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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l 17. 2021

1. 홍릉묘지기 고영근

우범선 암살범


홍릉(문화재청 )

1898년 10월 28-29일 종로네거리 광장에서 제3차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3차 만민공동회는 정부관리들이 참석하는 관민공동회였다.  여기서 헌의 6조가 채택되었다. 이 집회에 참석했던 총리대신 박정양 이하 대신들도 결의안에 서명했다. 10월 31일 고종은 헌의 6조를 받아들이고 조칙오조를 공표했다. 민중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종을 압박한 결과 1898년 11월 4일에 새로운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었다. 중추원은 법률과 칙령의 제정과 폐지 또는 개정에 관한 사항을 심사의 정하는 기관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요지음의 국회에 준하는 입법 기관이었다. 의원이라고 하지 않고 의관이라고 했다. 충추원 의관의 수는 50명으로 하고 25명은 정부가 임명하고 나머지 25명은 독립협회에서 27세 이상의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로 선거 한 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25명의 의관을 선거하여 그 명단을 보내 달라고 독립협회에 편지를 보냈다. 시민들은 환호했다. 


위협을 느낀 고종 친위 수구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1월 5일에 독립관에서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 전날인 11월 4일 수구파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공화제을 실시하여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내무대신에 이상재, 외무대신에 정교 등을 임명하여 정권을 잡으려 한다는 익명의 벽보를 내다 붙였다. 친러 수구파 조병식, 유기환, 이기동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들은 벽보의 내용을 고종에게 아뢰고 내일 박정양 등이 독립협회에 모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공화정으로 바꾸려 한다고 독립협회 개화파 인사들을 모함하였다. 


이들의 말을 믿은 고종은 대로하여 독립협회 간부 20명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날 새벽 부회장 이상재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었다. 회장 윤치호와 최정덕, 안경수는 잡히지 않았다. 물론 고종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으며  만민공동회에 참석했던 박정양 이하 진보 성양의 관료들이 해임되고 수구파 조병세, 조병식, 민영기 등이 임명되었다. 


날이 밝자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열고 사건경위 해명을 요구했다. 상인들도 이에 호응하여 철시했다. 고종은 11월 10일 체포된 17명 전원을 석방했다. 조병식과 민종목은 해임되고 유기환은 주일 공사로 이기동은 수원지방 참경으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헌의 6조 실시,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이기동 등의 처벌을 요구했다. 당시 만민공동회 시위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승만은 "만민공동회가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그때에 별의별 풍문이 나돌았다. 정부가 병정들을 보내어 우리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공동회가 해산하도록 할 것이라느니, 또는 정부가 나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회유할 것이라느니... 실제로 고영근과 김종한이 밤중에.. 나를 만나러 배재학당에 나타났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고종은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수구파를 제거할 수가 없었다. 


위협을 느낀 수구파들은 11월 14일부터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 시위대를 폭력으로 공격할 준비를 시작했다.  전국에 있는 보부상들이 서울로 속속 모여들었다. 11월 19일부터 농상공부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과천군수 길영수와 김옥균 암살범 홍종우가 이들을 지도했다. 시위의 목적은 폐지된 상무규정 인가장 재 발부였다. 고종은 특명으로 인가장을 발부했다. 특권을 되찾은 보부상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11월 21일 인화문 앞에서 만민공동회 철야 농성이 17일째 계속되고 있었다. 2000여 명의 보부상들은 몽둥이를 들고 홍종우와 길영수의 지휘아래 시위대를 습격했다. 이에 맞서서 싸우는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단상에 올라가 시위대가 동요하지 않도록 연설을 계속했다.  몽둥이를 맞아 부상자가 속출하고 도망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들어 시위대의 숫자는 더 많아졌다. 


