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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Sep 13. 2023

만주사변 전후 암살사건들

장쩌린 암살에서  홍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까지


1.   장쩌린 암살사건(황고둔 사건)


1920년대 중국은 군벌 시대였다. 개인이 조직한 군대가 일정한 영토를 점령하고 지배했다. 장쭤린은 봉천파 군벌의 총수로서 베이징-텐진 지역과 만주를 지배하고 있어서 가장 강력한 군벌이었다.  그는 일본 관동군으로부터 무기와 군수품 원조를 받아 그 세력을 확장해 나 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가 건설한 남만주 철도 중 장춘-뤼순 간의 철도와 그 지선, 이와 관련된 모든 권리를 러시아 로부터 넘겨 받았다.  그리고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1905년부터 일본 군대가 만주에 들어와 있었다. 일본은 또한 라오동 반도 조차권을 러시아로부터 양도 받게 되었는 데 이 지방을 일본은 관동이라고 불렀고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관동군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만주의 조선무장세력을 제거하기위해서 자신들의 원조를 받고 있는 봉천 파 군벌과 협정을 맺었다. 1925년6월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쓰야는 만주 펑텐에서 펑텐성 경무국장 위전과 조선인 단속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는 데 이를 마쓰야 협정이라고 한다. 요지는 “1. 중국 관헌은 재중 조선인에 대해 호구를 엄격히 조사하고 연대책임제로 단속한다. 2. 무기를 소지한 조선인의 조선내 월경을 금지하고 위반자는 검거하여 총독부 관헌에게 인도한다. 3. 항일 조선인 단체를 해산하고 갖고 있는 무기를 몰수한다. 4. …조선인 소유의 총기 및 화약을 수시로 수색해 전부 몰수한다. 5. 일제가 지명하는 항일단체지도자를 채포하여 일제측 관헌에게 인도한다. 6. 중일양국경찰은 서로 국경을 넘지 말고 필요한 경우 서로 통보한다.” 등이었다. 이러한 형식의 협정은 펑텐성에 이어 지린성과 하얼빈 등 만주 각지의 성으로 번져 갔다. 중국 당국은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규를 제정했다. 이로 인해서 조선인 사회는 큰 억압을 받았고 독립운동은 일본과 중국 양측에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정부는 만주의 군벌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고 필요한 요구를 하는 방법으로 국익을 챙겼다. 그러나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고위 장교들은 불만이었다. 


쑨원(손문)을 계승한 장제스(장개석) 는 군벌로 갈라져 있는 중국을 통일하고자 북벌을 하고 있었다. 1928년 4월, 베이징을 점령하고 있던 장쭤린의 봉천 파 군벌은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게 밀 려 베이징이 위험한 지경에 도달했다. 일본은 이기회를 이용하여 장쭤린에게 5개 철도를 부설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에 만주의 철도는 일본이 관리하고 있었다.  길회선(길림-회령), 연해선(길림-해림), 길오선(길림-오상), 장대선(장춘-대뢰), 조색선(조남-색륜) 이상 다섯개의 철도를 일본의 차관을 받아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철도를 일본이 관리하고 철도주위의 지역이 일본 관리로 넘어가기 때문에 일본의 만주 진출은 한결 수월 해진다. 아무리 일본의 도움을 받고 있던 장쭤린도 이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만철총재 야마모토 조타로의 끈질긴 압박에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거절하다가 일본 측이 “만약 이 계약에 응하지 않으면 장쭤린의 철수에 남만주 철도를 쓰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하자, 5월 중순경에 장쭤린은 4개 노선 건설에 합의했다.


원하는 것을 얻은 일본은 장쭤린의 봉천 파 군벌(동 북군)을 만주로 불러들여, 중국 전역을 통일하려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으로부터 만주를 보호하려 했다. 베이징 지역에서 후퇴하여 만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쭤린은 자기가 철수하면 중국이 공산화 될 것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일본정부는 5.18일 이에 대응하여 장쭤린과 장제스 에게 각서를 보냈다. 만주를 넘보지 말라는 협박이었다. 국민혁명군이 경진지구(베이징과 천진지역)에 도착하기전에 장쭤린의 봉천파 군대가 철수하는 것은 인정하나, 국민혁명군의 베이징입성은 저지하며, 국민혁명군과 봉천군이 경진지구에서 교전하거나 가까워진 상황에서 봉천군이 퇴각을 결정했을 때는 일본군이 개입하여 무장을 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장쭤린은 이러한 일본정부의 태도에 대해서 대노 했다. 물론 장제스도 이 각서를 일축했다. 


일본정부의 장쭤린 회유가 실패하자 관동군이 일본정부의 허락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28년 5월18일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장쭤린만 죽여 없애면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 장쭤린을 죽여 없애면 그 아들 장쉐량이 반드시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며 그 부하들 역시 소동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치안 유지 명분을 이유로 삼아서 붕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거에 만주를 점령 한다 음 다른 사람을 찾아 우리 군대의 보호 아래 정부를 조직한 다면 만주 문제는 한번의 수고로 영원함을 얻는 길이 될 거이다.”라고 주장 했다.

한편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조타로는 극비리에 동원령을 내려 병력을 봉천에 집결시켰다. 동북지방에 들어오는 국민혁명군과 봉천군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서 였다. 국민당 정부 외교부장 황푸가 적극적으로 항의했고, 미국과 영국 등도 내정간섭이며 중국의 주권침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조타로는 병력을 금주(라오닝성 진거우시)에 보내고 관동군 사령부를 봉천으로 옮기는 등 계획대로 진행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관동군의 조치가 포츠머스 조약(러일전쟁으로 인한 일본과 러시아의 조약)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지적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반대했다. 다나카 총리는 만주에서 치안 유지에 혼란이 오지 않는 다면 봉천군대가 만주로 후퇴하는 것을 용인하며 무장해제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관동군에게 아직 서두를 필요가 없고 장쭤린의 위치를 유보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관동군 고위 장교들은 크게 실망했다. 


관동군은 일본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하기 시작했다. 5월23일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베이징 주제 각국 외교사절들이 모여 경진지구에 전쟁(북벌 국민혁명군과 봉천파 군벌의 싸움)이 파급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일본 요시다와 공사가 각국군대가 경진선(북경-천진), 경봉선(북경-봉천) 철로의 관내 전 구간과 철로 연변 20리 이내에서의 남북군대가 절대 작전을 하지 못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각국공사들은 지위를 넘는 조치라고 반대했으나 일본 관동군은 1개 사단을 동원하여 병력을 철도 주변에 배치했다. 


장쭤린은 일본과 약속했던 철도건설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일본 측은 장쭤린에게 차관 500만원을 억지로 쥐어 주자 길돈선 종점에서 도문강까지 연장하는 공사만 하겠다고 하고 나머지는 전부 거절 했다. 장쭤린이 만주로 철수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아예 일본 측에 차관을 돌려주고 길돈철로 연장 및 차관계약을 파기하려 했다. 5월30일, 장쭤린은 야간 군정부 수뇌부 회의에서 총퇴각을 결정하고 철수준비에 들어 갔다. 6월2일 요시자와가 장쭤린을 방문하고 만약 일본에 협조하면 장제스를 물리쳐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장강을 사이에 주고 중국을 반으로 나누라면서 그 조건으로 길회선 집괴 허가, 호로도항건설중지, 타통선 개축 공사를 요구했다. 장쭤린은 단호이 거절했다. 

“일본인은 친구가 될 수 없다. 남의 집이 위급할 때 목을 조르니 말이다! 나 장쭤린은 정말 이런 방법은 싫다! 나는 동북인이다. 동북은 나의 고향이고 조상과 부모의 묘소가 다 여기에 있다. 내가 동북을 팔아먹을 것 같은 가? 나 장쭤린이 매국노 욕을 먹으란 말인가? 남 두려워할 것도 없다. 빌어먹을, 다 필요 없다!” 라고. 사태가 이쯤 되자 관동군 고위 장교들은 장쭤린을 제거해야 일본이 만주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조타로는 다케시다 요시하루 소좌를 시켜 베이징에서 장쭤린을 암살하려 했다. 장쭤린 암살을 처음으로 주장했던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갑자기 베이징에 가려는 다케시다 소좌를 수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고모토에게 술을 먹였다. 술에 취한 그는 그가 장쭤린을 죽이려고 베이징에 간다고 실토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정부가 아니고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며 자기에게 맡기라고 했다.  그리고 고모토는 장쭤린을 철로위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황고둔을 장소로 정하고 특공대로 하여금 열차를 습격하는 방법과 열차 폭발을 놓고 망설이다가 흔적 은폐가 용이한 폭발로 결정했다. 그는 이토 겐지로라는 민간인에게 “있으나 마나 한” 중국 민간인 3사람을 물색하여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이토 겐지로는 대륙 낭인 안도 다카나리와 접촉하여 중국인 3명의 포섭에 나섰다. 안도는 중국인 실직군인 유대명에게 “쓸데없는” 중국인 3명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6월3일에 마약 중독자 오귀생과 장문재를 꼬여서 목욕시키고 이발을 하게 하여 음모에 끌어들였다. 고모토는 독립수비대 2대대 4중대장 도미야 가네오를 거사에 가담하게 하였고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공병20연대도 끌어들였다. 관동군으로 하여금 장쭤린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하였다. 공병대는 6시간 만에 해당지역에 폭탄 설치를 마쳤다.


장쭤린 암살에 대한 풍문이 떠돌았다. 이 소문은 장쭤린에게도 들렸다. 그러나 그는 설마 했다. 장제스 군대의 북진을 피해서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만주 봉천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1928년6월1일 베이징을 열차를 타고 떠난다고 발표했다.  길림성과 흑룡강성군대가 가는 길 철도 연변을 지키기로 했다. 이때 봉천 헌병대 사령관 제은명이 일본수비대가 황고둔역 근처에 보초를 세워 행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을 포착하고 장쭤린에게 비밀전보를 쳐서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으 나 장쭤린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나 6월1일에 전용열차를 대기시켜 곧 출발할 것처럼 하다가 돌연 다음날로 연기했다. 그리고 정작 6월2일에는 그의 다섯번 째 부인의 일행만 타고 출발했다. 6월3일 오전1시 장쭤린은 대원수 정장을 입고 베이징 자택을 출발하여 정양문 동역에서 봉천 행 특별열차에 올랐다. 그의 심복들이 동승했는 데 그 중에는 일본고문 마치노와 키가도 있었다. 마치노는 1923년 예편된 이후부터 그의 고문으로 일했고 장쭤린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장쭤린의 제거를 강경하게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장쭤린은 그의 암살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그를 열차에 탑승하게 했다고 한다. 열차안에는 1개중대의 병력이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전6시30분에 열차가 텐진에 도착했다. 판푸와 마치노가 덕주에 있는 장쭝창을 만나러 간다고 하차했다. 장쭤린의 사돈이며 전 국무총리 진원평도 부관이 일본영사관에서 9시에 사카니시 리하치로와 함께 상담할 일이 있다고 하차했다. 이는 진일파인 진원평을 살려 두기 위한 일본의 배려였다. 대신에 창인화이가 이 곳에서 부터 장쭤린을 수행했다.


