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기철 James Ohn Jul 22. 2023

의열단과 1,2차 암살파괴사건

부산 경찰서, 종로경찰서 투탄사건과 홍옥사건


김원봉(우리 역사넷, 독립기념관)

영화 암살과 밀정은 천만 관중을 돌파했다.  두 영화 모두 김원봉의 의열단 활동에서 힌트를 얻어서 재작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있다. 1948년에 월북하여 인공 정부의 고위직을 담당했고 인공의 로력훈장을 받은 경력 때문이다. 해방 후 분단이 초래한 비극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의열단의 무장 투쟁은 다른 어떤 독립운동보다도 스릴 만점의 눈부신 활동이었다. 20대의 젊은 남녀단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보는 사람들의 분노와 눈물을 자아 내게 한다. 많은 단원들의 활동을 개별적으로 서훈하기는 했지만 이런 어마어마한 조직을 만들고 운영했던 인물을 단순히 공산주의자라고 하여 아무런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는 정부가 한없이 옹졸하게 보인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무시 했던 조선은 무사의 나라 일본에게 망했다. 그는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무력으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약한 외교적인 방법을 강조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김구와 쌍벽을 이루며 무장 항일 투쟁을 주도했다 


김원봉은 1898년 음력 3월 14일에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화 중학교에 다녔다. 교장 전홍표는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 민족의 원수 강도인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슬프고, 비참하다.”는 요지의 훈시를 듣고 크게 감화를 받았다.  이후로 그는 항상 항일운동을 준비했다. 학교가 폐교당하자 그는 표충사로 들어가서 중국의 병서를 탐독했다. 1913년 경성으로 가서 중앙중학교에 편입했다. 김성수, 유근, 안재홍 등이 그의 스승이었다. 윤치영과 변영로 등 과도 친구가 되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약수, 이여성과도 가까워졌다.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였던 김두봉, 김무정과도 친구가 되었다.

 

1916년 중앙중학교 졸업 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갔다. 1916년 10월에 천진에 있는 덕화학당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독일사람들이 운영했다. 그는 독일어와 중국어를 배웠다. 그러나 중국이 일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독일이 중국의 적국이 되었다. 독일인들은 중국에서 추방당했고 학교가 퍠쇄되었다. 1917년 귀국하여  한동안 실망에 빠져 있다가 중앙학교 친구 이약수, 이여성등과 중국으로 다시 가기로 결심하고 1918년 여름 경성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만주 봉천에 사는 고모부 황상규를 만나서 며칠 쉬고 대련으로 가서 기선을 타고 상하이로 갔다. 상해에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18년 9월에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그곳에서 영어, 중국어, 독일어를 배웠다.   


1919년 2월 27일 길림에서 여준, 조소앙, 박찬익, 김좌진, 정원택, 황상규 등이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독림운동가 39인의 연명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선독립군정사(길림군정사)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으나 일본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하기에는 무기, 군자금등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소수의 인원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의열 투쟁을 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의열 투쟁은 테러 활동의 의로운 쪽의 다른 말이다. 그래서 황상규는 처조카 김원봉을 1919년 3월 초에 길림으로 불렀다. 고모부 황상규는 김원봉에게 신흥무관 학교에서 폭탄 기술을 가르쳐 주고 있는 주황을 소개해 주었다. 김원봉은 5월 초에 신흥무관 학교에 입학했다.  신흥 무관학교는 이회영 선생이 창설했다. 사대부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6행제와 모두 함께 막대한 전재산을 청산하여 독립운동에 나섰다. 무정부주의자였던  그는 무장투쟁을 주장했다. 김원봉은  6개월간 학교에 다니면서 폭탄제조법뿐만 아니라 체력단련, 군사학교육을 받고 졸업 3개월을 남기고 자퇴했다. 김원봉은 이 학교에 다니면서 김옥(김상윤), 강세우, 이성우, 이종암(양건호), 서상락(서영림), 신철휴, 함봉근, 한봉인 등을 동지로 규합했다. 교장 이회영 선생은 여러 급우들과 같이 자퇴하는 것은 반대했으나 그의  개인적인 자퇴는 인정해 주었다.


1919년 1월에 열린 파리강화회의대표 파견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고 한민족과 조선의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면 민족적인 궐기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국내외 지도자들이 단결하여 3.1 운동이 일어났고 상해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비폭력을 원칙으로 진행되었던 3.1 운동은 일본의 무장진압으로 많은 조선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김원봉은 이러한 3.1. 운동의 결과를 보고 종래의 무장 투장에 관한 결심을 실행에 옮긴다. 지속적인 주요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로 일본을 괴롭히면 종국에는 못 견뎌서 조선을 독립시켜 주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원봉은 1919년 11월 길림성에서 신흥무관학교 동지들과 당시 길림성으로 망명했던 곽재기, 윤세주, 윤치영 등을 규합하여 의열단을 창설하였다. 창립 단원은 김원봉, 강세우, 김상윤, 배동선, 서상락, 신철휴, 윤세주, 이성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황상규, 윤치영, 이수택, 이낙준, 권준이었다. 반이 밀양 출신이었고, 동화학교 동창인 20대 청년들이었다. 단장을 의백이라고 했고 김원봉이 맡았다. 의백은 결의자들의 맏형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밤새 토론을 거듭한 후 11월 10일 새벽 공약 10조를 정 했다. 공약 10조의 제1조는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인데, “의렬단’의 “의”는 정의, “렬”은 맹렬에서 따온 것이다. 목적은 국내외기관파괴와 요인암살이었다. 5 파괴 7 가살을 목표로 삼았다. 다섯 개의 파괴할 일본 기관은 조선총독부, 대만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였으며 일곱 명의 죽여 마땅한 요인은 조선 총독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탐, 반민족 토호열신이었다. 그러나 창단 당시에는 명문화된 강령은 없었다.  막연하게 항일운동으로 나라를 되찾은 후에 특권계급을 없애고 토지소유권을 균등하게 하는 등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사회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단원들 간의 10가지 규칙을 정했다.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정으로 운 일)를 맹렬히 실행하기고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에 선히 하고, 단원의 의에 급히 함

