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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l 30. 2023

김구의 김립암살사건

박진순, 한형권 그리고 김립은 누구?


앞줄 오른쪽 끝이 김립. 시계방향으로 박진순, 이동휘, 이극로, 김철수, 계봉우, 신원 미상.(서울신문)


1919년 3월, 모스크바에 30여 국 대표가 모였다. 레닌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서 이들을 초청했다. 세계공산화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었다. 자본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연맹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국제연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제1회 코민테른 대회에서 코민테른이 탄생했다.  1920년 7월 제2차 대회가 열렸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언하는 등 공산주의 혁명에 관한 세부적 강령을 결정했다. 이때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가 된 약소국의 독립을 돕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것은 도움을 받는 국가를 공산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연두 교서에서 일차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를 위한 14개 원칙을 발표했다. 이 중 민족 자결주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강대국의 식민지가 된 약소민족들 에게는 이 선언이 자국의 독립을 인정해 준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나 약소국의 독립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고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승전국의 식민지 국가는 독립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운형이 주도하여 김규식을 파리 평화 회의에 파견했지만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베트남의 호지밍도 마찬가지였다. 여운형 등은 한국의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리려고 3.1 운동까지 벌였지만 열강의 반응은 싸 늘 했다. 파리평화회의에서 일본과 함께 영국 편에 서서 독일과 싸웠던 중국 대표에 대한 홀대는 중국민의 서방국가에 대한 분노를 샀고 결국 5.4 운동으로 번져 중국 공산당을 탄생하게 했다. 


이와 같이 약소국가들이 말과 행동이 다른 서방국가들을 믿지 못하게 된 판에 레닌의 좀 더 구체적인 도움은 가뭄에 단비였다. 사실상 상해 임시정부도 도움을 받을 만한 나라는 소비에트 밖에 없었다. 서방국가들은 식민지 통치 국인 일본 편이었다. 그들이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울 리가 없었다.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조선사람들은 만주, 시베리아, 상하이 등 러시아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중국 본토는 이권을 가지고 있는 서방국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시베리아와 만주에는 소비에트로부터 공산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자연히 조선의 독립운동가들도 우파와 좌파로 갈라졌다. 물론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도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 하에서 레닌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려 했던 인물이 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조선인 박진순이었다. 


박진순의 조상 고성 박 씨는 16세기에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유배당했다. 이곳은 함경북도 북쪽에 두만강과 접경하고 있다. 경원군 증산동은 고성 박 씨의 집성촌이다.  1890년 박진순의 부모는 시베리아 수찬으로 이주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북쪽으로 3킬로 떨어진 농촌이었다. 조선에서는 죽으라고 일해서 수확해 봐야 지주에게 반을 떼어 주고 나라에 과도한 세금을 뜯기고 나면 먹고 살 곡식이 남지 않았다. 그런데 러시아는 땅은 넓은 데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조선인 이주자들을 환영했다. 그래서 19세기말 20세기 초반에 연해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이 무척 많았다. 박진순은 1898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혈통은 조선인이나 러시아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박진순의 러시아어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조선의병지원단 수찬지역 지부장으로 그 지역 무장항일운동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박진순의 아버지는 이동휘와 동년배이고 친구였다고 한다. 이동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초대 상해임수정부 국무총리를 지냈다. 고려공산당을 창당 한 인물이다. 박진순이 이동휘와 같이 활동하게 된 연유인 것으로 보인다.


박진순은 1905-1911년, 6년 동안 교포들이 운영하는 한인 초등학교에 다녔다. 서당이 아니고 서구식 초등 교육 기관이었다. 수찬일대에 있는 한인 초등학교는 10개가 넘었다. 당시의 한인 인구가 많았고 그들의 교육열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어, 한문, 러시아어를 모두 가르쳤다. 학교에서는 일제에 항거하여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저항적 민족의식을 가르쳤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민족의식을 강조하고 자국의 언어로 교육하는 학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인가 없이 학교를 운영했고 경찰이 학교에 나타나 학교문을 강제로 닫게 했다. 

