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시변과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사건
1928년 관동군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와 철도대신 오가와 헤이키치로는 육군대신 시라카와 요시노라에게 만주 군벌 장쭤린 암살 계획을 보고하면서 중국인 건달을 매수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육군 기밀비에서 3천 엔을 몰래 마련해 주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중국정부에 대한 무력 도발을 반대했기 때문에 그가 공개적으로 관동군 독자적인 행위를 방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관동군과 일본군부는 일본정부의 허락 없이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만주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앞세워 허수아비 나라를 만드는 데는 이에 반발하는 중국과 반대하는 국제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군부는 여론전환을 하고 중국의 반발을 잠재우는 사건을 만들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이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다음날, 천황을 죽이거나 부상당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중국은 열광했다. 중국 내의 신문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들은 일왕 암살 실패를 아쉬워하고 이봉창에게 지사 또는 의사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의 용기를 극찬했다. 만보산사건 등, 만주에서 일본정부가 중국사람과 조선사람 사이를 이간하려는 정책이 무너지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격렬하게 항의했다. 공식사과와 정정보도뿐만 아니라 책임자 처벌까지 요구했다. 무력충돌을 우려했던 국민당 정부는 일본정부의 의견을 대강 들어주었다.
이봉창 의사 의거가 열흘정도 지나면서 들끓던 여론은 진정되어 가는 듯했다. 그런데 1932년 1월 18일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일본사람 일련종 승려 아키라마수 텐사키와 미즈카미 히데오가 일본인 신도 3명과 같이 상하이 마옥산로에 있는 삼우실업사에 나타났다. 이때 공장노동자들이 의용군을 조직하여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일본인 승려 일행은 마치 간첩이 염탐하는 것처럼 훈련장을 기웃 꺼렸다. 이때 갑자기 중국인 깡패들이 나타나서 승려 일행을 구타했다. 부상당한 일본 승려 한 명이 일본의원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본낭인들이 삼우실업사를 불태웠다. 중국경찰이 살해당했다. 이후 상하이에서는 일본인들의 폭력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1월 24일에는 일본공사 시게미츠 아오이의 공관이 불에 탔다. 일본 측에서는 이것이 중국인들의 소행이라고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일본관동군 참모 타나카 류키치와 헌병대위 케분 시게토의 조작이었다. 승려일행을 공격한 중국인 깡패는 일본 측에서 고용했고 일본공사 공관에 불을 지른 범인은 일본인이었다.
1월 20일 일본 측은 상하이 시정부에게 사과, 범인의 징계, 배상, 항일운동의 단속을 요구했다. 48시간 이내에 만족스러운 답이 없으면 일본군이 자유행동에 들어가겠다고 협박했다. 상하이 시정부는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전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일본은 상하이 일본교민을 보호해야 하니 중국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답을 기다리지 않고 장갑차 20여 대를 출동시켰다. 일본은 상하이에 군함 30여 척, 항공기 40대, 장갑차 수 십 대, 병력 6000여 명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중국은 19로군이 상하이를 방어하고 있었다. 만주사변 때에는 일본군의 도발에 미온적인 대응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1월 23일 군장교들은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일본군침략에 대한 작전계획을 논의했다. 상하이에는 19로군 78사단 소속 6 개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관동파 군벌인 19로군 사령관 차이팅카이는 일본침략에 저항할 결심과 시민들의 협조를 호소하는 “상하이-오송민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했다. 그리고 19로군 전병력인 60사단, 61사단, 78사단을 투입했다. 모두 9만 명에 달했다. 여기에 국민당정부 참모총장 주페이더와 군정부장 허잉친은 헌병 제6단을 난징에서 상하이로 파견하여 갑북 방어 임무를 주었다. 19로군은 정신무장이 잘되어 있고 전투력이 강한 정예부대로 철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19로군은 즉각 국제공동조계를 포위하고 참호와 토치카, 지뢰지대를 건설하는 등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본이 도발한 사변이었지만 당사자인 일본과 중국은 서로 다른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다. 일본은 만주에 허수아비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열강의 여론을 만주 이외의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은 전면전으로 확대할 의도가 없었다. 상하이에 조차권을 가지고 있던 열강들도 지속적인 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정전 논의가 시작되었다.
한편 난징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의 상하이 침공을 만주사변의 연속으로 보았다. 일본군이 상하이, 난징, 창치앙(장강) 유역까지 점령하려고 한다고 믿었다.
1932년 1월 28일 오후 11시 상하이 공안국(경찰국)과 상하이 정부는 시오자와 소장으로부터 뜻밖의 공문을 받았다. “제국의 해군은 다수의 일본인이 거주하는 갑북일대의 치안유지에 관하여 불안을 확대하고, 이에 병력을 배치하여 치안에 임하려 함. 본인은 중국군대가 갑북방면에 배치한 적대시설의 조속한 철수를 중국 측에 요구함.”라는 내용이었다. 갑분은 조계지 밖이어서 중국 통치 지역이었다. 당황한 중국 측은 일본 측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공문이 날아든 지 30분이 겨우 지났는 데 수십 량의 장갑차를 앞세운 일본 해군 육전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833명의 병력이 북사천로-송호로의 천통암역, 구홍로-보산로, 북사천로-보흥로 3개 방면으로 쳐들어왔다. 상하이 시 정부는 방금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고 전보를 보냈는 데 또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전보를 난징정부에 보냈다.
에스터 호텔에 투숙 중이던 장제스의 고문 윌리엄 헨리 도널드는 즉시 우태청 상하이 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화기 너머로 울리는 포성과 총성을 들려주었다. 상하이 서양인들은 야회복을 입고 몰려나와 술과 커피를 마시거나 샌드위치를 먹으며 일본군과 중국군의 교전을 구경했다. 조계지의 서양사람들은 사태 수습을 위해서는 일본군이 조속히 중국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본이 중국에게 무리한 요구를 지속적으로 하자 오히려 중국 측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장쭤린 암살과 만주사변은 관동군이 일본정부의 사전 승인 없이 군 독자적으로 실행에 옮긴 사건이었다. 만약 군이 본래의 목적을 달성 못했다면 명령 불복종으로 군법회의에 넘겨질 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정부가 군에 협조하는 양상으로 사건이 전개되었다.
1932년 1월 12일 , 상하이 주재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상하이를 출발하여 1월 15일에 도쿄에 도착했다. 외무성에 상하이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사태가 일본과 중국의 관계를 벗어나서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외무성 간부들도 이에 동의했다. 1월 25일 요시자 켄키치 외상은 빨리 상하이로 돌아가서 사건을 잘 수습하여 악화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시게미쓰는 29일에 고베를 출발하여 3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가 상하이 사변 발생을 보고받은 것은 1월 30일 나가사키에 기항했을 때였다. 사태를 자세히 조사한 그는 2월 2일 요시자와 외상에게 62호, 63호 전보를 쳤다.
“28일 중국 측이 위리 총영사의 요구사항을 모두 승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거류민단의 주요한 단체인 시국위원회는 여기에 절대 반대하였다. 즉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하면서 동 위원회의 농성장에 모여있던 재향군인들은 울기도 하고 흥분하여 총영사에 대해서는 물론 해군 측을 마찬가지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해군 측이 끝까지 예정대로 행동을 단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구락부인들의 소요는 만세의 소리로 일변하였다.”(62호)
63호 전보는 육전대에는 극우 호전파가 많고 상하이 거류민단의 강경한 분위기 때문에 중국 측이 타협안을 모두 수용했는 데도 불구하고 군사행동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시계무쓰 공사 자신이 일본의 부당한 침략을 인정하면서도 요시자와 외상에게 즉각적인 육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요시자와 외상은 이미 1월 30일에 육군대신 그리고 해군대신과 논의하여 육군 파병에 합의했다. 2월 2일 각의에서 육군 파병이 결정되었다. 1월 31일 요시자와 외상은 영국, 미국, 프랑스 대사를 불러 중국 측이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방어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상하이 외교관들은 일본이 먼저 중국군에 공격했음을 지적하고 일본정부에게 침략행위를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일본 측은 상하이 주제 영국 관헌에게 중국군에게 일정한 거리로 퇴각하라는 훈령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차이팅카이 19로군 사령관은 78사단 6단에게 일본군 격퇴를 명령했다. 중국군은 3만 5천, 일본군은 6천 명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월등이 많은 함대와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어서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화력도 우세했다. 그렇지만 중국군은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보흥로로 진입한 일본군 장갑차들은 중국군이 주위 건물 창문 뒤에 숨어있다가 던지는 수류탄에 맞아 하나하나 격파되었다. 중국군은 일본군이 거리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급습하여 섬멸했다. 29일 오전 4시, 일본 항공모함에서 20 여기의 함재기가 출격하여 육전대를 지원하기 시작했으나 중국군은 물러서지 않고 납북을 지켰다. 일본육전대가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일본군은 상하이 시내에 더욱 맹렬한 폭격을 가했다.
