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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Dec 02. 2023

해방과 암살

 1. 고하 송진우 암살사건

도쿄 폭격 장면

1945년 8월, 일본의 도시는 참담했다. 68 개의 도시가 미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다. 백칠십만의 인구가 집을 잃었고 300,000명이 죽었고 750,000명이 부상당했다. 66번의 폭격은 보통 폭탄으로, 두 번은 원자폭탄으로 이루어졌다. 밤마다 퍼붓는 폭탄으로 도시가 연달아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도시의 파괴가 일상이 된 일본사람들은 원폭 투하가 별다른 일이라고 느끼기 힘들었다. 


B 29 한 대는 16,000 – 20,000 파운드의 폭탄을 싫고 나타났다.  미공군이 한번 출격하는 데 500대가 출격했다. 그러면 한 도시에 약 5 킬로 톤의 폭탄이 떨어지는 셈이다. 그리고 보통 폭탄은 도시 전역에 광범위하게 그 폭발력이 확산된다. 히로시마 원폭은 16.5 킬로 톤, 나가사키 원폭은 20 킬로 톤이었지만 폭발 효과가 중앙에 집중된다. 따라서 보통 폭탄의 도시 파괴 효과가 어떤 도시에서는 원폭과 견줄 만했다고 할 수 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가 가장 많은 사망자를 발생하게 하지 않았다.  1945년 3월 9-10일에 도쿄에서 120,000 명이 미공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이것은 사상 최대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이다. 이와 같이 종래의 미군 폭격이 원폭 투하에 의한 도시 파괴 능력을 능가하기도 했기 때문에 원폭투하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차지한 영토와 국가의 통치권을 그냥 내주고 무조건 항복할 수는 없었다. 가능한 한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그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기 위해서 두 가지 전략을 진행하고 있었다. 중립조약을 맺고 있는 소련에게 미국과의 중재 역할을 부탁하는 한편, 앞으로 일본 본토에 상륙할 미군에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하기 위해서 일본 각지에 참호를 파고 병력을 배치하는 등,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에게 많은 양보를 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종전에 합의하게 끔 하려는 심산이었다. 1941년 4월, 이차대전 중 소련은 독일과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략하면 동서 양쪽에 전선이 펼쳐지고, 일본은 미국,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데 소련이 개입하면 태평양과 대륙에서 동시에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두 나라는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자, 소련은 병력을 서부전선에서 동부로 이동시킬 여유가 생겼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만주의 관동군과 싸워 줄 것을 부탁해 왔고 그때마다 독일이 항복한 후에 만주로 진입하겠다고 대답했다. 약속대로 스탈린은 1945년 8월 이전에 벌써 동부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소련군의 일본 만주 관동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은 8월 6일과 9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1945년 8월 8일 바이칼 시간 오전 11시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 9일에 만주 사할린으로 쳐들어왔다.  일본은 본토를 방위하기 위해서 상륙을 기다리는 미군과 사할린으로 쳐들어오는 소련군을 상대해야 했다. 만주의 관동군은 둘째 문제였다. 더구나 일본은 태평양에서 미군과 싸우고 있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는 날 소련은 만주로 진입하여 일본 관동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만약 미군이 일본 본토로 들어오면,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했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0시 30분, 소련군이 만주와 사할린으로 쳐들어오는 동안 일본최고지도자 6명은 최고회의를 소집하고 무조건 항복을 논의하고 있었다. 6명 외에 의전원원장과 천황이 참석했다. 11시 2분에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으나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최고 지도자들이 이를 보고 받은 것은 그날 오후였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느냐 거부하느냐를 놓고 표결에 부쳤더니 3:3이었다. 천황 히로히토가 수락에 표를 던져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 정상이 만나 “일본은 처참한 파괴를 원하지 않으면 당장 무조건 항복하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일본에게 보냈다. 따라서 일본이 선언을 인정하면 무조건 항복을 의미했다. 소련은 일본과의 중립조약이 유효했기 때문에 이 선언에 서명하지 않고 있다가 선전포고 이후에 서명했다. 


다음날 1945년 8월 9일 이른 아침, 일본제국 외무성은 스위스를 통해 미국에 ”천황의 대권을 손상시키는 어떤 조건도 없다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무조건 항복이 아니고 조건을 붙인 항복이었다. 미국은 B-29 400대를 동원하여 일본 각지에 대량의 폭격을 퍼부었다. 8월 14일 일본제국 외무성은 미국에 포츠담선언 전문을 수락한다는 전문을 보냈다. 



미국에 항복한 일제는 해체되었다.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해방의 기쁨에 환호했다. 한국사람들은 잃었던 나라를 돼찾았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제 나라의 주인이 되었음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철 천지 원수 일본 외에는 나라를 빼앗아갈 나라가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일제를 한반도에서 쫓아낸 장 본인은 한국사람들이 아니고 소련과 미국이었다. 한국사람들에게 한반도를 다스릴 주권을 주느냐 안 주느냐는 또 다른 주인인 소련과 미국에 달려 있었다. 다행히 이들은 한국을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차대전 승전국이었던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 3명이 패전국 영토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서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38선 이북과 이남을 각각 점령했던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어떻게 하나의 나라로 독립시킬 것인가에 대한 방안이 결정되었다. 이를 1945년 12월 16-26일에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라고 한다. 

이 회의 보고서 세 번째 조는 한국독립에 관한 방안을 명시하고 있다. 제3조 한국은 4개 항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을 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세운다.

2.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위해서 남한을 점령하고 있는 미국과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이 공동위원회를 조직한다. 미소공동위원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적 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한다. 공동위원회의 결정사항은 소련, 중국, 영국, 미국 정부에게 보고

하여 참고하게 한다. 

3. 신탁통치하기 위한 방안을 만드는 것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역할인데 이에 조선임시정부와 조선민주주의 단체가 참여한 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동안 4개국 신탁통치이다. 이에 대한 협약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에 4개국 정부와 공동으로 참작할 수 있게 제출되겠다.                                   

