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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Aug 13. 2022

4장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의 사람들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썼다. 그가 16세 나던 해 1894년은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한꺼번에 일어 나던 격동기였다. 


"1894년, 내 나이 16세에 아내 김아려에게 장가들었다. 현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은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것이 이후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한 바탕이 됐으며, 일본·청국·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전쟁하게 된 원인이 됐다.
관군은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청국 군인들이 들어오고 또 일본 군인들도 건너와 일본과 청국 두 나라가 서로 충돌해 마침내 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모으고, 격문을 뿌려 의병을 일으켰다. 나아가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모인 정예 병력은 70여 명이 됐으며, 이들은 청계산 속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중략)...
적병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었으나 우리의 의병들은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었다.
우리는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고 만세를 3번 부르며 본래의 마을로 개선해 황해도의 관찰부에 급히 승전 보고했다. 당시 일본 하급 장교인 스즈키란 자가 군대를 이끌고 지나가다 우리가 동학당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신을 보내어 축하의 뜻을 표한 적이 있었다.
이후 적병들은 소문을 듣고 멀리 달아나 다시는 더 싸움이 없었고, 차츰 잠잠해져서 나라 안이 다시 태평해졌다.


안응칠 역사"

(나무위키; 안중근)


안중근은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 수양산 아래에서 태어 났다. 태어날 때 안중근의 등에는 7개의 점이 있었는 데 이를 보고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세상에 나왔다고 하여 어릴 때 이름을 응칠이라 하였다. 성장기에 그는 차분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글 공부 보다는 사냥과 놀기를 좋아 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좀더 차분해 지라고 무거울 중자와 뿌리 근자를 써서 "중근"이라고 이름을 고쳐 쓰게 했다. 그의 집안은 유복 했다. 

사대부 집안은 아니었지만 양반 계급이었다. 부친은 4백석을 하는 대 지주였다. 거기다 곡물상까지 경영 했다. 


그가 태어 나던 1870년 대 후반은 대원군 섭정이 끝나고 고종과 민비가 권력을 잡고 있던 시대였다. 대원군의 쇄국에서 개방으로 정책이 바뀌고 개화운동이 물살을 타기 시작 했다. 그러나 민비와 민씨 척족의 가렴주구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보다 더 심했다. 이에 고종 자신도 가담 했다. 위키 피디아에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이 "명예 진주 현감"을 지냈다는 표현이 나오는 데,  빈자리가 아닌 억지로 만든 보직을 뇌물을 주고 임금에게서 사들인 감투가 아닌가 의심해 본다. 


그가 태어난지 3년 후 소위 임오군란이라는 사건이 일어 난다. 권좌에서 쫒겨난 대원군의 쿠테타 였다. 대원군은 민비를 축출 하고 권력을 장악 했으 나 33일 만에 청나라가 개입하여 대원군을 천진에 감금 함으로 서 

민비가 복귀 했다. 민비와 고종은 정권 초기의 개화정책으로 개화파에게 매우 호의적 이었다. 그러나 개화파는 반청 친일 경향이 강 했다. 청의 도움을 받아 재 집권한 민비는 친일 급진 개화파를 홀대 했고 친청 온건 개화파를 중용 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급진 개화파가 쿠테타를 일으킨 것이 1884년 갑신정변이다. 이 또한 3일만에 청이 제압 한다.  이후 10년 동안 1894년 까지 조선은 사실상 청의 위안스카이가 지배했다. 안중근이 16세가 되던 해에 동학혁명이 일어 났다. 고종과 민비의 가렴주구에 못 견뎌 백성들이 집권세력과 기득권층에 반기를 들었다. 양반이며 지주였던 안중근의 집안도 이들의 도전을 받았다. 동학군은 관청을 점령하고 지주들의 집을 습격하여 식량을 빼았가 갔다. 관의 병정들이 이들을 진압하지 못 했다. 양반들은 의병을 모집하여 이들을 제압하려 했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사병을 기르고 있었다. 자신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폭도들을 그냥 둘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의병을 일으켜 동학군 토벌에 나섰고 안중근도 부친을 따라 전투에 참여 했다.


