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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n 11. 2021

삼국간섭과 박영효 민비 암살 미수

민비의 친러 정책



시모노세키 조약

급진개화파의 두목 격이었던 김옥균은 1894년 3월 28일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되었다. 동학란이 시작되던 때였고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조금 전이었다. 청일전쟁의 초기에 일본은 청의 손아귀에 있었던 한양과 조선조정을 점령하고 개혁을 실시했으니 이것이 갑오경장이었다. 일본은 급진개화파들을 앞세워 일본이 원하는 개혁을 하게 했다. 1894년 갑오년은 동학란,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이 돼 얽혀 쏟아내는 브레이킹 뉴스로 꽉 찬 해였다. 이 와중에 민비, 급진개화파, 정동파, 대원군이 외세와 결탁하여 만들어내는 권력 쟁탈전은 스릴만점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엉망진창이 된 백성들의 삶과 망국이었다. 


10년 전, 1884년 급진개화파들은 쿠데타(갑신정변)를 일으켜 민 씨 척족과 친청세력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일본의 명치유신과 같은 개혁을 하려고 했다. 청의 개입으로 쿠데타는 실패했고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고종은 이들 본국 송환을 일본정부에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보호했다. 김옥균은 일본에 오래 있다가 암살범의 꾐에 빠져 상해로 가서 사살되었다. 김옥균의 머리는 효수되었고 신체 각 부분이 전국에 분배되어 거리에 전시되었다. 고종과 민비의 개화파에 대한 깊은 원한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10년 후 1894년 여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일본은 개화파를 다시 불러들였다. 권력은 개화파에게 넘어갔고 고종과 민비는 이들에게 발목이 잡혀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민비는 평소에 가까웠던 러시아 공사와 긴밀하게 연락하여 개회파를 모두 제거할 계획을 세우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어 실패했다. 결국 개화파는 대원군과 이준용뿐만 아니라 민비에게서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일본은 갑신정변 혁명 주체세력이었던 급진개화파 인사들을 복권시켜 등용하게 했다. 잡혔으면 목이 잘려 효시되었을 뻔했던 그들은 10년 만에 모두 무죄가 되었다. 1894년 12월 17일 박영효는 내무대신, 서광범은 법무대신이 되었다. 이주희, 우범선, 이규환, 정란교, 이혁로, 신응희 등 박영효 추종 세력이 군부와 경무청에 배치되었다.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 내각이었다. 대원군은 조정에서 이미 축출되었고 그가 피겨 헤드였던 군국기무처가 해체되고 근대식 내각이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일본이 대원군을 조정에서 몰아낸 정황은 민비로 하여금 개화파와 일본을 적대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민비는 박영효에게 관복을 지어 보내고  대저택까지 하사 했다. 


그러나 박영효는 일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서구식의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로우에게는 믿었던 박영효가 골칫거리가 되어 갔다. 


1895년 3월 20일,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의 중재로 시모노세키에서 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만나서 강화회담이 시작되었다. 4월 17일에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는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 돼있으나 조선의 주인이 청에서 일본으로 바뀌는 조약이었다. 


그러나 개화파는 조선의 독립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청나라로부터 조선이 독립하는 것은 그들의 숙원이었다. 일 년 후인 1896년 6월 20일 독립신문 논설은 개화파가 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조선을 포기하게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 하나님이 조선을 불쌍이 여기시어 일본과 청국이 싸우게 된 까닭에 조선이 독립국이 돼야... 조선인민도 세계 각국인민과 동등히 되었는 지라 이 일을 비교하여 볼진대 남의 종이 되었다가 종 문서를 물은 셈이니.... 500여 년 제일 되는 경사라."(조선근대사 산책에서)


개화파는 작은 나라 일본이 거대한 청나라를 이긴 것을 경탄하였고 조선이 살길은 일본식 개혁이라는 것에 대한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삼국간섭


