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고종의 자객 지운영
나라의 문을 꼭꼭 잠가 놓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사를 담당하기 시작하자 빗장이 풀리고 외국문물이 들어왔다. 중인들은 양반과 백성사이에 낀 계급이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양반보다 아는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은 중인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신분상승을 원 했다.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서 는 누구보다도 먼저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 했다. 이중에 지운영, 지석영 형제가 있었다.
1887년 형 지운영은 평안도 영변에서 동생 지석영은 전라도 완도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생 지석영에게는 조선에 우두를 보급한 것이 죄였고 형 지운영에게는 김옥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 죄였다. 자 그러면 어려운 시대에 이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았는 가를 살펴보자.
아버지 지익룡은 한성에서 유명한 한의였다. 두 형제는 관훈동에서 1852년, 1855년에 각각 태어났다. 지석영이 넷째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으니 지운영은 아마 셋째였을 것으로 짐작되나 확인하지 못했다. 삼 년 터울이었지만 두 형제는 같은 해인 1935년에 사망했다. 동생 지석영은 2월에 형 지운영은 4개월 후인 6월에 사망했다.
조선시대의 의원, 역관등 전문직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모두 중인에 속 했다. 19세기 중엽 이후에 서양과 일본에서 불어오는 개화 바람은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인들에게 매력 적이었다. 청계천 근처에 모여 살고 있었던 중인들은 열정적으로 새로운 눈물을 배우려고 했다. 두 형제는 방랑시인 강위, 매천 야록으로 유명한 황현, 정대영, 김홍집, 유길준 등과 접촉할 수 있었다.
동생 지석영은 한의사인 아버지와 같이 의학에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의 친구였고 당시 명의였던 박영선에게서 한문과 의학을 배웠다. 형 지운영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강위로부터 시문을 배웠다. 중인 전문직 계층을 여향이라고 했다. 한양에 새문물이 들어와서 상업이 발달 하자 여향(중인) 문인들은 과학, 문화 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청계천 광교 부근에 살던 여향인 들은 강 위를 스승으로 모시고 육교지사라는 모임을 만들었는 데 지운영도 이단체의 회원이었다.
지석영은 청나라에서 들어온 의학 책을 읽고 영국의사 에드워드 제너의 우두법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졌다. 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고종은 대원군의 정책과 반대인 개방정책으로 처음 문호를 개방한 것이 이 조약이었다. 곧바로 고종은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그의 스승 박영선이 수신사 김기수의 수행원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의 종두법 실황을 알아 오라고 간청했다. 박영선은 종두귀감이라는 책을 가져다 주었다. 이 책을 읽고 1879년 일본 해군이 세운 부산 제생의원에서 2 개월간 종두법을 배웠다.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려서 40여 명에게 우두를 접종하여 천연두 예방에 성공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두법 실시였다.
1880년 김홍집을 단장으로 하는 2차 수신사가 일본으로 갈 때 지석영은 수행원으로 도쿄에 갈 수 있었다. 그곳 위생국 우두종계소장 기쿠치에게서 종두 접종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배우고 종두 50병을 가지고 귀국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종두법 보급에 헌신했다. 한편 군의 마에다에게서 서양의학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무당들의 공격을 받아 체포령이 내리고 종두장이 불타 버렸으나 무사히 피신해 있다가 종두장을 재건하여 우두 접종 사업을 계속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개화파가 숙청되는 과정에서 개화파와 연루되어 1887년 완도로 유배되었다.
형 지운영은 카메라와 사진술에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수습 차원으로 박영효를 대표로 하는 수신사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사진술을 일본에 가서 배워 오겠다는 의지를 보여 수행원으로 발탁되었다. 육지지사 회원들과 어울리면서 청나라를 통해서 들어온 서적과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고 개화파 인사들과 인맥을 쌓은 덕분이었다. *임오군란 때 폭도들은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여 공사관이 소실되고 사상자가 발생하여 일본 측 항의를 무마하기 위한 사과 차원의 수신사였다.