1월 29일, 영국과 미국의 주선으로 첫 번째 정전협상이 열렸다. 휴전에 동의했어 나 30일에 다시 교전이 시작되어 31일부터 3일간 휴전에 합의했다. 그런데 일본 측은 본국에서 증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 휴전에 동의한 것이었다. 1월 30일, 일본은 육전대 474명, 2월 1일에는 525명을 파병했고 49척의 3함대를 새로 편성하여 상하이로 출발시켰다. 3함대의 사령관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이었는 데, 그는 종래의 1 파견함대, 1 수뢰전대, 순양함 3척으로 구성된 3 전대, 항공모함 가가, 호쇼 등을 포함한 1 항공전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상하이 공격의 총지휘관이었던 시오자와가 노무라로 교체되었다.
2월 2일, 미국, 영국, 프랑스는 일본과 중국에게 쌍방군대가 서로 접촉지점에서 철수할 것을 포함하는 정전에 관한 통첩을 했으나 일본 측은 이를 무시하고 2월 3일에 총공세를 재개했다. 2월 4일 보흥로 일대가 소이탄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었고 2월 7일에는 상하이 북부 오송지역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군은 일주일에 걸친 일본군의 공세를 잘 방어했다.
일본 육군은 2월 5일 가네자의 9사단, 제3, 제5, 제12 근위사단의 일부 부대를 차출하여 혼성여단을 구성하여 상하이로 파견했다. 3차 정전 교섭도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되었다.
일본의 상하이 침략은 중국 내 항일 여론을 들끓게 했다. 침략하는 일본군과 싸우지 않으면 정치적인 생명이 위태로웠다. 장광나이가 19로군 간의 전병력을 상하이로 보내고 29일 장광나이, 차이팅카이, 송호경비사령관 대극이 연명으로 일본과 철저히 싸울 것을 다짐했다. 12월 15일부터 공직에서 물러나 있던 장제스도 장광합작에 따라 평위상, 엔시산, 장쉐량과 함께 군사위원에 임명되었고 국민당정부는 전시체제로 돌입했다. 왕징웨이는 행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직속부대인 2사단을 먼저 상하이로 보내고 87사단과 88사단의 파견도 결정했다. 일본군이 양자강을 따라 올라올 가능성을 고려하여 수도를 난징에서 뤄양(낙양)으로 옮겨 장기항전을 준비했다.
주석 린썬, 행정원장 왕징웨이 등이 카이평을 거쳐 뤄양으로 떠났다. 2월 1일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온 일본군 함정들이 난징 시내를 포격했다. 난징과 상하이를 잇는 철도망이 붕괴되었다. 군사 위원회는 쉬저우에서 이틀간의 회의 끝에 중국을 5개 방위지역으로 나누어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이 방위계획에는 240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장제스가 북벌을 단행하여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여러 군벌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한 것처럼 보이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장제스의 지방 장악력은 극히 약했다. 종래의 군벌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고 말로만 장제스에게 충성했다. 5개 방위지역의 군벌들은 장제스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모두 일본군에게 자신의 군대가 피해를 입을 까봐 파병을 꺼렸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19로군을 칭송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을 돕기 위한 애국운동이 벌어졌다. 루쉰, 마오둔, 예성샤오, 위다푸, 후스, 저 우위통등 43인의 저명인사들이 연명으로 “세계에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면서 중국의 반제투쟁의 지원을 호소했다. 2월 7일에는 리다, 양한성, 저 우구청등 127명의 저작가들이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총파업, 수업거부를 통해 일제에 저항하는 뜻을 표했다. 그리고 농민, 노동자, 상인, 학생, 군인들의 일치단결을 호소했다. 언론도 군대의 전투 상황을 상세히 보도하여 항일여론을 고취시켰다.
2월 14일, 87사단과 88사단 지휘관에 장즈중이 임명되었다. 상하이의 중국군은 5만 명으로 증강되었다. 방위 진지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일본 상하이 공략의 주력부대인 9사단이 2월 9일과 10일에 히로시마 우시나를 출발 하여 14일부터 16일에 상하이에 들어왔다. 2월 13일 미국, 영국, 이탈리아 총영사는 상하이 무라이 일본 총영사에게 육군의 파병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다. 일본 측은 당신네 나라도 상하이에서 중국군의 공격을 받으면 본국에서 군대가 들어와서 방어할 것이라며 이를 묵살했다. 2월 16일 프랑스 조계지에서 중일 정전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일본 측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되었다.
2월 17일 자정, 중국군 지휘부는 오송, 강만, 갑북, 진여, 남시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간만역의 남쪽은 19로군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 군이, 북쪽은 5군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군이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지휘관은 19로군 사령관 장광나이였다. 우익 군은 19로군 군장 차이팅타이가, 좌익군은 5군 군장 장즈중이 지휘했다. 장제스는 중국군의 방위태세를 점검하고 중국군의 승리를 자신했다. “상하이 주변의 지형은 매우 복잡하다. 적군은 어쩌면 정면공격을 하지 않고 우리 쪽의 배후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진지에는 작은 강이 종횡으로 흐르고 있어 수비하기 쉽다. 일본군이 만약 전면공격으로 나온다면 그 희생은 우리의 10배 이상이고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 -장제스
2월 18일, 일본은 중국 측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9사단이 상하이에 도착한 후 요시자와 일본외상은 “이제 9사단이 도착하였기 때문에 19로군의 퇴각을 요구한다. 만약 듣지 않으면 일격을 가해 이를 격퇴시켜 나간다.”라고 발표했다. 외상의 지시에 따라 무라이 총영사는 상하이 시장 우테청에게, 9 사단장 우에다 켄기치는 19로 군장 차이팅카이에게 같은 요지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우테청을 비롯한 중국 측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저항의 뜻을 분명히 했다. 통첩의 유예기간은 단 하루였다. 2월 20일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국군은 일본군의 너무나 단조로운 돌격을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잘 방어했다. 방어에 성공한 중국군은 반격에 나섰다. 의기양양했던 일본군은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23일의 공세애도 패배하자 노무라 중장은 누적된 피해와 부족한 탄약사정을 인정하고 공세중지명령을 내리고 본국에 원군 요청을 했다. 크게 고무된 장즈중은 휘하 사단장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22일부터 시작된 묘행진의 일전을 거쳐 우리나라, 우리 군대의 명성과 영예는 국제적으로 10배쯤 급상승했고, 각국의 여론은 우리 군의 용감성에 대하여 매일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왜구의 명예는 일락천장이 되었던 것이다.”
25일 새벽 일본군은 다시 강만에서 묘향진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다. 소장묘의 중국군 88사단 소속 독립부대인 2단에게만 1천 발 이상의 포탄을 퍼부었다. 휘하 중대장들이 줄줄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은 2단은 결국 소장묘에서 철수했다. 중국군은 26일 오전 강만진의 수비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양가교까지 병력을 퇴각시켰다.
일본은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2월 23일 내각회의에서 육군대신 아라키 시다오 등의 주장으로 2개 사단 증파를 결정했다. 2월 24일, 1사단과 14사단을 증파하고,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를 신설하여 전 관동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2월 25일, 일본육군참모본부 제2부는 상하이사변을 국지적으로 해결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일본외무성도 군부의 방침에 호응하여 국제연맹 사무국장, 주중공사, 상하이 총영사에게 “우리로 서는 시국을 이용하여 상하이 지방에서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따라서 동 지방에서 전관 거류지를 설정한다 거나 혹은 일본인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과 같은 저의가 없음은 물론 오히려 상하이 개발의 공모자인 영국, 미국, 프랑스에 대해 충분한 경의를 표한다. 특히 공동조계 공무국을 존중하여 상하이가 국제도시 다운 면목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 생각하고 있는 형편임을 해당국에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2월 25일과 26일, 외무성은 중국군이 일정지역 밖으로 나간다면 정전협상에 응할 의사가 있음을 밝혀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에 상하이 부근의 외국인 보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상하이에 있는 열국 대표자들을 포함한 원탁회의 개최를 환영한다는 의사를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장제스는 일본군이 상하이 북서쪽 유하 방면에 상륙하여 상하이에 있는 중국군을 포위할 것을 염려하여 25일 장광나이에게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2차 결전 때를 29일과 3월 1일 양일로 하고 아군 후방부대를 모두 전선에 수송했다. 그 밖의 부대는 6일이 지나지 않으면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 이 며칠 동안은 어떻게 든 전선의 병력을 절감하여 부대를 각지에 모으고 유사시에 대비, 총병력의 반 이상을 예비병력으로 보존하라. 특히 유하 방면에는 3개 단의 병력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상세한 답을 기다리겠다. -중정”
그러나 장광나이와 차이팅카이는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전 행정부장 쑨커의 소개를 받은 가와시마 요시코가 차이팅카이에게 일본군은 갑북, 오송 방면으로 상륙할 것이라고 거짓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와시마 요시코는 망한 청국의 공주로서 일본에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 숙친왕는 일본의 힘을 빌려 만주와 몽골에 독립국가를 세워 청을 부활시킬 꿈을 가지고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자녀를 모두 일본에서 교육받게 했다. 요시코는 아버지와 절친한 일본인 카와시마 나니와의 양녀로 자랐다. 일본은 그녀를 스파이로 만들어 이용했다.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주제로 한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교포 배우 매기 한이 요시코로 분 한 바 있다.
