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의 쿠데타 갑신정변
청나라 군대 덕분에 대원군과 위정척사파를 몰아내고 고종과 민비는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1882년 임오군란).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고종은 청의 간섭에 시달려야 했다. 청나라는 용산에 원세개(위안스카이)를 수장으로 군대 3000명을 주둔시키고 조정에 묄렌도르프와 마건충을 파견하여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확인하듯 식민지 지배에 가까운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임오군란 동안에 민중의 지탄을 받은 일본은 아직 청과 정면 충돌할 자신이 없었다. 공사관이 난병의 습격을 받자 비밀 유지를 위해서 공사관 건물을 불태우고 본국으로 철수했던 그들은 제물포 조약을 맺어 보상을 받고 공사관 보호를 이유로 소규모의 군대를 주준 시키는 선에서 끝내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히 조선 조정은 반 대원군이기 때문에 쇄국이 아닌 개방이고 청나라의 압력 때문에 친청이요 반일 기조로 되어 갔다. 그러나 고종은 청의 압박에서 벗어나 보려고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교류를 확장하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다. 이 와중에 득세하는 인사들은 친청 온건 개화파였다. 서양에서는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고 도덕윤리는 전통적인 동양의 유교를 유지하자는 주장이었다. 당시에 청나라에서 추진하던 양무운동과 근본적으로 같은 기조였다. 따라서 청에 대한 사대를 계속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청에 영선사로 파견되어 고종과 민비 복권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윤식과 어윤중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종은 임오군란 후 개화윤음을 발표하여 세계열강과 교류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위적척사파들의 개화 개방 반대로 비밀리에 체결했던 외국과의 통상 조약을 전면적으로 공개했다. 청은 어느 한나라가 조선에게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조선에게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을 것을 장려하는 입장이었다. 여러 나라가 서로 견제하게 하여 청의 조선 장악을 유지하려는 정략이었다.
1882년 8월 고종은 박영효를 대표로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조선이 일본에 수신사를 보내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건국 이래 조선은 명과 청에 조공을 받쳐 왔지만 임오군란 이후처럼 직접 내정을 간섭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위협한 적은 없었다. 고종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보려고 수신사를 일본에 보내어 각국 공사들을 만나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중지시켜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공적인 목적은 일본정부에게 임오군란동안 일본공사관과 일본인에게 준 피해에 대한 사과였다.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민영익 등은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난다. 후쿠자와는 이들에게 조선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개혁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선이 청나라에 예속되어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지 않는 유교적인 사상에 억 매어 있기 때문에 망해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메이지 유신처럼 서양의 사상과 기술 모두를 받아들여서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후쿠자와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조선의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서양문명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개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자신들을 개화당 또는 독립당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으로 융성하고 있는 일본을 보고 우리 조선은 언제 저렇게 될꼬 하고 탄식했다. 일본 사람들은 일치 단결하여 나라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젊은 혈기에 마음이 알마나 조급 했을까 가히 짐작이 간다.
이후에 급진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와 결별하게 된다. 급진 개화파들은 이들을 수구당 또는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은 친청파와 친일파의 싸움이었다. 친청 온건 개화파(사대당)는 고종과 민비를 옹호하는 여당이요 친일 급진개화파(독립당)는 야당이었다. *"독립"하면 항일을 떠올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꼭 알아야 할 역사적인 사실이다. 독립문과 독립협회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한국사람들이 아직도 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독립은 "반 청 즉 반 사대"를 의미했다.
1882년 4월 조미통상조약이 맺어지고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가 부임했다. 푸트는 고종에게 미국 대통령 아터가 조선 사절단 파견을 원한다는 의향을 전 했다. 1883년 7월 고종은 미국에 보빙사를 보냈다. 사절단 정사는 민영익이었다. 부사에 홍영식, 종사관에 서광범이 임명되었다. 이 밖에 유길준과 중국인 오례당, 일본인 미야오카등 도합 11명이었다. 센 프란시코에 배로 도착 한 일행은 기차를 타고 8일 걸려서 워싱톤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터 대통령이 뉴욕에 출타 중이어서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그들은 40일 동안 각지를 순방하면서 공공기관, 산업박랍회, 시범농장, 병원, 전신회사, 소방서, 우체국, 상점, 제당공장, 해군기지등을 시찰했다. 같이 갔던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서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부사 홍영식과 일행은 12월 말에 귀국했으나 민영익, 서광범과 변수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1884년 5월에 귀국했다.
