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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an 08. 2024

2. 몽양 여운형 암살

그는 거인이었다. 

여운형(경기일보)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 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에게는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 여운형, 1919년 11월,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 연설에


송진우는 중경(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이 조선총독부로부터 통치권을 넘겨받을 자격이 있는 수권기관이라고 주장했다(임정봉대론). 그는 또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새 국가의 통치 이념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한마디로 전형적인 우파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38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단이라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송진우가 임시정부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좌우 대립의 국제정세를 간과했던 반면에 여운형은 임시정부를 신생국가의 수권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고 좌파를 경계하지 않고 포용하여 한반도에 통합된 신생국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신생국가의 이념보다는 통합된 나라가 우선이었다. 그래서 그의 설자리는 항상 좌와 우의 중간이었다. 좌우 통합이라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좌우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 방해꾼이 되어 양쪽에 정적을 양산했다. 덕분에 무려 10번이라는 기록적인 테러에 시달리다가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이필형) 일당의 습격을 받고 유명을 달리했다. 


흔히 해방정국에서 신생국의 지도자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은 이승만과 김구이지만 사실은 여운형이 이두 사람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한의 지나친 반공주의는 그를 똑바른 민족주의 관점에서 평가하지 않고, 공산주의자 또는 용공주의자라고 그의 공적을 폄하해 왔다.  김구가 국제정세에 어두운 우파 민족주의자였다면 여운형은 해박하고 국제정세에 밝은 능력 있는 당대에 보기 드문 이념을 초월한 지도자였다.


여운형의 기독교인 인맥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에 태어났다. 청나라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왕 고종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조공관계라기보다는 청나라가 직접 지배하는 식민지에 가까웠다(1882년-1894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는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의 집안은 소론계열의 양반 가문이었다. 여운형의 조부 여규신은 항상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수모를 당했다고 하며 중국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조정에 건의했다. 그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결사대를 만들기도 했다. 사대주의를 원칙으로 하여 군신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에게는 반역에 가까운 죄였다. 이런 일들이 발각되어 여규신은 유배를 당했다. 그러나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병법과 축성법을 연구하는 등 중국정벌의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손자 여운형에게 역사 이야기를 해주며 왜 중국을 정벌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여운형은 조부로부터의 영향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부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을 직접 만날 정도로 독실한 천도교 신자였다.  인내천이 교시인 천도교는 인간의 평등을 가르쳤고 조부는 손자 여운형에게 이를 전수했다. 그래서 여운형은 항상 가난한 자와 노비 같은 약자를 돌보았다. 


1880년 대의 개화파들은 당시에 나라가 망해가는 원인을 천년 동안 중국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조선이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부흥하려면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서 일본의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은 구식군대 가 신식군대에 대한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대원군의 민비에 대한 쿠데타였다. 청나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무력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텐진에 구금했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하면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은 개화파 젊은이들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려는 쿠데타였다. 청나라의 위안스카이는 개화파를 돕고 있는 일본군을 제압하고 사태를 수습하여 고종과 민비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조선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는 청일전쟁 (1894) 때까지 고종에게 가진 수모를 주고 조선에서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상인들보다 더 유리한 조건으로 장사할 수 있도록 조선상인들을 압박하였다. 조선에 사는 청나라 사람들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조선정부가 처벌할 수 없었다. 그들은 조선에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이 청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개화파들이 주장하여 옛 청나라 사신이 들어오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여운형의 조부도 여운형 성장기에 있었던 청나라의 학정에 분노하여 청나라 정벌을 주장했을 것이다.


여운형의 부모는 그가 14세 되던 해에 유채영의 장녀와 결혼시켰으나 17세 되던 해에 임신 6개월인 아내가 사망했다. 부모는 곧바로 무학력인 진상하 씨와 재혼시켰다. 


여운형이 성장하던 시기에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성리학 공부는 필요 없는 학문이 되었고 신학문을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 여운형이 9세가 되던 해인 1894-1895년은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동시에 진행되던 격동기였다. 구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오고 있었다. 