2월 27일, 일본이 영국 측에 정전교섭을 의뢰하여 중국과 일본이 동시 철수에 합의했다. 2월 29일 시라카와 요시라 사령관이 사령부 막료들과 함께 중순양함 다에다카를 타고 나타났다. 이들의 상륙을 돕기 위해서 일본군은 3월 1일 중국군 88사단이 수비하던 원돈, 양가교 일대를 공격했다. 그리고 시라카와 사령관이 탄 디에자카와 11사단이 탑승한 대함대가 그 위용을 들어냈다. 유하지역에서는 장광나이의 오판으로 교도총대 소속 1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순식간에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멸했다. 오전 7시, 칠료구와 육병구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장즈중은 1개 여단을 구원하려 했으나 이들을 수송할 자동차가 부족하여 실패했다. 수세에 몰린 19로군 지도부는 장제스에게 원병을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일본과 전면전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이를 거절했다.
19로군 지휘부는 이미 유하 방면에 일본군 14사단까지 상륙했다고 오판하여 전투기, 장갑차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1일 밤에 전군을 철수시켰다. 14사단이 상륙했다는 정보 또한 요시코가 퍼뜨린 거짓 정보였다고 한다. 중국군 5군은 19로군 철수를 2일 오후 2시에야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홀로 일본군과 싸워 많은 피해를 입고 뒤늦게 태창-안정진 선으로 후퇴했다. 이로서 상하이 사변은 일단 끝났다. 국제연맹과 열강의 중재로 중국군과 일본군 양측 군대가 상하이에서 철수하는 데 합의하여 5월 5일 송호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중국으로서는 자국 영토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는 굴욕적인 합의였다. 만주를 일본에 내주고 상하이의 주권까지 상실했으니 중국 내의 반일 감정은 들끓었다. 여론은 일본과의 전면전을 요구했다. 이를 회피하는 난징 국민당 정부를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1932년 6월 14일 제62회 중의원 회의에서 만주국 승인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1932년 9월 15일 일본정부는 만주국과 일만 의정서를 체결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상하이 사변이 진행되는 동안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한국교민단은 위로대를 조직하고 면포 200포와 의약품등 약 1천 원에 해당하는 구호품을 19로군에게 보냈다. 2월 1일에는 독립당 특무대가 중국을 돕고 일본에 타격을 주자는 내용의 “상하이 동포에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2월 27일 상하이 한인 단체들은 대만인 단체들과 함께 일본의 상하이 침략을 고발했다. 그리고 피압박민족인 한인과 대만인이 협조하여 세계평화에 이바지하자는 유인물을 비행기를 이용하여 살포했다. 사회주의 단체인 상하이한인반제동맹도 잡지를 발간하여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19로군 송호전투에는 많은 상하이 한인 유학생들이 참여했다. 복단대학에 유학 중이던 안병무는 학생의용군에 들어갔다. 그는 중국학생들과 함께 위로, 통신, 운수, 교제, 문서의 다섯 부서로 나누어 일주일 이상 전투를 도왔다. 김석은 중국구국학생의용군에 가입하여 19로군을 위한 의연금 모금 활동을 했다. 한인학생들은 구호대를 조직하여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박시창, 오명 등은 중국군과 함께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이렇게 한인 학생들은 중국학생들과 협조하여 공동의 적 일본에 저항하여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보산사건으로 인한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적개심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 발발은 중국인의 한인 혐오 감정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김구는 그의 회고록 백번일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왜구의 중한 양 민족에 대한 “감정악화 정책”의 일환으로 “만보산 사건”이 터졌다. 이를 기화로 중국 상인과 노동자들에 대한 감정이 폭발하여 조선곳곳에서 무뢰한들이 총동원되어 그들을 만나는 대로 때려죽이는 소동이 벌어졌다. 중류이상의 중국인들은 만보산 사건이 왜구의 간계임을 간파하였지만, 하류계급 사이에서는 “고려인이 중국인을 때려죽인다.”는 악감정이 이봉창 의거 이후에도 최영택 같은 악한을 사주하여 중국인집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물을 약탈하게 하는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났다. 이로 인해 주로 자동차와 전차의 한인 검표원들이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구타당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자금난에 허덕이는 임시정부는 상하이 사변으로 일본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할 기회를 노리며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던 윤봉길과 악화된 한중관계를 타개하여 임시정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김구는 서로 의기가 상충했다.
윤봉길은 1908년 5월 10일 충청남도 예산군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7살 때 큰아버지 윤경에게서 한문공부를 했다. 1918년 11 살이 되던 해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았다. 학교에 가면 일본말을 써야 했다. 교장은 일본인이었다. 소년 윤봉길은 학교가 마음에 안 들었다. 다니기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3.1 운동이 일어났다. 3월 3일 예산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윤봉길은 덕산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했다. 그 후 일본 식민지 교육을 받아야 하는 보통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부모님에게 자퇴를 선언했다. 최병대선생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 와 함께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새로운 지식이나 국내외 정세를 외면하지 않았다. 삼일운동 이후 일본의 문화통치로 새로운 지식에 접촉하기는 비교적 용이했다. 아껴둔 돈으로 잡지를 사서 정독하고 동생 남의에게 부탁해서 책을 구해서 열심히 읽었다. 14세 되던 해에 매곡 성주록의 서당 오치서숙에서 사서삼경, 고문진보, 국조명신록 등을 배웠다. 스승에게 배운 한학과 자습한 새로운 지식을 갖춘 윤봉길은 17세에 서당의 훈장이 되었다.
윤봉길은 어느 날, 길을 가던 중 나무 팻말을 한 아름 안고 가는 청년과 마주쳤다. 그는 윤봉길에게 글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가 안고 있는 나무 팻말은 비석대신 누구의 묘인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글을 몰라 자신의 묘소를 찾을 수 없으니 이 중에서 아버지 이름이 적힌 팻말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팻말에서 아버지 이름을 찾아 주었더니 어디서 그 팻말을 뽑았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버지 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묘까지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여기서 윤봉길은 무지가 식민지지배에서 벗어나는 데 큰 극복해야 할 장애라고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26년 그는 동료들과 함께 야학당을 열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배울 수 있었다. 한글, 역사, 지리, 산술, 과학, 일어,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다. 1927년에는 야학교재로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제1권은 “조선글 편”이라 헸는 데 한글 교재로 사용했다. 제2권은 “계몽 편”으로서 조선청년이 가져할 자세를 가르치기 위한 책이었다. 제3권은 “농민의 앞길 편”이라고 하여 농민이 가져야 할 공동정신과 노동의 의미, 자주, 자유, 평등사상을 강조했다.
윤봉길은 또한 농민들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 농민회를 조직하여 농촌부흥운동을 펼쳤다. 1927년 3월 동료들과 함께 목계농민회를 설립하여 오늘날 농업협동조합과 비슷한 기능을 하게 했다. 농산물의 증산운동, 공동구매조합운동, 토산품애용운동, 부업장려등을 펼쳤다. 1929년 2월 23일에는 위친계를 조직했다. 일종의 계모임인 데 목적은 집안의 장남끼리 모여서 부모나 조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모여 놓은 계돈으로 서로 돕는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풍습이었다. 1929년 4월 23일에는 월진회를 만들어 자신이 회장이 되었다. 상애상조, 근검절약, 미풍양속 함양등을 목적으로 하여, 야학교와 농민강습소 운영, 강연회를 통한 국내외 정세와 지식 보급, 공동판매와 저축증대 사업 등의 활동을 했다.
1929년 3월 농민운동의 본부인 부흥원 건물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서 학예회를 개최했다. 이솝우화 토끼와 여우를 각색하여 연극을 공연했다. 토끼와 거북이가 빵 조각을 나누어 먹으려 하자 여우가 나타나 똑같이 반 씩 나누어 준다고 하여 빵을 가져가서 혼자 다 먹어버리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연극이 끝난 후에 일경이 나타나 여우를 일본에 비유했다는 이유로 덕산주재소로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윤봉길은 아이들의 촌극이었다고 변명하여 훈방되었다. 윤봉길은 이때부터 농촌계몽이 성공하려면 우선 나라가 독립해야 된다고 믿게 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12월에는 서울은 물론 전국에 항일 시위가 퍼져 나갔다. 같은 해 11월에 함흥에서 수리조합반대운동이 일어나 조합 측의 일본인이 한국농민 3명을 타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여 들어오는 일본의 압박과 이에 항거하는 조선사람들을 보고 있던 윤봉길은 좀 더 능동적인 항일운동을 할 결심을 하게 된다. 야학에서 학생들에게 항일투쟁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가 야학이 폐쇄당하고 자신은 구속되어 3주간의 옥고를 치렀다.