심지어 병정들과 순검들도 제복을 벗어던지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편에 섰다. 혁명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 당황 한 고종은 독립협회의 부활과 보부상들의 단체인 상부사를 폐지하라고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개각을 단행했다. 11월 23일 만민공동회는 이틀 동안 해산 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보부상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각 지방에 서울로 올라오라는 통문을 돌려 독립협회를 공격할 사람들을 모았다.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홍종우는 11월 24일 "... 우리들이 처음에는 부상으로서 명명되었으나 지금은 의병이다... 우리들은 차라리 정부의 명령을 거스를지언정,.... 계속해서 올리오는 부상들에게 신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정부가 보부상 상경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서울로 모여들었다. 11월 25일 보부상들은 다시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시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1월 26일 아침부터 만민공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종로로 모여들었다. 고종은 오후 1시에 경운궁 돈례문 앞에서 공동회 대표 200명과 면담을 하고 독립협회의 부활 등 공동회의 요구 조건을 대체로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정부의 조치에 말참견을 불허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공동회 대표들은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오후 4시에는 보부상 대표 200명을 만나서 모호한 약속을 했다. 이들도 만족하여 해산했다.


11월 29일 고종은 50명 전원을 관선으로 하는 중추원을 만들었다. 독립협회 인사 17명, 황국협회 인사 16명, 고종 직계 17명으로 구성되었다. 2/3가 수구파였다. 이승만도 이중에 한 사람이었다. 독립협회는 왕을 옹호하는 인사가 다수인 중추원 구성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헌의 6조와 조칙 오조의 시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정부는 개혁안을 시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보부상들이 독립협회 간부를 암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12월 6일 독립협회는 다시 만민공동회를 열고 철야 농성을 시작했다. 이번 시위는 박영효 일파들의 책동이었다. 사실 독립협회 지도부는 시위를 원치 않았다. 박영효는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서로 싸우는 혼란한 정국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기획하고 있었다. 독립협회를 이끌고 있던 윤치호는 시위를 위한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12월 27일 자 그의 일기는 "투석전을 위해 배치된 70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인원을 먹이는 데 2-300냥이 소요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박영효는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1894년 갑오경장(동학란, 청일전쟁) 때 귀국했으나 1895년 7월에 다시 망명했다. 1898년 9월경에 박영효 지지파들이 시모노세키에 모여 독립협회를 지원할 목적으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10월에는 쿠데타 음모 사건에 연루된 안경수 까지 이에 합세하여 거금을 독립협회에 보낼 수 있었다. 이 돈으로 독립협회 열성 회원들이 포섭되어서 본래의 독립협회 지도부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자연히 시위는 과격해졌다. 중추원은 박영효의 소환을 권고했다. 박영효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모여드는 군중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었다. 


조병식, 민영기 등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공화제를 실시하려고 한다고 다시 주장했다. 불안해진 고종은 길영수와 홍종우에게 은밀히 보부상 패를 다시 소집하게 했다. 12월 15일, 고종은 윤치호를 한성부 판윤에 측근 김영준을 경무사로 임명했다. 두 사람 다 박영효가 조종하는 과격한 시위에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박영효가 조종하는 것도 모르고 과격한 시위를 하는 만민공동회 대표로 활동했다. 그가 김영준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새로 구성된 중추원은 인재 11명을 정부에 천거했다. 투표로 뽑힌 인물들은 민영환, 이중하, 박정양, 한규설, 윤치호, 김종한, 박영효, 서재필, 최익현, 윤용구였다.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했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지 오래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고종이 지독하게 싫어했다. 왕의 지위를 위협했던 사람들이었다. 


1898년 12월 23일 고종은 무력으로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고종이 보낸 군대와 몽둥이를 든 보수상들에게 수만군중은 뿔뿔이 헤어졌다. 고종이 독립협회 자체를 해산한 것은 아니었으나 만민공동회 해산 후  독립협회도 문을 닫았다. 


고종은 이승만을 비롯한 반정부 인사로 의심받은 4명의 중추원의관을 파면했다. 만민공동위원회와 독립협회를 앞세워 정부전복을 노렸던 박영효 일파들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도 고종폐위 음모를 포기하기 않았다. 고종을 폐위시키고 의화군을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었다. 도망자였던 이승만도 이에 연루되어 1899년 1월 9일 체포되었다. 이승만은 1월 30일 탈옥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어 죽을 목숨이었으나 재판장 홍종우가 종신형을 선고하여 살아남았다. 


