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기철 James Ohn Aug 12. 2023

빈주 사건과 김좌진장군암살

마왕 김좌진 장군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자 조선 전역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일본은 의병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래서 고국에서 일본에 저항할 수 없게 된 의병들이 만주 간도 지방으로 갔다. 이곳에는 많은 조선농민들이 19세기 말엽부터 이주해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의병활동을 하던 무인들이 간도에서 조선인을 모아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고, 식량 등 군수 물자 등을 마련하기가 용이 했다.  

간도는 중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독립군이 일단 국경을 넘으면 일본군이 추격할 수 없었다. 추격해서 일본군이 만주에 들어와도 독립군은 지리에 익숙했던 반면에 일본군은 지리에 어두어 독립군에 항상   유리했다.

망명 조선사람들은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대한독립단, 서로군정서를 조직하고 북간도에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대한독립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 밖에서 군대를 훈련시켜 조선안으로 들어가서 일본군대와 싸워 나라를 되 찾을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선포한 상해 임시정부는 외교와 무저항을 원칙으로 하는 독립운동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보고 1919년 말부터 무장투쟁으로 선회하기 시작하여 1920년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홍범도도 1919년12월에 군대를 조직했다.  1920년 봄, 상해 임시정부 동로 사령관 이용, 대한군무도독부 최진동, 대한국민회 안무 그리고 홍범도가 모여 상해임정의 요구에 따라 북간도 무장투쟁 단체를 하나로 통합했다.  이를 대한독립군이라고 하고 홍범도가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3월1일부터 6월 초까지 무려 34회에 걸쳐서 대한독립군은 국경을 넘어 일본관서와 파출소등을 공격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군은 국경을 넘어 중국영토 안으로 독립군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대한군무도독부 최진동은 홍범도 보다 조금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 형제가 봉오동 골짜기의 방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10 키로에 달하는 골짜기는 물이 흘러서 농토가 많이 있고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가 힘들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조선 사람이었다. 따라서 중국 당국의 간섭이 없었다. 독립군 훈련, 독립운동의 근거지, 한국인이 집결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최 씨 삼형제는 이곳에 생필품 공장도 가지고 있어서, 무기 구입을 위한 막대한 군자금도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실상의 군의 지휘는 최진동이 맡았다. 


독립군의 무기는 귀국하는 체코군단으로부터 구입했다. 일차대전중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나라가 없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다. 독립을 원했던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징집되어 나라를 빼앗아간 오스트리아 -헝가리 군대에 소속되어 연합군 편이었던 러시아와 싸웠다. 그들은 러시아군에 투항했다. 그리고 러시아군 안에서 자체적인 군단을 만들어서 자기 민족을 억압하던 오스트리아-항거리군에 대항해서 싸웠다. 그런데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고 볼세비키가 집권 한 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정전 협정을 맺어 버렸다. 러시아군에 속해 있던 체코군단은 서쪽에 있는 유롭의 연합국으로 가야 했으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적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그들이 고국으로 안전하게 돌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한없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동쪽 끝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당시 러시아는 적군과 백군이 싸우는 내전 중이었다. 그들의 동행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점령하고 배편을 마련하여 유럽으로 돌아 갔다.  65000 명이 넘는 병력이었다.  이 때 대한독립군은 이 들로 부터 무기를 구입했다. (참고: 거꾸로 읽는 러시아 혁명사 1, 체코 군단, 피바다 뚫고 시베리아 횡단; 중앙일보 채인택 기자 2017.11.01)


일본조선주둔군 사령관 우수미아 다로는 독립군 안 밖에 수많은 밀정을 심어 놓아 독립군 내의 정보를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1920년 8월 일본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독립군은 체코군단으로 부터 군총(소총) 약900정, 권총 약 200정, 기관총 2문, 폭탄 100개, 망원경 7개, 탄환 1정당 150발을 구입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구입한 무기를 북간도로 운반해야 했다. 무려 200 키로의 험난한 길을 도보로 운반했다. 지리적으로 험악할 뿐만 아니라, 일본군, 경찰, 헌병의 감시를 피해야 했고 중국군과 마적 때의 눈을 피해야 했다. 기차나 자동차로 운반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무기운반에 많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3개의 부대로 나누어 도보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등에 지거나 지게에 무기를 싫고 한달이 넘어서 무사히 북간도로 돌아왔다. 