부흥원이 건립될 무렵 이봉창의 농민계몽운동에 대한 소문이 다른 지역에도 퍼졌다. 어느 날 낯선 청년이 윤봉길을 찾아왔다. 그는 농촌운동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하며 자신을 천안에서 온 기자라고 소개했다. 시조사 기자 이흑룡이었다. 지금도 발행되는 기독교 계통의 유서 깊은 잡지사였다. 그는 시조 잡지 몇 권을 주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대한독립군 공작원으로 전국의 열성적인 민족주의자를 포섭하고 조직하며 적정을 탐지하고 군자금을 모아 보내는 활동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국내외 정세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고 비밀리에 활약하고 있는 독립단체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이흑룡과의 만남은 그동안 농촌 계몽이냐 아니면 좀 더 적극적인 독립운동이냐를 놓고 고민하던 윤봉길에게 후자를 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윤봉길은 이렇게 생각하며 이흑룡의 손을 맛 잡았다. 두 사람은 민족의 앞날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눈 후,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이듬해 1930년, 이흑룡이 윤봉길을 다시 찾아왔다. 윤봉길은 그동안 생명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이 과연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윤봉길은 이런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흑룡은 농민운동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하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더 큰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만주로 가자고 했다. 장남인 그는 내가 떠나면 부모형제, 처자식은 누가 돌보며, 야학, 농민운동, 월진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만주로 가 있었다. 윤봉길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만주로 가겠다고 그에게 약속했다. 이흑룡은 3월 8일 오후 2시에 신의주에서 기다리겠다고 하고 윤봉길의 집을 떠났다.
윤봉길은 이흑룡이 떠난 다음 곧바로 망명준비에 들어갔다. 무엇보다도 돈이 있어야 했다. 손에는 한 푼도 없는 그는 이리저리 궁리하던 끝에 마침 곧 닥쳐올 여동생 순례의 결혼식을 이용하기로 했다. 혼례를 치르려면 목돈이 필요했다. 아버지에게 결혼 비용에 쓰기 위해서 집 앞에 있는 산을 팔자고 넌지시 운을 띄웠다. 아버지는 선친께서 물려준 산을 팔 수 없다고 거절했다. 결국 자신이 관리해 오던 공금 월진회 회비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기로 했다면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가능하면 갚아 주려고 했다.
이흑룡과 신의주에서 만나기로 한날은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1930년 3월 5일 친정에 가신다고 길을 나선 어머니를 따라 나가 지금도 있는 정자나무 아래 사촌형 윤순희의 가게에서 머리에 두를 수건 한 장과 과자 한 봉지를 사들였다. 마지막 보는 어머니에 대한 무언의 작별 인사였다. 다음 날 3월 6일 아침 사랑방으로 내려가서 책상을 정리했다. 경찰 당국이 찾으면 곤란한 글이나 편지는 모두 불 살라 버렸다. 그리고 벼루와 붓을 꺼내 “장부출가생불환;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 다”라고 백지 조각에 썼다. 식사를 마치고 한복차림에 모자를 쓰고 방을 나오다가 아랫목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는 아기 윤종을 덥석 안고 부엌에 들어가 아내에게 물을 한잔 달라고 하여 마셨다. 남편이 부엌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내는 당황한 눈치였다. 윤봉길이 아내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는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 가? 아버지에게는 매부 될 사람 선보러 간다고 하고 서둘러 망명길을 떠났다.
20리 길을 걸어 삽교역에서 장항선을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중동중학교 졸업반인 사촌동생 윤신득을 종로 봉의동 하숙집으로 찾아갔다. 월진회 회원인 그에게 수중에 있는 60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향후 월진회를 부탁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나지 못하고 이흑룡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로 향했다. 열차에 타니 그동안의 긴장이 풀리며 잠이 몰려왔다. 끄덕끄덕 졸다가 잠이 깨여 고향친구 월진회 회원인 황종진에게 편지를 썼다. “…. 형은 이 편지를 받으면 크게 경악하리라 믿습니다. 이 아우는 가정과 사업과 동지를 다 버리고 00 사업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습니다. 현하 청년이 할 사업은 자로 이런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이 아우는 넓고 넓은 만주 벌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려고 합니다.”
이때 차장과 형사로 보이는 사람이 차표를 요구하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신의주 친척집에 갑니다.”라고 대답하니 친척의 이름을 물었다. 윤천의라고 하니 이번에는 “윤천의는 신의주부 무슨 정에 사느냐?”라고 물었다. 윤봉길은 처음 가는 신의주 동네 이름을 댈 수가 없었다. 형사는 소지품 검사를 했다. 수상한 편지가 나왔다. 선천역에서 윤봉길은 강제로 하차당하여 선천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는 경찰서애서 열흘 동안 호된 취조를 당했다. 심한 매질에도 실토하지 않으니 무죄로 풀려나왔다.
경찰에서 나와 선천 여관에 투숙했다. 고문으로 옷은 누더기가 되었고 몸은 피멍으로 성한 곳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흑룡과 신의주에서 만날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그를 못만 난 것이 무엇보다도 걱정되었다. 윤봉길은 사촌 동생 윤신득에게 편지를 썼다.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고 이흑룡을 만나면 피치 못할 사정을 전해주고, 옷도 한 벌 부쳐 달라는 내용이었다.
윤신득의 답장을 기다리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만주로 가기 위해서 같은 여관에 묵고 있는 김태식이 윤봉길에게 인사를 청했다. 그는 윤봉길이 선천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된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만주로 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금방 가까워졌다. 김태식은 같은 방에 묵고 있는 선우옥과 한일진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양복 한 벌을 윤봉길에게 주었다. 윤봉길이 장남이라는 것을 안 김태식과 선우옥은 집으로 돌아가 농촌개혁에 전념하고 후일을 도모하라고 설득하려 했다. 윤봉길이 집에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신의주에 일자리를 구해 줄 테니 서류를 준비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윤봉길은 어머니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간에 있었던 일, 자신이 왜 집을 떠난 는 지 등을 소상이 적고 호적등본과 토지대장 등 취직에 필요한 서류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3월 8일 이흑룡은 신의주 역에서 윤봉길을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다행히 윤신득과 연락이 되어 윤봉길이 신의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달려왔다. 너무나 반가워 둘은 부둥켜안고 감격했다. 둘은 그동안 지난 이야기를 하며 밤새 회포를 풀었다. 이때 김좌진 장군의 암살 소식도 들었다.
선우옥에게 신의주에서 일자리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이흑룡, 김태식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윤봉길은 이때의 심정을 그의 저서 “자서약력”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의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수화(물과 불)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으로 적을 즉각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속에 들어가면 무소용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였다. 다언불요, 이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마음의 폭탄을 안고 압록강을 건넜다. “
윤봉길, 이흑룡, 김태식, 한일진 4명은 만주의 독립군 근거지로 향했다. 독립군 숙영지에 도착하여 며칠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 둘러본 독립군의 실태는 그를 크게 실망시켰다. 체계가 없고 열악했다. 여기서 김태식이 소속 부대로 돌아갔다. 나머지 3명은 만주 독립군 근거지를 계속해서 돌아보며 조선인 부락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밤에는 동포들에게 강연회를 통해 국내 사정을 알렸다. 동포 교육을 위한 교과서를 만드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흑룡은 양세봉 장군이 사령관인 조선혁명군 사령부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상해 임시정부로 가야 겼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고, 윤봉길은 일행과 함께 안동으로 갔다. 이때 이흑룡은 임무수행을 위해 국내로 들어가고 윤봉길과 한일진은 청도로 향했다. 청도는 상해로 가기 전에 둘러 가는 곳이었다.
일행은 안동에서 기선 광리환을 타고 청도에 도착했다. 고향 목바리를 떠 난지 2개월이 지난 1930년 4월이었다. 청도에는 민족주의자 강석규가 송죽장이라는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윤봉길은 그의 집에 머물며 일자리를 찾았다. 강석규의 소개로 봉천로에 있는 일본사람 나카하라 겐자로가 경영하는 세탁소에 취직했다.
청도에 도착한 지 6개월 후, 한일진이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일찍이 미션 개통 학교에 다녀 영어를 잘했다. 윤봉길은 그에게 여비로 쓰라고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윤봉길이 순국한 해 말에 미국 켄터키 주에서 시량리 윤봉길의 집에 한 통의 편지가 날라 왔다. 한일진이 25불의 돈과 함께 떠날 때 윤봉길이 준 돈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였다. 당시의 25불은 꽤 큰돈이었다.