4. 남북 조선 간의 모든 문제와 북의 소련 사령부와 남의 미국사령부 간의 제반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2주 이내에 미국과 소련사령부 대표회의가 소집될 것이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된 한반도 신탁통치에 관한 보고서는 한반도를 반탁과 신탁운동의 소용 도리로 몰아넣었다. 암살과 테러의 연속이었다. 그 첫 희생자는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송진우였다. 


일제가 물러난 후에 한반도에 들어온 또 다른 외세는 소련과 미국이었다. 그런데 한반도의 여론은 미국보다 소련에게 훨씬 우세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소련은 조선사람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자주적인 정부를 형성하게끔 내버려 두어도 친소 공산정권이 한반도에 정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반면에 미국은 상해 임시정부는 물론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화와 같은 조선사람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금지하면서 자국정부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려고 노력했다.  반탁과 신탁이 우파와 좌파의 극렬한 대립으로 발전하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1. The Bomb didn’t beat Japan. Stalin did.: Have 70 years of nuclear policy based on a lie?; Ward Wilson, FP May 30, 2013


1. 고하 송진우; 해방 최초의 암살사건

고하 송진우(나무위키)

송진우는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에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극우파 자객 한현우 등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 난지 겨우 나흘 만이었다. 송진우는 누구이며 이 사건의 배경은 무엇일까? 


송진우는 1890년 6월 11일 전라남도 담양군 고지면에서 태어났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청 나라가 해결해 주고 대원군을 텐진에 구금시킨 다음 고종과 민비를 복권시켜 허수아비로 앉혀 놓고 청나라가 조선을 직접 지배하던 시대였다.


6세 때부터 그는 당시의 대 성리학자인 기삼연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기삼연은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송 씨 문중의 식객이 되어 동리 소년과 청년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특한 송진우는 성리학에 심취되어 성리학자가 되려고 했다고 한다. 1904년 15세 되던 해에 고흥 유 씨 유자와 결혼한 후 1905년에 전라남도 장성에 있는 김부식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다가 그해 말에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 송훈은 아들에게 영어를 배울 것을 권했다. 1905년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던 해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나라는 이미 기울어졌다. 우리가 정치를 잘못한 죄도 있지만 왜인들의 신학문이 우리를 크게 압박할 것이야. 왜인들은 일찍부터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그것으로 모든 무기를 장만하고 제도를 고치었으므로 놀랄만한 강국이 된 것이야. 우리는 꿈을 꾸고 있었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바깥세상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통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알려는 생각조차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러는 동안에 왜인들은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고 배우고 하여 산업을 발달시키고 문화를 깨우쳤으니 우리가 그 놈들을 따라갈 수 있겠는 가. 이 얼마나 통분할 노릇이냐?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는 않아. 우리만 노력한다면, 싸움만 아니하고 일심협력하여 신문명을 받아들인 다면, 다른 민족이 1백 년에 할 것을 20년이나 30년에 회복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길은 하루라도 빨리 일인들이 배운 것 이상으로 신학문을 배워서 학문으로나 무기로나 산업으로나 우리가 앞서서 그들을 이기는 길 뿐이다. 배우는 일-이보다 더 큰일이 없어. 무엇보다 영어를 먼저 배워야 한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은 개명한 지식인이었고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성리학에 심취되었던 아들 송진우는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듣고 크게 방황했다. 며칠 동안 울에 갇힌 사자처럼 집 근처를 배회했다. 산으로 들로 물가로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온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다시 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신 학문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1906년 4월 담양군 창평 의월리에 있는 영학숙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송진우는 이곳에서 김성수를 만나게 되었다. 순창이 고향이고 처가가 담양에 있었던 김병로도 창평 영학숙에서 알게 되었다. 이후 김성수와 송진우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1908년 10월, 둘은 같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세이소영어학교에서 일년동안 공부했다.  이듬해에 긴죠중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하고 1910년에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했으나 한일합방의 충격으로 일단 귀국했다. 그는 스승 기삼연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에게 피살당한 후였다. 상경하여 윤치호와 이상재를 만나 독립을 위한 거사를 호소했으나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나라를 잊은 슬픔과 분노에 방황하는 아들을 1910년 11월에 아버지 송훈이 상경하여 참고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달랬다. 아버지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듬해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메이지 대학 법학부로 옮겼고, 김성수는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김병로는 송진우 보다 2년 먼저 메이지 대학을 졸업했다. 재학 중에 조선유학생들과 함께 학생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김병로와 함께 잡지 학지광의 발행에 참여하고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유학생 단체를 통해 안재홍, 여운형, 이광수, 김상덕, 최남선, 장덕수, 조만식, 김준연, 김도연, 백관수, 현상윤, 신익희, 김약수, 조봉암 등을 만나 서로 알게 되었다. 1915년 7월에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6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6년 김성수가 중앙학교를 인수하는 것을 도와주고 김성수가 교장, 송진우가 교감이 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국사를 가르쳤다. 


1917년, 남산에 단군왕검, 세종대왕, 이순신을 모시는 삼성사 건립을 추진했으나 일제가 그곳에 조선신궁을 지어 무산되었다. 같은 해에 중앙학교 10대 교장이 되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계기로 그는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1918년 12월 이후부터 김성수와 함께 독립선언과 3.1 운동을 기획했다. 한상윤, 최린, 최남선 등도 이 숙직실을 근거지로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독립운동의 방책을 논의했다. 그래서 천도교와 기독교의 궐기가 확정되었다. 그러면 그가 3.1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1917년 1월 17일, 송진우가 윤치호를 찾아가 국제연맹, 파리강화회의 참여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치호는 송진우에게 국제연맹이 창설되어 실제 활동을 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며 조선문제는 파리평화 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열강 중 아무도 조선문제를 거론하여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국제여론에 밝은 윤치호와는 달리 아직 젊은 송진우는 국제연맹과 파리평화회의에 크게 기대를 걸었다. 파리평화회의에 파견되었던 김규식이 아무 성과 없이 돌아오자 송진우는 크게 실망했다. 