이때 여운형에게 새 시대를 헤쳐갈 지혜를 준 분이 7촌 종숙 여병현이었다. 그는 미국과 영국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와서 배재학당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이분의 주선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할 수 있었다. 조부와 부친은 반대했으나 여운형은 이를 무릅쓰고 상경하여 배재학당에 다녔다.  배재학당은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가 1885년에 설립했다. 여운형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7촌 종숙 여병현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이사이고 미국 공사관 통역관이었다. 여운형은 그를 통해서 외무대신 서리였던 윤치호, 학무대신 민영환, 한성부 경무관이었던 김정식, 월남 이상재 등을 알게 되었다. 


배재 학당에서는 매주 월요일마다 일요일에 교회에 갔는지를 조사했다. 한 번은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남산으로 놀러 갔다. 다음날(월요일)에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어제 교회에 가지 않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여운형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들었다. 그러나 같이 갔던 친구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는 손든 덕분에 1시간 남아서 자습하는 벌을 받았다. 여운형은 화가 나서 배재학당을 그만두고 17세 될 무렵에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로 전학했다. 1년 정도 다녔 는데 아내와 조부가 사망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다. 직업을 갖기 위해서 통신기술을 가르치는 직업학교인 우무학당에 들어갔다. 졸업하면 우무국 기술관으로 채용되어 높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정부는 군사기밀을 이유로 조선의 통신업무를 전부 일본인으로 교체했다. 여운형은 동료 학생들과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에게 채용한다는 통지가 왔지만 거절했다. 


이 무렵(1904) 여운형은 일본과 조선이 동맹을 맺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냈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아시아대 서양의 구도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일본은 자신들을 아시아를 대표하는 나라라고 주장하며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과 연합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선전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일본의 선전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동양평화론 또는 아시아 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이 조선을 합병할 것이 분명해지자 여운형은 “이리 무서운 줄은 알고 여우 무서운 줄은 몰랐다!”면서 국제정세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이 무렵 존경하던 스승 민영환이 자결하고 모친상을 당했다. 충격에 빠져 있는 데 도산 안창호의 시국 연설을 듣고 크게 감격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술과 담배를 끊고 국체보상운동에 앞장서서 시국연설을 하고 다녔다.  


촬스 알렌 클라크(곽안련, Charles Allen Clark)는 승동교회 선교사였다. 그는 경기도와 강원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전도했다. 그가 묘골을 방문했을 때 여운형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06년에 여운형의 고향 묘골에 묘곡교회를 세웠다. 여운형은 집안사람들을 설득하여 온 집안이 기독교에 입교하고 교회에 나가게 했다. 동학교도였던 집안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동학도들이 집단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20세 청년으로 성장한 여운형은 180 cm의 키에 몸무게 80kg, 균형 잡힌 체격, 누구보다도 잘 생긴 얼굴을 가진 아주 매력적인 남자였다. 거기다 언변이 좋았고 친화력이 대단했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당대 최고의 웅변가이기도 했다. 아마 그는 젊은 나이에 집안을 대표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설득으로 집안이 입교한 것으로 보인다. 1903년 첫 부인, 조부, 부모가 연달아 사망한 데서 오는 정신적인 충격도 여운형이 기독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같은 해에 설립자이며 담임 목사였던 사뮤엘 무어(Samuel F. Moore) 목사가 사망하자 곽안련이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여운형을 그의 조사(helper)로 임명했다. 여운형은 이후 5년간 승동교회 조사로 일했다. 월급은 20원이었다. 곽안련은 승동교회 부속으로 기독소학교와 여자 소학교를 설립하고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도 불러서 자신을 돕게 하였다. 덕분에 형제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임시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여운형의 창신동 숙소에는 손님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매일 2,3명이었다. 가계가 풍족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손님접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마부까지 데리고 오는 손님도 있었고 어떤 손님에게는 여비까지 마련해 주었다. 여운형의 집에는 기호흥학회, 관동학회 모임도 열렸다. 여운형은 이 모임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여운형은 배재학당에서 성서입문을 가르쳤다. 윌리암 스크랜턴이 세운 상동교회에는 전덕기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애국심이 많고 덕망이 높아 그의 주위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에게 “상동파”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유명했다.  여운형은 성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고 싶었으나 서투른 조선말로 하는 곽안련 목사의 설교는 이러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었다.  자연히 여운형은 전덕기 목사의 설교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의 설교는 “가난한 자에게 기쁨을, 갇힌 자에게 해방을, 억압받은 자에게 자유를, 계급사회를 평등하게”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청년학원”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청년계몽 운동을 했다.  여기에 이시형, 이회영, 이동녕, 이상재, 여준, 주시경, 김규식, 박은식, 김구 등이 참여했다. 여운형은 이 운동에 동참하여 이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친척 아저씨 여준이 있는 것을 보고 기독교에 대한 믿음에 자신을 얻었다고 한다. 이 조직의 목적은 “기존의 합법적인 학회와 단체가 하지 못한 구국운동을 적극적이고 투쟁적으로 전개하려”는 데 있었다.


