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의 반격
경복궁이 완공된 것은 1873년 11월경이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다. 1873년 12월 10일 친정을 선포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 데 경복궁에 불이 났다. 자경전의 부속건물인 순화당에서 시작한 불길은 복안당, 자미당, 교태전으로 먼저 무려 364칸이 잿더미가 되었다.
고종은 철저한 화재 발생 경위 조사를 명하고 청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침전인 강녕전과 건청궁이 피해를 입지 않았는 데 이어한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결심이었다. 대신들과 협의 끝에 이어 날짜를 12월 20일로 잡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변고 인가? 나흘 후에 또 화재가 발생했다. 홍복 전 수인문 안쪽에서 불길이 시작되어 홍복 전 동쪽에 있는 다경합 8칸, 창고 38칸, 행각 10여 칸 등 합계 56칸과 샛담의 문 11개소가 소실되었다.
고종은 예정 대로 12월 20일에 창덕궁으로 옮겠다. 국가 예산 문제로 소실된 건물 복원이 차일피일 미루어 지다가 1875년 5월에 완공되어 고종이 경복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
1873년 12월 10일 화재는 민비 침전 앞에 설치한 폭약이 폭발하여 발생했다. 고종과 민비는 대원군을 배후로 크게 의심했다. 이듬해에 고종은 암행어사를 전국에 파견하여 친 대원군 세력 숙청에 나섰다. 대원군 복귀를 청하는 유생들을 참형에 처했다. 1874년 봄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떠나 양주 작곡 산장(의정부시 곧은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아들을 경복궁에서 쫓아 내니 아들은 아버지를 경운궁에서 못 살게 한 셈이다.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제1권 참조)
남연군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이다. 흥선의 아들이 고종이다. 남연군, 대원군, 고종의 부인은 모두 여흥 민 씨이다. 3대의 처가가 여흥 민 씨이다. 이들이 어떻게 세도가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까? 아무리 흥선이 일가친척이 없는 집의 딸을 며느리로 삼아서 처가의 세도를 막으려고 했다지만 다시 여흥민 씨의 딸을 간택한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민자영(민비)은 경기도 여흥민 씨 민치록의 딸이다. 여흥 민 씨는 장희빈과의 알륵으로 유명한 인현왕후 집안이다. 민치록은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으나 모두 죽고 민자영 혼자였다. 혼인 당시에 민치록은 이미 사망했고 홀 어머니와 단둘이 감고당에서 살고 있었다. 감고당은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해서 지어준 건물로 현재 덕성여대 안에 있다.
이미 민자영이 왕비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으나 형식상의 간택에는 참여해야 했다. 그런데 민자영에게는 남자 보호자가 없었다. 마침 흥선 대원군의 부인에게는 민승호라는 오빠가 있었다. 대원군의 처남이다. 그를 민치록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민승호는 고종의 외삼촌이었다가 처남이 되었다. 민비가 왕비가 되어 궁에 들어가 홀로 된 어머니 이 씨는 민승호와 같이 살게 되었다.
여흥민 씨의 세력은 대원군 집권시기에도 점점 커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1873년 민비와 고종이 친정을 추진할 무렵 대궐 안의 민 씨 세력 관리가 벌써 30여 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민승호의 집 앞에 뇌물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것이다.
고종은 민비와 혼인할 무렵 이상궁을 좋아했고 그 사이에서 1868년 완화군을 출산하여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민비는 첫아들을 낳았으나 항문이 없어서 사망했다. 1874년 3월 25일 장차 순종이 될 왕자를 출산하였다. 경복궁 화재 등 대원군의 위협은 민비를 불안하게 했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완화군 또한 문제였다. 민비와 민 씨 척족들은 세자 책봉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민승호는 이조참의, 호조참판을 거처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는 민 씨 척족의 수장이었다. 대원군 실각 후에는 왕과 왕비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1874년 11월 28일(음력), 한 승례가 민승호 집에 나타났다. 그는 아주 특이하게 생긴 상자를 지방수령이 바치는 것이라면서 민승호에게 전달했다. "이 상자 안에는 복이 들어 있으니 바깥사람이 함께 하지 못하도록 꼭 안에서 열어 보십시오." 하고 떠났다. 민승호에게는 이런 식으로 뇌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크게 의심하지 않고 방 안에서 열쇠로 상자를 여는 순간 굉음을 울리며 큰 폭발이 일어났다. 양 어머니 한산 이 씨, 열 살 난 아들, 민승호 모두가 사망했다. 민승호는 죽기 전에 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을 두 번이나 기르켰다고 한다.
같은 해 봄에 민승호의 집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민승호가 폭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흥선 대원군의 형 흥인군 이최응의 집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대원군이 있다는 소문이 장안에 떠 돌았다. 그러나 고종은 대원군을 직접 수사하지 않았다. 흥인군 집 화재 사건의 범인으로 장 씨를 체포했다. 신철균이라는 사람의 문객이었다. 신철균은 대원군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1875년 흥인군 이최응의 집에 다시 화재가 발생했다. 고종은 장 씨를 범인으로 신철균을 그 배후로 체포했다. 장 씨는 민승호 폭사 사건과 흥선군 집 화재 사건 범인으로 처형되었지만 신철균은 증거 부족으로 방면되었다. 1876년 신철균은 화적때와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었다. 조사 중에 신철균의 장모가 점을 빙자해서 흥인군 집에 아무 날 불이 날 것을 예언했고 예언 한 그날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철균은 민승호 폭사사건과 흥인군 집에 두 번 방화했다는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했고 삼족이 멸하게 되었다. (나무위키 민승호 암살 사건 참조)
대원군이 이 모든 사건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아무 데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의심했다. 특히 민비와 민 씨 척족 들은 고종에게 대원군을 수사할 것을 종용했으나 고종은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폭탄 상자를 전달한 승례의 정체는 무엇일까? 과연 대원군은 신철균에게 폭파 사건을 사주했을 까? 아니면 장 씨, 신철균 모두 조작된 범인일까? 모두 미궁이다.
참고
1. 나무위키: 민승호 암살사건
2. 경복궁의 역사 제4부 - 궁궐을 감싸는 화염; blog.naver.com, Charles Kim, 2017.8.4.
3. 한국 근대사 산책 1권; 강준만, 인권 사상사; P.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