1918년 10월 상하이에서 장덕수가 보낸 밀사와 12월에는 미국에서 이승만이 보낸 밀사와 만났다. 상하이와 미국에서 온 밀사는 파리 평화회의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정식으로 제출될 것인 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 대표가 평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존재감을 만방에 알릴 만한 거사가 국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충고에 따라 송진우와 김성수 그리고 여러 동료들은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이를 위해서 학생과 시민이 참여하는 단체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1919년 송진우는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민족대표 명의의 독립 선언문에 대한 기본방침을 결정했다. 1919년 2월 최린등을 통하여 천도교 지도자들의 전국 궐기를 계획하였고 이승훈과 같이 기독교 지도자들의 거국적인 참여를 독려하였다.  송진우는 기독교 세력과 천도교 세력이 서로 협력하도록 비밀리에 만나게 해 주었다. 그는 민족대표 48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항일활동을 조선사람 밀정이 일본경찰에 밀고하여 1919년 3월 중순에 중앙학교 교정에서 일본 형사에게 연행되었다. 일본경찰의 고문에도 김성수와의 관련을 적극적으로 부인하여 1년 7개월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무죄가 획정되어 1년 반가까이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되었고 송진우는 옥중에서 발기인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1920년 10월 석방되어 고향 전남 담양으로 내려가 요양하고 있었다. 그동안에 학교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하다가 감시하던 일경에게 발각되어 다시 그해 겨울을 유치장에서 보냈다. 1921년 2월 상경하여 동아일보사를 주식회사로 만드는 일을 하고 9월에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1923년 1월 이후 조만식 등과 함께 20개 이상의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했다. 동아일보를 통하여 이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에도 참여하여 3월에는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4월 2일에 동아일보가 친일 정치깡패 박춘금 등이 만든 각파유지연맹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에 격분한 박춘금 등이 김성수와 송진우를 요정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육혈포를 탁자에 놓고 거금 3만 원을 요구했다. 김성수는 이를 거부했으나 송진우의 타협으로 합의했다. 그런데 이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져 동아일보의 명예가 실추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송진우는 1924년 4월 25일 사장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10월 21일 고문에 선임되었다. 박춘금은 대구에 있는 병영의 급사로 시작하여 일본에서 여러 가지 막일을 하다가 일본조직폭력배와 인연을 맺어 조선인 노동자 단체를 만들어 조선인 노동자를 착취하여 일본 기업과 관청에 협조하는 방식으로 이득을 취하는 조폭이었다. 그는 동경에서 일본중의원에 당선될 정도로 당대에 출세한 친일파 인사 중에 한 사람이었다. 


1925년 6월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같은 해 8월에 열리는 제1차 범 태평양회의 취재를 위해서 하와이로 출발했다.  조선인 대표단은 김활란, 서재필, 신흥우, 유억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송진우는 이들과 동행했다. 1925년 8월 하순에 귀국한 그는 ‘세계 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제목의 논문을 12 회에 걸쳐서 연재했다.

1926년 3월 5일 소련 국제농민본부에서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3.1 운동 7주년 기념사를 번역하여 동아일보에 실었다.  공산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총독부는 3월 7일 동아일보를 무기 정간 처분했다. 주필이었던 송진우와 발행인 김철중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4월 21일 동아일보가 속간되었다. 4월 25일 순종이 죽었다. 송진우는 3.1 운동과 같은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그는 6월에 대규모 시위를 위해서 정인보와 함께 순종이 남긴 측령을 허위로 작성하려다가 발각되었다. 곧이어 6.10 만세 운동을 배후에서 조정하였다 하여 경찰에서 취조를 받았다. 1926년 11월 소련국제노동부 3.1절 기념사 관련 항소에서 패소하여 6개월 형이 획정되어 복역을 시작했다. 1927년 2월 천황 즉위식 특사로 석방되었다.


1927년 10월 동아일보 6대 사장에 임명되었다.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씨에게 서울까지 올 차비를 마련해 주었다. 


그해 12월부터는 기자를 파견해서 만주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사정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송진우는 함북지역 지국장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도중 신간회 내의 공산주의 계열의 조종을 받은 하수인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을 총 망라하여 결성된 방대한 항일 단체였다. 1931년 5월에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1932년까지 브나로드 농촌계몽운동을 지원했다. 1928년 4월 문맹퇴치운동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했다. 브나로드는 사회주의 농촌계몽운동의 러시아 말이다. 1928년 10월 장제스가 총통에 취임하자 취임식 취재를 위해서 주요한을 파견했다. 이후 송진우는 장제스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29년 김성수를 비롯하여, 편집국장 김준연, 주요한 등이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송진우는 홀로 동아일보를 이끌어 나갔다. 


송진우는 김좌진 장군에게 독립군 3-4백 명을 무장할 수 있는 1만 원가량의 군자금을 4차 레에 걸쳐서 비밀리에 보내주었다고 한다. 