1912년 박진순은 러시아 중등학교애 진학하여 4년 동안 교육받고 15세 되던 해인 1916년에 고등 소학교에 입학하여 19세에 졸업 한 다음 블라디보스토크 시디미 마을에 있는 조선인 학교 교사로 일 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조선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혁명사상을 배웠다. 무정부주의자의 저술도 탐독하였다. 그는 1915년 고등학교 재학 중 18세의 나이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조선혁명가 김응렬(?)이라는 사람이 조직했는 데 이 사람은 안중근의사의 동료라고 알려져 있다. 일종의 민족주의 혁명 단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공산주의 혁명이 노동자들의 궐기로 이루어졌는 데, 당시의 조선 젊은이들은 민족주의적 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다. 

(참고: 한겨레 21, 염경석의 역사극장, 동양의 레닌이 재간을 키운 곳; 식민지 시기 넘치는 재주로 주목받은 박진순을 통해 본 조선사회주의 기원, 2022-01-11)


1917년 2월 혁명(러시아 제국의 멸망) 직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국민회의 비서로 일했다. 1917년 4 월 이동휘가 독일 정탐, 동중철도 파괴 공작의 주도 인물이라는 혐의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자 박진순은 이동휘 석방을 위한 한인 대표로 선정되어 러시아 정부 당국과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이 협상은 실패했다. 그리고 7개월 후 11월에 정권이 바뀌어 석방되었다.  


1917년 5월부터 그는 볼셰비키 강령을 받아들여 한인들 사이에 볼셰비키 정신 확산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2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3월 초에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이 결성되었다. 한인 사회당은 이 조직에 가입하기 위해서 7월에 박진순, 이한영, 박애 를 대표로 파견했다. 당시에 러시아 내전이 진행 중이어서 가는 길은 험 했다. 박진순은 먼저 무사히 도착했으나, 이한영과 박애는 여행 중 병을 얻어 늦게 도착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진순은 한인사회당 당원 명부와 2차 당대회 보고서 “조선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코민테른 집행위원에게 제출하고 코민테른 가입을 신청했다. 이 보고서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7-8호 합본에 실렸다. 

(참고: 나무위키 박진순)


박진순은 레닌과의 교섭에 성공하여 공산주의 선전비로 400만 루블을 받았다. 1919년 9월 10일 박진순 일행은 이돈 을 가지고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러시아 내 한인공산당 본부가 있었다. 이조직은 볼세비 키당 이르쿠츠크 지부인 이르쿠츠크 공산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곳 한인공산당은 볼세비키당에서 이 지부에 파견된 보리스 슈마츠키의 지원을 받아 “자신들이 시베리아 한인들의 정통적인 공산당”이라고 주장하여 200만 루블을 빼앗아 갔다. 나머지 200만 루블은 한인 사회당에서 수령하였다. 한인사회당 본부는 원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는 데 이동휘가 임정 국무총리로 부임하면서 상하이로 옮겼다. 이 돈은 일본돈으로 환전하여 총액 10만 엔 중 5000엔이 임시정부의 보조금으로 지출되고 나머지는 모두 한인사회당이 사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이고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이동휘는 1919년 11월에 박진순을 모스크바에 다시 보내어 이르쿠츠파 한인공산당의 자금탈취를 규탄하고 한인사회당을 끝까지 지원해 달라는 탄원서와 상해 임시정부는 실직적으로 한인사회당 정부이며 한인사회당은 공산주의 운동을 위하여 심신을 바치겠다는 서약서를 보내어 유일한 조선 사회주의 당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20년 1월 하순 이동휘는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이동휘가 한형권을 대표로 결정하는 데는 많은 곡절이 있었다.  한형권은 과격한 좌파 인사였다. 당시의 상해임시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고 있었다. 당연히 미국 중심의 국제연맹과 외교를 해야 하는 정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형권은 러시아의 코민테른 중심의 외교를 해야 하고 상해임시정부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소비에트민주주의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열강에 대하여 다소간 동정을 얻을 만한 선전공작은 필요하지만 실제의 원조는 추호도 얻지 못할 것이다.  오직 우리는 새로 출현한 노동 러시아와 더불어 악수하여야 할 것”이라고 이동휘, 김립, 남공선 등에 말하곤 했다. 이동휘는 국무총리, 김립은 총리 비서실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상해임시정부 헌장에는 민주공화제와 국제연맹 가입이 명시되어 있었고 임정요원 다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에 소비에트민주주의 체제로 바꾸고 코민테른에 가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러시아 공산당 공작원 포타포프가 1919년 연말에 나타났다. 그는 상해임정을 친 소비에트 정부로 만들려는 공작 임무를 가지고 상해에 온 것이었다. 한형권, 안창호, 여운형, 이광수 등이 그를 만났다. 그는 그들에게 “파리강화회담, 국제연맹, 연합국정부가 (한국의 독립에)무익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한편, 그와 동시에 러시아 혁명 사상을 폭넓고 과감하게 선전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임정을  친 소비에트 노선으로 바꾸려 했다. 


