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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Sep 12. 2023

소시민 이봉창의사

김구의 한인애국단


한겨레 신문(우측의 사진은 좌측과 가운데 사진을 합성해서 만든 사진이라고 함)

파리 평화회의 조선대표파견과 무저항주의를 표방한 삼일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임정은 외교적 노력보다는 무장투쟁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극심한 자금난으로 군대를 만드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요인 암살, 주요 기관건물 파괴와 같은 의열단 활동과 대동소이한 무장항일운동을 목적으로,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자금은 김구가 해외동포들에게 호소하여 모았다. 시카고 공동회의 김경, 미주대한인공동회의 안창호와 김호, 하와이 대한인동지회의 이승만, 멕시코의 김기창, 쿠바의 임천덕이 성금을 보내왔다. 

이 시기에 처음 찾아온 인물이 이봉창이었다. 


이봉창은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진규는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을 경영하면서 조선왕실의 건축을 청부받을 정도로 상당한 자산가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투병과 홍수로 인한 손실, 그리고 사기피해가 겹치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고 한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조선의 농지를 정리했는데, 토지소유자들로부터 신고를 받았다. 만약 신고를 하지 않으면 토지를 몰수했다. 그런데 토지신고가 무척 복잡하여 많은 농부들이 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인 사기꾼이 이봉창의 아버지에 접근하여 대신 신고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그를 믿고 토지문서를 내주었다. 그러나 일본인 사기꾼은 그 토지를 담보로 빚을 얻고 사라졌다. 그 후 이봉창의 집안은 가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봉창은 8살부터 서당에 다니다가 11세에 천도교 계통의 문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5세에 졸업했다. 첩을 둘이나 두었던 아버지는 첩과 딴살림을 차렸고 이봉창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형의 부부와 함께 살았다. 형 이범태가 버는 돈으로 근근 히 사는 형편이어서 상급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 내었다. 


당시 용산에는 일본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자연히 일본인들의 가게가 많았다. 집에서 가까운 원효로(원정 2 정목)에 있는 와다세이도라는 일본인 과자점 점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식사 제공하고 월급은 7-8원이었다. 17세에 현재 한강로 16번지에 있는 무라타 시계가쓰라는 약국으로 직장을 옮겼다. 식사제공, 월급 10원에 판매실적에 따라 배당금을 주어서 월 13-14원은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약국이 미리 약을 사다 놓지 않아서 애써 주문을 맡아와도 약이 없어서 팔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야 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났지만 그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언어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지 어느덧 일본사람과 구별이 안될 정도로 일본말을 잘했다. 그는 사교성이 좋아 사람들과 쉽게 사귈 수 있었다.  19세 되던 1919년 8월, 약국에서 일하며 잘 알게 된 철도국 영업과 서기 이오우에 사카이치의 도움으로 용산역 시용부(임시직)로 일 자리를 옮겼다. 열심히 일해서 1920년 1월에 정식 역부로 승진했다. 한 달 만에 전철수가 되고 10월 1일에 바라던 연결수가 되었다. 많은 봉급을 받아서 생활에 여유가 생겼으나 얼마가지 않아서 일본인에 비해서 승진, 봉급, 상여금(보너스) 등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만이 마음속에 쌓였으나 더욱 열심히 일해서 일본인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자포자기하고 향락에 빠졌다. 유흥에 돈을 낭비하여 빚을 많이 졌다. 1924년 퇴직금으로 빚을 갚으려고 사직했다. 그러나 경기 침체로 곧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 후 1년 반 동안 직업 없이 보냈다. 그는 금정청년회라는 청년 봉사단체에 가입하여 지덕체 삼육의 장려, 상호부조와 야경, 위생 등에 관한 봉사활동을 하였다. 1925년 일제 최초의 근대적 인구센서스 조사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국세조사위원이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지사가 추천하여 조선총독이 임명했다. 아마 금정 청년회를 후원하는 용산지역의 유지들이나, 용산역에 근무하던 일본인 동료들이 천거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국세조사 이후에는 잘했다고 경성부청이 상금 10원과 나무잔을 상으로 받았다. 그는 그저 착실한 식민지 시민이었다.