1930년 4월 제1회 동아마라톤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기념한 특별호에 미국 ‘네이숀’지 주필의 축사를 게재했다. 일본 당국은 이를 구실 삼아 4월 16일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다. 9월 2일 속간되었고 송진우가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되었다. 1931년 5월 이순신 유적 보존운동을 시작하였다. 조만식, 안재홍, 김성수와 함께 충무공유적지 보존 홍보활동을 하며 충무공 알리기에 힘썼다.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이 일어났다. 송진우는 이 사건은 일본이 조선사람을 위하는 척하면서 중국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이 서로 반목하게 하려는 술책이라고 주장하고, 중국 상하이 임정에 사람을 보내 이를 알렸다. 조선 사람들이 조선에 사는 화교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들의 재산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일이 벌어지자,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설과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흥분한 국민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위문금을 모아 피해를 입은 화교들에게 전달했다. 서범석 기자를 사건 현장에 파견하여 국제연맹조사단에게 진상을 알려주게 하였다.  후일 장제스는 송진우에게 ‘친인선린’이라고 적힌 감사패를 전달했다. 동아일보를 통해서 들어온 모금으로 행주의 권율 도원수 사당을 증수하였다. 1932년 아산에 있는 이 충무공 현충사를 완공하였다. 여기에 이상번 화백이 그린 영정을 봉안하였다. 7월부터 9월까지 2개월 간 단군성전 순례에 현진건 기자를 특파하였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우승했다. 남기용은 3등을 했다. 둘 다 일본을 대표하여 출전했다. 8월 13일 자 동아일보는 지방판 조간 2면에 손기정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다. 손기정 우승 기사를 쓴 이길용 기자는 사장의 지시에 따라 일장기를 손기정의 사진에서 삭제했다. 8월 25일 자 2면에 다시 일장기를 삭제한 손기정의 사진을 실었다. 8월 13일에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 손기정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손으로 지웠는 데 일제는 이를 모르고 있다가 8월 25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알게 된 것이었다. 일제는 8월 29일 자부터 동아일보를 무기정간 처분하였다. 총독부는 송진우 사장의 사퇴를 요구했고 그 압력에 못 이겨 11월 11일 결국 사장직에서 사임했다. 1937년 6월 9일 동아일보 고문으로 취임했다.


1939년 12월 김활란이 미국에서 돌아와 이화전문학교 설립을 추진할 때 창립위원으로 적극 참여했다. 같은 시기에 총독부는 다음 해 2월까지 동아일보 폐간을 강요했다. 1940년 4월 송진우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 정객들에게 동아일보 폐간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돌아오는 중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1940년 8월 10일 송진우가 끝까지 동아일보 폐간에 저항하자 총독부는 발행인을 바꾸어 폐간했다. 동아일보는 송진우를 폐간위원회 대표로 선임하여 그에게 폐간작업을 맡겼다. 그는 주식회수 작업, 직원들에 대한 보상 등을 비교적 공정하게 하여 주주와 직원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1940년 송진우는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에 이 핑계 저 핑계로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그에게 총독부는 불이익을 주거나 처벌하지 않았다. 일본은 국민총력연맹이라는 전쟁을 위한 조선과 일본 국민 총동원조직을 만들었다. 이에 협조하라는 일본정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일본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서 큰 국책회사 사장직을 맡아 달래든가 외곽단체 책임자가 되어달라고 했으나 병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1941년 12월 8일 하와이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송진우에게 학생들에게 전쟁에 지원하라는 권유유세를 강요했다. “동아일보는 내 입이요 내 귀며 호흡하는 코요 손과 발인 데, 그 전부를 잘려버린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 가!”하며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이광수, 최남선 등 당시의 이렇다 하는 애국지사들이 학도병 권유 연설에 나선 것에 비하면 대단한 용기였다. 


송진우는 경성방송국 편성과 PD로 근무하고 있는 양제헌과 어린이 방송프로와 가정물의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송남헌을 통해서 단파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송진우 외에도 김병로, 이인, 허헌, 여운형, 김성수 등도 단파방송을 들었고, 1942년에는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도 들었다. 미국의 소리 한국어방송은 미일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6월 13일 이승만에 의해서 단파라디오로 송출되었다. 이에 근거하여 송진우는 안재홍, 여운형, 장택상과 함께 암암리에 일본이 망할 것이라고 조선사람들에게 알렸다. 1942년 말부터 1943년 봄까지 경성방송국의 단파방송 도청으로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는 관련된 인사를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1943년 1월 주식회사 동아일보 청산위원회를 해체한 다음 다른 주식회사 동본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선출되었다. 동본사는 부동산 관련 사업을 한다고 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송진우가 항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고 항상 요주의 인물로 감시했다. 그는 이를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환자처럼 행동하거나 마작 같은 도박을 하면서 폐인 행세를 했다. 1944년 안재홍이 찾아와 독립운동을 일으키자고 했다. 송진우는 “긴박한 시국에서는 침묵밖에는…”이라고 하며 이불을 펴고 누워서 중병환자 시늉을 하며 꿈쩍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안재홍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방금 미국은 전 세계를 영도하고 있다.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응하여 이미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연맹)의 해체조차 단행하였다. 소련은 미국에 잘 협력할 것이다. 한편 중경의 임시정부는 이미 연합열강의 정식 승인을 얻었고, 그 배하에 10만의 독립군을 옹유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10억 불의 차관이 성립되어 이미 일억 불의 전도금을 받고 있는 터인 즉, 일제가 붕괴되는 때에 10만 군을 거느리고 10억 불의 거금을 들고 조선에 들어와 친일 거두 몇 무리만 처단하고, 그로써 행호시령(호령을 내림)하면 조선인은 원래 출입 우세를 잘하니까 만사는 큰 문제없이 해결될 것이다.”


송진우는 임시정부를 과대평가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임시정부에 대한 정보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1944년 가을, 그는 사람을 시켜서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고 1945년 5월경 구미 측의 동향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미국이 일본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싸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송진우는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했다. 1945년 초, 일본은 동년 10월에 반체제 인사들을 모아다가 경기도 야산으로 끌고가 총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1945년 8월 8일, 러시아가 만주 관동군을 공격하고 나가사끼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지기 하루 전, 마지막 조선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의 밀사가 송진우를 찾아와서 행정권을 그에게 넘겨줄 테니 일본인들의 재산을 보호해 주고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밀사가 송진우에게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자, 송진우는 “아니 그럴 일 없소.  당신은 내게 일본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모욕적인 일입니다. 나는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우리의 자유를 갈망해 왔으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였고, 용감하게 당신들의 고문실에서 맞섰습니다. 그런 나에게 당신은 지금 당신들의 구원자가 되라고 하고 있다니, 꺼져, 어리석은 작자들아!”라고 호통을 쳤다. 