포타포프의 공작이 계속되는 동안 임정은 러시아에 밀사를 보내기로 하고 대표를 물색하고 있었다.  우파인 안창호의 영향으로 임정은 여운형과 안공근을 밀사로 결정하였다. 안공근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다. 한편 좌파인 이동휘는 한형권을 대표로 보내려고 했다. 김립에 의해서 이 소식이 이동휘에게 전해지자 그는 안창호에게 여운형 밀사를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안창호는 생각해 보자고 하면서 이동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안창호는 내무 총장이었고 이동휘는 국무총리였다. 두 번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1920년 1월 31일 이동휘는 안창호에게 한형권을 러시아에 보내고 여운형은 보내지 않겠다고 안창호에게 통보했다. 안창호는 국무원에서 이미 결정된 사안을 취소할 수 없다고 반박했으나, 이동휘는 한형권을 밀사로 파견했다. 이동휘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좌파 소장파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서실장 김립, 재무차장 윤현진, 내무차장 이규홍, 교통차장 김철 등이 그의 뒤에 있었다. 재무총장 이시영은 한형권에게 여비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여비 2000원을 마련해서 한형권에게 주었다. 


이동휘는 한형권 편에 포타포트의 공작 보고서, 한인사회당에서 파악한 동아시아 3국의 정치적 상황보고서 등을 소비에트 정부와 코민테른에 제출하였다. 이런 은밀한 보고서를 안창호 계열의 여운형에게 맞길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1920년 6월 초 한형권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를 만난 후 레닌은 외무인민위원(장관) 치체린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치체린에게 “소련이 극동 인민의 식민지 해방운동을 지지하고 일본의 영토 확장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고 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는 큰 희망을 가지고 본인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공동투쟁을 하고 있는 두 나라 혁명정부 간에 상호연대를 강화할 수 있도록 관계를 수립하는 전권을 본인에게 위임했다.”라고 방문 취지를 설명하고 다음 4개 항의 도움을 요청했다. 


1.      소련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2.      소련은 임정에게 200만 루블의 차관을 제공할 것

3.      극동에서의 항일작전은 임정과 공동으로 수립할 것

4.      이르쿠츠크에 대한민국 독립군사학교의 개교를 지원할 것


당시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의 복권을 꾀하는 백군과 볼세미키 적군사이에 내전 중이었다. 미국, 일본 등 은 우파인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조선독립군과 볼셰비키 적군은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레닌의 소비에트정부는 임정에게 200만 루블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10월 이중 60만 루블을 받았다. 서류상으로는 한형권이 수령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코민테른 집행위원이었던 박진순이 레닌으로부터 60만 루블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동행했던 한형권으로 하여금 20만 루블을 모스크바 은행에 예치하도록 하고, 금화로 받은 40만 루블을 마차로 운반했다. 혁명정부에서 발행한 루블은 금과의 태환이 보장되지 않아서 레닌은 금화로 주었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무려 500억 원에 상당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금화는 그 무게가 327kg이나 나갔다. 운반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전국이 내전으로 불안했다. 백군과 마적단이 언제 나타나서 돈을 탈취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일본군 첩자도 문제였다. 그들은 비교적 안전한 루트인 모스크바-몽골-블라디보스토크-상하이를 택했다. 