청년동지회가 조직되고 1908년에는 이상재를 중심으로 황성 기독교 청년회관(YMCA)이 준공되었다.  새로운 지식에 굶주린 젊은 청년들이 모여 일반교양에서 시국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강연회, 토론회, 환등회 등을 개최했다. 1000명에서 3000명 에이르는 청중이 모였다. 여운형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기서 여운형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여운형이 조사로 5년 동안 근무했던 승동교회는 천민층을 위한 교회였다. 설립자 무어 목사는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있는 천민층을 대상으로 교회를 시작했다. 그 결과 조선사회에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던 백정이 이 교회에 몰려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승동교회를 “백정교회”라고 불렀다. 

1908년 10월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총리대신 박정량 등 고관대작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성춘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연설을 했다. 그는 백정출신의 승동교회 교인이었다. 


여운형은 1908년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나자, 유교적인 풍습을 버리고 근대적인 기독교 신앙인의 생활을 택했다. 상투를 자르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를 해방했다. 신주와 미신적인 터주 인형을 땅에 묻거나 태워 버렸다.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주변의 양반들은 그를 야단치고 백안시하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해방된 노비들이 그에게 반말을 했다. 그는 웃으며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너희들이 받았 구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승동교회 조사로 일하기 전에 곽안련의 지원을 받아 여운형의 집안에 기독광동학교를 세워서 수신, 이과, 셩경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동대문 밖에 세워진 첫 학교였다. 


1910년 봄, 관동학회 회장 남궁 억의 요청으로 여운형은 강릉에 있는 초당 의숙에서 잠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나라가 망한 후 메이지 연호를 강제로 쓰게 하자 학교가 패쇠되어 다시 승동교회로 돌아왔다. 곽안련 목사는 여운형이 돌아온 것을 너무나 기뻐했다. 여운형이 강릉에 있는 동안 감리교와 장로교 합동으로 ‘백만인 구령’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 데 이에 여운형 같은 젊고 유능한 전도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09년 조선의 개신교 신도 수는 약 18만이었는 데 이를 1910년 1년 동안에 백만으로 늘리는 운동이었다.  여운형은 새벽 기도에 나갔다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호별 방문을 하며 전도지를 돌렸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간혹 강단에 섰다. 신도들의 반응이 좋게 나타나자 목사를 대신하여 부흥회의 연사가 되기도 했다. 그의 타고난 웅변술은 청중을 매료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입교한 사람이 수개월 동안 4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 천국 같은 기독교의 나라 조선을 세우자고 외쳤다. 나라를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청중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의 눈에는 선교를 빙자한 독립운동이었다. 1911년, 그들은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조작하여 105명의 기독교 지도자를 검거하였다(신민회 사건 또는 105인 사건). 서양 선교사들은 교회에서의 반일 운동이 일제의 교회 탄압으로 이어져서 교세 확장에 영향을 미칠 것을 크게 우려하기 시작했다. 서양 선교사들은 교회에서의 정치적인 활동을 금지하고 개인의 신앙고백에 중심을 두는 선교만을 허락했다. 여운형식의 설교는 금기였다. 이때 소위 부흥회라는 한국교회의 특징적인 행사가 탄생했다. 선교사들이 총독부의 교회탄압을 피하여 교세 확장을 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선교활동의 열이 식자, 곽안련 목사의 소개로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 1년 중 9개월은 승동교회서 일하고 3개월은 신학교에서 공부하여 2년 동안 다니다가 중국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신학교를 졸업하려면 5년간 다녀야 했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씨는 당시 형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님은 밤낮없이 생각한 끝에 일본인의 감시가 심한 국내에서 자유로운 활동은 전혀 불가능한 사실, 그리고 우리의 힘, 연약한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조국독립을 이룩할 수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형님은 유학의 길에 올랐다.” 


