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과 민비 도피 51일
1871년 고종은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를 철거했다. 대원군이 쇄국을 했기 때문인지 개화가 그의 신념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대원군이 시행했던 모든 정책을 뒤집었다. 대원군이 흑자로 만들어 놓은 국가 재정마저도 적자가 되었다. 민비는 거의 매일 저녁 배우와 기생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엄청난 금품을 상으로 주었다. 밤을 새운 왕은 다음날 정오가 돼야 겨우 정사를 보기 시작했다. 그나마 꾸벅꾸벅 졸기 일수였다. 민비는 서울 근교의 절과 치성터는 물론 전국의 유명한 치성터를 독점했다. 병약한 왕자들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서였다. 막대한 국고를 탕진했다. 국민은 부당한 세금 징수에 시달 렸다. 시정상인과 공인들에게도 이 비용을 부담시켰다. 자연히 물건 값이 올랐고 백성들은 물가고에 시달 렸다.
고종, 민비, 민 씨 척족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반면에 대원군에 대한 향수는 점점 커졌다.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개혁하여 부당한 세금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제한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가 주장한 쇄국도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옳은 일이었다.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삶을 짓밟는 고종과 민비 그리고 민 씨 척족들이 추진하고 있는 개화와 개방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었다. 한마디로 대원군이 대세였다.
유림 즉 위정척사 파는 원칙적으로 개화, 개방을 반대했다.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것은 모두 사악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일이었다. 대원군, 유림과 위정 척사파 그리고 대다수의 백성들은 한편이 되어 고종과 민비의 반대편에 섰다.
고종은 1880년 12월 17일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근대식 내각을 만들었다. 근대국가와 외교 통상을 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정부기관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청나라에서도 비슷한 기관이 있었고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통한 청나라의 충고를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영의정 이최응이 총리대신이 되었다. 이최응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이고 정적이었다. 흥선의 쇄국에 반대하였고 고종친정을 적극 지지 했던 인물이었다. 각 사의 당상(장관)에는 김보현, 민겸호, 김병덕, 김홍집과 민영익 등이 임명되었다. 청에 충성하고 일본, 미국과 잘 지내라는 청의 충고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파견하고 일본에는 조사 시찰단을 보냈다. 모두 새로운 문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여론을 의식한 일본 조사시찰단은 각자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에 모여 일본으로 갔다. 병자 수호조약 이후 일본에 대한 백성들의 감정은 아주 좋지 않았다.
1882년 미 해군제독 로버트 윌리암 슈벨트는 이홍장과 교섭하여 미국이 조선과 수교하는 데 합의를 보았다. 조선의 외교권은 청이 가지고 있음을 당시의 국제사회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홍장은 영선사로 텐진에 와 있는 어윤중에게 수교를 권 했다. 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 청과 조선은 미국을 아주 마음씨 좋은 대국으로 받아들였다. 러시아, 영국, 일본처럼 남의 나라 영토에 관심이 없다고 믿었다.
조선 조정은 개화파가 권력의 핵심에 서고 유학자 보수 세력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졌다. 민비와 힘을 합쳐서 대원군을 밀어냈던 그들은 자연히 대원군을 다시 찾게 되었다.
1882년 봄은 몹시 가물었다. 모내기를 제때에 하지 못하면 가을 수확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쌀값이 폭등했다. 민심이 흉흉 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공납미 10 만섬을 횡령 했다. 말하자면 국세청장이 국민이 납부한 세금을 착복 한 셈이었다. 시전상인들은 쌀을 매점했다. 병자수호조약 이후로 일본은 조선에서 쌀을 싼 값으로 사 갔다. 거기다 가뭄까지 겹쳐 쌀 값은 2,3배로 폭등했다.
세도정치 시절에는 모든 정사를 비변사에서 관장했다. 행정권과 군사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기관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국가 비상시기에 운용되었던 통치 체제였다. 대원군은 비변사를 폐지하여 의정부를 부활시키고 삼군부를 두어 행정과 군사를 분리했다.
