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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Sep 13. 2023

만주사변 전후 암살사건들

당시의 일본, 만주, 중국의 정세


1.   장쩌린 암살사건(황고둔 사건)


황고둔 사건(위키백과)

1920년대 중국은 군벌 시대였다. 개인이 조직한 군대가 일정한 영토를 점령하고 지배했다. 장쭤린은 봉천파 군벌의 총수로서 베이징-텐진 지역과 만주를 지배하고 있어서 가장 강력한 군벌이었다.  그는 일본 관동군으로부터 무기와 군수품 원조를 받아 그 세력을 확장해 나 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가 건설한 남만주 철도 중 장춘-뤼순 간의 철도와 그 지선, 이와 관련된 모든 권리를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았다.  그리고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05년부터 일본 군대가 만주에 들어와 있었다. 일본은 또한 라오동 반도 조차권을 러시아로부터 양도받게 되었는 데 이 지방을 일본은 관동이라고 불렀고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관동군이라고 했다. 


일본은 만주의 조선무장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원조를 받고 있는 봉천파 군벌과 협정을 맺었다. 1925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쓰야는 만주 펑톈에서 펑톈성 경무국장 위전과 조선인 단속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는 데 이를 마쓰야 협정이라고 한다. 요지는 “1. 중국 관헌은 재중 조선인에 대해 호구를 엄격히 조사하고 연대책임제로 단속한다. 2. 무기를 소지한 조선인의 조선 내 월경을 금지하고 위반자는 검거하여 총독부 관헌에게 인도한다. 3. 항일 조선인 단체를 해산하고 갖고 있는 무기를 몰수한다. 4. … 조선인 소유의 총기 및 화약을 수시로 수색해 전부 몰수한다. 5. 일제가 지명하는 항일단체지도자를 체포 하여 일제 측 관헌에게 인도한다. 6. 중일양국경찰은 서로 국경을 넘지 말고 필요한 경우 서로 통보한다.” 등이었다. 이러한 형식의 협정은 펑톈성에 이어 지린성과 하얼빈 등 만주 각지의 성으로 번져 갔다. 중국 당국은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규를 제정했다. 이로 인해서 조선인 사회는 큰 억압을 받았고 독립운동은 일본과 중국 양측에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정부는 만주의 군벌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고 필요한 요구를 하는 방법으로 국익을 챙겼다. 그러나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고위 장교들은 불만이었다. 


쑨원(손문)을 계승한 장제스(장개석)는 군벌로 갈라져 있는 중국을 통일하고자 북벌을 하고 있었다. 1928년 4월, 베이징을 점령하고 있던 장쭤린의 봉천파 군벌은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게 밀려 베이징이 위험한 지경에 도달했다.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장쭤린에게 5개 철도를 부설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에 만주의 철도는 일본이 관리하고 있었다.  길회선(길림-회령), 연해선(길림-해림), 길오선(길림-오상), 상대선(장춘-대뢰), 조색선(조남-색륜) 이상 다섯 개의 철도를 일본의 차관을 받아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철도를 일본이 관리하고 철도주위의 지역이 일본 관리로 넘어가기 때문에 일본의 만주 진출은 한결 수월 해진다. 아무리 일본의 도움을 받고 있던 장쭤린도 이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만철총재 야마모토 조타로의 끈질긴 압박에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거절하다가 일본 측이 “만약 이 계약에 응하지 않으면 장쭤린의 철수에 남만주 철도를 쓰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협박하자, 5월 중순경에 장쭤린은 4개 노선 건설에 합의했다.


원하는 것을 얻은 일본은 장쭤린의 봉천파 군벌(동 북군)을 만주로 불러들여, 중국 전역을 통일하려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으로부터 만주를 보호하려 했다. 베이징 지역에서 후퇴하여 만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쭤린은 자기가 철수하면 중국이 공산화될 것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일본정부는 5.18일 이에 대응하여 장쭤린과 장제스에게 각서를 보냈다. 만주를 넘보지 말라는 협박이었다. 국민혁명군이 경진지구(베이징과 천진지역)에 도착하기 전에 장쭤린의 봉천파 군대가 철수하는 것은 인정하나, 국민혁명군의 베이징입성은 저지하며, 국민혁명군과 봉천군이 경진지구에서 교전하거나 가까워진 상황에서 봉천군이 퇴각을 결정했을 때는 일본군이 개입하여 무장을 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장쭤린은 이러한 일본정부의 태도에 대해서 대로했다. 물론 장제스도 이 각서를 일축했다. 


일본정부의 장쭤린 회유가 실패하자 관동군이 일본정부의 허락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28년 5월 18일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장쭤린만 죽여 없애면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 장쭤린을 죽여 없애면 그 아들 장쉐량이 반드시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며 그 부하들 역시 소동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치안 유지 명분을 이유로 삼아서 봉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거에 만주를 점령한다음 다른 사람을 찾아 우리 군대의 보호 아래 정부를 조직한 다면 만주 문제는 한 번의 수고로 영원함을 얻는 길이 될 거이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조타로는 극비리에 동원령을 내려 병력을 봉천에 집결시켰다. 동북지방에 들어오는 국민혁명군과 봉천군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서였다. 국민당 정부 외교부장 황푸가 적극적으로 항의했고, 미국과 영국 등도 내정간섭이며 중국의 주권침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조타로는 병력을 금주(라오닝성 진거우시)에 보내고 관동군 사령부를 봉천으로 옮기는 등 계획대로 진행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관동군의 조치가 포츠머스 조약(러일전쟁으로 인한 일본과 러시아의 조약)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지적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반대했다. 다나카 총리는 만주에서 치안 유지에 혼란이 오지 않는 다면 봉천군대가 만주로 후퇴하는 것을 용인하며 무장해제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관동군에게 아직 서두를 필요가 없고 장쭤린의 위치를 유보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관동군 고위 장교들은 크게 실망했다. 


관동군은 일본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하기 시작했다. 5월 23일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베이징 주제 각국 외교사절들이 모여 경진지구에 전쟁(북벌 국민혁명군과 봉천파 군벌의 싸움)이 파급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일본 요시다와 공사가 각국군대 가 경진선(북경-천진), 경봉선(북경-봉천) 철로의 관내 전 구간과 철로 연변 20리 이내에서의 남북군대가 절대 작전을 하지 못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각국공사들은 지위를 넘는 조치라고 반대했으나 일본 관동군은 1개 사단을 동원하여 병력을 철도 주변에 배치했다. 


