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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n 24. 2023

장인환과 전명운의 통쾌한 복수

더럼 스티븐스 암살 사건


Kiss7.tistory.com

“예를 들어 일만 냥을 내고 벼슬을 산사람이 있고, 다음에 몇천 냥을 더 바치는 사람이 생기면, 먼저 산 사람은 직함만 지닌 벼슬아치로 물러나게 되는 데, 이렇게 차례차례 긁어내어 더 이상 짜낼 것 이 없어야 끝이 났으니, 벼슬을 사려던 사람은 파산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가거나, 부임하다가 중도에 수레를 돌리거나, 혹은 부임하자마자 해임되기 일쑤였으며, 백성과 관리들은 수령의 송별과 영접에 지쳐 정신이 없고, 영남의 어떤 고을에서는 일 년에 네 번이나 사또를 영접하는 일이 생겼다.” 


“요행이 여러 날을 버티는 수령은 재물 긁어내기에 급급하여, 소낙비 몰아치듯 돈 생기는 곳이라면 약탈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니,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가 어려워서 살맛이 없게 되었다. “

-        (한 권으로 읽는 매천야록, 6장 매관매직; 황현지음 나중헌 옮김)


구한 말의 매관매직은 상상을 초월했다. 임금도 관직을 팔았다. 뇌물을 받고 임명할 관직이 바닥이 나자 임지가 없는 관직을 만들어서 팔았다. 돈을 들여 감투를 쓴 관리들은 임지에서 단기간에 본전과 이익을 챙기려고 백성들을 착취했다. 그야말로 먹고살 수가 없는 나라였다.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정이 맺어졌다. 러일전쟁 중이었다. 협약의 “1 항은 대한정부는 대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하여 대한정부에 용빙 하고,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 실시한다. 2항은 대한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 1명을 외무고문으로 하여 외부에 용빙하고 , 외교에 관한 요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 실시할 것 3항은 대한정부는 외국과의  조약 체결이나….”이었다.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게 위 협정에 따라 더럼 스티븐스를 외무고문으로 임명할 것을 촉구했다.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리스 알렌이 1901년에 스티븐스를 대한 정부 외교 고문으로  추천했음을 상기시키며 대한정부를 압박했다. 그는 1904년 11월에 외교고문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그에게 미국 내의 반일 정서를 가라앉히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함을 알리는 임무를 주었다. 이토는 또한 중요한 외교 안건은 주한 일본공사와 협의해서 처리하고 대한제국의 중요한 외교 사항은 신속하게 일본공사에게 알릴 것을 요구했다. 그는 대한정부로부터 보수를  받는 것 외에 일본정부로부터도 거액의 보수를 받았다.  


장인환은 1876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1세 때 아버지 마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되었다. 점원일을 하다가 평양에서  잡화상 경영을 하던 중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평양은 청일전쟁 격전지였다. 연전연패하던 청군이 평양에 집결했다. 일본군도 각지에서 평양성으로 모여 총공격을 했다. 당시에 평양성 주민들은 처음에 청군을 지지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오는 청군에게 음식과 물을 날라다 주고 일본군을 물리치기를 바라면서 환영했다. 그러나 청군은 조선 백성들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했다. 황현은 그의 매천야록에 청군의 만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청병은 음행과 약탈을 자행하여 날마다 뇌물을 요구하므로 공청과 민가를 막론하고 모두 곤경에 빠져 그들을 원수처럼 여겼다. 심지어는 그들이 평양에서 포위되었을 때 가산을 다 바쳐 일(본) 병을 인도한 사람이 있었는 가 하면 그들이 패전하여 도주할 때 백성들은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다 가르쳐 주었으므로 포위망을 벗어난 사람이 드물었다.”