임오군란과 갑오경장은 조선의 약점이 완전히 노출 되어 외세가 조선을 놓고 다투기 시작한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일본과 청이 힘겨루기를 했다. 일단은 청이 우세하여 조선을 직접 지배 했다. 1894년 동학란이 일어났는 데 조선의 관군이 이를 제압 할 수가 없게 되자 청에 원군을 청하여 청군이 들어오고 일본도 이를 빌미로 군대를 조선에 보내여 청일전쟁이 일어 났다. 청일전쟁은 지난 10여년 동안 청에 눌려 있던 일본이 청을 제압하고 개화파를 집권시켜 갑오경장을 실시 했다. 조선최고의 권력자였던 위안스카이는 전쟁이 일어나자 마자 청으로 돌아 갔다. 동학군은 일본군과 조선관군이 제압 했다고 하나 사실상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일본군 없이는 진압이 힘들었을 것이다. 


안중근은 대외적으로는 정부가 힘이 없어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로 백성의 삶이 토탄에 빠져 있던 시기에 청년기를 맞이 했다. 


 1895년에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인이 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경계에 있는 알사스 로렌 지방 출신인 프랑스인니콜라 빌렘 신부로 부터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을 받게 되었다. 알사스 로렌지방은 때에 따라 독일이 되었다가 프랑스 령이 되곤 했는 데 이 지방 출신인 빌렘신부는 당시의 조선 사정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고 한다. 천주교 학교에 입학 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했다. 


1895년 일본이 청을 제압하고 시모노세끼 조약을 맺은 후 청 대신 일본이 조선을 좌지 우지 하게 된것처럼 보였으나, 불과 며칠 사이에 삼국간섭으로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 했다. 민비는 러시아 세력을 불러들여 일본의 간섭을 물리치려 했다. 자기들 목적 달성을 방해하는 민비를 대원군과 결탁하여 제거 했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 까지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는 동안 그래도 약간의 독자적인 행보를 한다. 아관파천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미흡하나마 근대화를 추진 했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하는 것이 공식화 되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 주도의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 되었다.  이를 본 안중근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시작 했다. 삼흥학교를 세우고 남포 돈의 학교를 인수 했다. 1907년에 일본이 고종황제에게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제 퇴위 되었다. 그리고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 되었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안중근도 의병에 가담 하였다. 나라를 잃게 된 뜻있는 조선 사람들은 고향 땅을 버리고 만주와 연해주로 떠났다. 안중근도 강원도와 횡해도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세기 중반 부터 조선에서 거렴주구에 시달리 던 조선사람들이 상당 수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하여 포그라니치나 거리에 한인 타운을 행성 했다. 이를 러시아 사람들은 코레이카 거리라고 불렀다. 안중근이 이곳에 이주할 즈음에는 이 거리에 약 5,6000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유 튜브; 국방 TV 안중근)


안중근은 조선 밖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선안의 일본군대를 공격 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룩해 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 조선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나서 군대를 만들어 국내의 일본군대를 공격하겠다는 안중근에게 선뜻 협조 하지 않았다. 신문에 투고하고 거리에서 연설을 하여 어렵게 의병을 모집 하고 이 지역 유지들로 부터 군자금을 얻어서 군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국경에 가까운 크라스키노에 거점을 구축 했다. 동북 쪽으로 중국 훈춘이 40 키로 서북 쪽으로 두만강이 70 키로 였다. (유 튜브; 국방 TV 안중근)


1908년7월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명의 병력으로 함북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했다. 그후 그는 본격적인 국내진공 작전을 계획 했다.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300여명의 병력으로 교전하여 많은 포로를 잡았다(나무 위키 안중근). 포로들은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해 달라고 애걸 했다. 다시는 이곳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 했다.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의하여 포로를 석방하자고 했다. 부하들이 이들이 우리 정보를 본대에 알려서 공격할 것이니 모두 사살해야 한다고 했으나 그는 포로를 놓아 주었다. 그는 안응칠 역사에 포로를 석방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썼다.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없다. 가두어 두었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 돌려 보내 주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정에서 울어나 의로운 말이라 안놓아주고 어쩌겠는 가?"