1930년 10월 10일 윤봉길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단풍을 바라보며 왕사를 회고하니 새삼스럽게 세월이 빠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중략)…. 두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항상 혼자 부르짖기를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이상은 무엇이냐? 목적의 성공자이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목적의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우로(비와 이슬)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은 낮에는 세탁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일본인 세탁소에서 일하면서 일본말을 익혔다. 열심히 돈을 모아 떠날 때 가지고 나온 월진회 회비 60원을 송금했다. 떠날 때 한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아내가 둘째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왔다. 윤봉길은 아들의 이름을 담이라고 지어 보냈다. 어머니 편지에 큰 아들 종이 아버지가 곁에 있는 아이들을 부러워한다는 내용을 보고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종아! 재롱 많이 하고 사랑 많이 받아라. 네가 정말 두순에 대하여 너는 아버지가 있으니 좋겠다고 하였니?...(중략)…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못 되는 것은 현재의 자유로운 세상이 요구하는 바이다. 종아! 너는 아비가 없는 것이 아니란다. 너의 아비가 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해서 잠시 여행을 하고 있을 뿐이지, 영원히 헤어져 있는 것이 아니란다. 너에게는… 눈물이 있으면 그 눈물을, 피가 있으면 그 피를 흘리고 뿌리어 가며 훈련시키고 교양을 쌓아줄 어머니가 있지 않느냐?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사람을 보건대, 서양에는 영웅 나폴레옹과 발명가 에디슨 동양에는 맹자가 있단 다. 나중에 따뜻한 악수와 키스로 만나자.”
청도 생활도 일 년이 지났다. 마음의 빚이었던 월진회 회비도 청산했다. 상해로 가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차례였다. 1931년 5월 8일, 대망의 상하이에 도착했다. 윤봉길은 <자서약력>에서 “나를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으나, 목적지에 온 것만으로 무상 기뻤다.”라고 회고했다.
윤봉길은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조계에 있는 대한교민단 사무소를 찾아갔다. 교민단은 교민 친목회에서 발전한 단체로 임시정부 산하 기구로 개편되어 임시정부 건물 안에 있었기 때문에, 교민단과 임시정부를 같은 기관으로 알고 있는 교포들이 많았다. 교포들에 관한 실질적인 일은 교민단이 하고 있었다. 김구는 출타 중이어서 못 만나고 직원 김동우와 교포 안명진을 만날 수 있었다. 안명진은 프랑스 조계 하비로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당분간 그의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당시의 임정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지방색 다툼과 투쟁노선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특히 자금난으로 건물 월세도 제대로 납부하지 못하고 직원 월급도 주기 힘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임정을 떠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인과 남경 국민당 정부의 임정에 대한 존재감도 희박했다.
떠나기 전부터 임정에 대한 기대감이 무척 컸던 윤봉길은 임정의 실태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상해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한독립당 총무이사인 이유필을 만났다. 윤봉길은 자신이 고향에서 했던 농촌계몽운동을 비롯해서 그동안의 행적과 포부를 털어놓았다. 이유필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세계정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유필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했다. 이후 독립운동가 최동오, 김현구, 김의한, 김두봉, 박창세와 교류하게 되었다. 상해에 도착한 후 약 1개월 동안 인삼 등을 파는 행상을 하다가 안명진의 주선으로 교포 정안립과 동업으로 모자공장 미리공사를 차렸다. 그러나 개업하자마자 만보산 사건이 터졌다. 상해에서도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이 극심했다. 결국 모자공장을 교포 사업가 박진과 중국인이 공동 경영하는 중국종품사에 넘기고 자신은 그 회사의 직원으로 일했다. 종품사는 말총으로 모자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장 직공으로 일하면서 그럭저럭 생활은 되었다. 그러나 곰곰 히 생각해 보니 미약한 임정과 큰일을 도모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고용인 급료 20원과 월세 30원을 지불하지 못해서 고소당하고 권총 4 자루를 가지고 있었는 데 그중 2자루를 팔아서 운영비로 쓸 만큼 자금난에 허덕였다. 임시정부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김구는 동포의 집을 돌아가면서 아이를 보아주고 끼니를 해결했다. 잠은 동지들의 집이나 창기들의 집을 옮겨 다니며 잤다. 활동은 고사하고 이름을 유지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거기 다가 만보산 사건까지 겹쳐 이제는 중국인들의 협조도 절망적이었다.
이때 윤봉길은 임정과의 큰일을 포기하고 미국에 가서 세계혁명사를 공부하기로 작정하고 낮에는 모자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상해영어학교에 다니며 미국유학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모자공장에서 일하는 교포 17명과 한인공우친목회를 만들어 공우들의 권익 보호와 침목도모에 힘썼다.
만보산 사건에 이어 만주사변이 일어나더니 일본이 상하이를 침공했다. 세계 열강의 이목이 상하이로 집중되었고 항일 감정은 극에 달했다. 상하이 신문은 연일 중국인들은 싸워서 일본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봉길은 드디어 거사를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할 계획을 포기하고, 이곳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할 큰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1932년 2월 중하순경, 윤봉길은 동생 남의에게 “상해사변이 확전 될 것 같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겠다.”, 사촌형 순의에게 “상해사변에 해군 육전대 아이다가 전승했다지만 실패로 성공했고, 이번에는 시라가와라는 놈이 나온다는 데 가소롭다. 한낱 개미 같은 그자가 무엇으로 성공할 것인지 두고 보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남의에게 온 편지를 본 어머니 김원상 여사는 윤봉길에게 “집은 걱정 마라. 너의 길을 가라”라는 내용의 답장을 했다. 혹시 아들이 다칠 까봐 벌벌 떠는 여느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거침없는 응원이 그에게 상하이 사변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를 폭사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그가 일하던 중국종품공사의 두 주인 교포 박진과 중국인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며칠씩 공장이 휴업했다. 공원들은 일당을 받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 날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공장 측은 휴업하는 사유를 시국관계로 원료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장 직원들과 자신이 조직한 한인공우친목회 회장이었던 윤봉길이 자세히 알아보니 두 주인사이의 갈등이 휴업의 진짜 원인이었다. 두 주인과 단판 끝에 “두 주인의 싸움으로 휴업할 경우 하루 평균 임금을 지급할 것, 수습생이 직공으로 숙련될 때까지 적당한 돈을 빌려주어 생활을 보장할 것”을 약속받았다.
윤봉길이 공우회를 조직한 이후 공원 일인당 생산 모자 수가 3.5개에서 5개로 증가했다. 그러나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회사 측의 설명은 모자 판매 가격이 45전에서 35전으로 내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윤봉길이 알아보니 모자 가격은 오히려 더 비싸게 판매되고 있었다. 그는 박진에게 이 사실을 항의하고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박진은 이를 거절했다. 윤봉길은 이에 대응하여 정안립, 서상석과 함께 임금원상환원과 환경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주도했다. 공장 측은 공원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윤봉길을 해임했다. 공원들은 분노하여 윤봉길의 복직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상하이 교포사회에도 파장이 컸다. 공산주의 단체인 상해한인반제동맹이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32년 3월 12일 “조선 노동자를 착취하는 냉혈동물 박진을 매장하라! 그리고 흡혈귀 박진과 한 몸이 되어 파업노동자를 박해하는 교민단을 박멸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에 교민단(임시정부)과 이 공산주의 단체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윤봉길은 이를 보고 파업을 중단시켰다. 정무위원장 이유필과 임시정부 노동참판을 역임했던 안창호가 중재에 나섰다. 사업주들은 윤봉길의 해임을 유지하는 대신 공임원상환원과 작업환경개선 수용을 받아들여 파업이 마무리되었다.
모자공장일을 그만둔 윤봉길은 거사 준비를 위해서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기로 마음먹었다. 전차 검표원일을 하고 있던 계춘원 집에 머물면서 그와 함께 공동조계의 훙커우(홍구) 시장에 나가 장사를 했다. 공동조계 통주로에서 신공양행을 운영하던 한인 이 씨에게서 밀가루와 채소를 도매받아 시장에서 팔았다. 훙커우는 일본인 거주지역이었고 일본영사관이 있어서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는 중국종품공사에서 같이 일했던 최흥식, 친구였던 유진만과 자주 만났다. 유진만은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암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유진만의 집에서 이봉창에게 폭탄을 마련해 준 사람이 김구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동안 임정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윤봉길에게는 귀가 번쩍 트이는 소식이었다. 유진만은 3월에 일을 같이 하기로 했던 이덕주가 국내로 들어가던 중 황해도 집에서 체포되는 바람에 자신도 4월 초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조선총독 암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모자공장 동료였던 최흥식도 만주 일본 수뇌부 폭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계로, 남만주 철도 총재 우치다 고사이, 고 나동청 장관 야머오카 만노스케 등이었다. 만주사변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국제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만주에 파견했다. 조사단이 5월 26일에 만주를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3월 26일 대련으로 갔으나 거사 이틀 전인 5월 24일 체포되어 거사는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김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윤봉길이 일하는 종품공장을 찾아 공원들과 함께 시국을 토론했다. 윤봉길도 이에 참여했다. 윤봉길은 김구가 공장을 방문하지 않을 때도 가끔씩 만나서 시국을 토론하며 서로 친숙해졌다. 결국은 자신도 이봉창의사의 동경사건과 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1932년 4월 24일 윤봉길은 교민신문 일일신문에서 천황 탄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사변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4월 29일에 훙커우 공원에서 거행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날 식장에는 물병 하나와 도시락 한 개, 그리고 일장기를 지참할 수 있다”는 안내 말까지 게재되어 있었다. 그는 기사를 보자마자 김구를 찾아갔다.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하여 마음속에 폭탄을 지니고 집을 떠나 왔습니다.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죽음도 불사 하겠습니다.”라고 김구에게 거사의 뜻을 밝히고 폭탄을 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김구는 상하이 사변동안에 한인애국단을 통해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힐 사건을 획책하고 있었다. 일본군 상하이 사령부는 황포강 훙커우 부둣가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군함 이즈모호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를 폭파하려 했으나 잠수부의 실수로 실패했다. 그 후 훙커우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과 부두무기창고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윤봉길은 일본유학생 몇 명과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탄약창고에 일자리를 얻었다. 당시에 김홍일은 중국 국민당군에 소속되어 상해 병공창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임시정부를 위해서 폭탄을 만들어 주었다. 임정의 요구 대로 이 거사를 위해서 도시락과 물병에 넣은 폭탄을 고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3월 초에 중국군과 일본군이 임시 휴전을 하는 바람에 폭파계획은 중단되었다.