민영익은 조선이 얼마나 선진국 미국과 유럽국가에 뒤 떨어 저 있는 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귀국 후 소감을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에 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라고 피력했다.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에서)
민영익은 급진 개화파 인사들을 고종과 민비에게 소개해주고 개화를 주장했던 개화파들의 동지였다. 김옥균과 절친했다. 그러나 그가 미국과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후로는 친일 급진개화파와 결별하고 친청온건개화파 즉 수구 사대당이 되었다. 일본, 미국, 그리고 유럽 열강들로부터 허약한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청과 유대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는 지도 모른다. 특히 개화파가 친일 노선으로 기우는 것을 보고 일본이 대국 청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민 씨 척족인 그가 고종과 민비 반대편에 서서 이로울 것이 없는 것은 뻔한 이치이다. 아무튼 민영익의 변절 이후 개화파들의 입지는 급격히 좁아졌다.
한성 판윤이었던 박영효는 경기도 광주유수로 좌천되었다. 6개월 후에는 그나마도 물러나야 했다. 반면에 민영익은 군통설권을 장악하고 청군과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한편 군에서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축출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개화당 인사들은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할 준비를 서서히 진행했다. 김옥균은 1880년부터 충의계라는 결사 조직을 신복모로 하여금 운영하게 했다. 서재필, 서광범 등이 그 회원이었고 1884년에는 회원 수가 약 100명이었다. 박영효도 경기도 광주 임지에서 약 1000명의 사병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김옥균은 1883년 서재필과 서재창 등 14명을 일본에 보내서 단기 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윤웅렬은 별기군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하고 개화파와 뜻을 같이 하는 무인이었다. 그는 윤치호의 부친이다. 그는 북청군이라는 군대 500명을 가지고 있었다. 개화 파은 박영효의 군대 1000명과 윤웅렬의 500명 도합 1500명을 거사에 동원할 계획이었다. 개화파는 윤웅렬에게 쿠데타 군 총지휘를 맡겠다. 개화파의 수상한 움직임을 의심했던 수구파(사대당)는 박영효를 광주 유수에서 해임시켰다. 그러자 개화파는 윤웅렬의 북청군을 한성으로 오게 하여 고종의 친위 군으로 삼게 했다. 수구파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고종으로 하여금 병력의 반인 250명을 함경도로 돌려보내게 했다. 이것을 본 윤웅렬은 거사가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고종의 지지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거사 한 달 전에 북청군 70명만 남기고 모두 함경도로 돌려보냈고 거사 일주일 전에 쿠데타군 지휘관 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쿠데타 음모를 고종에게 고자질하지는 않았다. 알릴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고종이 이미 거사 내용을 김옥균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속속 들어 나고 있다.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과 뚜렷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대원군이 쇄국을 했기 때문에 개화 정책을 열심히 추진하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개화파를 등용해야 했다. 따라서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한 김옥균을 가까이하고 아꼈다.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1882년 8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옥균 등에게 주일 영국 공사와 접촉하여 청의 간섭 중지 교섭을 하도록 명을 내렸다. 개화파 들은 영국에게 낮은 관세등 영국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통상 조약을 해줄 테니 청에게 압력을 넣어서 조선 내정 간섭을 중단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 측은 불평등 조약만 체결하고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입장은 전혀 바꾸지 않았다. 청이 금기시하는 조선과 러시아의 통상조약도 고종이 김옥균에게 은밀히 부탁하여 1884년 7월에 체결되었다. 결국은 그 이듬해에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서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고 청은 이를 묵인하는 정황이 벌어졌다.