평양에서 양국이 대회전을 벌리기 직전, 1894년 8월 26일에 일본은 조선과 양국 맹약을 맺었다. 조선은 일본군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농민군의 재봉기와 같은 내란이 일어날 때 일본군이 관군을 도와 토벌 한 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 백성들은 일본군과 청군 양쪽에게 수탈을 당 했다. (한국근대사 산책, 6장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강준만 저)


당시에 평양에 살고 있던 18세의 장인환은 청과 일본이 싸우는 와중에  조선사람들이 핍박당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경험했다. 이게 다 조선의  국세가 약하기  때문에 외국군대가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전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울어져 가는 국가의 운명을 바로 잡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장인환)  


같은 해에 평양에 있는 중앙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했다. 교회의 추천으로 1904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서 하와이로 이민했다. 그는 코할라 사탕수수농장에서 2년 동안 일한 후 1906년에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했다.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진 것에 대해서 통분하여 1907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설립된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보국회의 발기인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상항(샌프란시스코) 한인연합교회 창림 멤버였고 길에 나가 복음을 전달할 정도로 신암심이 깊었다.(나무위키) 


전명운은 1884년에 서울 명동성당 부근 종현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3남매 중 7번째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큰형 전명선의 보호아래 자랐다. 형님은 종로 부근에서 점포를 경영하고 있었고 그는 그곳에서 일했다. 1898년 10월 29일 그가 14살 나던 해에 종로 네거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민공동회를 볼 수가 있었다. 만민공동회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이 1897년 광무 1년에 시작한 일종의 민중 토론회였다.

주최 측이 주제를 정하고 민중 중에 몇 사람이 자기들의 의견을 말하고 주최 측이 선정한 인사들이 연설 한 다음 다수결로 결론을 얻어내는 방법이었다. 전명운이 본 만민공동회는 지금까지 열린 집회중 최대 규모였다. 10여 개의 각종 정치단체가 주최했다. 정부대신 10여 명이 참여했다. 지식인, 중인, 학생, 상인, 승려, 기생등, 심지어 백정까지 참여했다. 청중은 무려 1만 명이었다. 


전명운은 이 민중대회를 보고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한성학교에 입학하여 1902년에 2 해의 수업과정을 마쳤다. 한성학교는 관립이었고 경기고의 시작이다. 1903년 1월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기 위해서 상하이로 떠났다. 그리고 그해 9월 18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서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했다. 1904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그는 철도 공사장과 알래스카 어장에서 일했다. 1905년 4월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독림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그는 각종 토론회가 개최될 때마다 연사로 나서서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촉구했다. 


스티븐스는 1908년 초에 안식년 휴가를 받았다. 미국 동부 워싱톤 DC와 뉴저지에 있는 가족을 만나서 휴가를 보내기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일본정부로부터 받은 공무가 있었다.(KCI 통합검색;American Media Coverage of the Assassination of Durham White Stevens)


당시 미국에서는 1906년부터 일본인 노동자 배척, 일본인 학생의 공립학교 취학 거부 등 반일 운동이 일어 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미일전쟁설까지 떠돌았다. 미국정부는 1907년 11월 일본인 이민 금지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러한 미국 내의 반일감정을 잠재우기 위해서 스티븐스를 안식년 휴가 겸 귀국시킨 것이었다. 또한 이토는 한국에서의 통감정치를 정당화하고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재미동포의 항일운동을 방해하라고 당부했다. 일본은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만주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서 협상을 추진하려고 했다. 일본은 스티븐스를 통해서 대 러시아 협상에 관한 미국 정부의 사전 양해를 구하려고 했다.(공훈전자사료관)  1909년, 이토는 러시아 재무상과 이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하얼빈으로 갔다가 안중근에게 피살되었다.


1908년 3월 21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그는 여러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을 착취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국을 발전시켜서 밝은 미래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부연하기를,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한 뒤로 대한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 사람들 사이에 교제가 친밀하여 일본이 대한제국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립핀을 다스리는 것과 같고, 대한제국에 새 정부가 조직된 뒤로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농민들과 백성은 전일 정부의 학대와 같은 학대를 받지 아니하므로 농민들은 일본을 환영한다.”라고 했다.


이 인터뷰 내용이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보도되었다. 이 기사를 읽은 이 지역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등 항일단체 회원들은 분노했다. 이들은 즉각 대책을 논의했다.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을 대표로 뽑아 스트븐스가 묶고 있는 페어몬트 호텔로 보냈다. 1908년 3월 22일 그들은 스티븐스에게 대한제국에 관한 신문기사를 정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를 거절하면서,


“대한제국은 황제가 어리석어 생각이 어둡고, 정부관리들이 백성을 학대하며 재산을 탈지 하므로 백성의 원망이 심하다. 그리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이 니면 러시아에게 빼앗길 것이다.”라고 대답했다.(위키백과)


네 사람을 대표해서 영어를 잘하는 얼 리(Earl Lee, 본명 이일)가 나섰다. 그는 신문기 자였는 데 일본정부의 검열에 걸려 추방되었다. (다른 기록에는 이학현이 영어를 잘해서 그가 대표로 스티븐스와 대화했다고 나와 있는 데 얼리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일본의 한국 의병 대량학살에 대해서 물었다. 농기구등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서울 8마일 근교까지 진격한 의병을 일본군은 대포와 기관총으로 14,000명을 죽이고 160명의 부상자를 낸 사건이 있었다.  