장쭤린은 일본과 약속했던 철도건설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일본 측은 장쭤린에게 차관 500만 원을 억지로 쥐어 주자 길돈선 종점에서 도문강까지 연장하는 공사만 하겠다고 하고 나머지는 전부 거절했다. 장쭤린이 만주로 철수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아예 일본 측에 차관을 돌려주고 길돈철로 연장 및 차관계약을 파기하려 했다. 5월 30일, 장쭤린은 야간 군정부 수뇌부 회의에서 총퇴각을 결정하고 철수준비에 들어갔다. 6월 2일 요시자와가 장쭤린을 방문하고 만약 일본에 협조하면 장제스를 물리쳐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장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을 반으로 나누라면서 그 조건으로 길회선 집과 허가, 홀로 도항건설중지, 타 통선 개축 공사를 요구했다. 장쭤린은 단호히 거절했다. 


“일본인은 친구가 될 수 없다. 남의 집이 위급할 때 목을 조르니 말이다! 나 장쭤린은 정말 이런 방법은 싫다! 나는 동북인이다. 동북은 나의 고향이고 조상과 부모의 묘소가 다 여기에 있다. 내가 동북을 팔아먹을 것 같은 가? 나 장쭤린이 매국노 욕을 먹으란 말인가? 남 두려워할 것도 없다. 빌어먹을, 다 필요 없다!”라고. 사태가 이쯤 되자 관동군 고위 장교들은 장쭤린을 제거해야 일본이 만주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조타로는 다케시다 요시하루 소좌를 시켜 베이징에서 장쭤린을 암살하려 했다. 장쭤린 암살을 처음으로 주장했던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갑자기 베이징에 가려는 다케시다 소좌를 수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고모토에게 술을 먹였다. 술에 취한 그는 그가 장쭤린을 죽이려고 베이징에 간다고 실토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정부가 아니고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며 자기에게 맡기라고 했다.  그리고 고모토는 장쭤린을 철로 위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황고운을 장소로 정하고 특공대로 하여금 열차를 습격하는 방법과 열차 폭발을 놓고 망설이다가 흔적 은폐가 용이한 폭발로 결정했다. 그는 이토 겐지로라는 민간인에게 인간 말자 중국 민간인 3 사람을 물색하여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이토 겐지로는 대륙 낭인 안도 다카나리와 접촉하여 중국인 3명의 포섭에 나섰다. 안도는 중국인 실직군인 유대명에게 인간 쓰레기 같은 중국인 3명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6월 3일에 마약 중독자 오귀생과 장문재를 꼬여서 목욕시키고 이발을 하게 하여 음모에 끌어들였다. 고모토는 독립수비대 2대대 4 중대장 도미야 가네오를 거사에 가담하게 하였고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공병 20 연대도 끌어들였다. 관동군으로 하여금 장쭤린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하였다. 공병대는 6시간 만에 해당지역에 폭탄 설치를 마쳤다.


장쭤린 암살에 대한 풍문이 떠돌았다. 이 소문은 장쭤린에게도 들렸다. 그러나 그는 설마 했다. 장제스 군대의 북진을 피해서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만주 봉천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1928년 6월 1일 베이징을 열차를 타고 떠난다고 발표했다.  길림성과 흑룡강성군대가 가는 길 철도 연변을 지키기로 했다. 이때 봉천 헌병대 사령관 제은명이 일본수비대가 황고둔 역 근처에 보초를 세워 행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을 포착하고 장쭤린에게 비밀전보를 쳐서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으나 장쭤린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나 6월 1일에 전용열차를 대기시켜 곧 출발할 것처럼 하다가 돌연 다음날로 연기했다. 그리고 정작 6월 2일에는 그의 다섯 번째 부인의 일행만 타고 출발했다. 6월 3일 오전 1시 장쭤린은 대원수 정장을 입고 베이징 자택을 출발하여 정양문동역에서 봉천행 특별열차에 올랐다. 그의 심복들이 동승했는 데 그중에는 일본고문 마치니와 키가도 있었다. 마치 노는 1923년 예편된 이후부터 그의 고문으로 일했고 장쭤린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장쭤린의 제거를 강경하게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장쭤린은 그의 암살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그를 열차에 탑승하게 했다고 한다. 열차 안에는 1개 중대의 병력이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전 6시 30분에 열차가 텐진에 도착했다. 판푸와 마치노가 덕주에 있는 장쭝창을 만나러 간다고 하차했다. 장쭤린의 사돈이며 전 국무총리 진원평도 부관이 일본영사관에서 9시에 사카니시 리하치로와 함께 상담할 일이 있다고 하차했다. 이는 진일파인 진원평을 살려 두기 위한 일본의 배려였다. 대신에 창인화이가 이곳에서부터 장쭤린을 수행했다.


장쭤린이 탄 열차는 총 20량이었다. 그는 10번째 칸에 타고 있었다. 이 열차는 서태후 전용열차였다. 내부는 호화로웠다. 큰 객실과 침실이 있었고 소파와 마작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후 4시 열차는 산하이관에 도착했다. 그의 요리사 박풍전이 차려준 진수성찬의 저녁을 먹었다.  동승하고 있던 부인 마 씨가 식사 후 “내일 아침밥은 집에서 먹을 수 있겠 내요.”라고 말하자, 양치를 하고 있던 장쭤린은 “기차에서는 멀 먹어도 맛이 별로 없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아.”라고 말했다. 식사 후에 그는 흑룡 강성 독군 우진성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동승한 동료 부하들과 마작을 했다. 6월 4일 새벽에 열차는 황고둔역에 도착했다. 이 지방 부하 군벌 장징후이가 마중을 나와서 집안식구와 문무 관헌들이 봉천 신차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황고둔 역에서 200미터 가면 노도구-삼동교가 나온다. 이곳은 남만철도와 경봉철도가 만나는 지점이고 일본 관리하에 있었다.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봉천으로 가는 경봉철도를 달려온 열차에 타고 있었다. 열차가 황고돈역을 출발하여 봉천으로 향했다. 그는 전망 칸으로 옮겨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우쥔성과 교위처장 온수선등 3명이 있었다. 우쥔성이 날씨가 추우니 옷을 더 입을 것을 권했다. 시계를 보더니 곧 도착할 것이니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그때가 오전 5시 23분이었다. 열차는 산동교를 지나고 있었다. 그 순간 두 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관동군이 다리에 매설한 600킬로그램 폭약이 장쭤린이 타고 있던 특별전망차와 식당칸 사이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고모토의 지시를 받은 공병중위 후지이 데이쥬가 육교 아래 오른쪽에 두 개의 폭탄을, 왼쪽에 한 개를 설치한 다음 만철 전망대까지 전선을 연장해 놓고 그곳에서 열차가 접근하는 것을 주시하고 있다가 적시에 스위치를 눌러 열차를 폭파했다. 대 성공이었다. 장쭤린이 타고 있던 차량은 산산조각이 나서 10미터나 하늘로 치솟았고 남은 것이라고는 바퀴 두 개밖에 없었다. 우쥔성은 머리에 파편이 박혀 즉사했다. 마 부인은 다리에 경상을 입었다. 사망자가 20명, 부상자가 53명이었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온수선이 장쭤린에게 다가가 보니 그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옷이 너덜너덜 찢겨 있었고 목에 깊은 구멍이 나 있었으며 온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응급처치를 한 다음 20분 만에 차에 태워 원수부 동원 소청루의 거실에 모신 다음 영국인 의사를 불러왔으나 상처가 너무 심해서 구제 불능이었다. 오전 9시 장쭤린은 “내가 상처가 너무 심하다. 잘못될 염려가 있으니 쉐량(아들 장쉐량)을 빨리 봉천으로 오도록 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54세였다. 그러나 봉천성장 짱스이는 그저 부상이라고 발표하고 장쉐량의 시체를 봉천으로 옮겠다. 폭발사고 30분 후에 봉천교섭총서 일본과 과장 관경택은 봉천주재 부영사 고노에게 이 사건은 일본의 소행이라고 항의했다. 고노는 이 사실을 신임 총영사 하야시 규지로에게 보고했다. 하야시는 일본이 저지른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아침 8시에 그는 관경택과 합동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도중 우치다 영사가 “교동 남쪽으로 30미터 떨어진 곳에 편의대원 두 명이 있는 데 수비대에 의해서 살해당했습니다. 같이 가서 현장검증을 해봅시다.”라고 말했다.