5.      의 백일 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 함

7.      하시하지에서나 초회에 필은 함

8.      피사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 함

9.      일이 구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반배한 자를 처살 함 


제1차 암살파괴계획


창단 직후 의열단은 제1차 암살파괴계획을 세웠다. 조선총독부, 경제수탈기관인 북로군정서 회사와 조선 식산은행, 일제선전 기관인 매일신보를 한꺼번에 폭파하고 각기관의 수뇌들을 암살하려는 거사였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무기와 폭탄을 거점에 반입해야 했다. 1920년 3월부터 만주에서 국내 반입이 시작되었다. 의열단 부단장이었던 곽재기는 만주 안동에서 밀양에 있는 김병완에게 폭탄을  보냈다. 3월 중순경에 이것이 경기도 경찰국에 의해서 발각되었다. 폭탄 3개가 압수되었고 괸계자 18명 중 곽재기외 12명이 체포되었다. 5월경에는 이성우가 폭탄 13개와 권총 2정을 만주 안동현 이륭양행을 통하여 경남 진영의 강원석에게 보낸 것이 일경에게 압수되고 윤치형 등 6명이 체포되었다. 관련자는 모두 26명이었는 데 18명이 체포되었다. 이중 16명이 재판을 받았고 강원석만 무죄로 방면되었다.  15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성우와 곽재기는 주범으로 지목 죄어 8년형이 언도되었다.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사건


의열단 창단 당시의 원대한 의열 개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김원봉은 싱가포르등 동남아와 상하이를 오가며 무역에 종사하고 있는 박재혁에게 부산경찰서를 폭파할 것을 주문했다. 

박재혁은 부산 범일동에서 1895년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삵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20세에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상업학교에 다니면서 최천택, 오택 등과 친구가 되었고 이들과 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펴낸 국사 교과서 <동국역사>를 등사하여 나누어 주었다.  1913년에 김병태, 최천택, 오택과 함께 비밀결사 구세단을 조직하고 단보를 만들어 배포하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벌써 요 주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오택과 최천택의 집은 잘 살았으나 박재혁은 상업학교 졸업 후 홀어머니와 누이를 부양하기 위해서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 전차 차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요주의 인물이라는 이유로 곧 파면되었다. 그래서 친지가 운영하는 왜관역 앞의 곡물 무역상회에서 일하다 가 1917년 6월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하이로 가서 무역업을 시작했다. 그는 싱가포르 까지 거래를 확대하여 부산, 상하이, 싱가포르를 오가며 인삼 중개 무역을 했다. 따라서 그는 일본어는 물론 중국어에도 익숙하게 되었다.


1920년 4월, 상하이에 둘른 박재혁에게 김원봉은 의열단 가입을 종용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그로서는 힘든 결정이었다. 두 번째 권유에 가입을 결심했다. 가입 후 부산으로 돌아와서 최천택 등 친구들과 의논하여 가사를 정리했다. 1920년 8월 박제혁은 싱가포르에 있었다. 김원봉으로부터 상하이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상하이로 온 박재혁에게 김원봉은  부산경찰서 폭파를 지시했다. 박재혁은 폭탄 한 개, 거사에 필요한 돈 300원과 여비 50원을 받았다. 김원봉은 “부산경찰서장을 죽여 독립운동의 기세를 높이라” 하고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지”분명히 밝히라고 지시했다. 제1차 암살 파괴 계획 실패로 인해서 의열단원 다수가 부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김원봉은 이를 보복하고 일제에게 의열단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부산경찰서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상하이에서 나가사키로 갔다가 대마도의 이즈하라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갔다. 시모노세키에서 부관연락선을 타면 검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오택 집에 들러 폭탄을 맡겨 놓았다. 그리고 최천택, 김영주 등과 동래온천, 해운대, 범어사 현효암 등지에서 거사전날까지 모의를 계속했다.  오택은 박재혁이 다시 찾아오기를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9월 14일 오후 박재혁이 나타났다. 오늘 거사하겠다고 밝힌 그는 맡겨둔 폭탄을 달라고 재촉했다. 오택의 아내 김정수가 폭탄을 조심스럽게 건네어주었다. 오택과 박재혁은 정공단으로 갔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사람들을 모신 제단이다. 비석 앞에서 거사의 성공을 빌었다.


박재혁은 오택과 헤어지면서 가족을 부탁했다. 오택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형제처럼 같이 지내던 친구였다. 그가 지금 가면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지 않은 가? 오택은 오륙도를 바라보며 멀건히 서서 한숨만 쉬었다. 머뭇거리다가 인근 부산진교회에서 열리는 도일노동자 봉쇄 반대 토의장으로 들어갔다.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30분경 박재혁은 장발에 밀짚모자를 쓰고 흰색 조선옷을 입은 채로  부산경찰서로 접근했다.  그의 주머니에는 폭탄이 들어 있었다. 경찰서 입구에는 경찰 한 명이 경계를 볼 뿐 무척 한가롭고 평화스럽게 보였고 주위에 인적도 드물었다. 박재혁은 경비를 보고 있는 경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나는 서장님께 직접 드려야 할 비밀정보가 있다.”라고 말하자 그는 박재혁을 서장이 있는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하시모토 서장은 공문서에 무엇인가 적어 넣고 있었다. 박재혁은 그의 오른쪽으로 접근했다. 서장은 잠시 적기를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주머니 안의 폭탄을 꺼내어 안전핀을 벗겨 서장 의자사이로 던졌다. 자신이 의열단원임을 밝힐 틈도 없었다. 폭탄은 서장 책상과 수부 계원석의 중간 지점의 마루 바닥에서 뒹굴었다. 폭탄을 던진 박재혁이 있는 곳에서 겨우 1미터 앞이었다. 아마 서장 의자 다리에 부딪쳐서 튕겨 나왔을지도 모른다. 박재혁의 발 밑에서 굉음과 함께 푸른 연기가 치솟았다. 폭탄 파편이 사방에 날려 흩어졌다. 사무실 의자, 탁자, 서적궤와 유리창등 상당한 건물이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 박재혁은 오른쪽 다리와 복부를 크게 다쳤다. 출혈이 심했다. 곧 제생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하시모토 서장은 오른쪽 발과 무릎 관절부에 경상을 입는 데 그쳤다. 그는 상처에 붕대를 감고 사건 수습을 지휘할 수 있었다. 