당시에 일본 기업들은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서 일본 내지(본토)에서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인과 같은 임금을 준다고 광고했다. 조선인 차별에 불만이었던 이봉창에게는 귀가 솔깃한 소식이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갈 여비와 신분보증이 필요했다. 일본에 반항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신분보증을 해주는 사람이 있아야 했다. 그때 용산역에서 일할 때 친하게 지냈던 후지하타라고 하는 일본인이 퇴직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식모를 한 사람 데리고 가고 싶다고 이봉창에게 말했다. 이봉창은 조카딸 이은임을 소개해주고 그 임금을 가불 받아 여비로 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신분도 보증해 주었다. 이 일을 어머님과 본인에게 의논했더니 다행히 승낙해 주었다. 1925년 11월 그는 조카딸 이은임을 데리고 후지하타와 함께 오사카에 도착했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그는 일본에 오면 곧장 취직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신분을 밝히면 대부분 거절당했다. 이듬해 2월에 어느 가스회사에 취직했다. 가스회사 직원들이 너의 이름은 발음하기가 힘드니 우리가 부르기 쉬운 일본 이름으로 바꾸라고 권유했다. 그는 이때부터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일을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각기병에 걸려 휴직해야 했다. 다음 해 4월에 건강이 회복되어 잠시 간장가게에 취직했다가 1개월 만에 가스회사에 복직했다. 그해 12월에 3-4일 결근했다는 이유로 2-3일에 한 번씩 쉬게 하자 화 가나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후 그는 부두노동자, 석탄 짐꾼, 공장잡역등을 전전하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실감했다.  부두에서 석탄을 나르는 일을 했다. 그는 3원 25전이라는 생애 최고의 임금을 받았다. 둘째 날 에는 25전 더하여 3원 50전을 주었다. 그런데 넷째 날부터는 갑자기 2원 50- 2원 70전으로 내려갔다. 선배와 하숙집주인에게 어찌 된 영문인 지 물었다. 기노시타 세이죠라는 일본이름으로 일을 시작했는 데 나중에 조선인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차별에 화가 나서 부두 노동일을 그만두고 1928년 스미모토 신동소 아마 가자키 출장소의 상용 인부로 취직했다. 이봉창이 하숙 한 다카무라의 집에는 같은 일을 하려 매일 출근하는 20-30명가량의 인부가 있었는 데 조선 사람은 이봉창 밖에 없었다. 차별대우도 하지 않았다. 야마노라는 일본인 조장은 이봉창에게 5-10명의 일본인 인부를 데리고 일하게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공장에서 직공을 구한 다는 광고를 보았다. 조선사람임을 밝히고 서무계에 문의했더니 조선사람임은 상관없고 조장이나 그 보다 높은 사람의 보증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평소에 자기를 잘 보아주던 조장에게 보증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예전에 보증인이 됐다가 잘못된 경험이 있다고 거절했다.


이봉창은 이러한 차별에도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참다운 일본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일본인 다 울려고 노력했다. “신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한일합방으로 새로이 탄생한 일본인이라는 뜻이다.  아마 가자키 출장소에서 일할 때,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 천황 즉위식이 교토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일본인이 되려면 일본 천황의 얼굴을 꼭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봉창은 그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이태왕 전하의 목안을 뵌 적이 없으며 경술병합 후 신일본인이 되어 천황폐하의 성안을 뵌 적도 없다. 또 조선 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역사를 가르쳐 받은 적도 없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한일합방에 대한 그의 이해는 너무나 순수하고 순진한 소시민의 마음이었다. 하숙집 앞에 서양식 세탁소가 있었는데 조선사람 최순평이 일하고 있었다.  같은 하숙집에 묵으며 같이 상용 인부로 일하고 있던 일본인 마에다 세이지와 친했다. 그는 이 두 사람에게 일본 황제 즉위식에 가는 일을 상의했다. 3명은 의기가 상충하여 같이 가기로 했다.  3명 모두 돈을 꾸어 여비를 마련했다. 11월 6일 밤 아마 가자키를 떠나 오사카에서 전차로 교토에 도착하여 고조의 가라스마토오리 번화가에서 밤을 지새우고 7일 아침 6시경 이 거리의 미쓰비시 은행 앞에 마련된 일본황제 행렬 참관석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경찰관이 나타나 참관자들에 대한 몸수색을 시작했다. 같이 간 두 동료는 아무 일 없이 검열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봉창의 양복저고리에서는 면도칼, 손수건 그리고 편지 한 통이 나왔다. 한문이 섞인 한글로 쓴 고향 친구가 보낸 안부 편지였다.  경찰은 편지가 일본어가 아닌 한글로 쓰인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 이봉창을 고조 경찰서 임시 출장소로 끌고 갔다. 한참 편지를 조사하더니 경찰서로 데려가 유치장에 가두 워 버렸다.  이봉창은 경찰에게 천황을 뵈어야 하니 빨리 이곳을 나가게 해달라고 애걸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일로 11일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그때의 착잡한 심경을 신문조서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나는 단순히 조선인이라는 것 때문에 민족적 차별을 받아 검속 된 것에 대해 아주 크게 울분을 느꼈고, 동시에 왜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일까라고 생각하면 이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점점 타락해 갔고 동시에 사상도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래 나는 조선인이라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조선에는 편지도 보내지 않았으며 또한 본명도 밝히지 않고 항상 일본이름을 쓰면서 어디에 가든 진짜 일본인 행세를 했습니다.” 