“일본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을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 리가 스티븐스에게 물었다.

“아니요,” 스티븐스가 대답했다.

“모든 한국관리들이 제거되었지 않습니까?” 리가 물었다.

“아니요,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당신의 나라를 떠나 있어서 한국정부의 정확한 상황을 아마 모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네 사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호텔 로비에 있는 의자를 집어 들어 그를 향해서 휘둘렀다. 그는 대리석 바닥에 쓰러졌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스티븐스는 일어나서 의자를 집어 들고 벽에 기대어 방어했다. 호텔 손님이 4명의 한국사람들을 강제로 호텔 밖으로 끌어내었다. 

“우리 모두가 그에게 더 해주지 못해서 섭섭했다.”라고 그는 후에 말했다. 그러나 다음날 기회가 왔다. 

스티븐스는 다음날 일본영사와 함께 호텔 가솔린 버스를 타고 페어몬트 호텔을 나와 페리 빌딩으로 향 했다. 페리를 타고 오크랜드로 가서 워싱톤 디시 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장인환과 정명운은 이 소식을 듣고 각각 페리에서 스티븐스를 저격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미리 약속하고 같은 장소에 똑같은 목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버스가 페리 빌딩 앞에 도착하자 스티븐스가 버스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전명운은 그의 앞에 바짝 닦아가서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발사되지 않았다. 그는 즉시 권총 손잡이 끝으로 스티븐스의 눈을 가격 하려 했으나 스티븐스는 바로 반격했다. 주먹으로 얻어맞은 전명운은 도망가기 시작했고 스티븐스는 그를 추격했다. 이때 몇 야드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인환이 뛰어나가 권총을 손수건으로 감추고 스티븐스를 겨냥해서 총을 쏘았다. 그러나 총알이 빗나가서 전운영의 팔에 맞았다. 그는 바로 땅에 쓰러졌다. 다행히 다음 두발은 스티븐스의 오른쪽 어깨 날개 뼈와 오른쪽 대관절 위쪽에 명중했다. 스티븐스는 같이 있던 일본영사의 팔에 쓰러졌다. 장과 전은 이스트 스트리트(엠바카데로)로 도주하려 했다. 그러나 군중들이 그들을 쫒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 일본 놈들을 때려죽여라!, “고 외치며 달려갔다. 그러나 곧 나타난 경찰들이 두 사람을 체포하여 일단 위기를 모면했다. 장은 스티븐스를 지나치면서 그를 향해서 외쳤다. “너는 우리나라를 반역한 놈이다. 우리 민족을 망하게 한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고 있다. 너는 우리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놈이다.”라고.

스티븐스는 근처 하버 하스피탈로 즉각 이송되었다. 경찰에 체포된 장과 전도 같은 병원으로 갔다. 

병원 측은 “스티븐스는 편안하게 쉬고 있고 그의 상태는 희망적이다.”라고 발표했다. 스티븐스 자신도 “나는 아픈 데가 없다. 이게 좋지 않은 징조 인가?”라고 말했다.

이틀 후에 염증이 생겨서 수술을 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말대로 불길한 징조였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한국에서는 암살에 대한 이야기를 광적인 칭찬으로 청중들이 열심히 들을 것이고 일본에서는 전혀 반대의 감정으로 보도될 것이다. 전 세계의 외교가는, 현명하지 못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본을 위해서 훌륭하게 봉사한 미국인의 피살을 보고 동요할 것이다. "라고 보도했다.

