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표지기사
<조선 왕비 암살(L'ASSASSINAT DE LA REINE DE CORÉE)>
야마구치현은 혼슈의 서쪽 끝에 있고 구마모토현은 규슈의 중앙부에 있다. 민비는 이지방 출신의 일본인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일본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의 서쪽 끝과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는 일본 우파들의 고향이다. 무서울 정도로 전통을 지키는 일본 사람들의 면모를 보이는 지방이기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는 사무라이들도 이곳 출신들이다. 임진왜란, 명치유신, 일본제국, 조선 강점, 태평양전쟁, 현재의 정권 모두 이 사람들의 작품이다.
민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일정한 주거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낭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그들은 무식한 불한당이 아니었다. 동경제대등 일류대학 츨신의 엘리트 들이었다. 말하자면 에도시대의 사무라이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사무라이는 조선의 선비에 해당하는 지배계급이었다. 일본에도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도가 있었으나 조선은 사가 선비였고 일본은 무사였다. 사무라이는 조선의 양반에 해당한다. 이들은 번주(영주)로부터 봉록을 받아먹고 살아왔다. 그러나 에도막부 말기부터 명치유신을 거치면서 영주에 속하지 않는 사무라이가 많아졌다. 그들은 일정한 주거지 없이 떠도라다니면서 청부살인 같은 일을 하며 살았다. 근대화되면서 신분제도 자체가 없어졌고 근대식군대 가 이들을 다 흡수할 수는 없었다. 엘리트 젊은이들 중에 사무라이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국가에 충성하려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 생겨 났다. 이들이 민비 피살에 동원된 낭인들이다.
무능한 고종과 간교한 민비는 부정부패의 근원이었다. 부패는 피폐한 백성들의 삶과 망해가는 나라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민비 제거의 대의명분이 되고도 남았다. 대원군파와 개화파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서 민비제거를 추진했겠지만 이에 동조한 조선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는 고종과 민비가 망국의 원인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비 피살사건을 다루는 글들은 민비의 비행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고 있다. 아마 결론을 "일본사람들에게 당한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일 것이다.
삼국간섭 이후 민비는 러시아와 접근하여 고종과 자신의 입지를 억압하는 일본세력을 배척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친일파인 개화파를 집권시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민비는 이러한 일본의 목적을 방해하는 존재였다. 조선 조정안에서 민비의 천적인 대원군과 민비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개화파가 민비를 제거하자고 하는 마당에 일본이 마다 할리가 없었다.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 투쟁의 마지막 장은 대원군, 개화파 그리고 일본이 한편이 되고 민비가 홀로 서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피살작전의 지휘권은 일본 측이 가지고 있었지만 대원군과 개화파가 피살작전의 타당성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작전에 직접 참여했다.
민비는 우유부단한 고종을 보호하여 자신의 영달을 유지하려고 가진 애를 썼고 대원군은 민비를 제거하여 고종을 상왕으로 만들어 무력화시키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여 권력의 중심에 복귀하려고 온갖 간계를 총 동원 했다. 동학군과 청나라의 힘을 빌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과 개화파는 그와 같이 민비를 제거하려 했다.
대원군이 군국기무처를 운용하고 있을 때 군국기무처에 자기 파인 박준양, 이태용, 이원경을 기용했다. 한편 손자 이준용은 유길준을 포섭해서 자기편 사람으로 만들었다. 유길준은 민비를 제거해야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친일 급진 개화파(일본파) 사람들과 대원군 파는 점점 멀어졌다. 대원군파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서 일본 파는 민비와 고종에게 일시적으로 가까워 졌고 민비 또한 그들과 협력하는 것이 유리했다. 민비가 박영효에게 관복과 저택을 하사 하던 시기였다. 물론 일본파 박영효는 유길준이 대원군과 가까워진 것을 한동안 모르고 있었다.
겉으로는 박영효와 가까워지는 척하면서 민비는 개화당을 모두 제거하려 했다. 1894년 가을 이 계획이 대원군의 정보망에 걸렸다. 그는 일본공사 오카모토를 만나서 이일에 대해서 협의했다. 이때 민비 제거를 위해서 일본 측에 도움을 요청했다(유길준 진술). 적어도 민비 피살 일 년 전에 대원군은 일본 측에 민비를 살해할 용의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는 증거이다.