장쭤린이 탄 열차는 총20량이었다. 그는 10번째 칸에 타고 있었다. 이 열차는 서태후 전용열차였다. 내부는 호화로웠다. 큰 객실과 침실이 있었고 소파와 마작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후 4시 열차는 산해관에 도착했다. 그의 요리사 박풍전이 차려준 진수성찬의 저녁을 먹었다.  동승하고 있던 부인 마씨가 식사 후 “내일 아침밥은 집에서 먹을 수 있겠 내요.”라고 말하자, 양치를 하고 있던 장쭤린은 “기차에서는 멀 먹어도 맛이 별로 없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아.”라고 말했다. 식사 후에 그는 흑룡 강성 독군 우쥔성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동승한 동료 부하들과 마작을 했다. 6월4일 새벽에 열차는 황고둔 역에 도착했다. 이 지방 부하 군벌 장징후이가 마중을 나와서 집안식구와 문무 관헌들이 봉천신차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황고둔 역에서 200미터 가면 노도구-삼동교가 나온다. 이곳은 남만철도와 경봉철도가 만나는 지점이고 일본 관리하에 있었다.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봉천으로 가는 경봉철도를 달려온 열차에 타고 있었다. 열차가 황고돈역을 출발하여 봉천으로 향했다. 그는 전망 칸으로 옮겨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우쥔성과 교위처장 온수선등 3명이 있었다. 우쥔성이 날씨가 추우니 옷을 더 입을 것을 권했다. 시계를 보더니 곧 도착할 것이니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그때가 오전5시23분이었다. 열차는 산동교를 지나고 있었다. 그 순간 두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관동군이 다리에 매설한 600킬로그램 폭약이 장쭤린이 타고 있던 특별전망차와 식당칸 사이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고모토의 지시를 받은 공병중위 후지이 데이쥬가 육교 아래 오른쪽에 두개의 폭탄을, 왼쪽에 한 개를 설치한 다음 만철 전망대까지 전선을 연장해 놓고 그곳에서 열차가 접근하는 것을 주시하고 있다가 적시에 스위치를 눌러 열차를 폭파했다. 대 성공이었다. 장쭤린이 타고 있던 차량은 산산조각이 나서 10미터나 하늘로 치솟았고 남은 것이라 고는 바퀴 두개 밖에 없었다. 우쥔성은 머리에 파편이 박혀 즉사했다. 마 부인은 다리에 경상을 입었다. 사망자가 20명, 부상자가 53명이었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온수선이 장쭤린에게 다가가 보니 그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옷이 너덜 너덜 찢겨 있었고 목에 깊은 구멍이 나 있었으며 온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응급처치를 한 다음 20분만에 차에 태워 원수 부 동원 소청루의 거실에 모신 다음 영국인 의사를 불러왔으나 상처가 너무 심해서 구제 불능이었다. 오전9시 장쭤린은 “내가 상처가 너무 심하다. 잘못될 염려가 있으니 쉐량(아들 장쉐량)을 빨리 봉천으로 오도록 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54세였다. 그러나 봉천성장 짱스이는 그저 부상이라고 발표하고 장쉐량의 시체를 봉천으로 옮겠다. 폭발사고 30분 후에 봉천교섭총서 일본과 과장 관경택은 봉천주재 부영사 고노에게 이 사건은 일본의 소행이라고 항의했다. 고노는 이 사실을 신임 총영사 하야시 규지로에게 보고했다. 하야시는 일본이 저지른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아침8시에 그는 관경택과 합동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도중 우치다 영사가 “교동 남쪽으로 30미터 떨어진 곳에 편의대원 두명이 있는 데 수비대에 의해서 살해당했습니다. 같이 가서 현장검증을 해봅시다.”라고 말했다.


가보니, 손에 소렌제 폭탄을 쥐고 혁명군 복장을 한 두 사람의 건장한 시신이 있었다. 나이는 30세 전후로 보였고 머리는 빡빡 밀었는 데 가슴에 서너 방의 총을 맞아 숨져 있었다. 시체 옆에는 몽천 밀집모자 2개와 신발 한 짝이 있었다. 옷 주머니에서 두통의 편지가 나왔다. 고급편지지위에는 “국민혁명 관동 초무사 용지”라고 씌어 있고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동지여 노력을 경주하자.”라고 적혀 있었다. 우치다는 이 시신이 장제스의 편의대 소속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대륙낭인 안도 다카나리를 시켜 포섭한 중국인 마약중독자 오귀생과 장문재였다.


우치다 영사는 관경택에게 사건을 장제스의 편의대가 폭탄을 투척한 것으로 결론 짓자고 요구했으나 관경택은 동의하지 않았다. 폭탄 투척이기에는 폭발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6월5일 오전 9시 일본 봉천영사 하야시는 모든 관련자들을 모아 문제의 중국인들을 살해한 시간을 4일 새벽4시로 입을 맞추었다. 중국측은 같은 날에 단독으로 현장을 조사했다. 봉천 현장에 파견한 공병창 러시아 기술자 로미도프와 다얼니는기술자들이 대량의 폭탄을 교량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관경택은 또한 두명의 사체에서 많은 주사바늘 자국과 가슴의 총상 자리를 칼로 오려낸 흔적을 발견하여 그들이 장제스의 편의대원이 아님을 증명했다. 

만철의 야모토 총재와 다나카 총리는 장쭤린을 이용하여 일본이 만주에서 국익을 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피살 소식에 크게 실망했다.


관동군과 일본군부는 군의 소행이 아님을 일본정부에 납득시키려고 갖은 허위사실을 보고 했으 나 결국 9,10월에 일본정부도 모든 것이 관동군이 일본정부의 허가없이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나카 총리는 진상조사를 하고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등 관련자들을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각료들이나 여론은 이 사건으로 일본군의 위상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천황도 이에 동의했다. 관련자들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나카 총리는 천황의 신임을 잃어서 결국 사임했다.


장제스의 아들 장쉐량은 6월17일 봉천으로 들어와 봉천성 독판이 된 다음 6월17일 아버지 장쭤린의 사망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장쭤린의 자리를 승계한 장쉐량은 1929년 장제스의 국민당정부와 합류하여 위안 스카이 사망 이후 10년만에 중국이 통일되었다. 장제스의 북벌은 중국을 통일했 다기 보다는 옛날의 군벌이 각성을 지배하는 구조로 그 냥 남아있고 형식상으로 중앙정부에 속해 있었다.  아버지를 계승하여 만주를 지배하는 장쉐량은 아버지를 피살 한 일본에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여론 또한 배일 사상이 지배적이었고 국민당정부도 이에 편승하여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을 전개했다. 그는 일본이 차지하고 있는 여순-대련의 조차지 및 남만주철도의 회수, 일본 영사 재판권 철회, 일본에 의한 철도 부설권 및 탄광개발권 확장에 대한 반대,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가옥임대료 및 소작료 인상 또는 계약갱신 거부 등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서 만주에서의 일본인의 입지가 위축되었다. 더구나 국민당정부의 만주철도 포위선 건설계획은 일본이 경영하고 있는 만주철도의 이권을 위협했다. 


업 친데 덥 친 격으로 1929년 세계경제공황이 일본 경제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남만주 철도 영업도 부진 했다.  본국의 정계와 군부에서는 불황의 타계책으로 만주 침략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장쭤린 피살 사건을 주도했던 관동군 고위층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배일운동에 수세에 몰리자 만주를 침략할 궁리를 하게 되었고 그 중에 하나가 1930년 만보산 사건이었다. 

참고: 나무위키 황고둔 사건  



2.   만보산 사건과 조선일보기자 김이삼 피살


김이삼은 1930년1월 김좌진장군 장군 암살사건을 소상히 보도했다. 그는 만주 통이었다.  동어일보 특파원으로 시작했지만 언제부터 인가 조선일보에도 취재한 기사를 보냈다. 서로 극심한 경쟁관계에 있던 양대 신문은 만주의 소식을 김이삼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가 보낸 만주에 대한 기사는 가장 빠르고 믿을 만했다.

김이삼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으며 일본국적을 취득한 인물이었다. 그의 공식직함는 조선일보 길림성 창춘지국장 겸 동아일보 길림 특파원이었다. 어느 날 일본 관동군 일본영사 다시로 시게노리가 만보산 사건에 대한 조작된 정보를 김이삼에게 주었다. 김이삼은 현지에 가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확인도 하지 않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본사에 특급전보로 보냈다. 


만주에 이주한 조선농민들은 중국인 지주의 소작인으로 농사를 지었다.  원래 19세기 말부터 조선의 가렴주구에 못 견뎌 이주한 농민도 상당수 있었지만 일제의 이주 장려 정책으로 조선인 인구가 부쩍 늘어 만주에는 100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중국의 지주는 좀 특이 했다. 땅주인이 직접 소작인을 관리하지 않고 한 농민에게 땅을 불하하고 그 농민이 소작인에게 땅을 나누어 주어서 농사를 짓게 하는 제도였다.


일본당국은 중국인 하오융더(학영덕)를 매수하여 만주 창춘(장춘)시에 장롱도전공사를 설립하게 했다. 물론 그가 이 회사의 지배인이 되었다.    1931년 4월16일 하오융더는 만보산지방 지주 11인과 그들이 소유의 미개간지 200ha에 대해서 10년 동안 관리할 권리를 가지는 소작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조선농민 이승훈 등 8명과, 개간을 하면, 10년동안 농사지을 권리를 주는 임대이전 계약을 맺었다. 만보산은 길림성 창춘에서 서북쪽으로 30 키로 떨어진 곳에 있다.  이 계약은 창춘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유효 하다는 조항이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하오융더는 정부허가가 나오기 전에 조선인들과 조차계약을 했다. 