시모노세키 조약은 청이 조선에서 손을 떼는 것 외에도 랴오동(요동) 반도, 타이완, 펑후 열도를 일본에게 넘겨주고 2억 량의 배상금을 7년에 걸쳐서 지불하며 사스, 충칭, 수쩌우, 항저우를 개항하고 구미열강과 동등한 특권을 일본에게도 줄 것을 약속했다. 일본에게는 대단한 성과였다. 겨우 13,000여 명의 사상자만 내고 일부 군수물자와 전비를 조선에 부담시키고 온 세상의 예상을 뒤엎고 청을 굴복시켜서 얻은 결과였다. 일본은 대륙 침략의 통로인 조선을 장악했고 베이징이 지척인 텐진 항을 넘겨다 보는 요동반도를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 역사상 초유의 경사도 겨우 일주일을 가지 못 했다. 1895년 4월 23일, 러시아가 주동이 되어 독일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이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넘겨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하며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절차상으로는 러시아가 주동자인 것처럼 보이나 이 사건(삼국간섭; Tripple Intervention)의 입안자는 독일의 빌헤름 3세(William III, Kaiser)였다. 독일은 극동에 해군기지를 가지기를 원 했다. 독일은 1850년 경부터 일본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894년 10월,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 미국 그리고 독일에게 청일전쟁 휴전을 제안했다. 코리아의 독립을 보장하고 일본에게 전쟁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독일은 영국의 제안을 거부했다. 독일은 일본과 잘 지내는 것이 전후에 극동에 해군기지를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일본이 청에게 과도한 영토 양보를 요구하지 않고 전쟁을 끝내기를 원 했다. 독일이나 서양 열강들은 청을 돕는 척하여 일본이 독식하는 것을 막고 도와주었다는 명목으로 청으로부터 이권을 따 내려는 심산이었다. 독일은 1895년 3월에 유럽 열강이 간섭할 가능성이 많으니 과도한 요구를 삼가라는 경고 쪼의 서한을 보냈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 일본은 강경파인 군부와 민간 정부 간에 강경 온건으로 갈라져 토의하다가 강경파의 의견대로 청에게 마음껏 영토 할애와 전쟁 보상을 요구하게 되었고 청은 할 수 없이 이 요구에 응 했다. 


독일은 동쪽 경계와 발칸반도 문제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었다. 월헤름 3세는 러시아가 극동에 신경을 쓰게 하여 유럽에서의 정세를 독일에 이롭게 하고자 러시아를 부추겨 삼국간섭을 하게 했다. 카이저(별명)는 동양인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 한 인물이었다(Yellow Peril). 러시아가 극동에 뛰어들어 흉측한 동양인을 처리해 줄 것을 원하기도 했다. (The Triple Intrvention. Japan's Lesson in the Diplomacy of Imperalism by Frank W. Ikle) 한편 러시아는 부동항을 원했고 트랜스 사이베리안 철도를 요동반도의 항구(포트 아터)와 연결하면 만사형통이었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우리말을 안 들으면 너희들은 우리 삼국과 전쟁을 해야 하는 데 일본은 도저히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실이었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일본정부와 일본사람들은 와신상담이란 말을 마음속에 다지며 일치단결하여 전쟁준비에 돌입했다. 


박영효 민비 암살 미수 사건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청에게 반환하자 제일 기뻐한 사람은 민비였다. 한때 무려 40명의 민 씨가 경복궁에 관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래 조정은 개화파 일색이었다. 일본의 힘으로 복권된 박영효였지만 그는 일본공사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하고 있었다. 일본세력의 약화는 우선 그의 입지를 넓혀 주었다. 


그동안 민비는 미국과 유럽의 외교관, 선교사들과 정동구락부라는 모임을 통해서 교류하고 있었다. 이 모임에는 개화파와 일본세력에 반대하고 구미국가에게 기대려는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를 정동 파라고 하고 친 민비 반개화파 세력이 되었다. 