 거의 완벽한 무장군대가 된 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 국내 일본군 초소등을 거의 매일 공격하고 국경을 넘어 도망 치는 작전을 수행했다. 


1920년6월4일독립군 30여명이 중국 쪽에 위치한 길림성 삼둔자 마을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 땅 강양동에 있는 일본 헌병초소를 습격했다.  일본군이 그냥 참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군 남양 수비대가 국경을 넘어 독립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은 이미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독립군에게 괴멸되었다. 독립군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계획했다.  나남 19사단은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1920년6월7일 봉오동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대회전이 벌어졌다. 


지형에 밝은 독립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매복해 있다가 골짜기를 따라 들어오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독립군의 완승이었다. 1920년 6월 27일자 상해 신보는 일본군 전사자는 150명이었고, 소총 160정, 기관총 3문, 수류탄을 노획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사람들에게는 우리도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지만 일본군에게 조선군이 오합지졸이 아니고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경각심을 일으켜 주었다. 간도 조선사람들의 독립에 대 한 희망이 고양되었다는 사실은 일본 당국을 긴장하게 했다. 


자주 일어나는 진공작전으로 일본군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조선주둔 일본군은 만주의 중국군벌에게 간도의 독립군을 토벌하라고 요구했다. 중국군 지휘관 맹부덕이 김좌진을 방문했다.

 그는 독립군을 무장해제 시키지 않고 조용히 부대를 이동시켜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 하라고 충고했다.  김좌진은 일단 시간을 달라고 하여 그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김좌진은 더욱 산속 깊숙한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중국군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일본외교 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1920년6월15일자로 된 기록에는” 일본군은 간도파견 정보원으로부터 독립군 각 단체가 활발한 전투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같은 문서 1920년7월21일 기록은 “간도 *불령선인단의 위력은 더욱 강대 해져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이 군련 군자와 무력충실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 국경의 습격 등을 기회를 타서 감행할 것으로 예측된다 ”고 적고 있다. (*일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조선 단체 즉 독립군을 의미)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부는 독립군뿐만 아니라 독립군에 전적으로 협조하는 간도 조선인 주민들까지 토벌 대상으로 삼았다. 독립군은 병력, 노동, 식량 기타 군수 물자를 사실상 주민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1920년8월 조선주둔 일본군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했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 초까지 계속된 토벌 작전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 일본관동군 도합2,3만의 병력이 연변지역을 포위했다.  이중 북간도 독립군을 직접 공격한 병력은 5,000에 달했다. 일본군의 공격 대상은 독립군뿐만 아니라 양민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독립군을 돕고 있던 조선인 사회를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일본 외교 사료관문서는 그때의 일본군 조선부락 공격의 상황을 “우리 부대는 이 부락을 습격하여 가옥 40여호를 소각하고 광복단 교관 및 제2대장 외교부장 및 동부원 3명 아울러 구장, 부구장, 광복단, 병졸 등 10여명을 독가스를 사용하여 살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에 수천명의 간도지역 한인이 학살되었다.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치를 떨게 한다. 


1920년10월2일 훈춘의 일본영사관이 습격 당했다. 영사관은 불타고 일본인 거류지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단의 소행이었다. 일본 당국은 마적단 속에 불령선인과 러시아 과격파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강을 넘어 중국영토에 군대가 들어가 조선인들을 토벌할 구실을 찾기 위한 일본이 꾸민 사건이었다. 일본군은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왔다.