가보니, 손에 소렌제 폭탄을 쥐고 혁명군 복장을 한 두 사람의 건장한 시신이 있었다. 나이는 30세 전후로 보였고 머리는 빡빡 밀었는 데 가슴에 서너 방의 총을 맞아 숨져 있었다. 시체 옆에는 몽천 밀짚모자 2개와 신발 한 짝이 있었다. 옷 주머니에서 두통의 편지가 나왔다. 고급편지지위에는 “국민혁명 관동 초무사 용지”라고 씌어 있고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동지여 노력을 경주하자.”라고 적혀 있었다. 우치다는 이 시신이 장제스의 편의대 소속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대륙낭인 안도 다카나리를 시켜 포섭한 중국인 마약중독자 오귀생과 장문재였다.


우치다 영사는 관경택에게 사건을 장제스의 편의대가 폭탄을 투척한 것으로 결론짓자고 요구했으나 관경택은 동의하지 않았다. 폭탄 투척이기에는 폭발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6월 5일 오전 9시 일본 봉천영사 하야시는 모든 관련자들을 모아 문제의 중국인들을 살해한 시간을 4일 새벽 4시로 입을 맞추었다. 중국 측은 같은 날에 단독으로 현장을 조사했다. 봉천 현장에 파견한 공병창 러시아 기술자 로마도프 와다언니는 기술자들이 대량의 폭탄을 교량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관경택은 또한 두 명의 사체에서 많은 주삿바늘 자국과 가슴의 총상 자리를 칼로 오려낸 흔적을 발견하여 그들이 장제스의 편의대원이 아님을 증명했다. 

만철의 야모토 총재와 다나카 총리는 장쭤린을 이용하여 일본이 만주에서 국익을 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피살 소식에 크게 실망했다.


관동군과 일본군부는 군의 소행이 아님을 일본정부에 납득시키려고 갖은 허위사실을 보고 했으나 결국 9,10월에 일본정부도 모든 것이 관동군이 일본정부의 허가 없이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나카 총리는 진상조사를 하고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등 관련자들을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각료들이나 여론은 이 사건으로 일본군의 위상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천황도 이에 동의했다. 관련자들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나카 총리는 천황의 신임을 잃어서 결국 사임했다.


장제스의 아들 장쉐량은 6월 17일 봉천으로 들어와 봉천성 독판이 된 다음 6월 17일 아버지 장쭤린의 사망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장쭤린의 자리를 승계한 장쉐량은 1929년 장제스의 국민당정부와 합류하여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10년 만에 중국이 통일되었다. 장제스의 북벌은 중국을 통일했 다기보다는 옛날의 군벌이 각성을 지배하는 구조로 그 냥 남아있고 형식상으로 중앙정부에 속해 있었다.  아버지를 계승하여 만주를 지배하는 장쉐량은 아버지를 피살한 일본에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여론 또한 배일 사상이 지배적이었고 국민당정부도 이에 편승하여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을 전개했다. 그는 일본이 차지하고 있는 여순-대련의 조차지 및 남만주철도의 회수, 일본 영사 재판권 철회, 일본에 의한 철도 부설권 및 탄광개발권 확장에 대한 반대,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가옥임대료 및 소작료 인상 또는 계약갱신 거부 등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서 만주에서의 일본인의 입지가 위축되었다. 더구나 국민당정부의 만주철도 포위선 건설계획은 일본이 경영하고 있는 만주철도의 이권을 위협했다. 


업 친데 덥 친 격으로 1929년 세계경제공황이 일본 경제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남만주 철도 영업도 부진했다.  본국의 정계와 군부에서는 불황의 타계책으로 만주 침략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장쭤린 피살 사건을 주도했던 관동군 고위층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배일운동으로 수세에 몰리자 만주를 침략할 궁리를 하게 되었고 그중에 하나가 1930년 만보산 사건이었다. 



2.   만보산 사건과 조선일보기자 김이삼 피살


김이삼은 1930년 1월 김좌진장군 장군 암살사건을 소상히 보도했다. 그는 만주 통이었다.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시작했지만 언제부터 인가 조선일보에도 취재한 기사를 보냈다. 서로 극심한 경쟁관계에 있던 양대 신문은 만주의 소식을 김이삼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가 보낸 만주에 대한 기사는 가장 빠르고 믿을 만했다.

김이삼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으며 일본국적을 취득한 인물이었다. 그의 공식직함은 조선일보 길림성 창춘지국장 겸 동아일보 길림 특파원이었다. 어느 날 일본 관동군 일본영사 다시로 시게노리가 만보산 사건에 대한 조작된 정보를 김이삼에게 주었다. 김이삼은 현지에 가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본사에 특급전보로 보냈다. 