박영효는 일본 측의 요구를 고분고분 들어주었던 총리대신 김홍집과 군부대신 조희연을 축출했다. 1895년 5월 28일, 박영효가 임시총리대신직을 수행하다가 6월 2일에 박정양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하여 박영효와 박정양 연립내각이 형성되었다. 박정양은 정동 파였다. 이외에도 이완용, 이채연, 윤치호, 이하영 등 친민비 정동파가 내각에 등용되었다. 


박영효와 개화파는 민비와 정동파의 제거 대상이 되어 갔다. 일본의 말도 잘 듣지 않는 그는 외톨이가 되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1895년 7월 그는 민비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 공사에게 병력 요청을 했다. 평소에 친했던 유길준에게 이 계획을 은밀하게 알려 주었다. 박영효는 흥선대원군 일파가 민비 암살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 에 유길준도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으나,  그가 밀고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 밖에 유길준은 고종에게 이사실을 고 했다. 고종은 궁궐 방비 강화와 개화파 인사들의 동태를 세심하게 살필 것을 명 했다. 


7월 5일 신응회, 이규환, 우범선은 박영효와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은밀히 거사 계획을 상의했다. (아마 고종이 일본인 사사키를 밀정으로 이 배에 타게 하지 않았을까?) 다음날 7월 6일 왕궁 수비교체를 구실 삼아 일을 벌이기로 했다. 그런데 일본인 사사키가 거사 내용을 필담으로 수첩에 적어 한재익에게 건네어주었다. 그는 이 수첩을 특진관 심상훈에게 주었고 7월 6일 심상훈은 고종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고종은 박영효에게 밀려난 전 총리대신 김홍집을 불러들여 박영효 일파 체포령을 내리는 한편 경무사 이윤용에게 박영효를 미밀리에 잡아들이라고 명 했다. 이윤용의 집과 박영효의 집은 담장 하나를 두고 갈라져 있었다. 이윤용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집으로 가서 담장 너머로 박영효를 불러 냈다. 그리고 체포령이 내렸으니 빨리 도망가라고 알려 주었다. (위키 백과에서)


이윤용은 그다음 날 7월 7일 경무청 경관들에게 박영효를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즉각 박영효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박영효는 이미 한강을 통행하는 증기선에 타고 행주산성을 지나 인천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신응회와 이규완 등도 박영효와 같이 일본으로 도주했다. 


유길준은 왜 박영효의 민비 암살 음모를 고종에게 밀고했을 까?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하여 궁금증을 달래 볼까 한다. 


유길준은 이준용과 대원군에게 포섭된 개화파 인사였다. 한편 박영효 주도로 추진되었던 갑오개혁은 유길준의 개혁안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박영효가 유길준을 의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둘 다 민비를 살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민비는 박영효의 손에 죽느냐 아니면 대원군(유길준)의 손에 죽느냐의 기로에 선 상황이었다. 박영효가 유길준을 만나서 민비 살해 계획을 실토했을 때 유길준은 무슨 생각을 했을 까?


"저 놈이 민비를 죽이면 권력은 저놈 손에 넘어갈 것이고 권력을 잡으면 대원군 파를 숙청을 할 것이 뻔한 데...., 이거 안되겠 구먼...." 했을 것이다. 대원군 파는 개화파를 제거하려 했고 권력을 잡은 개화파는 대원군 파를 잡아들이고 있었다(김학우 암살과 이준용 체포, 대원군과 전봉준 참조).


유길준이 살길은 박영효가 민비를 죽이지 못하게 하고 대원군이 민비를 살해하게 하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무정한 것이다. 


참고

1.한국 근대사 산책 2권;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P.234-237, P.285-295

2.위키백과: 명성황후 암살미수 사건

3.위키백과: 유길준

4.위키백과: 김학우 

5.위키백과: 동학농민운동; 개화파 제거기도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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