이들은 본대로 돌아가 인중근 부대의 상황을 그대로 알렸고, 안중근 부대는 모든 정보를 파악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멸 했다. 안중근은 한달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구사일생으로 흉칙한 몰골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 왔다. 이 지역 한인들은 안중근을 냉대 했다. 포로를 놓아주어 부하들을 희생시킨 그를 반길리가 없었다. (국방 TV 안중근)


그는 크라스키노로 가서 12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왼손 4번째 손가락 끝을 자르고 동의 단지 동지회를 만들었다. 이후로 안중근은 손바닥 도장을 사용하기 시작 했다. 당시의 마을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손바닥 도장이 세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국방 TV 안중근)


1908년11월경에 그의 동지 엄인섭은 일본총영사관에 나타나서 정탐으로 고용해 달라고 청원 했다. 이후 14년간 그는 밀정으로 활동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희생 되었다. (나무 위키와 위키피디아)


https://hubs.honam.ac.kr/HUSpecial/9/read/219

우덕순은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과 만났다. 안중근과 같이 의병대장 이법윤부대에 참여 했다.하루는 전투 후에 우덕순이 식량을 구하려 마을로 가겠다고 하자 안중근이 이를 말렸지만 결국 마을로 가서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함흥재판소에서 사형구형을 받고 판결을 기다리던 중 수감중인 이창도와 의병 김재익의 도움을 받아 탈출 했다. 1909년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안중근과 동의 단지 동지회에 참여 하고 대동공보사에서 이강, 안중근과 함께 이토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듣고 이토 암살을 계획 했다. 그리고 1909년10월21일 안중근과 함께 블라디 보스토크를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 했다(호남대학교 종합뉴스센터 HU Special).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4905

이강은 1903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그는 1904년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안창호를 만났다. 동갑이고 같은 평안남도가 고향인 그들은 공립혐회를 창설 했다. 공립협회는 안창호가 만든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의 전신이다. 안창호는 본국의 2천만 동포, 일만의 미국교포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의 수십만을 아우르는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 했다. 안창호는 이강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하여 만주와 연해주 지역 교포들의 독립운동을 촉진시키려 했다. 이강은 1907년 9월 중순 본국에 도착 했다. 1908년 3월에 블라다보스토크에 왔다. 이 곳 조선사람들은 독립운동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1840년 대 부터 주로 함경도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국경을 넘어 이 지역에 정착한 농민들이었다. 그는 1908년 11월에 대동공보를 창간하고 교회와 학교도 세워 교포 계몽과 독립운동 정신을 전파하려 했으나 별로 큰 반응이 없었다. 훗날 그는 "나는 무지한 교포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기가 여사였다"고 회고 했다. 끈질긴 노력으로 그는 점차 교포사회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 회원 전명운과 대한보국회 회원 장인환이 고종의 고문이었던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이 일어난 후 부터 교포사회에 독립운동 정신이 고양 되었다. 이에 힘입어 그는 안중근과 우덕순등 단지동지회 회원 모두를 신민회에 가입 시켰다. 우덕순은 이강이 편집장이었던 대동공보에서 회계주임으로 일 했다. 