독립군은 2만여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피해서 백두산 동남쪽에 있는 청산리 골짜기로 이동했다. 2000여멍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청산리는 통상적인 작은 마을이 아니었다. 좌우 몇 십 키로 가 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보급과 병력 등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독립군은 이곳의 지형에 밝았다. 


한편 일본군은 독립군의 이동과 병력의 규모를 첩보대와 밀정을 통해서 실시간 수준으로 보고 받고 있었다. 청산리에 독립군의 80%가 모여 있다는 정보를 안 일본군은 10월21일 총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골짜기 양쪽 끝으로 진입하여 독립군을 포위하려 했다. 독립군은 일본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 위 등의 고지에 잠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렸다. 이것을 모르고 골자기를 따라 들어오는 일본군을 독립군은 가차 없이 사살했다. 전투는 6일동안 계속되었다. 홍범도, 김좌진, 최진동이 독립군의 주력 부대였다. 독립군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이들 승전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참고: 국방 TV;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 특집


1920년10월2일 중국 마적단 일본영사관 방화 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들어온 일본군 3개 사단은 청산리 지역의 독립군 토벌 작전을 하는 동안 간도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다. 10월9일에서 11월5일까지 27일 동안 만의 학살된 조선인은 3,469명이라고 한다. 일본당국의 조선간도 불령선인초토계획이 1921년초까지 계속되었고 연해주에서 똑 같은 작전을 했기 때문에 아마 학살된 조선인은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인 학살이 일본의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이라고 대부분의 역사 자료에 기술되어 있는 데, 조선인 학살이 전투와 병행된 것으로 보아서 간도 조선인들이 독립군에게 식량, 군수물자, 정보 등을 제공했기 때문에 근거지를 없애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고 생각 한다. 

일본은 중국에게 압력을 넣어 조선독립군 토벌을 요구했다. 그동안 만주에서 중국군의 도움으로 비교적 아무런 제한 없이 활동하던 독립군은 만주의 주인 중국당국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추격 또한 끈질겼다. 조선인과 조선인 마을이라는 근거지가 없어졌다. 


만주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진 독립군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했다. 볼세비키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 였다. 당시에 레닌은 코민테른을 결성하고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 한 바 있다. 자유시는 고유명사 스보보드니(자유로운)의 번역이다. 당시 러시아는 내전 중이었다. 볼세비키 공산당 군대를 적군이라고 하고 보수 우파 군대를 백군이라고 했다. 일본,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일본은 적군의 적이었고 독립군 또한 일본이 주적이었다. 


자유시에 있는 적군은 독립군을 적군에 포함시켜 백군과의 전투에 투입하려고 했다. 러시아 안에 조선공산당이 있었고 이들 또한 일본과 무장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려공산당은 이르쿠츠파와 상하이 파로 갈라져 있었다. 

10여개의 독립군단은 자유시로 들어오자 소련당국은 공산당을 위해서 싸워달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절하자 독립군을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무장 해제를 시켰다. 이 기미를 미리 알아차린 김좌진은 이만에서 만주로 되돌아 갔다. 

이르쿠츠파 고려 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 공산당은 독립군의 통수권을 두고 서로 경쟁했다. 독립군은 일단 상하이파에 들어가 있었다. 이때 이르쿠츠파 공산당이 코민테른의 협조를 얻어 상하이파의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적군과 이르쿠츠파 공산당은 무력으로 상하이파 공산당을 공격하여 제압했다. 이 와중에 독립군 36명이 사망했고 970명이 포로가 되어 볼세비키 혁명군에 편입되었다. 홍범도와 지청천도 적군에 소속되었다. 


만주로 돌아간 김좌진은 어떻게 되었을 까? 1925년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이범윤등과 함께 신민부를 창설하고 무장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으로 간도조선인들의 협조가 청산리전투 이전 같지 않았다.  자금, 식량, 군수, 병력 등을 그들에게 의존해왔던 그로서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김좌진은 대한독립군총사령관으로서 발표한 부령 제11호 5조와 6조는 조선주민에 대한 병역의무와 세금납세의무를 강요하고 있다.