이승훈은 만주 각지에서 조선인농민 180명을 모집했다. 개간지역 근처에는 이통하(이통 강)라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학영덕은 개간토지와 이통하 사이에 수로를 파게 했다. 수로는 많은 중국인 토지를 통과해야 했다. 수로 공사가 이들 토지에 많은 피해를 유발하자 중국인 토지 주인들이 반발했다. 주민들이 현당국에 탄원했고, 개간이 정부의 허가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당국은 공사를 중지를 명령했다.  그래도 수로공사를 계속하자 중국측의 창춘공안국 순경 이 출동하여 수로공사를 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체포했다. 이후 창춘 시 당국은 수차례에 걸쳐서 타협안을 제안했다. 대체로 조선인들의 철수를 전제로하고 토지계약에 대한 배상과 체포한 조선인 석방이었다. 일본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만주군벌 장쭤상에게 사건해결을 부탁했다. 그는 시안사건으로 유명한 장쉐량의 아버지 장쭤린의 의형제로 만주지방군벌의 원로였다. 장쭤린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서 만주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1928년 일본관동군 대좌 고모토 다이사쿠의 음모로 그가 타고 있는 열차가 폭파되어 피살 되었다. 장쭤상은 일본군이 호시탐탐 만주를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정보원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큰 분규 없이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다. 대치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경찰이 충돌하고 중국주민과 개간하고 있는 조선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서 분쟁이 생기면 일본이 만주로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결국 수로공사는 일본경찰 보호 하에 6월말에 끝났다.  


그러나 장마를 우려한 중국인 400여명이 7월1일 수로 약 2리를 매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7월2일 창춘 일본영사관은 무장 경찰관 15명을 파견했다.  중국 측은 경찰 300여명을 파견했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 영사관은 무장경찰을 증파했다. 


조선인 농민, 일본 영사관 경찰, 중국인 지주, 주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중국주민과 일본경찰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경찰의 보호아래 수로는 7월11일 수로는 복구되었다. 


1931년7월2일 발행된 조선일보 호외는 만보산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의 제목은 “중국 관민 800여명과200동포 충돌부상” “대고개밑 일봄 관헌 한시간여 교전-급박한 동포의 안위” “전투 준비중”등이었다. 김이삼이 일본영사가 준 과장된 허위 사실을 그대로 기사 화했다. 이어서 조선일보는 특보를 실어서 동아일보를 압도했다. 동아일보도 질세라 같은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이기사를 읽은 조선사람들은 중국인이 조선사람을 박해했다고 분노했다. 이가사를 읽고 일어난 최초의 조선거주 중국인에대한 폭력사건은 전라북도 이리(현 익산)에서 일어났다.  다음은 인천이었고 경성, 원산, 평양, 부산, 대전, 천안 등 전국 각지로 중국인 배척운동이 퍼져 나갔다. 평양, 부산, 천안에서는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중국인을 구타하고 학살하는 사건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동아일보는 오보임을 알렸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신영우, 동아일보는 서범석 기자를 창춘에 파견하여 진상조사를 했다. 


김이삼은 1931년7월14일 자 조선일보에 “일본의 정보에 근거해서 기사를 썼지만 오보였다”는 사죄 기사를 계제 했다. 그리고 지린(길림)일보에 창춘일본영사 다시로의 오인을 요점으로 하는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발표했다. 일본인 기자들은 조선일보 지국 장 김이삼이 기사를 날조해서 대참극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김이삼이 사건의 진상과 자기비판기사를 계속해서 내보내자, 일본영사 다시로 시게노리는 영사관 순보 박창하를 시켜 김이삼의 숙소 동아여관에서 그를 총살했다. 현장에 출동한 중국경찰이 그를 체포했다. 일본 영사관은 중국당국에 박창하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중국은 다시라 영사의 경질을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재조선 중국인 100여명이 사망하고 10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중 평양에 사는 화교가94명이나 되었다. 평양의 화교인구는 779명으로 서울 4,107, 신의주 3,640, 인천 1,774에 비하면 아주 적었다. 인천에서 피살된 화교는 고작 2명이었고 시위규모가 가장 컸던 경성에서는 한명애 화교도 죽자 않았다. 조선인 한 명이 피살되었다. 왠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평양에서는 일본조선군이 개입하여 폭도들을 자극했기 때문이 라고 한다. 일본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의 중국인들의 감정을 건드려서, 조선인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게 하여 일본군이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만주 침략의 근거를 하나씩 만들어 가고 있었다. 


1931년7월16일, 조선총독부는 만보산 사건의 조선내 보도로 인해서 발생한 화교 테러사건으로 중국인 100여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이 중국내에 전해지자, 만주와 상하이 등 중국내의 조선인이 중국인의 피습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중국내 조선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중국영토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3.    만주사변과 일본수상 하마구치 오사치 피격 사건


일본은 무사의 나라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시대를 열어서 200여년 동안의 전쟁없는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조선에서 유교를 도입하여 사농공상의 계급사회를 이룩했다. 그러나 조선이 선비를 가장 우위에 놓았던 반면에 일본은 무사를 일등 계급으로 우대했다. 조선이 문을 숭상하는 선비의 나라였다면 일본은 무를 숭상하는 무사의 나라였다. 조선의 양반에 해당하는 계급이 일본의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이다. 아무리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근대국가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전통은 변함이 없었다. 


전쟁은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로 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다. 요동반도 조차권은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러시아에게 빼앗겼지만 경제는 호황을 맞이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궁지에 몰아넣고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요동반도 조차권과 남만주 철도 경영권을 차지했다. 비록 배상금은 못 받았지만 만주의 이권은 일본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14년 일차대전은 일본에게 특수였다. 유럽국가들이 전쟁에 바빠서 생산라인이 마비된 상태였고 군수물자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품질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무기와 군수물자 수출로 일본은 호황을 누렸다. 그리고 독일이 유럽에서의 전쟁에 정신이 없는 동안 독일이 관리하고 있던 산동반도의 이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1918년 일차대전이 끝나고 전쟁특수가 가시면서 일본경제는 침체하기 시작했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이후 일본에도 의회 민주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 군부는 혁명으로 혼란한 시기가 중국 침략의 호기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군부와 민간정부의 샅바 싸움은 계속되었다. 1920년대의 대세는 민간정부의 민주화였다. 1918년에 하다 다카시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는 평민 출신이었고 중의원 제1당 정우회 대표 자격으로 임명된 의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 최초의 총리였다. 이전까지 일본은 번 벌(지방 영주 세력 즉 사무라이)과 원로들이 차례로 총리를 맡아 왔다. 평민출신인 그가 총리가 되기도 힘들었지만 총리가 된 후에도 원로들 그리고 군부 와도 잘 지냈다. 법으로 군인 출신이어야 임명될 수 있는 육군과 해군 장관을 제외하고는 전내각을 민간인 출신으로 하고 자유 평등의 개념으로 민주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그의 재임기간동안 한국과 관련된 두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3.1운동과 워싱턴 선언이다. 1919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조선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난다. 3.1운동 이후 그가 조선의 무단 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꾼 것은 기왕 민주적인 그로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만에서 비슷한 정책 변화가 이루어졌다. 대만 총독부와 조선총독부는 천황 직속이었고 군인만이 총독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그는 문민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군부의 반대로 조선에서는 민간 출신 총독이 임명되지 않았지만 대만은 문민 총독이 부임했다. 삼일 운동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유화 정책이 일본의 민주화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삼일 운동이 일본의 무단정치를 중단하게 했 다기 보다는 그 당시의 일본의 정황이 더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아깝게도 1921년 11월4일 그는 입헌정우회 교토지부 대회에 가던 중 나카오카 곤이지라는 청년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그의 단독 범행이었고 동기는 부유층과 결탁한 정계에 대한 증오였다고 한다. 그는 3년여 동안 총리직을 수행했고 향년 76세였다. 나카오카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15년으로 감형되어 1934년에 사면되어1980년에 병사했다.  


1920년대는 군함이 한 나라의 군사력을 대표하는 무기였다. 오늘날의 핵무기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일차대전 승전국인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5개국의 군함 만들기 경쟁은 전쟁을 우려할 정도로 극심해져 가고 있었다.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이들은 1921-1922년 2년동안 워싱턴에 모여 군축 회담을 했다. 특히 일본과 미국의 경쟁이 두드러지게 심했다. 일본은 이 회담에서 일본해군은 미국과 영국의 60%선에서 합의했다. 일본 해군은 이에 동의한 민간정부를 맹공격 했다.  더구나 제5항은 일본이 1915년에 배양정부 수반 위안 스카이에게 요구한 21가지 사항을 백지화했다. 여기에는 일차대전동안에 독일에게서 빼앗은 산동반도의 이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일본에게 빼앗겠던 산동반도의 이권을 워싱턴 회의 덕분에 돌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친일적인 배양정부가 장제스의 1차 북벌로 패망하고 2차북벌후 국민당 정부가 자주외교를 표방하여 중국에서의 일본의 입지는 점점 위축되었다. 그럴수록 일본내에서는 군부의 민간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갔다.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가고 있었지만 일차대전이 끝나고 유럽이 경제를 회복하면서 일본의 수출도 감소되었다. 경제침체로 민생이 점점 힘들어지는 만큼 민간정부에 대한 불신과 군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 갈수록 커졌다. 


그런데 1929년10월29일 뉴욕 증권시장이 붕괴하고 대공황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일본경제는 침체에서 공황으로 치 달았다. 일본 재벌들은 정부에 돌파구를 찾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1930년 4월22일 런던군축회담에서 미국 후버대통령의 강력한 요구로 일본의 대형순향함은 미국의 60%, 경순양함과 구축함은 70%로 줄인다는 데 합의했다. 이와 같이 서방국가들에게 쩔쩔매는 유약한 민간정부에 대한 군부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런던회담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군령부 참조 쿠사가리 에이지 해군 소좌(소령)가 “런던조약건을 사죄하고자 국민 앞에 죽음으로 보답한다”는 요지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군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1928년 정쭤린 폭살사건을 주도한 관동군 처벌을 두고 군부와 마찰했던 다나카 기이치 총리가 실각한 후 1929년 취임한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긴축재정과 대 중국 평화외교를 시행했다. 그리고 민간 정치인 와카쓰키 레이치로 전 총리를 런던군축회담 수석대표로 파견했다. 통상적으로 해군 장성들이 수석대표로 파견되었다. 해군 강경파와 야당인 입헌 정우회가 해군군축을 강력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축에 합의했다. 그는 일본이 미국과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금핵금(금 수출금지 해제)과 긴축재정은 경제공황을 푸는 데 악영향을 미쳤다. 경제가 좋지 않을 때는 국가가 막대한 자금을 시장에 풀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높은 대중의 지지로 총리직에 올랐던 그의 인기는 추락했다. 그에 대한 군부의 불만도 극에 달했다. 야당과 해군은 군통수권은 천황에게 있고 따라서 통수권은 실질적으로 해군이 행사해야 함으로 해군조약은 해군이 해야 마땅한 데 민간정부가 해군조약을 채결한 것은 위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함대 파(군축반대파)였던 가토 하로하루 군령 부총장이 사임하고 조약파(군축찬성파)  제독이 임명되었다. 추밀원에서도 원로인 사이도 긴모지의 찬성으로 런던군축 조약이 1930년 10월9일에야 가까스로 가결되었다. 