만주에 이주한 조선농민들은 중국인 지주의 소작인으로 농사를 지었다.  원래 19세기말부터 조선의 가렴주구에 못 견뎌 이주한 농민도 상당수 있었지만 일제의 이주 장려 정책으로 조선인 인구가 부쩍 늘어 만주에는 10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중국의 지주는 좀 특이했다. 땅주인이 직접 소작인을 관리하지 않고 한 농민에게 땅을 불하하고 그 농민이 소작인에게 땅을 나누어 주어서 농사를 짓게 하는 제도였다.


일본당국은 중국인 하오융더(학영덕)를 매수하여 만주 창춘(장춘) 시에 장롱도전공사를 설립하게 했다. 물론 그가 이 회사의 지배인이 되었다.    1931년 4월 16일 하오융더는 만보산지방 지주 11인과 그들 소유의 미개간지 200ha에 대해서 10년 동안 관리할 권리를 가지는 소작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조선농민 이승훈 등 8명과, 개간을 하면, 10년 동안 농사지을 권리를 주는 임대이전 계약을 맺었다. 만보산은 길림성 창춘에서 서북쪽으로 30 키로 떨어진 곳에 있다.  이 계약은 창춘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유효하다는 조항이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하오융더는 정부허가가 나오기 전에 조선인들과 조차계약을 했다. 


이승훈은 만주 각지에서 조선인농민 180명을 모집했다. 개간지역 근처에는 이통하(이통 강)라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학영덕은 개간토지와 이통하 사이에 수로를 파게 했다. 수로는 많은 중국인 토지를 통과해야 했다. 수로 공사가 이들 토지에 많은 피해를 유발하자 중국인 토지 주인들이 반발했다. 주민들이 현당국에 탄원했고, 개간이 정부의 허가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당국은 공사 중지를 명령했다.  그래도 수로공사를 계속하자 중국 측의 창춘공안국 순경 이 출동하여 수로공사를 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체포했다. 이후 창춘 시 당국은 수차례에 걸쳐서 타협안을 제안했다. 대체로 조선인들의 철수를 전제로하고 토지계약에 대한 배상과 체포한 조선인 석방이었다. 일본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만주군벌 장쭤상에게 사건해결을 부탁했다. 그는 시안사건으로 유명한 장쉐량의 아버지 장쭤린의 의형제로 만주지방군벌의 원로였다. 장쭤린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서 만주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1928년 일본관동군 대좌 고모토 다이사쿠의 음모로 그가 타고 있는 열차가 폭파되어 피살되었다. 장쭤상은 일본군이 호시탐탐 만주를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정보원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큰 분규 없이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다. 대치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경찰이 충돌하고 중국주민과 개간하고 있는 조선인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서 분쟁이 생기면 일본이 만주로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결국 수로공사는 일본경찰 보호 하에 6월 말에 끝났다.  


그러나 장마를 우려한 중국인 400여 명이 7월 1일 수로 약 2리를 매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7월 2일 창춘 일본영사관은 무장 경찰관 15명을 파견했다.  중국 측은 경찰 300여 명을 파견했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 영사관은 무장경찰을 증파했다. 조선인 농민, 일본 영사관 경찰, 중국인 지주, 주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중국주민과 일본경찰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경찰의 보호아래  7월 11일 수로는 복구되었다. 


1931년 7월 2일 발행된 조선일보 호외는 만보산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의 제목은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 동포 충돌부상” “대고개밑 일본 관헌 한 시간여 교전-급박한 동포의 안위” “전투 준비 중”등이었다. 김이삼이 일본영사가 준 과장된 허위 사실을 그대로 기사 화했다. 이어서 조선일보는 특보를 실어서 동아일보를 압도했다. 동아일보도 질세라 같은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이기사를 읽은 조선사람들은 중국인이 조선사람을 박해했다고 분노했다. 이 가사를 읽고 일어난 최초의 조선거주 중국인에 대한 폭력사건은 전라북도 이리(현 익산)에서 일어났다.  다음은 인천이었고 경성, 원산, 평양, 부산, 대전, 천안 등 전국 각지로 중국인 배척운동이 퍼져 나갔다. 평양, 부산, 천안에서는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중국인을 구타하고 학살하는 사건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동아일보는 오보임을 알렸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신영우, 동아일보는 서범석 기자를 창춘에 파견하여 진상조사를 했다. 


김이삼은 1931년 7월 14일 자 조선일보에 “일본의 정보에 근거해서 기사를 썼지만 오보였다”는 사죄 기사를 계제 했다. 그리고 지린(길림) 일보에 창춘일본영사 다시로의 오인을 요점으로 하는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발표했다. 일본인 기자들은 조선일보 지국 장 김이삼이 기사를 날조해서 대참극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김이삼이 사건의 진상과 자기비판기사를 계속해서 내보내자, 일본영사 다시로 시게노리는 영사관 순보 박창하를 시켜 김이삼의 숙소 동아여관에서 그를 총살했다. 현장에 출동한 중국경찰이 그를 체포했다. 일본 영사관은 중국당국에 박창하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중국은 다시라 영사의 경질을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재조선 중국인 100여 명이 사망하고 10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중 평양에 사는 화교가 94명이나 되었다. 평양의 화교인구는 779명으로 서울 4,107, 신의주 3,640, 인천 1,774에 비하면 아주 적었다. 인천에서 피살된 화교는 고작 2명이었고 시위규모가 가장 컸던 경성에서는 한명의 화교도 죽자 않았다. 조선인 한 명이 피살되었다. 왠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평양에서는 일본조선군이 개입하여 폭도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의 중국인들의 감정을 건드려서, 조선인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게 하여 일본군이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만주 침략의 근거를 하나씩 만들어 가고 있었다. 


1931년 7월 16일, 조선총독부는 만보산 사건의 조선 내 보도로 인해서 발생한 화교 테러사건으로 중국인 10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이 중국 내에 전해지자, 만주와 상하이 등 중국 내의 조선인이 중국인의 피습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중국 내 조선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중국영토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3.    만주사변과 일본수상 하마구치 오사치 피격 사건


일본은 무사의 나라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시대를 열어서 200여 년 동안의 전쟁 없는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조선에서 유교를 도입하여 사농공상의 계급사회를 이룩했다. 그러나 조선이 선비를 가장 우위에 놓았던 반면에 일본은 무사를 일등 계급으로 우대했다. 조선이 문을 숭상하는 선비의 나라였다면 일본은 무를 숭상하는 무사의 나라였다. 조선의 양반에 해당하는 계급이 일본의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이다. 아무리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근대국가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전통은 변함이 없었다. 


