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없는 수박
우장춘박사의 일생; 씨 없는 수박
우장춘 박사는 Triangle of U(우의 삼각형)이라는 식물의 잡종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발견한 것이 그의 업적이다. 양배추와 브로칼리가 합처서 어떻게 유채를 만들어 내는 지를 염색체의 병합을 관찰하여 증명했다고 한다.
U는 그의 성씨 우를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원리는 1935년 그의 박사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논문에 나가하루 우(Nagaharu U)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요지음에도 인용되는 논문이라고 한다. 씨 없는 수박은 일본 농학자가 이미 만 들었었는데, 우장춘은 한국에 와서 종자개량을 하면 이러한 경이로운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씨 없는 수박을 재배했다. 말하자면 종자 개량의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 와전되어 우장춘 하면 씨 없는 수박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버린 것이다.
우범선은 우장춘의 아버지이다. 우범선은 임오군란직전에 신식군대 훈련대장이었다. 신식군대는 민비가 일본의 도움을 받아 신설 한 부대였다. 구식군대는 대원군 섭정시절에 개혁을 단행해서 대우도 좋았고 훈련도 잘해서 제법 정비된 부대였다.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 친정이 시작되자 신식군대가 만들어지면서 구식군대는 찬밥이었다. 대우 좋은 신식군대는 양반 자제들로 채워졌다. 훈련대장 우범선은 중인 출신이었다. 생도들은 양반, 교관은 중인인 데 생도들이 교관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생도들 구박을 참다못한 우범선은 어느 날 생도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한 다음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 개화파가 득세하고 다시 일본 식 훈련대대가 창설되었다. 우범선이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삼국간섭으로 민비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서 친일세력을 제거해 가고 있었다. 우범선의 훈련대도 해체될 운명이었다. 일본은 민비시해에 반민비 세력을 찾던 중 우범선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영사는 우범선을 포섭했다. 우범선은 훈련대를 이끌고 일본낭인들과 협조하여 민비시해에 가담했다. 우범석은 민비시체를 태워서 버리는 역할을 했다. 일본의 예상을 뒤집고 민비 시해 이후 친일파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자 일본으로 다시 망명했다. 처와 자식들이 조선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나은 첫아들이 우장춘이었다.
우범선의 일본인 부인은 사카이 나카이다. 우장춘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 우범선은 우장춘이 6세 때 고영근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고영근은 무과 출신의 개화파 인사이다. 종 2품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고위 관료였다. 윤치호의 친구였다. 개화파들은 민비시해 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방유지나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우범선과도 만나면서 지냈다. 하루는 고영근이 히로시마현 구레에 있는 숙소로 우범선을 초대했다. 서로 마주 보는 자리에서 칼로 이범선을 살해했다.
우범선의 묘는 도치기현 사노시의 스나가 집안 묘에 있다. 조선 개화파 인사들은 스나가 하지메라는 인물의 보호를 받아 왔다. 스나가는 이 지방의 부농이었다. 그는 게이오의숙 츨신이다. 탈아시아로 유명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설한 학교이다. 후쿠자와는 조선개화파를 교화시킨 인물이며 갑신정변의 배후이다. 개화파들 대부분이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스나가는 김옥균과 절친했고 그를 끝까지 보호해 주었다. 스나가의 집에는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과 기록이 스나가 문고로 남아 있다고 한다.
우범선의 처 사카이는 하녀 출신이었지만 아주 생활력이 강하여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식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장춘은 동경제대 공학부에 입학하고 싶었으나 홀 어머니가 꾸리는 살림에 염두도 못 낼 일이었다. 우장춘은 도쿄 제국대학 농학 실과에 입학했다. 학부 과정이 아닌 전문학교였다. 1916년 도쿄대학을 방문한 조선도지사가 연설하는 도중 김철수라는 유학생이 그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것을 보고 그와 친해졌다. 그 후 우장춘은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19년 졸업한 후 농림성 산하 연구소에서 일했다. 전문학교 출신인 그에게는 진급기회가 없었다. 장교가 되지 못하고 만년 선임하사인 격이었다. 박사학위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나팔꽃 연구로 졸업논문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소에 화재가 발생하여 연구자료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리고 다시 연구한 것이 잡종의 원리에 대한 것이었다. 우의 트라이 앵글(Triangle of U)은 그의 박사 논문이었다.
1924년 와타나베 코하루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고 했으나 여자 쪽에서 조선인이라고 반대했다. 이때 스나가가 도와주었다. 스나가는 와타나베를 양녀로 들이고 우장춘을 대릴사위로 맞이했다. 우장춘도 스나가 나가 하루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우(U)를 버리지 않고 우 나가 하루를 계속해서 사용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도 진급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농업연구소를 그만두고 사기업인 타카이 종묘 회사에 들어갔다. 아마 우라는 한국이름이 탈이었을 것이다. 1945년에 그 회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던 중 한국정부의 우장춘 모셔오기 운동에 부응하여 1948년부터 부산 농업 시험장에서 일했다. 배추, 무, 벼 품종개량에 크게 기여했다. 가족은 전부 일본에 남겨 두고 한국에서 현지 처와 같이 살았다. 1959년 8월 10일 위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61세였다.
우장춘은 와타나베 고하루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다. 이들은 모두 스나가 가문의 자손으로 행세했다. 스나가는 우익 계열의 든든 한 집안이었다. 위로 줄줄이 딸 넷, 아래로 아들 둘이었다. 딸 둘은 농학자와 결혼했는 데 우장춘이 혼담에 관여했다고 한다. 사위나 외손자들 모두 전문직이었고 아들도 모두 대학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넷째 딸은 이나모리 가즈오와 결혼했는 데, 결혼 일 년 후 교세라라는 일본 굴지의 기업을 창업했다. 일본항공 회장을 지냈다. 그가 아주 젊은 나이에 성공한 것을 보면 스나가 가문의 도움을 받지 않았나 의심하기도 한다. 우장춘의 장남 스나가 모토하루는 매형회사 교세라에 취직했다. 매형의 동생은 유명한 만두체인 교자노 오쇼의 사장이었다. 차남이 만두 체인점을 운영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범선은 민비시해 사건의 첨병이었다. 그는 일본 테러단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서 훈련대 병력을 이끌고 민비 시해에 참여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왕비의 시체를 소각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민비 시해는 대원군, 개화파, 일본 공사관 그리고 일본정부가 공모한 사건이었다. 사건 관련의 정도를 따지자면 우범선과 개화파는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개화파는 고위층이었고 우범선은 현장에서 테러에 참여했던 일꾼이었다. 모두 다 가렴주구의 원흉 민비 제거에 동의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많은 한국사람들은 우범선은 친일파 매국노이고 개화파는 한국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도 우장춘만큼 조국을 사랑했다고 하면 어떨까? 모두 다 썩을 대로 썩어서 빈약해진 나라에 살던 사람들의 운명이었다.
민비 시신 앞에선 우범선은 "숲처럼 무성하던 민 씨 족속, 수백 명의 시녀, 신하라며 그녀를 국모라고 부르던 이천만 백성,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 가, 한숨의 목숨이 끊어질 때 오직 한 사람 우범선 만이 보았네"라고 말했다.
참고
1. KBS 역사저널 그날: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베다 2010.1.23 방영
2. 위키백과: 우범선
3. 나무위키: 우장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