1930년 11월14일, 우파청년 사고야 도메오는 하마구치 총리가 천황의 통수권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도쿄역에서 그에게 총을 쏘았다.  즉시 도쿄제국대학병원에 옮겨져 장을 30%나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1931년 1월 21일에 퇴원했다. 그러나 상처가 악화되어 4월4일에 입원하여 5일 수술을 받는 도중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요양등 치료하려고 노력했으나 회복되지 않아 8월26일에 사망했다. (나무위키: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

봉천파 군벌을 이용하여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여 친일 허수아비 나라로 만들려고 했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장쭤린 암살사건으로 군부의 압력에 못 이겨 실각했다.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대령)가 육군상부와 정부의 허락없이 사건을 저지르고도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았고 오히려 총리가 물러나게 되자 만주의 장교들은 기고만장했다. 


장쭤린 폭사사건 이후 관동군 사령관이 혼조 시게루로 참모장이 이타가키 세이시로로 교체되었다. 이 때 이시와라 간지라는 인물이 관동군 작전참모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래에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할 것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주와 몽골을 점령해야 한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는 것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일본, 중국, 조선 삼국의 인민들이 평화로이 공존하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참모본부는 국제사회의 여론을 우려하여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청년장교들을 선동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1931년 중국의 사정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장제스 는 2차 북벌을 마치자 마자 경쟁세력인 광저우 파벌 후한민과 싸우고 있었고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좋지 않았다. 장강에 대홍수가 발생했고 이재민 구제문제로 국민장내에서 큰 갈등이 벌어졌다. 북반주철도인 중동로의 이권을 두고 장쉐량의 봉천 군벌과 소련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과 만주의 혼란스러운 정국은 만주 관동군으로 하여금 침략의 적기라고 믿게 하였다. 당시의 만주는 대강 러시아가 북만주의 이권을 일본이 남만주의 이권을 관리하고 있었다. 


간악한 이시하라 간지는 전쟁의 꼬투리를 잡을 사건을 꾸미기 시작했다. 남만주에 이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은 북만주에 이권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와의 충돌을 예상하여 대싱안링(흥안령) 일대에 스파이를 파견하여 조사를 하고 있었다. 대싱안링은 만주와 몽고의 경계에 남북으로 뻗어 있는 산맥이다. 1931년5월10일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는 도쿄를 출발하여 뤼순(요순)관동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봉천에서 받은 여권, 하얼빈에서 받은 여명학회 간사, 농학사라는 가짜 신분증을 가지고 관동군 참모부의 도움으로 대싱안링 지역의 조사에 착수했다. 그는 이스기 엔타로 예비역 상사, 백계 러시아인 시로카프, 안내하는 몽골인 3명을 데리고 6월6일 치치하얼을 출발, 대시안링을 남하하여 제심하 상류를 거쳐 색륜을 지나 7월3일 조남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6월26일 소악공부(대싱안링 부근의 도시)에 도착한 나카무라 일행은 대싱안(홍안) 둔간대 재3단(중국군부대)의 연병장 부근을 지나가고 있었다. 거동이 수상하다고 여긴 중국 부대원 왕병의가 여권 조사를 했다. 중국내 통행 허가증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부대 본부로 연행하여 심문하니 여행도중 비적에 쫓기어 여기까지 도망쳤다고 했다. 중국부대는 상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부대에서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허술한 군대식사를 주지 않고 읍내 식당에서 식사대접을 하는 등 27일 오후까지 귀빈대접을 해 주었다. 단장 조관오는 심양에 가고 없었다. 그날 밤에 단장대리 관옥형이 층장지에서 돌아왔다. 그는 그들이 간첩임을 의심하고 몸수색을 했다. 바지속에서 일본어와 러시아어로 된 군용지도 2개, 일기 두권, 그리고 필기록 3개, 은표 190원, 금패 2원이 나왔다. 일기에는 군사 작전에 필요한 정보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스파이가 틀림없었다. 돈간 공서의 지시로 정중하게 다루면서도 감시를 강화했다. 그러나 나카무라와 그 일행은 그 날밤 보초들이 잠든 틈을 타서 도주했다. 보초들이 그들을 뒤 쫓았다. 북쪽 산에서 한동안 총성이 들리더니 조용해졌다. 시간이 지나도 보초들이 돌아오지 않자 사무장 곽덕창이 병사들을 이끌고 수색에 나섰다. 곧 일본인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보초들은 외국인을 살해한 죄로 문책을 당할 까봐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단장 대리 관옥형도 역시 이 사건이 국제문제가 될 까봐 두려워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시체, 소지품, 그리고 말을 모두 소각시켰다. 증거를 남기지 않게 하기위해서였다. 지도, 일기, 필기록은 보존했다. 그는 상관에게 이 사건을 보고하지 않았고 병사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중국측은 외교로 사건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관동군은 자기들이 직접 중국측과 협상하여 만주를 침략할 구실로 삼으려 했고 일본정부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양측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동안에 6월26, 27일에 발생한 사건이 9월6일에야 중국측의 조사로 그 진상이 밝혀 졌다. 9월16일 경에는 양국이 대략 합의안에 동의하여 만보산 사건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사이의 제반 문제가 외교적으로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후9월18일에 관동군은 만주 침략을 감행한다.(나무위키: 만주사변, 나카무라사건)


1931년 8월 중순,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본국에서 육군 군사과장 나가타 데쓰잔 대좌, 보임과장 오카무라 야스지 대좌, 작전과장 이마무라 히토시 대좌, 작전과장 다테가와 요시쓰구 소장등과 회담을 하여 만주와 몽고 침략 계획을 세웠다. 만주로 돌아온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 중국과 충돌하였을 때 본국의 명령을 기다려서 행동해야 하는 가고 물었다. 혼조는 군사령관으로서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겠으 나 독단으로 전쟁하는 것을 주려워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본국 육군참모들과 합의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 계획은 관동군 사령부 조례 제3조에 의거하여 소동진압을 위해 관동군을 출동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로희토 일본 천황은 일본 육군이 계획하고 있는 만주와 몽고에 대한 무력침략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1931년 히로히토 천황은 미나지 지로 육군대신에게 군내부의 책동을 막으라고 명령했고 와카스키 레이지 총리에게는 중국과 친선을 유지하라고 당부했다. 전 수상이며 가장 원로 정치인인 사이온지 긴모치도 중국과 무력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의 호전적인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9월11일 천황은 다시 육군대신 미나지 지로를 다시 불러서 나카무라 사건, 만보산 사건등이 전적으로 중국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천황이 만든 군대가 중국을 중국을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엄중히 지시했다.  원로 정치인 사이온지 긴모치도 육군대신 미나지 지로에게 만주와 몽고는 중국 영토인 데 외무대신이 아닌 군이 끼어드는 것이 건방지다고 질책했다. 


육군본부도 할 수 없이 관동군의 계획을 말리기로 결정하고 9월14일 다테카와 요시쓰구 소장을 만주로 보냈다. 그는 관동군의 만주 침략에 찬성했으나 명령에 따라 만주로 향했다. 그러나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고 기차를 타는 등 늑장을 부렸다. 그 사이에 참모본부 하기모토 긴고로 중좌는 다테가와가 봉천에 도착하기 전에 거사를 해야한다는 전문을 비밀리에 보냈다. 


하시모토의 비밀 전문을 3통이나 받은 관동군 참모장등 지휘관들은 뤼순의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계루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들은 봉천에 모여 작전 실행 여부를 놓고 장시간 토론를 했으 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9월16일 오후 9시반부터는 술을 마시면서 토의를 계속 했다. 17일 오전 3시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나무젓가락을 세워놓고 오른쪽으로 자빠지면 중지, 왼쪽으로 넘어지면 결행 하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 했다. 3번 다 오른쪽으로 자빠졌다. 회의 결과는 중지였지만 젊은 강경파 장교들은 어정쩡한 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18일 오후 7시에 중지명령을 하달하려 온 다케가와 소장이 도착했다.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와 세이시로는 애주가인 그와 술을 마시며 그를 설득했다. 다케가와는 이타가키에게 “뒷일은 자네에게 맡긴다” 며 자신은 이 일을 묵인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만몽 침략을 떠들고 다니던 이시하라 간지는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계루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1931년 9월18일 오후 10시20분, 봉천 외곽 북쪽 7.5 키로 미터 떨어진 류타오후의 철도에서 폭발 사고가 났다.  그러나 사고 30분 후 특별열차가 시속 80 km로 무사히 이 지점을 통과했다. 관동군 독립수비대 2대대 3중대는 철도에 피해가 없을 정도의 폭발하게 해 놓고, 중국 동북군(장쉐량군)이 저지른 사건이라고 보고 상부에 거짓 보고를 한 것이었다.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의 명령이라고 하며, 독립수비대 2대대와 5대대에게 동북군 7여단을, 2사단 29연대에게 봉천 성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만주사변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뒤에 사건의 보고를 들은 혼조 관동군 사령관은 봉천 공격에 동의했다. 19일 새벽 1시7분 관동군은 도쿄 육군본부에 장쉐량이 철도를 폭발했다는 전보를 보냈다. 오후 6시 가나야 참모총장이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관동군 사령관 혼조에게 전해졌다. 혼조는 하얼빈을 공격하려는 이시와라 간지등에게 공격중지를 명령했다. 이에 이시하라 간지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벌렁 들어 누웠는 데 참모장 이타가키가 하얼빈 대신 길림성을 공격하자고 제안 했다. 그들은 봉천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길림성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길림성 공격의 표면상 명분은 길림서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보호였다. 관동군의 만주침략을 막으러 온 육본작전과장 다케나와 요시쓰구 소장 또한 이 길림성 공격 계획을 듣고 감탄했다. 그러나 사령관 혼조는 참모들의 끈질긴 설득에도 이를 반대하다가 참모장 이타가키와 3시간여의 독대 끝에 결국 동의하였다. 사령관의 제가를 받은 관동군은 완전히 고삐가 풀렸다. 


일본군 공격을 보고 받은 장쉐량은 일본영사에게 항의했다. 놀란 일본영사는 관동군에게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력 침략중단을 요구했다. 이 때 철도 폭파 사건에 참여했던 하나야 타다시 소좌가 군도를 뽑아들고 “이 칼이 아무것도 베지 않고 도로 칼집에 들어가는 일이 없을 것이요”라고 협박했다.

류타오후 철도 폭파를 해놓고 중국 동북군이 했다고 허위보고를 했던 2대대 3중대 105명은 즉각 북대영(장쉐량의 동북군 진영)을 공격했다. 방11시에 사령관 혼조는 철도폭발 허위보고를 받고 좀 망서리다가 철도를 보호하고 동북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9월19일 오전8시30분 조선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기다렸던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는 본국 찹모본부와 천황의 재가도 없이 1개 여단과 2개 미행중대를 만주로 보냈다. 조선은 일본의 영토였고 만주는 엄연히 중국의 땅이어서 천황의 허락 없이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병력을 이동한 것은 군법회의 감이었다. 


