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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y 06. 2021

대원군 쿠데타 실패

위정척사파와 이재선 역모사건


m.blog.naver.com 이재선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양문명의 물결은 노도와 같이 동양을 덮쳤다. 유교 중심의 문화가 뿌리 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청나라에서는 양무운동이 전개되고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 일어났다. 유교적인 관습을 버리고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개화라고 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조선 정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1866년 여름 제너럴 샤먼호 사건으로 유명한 평양감사 박규수는 조선 개화파의 선구자이다. 그는 많은 양반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개화 바람은 조선 정계를 친일 급진 개화파, 친청 중도 개화파, 그리고 위정척사파로 갈라놓았다. 종래에 없었던 새로운 당파였다. 동인, 서인,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은 옛날이야기가 되어 갔다. 기득권 층이었던 양반은 개화에 반대해서 똘똘 뭉쳤다. 이를 위정척사파라고 한다. 전통적인 유교는 옳은 것이고 외국 문물은 그른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을 위하고 그른 것을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상공업은 군자가 하는 짓이 아니다. 돈을 벌려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도덕과 윤리를 공부하는 문이 항상 싸우는 무 보다 더 고귀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부국강병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상공업을 중요시하는 개화는 분명히 사농공상의 질서를 위협했기 때문에 사대부의 기득권을 없애려는 수작이었다. 


고종은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버리고 개방을 원칙으로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반 대원군 세력을 모아 친정을 얻어 낸 그는 거의 대부분의 대원군이 하던 일을 뒤집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875년 4월 운양호와 군함 3척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서 함포 사격을 했다. 1875년 9월 20일 운양호가 강화도 초지진에 출현하여 조선인 35명을 사살하고 16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일본 병사는 한 명이 전사하고 또 한 명이 부상 당 하는 데 그쳤다. 1876년 1월 15일 군함 8척이 부산에 출현하여 함포 사격, 시가행진 등 미국이 일본 에도 앞바다에서 행 했던 페리호 사건을 일본이 부산에서 재현했다. 1876년 2월 4일 일본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타가가 8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나타나 더니 2월 10일 강화부에 상륙하여 2월 11일부터 병자수호조약(강화도 조약) 담판을 시작했다. 국제조약이 무엇 인지도 모르는 조선 대표 신헌은 역사상 유례없는 불평등 조약에 1876년 2월 27일 서명했다. 조선 근대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최익현 등 유생들은 반대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대원군 축출에 고종과 민비에게 협조했던 유학자들은 고종과 민비가 추진하는 개화 개방 정책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대원군의 쇄국에 동의하게 되었다. 


민승호가 폭사한 후 민영익이 민치록(민비의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개화파들은 민영익을 통해서 고종과 접촉할 수 있었다.  유교를 숭상하는 보수 수구 세력은 점점 밀려나고 개화파가 정계를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1880년 8월 김홍집은  수신사로 일행 58명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김홍집은 일본에서 개화승 이동인을 만나고 민영익은 이동인을 고종에게 소개해 주었다. 고종은 이동인을 자신의 밀사로 이용했다. 이동인은 개화파 인사들을 후쿠자와 유키치에게도 소개해 주었다. 후쿠자와 유기 치는 개화파의 대부처럼 행동했고 갑신정변을 배후에서 조종했다. 


김홍집은 일본에서 황준헌을 만난다. 그는 주일 청공사 하여 장의 참판(서기관)이었다. 그는 김홍집에게 조선책략론이라는 책을 주었다. 이 복잡한 시기에 조선이 취할 외교적인 책략은 친중, 결일, 연미 해야 한다는 것이 책 내용의 요점이었다. 중국이 러시아와 국경분쟁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 시기에 조선을 설득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 보려는 청의 계산이었다. 아무튼 조선은 일본은 물론 미국과도 통상 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청의 충고였다.  