서장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제1차 암살 파괴 계획실패로 침체했던 의열단의 분위기를 반전하기에는 충분했다. 의열단 최초의 성공적인 거사였다.


1921년 3월 21일 박재혁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거 당시 중상과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진 그는 폐병까지 얻었다. 그는 일제의 손에 죽 느니 스스로 목숨을 끈을 결심을 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식음을 폐한 지 9일 만에 대구 감옥에서 사망했다.  1921년 5월 27일, 향년 26세였다. 살아 있었다면 해방되던 해에 50세였을 것이다. 


참고;

1.      OhmyNews “박재혁,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이병길 2021.05.03

2.      동아일보    “뱍재혁 의사 폭탄 투척 오류  많아 독립운동사 수정 해야”김희영 기자, (부산동국 학원 이상국 전문위원) 2023.03.02

*박재혁이 고서적 파는 중국인 상인으로 변장했고 폭탄이 폭발하여 서장이 사망했다고 여러 공식 웝브 사이트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사건이 극화된 것을 역사적 사실로 잘못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김상옥과 종로 경찰서 투탄사건



 김상옥(문화일보)

김상옥은 영문포수(영문을 지키는 군인)의 3 남일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그는 장남 노릇을 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구식군대의 한 사람으로 대원군의 쿠데타에 참여했으니 온전 할리가 없었다. 요지음 말로 불명예제대를 했으니 상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기소침하여 가사를 돌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모험을 좋아했지만 가난하여 8살 때부터 공부 대신에 일을 해야 했다.  체의 그물을 만드는 쳇불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여 14 살 떼에는 대장간 직공으로 말발굽을 만들었다. 16세 되던 해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교 신자가 되었다. 예배당 안에 있는 야학교에 다니면서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힘든 대장간 일이 끝나면 야학교에 가서 밤늦도록 공부했다.  그의 어머니 김점순은 김상옥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애가 어려서부터 갖은 고생을 다했지요. 옷 한 가지 변변한 것을 못 얻어 입고, 밥 한 술도 제대로 못 얻어먹어 메밀 찌꺼기와 엿밥으로 주린 배를 채웠지요. 어려서 공부가 하고 싶어 ‘어머니 나 3년만 공부를 시켜주오.’ 하던 것을 구복(口腹)이 원수라 그 원을 못 풀어주었습니다 그려. 그래서 낮에는 대장간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니는데, 시간이 촉박해 방에도 못 들어오고 마루에서 주는 것을 받아 서서 퍼먹고 갈 때 그저 체하지나 않을까 가슴 졸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예수교에 들어갔을 때는 저의 아버지한테 천주학 한다고 매도 많이 맞았어요. 글 읽을 틈이 없어서 낮에 일하고 고단한데도 밤에 책을 읽다가 피곤함을 못 이겨 얼굴에 책을 덮고 자던 일이 많았지요.” (‘단판 씨름의 예언’ ‘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 자 호외)


교회 야간 학교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17세라는 많은 나이에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면서 어린 나이의 동료들과 함께 영어와 천자문을 배웠다. 대장간 일을 하면서 다닐 수가 없어서 1년 만에 중퇴했다. 그러나 그는 동흥 야학, 경성 영어학교를 전전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또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19세에 자신이 운영하는 대장간을 세웠다. 23세에 영덕 철물점을 차렸다. 요지음으로 말하면 어였한 사장님이었다. 가계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동생 김춘원에게 철물점을 맡기고 충청, 전라, 경상도를 넘나들며 기독교 선교 겸 약장사를 했다. 


24세 때에 정진주와 동대문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업이 날로 번창했다. 동대문 밖 창신동에 이층 집을 지어 가계와 살림집을 마련할 정도로 풍족했다. 결혼 한지 4년 후에는 철물점 이층에 양말, 장갑, 농기구, 말발굽, 말총모자 공장을 차렸다. 그가 처음으로 만든 말총모자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물산 장려운동도 했다. 그의 어머니 김정순은 그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을 “제 손으로 푼푼히 돈을 모아 동대문 안에 집을 짓고, 자장가들이고, 기를 쓰고 모아서 지금 사는 창신동 이 층집 짓고 그럭저럭 돈 삼사만원을 모았지요” (단판씨름 예언 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 자 호외)라고 회고했다. 슬하에 남매를 두고 부부의 금슬도 좋았다. 일본말과 한문에 능통했고 영어도 조금은 알았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불우한 유년시절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항상 편치 않았다. 나라가 없는 설움과 일본의 강압 통치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 들끓었다. 그는 교회에서 알게 된 보성 고보 학생 박노영, 윤익중, 정설교, 불교학원 학생 신화서, 경성우편국 집배원 전우진, 애국부인회 회원 이혜수 등과 시국에 대해서 토론을 하며 일본에 항거할 기회를 기다렸다.