그는 수신사가 귀국한 후 일 년 동안 일본에 머물 면서 사진술을 배웠다. 1883년, 일본에 있는 동안에 민 씨 척족이었던 민영목과 연줄이 닿아 통리군국사무아문(*고종의 개방을 위한 새로운 기구)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김옥균은 그의 상관인 참의였다.
1884년 귀국한 지운영은 도화원 츨시 김용원과 함께 관립 촬영국을 열었다. 그리고 개인 사진관을 개업했다. 고종의 사진을 처음 촬영 했다. 같은 해에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후원자 민영목이 죽었다. 일본인 소유로 오인한 폭도들은 그의 사진관을 파괴했다. 그는 개화파가 어렵게 만든 자신의 사업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지운영은 1885년 11월 3일 참판 민병석을 만났다. 누가 먼저 누구를 만나자고 했는지는 모른다. 둘은 김옥균 암살에 관한 일을 상의했다. 이틀 뒤에 고종을 배알 했다. 그가 고종에게 김옥균을 암살하겠다고 아뢰고 윤허를 부탁했을 것이다. 두 달 뒤 1886년 1월 10일(음력) 왕은 지운영을 불렀다. 고종은 그에게 국서와 여비 5만 원(5천 원이라는 기록도 있음)을 주었다. 국서는 지운영을 "도해포 적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바다 건너 역적을 잡는 특사라는 뜻이다.
1886년 2월 23일, 고종의 명을 받은 지 한 달 후, 지운영은 인천을 출발했다. 나가사키, 고베를 거처 도쿄에 도착했다. 김옥균 거처 근처 이세강 여관에 투숙했다. 만나자고 서면으로 연락했다. 김옥균은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왜냐면 지운영이 민 씨 척촉의 절친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국사범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김옥균은 이혁로, 신응회, 정난교 등에게 지운영에게 접근하여 지운영이 자객이라는 증거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암살 자금으로 가저온 5만 엔 까지 빼앗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지운영을 찾아가 망명자로 이국에서 떠돌아다니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다 김옥균 탓이라고 비난했다. 이, 삼 개월 동안 이들은 지운영 앞에서 신세 한탄을 계속했다. 지운영은 결국 이들을 믿게 되었다. 어느 날 지운영은 망명자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서 김옥균을 죽이자고 제안하며 고종의 특서와 품에 안고 있던 비수를 보여 주었다. 5천(만?)엔 지불 보증서까지 내놓았다. 그들은 즉시 지운영을 포박하고 특서와 지불 보증서를 빼앗았다. 그리고 지운영은 도쿄 긴자 근처 교바시 경찰서로 넘겨졌다. 일본정부는 지운영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고종은 송환된 지운영을 "제 마음대로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며 나라에 수치를 끼친 것이 많으니 엄하게 신문하라"라고 명 했다. 일주일 뒤에 지운영은 의금부에 "순전히 사적 분노로 나 홀로 쌍검을 갈아서 행한 짓이다. 임금 명령 또한 가짜였다."라고 배후를 전면 부인 했다. 의금부는 고종에게 고문해서 배후를 캐겠다고 고종에게 아뢰자 고종은 "딱히 단서가 없으니 그냥 유배형을 내리"라고 하여 사건을 종결시켰다. 1886년 6월 17일 그는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출충한 무예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민 씨 척족과 친분이 두터웠다. 또한 고종의 사진을 촬영하여 고종의 눈에도 들게 되었다. 고종, 민비 그리고 왕비의 척족들의 원수인 개화파의 수장 김옥균을 암살할 왕명을 받들었던 그였다. 이일을 성공시키면 출세 길이 훤하게 열리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사를 그르친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다. 만약 고종이 그에게 김옥균 암살을 명령한 것이 밝혀지면 고종은 일본의 항의에 몸살을 할 것이었다. 아마 고종은 지운영이 자신 혼자의 범행이었음을 고수하면 사형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 종용했을 것이다. 3년 후 1889년 지운영은 유배에서 풀려 났다.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뀐다.