이준용과 대원군은 일본 영사관에 자주 드나들면서 패륜인 민비를 살해하자고 요청했으나 일본은 당장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준용은 러시아, 영국, 청국 영사관을 드나들며 이들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삼국간섭 이후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정국은 완전히 정리되었다. 이 무렵 이준용은 개화파인 김학우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강화로 유배되었고 대원군은 공덕리 별장에 가택 연금 되었다. 일단은 급진 개화파(일본당)가 대원군파를 축출했다. 그러나 민비의 친러 정책으로 그들도 정동파에게 밀려 날 운명이었다. 박영효가 민비를 제거하려던 시기이다. 개화파도 일본도 대원군도 민비를 제거해야 했다. 공덕리 별장에 일본영사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이유이다. 아마 유길준 등 민비제거에 가담했던 조선사람들도 공덕리와 일본공사관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1895년 7월 8일, 박영효가 민비살해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의 실권이 민비와 친러파에 넘어가고 일본과 급진개화파가 조선 조정에서 완전히 축출되었음을 의미했다. 일본으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애써 대국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 놓으니 러시아가 조선을 가로채는 형국이 되어 갔다.
박영효 망명에 크게 자극을 받은 일본정부와 군부는 민비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필요한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협의차 일본에 있던 조선주제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1895년 7월 10일(박영효 사건 이틀 후), 자신의 후임으로 군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추천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는 민비를 회유해서 일본 편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극우파 군인 출신인 미우라를 앞세워 무력으로 민미를 다스리기로 결정했다. 추천 후 이노우에는 일단 조선에 귀국했다.
귀국한 이노우에는 고종을 예방하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할 것을 약속하고 고종에게 9천 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했다. 당시 내각에서 논의 중이던 차관을 조선에 제공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박영효 사건 전에는 조선에게 차관을 제공하는 대가로 조선이 친일정책을 유지하게 하는 회유책을 고려 중이었으나 박영효 망명 후에는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이노우에 고무라는 자신의 딸을 고종과 민비의 양녀로 삼게 하였다. 그녀는 민비가 죽은 후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매천야록). 모두가 고종과 민비를 안심시켜서 방비를 소홀이 하게 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1895년 9월 1일 미우라 고로가 조선주재 일본공사로 부임했다. 육군 중장 출신인 그는 일본 우익 군인 세력의 거두였다. 부임한 후로 일체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염불만 하면서 소일했다. 염불공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조선조정을 안심 시 키위 한 위장 전술이었다.
1895년 10월 3일 일본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미우라 고로 공사 보좌관 시바로 주제로 민비시해에 관한 비밀회의가 열렸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과 하바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그는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낭인 단체인 천우협 그리고 현양사 소속 낭인들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민비살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등서기관 스키무라 폼재기,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영사관보 호리쿠치 구마이치, 공사관 무관 구스 노세 유키히코가 참석했다. 이중 오카모토는 대원군과 친분이 두터 웠다.
회의 결정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시해의 범행은 일본낭인이 맡고 외관상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2.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공사관 순사들이다. 낭인자객들의 동원은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가 맡는 다. 3. 일본수비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공사관 소관이다. 4.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한다. 작전 명은 "여우사냥"이었다.
1895년 10월 4일, 친일파 농상부 대신 김가진이 친러파 이범진으로 경질되고 유길준이 내 무협판자리에서 의주부 관찰사로 쫓겨났다. 이로써 조정에는 한 사람의 친일파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895년 10월 6일, 일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공덕리 별장을 방문했다. 대원군과 마주 앉은 그는 4개 항으로 된 각서를 드리 밀었다. 민비를 제거한 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대원군은 장남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이 배석한 자리에서 각서에 서명했다. 민비는 우리가 처리해 줄 테니 당신은 우리가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사실상 일본 측과 대원군은 이렇게 민비살해에 동의했다.
1895년 10월 7일 새벽 2시(10월 8일 02로 짐작), 조선정부는 훈련대 해산 명령을 내렸다. 훈련대는 친일파 군대였다. 일본세력을 몰아내는 수순의 일부였다. 훈련대장은 우범선이었다. 오전 9시에 군부대신 안경수가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에게 알리고 우범선도 곧이어 보고 했다. 미우라는 그날 저녁에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불러들였다.
미우라는 거사 계획서를 영사관보 호리쿠치 구마이치에게 주고 용산으로 가서 거사 준비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한성신보 직원, 낭인들, 순사들이 용산에 속속 모여들었다. 한편 대원군 별장 공덕리에는 아시야마 지휘하에 군부협판 이주희가 규합한 조선인 수명, 공사관 직원, 고문관, 순사등 약 60명이 모였다.
10월 8일 자정쯤, 낭인들이 공덕리 별장에 도착하여 담장을 넘었다. 별장 경비병들을 모두 포박하고 그들의 옷을 벗겨 일본인 순사들이 조선인 군사로 변장하였다. 잠에서 깬 대원군이 집 밖을 좀처럼 나서지 않으려 하여 실랑이를 벌이면서 시간이 지연되었다. 대원군은 "민 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의 고유문을 자신이 직접 써서 한성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하고 경복궁을 향해 출발했다. 대원군 일행이 공덕리를 나선 것은 새벽 3시경이었다.