1919년 3월 1일,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왔다. 그날 아침 그는 가계문을 닫았다. 밤중 내 고무판에 파서 찍어낸 태극기를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파고다 공원으로 달려갔다. 독립선언문 낭독이 끝나자마자 그는 군중과 함께 파고다 공원을 나와 경성우편국, 대한문, 미국영사관, 서소문, 총독부, 창덕궁 앞을 지나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일경들은 만세 부르는 사람들을 구타하고 검거했다. 오후 5시경 그는 직원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동대문에 있는 가계로 가고 있었다.  긴 칼을 뽑아 들고 만세 부르려 나온 여학생을 쫓아가는 일본 헌병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그는 “이놈!”하고 큰소리를 치며 헌병을 덮쳤다. 장검을 든 팔을 등 뒤에서 잡아 비틀며 오른발로 등을 힘껏 걷어찼다. 장검은 땅에 떨어졌고 헌병은 비틀거리다가 땅에 꼬꾸라 졌다. 군중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오자 헌병은 장검을 버린 채 줄행랑을 쳤다. “경찰이 몰려온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는 장검을 집어 들고 집을 향해서 안간힘을 다해서 뛰었다. 집에 들어온 그는 장검을 가보로 집안 깊숙이 감추어 두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그는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알게 되어 시국을 토론하던 전우진, 정설교, 윤익중, 신화수, 이혜수 등과 혁신단을 조직하여 혁신공보와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서 1919년 8월에 종로경찰서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 났다. 물론 혁신공보와 독립신문 발간은 중단되었다. 그는 좀 더 행동으로 보여주는 독립운동 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1920년 1월 23일, 혁신단 여성 단원 이 혜수의 집에서 김상욱은 윤익중과 김동순을 만났다. 만주 길림성에 있는 무장 항일단체인 군정서에서 김동순이 비밀리에 서울로 왔기 때문이었다. 김동순은 서울에 온 목적을 설명했다.


“3.1 운동 이후 많은 젊은이들이 일제와 싸우겠다고 만주로 와서 군사 훈련을 받고 있고 길림군정서는 난징정부로부터 폭탄제조기사를 초빙하여 대규모로 폭탄을 만들고 있다. 올 일 년 동안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내년 1월 두만강이 얼었을 때 대규모 도강 작전을 전개하여 국경일대를 점령하고 동해안을 항해하는 내외국 선박을 파괴하여 조선사람들이 일본의 지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만방에 알릴 것이다. 도강작전이 시작되면 국내에서도 때를 맞추어 일본관공서를 파괴하고 관리들을 암살해서 우리를 도와주기를 바란다.”는 요지였다.

김상욱은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했다. 총독, 고위층 관리, 친일파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암살 행동 대원의 대장은 김상욱이 맡고 김상욱의 대장간을 서울 본부로 정했다. 대장간 창고 바닥을 파서 지하실을 만들어 화약과 쇠붙이를 보관하고 이를 비밀문서를 넣은 궤짝으로 덮은 다음 그 위에 농기구를 쌓아 놓았다. 


김동순이 김상욱에게 장일진을 소개해 주며 그에게 사격술을 배우라고 권했다. 장일진은 펑텐, 하얼빈, 창춘 등지에서 싸움패로 돌아다니다가 길림에 와서 군정서 일을 돕고 있는 19세 청년이었다. 그는 사격술, 표창 던지기, 올가미질등 암살하는 기술을 실전을 통해 익힌 인물이었다. 김상옥은 단원들을 인솔하여 북한산 깊숙이 들어가서 그에게서 사격술을 배웠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명사수가 되었다. 


1920년 5월 김동순이 김상옥을 찾아와서 거사를 앞당겨야겼다고 했다.  그는 “미국 상하 양원 의원들이 7월 초 미국을 출발하여 8월 5일 상하이에 도착, 베이징, 퐁텐을 거쳐 8월 24일에 서울에 온다. 이들이 서울에 있을 때 거사를 하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독립하기를 원하는 지를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거사일을 5개월 앞당기게 되었다. 무기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김동순은 자금만 마련되면 8월 20일 까지는 만주에서 무기와 탄약을 들여올 수 있다고 했다. 김상옥은 그동안에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을 해왔으나 3,4만 원의 저금도 바닥이 났다. 그는 자신의 이층 집을 담보로 2000원을 융자하여 무기구입 자금으로 내놓았고 윤익중도 자기 집을 잡히고 1000원을 보탰다. 그 정도로는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김상옥은 단원들과 함께 박영효, 박승민 등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모금을 했다. 돈을 내놓지 않으면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거사일이 다가와도 무기가 오지 않았다. 무기는 구 했는 데 일제 감시망을 피하여 국내로 들여오는 것이 문제였다. 


미국 의원단이 방문할 때 요인 암살을 계획하는 단체가 또 하나 있었다. 한훈이 지휘하는 광복군 결사대는 김상옥의 암살단과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무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권총 40 자루, 탄환 3000발, 폭탄 10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권총을 쏠 줄 아는 단원이 턱없이 부족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7월에 김상옥은 한훈을 만났다. 김상옥은 거사 계획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미국의원들이 열차에서 내려 기념촬영을 할 때 우리 단원들이 환영 인파 속에 섞여 있다가 전단을 뿌리고 만세를 부를 것이다. 다음 날 미국 의원단을 태운 자동차가 조선호텔에서 나와 종로를 통과할 때, 뒤에 따라오는 자동차에 탄 총독과 고관들을 처단할 예정이다. 경비대가 출동하면 우리는 총격전을 벌릴 것이고 한편에서는 관공서와 주요 시설을 폭파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한훈은 이 말을 듣고 감탄했고 김상옥의 무기지원요청에 흔쾌히 응 했다. 거사 하루 전날인 8월 23일에 무기를 철물점 이층으로 가져다주기로 약속했다. 한훈은 발각되기 쉬운 장소가 아니냐 고 반문했으나, 김상옥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로 안심시켰다. 둘은 그 후에도 수시로 만나서 거사 계획을 때때로 조율했다. 