전쟁은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다. 요동반도 조차권은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러시아에게 빼앗겼지만 경제는 호황을 맞이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궁지에 몰아넣고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요동반도 조차권과 남만주 철도 경영권을 차지했다. 비록 배상금은 못 받았지만 만주의 이권은 일본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14년 일차대전은 일본에게 특수였다. 유럽국가들이 전쟁에 바빠서 생산라인이 마비된 상태였고 군수물자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품질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무기와 군수물자 수출로 일본은 호황을 누렸다. 그리고 독일이 유럽에서의 전쟁에 정신이 없는 동안 독일이 관리하고 있던 산둥반도의 이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1918년 일차대전이 끝나고 전쟁특수가 가시면서 일본경제는 침체하기 시작했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이후 일본에도 의회 민주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편 군부는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중국을 침략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민간 정부는 전쟁에 반대했다. 이와 같이 군부와 민간정부의 샅바 싸움은 계속되었다. 1920년대의 대세는 민간정부의 민주화였다. 1918년에 하다 다카시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는 평민 출신이었고 중의원 제1당 정우회 대표 자격으로 임명된 의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 최초의 총리였다. 이전까지 일본은 번 벌(지방 영주 세력 즉 사무라이)과 원로들이 차례로 총리를 맡아 왔다. 평민출신인 그가 총리가 되기도 힘들었지만 총리가 된 후에도 원로들 그리고 군부 와도 잘 지냈다. 법으로 군인 출신이어야 임명될 수 있는 육군과 해군 장관을 제외하고는 전내각을 민간인 출신으로 하고 자유 평등의 개념으로 민주적인 정책을 펴 나갔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한국과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3.1 운동과 워싱턴 선언이다. 1919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조선의 3.1 운동, 중국의 5.4 운동이 일어난다. 3.1 운동 이후 그가 조선의 무단 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꾼 것은 기왕 민주적인 그로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만에서 비슷한 정책 변화가 이루어졌다. 대만 총독부와 조선총독부는 천황 직속이었고 군인만이 총독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그는 문민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군부의 반대로 조선에서는 민간 출신 총독이 임명되지 않았지만 대만은 문민 총독이 부임했다. 삼일 운동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유화 정책이 일본의 민주화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삼일 운동이 일본의 무단정치를 중단하게 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일본의 정황이 더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아깝게도 1921년 11월 4일 그는 입헌정우회 교토지부 대회에 가던 중 나카오카 곤이지라는 청년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그의 단독 범행이었고 동기는 부유층과 결탁한 정계에 대한 증오였다고 한다. 그는 3년여 동안 총리직을 수행했고 향년 76세였다. 나카오카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15년으로 감형되어 1934년에 사면되어 1980년에 병사했다.  


1920년대는 군함이 한 나라의 군사력을 대표하는 무기였다. 오늘날의 핵무기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일차대전 승전국인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5개국의 군함 만들기 경쟁은 전쟁을 우려할 정도로 극심해져 가고 있었다.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이들은 1921-1922년 2년 동안 워싱턴에 모여 군축 회담을 했다. 특히 일본과 미국의 경쟁이 두드러지게 심했다. 일본은 이 회담에서 일본해군은 미국과 영국의 60%선에서 합의했다. 일본 해군은 이에 동의한 민간정부를 맹공격했다.  더구나 제5항은 일본이 1915년에 배양정부 수반 위안스카이에게 요구한 21가지 사항을 백지화했다. 여기에는 일차대전동안에 독일에게서 빼앗은 산둥반도의 이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일본에게 빼앗겠던 산둥반도의 이권을 워싱턴 회의 덕분에 돌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친일적인 배양정부가 장제스의 1차 북벌로 패망하고 2차 북벌 후 국민당 정부가 자주외교를 표방하여 중국에서의 일본의 입지는 점점 위축되었다. 그럴수록 일본 내에서는 군부의 민간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갔다.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가고 있었지만 일차대전이 끝나고 유럽이 경제를 회복하면서 일본의 수출도 감소되었다. 경제침체로 민생이 점점 힘들어지는 만큼 민간정부에 대한 불신과 군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 갈수록 커졌다. 


그런데 1929년 10월 29일 뉴욕 증권시장이 붕괴하고 대공황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일본경제는 침체에서 공황으로 치 달았다. 일본 재벌들은 정부에 돌파구를 찾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1930년 4월 22일 런던군축회담에서 미국 후버대통령의 강력한 요구로 일본의 대형순향함은 미국의 60%, 경순양함과 구축함은 70%로 줄인다는 데 합의했다. 이와 같이 서방국가들에게 쩔쩔매는 유약한 민간정부에 대한 군부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런던회담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군령부 참조 쿠사가리 에이지 해군 소좌(소령)가 “런던조약건을 사죄하고자 국민 앞에 죽음으로 보답한다”는 요지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군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1928년 장쭤린 폭살사건을 주도한 관동군 처벌을 두고 군부와 마찰했던 다나카 기이치 총리가 실각한 후 1929년 취임한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긴축재정과 대 중국 평화외교를 시행했다. 그리고 민간 정치인 와카쓰키 레이치로 전 총리를 런던군축회담 수석대표로 파견했다. 통상적으로 해군 장성들이 수석대표로 파견되었다. 해군 강경파와 야당인 입헌 정우회가 해군군축을 강력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축에 합의했다. 그는 일본이 미국과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금핵금(금 수출금지 해제)과 긴축재정은 경제공황을 푸는 데 악영향을 미쳤다. 경제가 좋지 않을 때는 국가가 막대한 자금을 시장에 풀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높은 대중의 지지로 총리직에 올랐던 그의 인기는 추락했다. 그에 대한 군부의 불만도 극에 달했다. 야당과 해군은 군통수권은 천황에게 있고 따라서 통수권은 실질적으로 해군이 행사해야 하므로 해군조약은 해군이 해야 마땅한 데 민간정부가 해군조약을 체결한 것은 위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함대 파(군축반대파)였던 가토 하로하루 군령 부총장이 사임하고 조약파(군축찬성파)  제독이 임명되었다. 추밀원에서도 원로인 사이도 긴모지의 찬성으로 런던군축 조약이 1930년 10월 9일에야 가까스로 가결되었다. 


1930년 11월 14일, 우파청년 사고야 도메오는 하마구치 총리가 천황의 통수권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도쿄역에서 그에게 총을 쏘았다.  즉시 도쿄제국대학병원에 옮겨져 장을 30%나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1931년 1월 21일에 퇴원했다. 그러나 상처가 악화되어 4월 4일에 입원하여 5일 수술을 받는 도중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요양등 치료하려고 노력했으나 회복되지 않아 8월 26일에 사망했다. 