이와 같이 고종은 개화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을 앞세워 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청나라 정부가 파견한 독일인 뮐렌드로프의 부인이 쓴 그의 자서전에는 갑신정변 직전 고종은 민 씨 척족보다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당을 더 신뢰했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정변 5일 전 김옥균은 고종과 독대했다. 김옥균은 고종에게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를 설명하고 모종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고종에게 거사를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민비가 들어오자
고종은 "경이 품고 있는 뜻은 내가 잘 안다. 국가의 대계와 관련된 일은 위급할 때에 경의 대책에 일임할 터이니 경은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하고 친서 한 장을 써주었다. 김옥균은 고종이 자신의 거사 계획에 동의한 것으로 알아 들었다. (김옥균의 자서전 갑신일록 OhmyNews:고종과 김옥균의 은밀한 거레 2014.12.18)
거사 당일에 고종은 개화당이었던 윤치호를 통해 100여 냥 짜리 어음을 김옥균에게 전달했다. 거사 자금이었다. (위 오마이 뉴스 참조). 고종도 갑신정변의 음모에 참여했다는 증거이다. 아마 고종은 청나라의 간섭을 일본과 개화파 세력으로 하여금 물리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파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거사 계획을 작성하고 그 준비에도 깊숙이 관련했다고 한다. 그는 이오우에 가쿠고로라는 사람을 통해 개화파들에게 도검과 폭약을 조달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선생은 단지 대본의 작자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배우를 선택하고 배우를 가르치고 또한 필요한 도구를 갖추는 등 만반의 수단을 강구한 사실이 있다"라고 진술했다.(나무위키) 대본은 거사 계획이고 배우는 개화파 인사들임에 틀림없다.
1884년 6월 베트남을 놓고 청불 전쟁이 터졌다. 청은 조선 주둔군 3000명의 반인 1500명을 베트남 전선으로 보냈다. 1884년 8월 프랑스 함대가 청나라 푸젠함대를 격파하고 전쟁이 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일본과 개화당은 청을 조선에서 몰아낼 절호의 찬스라고 판단했다. 개화당은 9월부터 거사 준비를 시작했다. 1884년 10월 초 청나라가 프랑스에게 완패했다.
1884년 10월 30일,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1년 만에 한성에 돌아왔다. 개화당에게 적대적이었던 그가 갑자기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일본은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동안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개화파를 압잡이로 삼아 조선 조정을 장악할 계획이었다. 개화파들은 이러한 일본정부의 태도 변화에 크게 고무되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김옥균에게 병력 150명과 일본 돈 3백만 엔을 빌려 주겠다고 제안했다.
1884년 11월 4일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박영효의 집에 모여서 거사에 대한 회합을 갖었다. 일본공사관 측에서는 서기관 시마무라가 참석했다. 윤웅렬의 군대가 갑자기 거의 다 빠진 상황에서 청군과 대항할 병력이 문제였다. 이때 사마무라는 "청나라 군사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 1개 중대 150명으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장담했고 11월 6일 자 보고문서에서 "정변이 나면 김옥균을 보호할 방침이며 우리 병력 150명으로 청군 현재 병력 약 5-6백 명을 격퇴함은 지극히 용이한 일입니다"하고 장담했다. 일본 측의 장담을 믿고 개화당은 일본 군대와 자금을 빌려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고종에게 거사를 알리고 헐거운 고종의 인가를 받은 김옥균과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으로부터 군대와 자금지원을 받아서 친청 세력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정권을 잡아 청의 간섭에서 벗어남으로 써 일본의 명치유신과 같은 개혁을 단행하고자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 연회장을 습격하여 쿠데타를 단행했다.
당일 7시, 민영익, 이조연, 홍영식, 김홍식, 한규직,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묄렌드로프, 마국 공사 푸트, 영국공사 애시턴, 청국 총판 조선 상무 진수당, 일본 서기관 시마무라 등이 참석 한가운데 연회가 시작되었다. 밤 10시 연회가 한창 무루 익어 갈 무렵 "불이야" 하는 소리에 민영익이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는 나가자마자 잠복해 있던 반군의 칼에 맞았다. 그가 피를 흘리고 안으로 들어와 쓸어 지자 연회장은 아수라 장이 되었다.