1923년 8월 23일, 일본경찰은 요주의 인물 1000여 명을 미국 국회의원들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8월 23일에서 25일까지 미리 검거하여 심문한다는 명령이 각 경찰서에 하달되었다. 그들은 미 의원들 방문 기간 동안에 독립운동가들이 무엇인가를 획책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확실한 용의자를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혁신단을 조직하여 인쇄물을 배포한 혐의로 조사받은 경력이 있기 때문에 김상옥도 예비검속 대상이었다. 

경기도 경찰부 경부 조선인 황옥은 8월 23일 김상욱에게 오늘부터 25일까지 요주의 인물에 대한 예비검속이 있을 것이니 피하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무기를 가지고 자기 집으로 오는 한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도주할 수는 없었다.


8월 23일 아침 9시 30분경 동대문 경찰서 형사 10여명이 들이닥쳤을 때 김상옥은 철물점 이층에서 한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맞이한 김상옥의 아내는 남편이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고 잡아 땠다. 다짜고짜 형사들은 집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김상옥은 이층에서 계단 틈으로 동정을 살폈다. 형사들이 이층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2층 창문을 열고 지붕으로 탈출했다. 이를 본 형사들이 거기 서라 고 외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형사들은 도주한 그를 더욱 의심하여 방안을 철저히 수색했다. 벽으로 위장한 벽장문을 여니 암살단 취지문, 단원 명단, 암살자 대상자 리스트와 같은 각종 전단과 비밀 서류가 쏟아져 나왔다. 일부 형사들은 이것들을 압류하여 경찰 본부로 이송하고 김상옥의 도주 사실을 보고했다.  몇 명은 김상옥의 집에 잠복했다. 


오전 11시경 한훈이 무기를 가지고 김상옥의 집에 도착했다. 잠복 형사들은 이층으로 올라가고 있는 한훈을 덮쳤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권총 3정과 실탄 300발도 압수했다.  서울시내 전역에 경계가 강화되었다. 8월 24일 미국의원단 환영 행사는 모두 취소되었다. 24명의 암살단 단원 중 김동순, 윤익중, 신화수 등 18명이 체포되었다. 김상옥은 3개월 간 서울에 잠적해 있다가 1920년 10월 만주 상해로 피신했다.  


상하이에서 그는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을 만나고 임시정부 군무부 행정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서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1년 7월 그는 잠시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자금 모금운동을 했다. 그리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1922년 11월, 김상옥은 비단장수로 위장하고 영국상선을 타고 만주 안동으로 향 했다. 의열단장 김원봉이 마련해 준 권총 3정과 실탄 500발을 비단상자에 감추었다. 그는 떠나면서 의열단 단원들에게 “실패하면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총독과 고관 암살, 관공서와 주요 시설 폭파의 임무를 띠고 국내에 잠입했다. 안동에서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 12월 1일에 도강했다. 경의선 간이역에 정차하고 있는 화물차에 탔다. 그리고 일산 역에서 내려 도보로 들어왔다. 암살단 단원 전우진의 집에 며칠 머물다가 창신동 집으로 가서 어머니와 아내를 만났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자식들 잘 키우라고 당부하고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형사들이 언제 올지 모르니 어서 가라고 재촉하며 몸조심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대문밖을 나서면서 그는 어머니에게 누이가 사는 곳을 물었다. 어머니는 고서방과 같이 삼판동 304 번지에 살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고 하고 촘촘히 대문 밖을 나섰다.


일본의회 신년 첫 회의에는 조선 총독이 꼭 참석했다. 1923년에도 1월 17일에 조선 총독이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경성역을 출발할 예정이었다. 이때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암살단 동지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전우진, 이혜수, 정설교, 신화수, 윤익중 등이 이에 응 했다. 김상옥은 동지들 집을 전전하다가 12월 7일부터 삼판동 304번지 매부 고봉근의 집에 머물렀다.  누이와 매부가 살고 있는 집은 남산 밑에 외딴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은신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매부는 신혼인 데도 싫은 기색 하나 하지 않고 잘 대해 주었다.


1923년 1월 12일 금요일 저녁, 홍인순, 장상용, 엄찬용, 박봉환, 김영칠 매일신보 기계부 사원 5명은 종로사거리 요릿집에서 때늦은 신년 모임을 마치고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종로경찰서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오후 8시 10분, 종로경찰서 앞을 통과하고 있는 데 “쾅”하는 굉음과 함께 파편이 날아와 다섯 사람의 다리를 강타했다. 모두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누군가가 던진 폭탄은 종로경찰서 서편 담벼락과 인접한 교통실 벽면 상단부에 맞고 튕겨 나와 공중에서 폭발했다. 유리창 3장이 산산조각이 나고 창 옆에 걸어 둔 경찰복이 벌집이 되었을 뿐 인명피해는 없었다. 지나가던 기계부 직원 5명 외에 기생 월산월과 9살 난 몸종 정하영이 중경상을 입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종로경찰서는 서울 시내 경찰을 총 동원하여 70여 시간을 밤을 새워가며 연일 수사를 진행했으나 용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본부를 경기도 경찰부로 옮기고 40여 명의 고등계 형사로 조직된 별동대를 중심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김상옥은 윤익중과 함께 종로 사거리에서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종로 경찰서 근처에 왔을 때, 김상옥은 소변을 보려고 윤익중에게 천천히 가라고 하고 적당한 곳을 찾으려 헤어졌다. 그때 종로 경찰서 쪽에서 커다란 폭음 소리가 들렸다. 김상옥이 허겁지겁 윤익중에게 달려왔다. 오던 길을 되돌려 종로 경찰서 쪽으로 가 보았다. 경찰서는 소리에 비해서 큰 피해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윤익중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는 김상옥의 팔을 끌어 현장을 떠났다. 