여운형은 서양 선교사들이 “개인의 신앙생활”만을 허용하고 “사회 정치적인 정의 구현”을 금지하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더 넓은 세상에 나가 올바른 신학을 배워 그들을 반박하고 싶었다. 


여운형 3.1 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 수립의 기반을 만들다


여운형 형제는 어디로 유학을 갈까 생각하다가 형 여운형은 중국으로 동생 여운홍은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913년 5월 곽안련 목사와 함께 만주를 방문하고 마침 집안 사람인 여준이 교장으로 있는 신흥학교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키우기는 너무나 외딴 지역이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중국으로 유학하기로 결정하고, 1914년, 언더우드의 추천을 받아 중국 난징에 있는 진링(금릉) 대학에 입학했다. 진링대학이 기독교 대학이어서 평양신학교에서 못다 한 신학공부를 마칠 생각으로 진링대학을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링대학에는 신학과가 없었다. 진링대학은 원래 문리과, 의과, 신학과의 3 과가 있는 남경서원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 장로교 아카데미였던 유니온 기독교 서원과 1910년에 합병하여 진링대학이 되었다. 그리고 신학과가 없어졌다. 아무튼 추천서를 써준 언더우드는 여운형이 장래에 종교인으로 활동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여운형에게 “당신과 같은 사람이 끝까지 신학을 연구할 것 같지는 않소. 조선의 청년들은 모두 정치적 지향성이 강하오. 나는 김규식에게도 이 같은 말을 했는 데, 당신도 분명히 정치운동을 할 것이요”라고 했다. 여운형은 할 수 없이 영문과에 입학했다. 


진링대학 재학 중에 황해도 출신 재학생 서병호를 통해서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남경 기독교 청년회(YMCA) 총무를 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질레트 선교사는 종로에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 총무였고 여운형은 운동부장이어서 서로 잘 아는 처지였다. 여운형은 그를 찾아가서 교민들의 예배를 부탁했다. 그는 그다음 날부터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보고 주일학교를 운영하게 해 주었다. 교장은 서병호, 부교장은 잘러트, 서기 겸 회계는 여운형이었다.  이 교회와 학교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이 여운형의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여운형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목사가 되어 빛을 잃고 희망에 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를 드리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겠 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교회는 상하이의 동포 교회로 흡수되었다. 신도는 약 100명 남짓이었다. 처음에는 김종상이 나중에는 선우 혁이 예배를 인도했다. 1916년 여름방학 때 여운형은 일시 귀국하여 평양 장로교 총회에 목사를 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귀국의 진짜 목적은 학비 마련이었다. 승동교회 곽안련 목사를 찾아가 학비 200원을 보조받았다. 그리고 아내와 장남을 데리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우연히 한강에 수영하려 갔다가 이범석을 만났는 데 그가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여운형은 봉천에 둘러 그를 데리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상하이로 돌아와서 여운형은 복사천로에 식구들의 거처를 마련했다. 자신은 주중에는 남경에서 학교를 다니고 주말에 상하이로 돌아와서 예배를 보았다. 2년 동안 영어와 중국어에 서툴러 고생하면서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1916년 말에 상하이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리고 1917년 1월부터는 교우 30명이 사천로 상하이 기독교청년회 회관에 모여 여운형을 전도인, 임학준을 서기, 한진교를 회계로 선출하고 여운형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직장을 구 했다. 처자까지 거느린 집안 사정이 타국에서 2년간 더 공부하기에는 벅찼기 때문이었다. 첫 직장은 영국 선교사 에드워드 에반스(Edward Evans)가 경영하는 종교 도서관 이문사서관의 영문 사무원이었다. 이듬해 정월에 상해 미국교회 연합회가 경영하는 북경로 1번지에 있는 협화서국의 위탁판매부 주임으로 직장을 옮겼다. 미국인 선교사 조지 피치(George A. Fitch)가 운영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의 상관이었던 피치 선교사는 중국 장쑤 성 소주 태생이었다. 아버지가 중국에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피치 선교사는 1909년부터 상해 기독교 청년회(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당시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중국인 엘리트를 중심으로 중국 내에 기독교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피치 선교사는 향후 여운형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된다.