1909년 음력 9월1일자 원동보에 음력 9월중순 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분 한다는 기사가 났다. 이소식이 알려지자 블라디보스토크 애국지사들 가운데 그를 암살 하자는 의견이 분분 했다. 그날밤, 대동공보 편집국장 유지률과 주필 이강은 우덕순을 찾아가서 "(그를) 어찌하면 좋겠느 냐?고 물었다. 우덕순은 "나는 동지를 기다리 네"라고 답 했다. "누구? 안?" 라고 되물었다. 우덕순은 "그렇지, 그사람하고 의논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당시에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700리 떨어진 크라스키노(연추)에 살고 있었다.(우덕순 회고록)


이강은 <나의 망명생활 50년기>에서 "일제의 침략괴수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교포들과 의논 했다.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데 그 자를 어떻게 처치 했으면 좋겠소?'하고 말하였다. ..교포들은 안의사가 사격의 명수니 그를 불러 하얼빈에 파견하면 문제없이 이토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황급히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라고 회상 했다. 


이강의 편지를 받은 안중근은 즉시 블디보스토크 대동공보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음력9월8일이었다. 이강은 전일 발간 된 이토 하얼빈 방문 가사가 실린 원동보와 대동공보를 내 보였다. 안중근은 회심의 미소를 띠우고 "한그물 잡어 보다 한마리의 고래가 났다"고 하며 무릅을 쳤다. (이전의 안중근 혈투기)


8일 저녁 안중근이 돌아왔다. 그 신문을 내주니 이토의 기사를 읽고 나서 참말 일어나서는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내가 "어떻게 하겠는 가?"하고 물으니 "가야지" "어디로?" "하얼빈으로 가야지"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즉결되고 말았다. (우덕순 선생의 회고록)


1909년10웧21일 안중근과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조금가면 유수리스크이다. 이곳에는 최재형이 살고 있다. 안중근은 이 집에 드나들며 사격연습을 했다. 그는 러시아 군대와 군수업을 하여 큰 돈을 번 사업가였다. 그는 안중근에게 거사에 필요한 자금과 무기를 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거기서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을 넘으면 수이펜헤 역이다. 여기서 18세 난 유동하가 합류 했다. 함남 원산이 고향인 그는 한의사 아버지 유경집을 따라 1902년에 이곳에 이주 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1909년3월, 안중근이 부친을 찾아 왔을 때 서로 알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 말 통역과 연락 업무를 맏기로 했다. 


10월22일 일행은 하얼빈역에 도착 했다. 그들은 곧장 삼람가에 있는 한인회장 김선백의 집으로 갔다. 다음날 서오대로로 나가서 정보 수집을 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통역 유동하가 너무어리다고 생각하여 좀 나이든 사람을 구하려고 동흥학교를 찾았다.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가 조도선을 소개해 주었다. 조도선은 함남 홍원에서 1879년에 출생 했다. 6세 때 러시아 이루추스코로 이주 하여 세탁업과 통역일을 하다가 1909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하얼빈에 살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여자와 결혼하여 러시아 말을 잘 했다. 이토 암살 계획을 듣고 그도 흔쾌히 합류 했다.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세 사람은 이발을 하고 새양복을 사 입었다. 그리고 사진 촬영을 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각각 장부가와 거의가를 교환하고 결의를 다짐 했다. 


안중근의 장부가

장부가 세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라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우덕순 거의가(擧義歌)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하상견지만야(何相見之晩也)런고 


너를 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리(幾萬里)를

혹은 윤선(輪船) 혹은 화차(火車) 천신만고 거듭하야 

노청양지(露淸兩地) 지날 때에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앙천(仰天)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오호 간악한 노적(老敵)아 우리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 없이 뺏노라고 궁흉극악(窮凶極惡) 네 수단으로

대한민족 이천만이 다 같이 애련하여

너 노적을 이 정거장에서 만나기를 천만번 기도하며

주야를 잊고 만나고자 하였더니 마침내 이토를 만났고나

금일 네 명(命)이 나의 손에 달렸으니

지금 네 명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갑오독립 시켜놓고 을사체약(乙巳締約)한 연후에

오늘 네가 북향(北向)할 줄 나도 역시 몰랐도다

덕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너뿐인 줄 아지 마라 너의 동포 오천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 둘씩 보는 대로