관동군 2사단은 봉천을 포위 공격하여 20일에 함락했다.  관동군 사령부는 뤼순에서 봉천으로 이동했다. 20일 오전 7시에 장춘을 점령하고 21일에 지린성(길림)이 함락되어 일본은 남만주를 점령했다. 장쉐량이 일본군과 싸우지 말고 후퇴하라는 지시를 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큰 저항 없이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9월22일 오전10시 각료회의가 열렸다. 고삐가 풀린 암말처럼 본국 정부의 허락없이 만주를 침략하고 조선군이 국경을 넘는 일이 벌어졌으니 육본과 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는 만주사변이 육군의 계획된 행동이라고 육군을 힐책했다.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데 조선군이 국경을 넘어 만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회의 중에 밝혀졌다. 

총리 와카쓰키 레이지로는 19일에 관동군과 조선군에게 사태를 확대하지 말고 원대복귀를 명령했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이미 만주에 들어갔고 관동군이 남만주를 함락한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와카쓰키 총리는 “뭐라고? 이미 만주로 들어갔단 말인 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예산에서 특별군사비를 지출할 필요가 있다.” 고 말 했다. 


이와 같이 와카쓰키 총리가 본래의 입장과 정 반대되는 태도를 취한 이유는 내각 중 한명이라도 사퇴하면 전 내각이 물러나야 한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경파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면 내각의 총 사퇴를 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와카쓰키 총리는 관동군의 남만주 점령과 조선군 월경을 인정해 주고 특별예산을 편성해 주면 만주침략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관동군은 멈추지 않고 러시아가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는 북만주로 진격했다.  

그러나 장쉐량은 일본군의 전면적인 만주 침략을 믿지 않았고 만약 일본군과 자신의 군대가 싸우게 죄면 자칫 병력손실로 인한 자신의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 도리 수 있으면 전면전을 피하려 했다.  그는 장쉐량의 군대는 정규군 30만 비정규군 18 만의 대군이었다. 중국군벌 중에서 최대 규모의 함대와 300여대의 전투기를 보유한 공군도 있었다. 그리고 봉천에는 병기창이 있었는 데 이곳에서 는 2만5천명이 대포, 포탄, 기관총, 소총, 탄환 등을 생산했다. 이에 비해서 관동군은 불과 1만5천이었다.  그런데 그는 대부분의 병력을 텐진과 베이징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일본의 도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종래의 도발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외무성은 만주를 점령하려는 의도는 없으며 그저 철도를 모호하기위한 출병이라고 장쉐량을 안심시켰다. 장제스도 일본의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무력침략을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가 1931년11월에 치치하얼이 함락된 후 에야 알게 되었다. 


장쉐량은 베이징 미국병원에서 장티푸스 치료를 받고 있던 중에 일본의 침략에 대한 보고를 받고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광동군의 도발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동북 군 (자신의 군대)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모든 무기를 병기고에 보관한체 스스로 물러날 것이며 일본군에게 최대한 협조하라.

2.      남잔 정부에 알려 국제연맹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도록 하라.

3.      뤼순으로 대표를 파견해서 일본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9월23일 봉천에 있던 동북군과 정부를 금주로 옮겼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관동군에게 근거지를 내준 동북군 장병들은 반발하여 무더기로 관동군에 투항했다. 국민당 난징정부는 국제연맹에 제소했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국제연맹은 리턴 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했다. 결론은 일본이 만주의 이권을 관리하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만주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국재연맹을 탈퇴했다.  


10월15일 관동군은 투항한 동북군을 앞세워 치치하얼을 공략했다. 마진산이 선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11월9일에 함락되었다.  국제연맹의 대응이 지지부진하고 일본의 목적이 만주 전체를 강점하는 것임을 알아차린 장쉐량은 베이징의 병력과 패잔병을 금지(진저우)에 집결시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화북군벌이 베이징을 공격하여 할 수 없이 금지의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 시켰다. 혼란에 빠진 동북군은 1932년 1월3일 조선군 20사단에게 진저우를 내주었다. 1932년 2월5일 하얼빈도 일본군 2사단에 점령되었다. 이렇게 일본은 북만주와 남만주를 차지했다. 


4.    김구의 암살 활동

 

일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1917년11월 15일,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러시아 제 민족의 권리선언”을 했다. 러시아내에 살고 있는 100여개의 소수민족에게 “민족자결권”을 원칙으로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취지의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다. 아시아의 모든 약소국 식민지 국가들은 전후 독립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동맹국 즉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트만 제국등의 식민지 국가들의 처리가 목적이었다. 반면에 레닌은 사회주의(공산주의)혁명을 통한 제국주의 타도가 목적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국가들은 윌슨에게 희망을 걸고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사방국가들에게 독립을 호소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반면에 레닌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서 자금, 무기공급, 고문 파견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물론 레닌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산주의 세력 확장이었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은 레닌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상해임시정부, 만주와 시베리아의 무력 항일 운동도 그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김립암살사건과 자유시 참변이후 레닌은 조선은 아직 사회주의혁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선언하여 원조를 끝었다. 사실은 한인독립운동단체의 극심한 분열로 원조대상이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중반의 상해임시정부는 사회주의 계열의 이탈과 레닌의 원조 중단으로 극심한 지금난에 봉착 해서 와해 직전이었다. 거기 다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자들은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에 시달렸다. 일본이 만주침략을 획책하기 위해서 만보산사건등을 조작하여 중국인과 한인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1926년12월14일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었다. 그 후 조직개편에 따라 주석, 내무부장등을 맡았지만 그는 난파선의 선장이었다. 임시정부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서 건물주로부터 고발당했다. 직원들, 잡일을 하는 급사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니 모두 떠났다.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도 제 밥벌이를 찾아 흩어졌다. 김구는 정부예산의 대부분을 재중국한인교민단체의 성금, 중국인 기업체에 근무하는 한인, 시장상인, 중국의 군인 또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한인들의 기부금에 의존했다. 

이승만은 1925년에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김구는 1928년부터 계속해서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승만은 지금의 일부를 보냈으나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이 대답은 항상 자신도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4-1박희광과 3인조 암살단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수많은 무장독립단체들을 모두 통합하여 대한통의부라는 일종의 군정부를 만들었다. 1924년 김구는 대한통의부 오동진 선생에게 만철연선지역의 친일파를 토벌하리는 특명을 내렸다. 오동진은 김광추를 대장, 박희광과 김병현을 대원으로 하는 3인조 암살단을 조직했다. 당시 만주에는 재만조선인민회 산하에 친일단체인 보민단과 일민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여순조선인민회 서기 정갑주는 여순고등계 밀정으로 악명이 높았다. 1924년6월1일 그들은 무순에 도착하여 대남관동흥려관이라는 여관에 투숙했다. 그날 밤 대장 김광추는 여관에 머물고 김병현과 막희광는 윤영기의 안내를 받아  정갑주의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자고있는 정갑주를 깨워 이불을 덮고 정갑주 부자와 이내에게 륙혈포를 쏘아 정갑주와 그의 아들은 즉사했고 아내는 중상을 입었다. 그 후 그들은 조선인민회 문간에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을 위해서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1924년 6월1일 암살현장 사형선고문>라는 방이 붙었다. 


3인조 암살단은 6월1일 무순에서 일을 저지른 후 6월4일 봉천으로 이동했다.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 회원인 최정규를 암살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한일 합방 당시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며, 남만주일대에서 만주보민회를 조직하여 무장항일세력탄압,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정보수집, 항일운동가 체포, 폭행, 살상하거나 일본에 넘기는 등 직업적인 친일파였다. 


6월7일 대낮에 그의 집에 칩입 하여 이불속에 뒤엉킨 가족을 향해 권총을 난사했다. 장모는 즉사했고 부인 허균은 중상을 입었고 며칠 뒤 사망했다. 정작 최정규는 책상 밑에 숨어서 살아 남았다. 3인조 암살단은 최정규의 집 부근의 전신주에 최정규를 암살한다는 내용과 의용군 제5중대 철도연선 토벌감독 김광추, 박상만(박희광의 예명), 김병현의 이름을 날인한 방을 붙였다. 

같은 날,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했다. 그 날밤 일본 고관들이 출입하는 고급 조선요리집 금정관에 둘러 독립운동자금 300원을 받아 나오던 중 중국 관헌에게 발각되어 박희광과 김병현이 체포되었다. 김광추는 도주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6월15일에 일본영사관 경대(경찰)에 포위되어 총격전을 벌리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외에 3인조 암살단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를 대련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1927년에 그녀가 스파이 활동을 그만 두었다는 기록과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데 1924년에 3인조 암살단은 박희광과 김병현이 체포되고 김광추가 사살되어 와해되었다. 이용구는 1912년에 사망했다. (위키피디아 박희광, 디지털 구미 문화대전 박희광)

*(디지털 구미문화대전에는 1924년 7월27일에 김추광이 사망하고 박희광과 김병현이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데 김추광의 사망일이 1924년6월15일로 기록되어 있어서 위키피디아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의 전말이 더 정확한 것으로 추측된다.)


4-2한인애국단과 이봉창 의거


파리 평화회의 조선대표파견과 무저항주의를 표방한 삼일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임정은 외교적 노력 보다는 무장투쟁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극심한 자금난으로 군대를 만드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요인 암살, 주요기관건물 파괴와 같은 의열단 활동과 대동소이한 무장항일운동을 목적으로,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자금은 김구가 해외동포들에게 호소하여 모았다. 시카고 공동회의 김경, 미주대한인공동회의 안창호와 김호, 하와이 대한인동지회의 이승만, 멕시코의 김기창, 쿠바의 임천덕이 성금을 보내왔다. 

이 시기에 처음 찾아온 인물이 이봉창이었다. 


이봉창은 1901년 8월10일 서울 용산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진규는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을 경영하면서 조선왕실의 건축을 청부 받을 정도로 상당한 자산가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투병과 홍수로 인한 손실, 그리고 사기피해가 겹치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고 한다. 한일합방이후 일본은 조선의 농지를 정리했는데, 토지소유자들로부터 신고를 받았다. 만약 신고를 하지 않으면 토지를 몰수했다. 그런데 토지신고가 무척 복잡하여 많은 농부들이 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인 사기꾼이 이봉창의 아버지에 접근하여 대신 신고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그를 믿고 토지문서를 내주었다. 그러나 일본인 사기꾼은 그 토지를 담보로 빚을 얻고 사라졌다. 그 후 이봉창의 집안은 가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봉창은 8살부터 서당에 다니다가 11세에 천도교 계통의 문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5세에 졸업했다. 첩을 둘이나 두었던 아버지는 첩과 딴살림을 차렸고 이봉창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형의 부부와 함께 살았다. 형 이범태가 버는 돈으로 근근 히 사는 형편이어서 상급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 내었다. 