조지 피치는 일제에 강점당한 조선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여운형은 상하이 교민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여운형이 30-40명에 달하는 한인들의 미국 유학을 알선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그는 또한 조선인들의 중국학교 입학도 도와주었다. 


여운형은 상당히 높은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자기 쓸 돈까지 퍼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낮에는 서점에서 일하고 저녁때에는 담배나 양말을 팔아서 용돈을 마련했다. 한 미국교포는 당시의 여운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상해 6개 대학에서 활동하는 젊은 한국학생들은 여선생의 격려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 선생은 75원의 봉급을 타오면 많은 학생을 앉혀 놓고 그 자리에서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일어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한 푼도 넘겨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집으로 돌아갈 전차비도 없이 걸어가야 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목격하던 가까운 친우들은 여선생의 봉급 날 선생의 한 달 치 식생활비와 전차비를 제하고 나머지 돈을 건네주고 있었다. … 상해에 10여 개월 머무는 동안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선생을…. 청년과 민족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독립운동의 애국자라고 믿고 싶다.”


다음은 여운형에 대한 상하이 일본신문 보도이다.


“상해에서의 여씨는 낮에는 출근하고 저녁과 밤이 되면 반드시 양말 행상을 나간다고 한다. 즉 아침이 되면 좋은 양복을 입고 카이젤 수염을 갖춘 채 출근하지만, 퇴근 시간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양말을 넣고, 편지봉투등을 넣은 바구니를 가지고 프랑스 조계와 공동조계에 사는 외국인 집을 방문하여 양말과 담배를 팔아서 그 행상으로 벌은 적은 돈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거액의 돈을 만질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 데도 사용에는 일체 손대지 않고 양말 행상으로 사는 씨였다고 한다.”


1918년 여름, 여운형은 직장 휴가를 이용하여 평북 선천에서 열리는 장로회 총회에 상해대표로 참가했다.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세운 이승훈 장로와 선천교회 목사 양전백,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 기독교청년회의 이상재 등을 만났다. 표면적인 목적은 1917년에 기각되었던 목사 파견을 재 청구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이들과 국제정세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1차 대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의 국제정세의 변화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논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총회 중 참석자들의 발언에서 이것을 엿볼 수 있다. 1918년 8월 15일 양전백 목사는 “우리는 떠도는 들개처럼 가련한 민족이 되었으나…. 장래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다’는 발언을 했고, 이승훈 장로도 16일 “우리 민족은 무엇 때문에 패퇴했고 무엇 때문에 현재와 같은 경우에 처하게 되었는 가. 이제 와서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으나 제씨가 이미 뇌리에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으니 이를 잠시라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런 발언들은 종교 총회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여운형은 이때 경신학교 학생들을 모여 놓고 ‘어머니의 사랑과 모국’이라는 제목으로 2시간 동안 감동적인 강연을 하여 모인 학생, 교사, 학부형들의 눈물을 자아 내게 하였다. 