대원군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했다. 젊은 남자들이 직접 군에 가지 않아도 옷감으로 세금을 내면 면제해 주는 제도였다. 양반은 이것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200여 년 전부터 양반에게 군포를 부담하게 하는 호포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사대부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다가 대원군이 밀어붙인 것이었다. 대원군은 늘어난 세수로 수뢰포등의 군사무기를 개발, 제조하게 했다. 그동안 천대받았던 무인의 위상을 문인과 대등하게 하고 병사들의 대한 대우를 개선했다. 삼군부에 자신의 친위대를 양성했다. 그리고 직업군인의 수를 늘렸다. 대원군의 군사개혁은 쇄국정책의 뒷받침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프랑스군과 미군을 맞이하여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대원군은 직업군인들의 우상이 되었다. 개화시기에 구식군대는 대원군의 군대였다.
고종과 민비는 대원군이 만들어 놓은 종래의 오군영을 2 군영으로 축소했다. 많은 직업군인들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군인들에 대우도 형편없게 되었다. 반면에 새로 만들어진 신식군대에 대한 대우는 상대적으로 아주 좋았다.
국사교과서나 많은 역사 기록은 신식군대의 창설(?)을 "개화정책, 부국강병책의 일환"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정말 코미디 같은 미화이다. 대원군 뒤집기의 일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선 구식군대의 축소는 대원군 군대의 축소이지 결코 국방을 위해서 약한 군대를 강한 군대로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다.
일본은 조선정부의 신식군대 훈련계획을 미리 알고 1881년 4월 군무사 경리당상 민겸호와 예조판서 홍우창에게 훈련에 담당할 교사를 파견하겠다고 제의했다.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육군소위 호리모토 레이조를 추천했다.
군무사에서는 구식군대 군인 중에서 신체가 강건한 지원자 80여 명을 선발하여 무위영에 소속시켰다. 이를 별기군이라고 한다. "군대"라기보다는 장교 학교(?) 정도라고 생각한다. 실상은 대부분 사대부의 자녀들이었고 구식군대에 비해서 대우가 엄청나게 좋았다. 총책임자인 당상(훈련소장)은 민영익이었다. 물론 훈련의 총책임자는 호리모토 레이조 소위였다. 참령관에 우범선이 임명되었다. 아마 호리모토의 부관 정도였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그는 민비 시해 당시에 궁을 침범한 조선 사람 중에 하나였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부친이다). 예산은 민겸호가 훈련대 책임은 민영익이 지고 있었다. 별기군은 임오군란 당시에는 400명이 된다. 신식군대는 민비의 군대였다.
우범선은 중인이었고 별기군 훈련병들은 양반이었다. 그들은 교관인 우범선에게 반발을 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루는 생도들을 집합시켜놓고 분노를 토로하고 교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처벌이 두려운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1882년 7월 19일 구식군대 병사들에게 13개월 만에 처음으로 한 달 치 봉급으로 쌀이 지급되었다. 쌀에 물과 모래를 부어 무게를 늘린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곡물이었다. 병사들은 격분했고 처음에 몸싸움으로 시작하더니 7월 23일에는 대대적인 시위로 발전하였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주동자 4명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겸호가 이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분노한 병사들은 거리로 뛰어 나갔다. 백성들이 이들과 합세했다. 일부 병사들은 무위영 대장(직속상관) 이경하의 집으로 몰려가 민겸호의 비행을 규탄하고 그의 협조를 요구했으나 그는 해산 명령을 내렸다. 시위대는 그의 부하 여러 명을 살해하고 민겸호의 집에 몰려가 방화했다.
일이 커지자 주동자들은 불안 해 졌다. 누군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들이 추앙하던 대원군을 찾아갔다. 대원군은 그들을 달래고 은밀히 그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지휘하기 시작했다. 쿠데타의 시작이었다.
군중들은 개화 개방의 원흉을 일본으로 믿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구식군대 가 푸대접받은 것도 일본이 만들어 준 신식군대 덕분이 아니었던가? 서대문 밖 일본공사관이 시위대의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시위대가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자 공사관직원들은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인천으로 도망처 나가사키로 귀국했다.