연회장에 있던 개화파 쿠데타 핵심 인물들은 곧장 창덕궁으로 들어가서 고종에게 사대당과 청국 군이 정변을 일으켰다고 아뢰고 방어하기 쉬운 경우궁으로 피신하자고 하니 왕은 순순히 응 했다. 이미 창덕궁에는 여기저기 폭탄이 터지고 있었다.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 수빈 박 씨의 사당으로 아주 작아서 비교적 방어하기가 쉬었다. 김옥균이 고종에게 일본공사에게 왕의 호위를 요청하는 친서를 요구 하자 고종은 흰 헝겊에 "일본공사는 와서 나를 호위하라"는 친서를 써 주었다. 이 친서를 받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친히 200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경우궁을 포위했다. 전후 정황을 고려해 보면 고종은 이미 개화파가 거사를 일으킨 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 했을 것으로 추론해 본다. 개화파가 동원한 50명의 병력도 일본군과 같이 고종의 호위에 참여했다. 말이 호위이지 고종은 사실상 쿠데타 군에게 체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1시경 개화파들은 대신들에게 국왕의 명이라며 소집 명령을 내렸다. 왕을 알현하려고 들어오는 대신들을 왕이 보는 앞에서 칼로 베어 죽였다. 고종은 이를 말렸으나 이를 무시하고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단칼에 베었다.
한규직,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유재현 등이 목숨을 일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이들을 본 고종은 자신의 생명도 잘못하면 저들의 칼날에 희생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여기서 고종과 개화파의 밀월 관계는 끝이 났을 것이다.
12월 5일, 쿠데타 주체 세력은 창덕궁으로 돌아와서 새 내각을 발표했다. 주로 개화파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왕실 계열, 친 대원군 인사 그리고 일부 온건 개화파 인사들도 참여하는 거국 내각을 발표했다.
입궐하다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도주한 일부 민 씨 세력은 용산에 있는 청나라 군대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한편 이미 사태를 알고 있는 청나라 측은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을 경우궁으로 보내서 민비와 연락을 취 했다. 청이 군대를 파견할 계획이니 허락해 달라는 전갈이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체 없이 원군을 요청했다.
그리고 민비는 고종에게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했고 고종도 이에 동의했다. 개화당은 고종의 환궁 요구에 넓은 창덕궁에서는 방어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민비의 끈질 긴 요구로 좀 넓은 계동궁으로 옮겠다. 그러나 민비는 계속해서 고종에게 환궁을 요구했다. 결국 고종이 김옥균에게 창덕궁으로 가자고 하자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던 중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창덕궁에 가더라도 일본군대가 청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12월 5일 오후 5시에 고종은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12월 6일 아침 쿠데타 주체 세력은 정강 정책을 발표했다. 말하자면 혁명공약이었다. 그 첫 번째 조항이 "대원군을 즉각 환국케 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이었다. 대원군이 다시 돌아온다니 민비로서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 3시경, 청군 1500명이 창덕궁으로 쳐들어왔다. 같은 시각에 고종은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승리를 장담했던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싸우지도 않고 군대를 데리고 철수해 버렸다. 청군과 충돌하지 말라는 본국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박영효의 군대, 서재필이 이끄는 사관생도들도 청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개화파의 쿠데타는 3일도 채 안되어 실패로 끝나고 말 앗다.
개화파는 반역죄로 몰려 삼족이 멸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
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의사, 미국 시민이 되었다. 김옥균은 상해에서 홍종우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정변 이후 청의 지배와 위안스카이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고 조선 조정은 친청 민비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일단 민비와 개화파의 싸움은 민비의 승리로 끝났으나 둘의 사활을 건 투쟁은 민비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민비를 정적으로 가진 대원군과 개화파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청에게 배신당한 대원군은 점점 일본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고 일본 또한 청을 제압해야 조선에서 패권을 잡을 수 있었다.
참고
1. 한국 근대사 산책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P. 277-283, 미국 보빙사 단장 민영익의 귀국 P.322- 325,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P. 330-360
2. 위키백과; 갑신정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