자유롭게 사고 팔게 했다. 그러나 쌀값이 한 없이 올라 갔다. 미군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배급제를 실시 했다. 그 지긋지긋한 경찰이 다시 문전에 나타나서 곡물을 빼앗아 갔다. 민중의 경찰에 대한 불만은 건드리면 터질 지경이었다. 


일제 시대에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주의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원래 사림파 사대부의 고향이었던 경북지방에서는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 했고 이들 중에는 새로운 사상이었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1945년 남한을 통치 했던 미군정은 초기에 사상의 자유를 인정 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자들의 활동이 자유로 웠다. 대구 시민의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불만은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획책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 였다. 

마침 부산에서 시작한 철도노조 파업을 주도했던 이들은 10월1일 대구 노동절(May day) 행사를 계기로 폭동을 일으 켰다. 물론시민들의 자발적인 항거를 좀더 조직적으로 이끌 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양상은 사실상 폭동이었다.  그렇지만 요즈음에는 대구 항쟁이라고 한다. 

폭도들은 관공서와 경찰서를 공격 했고 많은 경찰이 희생되었다. 미군정은 무력을 동원하여 대구에서 폭도들을 몰아 냈다. 폭도들은 대구를 포기하고 시골로 방향을 돌려서  경찰서, 우체국, 관공서를 공격했다. 그리고 지주들의 집으로 쳐들어 갔다.  


달성 경찰서로 몰려간 폭도들은 경찰서 건물에 불을 질렀다. 서장실에는 달성군수를 비롯한 군 유지들이 모여 있었 는 데 모두 10여명이 불에 타 죽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천으로 몰려 갔다. 경찰서와 군청을 불 태우고 경찰을 보이는 대로 죽이고 경찰 가족을 납치 하고 경찰관 집에 불을 지르고 약탈 했다. 


이활의 아들 *병린은 영천 읍내 집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병린은 몹시 불안 했지만

동네에서 인심을 잃은 적이 없으니 괜찮으려니 하면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이 부잣집 때려 부숴라” 하는 폭도들의 외침에 화들 짝 놀랐다. 얼른 일어나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 문서와 할머니 할아버지 옷가지를 되는 대로 보따리에 싸들고 할머니를 등에 업고 담을 뛰어 넘어 평소에 친했던 이웃집으로 달렸다. 할머니를 이불에 싸서 그집 방에 숨기고 논과 밭을 우회하여 매호동(송호정) 집쪽으로 내 달렸다. 송호정은 99칸 짜리 사대부 이부자 집이었다.


폭도들은 “부자는 무조건 때려 죽여라” 라고 외치며 탈취한 트럭을 타고 임고면 매호동 집을 향해 적기가를 부르며 몰려 갔다. 이담의 부인 조씨(조애영)은 멀리서 사람을 태운 트럭이 자신의 집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시아버지 이인석을 뒷산으로 피신 시켰다. 


그리고 장롱에서 패물과 옷가지를 챙기는 중 폭도들은 이미 대문으로 밀려 오고 있었다. 

폭도들은 “이 부자 나오너라” 하고 외쳤다. 안채 대청에 있던 이담은 아버지(이인석)를 구하기 위해서 “주인 여기 있다” 라고 답했다. 그말이 떨어지자 마자 폭도들은 이담에게 달려들어 몽둥이로 내려 치기 시작 했다. 머리를 몽둥이로 맞은 이담은 이마에 피가 흐르고 의식 불명이 되었다. 


조씨 부인은 “사람 잡네!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는 거요!”하고 울부짖으며 남편 이담의 몸을 덮쳐 안았다.  “누구 물좀 떠오너라” 조씨 부인은 의식이 없는 남편에게 물을 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물이 그냥 입가에 흘러 내렸다. “아이고, 물도 안 넘어 가네…..아이고 아이고 ... 생사람 죽었 네” 하고 울부짖었다. 


폭도들은 조씨 부인이 통곡을 하며 울부 짖자 잠깐 멈칫 했다. 이 때 젊은 지휘관 처럼 보이는 사람이 지프 차를 타고 나타 났다. 지프에서 내린 그는 폭도들에게 “그 만 멈춰라, 그 사람은 집주인이 아니다.” 라고 외쳤다. 그리고 폭도들에게 “저 언덕 쪽에 가서 찾아 봐라” 고 하여 폭도들을 다보낸 다음 “저들이 다시 돌아와서 죽이기 전에 얼른 데리고 가시오” 하며 사라 졌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줄기 차게 내리고 있었다. 