윤봉길의 제안을 받은 김구는 훙커우 공원 천장절 기념행사를 상하이 사변 승전 축하식과 함께 훙커우공원에서 거행한 다는 신문 기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일본 군정 수뇌부가 모두 행사에 참석한 자리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을 세웠다. 1932년 4월 26일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4월 29일에 있을 천정절 행사의 거사 계획을 보고하여 승인을 받았다.
윤봉길은 기념식에 입고갈 양복을 김구가 얼마간 마련해 준 돈으로 사 입었다. 그리고 수시로 훙커우 공원에 들러 지리를 익히고 폭탄 던질 지점을 점검했다. 김구는 김홍일에게 3일 이내로 도시락과 물통 속에 폭탄 장치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김홍일은 왕웅이라는 중국 사람 이름으로 19로군 중국군 장교로서 정보처장과 상하이 병공창 주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중국인 향차도에게 폭탄제조를 맡겼다. 향차도는 자강철공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중국군 19로군 후원회 병기관계 책임자였다. 향차도는 이미 폭탄에 위장 외피를 입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3일 이내에 위장 폭탄을 만들어 김홍일에게 줄 수 있었다. 이때 화학교수 임계용이 폭탄의 성능을 강화하는 일을 했다.
원래 물통과 도시락 위장폭탄은 김구가 이봉창 의거 이후 일본군의 주요 인물과 군사시설 폭파 계획을 세우고 병공창 중국인 기술자 왕백수가 만들어 향차도의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상해 조선소에 있었던 병공창은 1932년 1월 28일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항주와 남경으로 옮겼다. 백범일지에 “윤봉길과 거사 계획을 세운 김구는 김홍일을 통해 3일 이내에 폭탄을 만들어 줄 것을 상해 병공창에 요청하고 병공창을 직접 방문하여 폭탄 성능을 확인한 후 20여 개의 폭탄을 제공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때는 병공창이 상하이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폭탄이 상하이 병공창에서 제조되었다면 이봉창 의거 이후 1932년 1월 28일(상하이 사변) 이전이어야 한다. 그러면 김구에게 준 2개의 폭탄은 보관하고 있던 위장 폭탄 20개 중 2개를 준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본다. 아니면 보관 중인 폭탄이 완성 품이 아니고 조립할 부품이 준비되어 있었 는 데 3일 만에 조립하여 김구에게 전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백범일지의 “병공창을 직접 방문하여…..”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인애국단 본부는 안공근의 집이었다. 1932년 4월 26일에 이곳에 김구, 안공근, 윤봉길이 모였다. 윤봉길은 김구 앞에서 선서문을 썼다. “나는 적성으로써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 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선서문 작성이 끝날 무렵 안낙생(안공근의 차남) 이 날씨가 흐려 사진 촬영이 곤란하다고 하여 선서식을 다음날로 연기하기로 했다. 4월 27일, 입단식을 엄숙히 거행한 다음 윤봉길은 양복차림의 독사진 한 장, 태극기를 배경으로 하고 가슴에 선서문을 붙이고 왼손엔 수류탄, 오른손엔 권총을 들고 한 장, 김구와 함께 한 장 도합 3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입단선서식이 끝난 다음 윤봉길은 훙커우 공원으로 갔다. 잔디밭을 산책하며 발에 밟힌 잔디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강한 자에게 짓 밟힌 인간도 꿋꿋하게 일어나는 잔디처럼 되어야 할 텐데…” 이렇게 일본에게 짓 눌리는 조국의 현실과 이에 저항하여 일어나려는 자신이 연상되었다.
그날 저녁 김구가 자신이 묵고 있는 동방공우를 찾아왔다. 김구는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글이 있으면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바로 자신의 약력과 거사에 대한 결심을 단숨에 적어 내려갔다. 이것이 지금도 남아있는 <자서약력>이다. 이후 그는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라는 시를 두 아들에게, “청년 제군에게”를 조선 청년들에게, 사후의 일을 당부하는 시와 “27일 신공원에 답청하여”, “백범선생에게”라는 유시를 남겼다. 이 중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보내는 편지는 눈물을 자아 내게 한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어머니 교향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동서양역사에서 보건대/동양에는 문학가 맹자가 있고/서양에는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미국에는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조국이 먼저였다.
1932년 4월 28일 윤봉길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김구와 같이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경 마지막으로 현장을 점검하기 위해서 훙커우 공원에 갔다. 내일이 기념식이어서 일본군인들이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다. 상하이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윤봉길은 시라카와 대장과 우에다 겐키지 중장의 사진을 일본사진관에서 입수하여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었다. 내게 지금 폭탄이 있었다면 당장에 저놈을 처단할 수 있는 데…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내일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숙소 동방고우에서 7시경에 김구를 만나 훙커우 공원에서의 이야기를 한 다음 그날 저녁에 상하이 교민단장 이유필의 집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마 거사 후 잡혔을 때 어떻게 진술할 것인가에 대해서 서로 입을 맞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윤봉길은 체포 후 이유필을 배후로 지목했지만 이름을 이춘산이라고 하고 그의 인상착의도 엉터리로 진술해서 일경을 혼란에 빠트렸다.
1932년 4월 29일, 잔뜩 흐린 날씨였다. 윤봉길은 새 양복으로 갈아입고 회룡로 원창리 13호 김해산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폭탄 사용법을 배우고 아침을 이 집에서 먹기로 김구와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김해산 부부에게 윤봉길이 중요한 일로 29일 아침에 동북 3성(만주)으로 떠나니, 소고기를 사다가 아침밥을 해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윤봉길은 잘 차려준 아침밥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스럽게 먹고 있었다. 김구는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57세인 김구에게 24세의 윤봉길은 아들 뻘이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거사 당일 김해산 집에서의 아침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새벽에 윤군이 같이 김해산 집에 가서 최후로 식탁을 같이 하여 아침밥을 먹으면서 기색을 살펴보았다. 태연자약하다……………… 김해산 군은 윤군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나에게 조용히 이러한 권고를 한다. ‘선생님, 지금 상해에서 우리의 활동이 있어야 민족적 체면을 보전하게 되는 이때에 윤군을 구태여 다른 곳에 파송하려 하십니까?’ 나는 두루뭉술실로 대답할 뿐이었다. ‘모험사업은 실행자에게 전부 맡기는 것인 즉, 윤군 마음대로 어디서나 하겠지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나 봅시다.’”
시계가 7번 울렸다. 윤봉길은 회중시계를 꺼내 “선생님, 저와 시계를 바꾸시죠.”하며 김구에게 건 내었다. 김구가 의아해하자, “제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 대로 어제 6 원주고 산 것인 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지 않습니까? 이제 제게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는 물건입니다.” 김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자신의 낡은 시계를 윤봉길에게 주었다. 그리고 윤봉길이 자신이 준 거사 자금 중에서 6원을 주고 산 스위스 월섬 사에서 만든 시계를 품에 넣었다. 김구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시계를 간직하여 지금도 유품으로 남아 있다.