박진순과 한형권은 두 달 만에 치타에 도착했다. 여기서 일행은 김립을 만났다. 치타에서 상하이까지의 운반은 그가 맡기로 되어 있었다. 이때 김립이 볼셰비키 혁명정부가 지원한 자금은 사회주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형권도 이에 동의했다. 이 세 사람은 상하이로 가지 않고 독립자금 금궤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촌 어느 집 지하실에 감추었다. 이후 6개월 동안 극동러시아 지역 한인사회당, 전로 공산당등 10개 단체에 독립운동자금을 배포했다. 홍범도의 독립군부대도 거금을 받았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이 소식이 임정에 전해지자 발칵 뒤집혔다. 긴급회의가 소집되고 이동휘 총리에게 사건의 경과보고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레닌의 독립자금은 임정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하며 이를 거절했다. 그는 레닌이 준 자금은 당연히 사회주의 운동 자금으로 쓰여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임정 대통령이었던 이승만도 미국에서 모금한 자금을 임정에 보내지 않고 있었다. 국무총리 이동휘의 반발에 대해서 대부분의 임정 고위층은 크게 항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무국장 김구와 그의 측근은 분노했다. 김구와 이동휘의 충돌을 우려한 안창호는 김구에게 “김동지,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보낸 자금인 데 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 않소?”라고 말하며 그를 달랬다.


김립은 이동휘의 책사였다. 당시에 가장 유능한 책략가였다고 한다. 그는 남은 돈 18만 원(오늘날 220억 원에 해당)을 가지고 상하이로 와서 임시정부 안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그는 임시정부를 혁명운동의 지휘부로 바꾸려고 했다. 국무총리 이동휘의 비서실장으로 이 돈을 가지고 임정 내 여러 인사들의 편리를 봐주었다. 임시정부 식사비, 김규식의 여비, 신채호의 역사 편찬비, 김원봉 의열단의 무기구입비등을 지출했다. 그런데 김구는 백범일지에 “김립은 그 돈으로 북간도의 자기 식구를 위해서 토지를 샀고 자기는 상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얻어 향락을 누렸다”라고 적고 있다.

 

이때 김립이 레닌으로부터 받은 돈을 횡령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김립의 정적이 퍼트린 유언비어였다.  당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르쿠츠파 공산당과 상하이파 공산당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동휘 등 임정 사회주의자들은 상하이 파였다. 이르쿠츠파 공산당이 가장 의심스러운 소문의 원천지였다. 이르쿠츠파 공산당원 장건상은 항상 김립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김립은 한인사회당 대표자 회의에서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님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회의 결과 한인사회당은 김립의 결백을 인정했다. 그러나 국제공산당(레닌) 자금 사건이 터지자 1921년 1월 24일 이동휘는 임정총리직에서 사임했다. 비서장이었던 김립도 따라서 임정을 떠났다. 


임정은 소비에트가 임정 대표 한형권에게 준 자금을 이동휘와 김립이 횡령했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좌파인사들은 크게 반발했다. 1922년 1월에 열린  의정원 회의에서 이동휘와 김립 등은 성토문을 발표했다. 두 계열은 이 자리에서 피 튀기는 난투극을 벌렸다. 결국 의정원 의원이 대거 사퇴했다.” 반동의 괴수는 모화주의자 신규식이 다”라는 비난이 빛발 쳤다.  1922년 1월 26일 상해임정은 “한형권을 이웃나라에 몰래 파견하여 이웃나라의 후의에 의하여 거금을 정부에 증여케 하고 김립으로 하여금 이를 중도 횡령케 하고 도리어 죄를 전각원에게 돌리어 정부를 파괴하려고 꾀한 그 죄 하늘과 백성이 함께 할 수 없다. 김립은 이동휘와 서로 결탁하여 마침내 국금을 횡령하여 사양을 살찌우고 같은 무리를 숙취 하여 공산주의 운동의 미명 하에 숨어서 간모 하고 있어 그 죄는 극형에 처할만하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문서에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을 비롯하여 내무총장 이동녕, 군무총장 노백린, 학무총장대리김인전, 재무총장 이시영, 교통청장 손정도가 서명했다. 포고문은 김립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임정의 입장을 표명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임정 경무국장(경찰청장) 김구는 1921년 말부터 경무국직원들을 상하이 시내에 풀어 잠적한 김립의 소재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김립을 처단하겠다는 임정 국무회의의 방침을 경무국장의 자격으로 수행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극동공화국내 스보보드니에서 볼셰비키 적군이 독립군에게 지휘권을 적군에게 반납하라고 요구했으나 독립군단은 이를 거절했다. 적군은 반발하는 독립군단을 포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이르쿠츠파 공산당과 상하이 공산당이 서로 볼셰비키 적군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헤게모니 싸움을 했다. 상하이에 있던 상하이파 공산당원들 대부분이 러시아 스보보드니로 가서 이 분쟁에 참여했다. 그래서 김립, 김철수 등 소수가 상하이 고려공산당 근거지를 지키고 있었다.