황칠의 사진관에서 잠시 일하다가 1892년 중국의 고주와 항주 등지를 여행하였다. 그는 소동파의 그림을 흠모하여 동파건생입극도를 보고 그대로 그려서 가지고 귀국했다. 그리고 그는 도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도교는 조선에서 금지되어 있는 종교였다. 그러나 고종은 지운영과 최시명을 중국에 보내어 도교를 배워 오도록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시, 서예, 화(그림)에 능한 사람을 삼절이라고 했다. 지운영은 조선말기의 삼절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해서와 산수화, 인물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유교,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도 공부하여 유불선에 통달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지사절이라 불렀다. 그가 시, 문, 서, 화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https://blog.daum.net/leepansoo/8626305 어려서부터 남달리 운동신경이 발달했던 그는 무예를 연마하여 태견의 달인 이 되었다. 이와 같이 무예와 시, 서, 화에 능한 삼절이었던 그는 은둔생활을 결심했다. 1911년에 경기도 안양 삼성산(관악산)에 있는 삼막사라는 절에 백련암이라는 암자를 동생 지석영과 함께 짖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림과 글씨에 심취했다. 1922년 제1회 조선 미술박람회에 산인탁족도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그가 가지고 다니던 보검을 그리고 일심보검이라는 글씨를 써넣은 액자를 지인 오세창에게 선물했는 데 그 액자가 성균관 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세창은 중인 개화파로 유명한 오경석의 아들이며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동생 지석영은 1892년에 유배에서 풀려 났다. 1893년 우두보영당을 설립하고 소아에게 우두 접종을 실시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는 자유롭게 우두를 보급하게 되었다. 그는 1883년에 문과에 등제하여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했다. 그는 김홍집 내각에서 형조참의, 승지를 거처 동래부사가 되었다. 1899년 자신이 제의한 경성 의학교가 설립되자 초대 교장이 되었다. 훈동에 의학교 부속 병원을 설립했다. 1908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로 개편되자 학감에 취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후에 사임하였다. 그
1894년 동학란이 일어났다. 지석영은 "백성을 수탈해 난을 초래한 민영휘를 처단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고종은 지석영을 대구 동학군을 토벌하는 토포사로 임명했다. 그는 많은 동학군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1898년 지석영은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고종은 그를 유배시켰다. 여론이 들 끌었다. 고종은 할 수 없이 3개월 만에 유배를 풀어 주었다. 의학교 교장 일을 하면서 그는 한글 보급에도 입장 섰다. 대한제국의 공식 한글 정책인 신정국문(일종의 한글 사용법)을 만들어 정부에 제출했는 데 그것이 그대로 받아들여 져서 공표 되었다.
1909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동년 12월 12일 한자통일회 주최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에서 지석영은 추도문을 낭독했다. 이토 약사는 한성부민회장 유길준이 읽었다. 2002년 부산시는 지석영을 친일 인사라고 부산을 빛낸 인물에서 제외했다. 2003년 과학 기술부는 괴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15인에 선정되었던 지석영을 제외했다.
1920년 5월 20일 윤치호의 일기에는 "삼막사 절 옆에는 유명한 미치광이 화가 지운영이 살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도교에 심취해서 기인된 지운영을 항간에서 바보, 미치광이, 구도자와 지혜를 더해 지팔 절이라고 불렀다. 시, 문, 서, 화와 치, 광, 선, 혜를 합치면 8절이 된다. 동년 5월 29일 윤치호의 일기는 "두 형제분은 이 속세에서 신선처럼 살고 있다."라고 부러워하고 있다.
지운영은 백련암 바위에 거북 귀자 세자를 새겨 놓고 살다가 가회동 집에서 사망했다. 아마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이었을 는지 모른다. 어러운 세상 살기도 힘들었는 데 저 세상에 가있는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나무라지 말았으면 좋겠다. 형 지운영은 친일파 김옥균을 살해하려 했기 때문에 애국자이고 동생 지석영은 이토의 추도문을 읽었기 때문에 적과 내통한 매국노란 말 인가? 다 부패한 조선이 지은 죄이다.
1899년 설립된 의학교(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초대 교장을 맡았던 지석영 선생이다. 지석영 선생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도입하신 분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근대의학의 아버지로 불릴만한 지석영선생의 동상은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구내에 있다.
참고
1.https://www.jsd.or.kr/?c=806&uid=23347
2. https://m.blog.naver.com/jwoh8154/220637857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