내 손으로 죽이리라 


오호라 우리 동포여

한마음으로 전결(專結)한 후 우리 국권 회복하고

부국강병 꾀하며는 세계에 어느 누가 압박할까

우리의 자유가 하등(下等)의 냉우(冷遇)를 받으니

속히 속히 합심하고 용감한 힘을 가져

국민 의무 다하세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802100067


안중근이 타고 온 기차는 동청철도를 동에서 서로 달려 하얼빈에 도착 했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이토 히로부미는 대련 뤼순(여순)항에 도착하여 남만주철도를 달려 하얼빈으로 북상 하고 있었다. 10월 중순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는 러시아 횡단 철도를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가 러시아 황실에 회담을 요청 했고 가쓰라는 4개월전에 조선 총독 자리를 사퇴한 이토 히로부미를 일본측 대표로 임명했기 때문에 그는 이토를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했다. 


1909년7월6일 일본내각은 조선 합병을 단행하기로 결정 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내각은 우선 다음과 같은 조치를 하기로 합의 했다. 

1. 조선의 질서 유지와 국방을 위해서 군대를 주둔 시킨다.

2. 조선의 외교는 일본이 담당 한다.

3. 조선철도를 일본제국 철도원의 관활로 이관하고 남만주철도와 밀접하게 연결 하도록 하여 아시아 대륙철도의 통일과 경제관계를 밀접하게 도모 하도록 한다.

4. 가능한한 많은 본국인들을 조선으로 이주시켜 조선내에서 일본세력의 밑바탕을 튼튼하게 함과 동시에 일조간의 걍제관계를 밀접하게 한다.

5. 조선의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에 근무하고 있는 본국인의 관리의 권한을 대폭 확대해 한층 더 민활하고 통일적인 시정을 행할 수 있도록 한다. 


조선의 합방은 일본의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이 되고 만주와 러시아가 그 건너에 도사리고 있는 형국이 될 것이다. 물론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대련 여순항 조차권과 남만주 철도 경영권이 러시아로 부터 일본에 넘어갔고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만주를 청나라에게 넘겨주기로 포츠머츠 조약에서 결정되었지만 일본으로서는 이제 일본영토가 될 조선의 방어를 러시아로 부터 좀터 튼튼히 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1841년10월16일 조슈번에서 태어 났다. 하급 사무라이 집안 출신이었다. 원래 성은 하야시 였으나 이토 가문의 양자로 가면 서 이토 성을 쓰게되었다. 경제적으로 태어난 가문 보다 훨씬 나았으나 역시 낮은 계급 사무라이였다. 1857년, 16세에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되었다. 요시다가 경영 하는 학교 쇼카손주쿠에서 새로은 학문을 배웠다. 막부 타도의 존왕양이 운동에 적극 참여 했다. 

1863년5월에서 1864년6월 까지 다른 5명의 청년들과 영국 유학을 했다. 런던 대학 교수 알렉산더 윌리암스 교수 집에 하숙 하면서 영어와 서양 풍속을 배웠다. 그는 영국에 머무는 동안 일본이 영국에게 크게 뒤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쇄국 정책을 주장 하던 그는 개국 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귀국 후에 막부 타도와 명치유신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다. 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 했다. 그리고 새헌법에 의한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천황은 의례적인 국가 수반이고 총리가 전권을 가지는 헌법하의 총리는 지금의 대통령과 같은 같은 것이다. 그 후 5,7,10대 총리를 역임 했다. 3,4,8대 추밀원 의장을 지냈다. 지금의 국회에 해당 하는 기관이었다. 그는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5년 한일 합방의 전 단계인 을사 보호 조약 후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이 되었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이 이토와 한일 합방에 동의 한후 1909년6월14일 이토는 통감직을 사임 했다.  