조선책략론의 내용이 조선 전역에 퍼졌다. 유림들은 결사 반대 했다. 1881년 봄 영남 유생 이만손과 강진규 등 일만여 명이 개화정책을 규탄하고 위정척사를 요구하는 만인소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이들을 유배시켰다. 1881년 가을에는 유생 수백 명이 대궐 앞에서 북한 상소 운동을 벌였다. 유생 홍 재학은 고종을 배우지 못하고 무식해서 개화 정책을 추진한다고 비난했다. 고종은 그를 사형에 처했다. 


고종은 과격한 상소를 올리는 위정척사파 유림들을 의금부 투옥 후 형문과 참수형, 사약을 내리는 등 중벌을 가 했다. 이에 분노한 위정 척사파 유림들은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쿠데타를 모의하기 시작했다. 홍재학과 함께 복합 상소운동을 하던 강달선은 이재선을 포섭해서 대원군의 협조를 받아 고종을 폐위시키려고 했다.  이재선은 대원군의 서장자이다. 이재선의 모친은 기생이었다. 한편 대원군은 위정척사파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다가 그들의 힘을 빌려서 재 집권 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881년 7월 강달선은 이재선과 여러 번 만나서 시국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편 운현궁의 대원군 사람들은 인기영, 권정호 등을 중심으로 반 고종 세력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7월 어느 날 강달선은 고종이 일본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으니 우리가 직접 나서서 왜(일본 사람)를  몰아내자고 제안했다. 서대문 밖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종을 폐위시키는 데 필요한 군사를 일으키는 명분이었다. 좀 아둔하기는 했지만 이재선은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는 거사라는 것쯤은 알아차렸다. 

이재선의 동의를 얻은 강달선은 안기영, 권정호 등 대원군 측근을 포섭했다. 이재선도 자신의 측근을 포섭했다. 그럴 때마다 "큰사람의 뜻도 이와 같다"는 말을 부연했다. 큰 사람은 아버지 흥선을 의미한다. 아마 이재선은 일본공사관 공격 계획을 흥선에게 알려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재선, 강달선, 안기영은 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구체적인 쿠데타 계획을 완성했다. 1881년 8월 21일 경기지방 과거 시험을 이용해서 거사하기로 했다. 이때 모인 수천 명의 유생을 선동하고 쿠데타 군 1000명을 모집하여 500명은 유생들과 함께 일본공사관을 공격하고 나머지 500명은 유생들과 함께 고종을 납치한다는 계획이었다. 흥선은 주모자들을 수시로 만나 진행과정을 보고 받았다. 


거사를 하루 앞둔 8월 20일 밤 이재선, 강달선, 안기영 등이 최종 점검을 하기 위해서 한자리에 모였다. 예정했던 거사자금과 군사 천명이 거의 모집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유생들 만으로 거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대원군에게 보고 했다. 대원군은 강달선을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대원군은 군사 모집을 하지 못한 강달선을 체포했다. 체포 이유는 금품을 갈취하려고 사람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원군은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 빠져 나갈 구실을 만들어 놓았다. 물론 8월 21일 쿠데타는 실현되지 않았다. 


강달선을 제외한 이재선, 안기영, 권정호, 이철구 등 대원군 측근은 쿠데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진했다. 그들은 300명 정도의 군사를 모아 강화도를 점령하고 강화도 군사를 동원하여 한양을 기습 공격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8월 2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군사를 모을 자금이 모여지지 않았다. 거금 일만 냥을 모아야 했다. 그리고 거사일을 9월 13일로 연기했다. 그리고 한참 잠잠했다. 


8월 28일 광주산성의 장교 이선풍이 의금부에 자수하여 거사의 전모가 들어 났다. 8월 29일 이재선을 비롯한 관련자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9월 3일에는 광주산성의 장교들이 의금부에 자수했다. 이윤용은 입궐하여 고종과 민비에게 직접 고변하였다. 9월 13일 권정호, 안기영 등 30명은 능지처참 당했다. 이재선은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0월 28일 사약을 받았다. 대원군은 임금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참고

1. 한국 근대사 산책 1권; 강준만 지음, 인물사상사: 제5장 개화파의 등장 

2. 위키백과; 이재선 추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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