김립과 같이 상하이에 잠적하고 있던 김철수는 언제부터인가 누군가가 자기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인력거를 타고 움직이면 다른 인력거가 뒤를 따랐다. 자신이 타고 있는 인력거가 서면 뒤 따르던 인력거도 섰다. 하루는 자신이 탄 인력거를 세우고 미행하는 인력거로 다가가서 “어떤 놈이 뭐라고 했던지, 네가 네 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해야지, 왜 내 뒤를 따라다니는 나? 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결국 김립은 김구 부하들의 미행에 꼬리가 잡혔다. 일본경찰의 첩보에 의하면 김립이 살해되기 한 달 전 그는 망명객 현정건과 같이 살고 있었고 조선에서 출장 나온 언론인 유진회와 회견을 했다고 한다. 


1921년 11월 황해도가 고향인 오면직과 노종균이 상하이로 망명했다. 군자금 모금을 하다가 누설되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고향 사람인 김구에게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암살조는 4명으로 구성되었다. 두 사람이 퇴로를 막고 두 사람이 앞에서 달려들면서 총격을 가하는 방법이었다. 퇴로를 차단하는 일을 담당했던 사람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1922년 2월 11일 김립은 다른 한국인 사회주의자인 김철수, 유진회, 김하구와 같이 상하이 지배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괴한 4명이 뛰쳐나왔다.  오면직과 노종균은 김립의 앞에서 총을 쏘았다. 무려 12발의 총알이 김립의 몸에 박혔다. 


같이 있던 동료들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김철수는 암살자들의 목표가 은행에 있는 자금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는 총에 맞은 김립을 급히 병원으로 옮기라고 하고 은행으로 달려갔다. 통장, 도장 등등 인출에 필요한 아무런 서류가 없는 그로서는 정말 막막했다. 그런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은행장이 일본 유학생 출신 천광푸였다.  그는 뒷날 대만 재무장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김철수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 동아시아 유학생들은 비밀결사 단체인 신아동맹단을 결성했다. 둘은 그때 같은 단원이었다. 상하이로 돌아온 중국인 유학생 단원들은 상하이기독청년회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김철수의 신원을 보증해 주었고 은행장 천광푸는 김철수의 신원을 인정해 주었다.  덕분에 김철수는 암살자의 예금인출 기도를 막고, 잔여 예금 인출권을 자기 명의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 이 사건과 관련된 문서가 발견되었다. 1차로 지급된 400만 루블과 김립이 관련된 2차 200만 루블 지급은 모두 상하이파 공산당에 지급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러시아 당국의 조사에 의하면 김립이 이 자금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었다고 한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적어 놓은 김립이 레닌이 상해 임정에게 준 돈을 상하이파 공산당 자금으로 쓰고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사용했다는 부분은 사실이 아니고 정적들이 퍼트린 유언비어였음이 한국외대 반병률 교수의 연구에 의해서 밝혀졌다.  그러나, 김립은 김구의 잘못된 주장 때문에 독립유공자로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김구가 상해임정의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서 김립이 레닌자금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고 하고 그를 암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본다.


참고

1. 월간중앙: 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 사(10); 밀사 한형권, 한인사회당 통일전술을 레닌에게 보고하다. 2022.12.17)

2. OmyNews: 임시정부가 암살하고 매장해 버린 김립의 진실, 황광우의 역사산책, 2022.11.29

3. 위키백과: 김립; 공금횡령문제

4. 나무위키: 김립피살사건, 2022.10.01

5. 한겨레 21: 동지가 동지를 쐈다. 20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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