10월24일, 유동하를 제외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3 사람은 거사 자금을 빌리고 이토가 장춘에서 출발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장춘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장춘까지 가지 못하고 체가구 까지 밖에 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체가구 주민들이 이토를 태울 특별열차가 이곳에서 장춘으로 출발 했고 그열차는 26일에 돌아온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토가 탄 열차가 체가구를 거쳐 하얼빈으로 갈 것이라고 확신 하게 되었다. 여러 열차가 교차하는 체가구역에서 이토가 내릴 가능성도 있었다. 체가구 역사 지하에 있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10월25일 아침 우덕순과 조도선은 체가구에 남고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돌아 갔다. 26일 새벽 6시경에 이토를 태운 열차가 체가구역을 통과 했다. 러시아 경비원들은 보안을 이유로 역 지하의 여관 문을 잠구었기 때문에 그들은 역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10월25일 저녁 안중근은 하얼빈 김성백의 집에서 잤다. 그는 아침일찍 일어나서 하얼빈공원으로가서 마음을 가다 듬었다. 

"김성백의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일찍 양복한벌을 갈아입은 뒤에 단총을 지니고 정거장으로 나가니 그 때가 오전 7시였다."(국방 TV; 안응칠의 역사)


러시아 당국은 이토 일행의 안전을 위해서 하얼빈 역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으나 일본 총영사가 많은 일본인들이 이토 일행을 환영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여 경계가 삼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안증근은 권총을 휴대 하고 프랫트폼 가까이 접근 할 수 있었다.(나무위키)


2시간 후 오전 9시, 이토가 탄 열차가 러시아 군인과 군악대 그리고 요인들이 사열하고 있는 하얼빈역으로 들어 왔다. 

"나는 동정을 엿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느 시간에 저격하는 것이좋을까?'하며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할지음 일행이 기차에서 내려오니 의장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울리며 귀를 때렸다"(국방 TV; 안응철의 역사)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잘 몰랐다. 일본인 환영객 중의 하나가 이토의 이름을 불렀다. 이토는 손을 올려 흔들어 보였다. (나무위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용솟음치고 3천길 업화가 머릿속에  치솟아 올랐다"(국방 TV; 안응철의 역사)

안중근의 부라우닝 제 반자동 권총M1900이 불을 뿜었다. 복부에 두발 가슴에 한발이 명중 했다. 1909년10월26일 오전9시반이었다. 안중근은 이토를 수행하던 일본인 3명을 저격 했다. 그는 안중근의 역사에서 혹시 무고한 늙은이를 사살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3명을 저격 했다고 회고 했다. 총에는 7발이 장진 되어 있었다. 남은 한발을 발사하기 전에,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서 체포 되었다.(나무위키)


그리고 안중근은 세계 공영어인 에스페란트 어로"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라고 외친다음 한국말로 "대한 만세" 크게 불렀다(나무위키).  러시아 경비병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러시아 한병대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당시에 하얼빈은 러시아 관활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러시아 정부는 일본과의 마찰을 원하지 않았다. 안중근의 신병은 곧장 일본영사관에 넘겨졌다. 일본은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의 재판을 일본이 조차권을 가지고 있는 뤼순에서 하기로 하고 이들을 11월3일 뤼순 감옥으로 이송 했다. 이것은 안중근의 조력자들이 러시아령에서 사건을 일으키면 러시아의 재판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간 것이었다. 이들의 재판은 5개월 동안 재판이 계속 되었다. 일본 정부에서 이미 사형 시키기로 결정된 재판이었다. 안중근은 자기가 죽을 줄 알고 저지른 일이었기 때문에 전혀 흔들림이 없이 의연 했다. 