여운형의 전기 <혈농어수>의 저자 강준식은 이승훈이 3.1 운동의 기독교 측 발기인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 동기가 1918년 8월 여운형이 선천을 방문하여 상해에서 관찰한 세계정세를 전달해 준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여운형도 이 장로교 실력자들과 만남이 앞으로 자신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부연했다.  


앞으로 갈 길이 확실해진 여운형은 상해로 돌아와서 1918년 가을 신석우 등과 함께 상하이 거주 교포 약 100명을 모아 상해고려교민친목회라는 거류민단을 조직했다. 그는 만장일치로 단장(총무)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소식”이라는 유인물을 발행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그리고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연합국, 동맹국 그리고 전쟁에 관여했던 국가의 대표가 모여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었다. 32개국이 참석한 이른바 파리강화회의였다. 파리강화 회의가 열리기 열흘 전인 1919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위드로우 윌슨은 연두교서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국민적 열망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오로지 국민적 동의에 의해서 만이 국민을 통치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습니다. “자결”은 한갓 경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치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주시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행동의 원칙입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대부분의 약소국가들은 강대국의 식민지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 세계 약소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여운형을 비롯한 당시 상해에 망명해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찾아 헤매고 있던 조선인 엘리트들에게도 더할 수 없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1918년 11월, 미국 윌슨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이 상하이 칼튼 카페에서 연설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찰스 리처드 크레인은 시카고 출신의 재벌이었다. 1912년 대선 때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억압받는 소수민족을 돕는 데 관심이 많았다. 부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소수민족의 해방에 기여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중요한 관심은 중동의 아랍 민족에 있었다. 윌슨 대통령은 그를 오토만 제국의 식민지였던 발칸반도와 중동 지역 민족의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한 방안을 그에게 맡겨 마련하게 하였다. 그는 파리 강화 회의의 미국 대표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중국에 왔고 중국 대사로 임명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참고로 그는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윌슨 대통령에게 전후 처리 문제를 처리하는 데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태평양 건너편의 나라 사정을 잘 알아야 한다고 건의하여 윌슨의 특사로 일본과 한반도를 거쳐 중국에 왔다고 한다. 


여운형은 자신이 일하고 있던 협화서국 사장 피치 박사에게 크레인 환영연에 참석하고 싶다고 입장권을 부탁했다. 피치 사장의 아들 비오생이 입장권을 구해 주어 1918년 11월 28일 칼튼 카페에 입장하여 그의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연회장에는 중국과 각국의 고위 명사 약 1천 명이 참석하여 대 성황을 이루었다.  크레인  특사는 그해 년두교서에서 발표한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의 세계평화를 위한 제안과 민족자결주의를 선전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연설을 경청한 여운형은 조선도 독립할 수 있는 지를 그의 입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만나서 직접 그에게 물어봐야 했다. 크레인을 잘 아는 사람의 소개가 필요했다. 크레인 환영회를 주최한 중국인 왕정정이 떠 올랐다. 여운형은 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통해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후에 국민당 정부의 외교부장을 지냈다. 밤늦게까지 기다려 크레인과 독대한 여운형은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가?”라고 물었다. 자신이 조선의 독립여부를 대답할 입장은 아니지만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 대표를 참가시키라고 조언했다. 

이 말에 크게 고무된 여운형은 즉시 장덕수, 조동호와 함께 윌슨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영문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그 초고를 피치 박사에게 보여 주고 수정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때 피치박사가 청원서는 개인자격으로 보낼 수 없고 기관이나 단체 명의로 보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이 청원서를 보내기 위해서 급하게 만든 정당이 신한 청년당이었다.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이 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독립전쟁을 일으켜 현재의 터키를 건설한 터키의 전설적인 인물이 (무스타파) 케말 파샤이다. 당시에 그는 “터키 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상해에서 터키인 아르멜 베이를 사귀었고 그로부터 터키 청년당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신한청년당”은 “터키청년당”을 본뜬 것이었다. 당시에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젊은 지식인 장덕수, 조동호, 김철, 선우 혁, 한진교, 여운형 모두 6명이었다. 