봉천파 군벌을 이용하여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여 친일 허수아비 나라로 만들려고 했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장쭤린 암살사건으로 군부의 압력에 못 이겨 실각했다.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대령)가 육군상부와 정부의 허락 없이 사건을 저지르고도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았고 오히려 총리가 물러나게 되자 만주의 장교들은 기고만장했다. 


장쭤린 폭사사건 이후 관동군 사령관이 혼조 시게루로 참모장이 이타가키 세이시로로 교체되었다. 이때 이시와라 간지라는 인물이 관동군 작전참모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래에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할 것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주와 몽골을 점령해야 한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는 것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일본, 중국, 조선 삼국의 인민들이 평화로이 공존하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참모본부는 국제사회의 여론을 우려하여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청년장교들을 선동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1931년 중국의 사정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장제스는 2차 북벌을 마치자마자 경쟁세력인 광저우 파벌 후한민과 싸우고 있었고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좋지 않았다. 장강에 대홍수가 발생했고 이재민 구제문제로 국민당 내에서 큰 갈등이 벌어졌다. 북만주철도인 중동로의 이권을 두고 장쉐량의 봉천 군벌과 소련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과 만주의 혼란스러운 정국은 만주 관동군으로 하여금 침략의 적기라고 믿게 하였다. 당시의 만주는 대강 러시아가 북만주의 이권을 일본이 남만주의 이권을 관리하고 있었다. 


간악한 이시하라 간지는 전쟁의 꼬투리를 잡을 사건을 꾸미기 시작했다. 남만주에 이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은 북만주에 이권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와의 충돌을 예상하여 대 싱안링(흥안령) 일대에 스파이를 파견하여 조사를 하고 있었다. 대 싱안링은 만주와 몽고의 경계에 남북으로 뻗어 있는 산맥이다. 1931년 5월 10일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는 도쿄를 출발하여 뤼순(요순) 관동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봉천에서 받은 여권, 하얼빈에서 받은 여명학회 간사, 농학사라는 가짜 신분증을 가지고 관동군 참모부의 도움으로 대 싱안링 지역의 조사에 착수했다. 그는 이스기 엔타로 예비역 상사, 백계 러시아인 시로카프, 안내하는 몽골인 3명을 데리고 6월 6일 치치하얼을 출발, 대시안링을 남하하여 제심하 상류를 거쳐 색륜을 지나 7월 3일 조남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6월 26일 소악공부(대 싱안링 부근의 도시)에 도착한 나카무라 일행은 대싱안(홍안) 둔간대 재 3단(중국군부대)의 연병장 부근을 지나가고 있었다. 거동이 수상하다고 여긴 중국 부대원 왕병의가 여권 조사를 했다. 중국 내 통행 허가증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부대 본부로 연행하여 심문하니 여행도중 비적에 쫓기어 여기까지 도망쳤다고 했다. 중국부대는 상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부대에서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허술한 군대식사를 주지 않고 읍내 식당에서 식사대접을 하는 등 27일 오후까지 귀빈대접을 해 주었다. 단장 조관오는 선양에 가고 없었다. 그날 밤에 단장대리 관옥형이 층장지에서 돌아왔다. 그는 그들이 간첩임을 의심하고 몸수색을 했다. 바지 속에서 일본어와 러시아어로 된 군용 지도 2개, 일기 두권, 그리고 필기록 3개, 은표 190원, 금패 2원이 나왔다. 일기에는 군사 작전에 필요한 정보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스파이가 틀림없었다. 돈간공서의 지시로 정중하게 다루면서도 감시를 강화했다. 그러나 나카무라와 그 일행은 그 날밤 보초들이 잠든 틈을 타서 도주했다. 보초들이 그들을 뒤쫓았다. 북쪽 산에서 한동안 총성이 들리더니 조용해졌다. 시간이 지나도 보초들이 돌아오지 않자 사무장 곽덕창이 병사들을 이끌고 수색에 나섰다. 곧 일본인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보초들은 외국인을 살해한 죄로 문책을 당할 까봐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단장 대리 관옥형도 역시 이 사건이 국제문제가 될 까봐 두려워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시체, 소지품, 그리고 말을 모두 소각시켰다. 증거를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도, 일기, 필기록은 보존했다. 그는 상관에게 이 사건을 보고하지 않았고 병사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중국측은 외교로 사건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관동군은 자기들이 직접 중국측과 협상하여 만주를 침략할 구실로 삼으려 했고 일본정부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양측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동안에 6월 26, 27일에 발생한 사건이 9월 6일에야 중국 측의 조사로 그 진상이 밝혀졌다. 9월 16일경에는 양국이 대략 합의안에 동의하여 만보산 사건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사이의 제반 문제가 외교적으로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후 9월 18일에 관동군은 만주 침략을 감행한다.


1931년 8월 중순,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본국에서 육군 군사과장 나가타 데쓰잔 대좌, 보임과장 오카무라 야스지 대좌, 작전과장 이마무라 히토시 대좌, 작전과장 다테가 와 요시쓰구 소장등과 회담을 하여 만주와 몽고 침략 계획을 세웠다. 만주로 돌아온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 중국과 충돌하였을 때 본국의 명령을 기다려서 행동해야 하는 가고 물었다. 혼조는 군사령관으로서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겠으나 독단으로 전쟁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본국 육군참모들과 합의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 계획은 관동군 사령부 조례 제3조에 의거하여 소동진압을 위해 관동군을 출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로희토 일본 천황은 일본 육군이 계획하고 있는 만주와 몽고에 대한 무력침략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1931년 히로히토 천황은 미나지 지로 육군대신에게 군내부의 책동을 막으라고 명령했고 와카스키 레이지 총리에게는 중국과 친선을 유지하라고 당부했다. 전 수상이며 가장 원로 정치인인 사이온지 긴모치도 중국과 무력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의 호전적인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9월 11일 천황은 다시 육군대신 미나지 지로를 다시 불러서 나카무라 사건, 만보산 사건등이 전적으로 중국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천황이 만든 군대가 중국을 중국을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엄중히 지시했다.  원로 정치인 사이온지 긴모치도 육군대신 미나지 지로에게 만주와 몽고는 중국 영토인데 외무대신이 아닌 군이 끼어드는 것이 건방지다고 질책했다. 


육군본부도 할 수 없이 관동군의 계획을 말리기로 결정하고 9월 14일 다테카와 요시쓰구 소장을 만주로 보냈다. 그는 관동군의 만주 침략에 찬성했으나 명령에 따라 만주로 향했다. 그러나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고 기차를 타는 등 늑장을 부렸다. 그 사이에 참모본부 하기 모토 긴 고로 중좌는 다테가와가 봉천에 도착하기 전에 거사를 해야 한다는 전문을 비밀리에 보냈다. 