1945년 8월 11일, 경기도 지사 이쿠다가 다시 송진우에게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보호하는 조건으로 총독부 행정권을 이어받을 것을 종용했으나 통치권을 이어받을 개체는 중경의 임시정부(상해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피난)라고 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1985년 8월 14일, 니시히로 다다오 총독부 경무국장은 송진우를 총독부로 오라고 하여 일본의 패전을 알리고 조선반도의 치안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또다시 거절했다.

1945년 8월 15일에 여운형은 일본에게 5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일본 측이 이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일본 측과 합의를 봄으로써 총독부로부터 그의 건국준비위원회가 행정권을 이양받는다. 


여운형은 송진우에게 같이 일 하자고 설득하려 했으나, 송진우는 총독부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을 기관은 임시정부라고 하며 이를 거절했다. 송진우는 1945년 9월 7일,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맞서기 위해서,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임정봉대론을 주장했다. 일본으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을 정통성을 가진 기관은 중경 임시정부라는 뜻이다. 


1945년 9월 16일에 장덕수, 허정, 백남훈, 김병로, 조병옥, 윤보선 등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했다. 송진우는 당수에 해당하는 수석 총무에 추대되었다. 한민당은 오늘날 민주당의 원조이다. 한민당은 국민대표준비위원회(국준) 내의 우파 정당을 통합했기 때문에 건국준비위원회는 한민당 창당으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초기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 안재홍, 박헌영이 운영했으나, 박헌영의 주장에 따라 건준이 정부 형태의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조되자 우파인 안재홍이 빠져나왔다. 송진우는 안재홍의 한민당 입당을 원했으나 당원들의 반발로 이를 포기했고 안재홍은 조선국민당을 창당했다. 


여운형이 송진우에게 건준 참여를 종용했던 반면에 송진우 또한 여운형의 한민당 참여를 권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좌우 합작을 원했고 송진우는 좌파를 위험한 존재로 생각했다. 


송진우는 우파의 결집을 추진하면서 한민당의 국민적 인식을 높여야 했다. 이를 위해서 임정은 물론 이승만도 한민당에 참여하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1945년 10월 20일 송진우는 환국지사 환영위원회의 조직을 주도했다. 이 위원회의 첫 수혜자는 이승만이었다. 그가 귀국하자 그는 윤치영 등 여러 독지가들의 사재를 모아 돈암장을 빌려 그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이승만에게 한민당 입당을 요청했으나 거절당 했다. 


미군정청은 마지막 총독 아베의 귀국을 연기하고 종래의 일본관리들을 그대로 고용하여 38선 이남의 통치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국내여론이 들끓었다. 송진우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송진우는 여운형과 박헌영의 인민공화국은 미군정 외의 또 다른 통치기관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 군정에 조선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미군정고문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런데 여운형과 조만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민당 인사였다. 여운형은 자신의 의견이 반영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위원 자격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조병옥이 경찰청장, 장택상이 수도 청장에 임명되었다. 둘 다 한민당 인사였다.  1945년 10월 10일 미군정정관 아널드는 미군정 외의 정부를 표방하는 모든 기관은 위법임을 선언했다. 미군정이 인공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식 선언이었고 한민당과 협조하여 남한을 통치하겠다는 신호였다. 따라서 인공과 한민당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후 하지 중장은 중요한 군정의 정책을 한국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경우에 송진우를 통하여 그렇게 하도록 했다. 하지는 미군정에 우호적인 보수인사들이 많이 있다는 점에 크게 고무되었다. 송진우와 한민당은 그들의 홍보기관을 통하여 여러 가지의 점령 정책을 국민에게 전달하거나 좀 더 한국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도록 다듬었다. 

 

1945년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진이 조국으로 돌아왔다. 군정 당국은 중경 임정을 비롯한 모든 조선 독립단체를 조선 국민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군정이 중경 임정에게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는 지침을 주었는 데도 김구와 임정일행은 임정이 한반도를 대표하는 조직처럼 행동했다. 11월 3 일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한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귀국한 김구와 임정요원들은 조선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경교장에 여장을 풀었다. 1945년 11월 5일, 송진우는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에서 김구를 만나서 임정과 김구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표시하고 노고를 극찬했다. 같은 날에 국민대표준비회의 대표자격으로 장택상을 대동하고 후원회 기금 900만원을 전달하였다. 평소에 임정에 대한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임정봉대론을 주장하고 임정을 과대평가했던 그로서는 당연한 행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임정 요인들은 그 후원금 안에 친일파의 돈이 들어 있다고 하며 국민대표회의 사무실로 찾아와 전액을 반납하려 했다. 국민대표준비회의 요인들과 임정요인 사이에 언쟁이 오가다가 주먹싸움이 되어 사무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송진우가 ‘정부가 받는 세금 속에는 양민의 돈도 들어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것이요. 이런 나라 세우기 같은 큰일에 그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 아오’라고 하여 사태가 수습되었다. 


11월 24일 송진우는 김준연과 함께 임정요인을 예방하였다. 11월 하순에 애국지사위원회를 결성했다.  1945년 12월 1일 동아일보 8대 사장에 위임하였다. 


1945년 12월 초순 송진우는 소련영사관으로 영사 알렉산드르 폴란스키를 방문하여 북한지역에서의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의 북한 주민에 대한 그들의 탄압을 항의하고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소련군정과 공산주의자들의 북한주민 인권유린 문제, 소련군 병사들의 부녀자 겁탈, 민간 재산 약탈, 산업시설 소련반출 문제등이 심각했다. 남한에도 소문이 파다했으나 이를 항의하는 남한 정치인은 아주 드물었다. 


1945년 12월 중순 송진우는 한민당을 대표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을 서울 관수동 근처 국일관으로 초대하여 환국 환영 준비회를 겸한 간담회를 열었다. 임정 측에서는 김구, 김규식,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조완구, 엄항섭 등이 참석했다. 한민당에서는 송진우, 조병옥, 장덕수 등이 마주 앉았다. 