당시 용산에는 일본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자연히 일본인들의 가게가 많았다. 집에서 가까운 원효로(원정 2 정목)에 있는 와다세이도라는 일본인 과자점 점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식사 제공하고 월급은 7-8원이었다. 17세에 현재 한강로 16번지에 있는 무라타 시게가쓰라는 약국으로 직장을 옮겼다. 식사제공, 월급 10원에 판매실적에 따라 배당금을 주어서 월 13-14원은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약국이 미리 약을 사다 놓지 않아서 애써 주문을 맡아와도 약이 없어서 팔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야 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났지만 그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언어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지 어느덧 일본사람과 구별이 안될 정도로 일본말을 잘했다. 그는 사교성이 좋아 사람들과 쉽게 사귈 수 있었다.  19세 되던 1919년 8월, 약국에서 일하며 잘 알게 된 철도국 영업과 서기 이오우에 사카이치의 도움으로 용산역 시용부로 일 자리를 옮겼다. 열심히 일해서 1920년1월에 정식 역부로 승진했다. 한달만에 전철수가 되고 10월1일에 바라던 연결수가 되었다. 많은 봉급을 받아서 생활에 여유가 생겼으나 얼마가지 않아서 일본인에 비해서 승진, 봉급, 상여금(보너스) 등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만이 마음속에 쌓였으나 더욱 열심히 일해서 일본인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자포자기하고 향락에 빠졌다. 유흥에 돈을 낭비하여 빚을 많이 졌다. 1924년 퇴직금으로 빚을 갚으려고 사직했다. 그러나 경기 침체로 곧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 후 1년 반 동안 직업 없이 보냈다. 그는 금정청년회라는 청년 봉사단체에 가입하여 지덕체 삼육의 장려, 상호부조와 야경, 위생 등에 관한 봉사활동을 하였다. 1925년 일제 최초의 근대적 인구센서스 조사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국세조사위원이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지사 가 추천하여 조선총독이 임명했다. 아마 금정 청년회를 후원하는 용산지역의 유지들이나, 용산역에 근무하던 일본인 동료들이 천거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국세조사 이후에는 잘 했다고 경성부청이 상금 10원과 나무잔을 상으로 받았다. 그는 그저 착실한 식민지 시민이었다.


당시에 일본 기업들은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서 일본 내지(본토)에서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인과 같은 임금을 준다고 광고했다. 조선인 차별에 불만이었던 이봉창에게는 귀가 솔깃한 소식이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갈 여비와 신분보증이 필요했다. 일본에 반항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신분보증을 해주는 사람이 있아야 했다. 그때 용산역에서 일할 때 친하게 지냈던 후지하타라고 하는 일본인이 퇴직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식모를 한 사람 데리고 가고 싶다고 이봉창에게 말했다. 이봉창은 조카딸 이은임을 소개해주고 그 임금을 가불 받아 여비로 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신분도 보증해주었다. 이 일을 어머님과 본인에게 의논했더니 다행히 승낙해 주었다. 1925년 11월 그는 조카딸 이은임을 데리고 후지하타와 함께 오사카에 도착했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그는 일본에 오면 곧장 취직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신분을 밝히면 대부분 거절당했다. 이듬해 2월에 어느 가스회사에 취직했다. 가스회사 직원들이 너의 이름은 발음하기가 힘드니 우리가 부르기 쉬운 일본 이름으로 바꾸라고 권유했다. 그는 이때부터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일을 시작한지 7개월 만에 각기병에 걸려 휴직해야 했다. 다음해 4월에 건강이 회복되어 잠시 간장가게에 취직했다가 1개월만에 가스회사에 복직했다. 그해 12월에 3-4일 결근했다는 이유로 2-3일에 한 번씩 쉬게 하자 화 가나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후 그는 부두노동자, 석탄 짐꾼, 공장잡역등을 전전하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실감했다.  부두에서 석탄을 나르는 일을 했다. 그는 3원 25전이라는 생애 최고의 임금을 받았다. 둘째 날 에는 25전 더하여 3원50전을 주었다. 그런데 넷째 날 부터는 갑자기 2원50- 2원70전으로 내려 갔다. 선배와 하숙 집 주인에게 어찌된 영문인 지 물었다. 기노시타 세이죠라는 일본이름으로 일을 시작했는 데 나중에 조선인임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차별에 화가 나서 부두 노동일을 그만 두고 1928년 스미모토 신동소 아마가자키 출장소의 상용 인부로 취직했다. 이봉창이 하숙 한 다카무라의 집에는 같은 일을 하려 매일 출근하는 20-30명가량의 인부가 있었는 데 조선 사람은 이봉창 밖에 없었다. 차별대우도 하지 않았다. 야마노라는 일본인 조장은 이봉창에게 5-10명의 일본인 인부를 데리고 일하게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공장에서 직공을 구한 다는 광고를 보았다. 조선사람임을 밝히고 서무계에 문의했더니 조선사람임은 상관없고 조장이나 그 보다 높은 사람의 보증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평소에 자기를 잘 보아주던 조장에게 보증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예전에 보증인이 됐다가 잘못된 경험이 있다고 거절했다.


이봉창은 이러한 차별에도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참다운 일본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일본인 다울려고 노력했다. “신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한일합방으로 새로이 탄생한 일본인이라는 뜻이다.  아마가자키 출장소에서 일할 때,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 천황 즉위식이 교토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일본인이 되려면 일본 천황의 얼굴을 꼭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봉창은 그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이태왕 전하의 옥안을 뵌 적이 없으며 경술병합 후 신일본인이 되어 천황폐하의 성안을 뵌 적도 없다. 또 조선 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역사를 가르쳐 받은 적도 없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한일합방에 대한 그의 이해는 너무나 순수하고 순진한 소시민의 마음이었다. 하숙집 앞에 서양식 세탁소가 있었 는데 조선사람 최순평이 일하고 있었다.  같은 하숙집에 묵으며 같이 상용 인부로 일하고 있던 일본인 마에다 세이지와 친했다. 그는 이 두 사람에게 일본 황제 즉위식에 가는 일을 상의했다. 3명은 의기가 상충하여 같이 가기로 했다.  3명 모두 돈을 꾸어 여비를 마련했다. 11월6일 밤 아마가자키를 떠나 오사카에서 전차로 교토에 도착하여 고조의 가라스마토오리 번화가에서 밤을 지새우고 7일 아침 6시경 이 거리의 미쓰비시 은행 앞에 마련된 일본황제 행렬 참관석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경찰관이 나타나 참관자들에 대한 몸수색을 시작했다. 같이 간 두 동료는 아무일 없이 검열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봉창의 양복저고리에서는 면도칼, 손수건 그리고 편지 한통이 나왔다. 한문이 섞인 한글로 쓴 고향 친구가 보낸 안부 편지였다.  경찰은 편지가 일본어가 아닌 한글로 쓰여진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 이봉창을 고조 경찰서 임시 출장소로 끌고 갔다. 한참 편지를 조사하더니 경찰서로 데려가 유치장에 가두 워 버렸다.  이봉창은 경찰에게 천황을 뵈어야 하니 빨리 이곳을 나가게 해달라고 애걸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일로 11일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그때의 착잡한 심경을 신문조서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나는 단순히 조선인이라는 것 때문에 민족적 차별을 받아 검속된 것에 대해 아주 크게 울분을 느꼈고, 동시에 왜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일까라고 생각하면 이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점점 타락해 갔고 동시에 사상도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래 나는 조선인이라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조선에는 편지도 보내지 않았으며 또한 본명도 밝히지 않고 항상 일본이름을 쓰면서 어디에 가든 진짜 일본인 행세를 했습니다.” 

그가 일본인 행세를 한 것은 조선인 행세를 하면 불이익을 당할 까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속 마음은 억울해서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 본명을 사용해서는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언짢은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고, 당당하게 본명을 쓰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 들로부터 나는 조국인 조선을 일본에서 독립시켜 다시 옛날 같은 우리나라가 되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상해로 건너가 그곳에 체재 중 조선독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천황 폐하를 죽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위키 백과 이봉창; 제2회 신문조서 중에서)

이후 그는 그야말로 방탕한 생활을 한다. 1929년 2월 비누상점에 취직했다. 9월에 매상금 100원을 가지고 도쿄로 달아났다. 그리고 해산물 도매점 점원으로 취직했다.  친구집에서 자거나 요시와라(창녀촌)에서 여자를 사귀는 등 불규칙적인 생활 때문에 결근이 잦았다.  주인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점원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가방점의 외판원이 되었다. 11월에 오꼬스카에 출장을 가서 수금한 돈 50-60원을 사용으로 써버렸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판매대금 50-60원을 가지고 오사카로 도주했다.  


1930년 11 월 어느 날 오사카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 데, 박태산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어서 조선인을 돌 봐주고, 영국 전차회사에서 조선인을 우대해서 써준다고 하면서 상하이로 갈 것을 권유했다. 조선인 차별에 지쳐 있던 그에게 차별없이 살 수 있는 기회였다. 1930년 12월6일 그는 쓰이코에서 일본여객선을 타고 10일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해서 일자리를 구하려 했으나 중국말을 못하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그리 쉬운 일이 안이었다.   1개월 넘게 일자리를 찾았으 나 허탕이었다.  여비로 가지고 온 18원도 바닥이 났다. 여관에서 무료 숙박소 이치키양으로 숙소를 옮겼다. 마지막 희망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나섰다. 영국전차회사 취직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가 어디 있는 지도 몰랐는 데 우연히 만난 안공근의 도움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안공근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나무위키, 위키 백과 이봉창 참조)


1931년 1월초순 그는 상하이 마아랑류우 보우갱리이 4호에 있는 임시정부 민단사무소를 찾아갔다. 민단 사무원 김동호에게 자신의 경력을 대강 밝히고 영국 전차회사 취직을 알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동호는 영어와 중국어를 다 알아야 취직이 된다고 하며 우선 두 나라말을 2-3개월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말을 배울 돈이 없었다. 결국 그는 기독교청년회관의 소개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명화 철공소에 취직했다.