이때 작성된 1통의 편지와 4쪽의 청원서가 미국 콜럼비아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수년 전에 발견했지만 윌슨 대통령에게 전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강화 회의에 파견할 조선 대표로 추천했고 신한청년당 당원들 모두가 찬성했다. 김규식은 당시 몽고와 접경지대에 있는 장가구의 앤더슨 마이어라는 미국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규식은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언더우드는 그를 미국에서 교육시켰다. 미국 버지니아에 있는 르노크 대학을 졸업했다. 자연히 영어에 능통했고 서양 풍습에 익숙하여 파리강화회의 대표로는 적격이었다. 김규식은 신한 청년당에 입당하여 이사장이 되었다.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장덕수가 국내에 들어가 부산의 백산상회 안희제로부터 3천 원의 성금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고 여운형은 상해 교포들의 성금 1천 원을 모았고, 김규식이 사재 2천 원을 내놓았다. 


나라가 없는 민족은 여권을 가질 수가 없다. 여운형은 손문에게 부탁하여 김규식에게 중국 여권을 마련해 주었다. 기독교 청년회를 통해서 알게 된 언론인 선 겸이 손문을 소개해 주었다. 손문은 여운형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중국 대표로 갈 진우인과 오조추를 소개해 주며 파리에서 김규식과 같이 행동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김규식이 타고 갈 배표를 알아보니 3,4월 분까지 매진되어 모두 당황하고 있던 차에 손문의 중국 대표단 중의 불어 통역을 맡았던 정육수에게 어려운 사정을 알렸다. 그는 대표단들 표 중에 일부를 김규식 일행에게 양보하여 배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준비가 완료되어 신한 청년당 당원, 여운형과 김규식이 모인 자리에서 김규식이 “조선의 존재를 세계 각국에 알리는 모종의 운동이 조선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그의 부인 김순애 여사는 김규식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고했다.


“내가 떠나기는 하되 세계각국 대표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 리가 없다. 지도상에 보더라도 조선반도는 쌀알만큼 밖에 나타나 있지 않고, 코리아라는 나라는 거의 알려지지를 않았다. 내가 만일 정식 대표라면 회의 석상에 좌석이 있고 발언권이 있겠지만 나는 방청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 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단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가는 사람은 희생을 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리나라 독립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바로 이 김규식의 제안이 독립운동사에 기리 남을 3.1 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김규식의 제안에 십분 동의했고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김규식은 민족의 궐기를 주문하고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파리로 향했다. 


여운형은 1919년 1월 20일경 만주와 연해주 지방으로 향했다. 당시에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백만이 넘는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고 일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지역이었다. 목적은 조선의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한 대대적인 시위 계획과 이에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 모금이었다. 

가는 길에 북경에 들려 천주교 계통의 중국어 일간지 익세보의 주필 선 겸을 만나서 신한청년단의 거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전달했다. 이것은 1919년 2월 18일 자 익세보에 실렸다. 

여운형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익명을 사용하고 장사꾼으로 변장했다. 장춘에 도착하여 심영구의 집에 묵었다. 이때 길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집안사람 여준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수리스크에서 박은식, 문창범, 조완구를 만나서 거사에 관한 계획을 알리자 이들은 장차 상해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여운형은 이동녕, 원세훈, 이승복 형제를 만나서 거사 계획을 알리고 행동을 같이 할 것을 부탁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에는 한인마을 신한촌이 있었다. 이곳 한인 거류민단장 채성하의 집에 머물렀다. 강우규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났다. 여기서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내라고 권고했다. 