이때 이미 한민당과 임정은 친일파 척결문제, 미군정에 대한 입장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송진우와 한민당은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유화적이었다. 새나라 건설에 도움이 된다면 그들의 재력과 능력을 십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통치하고 있지만 미국은 일제와 달라서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건설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은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믿었다. 한편 김구와 임정은 미국은 또 다른 외세에 불과하며 임정만이 한반도를 통치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미군정에 협조하려는 한민당과 미군정을 부정하는 임정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친일파지요.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 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 말에 노기 띈 말투로 장덕수가 “해공(신익희)!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 국내에 있던 사람은 다 친일파라니? 임정요인들은 그런 색안경을 쓰고 우리 국민을 보고 있었나?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렇다면 해공, 난 어김없는 숙청 감이군 그래”하고 말했다. 송진우가 나서서 신익희를 타일렀다. 


“여보 해공! 표현이 좀 안 됐는 진 모르지만 국내에 발붙일 곳 없이 된 임시정부를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 소위 인민공화국 작자들이 했을 것 같아? 천만 에요. 해외에서 헛고생을 했군. 해방된 우리 국민들에게 임시정부를 떠 받들도록 하는 것이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의 법통 때문이지 노형들 개인을 위해선 줄 알고 있소?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을 해 먹고살았는지 여기서 모르고 있었는 줄 알아?  국외에서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국내사람들 보다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들 있기나 해요.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쳐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은 삼가 하도 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여운형과 박헌영이 주도하는 인공의 대세를 꺾기 위해서 송진우와 한민당은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으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이승만과 김구를 포섭하려 했으나 오히려 관계가 어렵게만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을 즉시 독립시키지 않고 4개국이 최대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아일보 오보 사건이나 그 내용이 조선사람들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만들게 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와 상의해서 신탁통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자세한 내용을 불식하고 전 국민은 신탁통치를 또 다른 외세의 지배로 받아들여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에 찬성하는 사람은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신탁통치 방안이 최초로 국내에 알려진 시기는 1945년 10월 23일이었다.  이날 매일신보는 미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말을 인용하여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방안을 보도했다. 이후 좌우할 것 없이 반탁의 입장을 강력히 표명했다. 미국의 신탁론에 대한 반대여론이 분분하자 미군정 장관 아널드는 “빈센트의 말은 개인의 의사일 뿐 미국 정부의 방침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반탁에 대한 여론은 진정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한반도 신탁통치는 원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국무성의 생각이었다. 아마 극동국장 빈센트가 신탁통치 방안을 언론에 흘려서 한국민의 민심을 맛보려 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짖다. 왜냐면 신탁을 제안했던 미국이 갑자기 반탁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난 지 하루만인 12월 27일 낮에는 전국 초등학교교사 400명이 서울 수송초등학교에 모여 반탁을 결의했다. 12월 28일 라디오 방송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임정은 경교장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개국 원수에게 보내는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날 오후 서울 기독청년회관에서 대한 독립 촉성전국청년연맹 주최로 42개 단체 대표자가 모여 반탁대회를 개최했다. 조선혁명당, 신한민족당, 경북인민위원회, 보성전문학생회 등의 반탁결의 성명이 있었다. 거리 곳곳에서 가두 연설회가 열리고 그날 밤에는 서울 시내에 반탁전단이 살포되고 포스터가 붙었다. 


송진우는 근본적으로 신탁통치를 반대했지만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무조건적인 신탁통치가 아니고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와 상의해서 신탁통치 방안을 결정한다는 내용임을 알고 미군정과의 협조하여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가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송진우의 신탁통치에 관한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탁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여운형도 같은 태도를 보여서 찬탁주의자로 몰렸다. 

송진우 타도 등의 벽보가 붙기 시작했다. 그의 신변이 위태함을 걱정한 허정이 하루는 송진우에게 “괴 벽보가 나붙는 데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송진우는 “관상쟁이가 그럴 염려는 없습니다.”라고 했다고 웃어넘겼다. 


동아일보기자가 송진우에게 사람들이 찬탁론자로 몰고 있다고 알려주자 무척 불쾌하다고 그 억울함을 표현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을 새나라 건설에 무척 소중하게 여겼다. 암살당할 무렵 그는 주한 미군의 한국 주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 보다 조직이 더 잘되어 있기 때문이다.” 

3년 6개월여 후인 1949년 6월 29일에 미군은 500여 명의 미군 고문관만 남기고 남한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일 년 후 인공은 남한을 전면 침략했다. 그가 얼마나 정국을 꽤 뚫어 보고 있었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2월 29일 송진우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의 요청으로 군정청에서 면담했다. 미군정 자문위원인 그에게 임시정부와 우익 진영에게 신탁에 대한 설득을 부탁했다. 이때 미군정은 송진우에게 경호원을 붙여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그날 밤 김구의 숙소인 경교장에서 각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신탁통치 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각계인사로 구성된 중앙위원 76명 중에는 박헌영, 홍남표, 이극로, 김세용 같은 좌익인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좌익인사와 좌익단체들의 반탁 담화가 줄을 이었다. 12월 30일에는 40여 개의 좌익단체가 모여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를 갖고 신탁통치치안철폐요구성명서를 채택했다. (경교장 모임에 참석했던 강원용 목사의 증언)