김구는 도시락 폭탄과 물통폭탄을 윤봉길에게 주었다. 윤봉길은 보자기로 싼 도시락 폭탄은 손에 들고 물통 폭탄은 긴 끈을 달아 반대쪽 어깨에 메어 물통이 허리에 내려왔다. 윤봉길과 김구는 김해산의 집을 나왔다.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윤봉길은 김구의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차비를 주고도 5,6원이 남으니 김구 보고 쓰시라고 돌려주는 것이었다. 김구는 돈은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조금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며 받지 않으려 했어 나 윤봉길은 이를 뿌리치고 택시에 탔다.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김구는 목이 메는 소리로 “윤동지... 후에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고 외쳤다. 윤봉길은 차창 너머로 고개를 숙이며 “선생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김구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져 가는 택시를 쳐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택시 안에서 보자기에 싼 도시락 폭탄을 그대로 던지기 위해서 발화용 끈이 있는 부분의 보자기에 구멍을 뚫었다. 보자기에 싼 체로 던지기 위해서였다. 오전 7시 50분, 훙커우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에는 일본인과 중국인 문지기가 양쪽에서 지키고 있었다. 윤봉길은 중국인 경비에게 다가갔다. 당시에 일본 사림들이 즐겨 입는 스프링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손에는 일장기와 보자기에 싼 도시락을 들고 물병을 어깨에 맨 그는 영락없는 일본 사람이었다. 경비는 입장권을 요구했다. 윤봉길은 입장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유창한 일본말로 자신이 일본인임을 강조했다. 결국 중국인 경비는 그의 입장을 허락했다.
같은 시각에 정화암과 백정기도 이 날 훙커우 공원 행사장에 폭탄 투척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무장 투쟁을 하고 있는 이회영 선생 지도하에 의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천진에서 일본선박과 영사관 폭발에 실패하고 이번 행사에 폭탄투척을 위해서 상하이에 와 있었다. 그날 아침 중국인 왕아초가 입장권을 구해 오기를 기다렸으나 그가 나타나지 않아서 무산되었다.
천장절 축하와 상하이 사변 전승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는 훙커우 공원의 경비는 삼엄했다. 윤봉길은 단상 뒤쪽 민간인 관람석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단상에서 약 19m 떨어져 있었다. 윤봉길 1m 앞, 단상에서 18m 떨어진 지점에는 보병이 단상을 에워싸고 있었다. 단상 5m 앞에는 기마병이 제1차 경비선을 만들어 단상을 보호하고 있었다.
오전 9시, 상해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필두로 내외 귀빈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상하이 사변 승전을 기념하는 관병식이 거행되었다. 일사불란한 군인들의 행진에 일본인들은 일장기를 흔들며 열광했다. 관병식은 약 2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10분간 휴식시간이 지난 다음 천장절 축하식이 시작되었다. 단상에 중국 주재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를 비롯하여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크라마쓰, 상하이 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시다쓰구, 거류민단 서기장 토토노 모리가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잔뜩 흐리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11시 40분경 개회사가 있고 기미가요 합창이 있었다. 마지막 구절을 부르는 도중 스피커에서 삐익 삐익하는 잡음이 났다. 경비병들의 시선이 무대로 가고 장내가 그 소리에 주의가 산만해졌다. 윤봉길은 이때 다고 직감했다.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을 슬그머니 잔디밭에 내려놓고 경비병이 서있는 경계선을 재빨리 통과하여 기마대가 서있는 경계선 가까이로 달려가 수통폭탄의 안전핀인 끈을 당겨 뽑은 후 폭탄을 단상을 향해 힘껏 던졌다. 폭탄은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이 있는 단상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음이 터졌다. 단상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단상은 피 바다가 되었다.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7명의 일본 장성과 고위층 관리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윤봉길이 잔디에 놓고 온 도시락 폭탄을 가지려고 돌아서는 순간 우에마스 소장의 호위병 고우모토 일등병조가 윤봉길을 잡아 땅에 내동댕이 쳤다. 이때 주위의 일본인들이 달려들어 마구 두들겨 팼다. 체포된 후에 거사가 대 성공임을 확인한 윤봉길은 자신의 이름 윤봉길을 목청껏 외쳤다.
헌병 제1분대로 끌려간 윤봉길은 거짓 진술로 수사 당국을 골탕 먹였다. 사건을 같이 도모한 김구를 이춘산이라고 했다. 이춘산은 상하이 교민단 정무위원 이유필의 가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상착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묘사했다. 거사 자금 200원도 이춘산으로부터 받았고 모든 계획과 준비도 그와 함께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일본당국은 이유필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프랑스 공무국의 허락을 받아 4월 29일 오후 2시에 이유필의 집을 습격했으나 그는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경찰은 집에 잠복해 있다가 이유필의 집을 찾아온 안창호를 체포했다. 그는 한국소년동맹 회장이었던 이유필의 아들 만영을 만나 약속했던 체육대회 경비 5원을 주려 다가 변을 당했다. 소년동맹회에서는 매년 5월 첫 일요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체육대회를 열었다.
다음날 새벽에 윤봉길 의사는 헌병대 본부로 이송되었다. 헌병대위 오오이시 마사유키는 심한 고문을 가해 사건의 배후를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끝까지 일관된 허위진슬로 수사당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사건의 배후를 이유필로 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사건 3일 만인 5월 2일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
의거 다음날인 4월 30일 새벽부터 독립운동자들을 수색하여 검거하기 시작했다. 일본 총영사관 경찰 44 명 사복 헌병 22명이 동원되었다. 워낙 중요한 인물이 죽거나 다쳤기 때문에 수사에 프랑스 형사 12명과 중국 형사 48명까지 협조했다. 김구는 한국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5월 10일 한국 애국당 명의로 홍구공원 사건 진상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그동안 해왔던 윤봉길의 진술과는 전혀 달랐다. 진실을 캐내려는 형사들의 고문은 더욱 가혹 해졌다. 그러나 김구 선생이 체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윤봉길은 5월 11일 재판에서 김구선생 발표를 인정하고 자기가 진술한 내용에서 이춘산을 김구로 바꾸면 된다고 밝혔다. 거사 목적이 무엇이냐는 헌병의 심문에 윤봉길은 다움과 같이 답했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투쟁하여 독립함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며, 그때야 말로 조선은 물론이고 모든 식민지배민족이 독립하고 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패망할 날이 꼭 온다는 것은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가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을 그 역할로 삼는 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 독립이 용이하게 실현될 리는 없다. 따라서 금번의 사건과 같은 것도 독립에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 하는 데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같은 색으로 채색되어, 세계 사람들은 조선의 존재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자체에 조선이라는 개념을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에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믿는다.”
5월 2일에 군법회의에 회부된 윤봉길의 군사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5월 25일 재판장 판사 핫토리 중령은 사형을 선고했다. 상고 없이 단심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럴 만했다. 그날 단상에는 상하이 파견 일본군 수뇌부가 모여 있었고 이들은 치명타를 입었다. 아무리 큰 전쟁이라도 군의 최고 지휘관들이 한꺼번에 희생되는 경우는 세계 전쟁사에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언론은 일본 군 수뇌부의 희생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당시 상하이에 파견된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해군 중장은 눈에 파편이 박혀 실명했다.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은 왼쪽다리가 절단되었다. 대어는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이었다. 상하이 사변에서 중국 19로군을 굴복시킨 장 본인이었다. 그는 폭탄을 맞은 지 27일 만인 5월 26일에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아마 항생제가 없던 시절에 수술부위에 염증이 생겨 사망하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일본 천황은 그에게 남작 작위와 어주까지 내리고 욱일훈장을 수여하여 쾌유를 빌었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64곳에 파편이 박혀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 다쓰 구는 내장이 쏟아져 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고 다음날 사망했다. 상해 총영사 무라이와 거류민단서기장 토모노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에 중국인들은 열광했다. 그동안 일본은 만주를 강점하고 상하이 사변에서 중국군을 굴복시켜 사실상 상하이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분통이 터졌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 원수를 윤봉길 의사가 통쾌하게 갚아 준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을 일본 편이라고 생각하던 오해도 말끔히 가셨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무시하던 중국사람들의 태도도 완전히 역전되었다.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해낼 수 없는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도와 한중 공동 항일전선을 펴기 시작했다. 윤봉길은 목숨을 바쳐 고사 직전의 임시정부를 회생시켰다. 광복군도 장제스의 남경 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조직되었다.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을 거론했다. 윤봉길이 그를 감동시킨 덕이다.
남화한인연맹을 이끈 정화암 선생은 “… 우선 내가 명백히 지적해 두는 것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없었으면 임정이라는 것은 거기서 끝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들어오던 돈도 딱 끊어졌고, 중국사람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 이러다가 윤봉길 의거가 있게 되어 임정이 살아납니다. 중국정부로부터 지원받고, 또 해방과 더불어 귀국할 때도 그래도 임정을 앞세워 떳떳하게 나서는 것도 모두 윤봉길 의사의 피 하나의 결과입니다.”
1936년 중국공산당이 파리에서 발행한 <구국시보>1월 9일 자에 윤봉길의사를 상해보위 전의 순국열사 명단에 수록했다. 3월 5일 자 신문에는 ‘윤봉길 열사는 비록 숨을 거뒀지만, 우리 혁명에 대한 열사의 업적은 영원하리라. 열사는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됐지만, 열사의 정신은 우리당 동지들을 격려해 주었으며 용맹하게 전진하라는 메시지였다’라는 글을 실었다. 1989년 10월 <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는 외국인으로 유일하게 윤봉길의사만 혁명가로 기재되어 있다.