그날 밤부터 경찰이 경성 시내에 빈틈없이 배치되었다. 몇몇 동지도 경찰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고 있었다. 경찰은 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에 입국한 김상옥을 지명 수배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6일 째인 1월 17일, 유능한 형사 15명을 고봉근의 집으로 보냈다. 새벽 5시 이마세 경부 지휘하에 검거 작전이 시작되었다. 김상옥은 다무라 순사를 살해하고 이마세 경보와 우메다 경보부에게 중상을 입힌 후 눈에 쌓인 남산으로 달아났다. 그날은 원래 경성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살해하려던 날이었다. 대신에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는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발을 헛디뎌 별로 높지 않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워 정신을 차려보니 서빙고 채석장이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말바닥이 몹시 아팠다. 장충단 부근 백호정에 이르니 먼동이 텄다. 그때서야 신발을 신지 않고 집을 뛰쳐나온 것을 알아차렸다. 체석장 날카로운 돌에 버선이 찢기고 발바닥을 다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경찰은 눈에 박힌 발자국이 5-10 미터 벌어져 있는 것에 놀랐다. 그들은 그가 축지법을 쓰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왕십리 안장사에서 아침밥을 얻어먹었다. 주지 스님에게서 버선, 승복, 짚신, 여승이 쓴 모자를 빌려 여승으로 변장했다. 그리고 왕십리 쪽으로 내려갔다. 짚신을 거꾸로 신어서 산을 올라왔던 것처럼 보이게 했다. 마장동 개천을 건너 청량리를 거쳐 영도사 고개를 넘어 미아리 무내미에 있는 이모집에 도착했다. 그는 거기서 저녁을 먹고 효제동 73번지 이혜수집으로 옮겼다. 동지들이 달려와서 상하이로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거사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그는 새로운 거사 계획을 생각하며 발바닥 상처를 치료했다. 


경성우편국 집배원 전우진이 고문 끝에 김상옥이 이혜수의 집에 숨어 있다는 것을 자백했다.  1월 22일 새벽 4시 30분,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이 발생한 지 11일이었다. 경기도 경찰부 이마노 경찰 부장은 이혜수의 집을 4 겹으로 포위했다. 삼판동에서 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혜수 집에서 가까운 순서로 제1진은 권총부대가, 제2진은 소총부대가, 제3진은 기마 부대가, 제4진은 헌병대와 자동차가 집을 포위했다. 제1진에 속한 경관들은 지붕에 올라가 김상옥이 숨어 있는 방을 감시했다. 이마노는 포위한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작전개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새벽 5시, 이혜수의 동생 이창규가 마당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마루에 나오니 지붕에서 사람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혜수를 깨워 지붕을 보라고 했다. 이혜수는 대청으로 나와 김상옥이 자고 있는 방으로 가서 그에게 반침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반침방은 큰방에 딸린 작은 방인데 한문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김상옥은 그 뒤에 숨어 추이를 살폈다. 집안사람들은 세수를 하고 옷을 가라 입고 부산을 떨었다. 이마노는 마냥 기다리다가 또 그를 놓질 가봐 본부에 연락했더니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7시 30분에서야 날이 밝았다. 이마노가 작전개시 명령을 내렸다. 지붕에 있던 경찰이 뛰어내리고 경찰이 집안에 들어가서 그를 찾았다. 

구리타가 방 안을 둘러보니 벽장문이 조금씩 움직였다. 구리타가 벽장문을 재빨리 열어젖혔다. 책더미뒤에 숨어서 쌍권총을 들고 있던 김상옥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김상옥의 쌍권총이 불을 뿜었다. 구리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경찰이 반침방을 향해 일제히 사격했다. 김상옥은 다락의 담벼락을 발로 차서 구멍을 내어 옆집 74번지를 지나 76 변지로 갔다. 집주인 김학수에게 이불을 달라고 했다. 뒤집어쓰고 저항하다가 죽겠다고 했으나 그는 괴한이 나타났다고 큰소리로 외쳐서 경찰에게 그가 왔다고 알렸다. 김상옥은 담을 넘어 72번 집으로 갔다. 


400명의 경관은 그 집을 포위했다. 이마노는 30분 동안 회유 했으나 그는 항복하지 않았다. 이마노가 일제사격 명령을 내렸다. 김상옥도 응사했다. 72번지 집은 잿더미가 되었다. 집주인 이진옥 노인도 유탄에 맞아 죽었다. 김상옥도 몸 여러 곳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마당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저항했다. 3시간 동안 교전했다. 총알이 한발 남았다. 김상옥은 자신의 이마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명사수이며 훌륭한 사업가였다. 그는 돈벌이를 마다하고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그는 영웅이었다. 


김상옥은 일본경찰이 용의자로 지목한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의 범인이다. 그는 조선 총독을 1월 17일에 암살할 계획으로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했다. 그런데 그가 1월 12일에 종로 경찰서에 섣불리 폭탄을 던져 그의 거사를 망쳤을 까?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더구나 그가 체포되지 않고 자살했기 때문에 그의 진술을 들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더 자세히 기록을 살펴볼만한 일이다. 


참고; 신동아: 종로경찰서 투탄사건; 거사 앞둔 김상옥이 정말 폭탄을 던졌을 까; 전봉관, 2008/05/07 


제2차 암살파괴계획-황옥사건

황옥(위키백과)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투탄사건 이후, 의열단은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청사 폭탄 투척, 1922년 3월 28일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의 상해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시도 등 소소한 의열 활동은 있었으나 대대적이고 동시 다발적인 암살파괴는 제1차 계획 실패 이후 아직 단행하지 못했다.


