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민영익, 이승만
갑신정변(1884)과 을미사변(1895)은 공통점이 있다. 고종에 대한 반역이며 반역자들의 뒤에는 일본이 있었다. 반역자들은 개화파였고 그들은 일본의 힘을 빌려서 조국을 근대화시키려고 했다. 반역자들은 잡혀서 처형을 받거나 일본으로 망명했다. 고종은 도망간 반역자들을 암살하기 위해서 자객을 끝임 없이 보냈다.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서 지운영을 보냈지만 실패했다. 그 후 홍종우는 김옥균을 상해에서, 고영근은 우범선을 일본에서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1899년 1월 30일 이승만은 최정식, 서상대와 함께 서소문안 감옥에서 탈출했다. 이승만은 뒤 처저서 곧 다시 붙잡히고 최정식은 감옥에서 빠져나와 일본으로 밀항하려다가 체포되었다. 서상대만 탈출에 성공했다. 붙잡힌 최정식과 이승만은 법정에서 재판장 홍종우 앞에 서게 되었다. 최정식은 이승만이 탈출을 주도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홍종우는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면 최정식이 앞장서서 권총을 3발이나 발사하는 동안 이승만은 한 발도 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정식에게 교수형을 이승만에게 태형 백대를 선고했다. 만약 홍종우가 최정식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강경파에 속해 있었다. 홍종우는 독립협회의 반대 단체인 황국협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1850년 홍종우는 경기도 안산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도로 이주하여 가난하게 자랐다. (*고금도는 정유재란 때 조선수군 본부가 있었고 이순신 장군이 노량진 전투에서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잠시 안치되었던 곳이다.) 한때는 제주도에서 화전민과 같이 살기도 했다고 한다.
1886년 모친상을 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간 동기에 대해서는 기록에 잘 나와 있지 않다. 당시에 고종은 외국에 다녀와서 그곳 이야기를 잘하면 별시를 치게 하여 등용했다고 한다. 그가 이 출세길을 노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한 그는 막노동을 하며 규슈, 오사카를 거처 도쿄에서 아사히 신문사 식자 공으로 2년 동안 일 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된 일본을 보고 감탄했다. 식자공을 하면서 신문을 읽고 세계정세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그는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가 돼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여비에 충분한 돈이 모여지자 1890년 동경하던 프랑스로 떠났다. 요코하마를 출발한 지 40여 일이 되어 프랑스 마르세이우 항구에 도착했다. 그 후 파리에서 레가미라는 프랑스 사람을 만났다. 이렇게 그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 되었다.
"그의 머리는 천장까지 와닿는 것 같았다. 그를 보자 나는 일종의 신비로운 공포감에 사로 잡혔다. 그 느낌은 예전 동양에서 본 큰 호랑이가 내게 불러일으켰던 경외감과 같은 것이었다. " 레가미는 처음 만난 홍종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잡지 통보에 "정치적 암살자"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화가이기도 한 그는 홍종우의 초상화도 기고문에 그려 넣었다.