그들이 서대문에 이르렀을 때 우범선의 훈련대 제2대 대대와 합류했다. 일본 수비대 제1대대가 서대문으로 오기로 했는 데 엉뚱한 곳으로 가서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느라고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대원군 일행이 경복궁으로 오는 동안 궁은 일본군 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에 의해서 포위되었다. 이사실을 보고 받은 고종은 이범진에게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급히 가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 했다. 그가 미국공사관에 도착했을 무렵 대궐 쪽에서 총성이 울 렸다. 오전 4시 30분경 광화문을 지키던 군사와 일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5시경에 대원군이 도착하자 일본순사들이 담을 넘어 광화문 빗장이 열렸다.
궁내로 들어온 일본군 폭도들과 궁 경비병사사이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경비병들은 무기와 군복을 벗어던지고 도망치기에 급급 했다. 미국 지휘관 윌리엄 다이가 지휘하는 500명의 경비대도 폭도들에게 쉽게 무너 졌다. 폭도들은 광화문뿐만 아니라 춘생문, 추성문으로 칩입해 들어왔다.
폭도들이 혈안이 되어 민비를 찾는 동안 대원군은 근정전 뒤 강녕전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훈련대 군인들은 건청전 앞마당에서 쉬며 민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법무 협판 권재형의 보고서에 따르면 서 있는 고종 앞에서 "폭도들은 칼을 휘두르며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고종의 어깨에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덜미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라고 한다.
폭도들은 건청궁 동쪽 곤녕합 옥호루에서 황후를 발견했다. 민비는 이들의 칼에 맞아 절명했다. 10월 8일 오전 5시 50분과 6시 사이였다. 민비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 낭인의 칼에 맞아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날 아침 8시 고종은 일의 내막을 묻기 위해서 일본공사 미우라를 호출했다. 미국과 러시아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들어왔다. 미우라는 서기관 스기무라와 통역관을 대동했다. 흥선대원군도 고종 옆에 앉았다. 이 자리에서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게 했다. 친 민비 정동파(미, 친러파) 인사들이 모두 경질되었다. 대신 친일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서광범은 법부대신, 유길준은 내무대신에 임명되었다.
김학우 암살사건으로 강화에 유폐되었던 손자 이준용이 일본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고종의 형 이재면은 궁내부 대신이 되었다. 대원군이 민비 살해에 협조한 일본 측의 보답이었다.
1985년 10월 10일, 고종은 민비를 왕비에서 폐한다는 조칙을 발표하였다. 왕비가 죽었다고 하지 않고 "옛날 임오 때와 마찬가지로 짐을 떠나 피난했다. 친지를 좌우에 포진하여 왕의 총명을 막고 인민을 착취하여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의 죄를 지었다"라고 폐비의 이유를 밝혔다. 유길준이 생각하는 민비의 상이 었다. 이 조칙에 서명한 대신들은 김홍집, 김윤식, 조희연, 서광범, 정병하 등이었다. 탁지부 대신 심상훈은 서명을 거부하고 낙향했다.
1895년 12월 1일 김홍집 내각은 왕비시해 사실과 국상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주희, 박선, 윤석우 3명을 주동자로 체포하여 처형했다. 조선인 가담자인 조희연, 권형진, 우범선, 이두황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유길준은 개혁의 선봉에 섰다. 단발령을 내렸다. 상투를 자르는 일은 천륜을 어기는 행위였다. 백성들은 이것을 일본이 강제로 시키는 일로 받아들였다. 어느덧 조선의 정국은 친일파 유길준과 위정척사파 최익현의 대결로 번저 갔다. 대세는 항일 반개혁이었다. 대원군도 일본도 개화파도 민비 살해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건 당시 대원군의 나이 76세였다. 1895년 말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사실상 가택연금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공덕리 별장에 머물다가 1898년 1월 부인 민 씨가 사망한 후 2월에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에서 생애를 마쳤다.
고종은 아내를 살해한 아버지를 임종하지도 않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896년 2월 2일, 일본군사와 친일 개화파에게 둘러 싸여 공포에 떨던 고종은 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오자마자 반민비세력으로 지목되었던 총리대신 김홍집, 내무대신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 법부대신 장박을 처형하라고 명 했다.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는 거리에서 무참히 피살되었다. 이들은 민중의 원수였다. 유길준, 장박,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참고
1. 한국 근대사 산책 2권; 강준만; 인권 사상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P. 294-311
2. 위키백과: 을미사변
3. 위키백과: 대원군
4. 위키백과: 유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