그는 재판장에서 이토를 왜 죽였는 가? 하는 질문에 메모지 한장 없이 판사를똑바로 바라 보며 15 가지 이유를 또렷하게 대답 했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18]


*이토가 일본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그런 소문이 파다 했고 안중근은 그것을 믿었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안중근은 일국의 군인의 자격으로 적국의 요인을 사살 했기 때문에 만국공법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지 일본헌법에 의해서 재판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 했다. 그는 국제법에 대한 올라은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정부의 방침에 따라 이루어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상소를 포기 하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 했다. 한국, 일본, 중국이 힘을 합쳐서 서양제국주의에 대항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지배하에 들어와야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과 반대 되는 이론이었다. 안중근은 일본이대련과 뤼순을 중국에 즉각 반환하고, 이곳에 한, 중, 일의 삼국 공동기구를 만들고 군 훈련 기구을 설치하고 공동화폐를 만들자고 제안 했다. 그는 이와 같은 이론을 칸트의 영구평화론를 읽고 착안 한것으로 전문가들은 짐작 하고 있다. 당시에 칸트의 이 이론이 지식인들 간에 유행 했다고 한다. 안중근은 이 책의 집필을 완성하기 위해서 사형집행 연기를 원했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국방 TV 안중근)


안중근은 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의 역사"를 집필 했다. 안중근을 김시하고 하고 있는 뤼순감옥의 직원들은 안중근의 처신을 보고 모두 감복하여 그에게 무척 잘 해 주었다. 간수들은 집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다. 


뤼순 형무소 소장 구리하라 사다키치, 일본 헌병 지바 도시치와 안중근의 우정


안중근은 감옥에 있는 동안 많은 유묵(붓 글씨)을 남 겼다. 2014년 8월14일, 일본으로 부터 "경천"이라고 쓴 유묵이 한국에 돌아 왔다.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당시 형무소 소장이었던 구리하라 사다키치에게 죽기 며칠 전에 준 선물 이었다. 사형장으로 떠나는 날 그를 감시하고 있던 헌병 지바 도시치의 배웅을 받는 다. 그가 5개월 간 묵었던 방에는 "위국 헌신 군인 본분"이라는 유묵이 남아 있었다.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 이라고 하여 자기의 행위를 일본 헌병 에게 이해 시키려 한 것이라고 생각 된다. 그가 자기를 최선을 다해서 보살 폈던 일본 헌병에게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었다. 이 글씨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다. 뤼순 형무소 소장 구리하라 사다키치는 자기나라 영웅을 암살 한 안중근 을 성의 껏 보살펴 주었다. 지바는 안중근을 직접 감시 하면서 그의 인품에 감복 되어 서로 친하게 되었다. 그는 안중근에게 마지막 소원을 물었다. 안중근은 한복을 입고 죽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한복을 만들게 하여 안중근에게 주었다고 한다. (일설은 구리하라가 자기아내에게 부탁 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는 그옷을 입고 형장으로 갔다.


일본 사찰에 세워진 안중근의사의 유묵비


지바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된 후 얼마안되어 전역 되었다. 그는 집안에 안중근의사의 위패를 모셔 놓고 향을 피워 추모 했다. 1934년 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내에게 안의사를 계속해서 추모 할 것을 유언 했고 그녀는 이를 받들 었다. 아내는 양녀에게 유언 하여 추모는 계속 되었다. 일본 다이린지에 있는 절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 비가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안중근의 인품에 감복 된 일본인 들이 안중근의사를 추모 해왔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안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1910년3월26일, 조선의 영웅  안중근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31세의 젊은 나이 였다.


우덕순은 밀정이었나?