1923년 1월, 좀 더 구체적인 강령의 필요성을 느낀 김원봉은 북경으로 가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고 있는 신채호를 만났다. 김원봉은 신채호에게 의열단 정신을 글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신채호는 즉시 김원봉과 같이 상하이로 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 달 동안 여관에 머물면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해서 김원봉에게 주었다. 이는 민중의 궐기와 폭력투쟁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을 추구하자는 하나의 독립선언서였다.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안중근, 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열 했지만, 그 후면에 민족적 역량의 기초가 없으며 3.1 운동이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를 볼 수 있었으나 또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김원봉과 의열단의 생각과 일치하는 주장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선언문이 적혀 있는 작은 책자를 항상 품속에 간직하고 다녔다. 


일본은 한일합방 이후 조선을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해왔다. 3.1 운동 진압에도 무력을 동원하여 학살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서 국제여론이 나빠지자 일본정부는 3.1 운동 이후  문화 통치로 전환했다. 강압으로 아예 독립운동 활동을 시작하지도 못하게 하지 않고 표면상으로는 자유를 주는 것처럼 하고 밀정을 활용하여 독립운동 단체를 은연중에 적발하는 방법을 썼다.


의열단 내에도 밀정이 있었다.  단원 개인적인 활동은 비교적 용이하게 성공했지만 여러 단원이 참여하는 활동은 대부분 미리 발각되었다. 밀정의 탈을 쓴 단원 때문이었다. “일본총영사관 통역관 오다 미쓰루의 지시에 따라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장 김원봉과 함께 한구로 왔고, 김원봉은 북경을 거쳐 관도로 갔다.”  KBS 다큐 창은 일본 기밀문서에서 발견한 의열단원 김호(본명 김재영)의 밀고에 관한 기록을 보도했다. ”김원봉은 러시아 정부와 선전비를 교섭 중이다. 이달 안으로 선전비 일부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상해조계 삼일공학에서의 의열단 회의가 개최될 것이다. 참석자는 40-50명이다.” 또 다른 김호의 밀고였다. 


1919년 4월 29일 상해주재일본영사는 상해에 사는 조선인을 정탐하기 위해서 새로 부임한 한 관리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받았다. “3.1 운동 이후 상해에 조선인들이 갑자기 늘어난 이후, 그동안에 고용된 정보원들이 불령선인(일본에 항거하는 불량한 조선사람)들의 협박으로 사직하여 정보수집에 곤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두 명의 밀정을 조선인 사회에 잠입시켜 정보수집에 착수했다. 한 명은 자신이 데려온 한경순으로, 조선인 청년회에 잠입하여 조선인들의 민적을 파악하고 있다. 다른 한 명은 완전히 독립운동 동지로 가장하고 상해임시정부 안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과격론에 편승하여 조선인들에게 채용되었다. 조만간 상당한 정보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는 내용이었다. 후자가 황옥이었다.


황옥은 1887년 5월 3일에 문경에서 태어났다. 1906년 20세 되던 헤에 도천소학교에 다녔다. 이듬해에 의병에 의해서 학교가 소실되었다. 황희의 18대손이어서 양반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문교육은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신교육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어에 능숙했다. 덕분에 1909년 그는 서기 겸 통역관보로 평양 재판소와 진남포 재판소에서 일했다.  1912년 한일합방 후에는 해주지방법원 송화지청 검사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1919년 4월 황옥이 갑자기 중국 상해에 나타났다. 한성정부 요인 홍진의 소개로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같이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3.1 운동 이후에 1919년 4월 23일 13도 대표 24인이 인천만국공원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수립한 임시정부를 한성정부라고 한다. 홍진은 구한말 판사였는 데 나라가 망한 후에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자연히 재판소 출입이 잦았고 재판소의 서기 겸 통역이었던 황옥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건물 이층에서 기숙하며 임시정부요인들과 같이 지냈다. 


이명교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충청도 의원이었다. 그가 일제의 밀정으로부터 조선총독부가 발급한 국경통과여행증을 받아서 상해로 왔음이 밝혀졌다. 그는 5월 13일 의원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여행증을 준 밀정은 바로 황옥이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황옥은  황급히 상해를 떠났다. 


황옥은 1916년부터 상해를 오고 갔다고 한다. 용무가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으로 돌아온 황옥은 1919년 7월 부산재판소 진주지청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그 이듬해 3월에 경기도 경찰부 경부로 특채되었다. 조선인으로서는 대단한 영전이었다.  상해임시정부 밀정 경력이 주효했다.

한편 의열단의 김원봉은 제2차 암살파괴계획을 추진했다.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원인 장건상과 협의하여 같은 공산당원인 김한과 김시현에게 이일을 맡겼다. 김한이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바람에 김시현 책임하에 진행되었다. 


1921년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은 서초, 이교담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내 지부와 세포조직을 만들었다. 황옥도 이조직에 이름을 올렸다. 서초등이 조직한 내 지부의 간부가 되었다.  경기도 경찰부 경부가 공산당 조직 간부가 된 것인데,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산당은 인민(국민)을 최고로 우대하고 군주(왕)를 타도하기 때문에 천황을 모시는 일본은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 경무국 보안과장 시라카미는 황옥에게 고려공산당과 곧 개최될 예정이었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고 지시했다. 황옥은 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에 접근하여 당원이 되었다. 극동인민대표대회는 1922년 1월에 레닌이 동아시아 출신 사회주의자, 민족운동가 144명을 초대하여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주의 궐기 대회였다. 조선인이 56명으로 가장 많이 참석했다. 조직의 간부가 된 황옥은 내 지부와 세포단체 조직에 깊이 관여했고 극동인민대표대회 대표자 선정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선정된 대표자들에게 조선총독부가 발급한 국경 통과 여행증을 만들어 주었다. 이중에는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의 총책임자 김시현도 들어 있었다. 