그가 일본인 행세를 한 것은 조선인 행세를 하면 불이익을 당할 까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속 마음은 억울해서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 본명을 사용해서는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언짢은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고, 당당하게 본명을 쓰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 들로부터 나는 조국인 조선을 일본에서 독립시켜 다시 옛날 같은 우리나라가 되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상해로 건너가 그곳에 체재 중 조선독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천황 폐하를 죽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위키 백과 이봉창; 제2회 신문조서 중에서)


이후 그는 그야말로 방탕한 생활을 한다. 1929년 2월 비누상점에 취직했다. 9월에 매상금 100원을 가지고 도쿄로 달아났다. 그리고 해산물 도매점 점원으로 취직했다.  친구집에서 자거나 요시와라(창녀촌)에서 여자를 사귀는 등 불규칙적인 생활 때문에 결근이 잦았다.  주인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점원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가방점의 외판원이 되었다. 11월에 오꼬스카에 출장을 가서 수금한 돈 50-60원을 사용으로 써버렸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판매대금 50-60원을 가지고 오사카로 도주했다.  


1930년 11 월 어느 날 오사카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 데, 박태산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어서 조선인을 돌 봐주고, 영국 전차회사에서 조선인을 우대해서 써준다고 하면서 상하이로 갈 것을 권유했다. 조선인 차별에 지쳐 있던 그에게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기회였다. 1930년 12월 6일 그는 쓰이코에서 일본여객선을 타고 10일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해서 일자리를 구하려 했으나 중국말을 못 하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1개월 넘게 일자리를 찾았으나 허탕이었다.  여비로 가지고 온 18원도 바닥이 났다. 여관에서 무료 숙박소 이치키양으로 숙소를 옮겼다. 마지막 희망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나섰다. 영국전차회사 취직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가 어디 있는 지도 몰랐는 데 우연히 만난 안공근의 도움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1931년 1월 초순 그는 상하이 마아랑류우 보우갱리이 4호에 있는 임시정부 민단사무소를 찾아갔다. 민단 사무원 김동호에게 자신의 경력을 대강 밝히고 영국 전차회사 취직을 알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동호는 영어와 중국어를 다 알아야 취직이 된다고 하며 우선 두 나라말을 2-3개월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말을 배울 돈이 없었다. 결국 그는 기독교청년회관의 소개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명화 철공소에 취직했다.


이봉창은 한 2개월 후 자신이 명화 철공소에 취직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임정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이때 김구가 처음으로 이봉창을 만났다. 김구는 자신을 백정선이라고 소개했다. 김구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여러 가명을 사용했는 데 백정선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봉창은 독립운동이 하고 싶어서 임정을 찾아왔다고 김구에게 말했다. 그리고 임정의 주의, 강령,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김구는 “임시정부 민단 사무소는 상해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의 직업소개와 상호 친목을 도모하는 것을 사업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매월 각자에게서 1원 정도의 회비를 모아 부인회, 어린이회와 그 밖의 한국인 이 개최하는 여러 회합을 뒷바라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봉창이 일본말을 섞어서 한국말을 하고 일본 옷을 입고 몸동작이 일본인을 닮았으며 임정을 일본사람들이 말하듯 "가 정부"라고 하는 등 일본인으로 의심받을 언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김구는 이봉창에게 일본 내의 사정, 조선사람에 대한 대우 등을 물으면서 그의 의중을 떠 보았다. 일본 천황이 행차할 때 경계가 엄중한가, 무엇인가 큰일을 할 수 있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무기만 마련할 수 있으면 일본으로 가서 큰일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이후 이봉창은 술과 안주를 사 들고 임정 민단 사무소에 와서 직원들과 가끔 술을 마셨다. 당시 임정 살림이 궁핍했기 때문에 직원들도 그를 반겼다.   