이와 같이 이 모임에는 각 정당대표들, 좌익, 우익, 중도파, 공산주의자들까지 다 참석했다. 이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한반도를 신탁통치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송진우도 12월 29일 밤부터 12월 30일 새벽 4시까지 김구를 만나고 있었다.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을 벗어버리자”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목맨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독립정부를 우리 손으로 세워야 한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하였다. 강원용 목사는 이날 경교장에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는 김구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구는 반탁은 물론 이 계제에 미군정의 통치권을 임정이 인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송진우는 미군정과 반목하면 공산주의자들만 이롭게 한다고 하며 김구를 설득하려 했다. 신탁문제도 무조건 반대하지 말고 미군정과 상의해서 해결해 나가자고 제안했다. 물론 송진우는 미군정이 김구가 원하는 대로 통치권을 임정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송진우는 근본적으로 미국의 도움 없이는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없다고 믿었든 것처럼 보인다. 송진우의 항변에 좌중은 크게 놀랐다. 김구는 송진우가 신탁에 찬성한다고 몰아붙였다. 물론 송진우는 자신도 신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여러 번 강조했지만 미군정과의 협조를 주장하는 송진우를 반 민족주의자로 몰아갔다. 좌중의 분위기는 김구 쪽이었고 송진우는 외톨이가 되어갔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격렬한 토론이 끝난 다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행정권을 발동하여 현재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공무원과 경찰들이 임정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자는 결의를 했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거리로 나가 반탁운동을 벌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막강한 군대와 어마어마한 국력을 가진 미국의 군정에 아무 힘도 없는 임정이 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어리석은 수작이었다. 송진우는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설득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는 5년 이하이고 우리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일이며 신탁기간이 5년이 될 수도 있고 3년이 될 수도 있는 문제’이니 여유를 갖고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고 촉구했다.


송진우는 1945년 12월 30일 새벽 4시경 경교장을 떠나서 원서동 자택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1945년 12월 어느 날 한현우가 송진우의 호위경관 정종근을 찾아왔다. 와세다 대학 출신인 한현우는 유학시절에 정종근과 안면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송진우 경호원으로 추천해 줄 것을 부탁했다. 거절했으나 또 찾아왔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경호원 유근배가 “일본 유학시절에 호의 호제하던 사이라면서 왜 그냥 돌려보냅니까?”하고 물었다. 정근배는 “저 사람 미친개야, 미친개는 주인을 물 수도 있거든”라고 대답했다. 


한현우는 1918년 강원도 고성군 간성 읍에서 태여 났으나 본적은 평안북도 중강진으로 되어있다. 소학교는 조선에서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금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12월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도메이 통신에서 일하다가 1943년 5월경 재일조선인 유학생 5천 명이 참여하는 조선독립연맹이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의 목적은 태평양 전쟁의 전범 제1순위 도조 히데키 반대운동이었다. 이 조직을 결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인물은 나카노 세이고와 고이치 호즈미였다. 나카노 세이고는 일본 쇼와시대의 언론인, 중의원 의원을 지냈고 동방회의 당수였다. 우파 정치인이었으나 태평양전쟁 전범 1순위인 도조 히데키와 대립했다. 고이치 호즈미는 어떤 인물인지 기록을 찾을 수가 없으나 아마 나카노 세이고와 같이 반 도조 히데키 정치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현우는 이 두 정치인을 존경했고 이들의 지도를 받았다.  한현우의 조선독립연맹도 항일 단체라기 보다는 반 도조 일본 우파가 원하는 도조의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하는 운동이었을 것이다. 자연히 이 단체에 대한 일본 경비청의 감시가 심했다. 한현우는 이를 피하기 위해서 고이치 호즈미의 도움을 받아 일본국체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본황실중심주의(반 도조히데키)를 표방하다가 1944년 3월에 비밀이 탄로 되어 인심교란죄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4년을 받고 귀국하여 1945년 2월 25일경부터 강원도 춘천 처갓집에서 칩거하다가 일본이 항복한 지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 서울에 나타났다.  한현우는 도조 히데키 암살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체포되었다고 주장했다고 하지만 죄목이나 형량이 너무 가벼웠던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현우는 1993년 2월 23일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해방 전에 귀국하여 격몽의숙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에서 따왔으며 자신은 숙장이었고 송진우 처단에 가담한 부하들은 모두 숙생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1994년에 KBS가 방영한 “정치 암살의 희생자들 고하 송진우[추억의 영상]”에서는 한현우 지휘하에 송진우 암살에 동원된 단체를 “화랑단”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10명 안팎의 젊은이들을 모아 화랑단이라는 애국활동을 빙자한 테러 단체를 만들어 적산가옥(일본인들의 집)을 강탈했다. 적산가옥 갈취는 화랑단 활동자금마련이 목적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그의 축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는 소영웅주의가 발동하고 있었다.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 전 1945년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는 국가의 조직인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 바꾸었다. 미군정이 인공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통치권을 넘겨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에 적극적이었던 인공과 여운형의 국민적 인기는 대단했다. 


이에 주도권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면 한반도가 공산화될 것을 우려한 송진우는 미군이 진주하기 하루 전에 국민대표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미군정에 대해서 국민을 대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민족진영을 대표하여 해외 민족독립지사들의 귀국을 도와주기 위한 조직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송진우와 여운형은 신탁에 대해서는 돌다 신중론을 폈다. 


1945년 9월 16일 송진우는 한국국민당과 고려민주당을 포함한 1600여 명의 우익 인사들과 함께 천도교 기념관에서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에 대한 기대가 컸던 민심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한민당의 정강은 많은 국민의 원망을 샀다. 거기에 12월 말에 신탁통치 문제까지 대두되어 정국은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새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당분간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훈정론과 신탁에 대한 신중론을 주장하는 송진우에 대해서 여론은 좋지 않았다

 

한현우는 1945년 11월 초부터 화랑단 단원들에게 ‘소위 민족의 지도자라는 작자들이 민족의 일치 단결하여 새나라 건설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서로 갈라져서 싸움을 일삼고 있다.  이 분열의 원흉은 우파 두목 송진우와 좌파 두목 박헌영, 여운형이다. 이 두 사람(송진우와 여운형)만 처분하면 이 혼란스러운 정국을 바로잡을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나서서 정국을 바로잡아 대한민국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단원들을 설득했다.  송진우 경호원이었던 유근배도 화랑단에 가입하여 한현우와 같이 활동했다. 