황옥은 1920년 9월 밀양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김시현을 서울로 호송하게 되었는 데 이때 김시현과 친해졌다. 김시현은 황옥이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황옥은 조선총독부 여행증과 총독부로부터 받은 기밀비 50원을 여비로 김시현에게 주었다. 김시현은 황옥이 일제경찰이지만 독립운동가 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김시현은 황옥의 일제경찰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하여 의열단의 제2차 암살파괴계획을 추진했다. 암살파괴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대부분의 의열단원은 황옥의 참여를 반대했다. 그러나 김시현이 그의 참여를 고집했다. 김시현이 김원봉에게 황옥의 참여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김원봉은 황옥을 직접 면담하고 나서 결정하겠다고 했다. 많은 단원들이 현직 일본경찰 경부를 만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반대했다.


1923년 2월 8일 일경은 황옥을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에 사용한 폭탄의 출처를 알아보라고 천진으로 출장을 보냈다. 이때 개성경찰서 경보부 하시모토와 유석현이 동행했다. 황옥은 상부에 유석현이 자신의 밀정이라고 보고했다. 2월 11일, 천진에 도착한 황옥은 하기 모토를 따돌리고 김시현과 함께 김원봉을 만났다. 김원봉은 황옥을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판단하고 그를 의열단에 가입시키고 거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의열단은 먼저 폭탄을 국내에 들여온 다음에 단원들이 몰래 국내로 들어가서 이 폭탄을 가지고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상해에서 천진 까지는 폭탄전문가 헝가리인 마자 알과 한계옥, 의열단 동조자였던 중국인  노파 조 노태태 등이 한가족처럼 꾸미고 기차를 타고  폭탄을 운반했다. 3월 3일, 김시현과 황옥이 천진에서 폭탄을 넘겨받아 여행가방에 넣고 안동까지 갔다. 안동에 사는 홍종우의 집으로 폭탄을 운반해야 했다.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원이었던 그는 조선일보 안동 지국 장이었다. 3월 8일 홍종우는 자신의 집에서 조선일보 안동 지국 설치 축하 연회를 열었다. 폭탄 운반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연회에는 안동 영사관 김우영 부영사, 영사관리, 경무서 경관, 신의주 경찰서 최두천 경부 등 일본관리 10여 명과 김시현, 황옥, 기생 

등이 참석했다. 한참 즐겁게 먹고 마시다가 신의주로 가서 2차를 하기로 했다. 일본관리들은 자동차에 타고 갔고 황옥과 김시현은 인력거로 그 뒤를 따랐다. 폭탄과 유인물은 인력거 뒤에 실었다. 김시현과 황옥은 연회가 끝난 후 비상시에 쓸 폭탄과 유인물만 신의주에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경성으로 옮겼다. 행동 대원만 들어오면 이 폭탄을 가지고 거사할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3월 14일부터 일경은 의열단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7일에 유석현, 19일에 횡옥이 체포되었다. 일시 도주했던 김시현이 3월 30일에 체포되었다.  


1923년 4월, 일제 공안당국은 경기도 경부 황옥이 의열단과 함께 테러를 공모하다가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23년 8월 7일 법정에서 황옥은 자신이 의열단을 도운 것은 의열단을 검거하기 위한 비밀 작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까지 경기도 경찰부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였다.  경기도 경찰부와 경무국은 의열단원과 공산당원을 체포하기 위해서 황옥과 홍종우를 밀정으로 의열단에 침투하게 하여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평안북도 경찰부와 만주 안동 경무서는 황옥이 실제로 의열단의 테러 계획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경기도 경찰부가 사건을 빨리 마무리하려고 황옥에 대한 심문을 강화했다 그러나 황옥은 의열단을 일망타진하려고 많은 정보를 숨겼다. 특히 김시현의 거취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이에 경기도 경찰부도 할 수없이 황옥을 보호하려 하지 않고 의열단 단원과 싸 잡아서 체포했다. 


법정에서 황옥이 자신이 일본경찰의 밀정임을 밝혔을 때 의열단원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안동 지 국장 홍종우는 자신도 황옥과 마찬가지로 고려공산당과 의열단 체포에 협력한 밀정임을 인정했다. 

황옥의 진술은 일제 공안당국이 여론의 뭇매를 맛 게 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를 잡기 위해서 조선인 고등경찰을 활용했고, 그들이 독립운동 단체에 침투하게 했고, 일본 국가의 체제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운동이나 조선의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것이 용납되었다. 이것은 불법행위였다. 공안당국은 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황옥이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을 금할 수가 없었다. 


황옥이 출소하면 죽이겠다는 의열단원들도 많았지만 10년 후 김원봉은 황옥을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경부이나 과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애련 한 자”라고 했다.

박태원 저 “약산과 의열단”에서는 황옥이 밀정이라고 털어놓아 세상의 비난을 자초한 것은 의열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변호하고 있다. 1961년 김시현의 회고록과 1983년 유석현의 회고록에도 황옥은 진정한 독립운동가라고 회고했다. 


황옥은 경기도 경찰부 경부로 상부의 지시를 받고 의열단에 침투했다. 물론 의열단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의 눈부신 활동으로 제2차 암살파괴계획이 무산되고 많은 의열단원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 일을 수행하는 도중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사람으로서 어떻게 마음이 변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그와 같이 일했던 김원봉, 유석현, 김시현 등이 이심전심으로 느낀 바가 있어서 훗날에 그를 변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참고: 

1.‘두 개의 얼굴-밀정이냐, 독립투사냐?’ – 경기도 경찰부 황옥의 진실; 민족문제연구소 – 2016년 10월 19일, 조한성 선임연구원  

2. 위키백과: 김원봉

3. 위키백과: 김상옥

4. 위키백과: 황옥


이전 13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