하루는 이봉창이  3-4명의 임정 청년들과  서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김구는 그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가 방문할 때마다 임정직원들과의 대화를 장막 뒤에서 엿들었다. 이봉창이 “왜 당신들은 독림운동을 한 다면서 천황을 처단하지 못하느냐?” 고 물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면 당신은 왜 처단하지 못하느냐?” 고 되물었다. 이에 이봉창은 “나는 작년에 도쿄에 있을 때, 하루는 천황이 하야마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구경하러 가서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런데 임금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이때 가슴이 일렁이고 온몸의 피가 솟구쳐올라 내게 무기만 있으면 큰일을 한번 해볼 텐데 하고 생각하던 중에 천황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버려 좋은 기회를 놓쳤다”라고 말했다. 


며칠 후 김구는 이봉창을 그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갔다.  이봉창은 찾아온 김구에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천황 암살 계획을 설명했다. 이봉창의 의도를 믿게 된 김구는 일본 천황 암살 준비를 이봉창과 함께 시작했다.


1931년 2월, 김구는 이봉창에게 상하이 홍구(훙커우) 방면으로 가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숨어 있으라고 권고했다. 이 지역에는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  훙커우 지역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했던 홍구(훙커우) 공원이 있는 지역이다. 

이봉창은 기노시타라는 일본이름을 가지고 홍구에 거주하면서 일본인 인쇄공장에 다녔다. 몇 달 뒤에는 일본인 악기점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는 탁월한 사교술과 능숙한 일본어 실력으로 많은 일본인 친구를 사귀었고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김구와 가끔 만나서 거사에 대해서 상의했다. 그리고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1931년 5월 이봉창을 만난 김구는 폭탄을 꼭 준비해서 연락하겠다고 약속했다. 8월 말 경에 철공소를 그만두었다. 9월 중순에 이봉창은 임정 민단 사무소를 찾아갔다. 그는 김구에게 “폭탄을 입수할 수 있는 겁니까?”하고 물었다. 김구는 “폭탄은 입수할 수 있고 여비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이 거사를 결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고 싶소.” 하고 되물었다. 그는 “5-10년을 더 사는 것도 내게는 흥미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빨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폭탄이 손에 들어온다면 반드시 책임지고 거사를 결행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는 어떤 일이든 중도에 흐지부지하는 것을 싫어하므로 폭탄이 틀림없는 것인지 효력이 어떠한 지를 확인 한 다음 일본으로 갈 생각이니 폭탄이 입수되면 즉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구는 “폭탄은 자기가 잘 아는 데 6-7칸 거리 내의 물건을 모두 파괴하는 위력이 있으니 시험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으니 자기를 믿어달라”라고 하면서 폭탄과 여비가 준비되면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폭탄을 비밀리에 실험할 장소와 폭탄을 적어도 하나 더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 문제였다.


김구는 재미동포가 보낸 성금으로 거사자금 250원을 마련했다. 떠날 때 150원을 주고 이봉창이 일본으로 간다음 100원을 송금했다. 이봉창이 가지고 간 수류탄은 중국군 고창묘의 병공창에 근무하는 왕웅에게 부탁해서 1개를 마련하고 또 하나는 김현을 시켜 허난 성의 유치 방면에서 가져왔다. 왕웅은 조선의용군 사령관 김홍일의 중국식 이름이었다. 김홍일은 해방 후 국군 육군 준장으로 한국전에 참전했고 외무부 장관을 지낸 분이다. 