윤봉길이 예견한 대로 이차대전이 일어나고 1941년에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를 태평양전쟁이라고 했다. 윤봉길은 낙엽이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것처럼 강국도 망할 날이 올 것이라고 취조하는 헌병에게 말했다. 일본이 미국에 전쟁에서 졌다. 일본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르는 1945년 9월 2일 미주리 호 함상에서 지팡이를 집고 오른쪽 다리를 절며 걸어 나와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그는 중국 주재 일본공사 자격으로 그날 단상에 있다가 일본의 패전을 예측했던 윤봉길의 폭탄에 오른쪽 다리를 잃어서 의족을 달고 있었다.
일본은 사건 배후인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서 윤봉길의 사형을 미루고 상하이 헌병대 본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나 김구가 좀처럼 체포되지 않아 1932년 11월 18일 우편수송선 다이요마루호에 태워 본토로 압송했다. 11월 20일 오후 2시에 고베에 도착했다. 취재진의 접근을 금지하고 극비리에 윤봉길을 쾌속정 마야마루에 태우고 미쓰비시 조선소 선착장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옮겨 타고 오사카성내에 있는 육군 제4사단 사령부 직활 육군위수형무소 독방에 구금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갑자기 간수가 다른 곳으로 옮긴 다며 연 노랑 죄수복을 양복으로 갈아입혔다. 감옥을 나온 시각은 오전 6시 25분이었다. 사복 헌병 4명에 들러 싸여 기차에 올랐다. 군 검찰관 네모토 소타로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추적자를 따돌리기 위해서 원래 하차 역이었던 가나자와역을 그냥 통과하게 하고 다음 역인 모리모토역에서 하차하라고 지시했다. 모리모토역에 하차한 시간은 오후 4시 35 분이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타고 오후 5시 5분에 가나자와 육군위수 구금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아침 6시 30분, 윤봉길은 가나자와 위수 구금소를 나와 근처 육군공병작업장의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향했다. 간수장 다쓰다 소토지로와 간수 2명, 헌병 3명의 호위를 받으며 7시 15분에 형장에 도착했다. 그는 양복을 입고 중절모자를 쓰고 있었다.
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가나자와 위수구금소장, 육군법무관 감옥장, 군법회의 녹사, 군의 괸, 간수장 등이 입회했다. 검찰관 네모토 소타로는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언도한 사형을 집행한다’고 선언 한 다음 윤봉길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윤봉길은 “사형은 이미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라고 답했다. 녹사 다치무라 규베는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의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윤봉길을 꿇어 앉힌 다음 양 쪽 팔을 벌려 십자가 형틀에 묶었다. 10m 전방에 사수 2명이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7시 27분 정사수의 제1발이 윤봉길의 미간에 명중했다. 7시 40분 군의관이 윤봉길의 사망을 확인했다. 유해는 노다산 육군묘지에 인접한 가나와 시 공동묘지의 쓰레기 하치장 옆 사람이 걸어 다니는 좁은 통로에 평장으로 묻고 그 흔적을 없앴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윤봉길 의사의 시체 위를 무려 14년 동안 밟고 지나갔다.
윤봉길은 2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살아있는 인생 자체 보다 미래에 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존경받는 삶을 원했다. 그는 가족과 부모 형제를 사랑했지만 그 보다 조국이 먼저라고 믿었다. 그는 앞으로의 세계정세가 어떻게 변할지를 정확히 예견할 정도로 해박했다. 그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잘 이해하여 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무엇 보다도 남다른 담력으로 범인이 해낼 수 없는 큰일을 완수할 수 있었다. 25세의 나이에 저 세상에 보내기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물이었다. 이순신, 안중근의 반열에 설 수 있는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사는 인생이라고 아까워하며 사는 영웅부재의 요즈음 세상에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거사 다음날인 1932년 4월 30일, 충남예산 윤봉길의 집에 일경이 들이닥쳤다. 아버지 윤황과 가족 전부를 마당에 꿇어 앉혀 문책을 하고 집안을 삿삿이 뒤져 사건의 단서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어머니 김원상여사는 “우리 봉길은 대한남아로 할 일을 했다.” 고 일경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후 김원상 여사는 “봉길은 의거일에 대한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다.”며 해방될 때까지 13년간 4월 29일에 윤봉길을 위한 생일 상을 차렸다. 일경은 윤봉길의 집 앞에 초소를 세우고 가족들을 감시했다. 그의 집은 ‘조선에서 제일 나쁜 역적의 집’라는 낙인이 찍혔다. 마을 사람들은 윤봉길의 가족들과 만나면 혹시 일경이 주위에 없나 눈치를 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심지어 윤봉길의 집을 피해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경의 감시 중에서도 동생 윤남의는 유해 송환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다. 유해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품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각도장, 피자국으로 얼룩진 손수건, 지갑, 안경집, 회중시계, 약간의 중국 지폐를 돌려받았다.
1945년 8월 15일 세상이 뒤집혔다. 일제가 망했다. 역적의 집이었던 윤황의 집은 갑자기 의사의 집이 되었다. ‘조국 광복을 앞당긴 의사의 집’으로 다시 태어났다. 지방유지는 물론 유명인사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윤봉길의사의 공적을 찬양했다. 어느 날, 충남 도지사가 방문하여 윤황에게 큰 절을 올렸다. 이 후로 동네 사람들은 윤황을 한갓 농부가 아닌 선비로 우러러보았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가 돌아왔다. 해방 무렵 상해임시 정부의 위상을 유지하는 데 윤봉길의 기여는 김구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입국하자마자 김구는 신문에 윤봉길 의사 유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 기사를 본 동생 윤남의는 1945년 12월 2일 윤봉길의 아들 윤종, 유골봉환위원회 부위원장 김관용과 함께 김구선생이 묵고 있는 죽첨장(경교장)을 방문했다. 윤봉길의 동생과 아들을 본 김구는 마치 윤봉길을 다시 만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다.
이때 윤남의는 김구에게 1945년 8월 16일 덕산에서 조인원, 장인영 등 300여 명이 모여, ‘매헌윤봉길선생유골봉환위원회’를 발족했다고 말했다. 이에 김구는 유해 봉환은 임정에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1946년 4월 26일, 김구는 조성환, 안재홍, 권태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충남예산에 왔다. 윤봉길의사 유가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예산 군민들은 임시정부의 수반 김구를 마치 왕의 행차를 방불하게 하는 열렬한 환영을 했다. 윤봉길의사 옛날 집에 이르는 길에는 황토를 깔았다.
김구는 윤봉길 의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아침 윤 의사의 옛 집 앞 넓은 공터에서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제14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김구 선생이 추도사를 했다. 그는 윤봉길이 조국해방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는 도중 연단에 엎드려 통곡했다. 해방의 기쁨을 같이 못 나누어서, 훌륭한 인재를 너무나 젊은 나이에 저 세상에 보내어서, 새 나라 건설에 같이 일할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1946 년 초, 김구는 도쿄에 있는 신조건설동맹위원장 박열에게 윤봉길의사 유해 봉환을 부탁했다. 박열은 서상한, 이강훈과 함께 ‘대한순국열사 유골봉환회’를 조직하고,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봉환도 윤봉길의 유해 봉환과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이봉창과 백정기의 유해는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윤봉길 유해의 위치는 오리무중이었다.
1946년 3월 4일부터 발굴단은 가나자와 노대산 육군묘지와 시영묘지를 수색했다. 발굴 이틀째인 3월 5일 오후 서 단장은 레일을 깔고 밀차를 이용해서 이곳 묘지 모두를 파헤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겁을 먹은 전 간수 시계하라가 한 밤중에 서 단장을 찾아와서 암매장 장소를 알려주었다. 관리사무소 바로 옆에 있는 쓰레기하치장사이의 좁은 통로였다. 다음 날 3월 6일 아침, 반신반의하며 약 6척을 파니 썩은 관이 나왔다.
1946년 5월 15일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가 맥아더 사령부 군함에 실려 부산으로 봉환되었다. 6월 14일에 유골 봉안소가 설치된 부산동광국민학교에서 추도식을 거행한 다음 유해는 특별열차 ‘해방자호’에 실려 서울로 후송되었다. 7월 6일 국민장이 거행된 후, 삼의사는 효창공원에 나란히 모셔졌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최고의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윤봉길은 대한의 젊은이들에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역력히 보여주는 위인이었다.
참고:
1.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윤봉길 동생 윤남의의 아드님), 아주경제[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 9-19]
2. 유튜브: 역사스페셜 KBS 역사 재구성 결정적 하루 1932.4.29
3. 우리 역사 넷: 윤봉길 1908-1932
4. 나무위키: 상하이 사변
5. 매일경제; 2017.03.27; 이문영 기자: 약속지키다 체포된 안창호 일화는 어디까지 사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