조씨 부인의 아들 이병붕 교수(서울 의대 ‘63년 졸업 현재 존스 합킨스 의대 교수)는 “지프에서 내린 젊은 지휘관이 박상희 였다”고 어머님이 일러 주었다고 회고 하고 있다. 박상희는 박정희의 셋째 형이다. 박상희는 절친 황태성과 함께 대구 폭동의 중요한 지도자 였다.  독립운동가였던 그는 해방 후  구미 지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었다. 대구 폭동 당시에 그는 조선공산당 선산군당 총책이었다. 박상희는 10월6일에 경찰 총에 맞아 사망 했다. 


폭도들은 집주인 이인석을 찾지 못하고 이담을 죽일려고 다시 매호동 집으로 돌아 왔으나

이담은 이미 피신한  후 였다. 화가 난 폭도들은 99칸 집에 불을 질러 모두 잿더미로 만들었다. 


폭도들을 따 돌린 며느리 조애영은 의식 불명의 남편을 한 하인의 집에 맡겼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을 일단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 시켰다. 그러나 그대로 있으면 자신과 남편 그리고 온 가족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경찰의 힘을 빌리지 않고 는 모두 폭도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을 빠져 나갈 수 가 없었다.  경찰서로 가려면 폭도들이 모여 있는 곳을 통과 해야 했다. 조애영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사람 흉내를 내며 폭도들  중앙을 통과하여 경찰서에 도착 했다.  경찰은 무장한 경찰과 함께 빈 트럭을 내주 었다. 한밤중에 온 가족이 그 트럭을 타고 폭도들이 장악한 지역을 완전히 벗어 날 수 있었다. 


경찰이 적극적으로 조애영을 도운 또 다른 숨은 이유가 있었다. 남편 이담의 동생 이호는 치안국장이었고 조애영의 셋째 오빠 조준영은 경찰국장이었다. 조애영은 시인 조지훈의 고모 이다. 


1971년 조애영은 회갑 기념으로 “은촌 내방가사 집”이라는 책을 냈다.  “10월 폭동”은 대구 10월 항쟁 때의 경험을 내방가사라는 시조 형식의 서사시로 표현 한 작품이다. 이외에 한 평생 써온 내방가사 36편을 정리한 “슬픈동경”이라는 작품이 있다.  모두 한글로 쓰기 때문에 은촌의 작품은 한글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다. 내방가사는 조선시대 규중의 여성들이 언문을 사용하여 시조 형식으로 쓴 서사시 이다.  그러나 신문학이 들어 온 이후 이런 형식의 문학 장르가 소멸 되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아주 중요한 고전이 되었다. 


<박상희, 황태성, 박정희, 박영옥, 김종필>


1961년 9월 황태성으로 부터  조귀분에게 연락이 왔다. 박정희를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조귀분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아내였다. 박정희의 형수이다. 황태성은 1946년에 월북했던 사람이었다. 자기 남편의 절친한 친구였다. 박상희와 조귀분 사이에서 난 딸이 김종필의 아내 박영옥 이다.  김종필은 박정희 조카사위이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군부는 육군 정보기관을 통해서 북한에게 남북 대화를 요청했다. 4.19 혼란기에 남로당원이었던 박정희가 남한을 지배하게 되자 김일성은 적화 통일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남쪽에 보낼 밀사를 찾고 있었다. 마침 황태성이 옛 박정희와의 친분 관계를 앞세워 자원하자 이를 수락했다.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옛 친구의 부인 조귀분을 찾아갔다. 10월에 그는 체포되었다. 조귀분은 자기 딸 박영옥에게 연락했을 것이고 박영옥의 남편 김종필이 체포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는 1963년 비 공개 육군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 졌다. 