12월 10일 김구는 이봉창을 임정 근처 여관 중흥 여사로 불러 하룻밤을 같이 자며 거사에 대해서 자세히 논의했다. 거사에 실패하여 체포될 경우에 심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등등을 이봉창에게 당부했다. 다음날 아침 김구는 헌 옷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어 이봉창에게 주었다. 당시 일본돈으로 150원이라는 거금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갈 준비가 다 되거든 다시 오라고 하고 헤어졌다. 


이틀 후, 12월 13일 그가 김구를 다시 찾아왔다. 장원루에서 저녁 식사와 함께 술을 마신 다음, 밤 10시쯤 김구는 이봉창을 안공근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중국식 복장을 한 청년(안공근?)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가 안내하는 방으로 갔더니 폭탄 두 개, 조선독립선서문, 태극기가 놓여 있었다. 선서문에는 “나는 적성(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 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앞”라고 적혀 있었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폭탄을 들고 찍으라고 했으나 죽기 전에 형 병태에게 보낼 사진을 먼저 찍어 달라고 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독사진을 먼저 찍었다. 그리고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하여 거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봉창의 한인애국단 가입식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김구와 이봉창은 마지막으로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어려운 임정 살림에도 불구하고 많은 거사자금을 마련해 준 데 대하여 감복한 나머지,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이라 믿으시고 이렇게 큰돈을 주시나 하고, 내가 이돈 을 떼어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백범일지, 나무위키) 이봉창은 “나의 계획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조선이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다.”라고 말했다. 김구는 “나도 군의 행동이 다행히 성공한다 하더라도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공하지 못해도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서 희생자를 파견할 결심이다. 군은 조선독립을 위한 제1의 희생자 이므로 강한 애국심을 갖고 반드시 목적을 관철하도록 하라.”라고 답했다. (위키백과, 이봉창) 이봉창은 홍구로 돌아와 일본으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 


12월 17일 이봉창은 허리춤에 폭탄을 숨기고 양복을 입었다. 중국요릿집에서 김구와 만나 최후의 축배를 들었다. 김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젊은 나이로 희생되어야 하는 이봉창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봉창은 오히려 김구를 “우리가 대사를 성취할 터인 데 기쁜 낯으로 헤어집시다.”하고 위로했다. 


김구는 이봉창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는 곧바로 도라야(요깡등을 파는 일본 과자점)로 향했다. 과자점 주인아주머니가 차려주는 점심을 먹고 전날 그곳에 맡겨 두었던 빨간 가죽 트렁크 한 개와 등나무 바스켓 한 개를 찾아들었다. 일본인 주인아주머니는 도쿄에 사는 자기 딸에게 전해 달라고  선물 꾸러미를 부탁했다. 짐을 들고 부두로 갔다. 부두에는 일본인 철공소 직원들이 배웅 나와있었다. 심지어 일본 경찰관도 전송하러 부두에 나와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일본인답게 행동했고 사교성이 좋았는 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일본 우편선을 타고 12월 19일에 고베에 도착했다. 그는 폭탄을 비단 주머니에 넣고 사타구니 사이에 숨기고 다녔다. 그는 바로 한신행 열차를 타고 오사카에 가서 미나토구 야구초모 여관에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나라에 있는 여자사범고등학교 기숙사를 찾아가서 도라야 과자점 주인아주머니가 부탁한 선물을 그녀의 딸 오다기리 미치코 양에게 전해주고 나라 관광을 했다. 


12월 28일 이봉창은 아사이 신문에서 1932년 1월 8일에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 관병식이 거행되며 이때 일본 황제가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고 거사일을 그날로 잡았다. 이 행사의 목적은 관동군이 정부의 인가 없이 마음대로 저지른 일본의 만주 침략을 기정사실화 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구는 일본에 있는 이봉창에게 추가로 100원을 더 송금했다. 이봉창은 잘 받았다는 답장을 하면서  “상품은 1월 8일에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라는 전보를 쳤다. 그는 오와리야 여관에서 수류탄 주둥이에서 나무마개를 뽑고 쇠로 된 기계를 끼어 넣은 다음 안전핀을 뽑아내어 언제 어디서든지 터질 수 있게 해 놓았다. 6일 아침 8시 그는 행사가 열리는 요요기 연병장을 미리 살펴보았다. 관람 좌석과 천황이 사열하는 운동장이 너무 멀어서 폭탄을 투척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천황이 궁을 떠나서 요요기 운동장으로 오는 행차 진로를 파악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쿄시내 지도를 사들고 합승 버스에 탑승했다. 이때 그는 천성적인 사교성을 발휘하여 버스기사와 친숙 해졌다. 자연히 천황 행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봉창이 관병식을 보고 싶다고 하자 버스 기사는 일본 육군 헌병대 조장 오버 켄게이의 명함을 주었다.  천황 행차 노선을 파악한 이봉창은 요요기 연병장에서 가까운 하라주쿠 역에서 폭탄을 던지기로 작정했다. 