김구와 송진우가 경교장에서 언쟁을 벌리고 있는 동안 1945년 12월 29일 저녁 한현우와 그의 일당 화랑단원들은 내일 새벽 손진우를 원서동에 있는 그의 자택에 침입하여 암살할 모의를 하고 있었다. 

한현우는 부하 유근배, 김의현, 이창희, 김인성, 백남석, 신동운과 함께 범행을 계획하고, 유근배, 김의현, 이창희, 김인성을 동원하여  1945년 12월 30일 새벽 5시 그들의 근거지를 떠나서 송진우의 원서동 자택 담을 넘어 잠든 지 겨우 2시간 된 승진우를 6시 15분에 권총으로 사살했다. 그들이 쏜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향년 56세였다. 


1946년 4월 8일 경기도경찰부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 등 일단 7명을 체포했다. 경찰 발표에 의하면 한현우는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를 돕고 있었다고 한다.  송진우에게 권총을 발사한 범인은 유근배와 김의현이었다. 권총은 한현우의 지도자로 알려진 전백이라는 사람이 제공했다고 한다.  유근배는 송진우의 경호원이었다. 1946년 9월 3일 권총을 제공한 전백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현우는 송진우를 암살한 이유를 “송진우가 근대국가와 민주정치를 가져보지 못한 우리 민족은 선진국의 지도를 받아야 하고, 신탁통치도 선진국의 지도를 받는 훈정의 의미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민족분열을 획책하는 자는 힘으로 숙청하는 것이 애국애족이며 승리라는 생각으로 암살에 착수했다” 라고 말했다.  


1947년 2월 14일 한현우는 최종언도공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1950년 한현우는 마포형부소에서 복역 중 북한군에 의해서 석방되었다. 9.28 수복 후에 묵한군에 의해서 석방된 죄수들의 자수를 권했으나 한현우는 자수하지 않았다. 한때 그가 부산시내를 배회한다는 소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여성과 결혼하여 일본에서 살았다. 


1960년대에 그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왜 군사혁명이 일어났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 그는 30여 차례의 서신을 교환했다. 박정희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하여 “유엔군 절대 주둔 필요”등을 주장했다. 이때 박정희와 그를 서로 연락하던 사람이 전병민이었다. 전병민은 한현우의 사위이고 김영삼정부 때 청와대 비서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한현우와의 관계가 밝혀져 며칠 만에 사퇴한 인물이었다. 한현우는 박정희가 전과를 말소해 주었기 때문에 호적에 송진우 암살 범행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반공활동과 칼럼 등을 기고한 공로로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한현우는 배후설을 부정하고 단독범행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김구의 사주를 받았다는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2월 29일 경교장 모임에 참여했던 겅원용목사는 “장택상이 술자리에서 미군정 인사에게 <송진우 암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 <경교장에 모인 날 싸워서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겁니다”라고 회고했다. 장택상이 미군정 인사에게 김구 배후설을 이야기하기 전에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도 이미 송진우 암살 배후를 김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찰청장이었던 조병옥은 훗날 미국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송진우가 우파 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시카고 대학 역사학 교수이며 한국전쟁의 기원, 한국전쟁을 발간한 부르스 커밍스 또한 김구 배후설을 주장했다. 


송진우가 죽은 다음날, 12월 29일 경교장 모임에서 결의한 대로 임정이 주권을 행사하여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인 공무원을 접수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임정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발표되자 1945년 12월 31일 미군정에 근무하던 한국사람 1500명이 서울 시내 모 맹아학교 운동장에 모여 미군정을 보이 코트 했다.  서울시내의 일곱 경찰서장들이 미군정에 사표를 제출하고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것은 임정이 미군정을 부정하고 남한을 통치하겠다는 쿠데타였다. 


1946년 1월 1일 하지는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호출하였다. 이시영, 신익희, 조소앙, 엄항섭 등도 불려 갔다. 하지는 명령을 거역하면 죽이겠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김구는 카펫에 올라가서 여기서 죽겠다고 하며 대들었다고 한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에 의하면 하지는 김구에게 추방시키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지에게 경고를 받고 돌아온 김구는 공무원들의 파업 철회를 종용했다.  

 

김구의 미군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임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지도자가 암살될 때마다, 미군정은 김구를 배후로 의심했다. 한현우가 김구의 사주를 받았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마당에 미군정의 김구 배후 설은 그들의 의도적인 김구 깎아내리기 정책일 수도 있지 않나 의심해 본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경험하며 성장했고 조선을 강점했던 선진 일본에서 교육받은 송진우는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를 통해서, 외국에 나가지 않고 국내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이끈 가장 훌륭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태평양전쟁 동안 일본의 가진 압력에도 굽히지 않고 전혀 일본에 협조하지 않은 보기 드문 애국지사였다. 그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으며 학도병 찬조 연설도 거절했다. 

임정봉대론을 주장했고 임정을 크게 믿었던 그로서는 한민당에 대한 김구의 태도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송진우는 미국과 미군정의 38 이남에서의 실질적인 힘과 역할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김구는 송진우의 충고를 알아들을 만한 국제정세에 대한 현실적인 안목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신생 대한민국을 위해서 가장 큰일을 했어야 할 분이 해방된 지 겨우 4개월 보름 만에 불한당의 권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잘 모른다.  


송진우는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역할을 꿰뚫어 보았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병처럼 퍼져 나가던 시절에 이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사상임을 알고 인공과 협조하지 않았음은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면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에 그가 살아서 미국과의 협조가 그의 설득으로 좀 더 현실적으로 이루어졌더라면 한국전쟁을 예방할 수도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참고

1.      You Tube: 정치 암살의 희생자들 고하 송진우[추억의 영상] KBS 1994.2.6 방송

2.      송진우(1890) – 위키백과

3.      한현우 – 나무위키

4.      한현우 – 위키백과

5.      동아일보: 광복 5년 사 쟁점 재조명 <1부>(17) 삼상회의 보도 강원용 증언 2009.10.9

6.      한겨레: 고하 암살범 한현우 증언(1) 199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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