이봉창은 한 2개월 후 자신이 명화 철공소에 취직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임정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이 때 김구가 처음으로 이봉창을 만났다고 한다. 김구는 자신을 백정선이라고 소개했다. 김구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여러 가명을 사용했는 데 백정선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봉창은 독립운동이 하고 싶어서 임정을 찾아왔다고 김구에게 말했다. 그리고 임정의 주의, 강령,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김구는 “임시정부 민단 사무소는 상해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의 직업소개와 상호 친목을 도모하는 것을 사업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매월 각자에게서 1원정도의 회비를 모아 부인회, 어린이회와 그 밖의 한국인 이 개최하는 여러 회합을 뒷바라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봉창이 일본말을 섞어서 한국말을 하고 일본 옷을 입고 몸동작이 일본인을 닮았으며 임정을 일본사람들이 말하듯 가 정부라고 하는 등 일본인으로 의심받을 언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김구는 이봉창에게 일본 내의 사정, 조선사람에 대한 대우 등을 물으면서 그의 의중을 떠 보았다. 일본 천황이 행차할 때 경계가 엄중한가, 무엇인가 큰일을 할 수 있는 지 등을 물어보았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무기만 마련할 수 있으면 일본으로 가서 큰일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이후 이봉창은 술과 안주를 사 들고 임정 민단 사무소에 와서 직원들과 가끔 술을 마셨다. 당시 임정 살림이 궁핍 했기 때문에 직원들도 그를 반겼다.   


하루는 이봉창이  3-4명의 임정 청년들과  서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김구는 그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가 방문할 때마다 임정직원들과의 대화를 장막 뒤에서 엿들었다. 이봉창이 “왜 당신들은 독림운동을 한 다면서 천황을 처단하지 못하느냐?” 고 물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면 당신은 왜 처단하지 못하느냐?” 고 되물었다. 이에 이봉창은 “나는 작년에 도쿄에 있을 때, 하루는 천황이 하야마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구경하러 가서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런데 임금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이때 가슴이 일렁이고 온몸의 피가 솟구쳐올라 내게 무기만 있으면 큰일을 한번 해볼 텐데 하고 생각하던 중에 천황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버려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며칠 후 김구는 이봉창을 그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갔다.  이봉창은 찾아온 김구에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천황 암살 계획을 설명했다. 이봉창의 의도를 믿게 된 김구는 일본 천황 암살 준비를 이봉창과 함께 시작했다.

1931년 2월, 김구는 이봉창에게 상하이 홍구(홍커우) 방면으로 가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숨어 있으라고 권고했다. 이 지역에는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  홍커우 지역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했던 홍구(홍커우)공원이 있는 지역이다. 

이봉창은 기노시타라는 일본이름을 가지고 홍구에 거주하면서 일본인 인쇄공장에 다녔다. 몇 달 뒤에는 일본인 악기점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는 탁월한 사교술과 능숙한 일본어 실력으로 많은 일본인 친구를 사귀었고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김구와 가끔 만나서 거사에 대해서 상의했다. 그리고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1931년 5월 이봉창을 만난 김구는 폭탄을 꼭 준비해서 연락하겠다고 약속했다. 8월말 경에 철공소를 그만두었다. 9월 중순에 이봉창은 임정 민단 사무소를 찾아갔다. 그는 김구에게 “폭탄을 입수할 수 있는 겁니까?”하고 물었다. 김구는 “폭탄은 입수할 수 있고 여비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이 거사를 결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지 알고 십소.” 하고 되물었다. 그는 “5-10년을 더 사는 것도 내게는 흥미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빨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폭탄이 손에 들어온다면 반드시 책임지고 거사를 결행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는 어떤 일이든 중도에 흐지부지하는 것을 싫어하므로 폭탄이 틀림없는 것인지 효력이 어떠한 지를 확인 한 다음 일본으로 갈 생각이니 폭탄이 입수되면 즉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구는 “폭탄은 자기가 잘 아는 데 6-7칸 거리 매의 물건을 모두 파괴하는 위력이 있으니 시험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으니 자기를 믿어달라”고 하면서 폭탄과 여비가 준비되면 연락하겠다고 말 했다. 폭탄을 비밀리에 실험할 장소와 폭탄을 적어도 하나 더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 문제였다.

김구는 재미동포가 보낸 성금으로 거사자금 250원을 마련했다. 떠날 때 150원을 주고 이봉창이 일본으로 간다음 100원을 송금했다. 이봉창이 가지고 간 수류탄은 중국군 고창묘의 병공창에 근무하는 왕응에게 부탁해서 1개를 마련하고 또 하나는 김현을 시켜 하남성의 유치 방면에서 가져왔다. 왕응은 조선의용군 사령관 김홍일의 중국식 이름이었다. 김홍일은 해방 후 국군 육군 준장으로 한국전에 참전했고 외무부 장관을 지낸 분이다. 

12월10일 김구는 이봉창을 임정 근처 여관 중흥 여사로 불러 하룻밤을 같이 자며 거사에 대해서 자세히 논의했다. 거사에 실패하여 체포될 경우에 심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등등을 이봉창에게 당부했다. 다음날 아침 김구는 헌 옷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어 이봉창에게 주었다. 당시 일본돈으로 150원이라는 거금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갈 준비가 다 되거든 다시 오라고 하고 헤어졌다. 


이틀 후, 12월13일 그가 김구를 다시 찾아왔다. 장원루에서 저녁 식사와 함께 술을 마신 다음, 밤 10시쯤 김구는 이봉창을 안공근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중국식 복장을 한 청년(안공근?)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가 안내하는 방으로 갔더니 폭탄 두개, 조선독립선서문, 태극기가 놓여 있었다. 선서문에는 “나는 적성(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 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13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앞”라고 적혀 있었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폭탄을 들고 찍으라고 했으나 죽기전에 형 병태에게 보낼 사진을 먼저 찍어 달라고 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독사진을 먼저 찍었다. 그리고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하여 거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봉창의 한인애국단 가입식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김구와 이봉창은 마지막으로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어려운 임정 살림에도 불구하고 많은 거사자금을 마련해 준 데 대하여 감복한 나머지,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이라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주시나 하고, 내가 이돈 을 떼어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백범일지, 나무위키) 이봉창은 “나의 계획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조선이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다.”고 말 했다. 김구는 “나도 군의 행동이 다행히 성공한다 하더라도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공하지 못해도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서 희생자를 파견할 결심이다. 군은 조선독립을 위한 제1의 희생자 이므로 강한 애국심을 갖고 반드시 목적을 관철하도록 하라.”라고 답했다. (위키백과, 이봉창) 이봉창은 홍구로 돌아와 일본으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 


12월 17일 이봉창은 허리춤에 폭탄을 숨기고 양복을 입었다. 중국요리집에서 김구와 만나 최후의 축배를 들었다. 김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젊은 나이로 희생되어야 하는 이봉창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봉창은 오히려 김구를 “우리가 대사를 성취할 터인 데 기쁜 낯으로 헤어집시다.”하고 위로 했다. 

김구는 이봉창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는 곧바로 도라야(요깡등을 파는 일본 과자점)로 향했다. 과자점 주인 아주머니가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전날 그곳에 맡겨 두었던 빨간 가죽 트렁크 한 개와 등나무 바스켓 한 개를 찾아 들었다. 일본인 주인 아주머니는 도쿄에 사는 자기 딸에게 전해 달라고  선물 꾸러미를 부탁했다. 짐을 들고 부두로 갔다. 부두에는 일본인 철공소 직원들이 배웅 나와있었다. 심지어 일본 경찰관도 전송하러 부두에 나와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일본인 답게 행동했고 사교성이 좋았는 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일본 우편선을 타고 12월19일에 고베에 도착했다. 그는 폭탄을 비단 주머니에 넣고 사타구니 사이에 숨기고 다녔다. 그는 바로 한신행 열차를 타고 오사카에 가서 미나토구 야구초모 여관에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나라에 있는 여자사범고등학교 기숙사를 찾아가서 도라야 과자점 주인 아주머니가 부탁한 선물을 그녀의 딸 오다기리 미치코양에게 전해주고 나라 관광을 했다. 


12월28일 이봉창은 아사이 신문에서 1932년1월8일에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 관병식이 거행되며 이 때 일본 황제가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고 거사일을 그날로 잡았다. 이 행사의 목적은 관동군이 정부의 인가 없이 마음대로 저지른 일본의 만주 침략을 기정사실화 하기위한 것이었다. 

김구는 일본에 있는 이봉창에게 추가로 100원을 더 송금했다. 이봉창은 잘 받았다는 답장을 하면서  “삼품은 1월8일에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라는 전보를 쳤다. 그는 오와리야 여관에서 수류탄 주둥이에서 나무마개를 뽑고 쇠로 된 기계를 끼어 넣은 다음 안전핀을 뽑아내어 언제 어디서든지 터질 수 있게 해 놓았다. 6일 아침 8시 그는 행사가 열리는 요요기 연병장을 미리 살펴보았다. 관람 좌석과 천황이 사열하는 운동장이 너무 멀어서 폭탄을 투척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천황이 궁을 떠나서 요요기 운동장으로 오는 행차 진로를 파악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쿄시내 지도를 사들고 합승 버스에 탑승했다. 이때 그는 천성적인 사교성을 발휘하여 버스기사와 친숙 해졌다. 자연히 천황 행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봉창이 관병식을 보고 싶다고 하자 버스 기사는 일본 육군 헌병대 조장 오바 켄게이의 명함을 주었다.  천황 행차 노선을 파악한 이봉창은 요요기 연병장에서 가까운 하라주쿠 역에서 폭탄을 던지기로 작정했다. 


1월8일 거사 날 오전 8시에  검은 색 오버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올백으로 빗고  헌팅 캡을 눌러 썼다.  검은 가죽구두 위에 천으로 된 구두 커버를 두르고 폭탄이 들어 있는 보따리를 들고 다마키로 향했다. 그리고 가와자키역에서 국철을 타고 하라주쿠로 향했다. 하라주쿠 역에 도착하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역 앞 중국집에 들어가서 닭고기 계란 덮밥을 시켜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이때 형사처럼 보이는 두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미행당하는 것 같아서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주인에게 다가가서 아무나 보러 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주라고 관병식 초대권 같은 것을 주었다. 그러면서 “이것으론 남쪽 출입구 밖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을 보고 이봉창은 일행에게 다가가서 합승버스 운전사가 준 헌병 조장 오바 켄게이의 명함을 주인에게 보이며 “나는 이 분의 초대를 받았는 데 어디로 들어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안주인이 그 명함을 두 형사에게 보이자 “그 명함으로는 헌병이 지키는 곳이면 어느 출입구로 든지 들어 갈 수 있다.”고 하고 음식점을 나갔다. 