전은 살인 방조 혐의로 고발되었으나 3개월 후에 석방되었다. 장은 2등급 살인죄로 25년 선고를 받고 싼 큐엔틴에서 복역하다가 10년 후 페롤로 석방되었다. 1927년에 한국으로 돌아갔으나 일본은 그를 추방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하다가 1930년 자살했다. 싸이프러스 론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75년에 서울 국림묘지로 이장했다. 한국정부는 그에게 독립유공 훈장을 수여했다.(이상 San Francisco Examiner, March 2, 2023; I decided to kill him and myself… by Gary Kamiya) 


전명운은 일본인들의 위해를 염려하여 이름을 맥 필즈(Mack Fields)로 바꾸었다. 그의 변호사는 장인환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미국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자 1908년 12월에 연해주로 갔다. 연해주에서 1909년 봄에 안중근 의사를 만나 동의회에 가입했다. 동의회는 1908년에 최재형집에 87명이 모여  항일 의병을 일으킬 목적으로 결성된 조직을 말한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과 관계있는 단지 동지회와는 다른 조직이다.(공훈전자사료관)


1909년 7월에 그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활동했고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보냈다. 1927년 부인이 사망하자 로스 안젤레스로 이주했다.  이승만이 조직한 동지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1947년 4월에 로스 인젤레스에서 사망했다. 1994년 4월에 그의 유해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인환과 전운영은 친일파 스티븐스를 사살함으로써 일본이 한국을 합방하는 것이 부당함을 미국 국민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의 신문 보도는 그와 정 반대였다. 대부분의 미국신문은 두 의사와 한국민족주의자들의 행위를 비난하고 그들의 활동을 방해했다.  신문은 암살사건을 무정부부의, 반 아시아이민, 세상에 알려진 한국의 사회문제와 연계시켰다. 이는 당시의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편견과 캘리포니아와 미국 내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직면한 사회적 문제를 반영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스티븐스는 미국 사교계에서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반 아시아 감정이 팽배해 있었다. 말하자면 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백인 외교관을 미워하는 아시아인 한국 민족주의자들이 죽였으니 반응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당시의 미국사회는 백인위주였고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은 무척 심했다. 더구나 이시아 사람들은 괴물이고 백인를 멸살시키려고 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코스탈 캐롤라이나 대학의 브랜돈 팔마는 “다럼 화이트 암살의 미국언론 보도”라는 제하의 논문에서 당시의 신문보도를 다섯 가지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스티븐스는 한국을 더 나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일했다. 둘째는 장과 다른 민족주의자들은 광신자들이고 야만이다. 셋째는 한국은 자신들의 힘으로 통치할 수 없는 나라이다. 넷째는 암살은 국제음모의 일면이다. 다섯째는 암살은 아시아인을 미국이민으로 받아들이지 말자는 논쟁을 당연하게 만든 사건이다. “ 또한 그는 논문의 결론에서 스티븐스의 암살은 일 년 후 이토 히로부비의 암살과 같이 일본의 한국 합방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을 일본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인들의 공식적인 기록이  “일본의 만행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의 존재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인식하게 했다.”라고 되어 있는 것과 상반된다.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는 일본을 도와 한일합방을 촉진시킨 친일파 미국인 외교관이었다. 그를 암살한 장인환과 전운영은 애국지사이며 한국민으로서는 통괘한 복수였다. 그렇지만 구한말의 부패 상과 임금의 무능, 관리와 양반의 착취로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더럼 화이트의 주장을 반박하기 힘들다. 스티븐스는 아마 "너희(대한제국 국민)들이 못난 임금 밑에서 이렇게 사느니, 일본이 나라를 다스리게 하여 좀 더 잘살아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국 언론은 두 의사를 선량하고 유능한 외교관을 죽인 야만적인 한국인 살인자로 보도했다. 


국가가 국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국민은 나라를 떠난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조국이 아무리 못났서도 미워하지 않는 다. 물론 통치자들에 대한 혐오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결코 조국을 버리지는 않는 다. 그리고 조국이 잘되기를 바라고 잘못되고 있으면 잘되게 도우려고 백방으로 애를 쓴다. 해외동포들에게 조국은 애인이나 마찬가지이다. 스티븐스는 조국을 말살하려는 일본을 도왔다. 애인을 죽이려는 자를 방조한 인물이었다. 장인환과 전운영의사의 의거는 통쾌한 복수였다. 


참고

1. 한국근대사 산책; 강준만, 인권과 사상사; 제6장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2. 한국민조문화 대백과사전; 장인환

3.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전명운

4. KCI 통합검색: American Media Coverage of the Assassination of Durham White Stevens

5. 공훈전자사료관: 장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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