1월 8일 거사 날 오전 8시에  검은색 오버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올백으로 빗고  헌팅 캡을 눌러썼다.  검은 가죽구두 위에 천으로 된 구두 커버를 두르고 폭탄이 들어 있는 보따리를 들고 다마키로 향했다. 그리고 가와자키역에서 국철을 타고 하라주쿠로 향했다. 하라주쿠 역에 도착하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역 앞 중국집에 들어가서 닭고기 계란덮밥을 시켜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이때 형사처럼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미행당하는 것 같아서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주인에게 다가가서 아무나 보러 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주라고 관병식 초대권 같은 것을 주었다. 그러면서 “이것으론 남쪽 출입구 밖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했다. 이것을 보고 이봉창은 일행에게 다가가서 합승버스 운전사가 준 헌병 조장 오버 켄게이의 명함을 주인에게 보이며 “나는 이 분의 초대를 받았는 데 어디로 들어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안주인이 그 명함을 두 형사에게 보이자 “그 명함으로는 헌병이 지키는 곳이면 어느 출입구로 든 지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고 음식점을 나갔다. 

이봉창이 음식점을 나와 주위를 살펴보니 경계가 너무 삼엄했다. 도저히 일을 벌이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전철을 타고 요쓰야역으로 향했다. 하라주쿠역은 요요기 경기장에 가까운 쪽에 있고 요쓰야 역은 왕궁에 가까워서 천황이 오는 길을 역행하는 방향이었다. 역에서 내려 보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했다. 신문팔이 소년 오버네 요시에게 천황이 지나갔느냐고 물었다. 그는 천황은 이곳을 지나가지 않고 아카사카미스케를 통과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거사하기로 마음먹고 파출소 뒤 공중변소로 가서 수류탄을 꺼내 바지 주머니 양 쪽에 하나씩 넣었다. 이봉창은 9시 40분경에 이곳에 도착했다. 요요기 운동장에서의 관병식이 9시 50분 예정인 것을 감안하면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천황 행렬은 이미 이곳을 지나갔고, 정오경에 환궁할 때 다시 이곳을 통과할 것이라고 했다. 


이봉창은 천황이 환궁할 때를 노리기로 작정하고 시간이 많이 남아서 가까운 잇키 식당에 들어가서 술을 한잔 시켜 놓고 관병식 라디오 중계에 귀를 기울였다. 관병식이 끝났다는 방송이 나왔다. 바로 나가면 이를 까봐 늑장을 부렸다. 그리고 아카사마미 스게에 도착해  보니 행차는 벌써 이곳을 지나서 맨 끝의 의장대가 다 마치길 모퉁이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봉창은 무척 당황했다. 이러다가 거사를 모두 그르칠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있는 행인 선로 인부 사쿠라이 긴타로에게 천황 행차 행렬을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행렬은 다 마이케 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지름길로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마침 빈택시가 다가왔다. 택시에 타자마자 “천황 폐하의 행렬을 봐야 하니 빨리 갑시다.”하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택시는 아카사카미쓰케 언덕을 올라 새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 육군참모본부 앞을 거쳐 내리막길을 달렸다.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서 경찰이 제지했다. 이봉창은 택시에서 내렸다. 경찰은 한쪽길만 막고 있었고 반대편은 통행이 가능했다. 경시청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봉창은 서둘러 경시청 쪽으로 향 했다. 