하시모토의 비밀 전문을 3통이나 받은 관동군 참모장등 지휘관들은 뤼순의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계루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들은 봉천에 모여 작전 실행 여부를 놓고 장시간 토론을 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9월 16일 오후 9시 반부터는 술을 마시면서 토의를 계속했다. 17일 오전 3시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나무젓가락을 세워놓고 오른쪽으로 자빠지면 중지, 왼쪽으로 넘어지면 결행하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3번 다 오른쪽으로 자빠졌다. 회의 결과는 중지였지만 젊은 강경파 장교들은 어정쩡한 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18일 오후 7시에 중지명령을 하달하려 온 다케가와 소장이 도착했다.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와 세이시로는 애주가인 그와 술을 마시며 그를 설득했다. 다케가와는 이타가키에게 “뒷일은 자네에게 맡긴다” 며 자신은 이 일을 묵인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만몽 침략을 떠들고 다니던 이시하라 간지는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계루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20분, 봉천 외곽 북쪽 7.5 키로 미터 떨어진 류타오후의 철도에서 폭발 사고가 났다.  그러나 사고 30분 후 특별열차가 시속 80 km로 무사히 이 지점을 통과했다. 관동군 독립수비대 2대대 3중대는 철도에 피해가 없을 정도로 폭발하게 해 놓고, 중국 동북군(장쉐량 군)이 저지른 사건이라고  상부에 거짓 보고를 한 것이었다.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의 명령이라고 하며, 독립수비대 2대대와 5대대에게 동북군 7 여단을, 2사단 29 연대에게 봉천성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만주사변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뒤에 사건의 보고를 들은 혼조 관동군 사령관은 봉천 공격에 동의했다. 19일 새벽 1시 7분 관동군은 도쿄 육군본부에 장쉐량이 철도를 폭발했다는 전보를 보냈다. 오후 6시 가나야 참모총장이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관동군 사령관 혼조에게 전해졌다. 혼조는 하얼빈을 공격하려는 이시와라 간지등에게 공격중지를 명령했다. 이에 이시하라 간지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벌렁 들어 누웠는 데 참모장 이타가키가 하얼빈 대신 길림성을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봉천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길림성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길림성 공격의 표면상 명분은 길림성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보호였다. 관동군의 만주침략을 막으려고 온 육본작전과장 다케 나와 요시쓰구 소장 또한 이 길림성 공격 계획을 듣고 감탄했다. 그러나 사령관 혼조는 참모들의 끈질긴 설득에도 이를 반대하다가 참모장 이타가키와 3시간여의 독대 끝에 결국 동의하였다. 사령관의 제가를 받은 관동군은 완전히 고삐가 풀렸다. 


일본군 공격을 보고 받은 장쉐량은 일본영사에게 항의했다. 놀란 일본영사는 관동군에게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력 침략중단을 요구했다. 이때 철도 폭파 사건에 참여했던 하나야 타다시 소좌가 군도를 뽑아 들고 “이 칼이 아무것도 베지 않고 도로 칼집에 들어가는 일이 없을 것이요”라고 협박했다.

류타오후 철도 폭파를 해놓고 중국 동북군이 했다고 허위보고를 했던 2대대 3중대 105명은 즉각 북대영(장쉐량의 동북군 진영)을 공격했다. 밤 11시에 사령관 혼조는 철도폭발 허위보고를 받고 좀 망설이다가 철도를 보호하고 동북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9월 19일 오전 8시 30분 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기다렸던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는 본국 참모본부와 천황의 재가도 없이 1개 여단과 2개 비행중대를 만주로 보냈다. 조선은 일본의 영토였고 만주는 엄연히 중국의 땅이어서 천황의 허락 없이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병력을 이동한 것은 군법회의 감이었다. 


관동군 2사단은 봉천을 포위 공격하여 20일에 함락했다.  관동군 사령부는 뤼순에서 봉천으로 이동했다. 20일 오전 7시에 장춘을 점령하고 21일에 지린성(길림)이 함락되어 일본은 남만주를 점령했다. 장쉐량이 일본군과 싸우지 말고 후퇴하라는 지시를 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큰 저항 없이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9월 22일 오전 10시 각료회의가 열렸다. 고삐가 풀린 암말처럼 본국 정부의 허락 없이 만주를 침략하고 조선군이 국경을 넘는 일이 벌어졌으니 육본과 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는 만주사변이 육군의 계획된 행동이라고 육군을 힐책했다.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데 조선군이 국경을 넘어 만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회의 중에 밝혀졌다. 

총리 와카쓰키 레이지로는 19일에 관동군과 조선군에게 사태를 확대하지 말고 원대복귀를 명령했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이미 만주에 들어갔고 관동군이 남만주를 함락한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와카쓰키 총리는 “뭐라고? 이미 만주로 들어갔단 말인 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예산에서 특별군사비를 지출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이와 같이 와카쓰키 총리가 본래의 입장과 정 반대되는 태도를 취한 이유는 내각 중 한 명이라도 사퇴하면 전 내각이 물러나야 한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경파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면 내각의 총사퇴를 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와카쓰키 총리는 관동군의 남만주 점령과 조선군 월경을 인정해 주고 특별예산을 편성해 주면 만주침략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관동군은 멈추지 않고 러시아가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는 북만주로 진격했다.  

그러나 장쉐량은 일본군의 전면적인 만주 침략을 믿지 않았고 만약 일본군과 자신의 군대가 싸우게 되면 자칫 병력손실로 인한 자신의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 될 수 있으면 전면전을 피하려 했다. 장쉐량의 군대는 정규군 30만 비정규군 18 만의 대군이었다. 중국군벌 중에서 최대 규모의 함대와 300여 대의 전투기를 보유한 공군도 있었다. 그리고 봉천에는 병기창이 있었는 데 이곳에서 는 2만 5천 명이 대포, 포탄, 기관총, 소총, 탄환 등을 생산했다. 이에 비해서 관동군은 불과 1만 5천이었다.  그런데 그는 대부분의 병력을 텐진과 베이징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일본의 도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종래의 도발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외무성은 만주를 점령하려는 의도는 없으며 그저 철도를 보호하기 위한 출병이라고 장쉐량을 안심시켰다. 장제스도 일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무력침략을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가 1931년 11월에 치치하얼이 함락된 후 에야 알게 되었다. 