이봉창이 음식점을 나와 주위를 살펴보니 경계가 너무 삼엄 했다. 도저히 일을 벌리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전철을 타고 요쓰야역으로 향했다. 하라주쿠역은 요요기 경기장에 가까운 쪽에 있고 요쓰야 역은 왕궁에 가까워서 천황이 오는 길을 역행하는 방향이었다. 역에서 내려 보니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 했다. 신문팔이 소년 오바네 요시에게 천황이 지나갔느냐고 물었다. 그는 천황은 이곳을 지나가지 않고 아키사카미스케를 통과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거사하기로 마음먹고 파출소 뒤 공중변소로 가서 수류탄을 꺼내 바지 주머니 양 쪽에 하나씩 넣었다. 이봉창은 9시40분경에 이곳에 도착했다. 요요기 운동장에서의 관병식이 9시50분 예정인 것을 감안하면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천황 행렬은 이미 이곳을 지나갔고, 정오경에 환궁할 때 다시 이곳을 통과할 것이라고 했다. 


이봉창은 천황이 환궁할 때를 노리기로 작정하고 시간이 많이 남아서 가까운 잇키 식당에 들어가서 술을 한잔 시켜 놓고 관병식 라디오 중계에 귀를 기울였다. 관병식이 끝났다는 방송이 나왔다. 바로 나가면 이를 까봐 늑장을 부렸다. 그리고 아카사마미스께에 도착해  보니 행차는 벌써 이곳을 지나서 맨 끝의 의장대가 다마치길 모퉁이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봉창은 무척 당황했다. 이러다가 거사를 모두 그르칠 것 같았다. 그 때 옆에 있는 행인 선로 인부 사쿠라이 긴타로 에게 천황 행차 행렬을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행렬은 다마이케 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지름길로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마침 빈택시가 다가왔다. 택시에 타자마자 “천황 폐하의 행렬을 봐야 하니 빨리 갑시다.”하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택시는 아카사카미쓰케 언덕을 올라 새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 육군참모본부 앞을 거쳐 내리막길을 달렸다.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서 경찰이 제지했다. 이봉창은 택시에서 내렸다. 경찰은 한쪽길만 막고 있었고 반대편은 통행이 가능했다. 경시청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봉창은 서둘러 경시청 쪽으로 향 했다. 


이봉창은 단숨에 경시청 현관 잔디밭으로 달려 갔다. 행렬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파가 7-8겹으로 몰려 있었다. 이봉창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두세 겹까지 접근하여 황제의 행렬을 기다렸다. 드디어 행렬의 맨 앞 마차가 나타났다. 안에 한 사람빆에 보이지 않았다. 이봉창은 천황이라면 옆에 수행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얼핏 보기에 천황의 얼굴이 아니었다. 뒤에 의장병도 따르지 않았다. 이봉창은 이 마차를 그냥 보냈다. 이어서 두번째 마차가 따라왔다. 의장병이 뒤에서 호위하고 있었다. 안에는 두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봉창은 이 마차에 천황이 타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봉창은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어 약18미터 앞 두 번째 마차를 향해서 힘껏 던졌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45분경이었다. 수류탄은 뒤쪽 마부가 서는 받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커다란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 구경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이봉창은 왼쪽으로 5-6보 물러 났다. 이봉창은 6-8칸 내의 모든 것이 파괴되는 위력을 기대했기 때문에 두번째 마차는 물론 그 주변이 엉망이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봉창의 눈 앞에는 전혀 뜻밖의 정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마차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뒤 따르던 의장병도 의연하게 말을 타고 따랐다.


이봉창은 거사가 실패 했음을 직감했다. 폭탄의 위력이 너무나 약했다. 폭탄의 무게를 줄여서 운반하기 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오기전에 폭탄을 시험해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으 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직 자신이 목표로 한 마차에 천황이 타지 않았다는 것은 몰랐다. 천황 마치노미야 히로히토는 그가 그냥 보낸 첫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뒤쪽에서 “나는 아닙니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사 혼다 쓰내요시가 50세 가량의 무명 옷을 입은 남성을 범인으로 오인하고 채포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봉창은 혼다에게 “그 사람은 아닙니다. 접니다!”라고 말하고 체포에 순순히 응하려 했다. 그러나 경시청 수사 2과장 이시모리 아사오, 순사부장 야마시타 슈헤이, 헌병 상등병 가와이 요시 등이 그를 난폭하게 제압했다. 곧 바로 그는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이봉창을 경시청으로 연행한 이시모리 아사오 수사 2 과장이 몸수색을 하려 하자, 이봉창은 이를 물리치고 스스로 주머니에서 나머지 한 개의 수류탄, 도쿄 시외지도, 현금 5원64전등 거사를 위해서 소지하고 있던 물건을 전부 내놓았다. 


외부와의 연락이 일절 차단된 가운데 도쿄 지방 재판소의 미야기 나가고로 검사장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검찰이 대심원에 예심을 청구하는 데 필요한 사건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보고서와 함께 이봉창은 대역죄인으로 대심원에 예심이 청구되었다.  이후로는 검사가 아닌 예심 담당 판사의 심문을 받았다.

이봉창의 심문이 한창인 동안 그의 일본 천황 암살 미수 사건은 일본 정계와 시민에게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수상 이누카이 다카시는 입궐하여 시종상 스즈키 간타로를 통해 천황 히로히토에게 문안을 여쭈었다. 12시 35분, 수상관저에서 긴급 각의가 열렸다. 내각은 경시청 보안과장 모리오카 지로와 경시총감 초앤렌으로 부터 사건의 진상 보고를 받았다. 사건 수습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내각이 책임을 지고 총 사퇴할 것을 결의 했다. 이누카이 수상은 그 날 오후 5시에 입궐하여 천황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경시청 간부 7명과 지휘관 6명이 징계당했다. 지방공무원도 무사하지 않았다. 시이토 무네요시 교토부 지사, 시로네 다이스케 효고겐 지사. 엔도 류사쿠 아이치겐 지사와 그외 지방공무원 10명이 견책 처분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그라마츠는 외무차관 나가이 마쓰죠에게 자신의 사퇴여부를 적절히 조사해 달라고 상신했다. 상해 총영사관의 아카이 사무관과 하나사로 경찰서장이 무라이 총영사에게 서면으로 자신들의 진퇴를 묻자 이를 외무성에 보고했다. 


조선내의 친일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동민회를 중심으로 한 중추원 참의와 그 밖의 민족 반역자 34명은 사죄성명서를 조선 총독부에 제출했다. 박춘금등은 일본 황궁 앞에서 사죄의 망배 를 하고 일본 고위 인사에게 사죄 전보를 보냈다. 


만주 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중국의 이봉창 의거에 대한 반응은 대단 했다. 중국의 민국일보는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이 정확하게 일본황제에 명중되어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야 했을 것을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다” 라고 대서특필했다. 익세보는 “이 장대한 의거를 2천만의 작은 나라 조선인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고 보도했다. 남경의 중앙일보는 “4억인구의 중국이 이렇다할 항일 투쟁을 벌이지 못한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이봉창의 거사를 부러워했다. 물론 일본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이러한 중국 언론의 태도에 대해서 강력히 항의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사 사장과 기자들의 해고를 요구했다. 국민당 정부는 그저 가벼운 경고를 하는 정도로 비켜가려 했으 나 집요하고 강경한 일본의 압력에 못 이겨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그러나 중국의 언론은 이에 굴 하지 않고 기회있을 때 마다 이 사건의 보도를 계속했다. 이와 같은 국민당 정부의 일본을 달래서 그들의 침략의욕을 잠재우려는 노력은 허사였다. 이봉창 의거후 악화된 상하이의 일본 사람들과 중국인의 충돌은 일본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한다. 


상하이의 임정과 한국독립당은 비록 이봉창의 폭탄 투척이 예상한 대로 천황을 암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반향이 워낙 커서 크게 고무되었다. 한국 독립당은 일본의 침략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 동안의 조선인의 독립을 위한 요인암살사건을 열거하며 이러한 일들이 단순한 테러가 아니고 독립이라는 정의의 구현을 위한 활동임을 만 천하에 알리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 30년 동안의 의인과 열사가 전에 없이 뒤를 이어 나타나고 있으니, 즉 장인환에 있어서의 스티븐스, 안중근에 있어서의 이토 히로부미, 이배명에 있어서의 이완용, 신민회에 있어서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강우규에 있어서의 사이토 마코토, 양근화에 있어서의 민원식, 김익사에 있어서의 다나카 기이치, 김지섭에 있어서의 니주바시, 송학선에 있어서의 김호몽, 조명하에 있어서의 구니신노와 같은 예가 모두 그러하다. 한국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나서지 않을 수 없게 한 것 가운 데 제국주의자들이 그렇게 만들지 않은 것이 없다. “

일본 재판부는 이봉창을 9번 심문하고 사형을 언도했다. 이봉창은 8번째 심문 까지는 반성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6월27일 마지막 심문에서 그동안 백정선이라고 호칭하던 인물을 김구라고 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일본 황제에게 난폭한 짓을 한 것”, “조선 독립은 전혀 실현할 수 없는 것”라고 진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그랬을 까?


국제한국학연구원장 최서면은 이 조서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역죄는 천황의 성덕을 증거하기 위해 경관, 검사, 판사들이 범인이 후회의 뜻을 표명시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고 대역죄 연구학자들의 결론을 인용하여 이를 설명하고 있다. 


단 두번의 공판 끝에 사형이 언도되었고 1932년 10월10일 오전 9시2분 이봉창은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향년 31세였다. 그의 유해는 도쿄 서북쪽 사이타현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봉창은 초등학교 교육을 받은 재주 있는 청년이었다. 그의 집안 환경이나 교육정도는 일제강점시대의 조선을 일본의 영토라고 이해하게 했다. 그래서 자신도 당연히 일본사람과 똑같이 대우를 받아야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번돈으로 재미있게 살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일본사람들보다 훨씬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원인을 자신이 일본사람들과 똑 같은 시민이 못되었다는 데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더욱 일본사람과 똑 같이 되려고 성심껏 노력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천황에 충성하는 착실한 일본시민이 되려는 그를 일본은 지속적으로 냉대했다. 결국 그는 조선사람이 사람 답게 살려면 일본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만난 김구는 일본의 괴수 천황을 제거하려는 그의 생각을 굳혀 주었고 그 수단과 자금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봉창을 통해서 당시 조선의 소시민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거창하고 위대한 자주독립보다는 앞에 놓인 민생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천황 암살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 동안 만주사변에 얽힌 일본의 대 만주 정책으로 인해서 중국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차후 벌어질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과 함께 이봉창 의거는 중국 국민당정부와 임정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레닌의 원조 중단으로 인한 임정의 자금난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원조로 일부 해소시키고 임정의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했다.  


참고: 이봉창 위키백과, 이봉창 나무위키, 브로그 대구 cctv 보인 역사이야기 항일투사 이봉창, YouTube 벌거벗은 한국사 이봉창편 사피엔스 스튜디오, 조선일보 2022.11.04 유석재의 돌발사전 이봉창의 두 얼굴-과연 어느 쪽이 진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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