7월 24일 일만여 명의 시위대는 이최응의 집으로 몰려가 그를 죽였다. 그리고 대원군은 시위대를 이끌고 창덕궁을 점령했다. 난병이 민겸호를 궁전에서 끌어 내자 민겸호는 대원군을 처다 보며 "대감 나를 제발 좀 살려 주시오"하고 애원했다. 대원군은 "내 어찌 대감을 살랄 수 있겠소"라고 대답했다. 난병은 대원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 질 했다. 김보현도 대원군을 보자 살려 달라고 했으나 대원군은 외면했다. 난병은 김보현을 박살 내어 죽이고 입을 찢어 엽전을 집어넣고 총의 개머리 판으로 마구 쑤셔 넣었다. 결국은 돈이 가슴으로 튀어나왔다. 두 대감의 시체는 궁궐 개천에 버려졌다. 수일이 지나자 시체는 허옇게 흐물거렸다. 백성들은 탐욕스러운 자들의 말로라고 조롱했다.(위키 백과 매천야록 인용)
난병들은 "중궁은 어디 있는 냐?"라고 외치며 민비를 찾아 죽이려고 궁을 샅샅이 뒤졌다. 가렴주구의 원흉이고 일본과 내통하여 개화, 개방을 추진한 민비는 민중의 적이었다. 민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이수정의 등에 업혀 궁을 빠저 나갔다. 무예별감 홍계훈의 배려로 민비는 충주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에 숨어 있었다. 군중은 상점을 파괴하고 시전 상인 100여 명을 살해했다. 민비가 국가 예산을 탕진하여 부를 축적한 사찰과 무당집도 공격의 대상이었다.
고종은 이미 죽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 도봉소 당상 심순택, 무위대장 이경하, 장어 대장 신정희 등을 파직시키고 부위대장에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서자 이재선과 혼동하지 말 것)을 무위 대장에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했으나 폭도들은 막무 가내였다. 개화당인 별기군 영병관 윤웅렬이 일본공사에게 정변을 알리고 도움을 청 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이미 귀국한 후였다. 7월 25일 고종은 대원군에게 입궐을 요청했다. 대원군은 부인 민 씨와 장남 이재면을 대동하고 입궐했다. 훈련도감 출신 가담자 200명이 대원군을 호위했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전권을 이양했다. 9년 만의 정권 복귀였다.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고종으로 하여금 자책교지를 반포하게 하여 군란을 정당화했다. 5 군영을 복구하고
삼군부를 설치했다.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했다. 고종의 형 이재면에게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겸임케 하고 직업군인들에게 밀린 봉급을 지급했다. 요직에 있는 민 씨 척족을 모두 파직했다. 그 자리에 위정 척사파를 임명했다. 고종과 민비가 대원군이 한 일을 뒤집어 놓은 것을 대원군이 9년 만에 다시 원상 복귀 시킨 것이었다.
난 가담자들을 해산시키고 대대적인 사면을 단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난 가담자들은 민비를 처단할 때까지 해산을 거부했다. 대원군은 민비의 옷을 시신으로 삼아 송장 없는 장례식을 치러 난군 해산을 관철했다.
대원군은 매점행위를 한 시전상인 1000여 명을 처형했다. 명분은 백성들의 물가고 해결이었으나 백성들의 원수를 갚아 주는 정치적인 제스처가 아니었을 까? 그가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살리기 위해서 천주교인 8000명을 처형했음을 상기할 때 그는 권력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냉혈한이었다.
7월 24일 고종과 민 씨 외척들은 영선사로 청나라에 체류 중이던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급보를 보내어 청에게 원군을 요청할 것을 명 했다. 이 서신은 8월 2일에 도착했다. 8월 1일 주일 청국 공사 여서창이 "일본 병선이 조선으로 가니 중국 병선을 앞서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본국에 보냈다. 북양대신 이홍장의 직무대리 장수성이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출동 명영을 내렸다. 8월 7일 장수성은 오장경에게 덩저우의 회군 3천 명을 조선에 파병하라고 자시 했다. 8월 10일 정여창은 우선 북양함대 3척에 병력 4-500명과 마건충을 싣고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날 이홍장은 영선사 김윤식의 동의를 얻어서 흥선대원군 납치를 결정했다.
8월 12일 일본군함 4척과 1개 대대 병력 약 300명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러나 10배에 달하는 청군과 대립할 처지가 아니었다. 8월 13일 일본 정부는 대원군의 쿠데타 정권을 인정한다는 비밀 훈령을 작성했고 이 훈령은 8월 18일에 하나부사 공사에게 전달되었다. 8월 20일 오장경이 3000명의 군사와 함께 정여창의 배를 타고 남양만에 도착했다. 김윤식도 오장경과 같이 귀국했다. 제물포에 있는 일본군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남양만을 선택한 것이었다.