체제가역에서 이토를 노렸던 우덕순은 3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함흥 감옥에서 탈옥에 실패하여 2년형을 더받아 1925년에 석방 되었다. 감옥에서 나와 만주로 망명하여 교육과 종교 사업으로 독립운동에 힘썼다. 2019년 8월13일에 방영 된 KBS 시사계획 창 밀정1부-배신의 기록은 1920-30년에 우덕순은 하얼빈 조선인민회장 및 치치하얼 조선인민회 간부를 맡았다는 이력이 보도 되었다. 조선인민회는 일본 정부로 부터 예산을 받아 한인들의 동정을 일본 기관에 보고 했다. 창은 1925년에 우덕순이 일본 외무상 시데하라 기주로에게 "외무성 보조로 많은 실적을 올렸습니다. 더 많은 실적을 위해서 예산지원을 요청 합니다."라는 내용의 공문서를 증거로 제시 했다. 당시 인민위원회가 관리하는 밀정에게 높은 봉급을 주었으며, 그들은 호회로운 생활을 했다고 창은 방송 했다. 그러나 우덕순이 일본 총영사관에서 1925년 4월30일 6,175엔을 받았다는 기록은 오래전 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인중근 의사 연구 전문가인 신운용 박사도 이를 근거로 2010년 까지 도 밀정으로 활동 하고 있었다고 주장 했다. 그렇지만 조선 총독부은 1934년에 "외국의 용의 조선인 명부"를 만들었는 데 여기에 우덕순을 "농후한 배일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신운용 박사도 새로운 기록이 나오자 우덕순이 친일파라는 주장을 바꾸었다. 실제로 우덕순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 까지 치치하얼 감옥에 갖혀 있었다. 광복후 그는 헤이륭장성의 한인민단 위원장으로서 외아들 우대영과 함께 교포들의 본국 수송을 도왔다. 귀국한 후 1948년 대한국민당 최고 위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사망 했다. 그의 유해는 국림서울현충원에 안장 되어 있고 아직도 독립유공자의 대우를 받고 있다.(나무위키)


결론

안중근은 이순신 이래 한국이 나은 최고의 영웅이라고 생각 한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위대한 지도자의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권총으로 이토의 급소를 명중 시킨 그의 사격술은 비상 했다. 재판에서 그의 국제법에 대한 이해는 어느 변호사의 그것을 능가 했다. 동양 평화론을 주장할 만큼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에 밝았다. 여러사람을 모아 의병 횔동을 하고 하얼빈 거사를 성사 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독력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오늘날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지묵과 저서를 남겼다. 


명치유신이라는 일본 뿐만 아니라 동북 아시아 역사에 기리 남을 수 있는 거대한 개혁의 지도자 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인들 처럼 약소 국을 가차 없이 점령 하여 식민지 화 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침략정책을 "동양평화"라는 미명 아래 청일전쟁, 노일 전쟁을 서슴치 않았다. 한국을 식민지화 했다. 말은 평화지만 전쟁을 택한 것이다.

이토는 조선과 중국(청)은 비문명국이어서 일본이 다스려 문명국인 구미국가들의 침략을 막아야 동양평화가 

이루어 진다고 주장 했다. 사회진화론을 앞세워 약소국을 식민지화하는 구미국가를 흉내낸 수작이었다. 


안중근은 서양 사람들이 동양을 침략하고 있는 데 왜 같은 동양 사람인 일본이 조선, 중국을 침략 하느 냐고 반문 했다. 일본, 조선, 중국이 서로 힘을 합 해서 서양인들의 침략을 막아야 동양 평화를 유지 할수 있다고 주장 했다. 이것이 그의 동양 평화론이었다. 


역사를 가정에 의해서 돌이 켜 보는 것은 무의미 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안중근의 주장 은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의 헤아릴 수 없는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 한다. 이토는 미국의 원폭 투하 일본의 굴욕 적인 항복을 자초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양 삼국에 모두 이로운 "누이 좋고 매부 좋은생각이었다. 


안중근의 용기 있는 행동은 일본에게 침략당하는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영웅적인 쾌거였다. 그러나 이토가 죽었는 데도 일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좀 참고 기다리며 그의 넓고 깊은 지식과 전투 능력을  장기 적이고 조직 적으로 일본에게 저항하는 데 사용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전쟁 터에서 상대의 군인을 군인 정신으로 이해 하는 우정 어린 이야기는 우리의 심경을 울린다. 일본인 형무소장 구리하라, 간수 지바와 안중근의 일화는 이러한 예의 하나 라고 생각 한다. 일본 방송은 슬픈 테러리스트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안중근과 지바의 이야기를 방영 했다.  

 

https://youtu.be/P-NDvHKwt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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