중추원 의관이었던 고영근도 이승만과 같이 1899년 2월에 면직되었다. 그는 같은 해 5월에 최정덕, 현세창, 윤병길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다시 세우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고종은 보수인사들로 둘러 싸이게 되었다. 이 판국에 1899년 6월 이유인, 조병식, 홍종우, 이용익의 집에 누군가가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모두 친왕 보수 인사들이었다. 폭탄은 고영근 일파들이 박영효의 집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겁이 난 고종은 외국공사관으로 피신할 계획까지 하게 되었다. 범인을 밀고하면 500원, 체포하면 1000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고영근은 1899년 여름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한 지 4년 후인 1903년 10월 28일 그는 고종의 원수를 갚으러 우범선의 집에 나타 난다. 왜 그랬을 까?



우범선과 고영근(Steemit)

고영근은 대대로 벼슬을 했던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의탁할 때가 없어서 민영익가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는 민영익 집안일을 돌보는 겸인(하인)이었다. 민영익은 고영근을 고종과 민비에게 소개해 주었다. 고영근은 왕과 왕비에게 하루 세 번씩 문안을 드릴 정도로 충복을 보여 그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893년 8월 고영근은 종 2품인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898년 6월 30일 이기동, 홍종우, 길영수와 함께 황국협회를 설립했다. 당시에 이세 사람은 홍, 길, 동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실세였다. 1898년 7월에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영근은 곧 황국협회를 탈퇴하고 독립협회와 민민공동회에 참여했다. 이것은 완전한 친왕 보수세력에서의 이탈을 의미한다. 여러 차례 독립협회 총대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98년 11월에는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시기에 독립협회에서 선거로 뽑은 17명의 중추원 의관 중에 한 사람으로 중추원의 의관이 되었다. 만민공동회를 대표하여 5흉을 재판에 회부할 것, 대신을 가려 쓸 것, 헌의 욕조를 시행할 것 등을 골자로 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899년 1월 그는 윤치호와 만나 위기에 몰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대해서 대책을 논의하고 필요한 자금의 일부를 담당했다.


1899년 여름 보수 인사 자택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으로 쫓기는 몸이 된 고영근은 일본에 도착했다. 그가 일본에 있는 동안 본국에서는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져 있었다. 구마모토와 고베, 오사카 등을 떠돌아 다니며 지내다가 1903년 7월에 오사카 윤효정이라는 사람 집에 머물게 되었다. 


윤효정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탁지부 주사로 근무했다.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했다. 1898년 7월 9일 안경수 정변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안경수가 김재풍, 이충구와 함께 친위대 병력을 동원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황태자를 옹립하려고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미수에 그쳤던 사건이었다. 윤효정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안경수와 함께 일본에 망명 중이었다. 당시에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박영효, 우범선 등과 조일의 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새워 조선유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윤효정과 친숙하게 된 우범선은 민비시해 당시의 자신의 역할을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윤효정은 그의 진술을 포함한 우범선 암살 전후의 정황을 상세히 기록한 우범선 최후사라는 책을 남겼다. 윤효정은 우범선이 자신의 병력을 동원하여 궁을 습격했고 살해된 민비의 신원을 확인해 주었고 사후 시체를 불에 태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범선을 살해할 결심을 했다. 


 고영근은 "황태자 전하께서 밤낮으로 통곡하면서 생모의 원수를 누가 토벌해 줄 것인가 하고 한탄했는 데 나는 오늘도 그 일을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라고 하면서 조선을 떠날 때부터 우범선을 죽일 결심을 했다고 윤효정에게 털어놓았다. 그동안 우범선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윤효정을 찾아온 것도 혹시 그가 우범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까 싶어서였다. 고영근은 윤효정이 우범선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크게 고무되었다. 


윤효정은 우범선을 압록강 유역으로 유인해서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영근은 그의 계획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단독으로 현지에서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윤효정에게서 우범선이 구레시 1508번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대를 자세히 답사했다. 우범선은 타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이층에 살고 있었다. 물론 신변의 안전을 위한 경계에 세심했다. 1903년 10월 28일 그는 우범선에게 접근하여 윤효정이 당신을 살해하려고 한다고 알려 주었다. 우범선이 이사실을 일본 당국에 알려서 윤효정은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우범선이 고영근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한 계략이었다. 고영근은 이웃에 살고 싶으니 방을 구해 달라고 우범선에게 부탁했다. 그는 구레시 와쇼 마치 2079번지에 방 두 칸짜리 집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오카야마에 살고 있는 지신의 노복이었던 노윤명을 포섭했다. 1903년 11월 24일 셋집에 대한 계약을 마쳤다. 그는 우범선에게 이사턱을 내겠다고 초대했다. 우범선, 고영근, 노윤명 세 사람이 술과 식사를 하며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 고영근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일어나면서 우범선의 턱과 목을 칼로 수차레 찌르고 노윤명이 쇠망치로 그의 머리를 가격하여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날 저녁 8시 15분, 고영근과 노윤명은 인근 파출소에 자수했다. 일본 언론은 전국적으로 이 사건을 대서 특필 했다. 우범선은 열사이며 그가 살해당한 것은 비문명의 오욕이라고 했다. 그의 유해는 구레의 작은 사찰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비석을 세우고 제사 지낼 비용을 모금했는 데 민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 낭인들과 조선 망명객들을 도와주었던 부호들이 돈을 냈다.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 집안이었던 스나가 가문의 가족묘에도 우범선의 묘가 있다. 