 

황태성은 190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경기고에 들어갔으나 일본 교장 배척운동으로 3년 만에 퇴학당했다. 연희전문에 다니다가 항일운동을 이유로 퇴학당했다. 학생운동을 하는 동안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김천에서 신간회, 청년동맹 간부로 활동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항일운동으로 3년 6개월 동안 옥 사리도 했다.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는 황태성과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였다.  신간회와 청년동맹 지방 지도자로 활략 했다. 신간회는 사회주의자 독립운동 단체였다.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대구지국장을 지냈다.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수감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구를 창설했다. 구미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다고 한다. 1946년에 조선공산당 선산 군당 총책이 되었다. 황태성은 교사였던 조귀분을 박상희에게 소개하여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이 박영옥이고 후에 김종필의 처가 되었다. 

 

박상희와 황태성은 대구 10.1 사건 동안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박상희는 10월 6일에 경찰 총에 맞아 사망했다. 황태성은 이무렵에 월북했다. 이북에서 무역상 부상 등을 지냈으나 1959년에 모든 관직에서 물러 났다. 박정희는 형이 경찰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남로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박상희보다 11살 아래이다. 박상희가 대구사범에 낙방 한 반면에 박정희는 합격했다. 박정희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박상희는 동생이 일본군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만주군관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일본 육사 입학 자격을 얻었다. 일본 육사를 1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관동군 헌병 소위로 임관되었다. 관동군 장교로 근무하던 중 소련군에 의해서 관동군이 패퇴 하자 베이징에 있는 광복군에 합류했다. 이북은 이미 소련군이 점령하여 일본군이었던 그에게는 들어갈 수 없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1946년 5월 박정희는 미군 수송선을 타고 구미로 돌아왔다. 박상희는 박정희를 "선생질이나 하지 일본군이 되더니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다"라고 나무랫 다고 한다. 그는 해방된 한국에서 일본군 경력은 치명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그 해 9월에 조선 경비 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12월에 졸업한 후 한국군 장교가 되었다. 박정희는 셋째 형 박상희를 무척 존경 했다. 박정희도 형처럼 남로당에 가입하여 군내 남로당 조직 총책이 되었다. 그후 여순사건에 연루 되었으나 미군과 이승만 정부의 도움으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인석의 큰 아들 이활은 김성수와 함께 고려대학교 재단을 만들고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이활의 아들 이병린이 이사장직을 승계 했다. 이병린은 김성수의 사위가 되었다. 


추론


박상희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 였기 때문에 나쁜 시람들 일 까?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근무 했기 때문에 민족의 적 일본과 내통한 친일파 일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국가의 주인이 군주에서 국민으로 바뀌는 시대였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가 대세 였다. 그러나 대중은 나라의 경제구조에 있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둘중의 하나를 선택 해야 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부와 권력을 대중이 공평하게 나누어 갖기를 원 했다.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면 권력 또한 소수가 가지게 되어 귀족과 같은 특권층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었다. 박상희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산주의가 다른 사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당 독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은 세계 일류국가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 날 무렵 일본은 한반도, 만주, 중국, 동남아를 석권하고 있었다. 그 때 태어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에 가면 공부 잘해서 우등생이 되려 했을 것이다. 그 중에 예외적인 인물이 황태성 같은 사람들이다. 졸업하면 그 사회에서 출세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지 상정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도 그랬다. 그렇다고 그들이 해방된 후에도 한국을 버리고 일본에 충성하려 하지는 않았다. 미군정과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일제 강점기에 배운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새나라에 기여할 기회를 주었다. 이들은 철저한 친미 반공주의자가 되어 친일경력에서 탈출하려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이 과거에 공산주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 씀에도 불구 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공산주의 경력은 용서하지 않고 그들을 제거 하는 데 십분 이용 했다. 더구나 정적을 빨갱이 누명을 씨워 제거 하기도 했다. 


이북에서는 친일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건국 초기에 철저히 제거 되었다. 항일운동을 했던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자들은 초기에 일부 등용 되었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대부분 숙청 되었다. 김일성 정부는 친쏘 정권이었다. 국수주의자였던 그들이 친쏘 정권에 협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디 사람을 탓하지 말라! 나라의 운명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나라에 대한 사랑는 언제나 우리 핏속에 흐르고 있다. 나라가 허약하면 국민이 나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다. 

 

 참고:

1.중앙일보, 1971년3월12일, 현대판 <대방가사집> 낸 조애영 여사

2. SNUMA.NET: 시조시인 조애영; 이병붕 동문 어머님

3. 아주경제 2016년7월7일: 목당 이활의 생애. 대구폭동 발발, 영천까지 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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