제5조 본군단에 있어서 징모 한 병사로서 병역의 복무를 기피하는 자는 중벌에 처한다.

제6조 군에서 청한 자금납부를 거절하는 자는 중벌에 처한다.


간도주민들은 신민부에 의무금을 납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작인이어서 지주에게 수확의 반을 주고 나머지에서 중국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신민부에 또 의무금을 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김좌진은 강제로 군자금을 징수해 갔다. 이에 대해서 조선동포들은 불만이 많았다.


하얼빈 근처에 빈주현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1928년 10월20일, 이곳 조선사람들이 신민부에게 의무금 납부를 거부하고 신민부 보안대가 와서 강요할 경우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포착한 신민주 보안대원들이 회의장을 습격하여 총기를 난사했다. 회의 개최자 황혁 등 사상자 4-50명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11월 하순 영안현에서 최경환 등의 주도로 북만주 주민대회를 개최했다. 6개현 16지역에서 한인들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김좌진의 죄악을 열거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본국에 보낸 1930년 2월27일자 보고서에는 빈주사건피해자 유족들이 재중청년동맹과 함께 김좌진살해를 계속 계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빈주사건)


2007년10월 월간조선은 “김좌진장군은 하얼빈 산시창에 있는 한족총연합회가 운영하는 정미소에서 1930년1월24일, 고려공산청년회일원이며 재중한인청년동맹원인 김신준에게 총격 피살됐다”는 하얼빈총영사관 경찰서장의 보고서를 보도했다. 빈주사건 유족들이 원수를 갚기 위해서 신민부와 대립하고 있던 고려공산당을 끌어들여 김좌진을 살해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한족총연합회는 1928년 12월에 해체된 신민부를 김좌진이 무정부주의자들을 끌어들여 만든 단체이기 때문에 그 정미소는 김좌진이 운영했다고 할 수 있다. 


김신준은 사건발생 1년전부터 이 정미소에서 일했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김좌진장군을 경호하던 청년들이 고강산 경호대장과 함께 철둑 넘어 술집으로 가고 없었다. 이때 마침 김좌진이 정미소를 둘러보러 왔다. 김신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미소를 둘러보는 김좌진에게 권총 두발을 발사했다. 중국군경과 청년대원들이 그를 추적했으나 놓치고 말았다. 배후 지시자 김봉환은 곧 체포되어 독립운동 단체에 의해서 총살되었다. 대부분의 역사 기록은 김좌진의 암살범을 박상실이라고 하고 박상실과 김신준이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나 그 증거는 아직 없다. (월간조선 2007년10월호)

김좌진 장군은 40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김좌진의 신민부는 간도조선인주민들에게 일종의 군사정부 노릇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의 군벌과 흡사한 방법으로 주민들로 부터 독립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무장 항일에 참여하게 했다. 더 나아가서 나라를 위해서 싸운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이 자신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식의 요구를 주민들에게 했다. 주민들 중에는 독립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먹고 살기에 바쁜 마당에 나라의 독립이나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려는 의도가 없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신민부의 보안대는 세금을 내지 않거나 협조를 거절하면 집에 나타나서 협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포악한 행패는 김좌진장군에게 마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했다. 


김좌진장군은 간도조선주민들의 원성을 샀고 고려공산당의 적이었다. 빈주사건으로 살해된 조선인들의 유족이 고려공산청년회와 협의하여 김좌진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과 공산주의자들을 혐오하는 한국사람들은 일본이 공산주의자들을 사주하여 김좌진을 암살했다고 이 사건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앞뒤를 잘 살펴보면 일본당국이 구태여 고려공산청년회를 꼬드길 필요가 없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조선인들끼리 골치거리를 해결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 다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매거진의 이전글 김구의 김립암살사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