1903년 12월 24일 일심공판에서 노윤명은 무기징역, 고영근은 사형이 언도되었다. 민 씨 집안과 대한제국 황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원수를 갚고 한을 푼 시원함이었을 것이다. 일본 당국은 사건을 고영근과 노윤명이 저지른 범행으로 축소하려 했으나 일본과 한국에서는 고종의 밀명을 수행한 암살이라는 의혹이 끝임 없이 제기되었다. 


우선 노윤명과 고영근의 주장이 판이하게 달랐다. 노윤명은 전부터 여러 번 궁녀를 통해 황태자에게 복수를 위임받았다고 진술했다. 반면에 고영근은 자신이 스스로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고 주장했다. 박영효는 일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폭탄사건도 조선의 관련자들이 거짓말로 지어낸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해 있는 우리들을 조선에 유인해서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라고 진술했다. 일본과 한국의 역사적 자료에서도 우범선 암살 사건은 한국조정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기록이 많이 있다고 한다. 


고종은 민영수와 민영환을 하야시 공사관에 보내어 선처를 부탁했다. 1904년 3월 서울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고영근의 감형을 부탁했다. 당시에 일본은 러일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전쟁 터가 될 한국과 좋은 관계를 가져야 했다. 고종의 협조가 필요했다. 항소심에서 무기로 감형되고 수감된 지 8년 후인 1911년에 석방되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방된 후였다. 


고종은 1919년에 사망했다. 홍릉에 있는 명성황후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고영근은 이 묘지의 능참봉이 되어 옛 군주를 모셨다. 이 홍능에는 비석이 없었다, 세워질 비석은 방치되었다. 비석에 원하는 글자를 새겨 넣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성태황후와 고종태황제라고 써넣어야 했는 데 조선총독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922년 고영근은 이 글자를 새겨 넣고 합장을 의미하는 부좌를 추가하여 비석을 세웠다. 


조선총독부는 황제라는 말을 못 쓰게 하고 이태왕이라고 했다. 대한이라는 말도 금어였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제국 황족에 관련된 사무를 보기 위해서 총독부는 이왕직이라는 부서를 운영했다. 이왕직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고영근의 범법행위에 대해서 논의했다. 물론 비석을 다시 뉘어 놓기로 전원 합의 했다. 고영근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홍릉에는 새로 세워진 비석을 보기 위해서 매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급기야 총독부

는 비석에 붉은 포장을 씌워 보이지 않게 해 버렸다. 


1월 23일 본국과 상의를 거듭한 후 사이토 총독은 고영근이 세운 비석을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1919년 3.1 운동 덕분이었다. 3.1 운동 이전의 무단정치가 1920년부터는 유화적인 문화 정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15일 총독부는 고영근을 능참봉직에서 해임했다. 그렇지만 고영근은 고종과 명성황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근처 숲 속에 초가집을 짓고 홍릉을 바라보며 농비를 세운 지 일 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였다. 


하루 세 번 문안드리던 왕과 왕비가 아니었던가? 고영근은 그들의 원수를 갚아 주고 묘를 보살피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왕이 올바른 길을 가기를 원했다. 그가 왕의 지위를 위협하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 한 이유는 왕을 배반한 것이 아니고 진심 어린 충정에서 나온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는 충신이었다.


참고

1. https://youtu.be/epp9 sqA5 dyY


2. 한국근대사 산책 3권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제5장 만만공동회의 도전, 6장 만민공동회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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