홍종우의 나이 41세였다. 그는 양복을 입지 않고 꼭 조선복을 착용했다(*당시에 한복이란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품속에는 항상 대원군과 고종의 사진이 있었다. 그가 프랑스에서 근대문명을 배워서 조선을 개화시키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의 전통과 왕에 대한 충성을 중요시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2006년 한국 국립발레단은 1936년 러시아 발레리나 미하일 포킨이 제작한 발레 "사랑의 시련"을 복원해서 공연했다. 사랑의 시련은 조선의 춘향전을 원본으로 하여 서양식으로 각색한 작품이었다. 포킨이 춘향전을 접하게 된 것은 홍종우 덕분이었다. 홍종우는 프랑스 작가 로니와 협조하여 춘향전을 불어로 번역했다. 직역이라기보다는 춘향전을 바탕으로 불어 식 소설을 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목은 춘향을 풀어서 번역 한 "향기로운 봄"이었다. 홍종우는 로니에게 춘향가를 들려주며 그로 하여금 소설의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포킨은 향기로운 봄을 읽고 사랑의 시련이라는 발레를 제작했다. 이외에도 그는 심청전을 불어로 번역하여 "마른나무에 꽃을 피우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17세기까지 코리아는 지구상에 하나의 섬처럼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무지의 주된 원인은 우리가 서양문명과의 접촉을 시도하려는 열의가 적었기 때문이었슴을 겸허히 고백한다." 홍종우는 "마른나무에 꽃이 피다"의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파리 거리를 거닐 던 양반 홍종우는 조선이 약소국인 원인을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코리아의 상황을 발칸반도와 비교할 것이다. 조선은 강대국에 둘러 싸여 있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여왔으며 얼마 후 먼 러시아가 끼어들 것이다."라고 서문은 계속된다. 그는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적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들과 같이 옷을 입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 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각각 다른 정체를 가지고 있다."라고 나라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야 하지만 우리 것을 버리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들은 우리 조선의 연대가 기원전 2천 년 이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조선은 강대국에 둘러 싸여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저는 유럽문명을 조속히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들의 도움과 충고를 바랍니다." 파리 카페 리 마고에서 홍종우가 한 연설 내용이다. 이곳에는 파리의 유명인사가 자주 모이는 카페였다. 레가미는 홍종우를 이곳에 데리고 가서 연설을 하게 해 주었다.
레가미의 소개로 홍종우는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일했다. 그는 그곳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물건들을 모아 조선문화 전시실을 만들었다. 춘향전과 심청전 외에도 직성행년편람을 불어로 번역했다. 1893년 7월 22일, 2년 7개월 동안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왕권을 튼튼히 하여 국민이 총 단결 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강하게 하되 조선의 전통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은 급진개화파들의 고종과 민 씨 세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쿠데타였다. 쿠데타가 실패했기 때문에 주모자들은 모두 반역자로 처형되었다. 역모는 삼족이 멸하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해서 생명을 부지했다. 고종은 일본에게 이들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고종은 자객을 보내어 이들을 암살하려 했다.
1886년 고종은 지운영을 일본에 보내어 김옥균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890년 김옥균이 북해도에서 도쿄로 돌아왔다. 일본정부는 조선정부가 끝임 없이 그를 암살하려 했기 때문에 그의 거처를 이리저리 옮겼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정부는 다시 적극적으로 김옥균을 일살 할 계획을 진행하였다.
1892년 5월 당시 민 씨 척족의 영수, 병조판서 민영소는 이일직을 두목으로 권동수, 권재수 형제를 김옥균 암살의 임무를 주어 일본으로 파견했다. 이일직은 풍부한 자금을 쓰며 김옥균, 박영효 등에게 접근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홍종우를 포섭했다. 이일직이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할 것을 제안하자 홍종우는 이에 동의했다.
홍종우는 쉽게 김옥균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서로 개화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홍종우는 프랑스 요리를 해서 김옥균을 대접했다. 그의 요리 솜씨는 김옥균뿐만 아니라 일본인 친구들도 맛있게 먹을 정도였다.
한편 조선정부는 당시 조선의 감국(총독에 해당) 위안스카이에게 "동양평화를 논의하기 위해서 김옥균을 청으로 초청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김옥균에게 보낼 것을 요청했다. 위안스카이는 홍종우를 동반자로 추천한다는 내용까지 첨부하여 김옥균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개화파와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일본에서 일을 벌이면 조선이 일본에게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달랐다. 청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갑신정변을 제압한 나라이다. 청나라에서 친일 개화파 우두머리를 처단하면 조선에게 큰 부담이 없을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1894년 1월 31일,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되기 2달 전이었다. 당시 상해에 살고 있던 민영익은 상해 주제 일본 영사관에 나타나서 홍종우가 김옥균을 상해에서 암살하려 하니 일본당국에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일본영사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VXbmEQpfyY
김옥균 사후에 일본 전국이 애석해하던 일본의 태도와 전혀 다른 일본의 반응이었다.