이봉창은 단숨에 경시청 현관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행렬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파가 7-8겹으로 몰려 있었다. 이봉창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두세 겹까지 접근하여 황제의 행렬을 기다렸다. 드디어 행렬의 맨 앞 마차가 나타났다. 안에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봉창은 천황이라면 옆에 수행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핏 보기에 천황의 얼굴이 아니었다. 뒤에 의장병도 따르지 않았다. 이봉창은 이 마차를 그냥 보냈다. 이어서 두 번째 마차가 따라왔다. 의장병이 뒤에서 호위하고 있었다. 안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봉창은 이 마차에 천황이 타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봉창은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어 약 18미터 앞 두 번째 마차를 향해서 힘껏 던졌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5분경이었다. 수류탄은 뒤쪽 마부가 서는 받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커다란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 구경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이봉창은 왼쪽으로 5-6보 물러 났다. 이봉창은 6-8칸 내의 모든 것이 파괴되는 위력을 기대했기 때문에 두 번째 마차는 물론 그 주변이 엉망이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봉창의 눈앞에는 전혀 뜻밖의 정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마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뒤 따르던 의장병도 의연하게 말을 타고 따랐다.


이봉창은 거사가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폭탄의 위력이 너무나 약했다. 폭탄의 무게를 줄여서 운반하기 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오기 전에 폭탄을 시험해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직 자신이 목표로 한 마차에 천황이 타지 않았다는 것은 몰랐다. 천황 마치노미야 히로히토는 그가 그냥 보낸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뒤쪽에서 “나는 아닙니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사 혼다 쓰네요 시가 50세가량의 무명옷을 입은 남성을 범인으로 오인하고 채포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봉창은 혼다에게 “그 사람은 아닙니다. 접니다!”라고 말하고 체포에 순순히 응하려 했다. 그러나 경시청 수사 2 과장 이시모리 아사오, 순사부장 야마시타 슈헤이, 헌병 상등병 가와이 요시 등이 그를 난폭하게 제압했다. 곧바로 그는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이봉창을 경시청으로 연행한 이시모리 아사오 수사 2 과장이 몸수색을 하려 하자, 이봉창은 이를 물리치고 스스로 주머니에서 나머지 한 개의 수류탄, 도쿄 시외지도, 현금 5원 64 전등 거사를 위해서 소지하고 있던 물건을 전부 내놓았다. 


외부와의 연락이 일절 차단된 가운데 도쿄 지방 재판소의 미야기 나가고로 검사장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검찰이 대심원에 예심을 청구하는 데 필요한 사건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보고서와 함께 이봉창은 대역죄인으로 대심원에 예심이 청구되었다.  이후로는 검사가 아닌 예심 담당 판사의 심문을 받았다.


이봉창의 심문이 한창인 동안 그의 일본 천황 암살 미수 사건은 일본 정계와 시민에게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수상 이누카이 다카시는 입궐하여 시종상 스즈키 간타로를 통해 천황 히로히토에게 문안을 여쭈었다. 12시 35분, 수상관저에서 긴급 각의가 열렸다. 내각은 경시청 보안과장 모리오카 지로와 경시총감 초 앤 렌으로부터 사건의 진상 보고를 받았다. 사건 수습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내각이 책임을 지고 총 사퇴할 것을 결의했다. 이누카이 수상은 그날 오후 5시에 입궐하여 천황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경시청 간부 7명과 지휘관 6명이 징계당했다. 지방공무원도 무사하지 않았다. 시이토 무네요시 쿄토부 지사, 시로네 다이스케 효고겐 지사. 엔도 류사쿠 아이 치겐 지사와 그 외 지방공무원 10명이 견책 처분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그라마츠는 외무차관 나가이 마쓰조에게 자신의 사퇴여부를 적절히 조사해 달라고 상신했다. 상해 총영사관의 아카이 사무관과 하나사로 경찰서장이 무라이 총영사에게 서면으로 자신들의 진퇴를 묻자 이를 외무성에 보고했다. 


조선 내의 친일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동민회를 중심으로 한 중추원 참의와 그 밖의 민족 반역자 34명은 사죄성명서를 조선 총독부에 제출했다. 박춘금 등은 일본 황궁 앞에서 사죄의 망배를 하고 일본 고위 인사에게 사죄 전보를 보냈다. 