8월 26일 오장경(우창징)은 고종과 대원군을 예방했다. 운현궁에서 대원군을 만난 오장경은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자신의 군영으로 대원군을 초대했다. 안심하고 군영에 들어온 대원군을 체포하여 텐진으로 압송했다. 대원군은 텐진에서 4년 동안 가택연금 생활을 했다. 이렇게 해서 대원군의 33일 천하는 끝이 났다.
8월 29일 청군은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난 가담자들을 공격하여 170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처형했다. 한편 일본은 약 1200명의 병력을 충무로 2가와 을지로 2가 사이에 주둔시키고 보상을 요구했다. 8월 30일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다. 거금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일본공사관에 수비대 병력을 주둔시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청과 전쟁을 해서 이길 자신이 없던 일본은 조선 조정이 친청 세력에 넘어가는 것을 일단 말리지 않았다.
민비가 극비리에 영선사로 청에 가 있는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청에게 원군을 청하라고 부탁했다는 설이 종래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었으 나 2006년 7월 1일 민비 피난 기록을 소상이 적은 책 "임오유월일기"가 뱔견된 후로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8월 29일 일기를 보면 "민비가 사람을 시켜 경성에 붙은 방분을 베게 오도록 했다"는 기록 이 있다. 누가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종과 민 씨 척족들이 김윤식, 어윤중과 접촉하고 이들이 이홍장과 상의해서 청군이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편전쟁 이후 청은 조공국을 종래의 방법으로는 청의 영향권에 둘 수 없음을 자각하고 조선을 서양 제국주의 국가처럼 식민지화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홍장은 임오군란은 청이 조선을 좀 더 직접적으로 지배할 기회라고 판단하고 김윤식 등 영선사의 청군 개입 부탁을 수락했다. 한편 고종은 일본 영사관이 철수 한 마당에 난 진압을 부탁할 세력은 청나라 밖에 없었다.
음력 7월 26일 일기에는 "궁중전하(민비)를 위한 탄원서를 오장경 제독에게 전했는 데, 곧 받들어 모셔 오라는 희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민비는 9월 12일 궁을 떠난 지 51일 만에 돌아왔다. (위키백과 참조)
임오군란을 평정하고 고종과 민비를 복권시킨 청은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간여하기 시작했다. 용산에 위안스카이(원세계)와 청군이 상주했다. 1882년 10월 4일 청은 조청상민수륙장정을 조선에게 일방적으로 동의하게 했다. 대등한 국가와 국가 간의 조약이 아니라 청의 황제가 속국 조선 왕에게 내리는 일종의 행정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청나라 상인은 조선 내에서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 장사를 했다. 청군의 보호를 받은 그들은 조선 상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횡포를 부렸다.
1882년 12월 13일 청은 조선의 정치와 외교를 지도하는 고문으로 독일 인 뮐렌드로프와 마건충을 조선 조정에 파견했다. 임오군란은 청이 조선을 직접 지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의 지배는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끝이 났다.
청나라 군대는 개화 개방을 반대하는 대원군과 위정척사파를 제거해 주었다. 고종은 좀 더 활발하게 개화 개방 정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영선사로 청에 다녀온 친청 중도 개화파가 점점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 이들을 일명 사대당이라고 한다. 요지음 말로 고종과 민비 편인 보수 여당이다.
1882년 8월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민영익 등은 임오군란 뒤처리를 위해서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이들은 후쿠자와 유키치를 일본에서 만나고 그의 교화를 받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이 청에 오랫동안 예속 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이 망해 간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들에게 유키치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일본처럼 유교적인 것을 버리고 서양의 문화와 기술,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유키치가 조선이 청으로부터 분리되면 일본에게 유리하게 된다는 점을 이야기했을 리가 없다. 동도서기, 동양의 도덕적인 것(유교)은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만 받아 드리는 개혁은 친청 중도 개화파(사대당)가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홍장이 주도하는 양무운동과 같은 생각이었다.
급진 개화파는 반청(반 사대당) 친일 노선이 되었다. 요지음의 야당이다. 고종과 민비가 좋아 할리가 없었다. 그들은 조정의 중심에서 점점 소외되기 시작했다. 정적 대원군 대신에 급진개화파가 민비의 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참고
1. 한국 근대사 산책 1권; 간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외국군의 주둔을 불러온 임오군란, P.250-264
2. 위키백과: 명성황후
3. 위키백과: 흥선대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