장쉐량은 베이징 미국병원에서 장티푸스 치료를 받고 있던 중에 일본의 침략에 대한 보고를 받고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광동군의 도발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동북군 (자신의 군대)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모든 무기를 병기고에 보관한 체 스스로 물러날 것이며 일본군에게 최대한 협조하라.

2. 난징 정부에 알려 국제연맹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도록 하라.

3.  뤼순으로 대표를 파견해서 일본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9월 23일 봉천에 있던 동북군과 정부를 금주로 옮겼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관동군에게 근거지를 내준 동북군 장병들은 반발하여 무더기로 관동군에 투항했다. 국민당 난징정부는 국제연맹에 제소했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국제연맹은 리턴 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했다. 결론은 일본이 만주의 이권을 관리하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만주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국재연맹을 탈퇴했다.  


10월 15일 관동군은 투항한 동북군을 앞세워 치치하얼을 공략했다. 마진산이 선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11월 9일에 함락되었다.  국제연맹의 대응이 지지부진하고 일본의 목적이 만주 전체를 강점하는 것임을 알아차린 장쉐량은 베이징의 병력과 패잔병을 금지(진저우)에 집결시켜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화북군벌이 베이징을 공격하여 할 수 없이 금지의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시켰다. 혼란에 빠진 동북군은 1932년 1월 3일 조선군 20사단에게 진저우를 내주었다. 1932년 2월 5일 하얼빈도 일본군 2사단에 점령되었다. 이렇게 일본은 북만주와 남만주를 차지했다. 


4. 박희광과 3인조 암살단 

 

일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1917년 11월 15일,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러시아 제 민족의 권리선언”을 했다. 러시아내에 살고 있는 100여 개의 소수민족에게 “민족자결권”을 원칙으로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취지의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다. 아시아의 모든 약소국 식민지 국가들은 전후 독립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동맹국 즉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트만 제국등의 식민지 국가들의 처리가 목적이었다. 반면에 레닌은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을 통한 제국주의 타도가 목적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국가들은 윌슨에게 희망을 걸고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사방국가들에게 독립을 호소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반면에 레닌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서 자금, 무기공급, 고문 파견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물론 레닌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산주의 세력 확장이었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은 레닌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상해임시정부, 만주와 시베리아의 무력 항일 운동도 그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김립암살사건과 자유시 참변 이후 레닌은 조선은 아직 사회주의혁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선언하여 원조를 끈었다. 사실은 한인독립운동단체의 극심한 분열로 원조대상이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중반의 상해임시정부는 사회주의 계열의 이탈과 레닌의 원조 중단으로 극심한 지금 난에 봉착해서 와해 직전이었다. 거기 다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자들은 중국인들의 반한감정에 시달렸다. 일본이 만주침략을 획책하기 위해서 만보산사건등을 조작하여 중국인과 한인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1926년 12월 14일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었다. 그 후 조직개편에 따라 주석, 내무부장등을 맡았지만 그는 난파선의 선장이었다. 임시정부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서 건물주로부터 고발당했다. 직원들, 잡일을 하는 급사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니 모두 떠났다.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도 제 밥벌이를 찾아 흩어졌다. 김구는 정부예산의 대부분을 재중국한인교민단체의 성금, 중국인 기업체에 근무하는 한인, 시장상인, 중국의 군인 또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한인들의 기부금에 의존했다. 


이승만은 1925년에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김구는 1928년부터 계속해서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승만은 지금의 일부를 보냈으나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이 대답은 항상 자신도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수많은 무장독립단체들을 모두 통합하여 대한통의부라는 일종의 군정부를 만들었다. 1924년 김구는 대한통의부 오동진 선생에게 만철연선지역의 친일파를 토벌하리는 특명을 내렸다. 오동진은 김광추를 대장, 박희광과 김병현을 대원으로 하는 3인조 암살단을 조직했다. 당시 만주에는 재만조선 인민회 산하에 친일단체인 보민단과 일민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여순조선인민회 서기 정갑주는 여순고등계 밀정으로 악명이 높았다. 1924년 6월 1일 그들은 무순에 도착하여 대남관동흥려관이라는 여관에 투숙했다. 그날 밤 대장 김광추는 여관에 머물고 김병현과 박희광은 윤영기의 안내를 받아  정갑주의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자고 있는 정갑주를 깨워 이불을 덮고 정갑주 부자와 이내에게 육혈포를 쏘아 정갑주와 그의 아들은 즉사했고 아내는 중상을 입었다. 그 후 그들은 조선인민회 문간에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을 위해서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1924년 6월 1일 암살현장 사형선고문>라는 방이 붙었다. 


3인조 암살단은 6월 1일 무순에서 일을 저지른 후 6월 4일 봉천으로 이동했다.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 회원인 최정규를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일 합방 당시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며, 남만주일대에서 만주보민회를 조직하여 무장항일세력탄압,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정보수집, 항일운동가 체포, 폭행, 살상하거나 일본에 넘기는 등 직업적인 친일파였다. 


6월 7일 대낮에 그의 집에 칩입하여 이불속에 뒤엉킨 가족을 향해 권총을 난사했다. 장모는 즉사했고 부인 허균은 중상을 입었고 며칠 뒤 사망했다. 정작 최정규는 책상 밑에 숨어서 살아남았다. 3인조 암살단은 최정규의 집 부근의 전신주에 최정규를 암살한다는 내용과 의용군 제5중대 철도연선 토벌감독 김광추, 박상만(박희광의 예명), 김병현의 이름을 날인한 방을 붙였다. 


같은 날,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했다. 그 날밤 일본 고관들이 출입하는 고급 조선요릿집 금정관에 둘러 독립운동자금 300원을 받아 나오던 중 중국 관헌에게 발각되어 박희광과 김병현이 체포되었다. 김광 추는 도주 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6월 15일에 일본영사관 경대(경찰)에 포위되어 총격전을 벌리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외에 3인조 암살단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를 대련에서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1927년에 그녀가 스파이 활동을 그만두었다는 기록과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데 1924년에 3인조 암살단은 박희광과 김병현이 체포되고 김광추가 사살되어 와해되었다. 이용구는 1912년에 사망했다. 


참고

1. 나무위키: 황고둔 사건  

2. 나무위키: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

3.나무위키: 만주사변, 나카무라사건

4.위키피디아 박희광

5. 디지털 구미 문화대전 박희광(디지털 구미문화대전에는 1924년 7월 27일에 김추광이 사망하고 박희광과 김병현이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데 김추광의 사망일이 1924년 6월 15일로 기록되어 있어서 위키피디아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의 전말이 더 정확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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