1894년 3월경 이일직은 김옥균이 진 빚을 갚아 주었다. 주색에 빠저 방탕한 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항상 돈이 모자랐다. 그는 일본은 위험하니 상해로 갈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상해로 가는 배표와 중국에서 쓰라고 5,000원짜리 수표를 주었다. 상해 동문 밖에 있는 천풍보호(은행?)에 가서 환불하라고 했다. 그리고 홍종우가 자신의 대리인으로 되어 있으니 그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수표는 가짜였다.
김옥균과 홍종우는 1894년 3월 23일 고베항을 출발해서 3월 27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그들은 뚱허양행(동양양행)에 서로 다른 방에 투숙했다. 다음날 3월 28일 홍종우는 김옥균의 방에 침임 하여 권총으로 그를 사살했다.
이일직은 권동수, 권재수 형제와 함께 일본인 가와쿠보를 매수해 박영효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은 그들을 조선으로 압송했다.
청나라는 형식적인 재판을 하고 "조선의 관원 자격으로 공무를 이행"한 것에 불과하다고 석방되었다. 조선과 청이 미리 짜 놓은 각본이었다. 1894년 4월 홍종우가 김옥균의 시체를 가지고 들어오자 고종은 버선발로 뛰어 나갔다. 고종의 환심을 산 그는 출세가도를 달 렸다. 특별히 실시한 과거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는 것을 필두로 1897년 8월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비서원승, 의정부 총무국장, 평리원 판사, 중추원 의관, 태의원 소경등 요직을 역임했다. 평리원 판사 시절 이승만을 재판하였다.
1898년 6월 홍종우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 협회를 조직하였다. 독립협회가 입헌군주 제도를 주장하던 때이다. 황국협회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 독립협회가 주도하는 만민공동회의를 습격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강경파였다. 황실을 보호하는 입장이었던 홍종우가 분별 있는 판결을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강직한 성격이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홀대했지만 도아마 미치르가 창설한 겐요사(현양사)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겐요사는 일본 우익 낭인 들이 만든 집단이었다. 후에 민비 시해에 참여한다. 친왕파인 홍종우가 친일 성향이 짙은 김옥균을 좋아 할리가 없었다.
김옥균을 홀대하던 일본정부는 그가 죽은 후 완전히 태도를 바꾼다. 신문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를 대서 특필하고 모금 운동까지 했다. 암살에 관련된 조선 정부와 청나라 정부를 비난했다. 일본 국민의 반청 감정을 고무시켜 청과 전쟁을 하려는 포석이었다.
고종은 청일전쟁이 끝나고 민비가 살해되고 아관파천을 할 때까지 홍종우를 등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개화파와 일본세력이 조선 조정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는 시대 여서 고종이 비교적 자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홍종우는 아관파천 이후에 출세 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진 후로는 제주목사를 끝으로 행방이 묘현 하다. 외세를 경계하라는 상소를 올렸던 그도 외세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암살당한 김옥균은 조선이 허약한 나라가 된 원인을 천년동안 조선이 중국에 예속되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는 조선이 청나라 그늘에서 벗어나 부강한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허약한 왕과 대립하였다. 암살자 홍종우도 김옥균과 같이 조선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왕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일본의 힘을 빌려 왕에 반기를 든 김옥균을 역적으로 생각한 것은 그 시대에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 까?
참고
1, 유튜브: KBS 한국사전 - 네가 김옥균을 쏜 이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2007.8.18 방송
2. 유튜브: KBS 실험실: 김옥균 과 민영익의 개화 방법론; 1995.03.04 방송
3. 위키백과: 홍종우
4. 위키백과: 김옥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