만주 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중국의 이봉창 의거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중국의 민국일보는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이 정확하게 일본황제에 명중되어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야 했을 것을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다”라고 대서특필했다. 익세보는 “이 장대한 의거를 2천만의 작은 나라 조선인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보도했다. 남경의 중앙일보는 “4억 인구의 중국이 이렇다 할 항일 투쟁을 벌이지 못한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이봉창의 거사를 부러워했다. 물론 일본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이러한 중국 언론의 태도에 대해서 강력히 항의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사 사장과 기자들의 해고를 요구했다. 국민당 정부는 그저 가벼운 경고를 하는 정도로 비켜가려 했으나 집요하고 강경한 일본의 압력에 못 이겨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그러나 중국의 언론은 이에 굴 하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사건의 보도를 계속했다. 이와 같은 국민당 정부의 일본을 달래서 그들의 침략의욕을 잠재우려는 노력은 허사였다. 이봉창 의거 후 악화된 상하이의 일본 사람들과 중국인의 충돌은 일본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한다. 


상하이의 임정과 한국독립당은 비록 이봉창의 폭탄 투척이 예상한 대로 천황을 암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반향이 워낙 커서 크게 고무되었다. 한국 독립당은 일본의 침략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동안의 조선인의 독립을 위한 요인암살사건을 열거하며 이러한 일들이 단순한 테러가 아니고 독립이라는 정의의 구현을 위한 활동임을 만 천하에 알리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 30년 동안의 의인과 열사가 전에 없이 뒤를 이어 나타나고 있으니, 즉 장인환에 있어서의 스티븐스, 안중근에 있어서의 이토 히로부미, 이배명에 있어서의 이완용, 신민회에 있어서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강우규에 있어서의 사이토 마코토, 양근화에 있어서의 민원식, 김익사에 있어서의 다나카 기이치, 김지섭에 있어서의 니 주바시, 송학선에 있어서의 김호몽, 조명하에 있어서의 구니 신니와 같은 예가 모두 그러하다. 한국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나서지 않을 수 없게 한 것 가운 데 제국주의자들이 그렇게 만들지 않은 것이 없다. “


일본 재판부는 이봉창을 9번 심문하고 사형을 언도했다. 이봉창은 8번째 심문 까지는 반성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6월 27일 마지막 심문에서 그동안 백정선이라고 호칭하던 인물을 김구라고 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일본 황제에게 난폭한 짓을 한 것”, “조선 독립은 전혀 실현할 수 없는 것”라고 진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그랬을 까?

국제한국학연구원장 최서면은 이 조서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역죄는 천황의 성덕을 증거 하기 위해 경관, 검사, 판사들이 범인이 후회의 뜻을 표명시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라고 대역죄 연구학자들의 결론을 인용하여 이를 설명하고 있다. 


단 두 번의 공판 끝에 사형이 언도되었고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봉창은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향년 31세였다. 그의 유해는 도쿄 서북쪽 사이타현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봉창은 초등학교 교육을 받은 재주 있는 청년이었다. 그의 집안 환경이나 교육정도는 일제강점시대의 조선을 일본의 영토라고 이해하게 했다. 그래서 자신도 당연히 일본사람과 똑같이 대우를 받아야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번돈으로 재미있게 살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일본사람들보다 훨씬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원인을 자신이 일본사람들과 똑같은 시민이 못되었다는 데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더욱 일본사람과 똑 같이 되려고 성심껏 노력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천황에 충성하는 착실한 일본시민이 되려는 그를 일본은 지속적으로 냉대했다. 결국 그는 조선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일본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만난 김구는 일본의 괴수 천황을 제거하려는 그의 생각을 굳혀 주었고 그 수단과 자금을 제공했다. 


우리는 이봉창을 통해서 당시 조선의 소시민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거창하고 위대한 자주독립보다는 앞에 놓인 민생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천황 암살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만주사변에 얽힌 일본의 대 만주 정책으로 인해서 중국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차후 벌어질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과 함께 이봉창 의거는 중국 국민당정부와 임정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레닌의 원조 중단으로 인한 임정의 자금난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원조로 일부 해소시키고 임정의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했다.  


참고 

1. 위키백과: 이봉창

2. 나무위키: 이봉창

3. 블로그 대구 cctv 보인 역사이야기 항일투사 이봉창

4. YouTube 벌거벗은 한국사 이봉창 편 사피엔스 스튜디오

5. 조선일보 2022.11.04 유석재의 돌발사전 이봉창의 두 얼굴-과연 어느 쪽이 진짜인가.

6. 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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