여운형은 만나는 사람마다 설득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연설을 했다. 그의 줄충한 언변과 웅변술, 그리고 나라에 대한 애정은 교민들을 감동시켰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게 했다. 러시아 교민 단체인 전로한족회를 국민의회로 개편하고 한족회 간부였던 윤해와 고창일을 파리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여운형은 약 한 달 동안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머물렀다. 간도 지역에서 여운형을 만나러 간민회를 세운 김약연 목사와 총무 정재면 목사가 여운형을 만나러 왔다. 당시 러시아는 내전 중이었다. 백군 편에 서서 싸우던 채코 군 사령관 카이더 장군의 보호를 받으며 상하이로 돌아오는 길에 하얼빈 어떤 여관에 묶었다. 이때 아편 밀매상을 하는 한인 한명성으로부터 3.1 운동 소식을 들었다. 여운형은 신문 조서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월 6,7일경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한 후, 하얼빈의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여관에 체재하던 중 아편밀매업자인 한명성을 만났다. 그때 조선에서 독립만세사건이 일어나 들썩거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보다 자세한 얘기는 다시 장춘에 와서 1박할 때 위혜림이라는 자가 해 주었는 데, 그는 수만 명이 조선에서 소동을 일으켜 철도도 경계가 엄중하다고 했다. 나는 봉천에는 들리지 않고 만세사건의 동기와 그 시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듣기 위해 급히 상해로 갔다.”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를 방문하여 독립성금 5만 엔을 모금했다. 그리고 만주의 동포들이 3월 13일 용정촌에서, 연해주의 동포들이 3월 17일 니콜리스크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를 벌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18년 1월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 후 약소민족 독립에 관한 기사들이 많이 보도되었다.  1918년 12월 일본 고베의 영국 영자 신문과 아사히 신문에 실린 조선 독립에 관한 기사는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을 흥분하게 했다. 1919년 1월 6일 동경의 간다에 있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었는 데 “지금이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합한 시기”라는 데 전원 합의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운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하고 실행 위원으로 10명을 선출했다. 


다음날 기독교 청년회관에 유학생 약 200명이 모인 자리에서 실행위원들의 결의사항을 보고 하고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고 이광수와 김철수를 실행 위위원에 위촉하여 실행위원은 11명이 되었다.   

여윤형은 신한청년당 당원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했다. 장덕수는 1919년 1월 8일에 일본에 들어와서 2월 3일 동경에 도착하여 <학지광>의 편집장 최팔용을 만났다. 학지광은 조선인 동경유학생들의 기관지였다. 장덕수를 만난 최팔용은 동경유학생들이 파리강화회의에 정덕수를 파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장덕수는 상해에서 이미 신한 청년당이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 주고 그가 왜 적격자인지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한편 미국 유학 중이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형의 연락을 받고 1919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1월 말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2월 1일에 동경에 들어왔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 중이던 사촌 여운일의 소개로 최팔용 등 일본유학생들을 만났다. 그는 그들에게 해외정세와 형이 하는 일을 설명하고 유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최팔용은 벌써 유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귀띔해 주었다. 


이광수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1919년 2월 6일 최팔용은 일어로 번역된 독립선언문을 동경 시바구 고야마마찌에 있는 이토오 인쇄소에서 1천 부를 인쇄했다. 영문본과 국문본은 7일 밤 김의술의 집에서 타자를 치고 가리방을 긁어 등사판으로 밀어 만들었다. 2월 8일 아침 각국 대사관, 일본정부, 국회, 조선총독부, 각 신문사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날 오후 2시, 간다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400명이 모여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최팔용과 실행위원 10명은 2.8 독립선언 직전에 이 사실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서 송계백과 최근우를 서울로 보냈다. 그들은 독립선언문을 베껴서 중앙학교 교감 현상윤과 교장 송진우에게 전달했다. 보성학교 출신이었던 현상윤은 보성학교 교장 최린에게 건네어주었다. 천도교 신자였던 최린은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에게 전달했다. 동경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했다는 말을 들은 손병희는 “외국에서 젊은 사람들이 그처럼 활약하고 있다면 우리도 호응해야지”라고 국내에서의 거사를 할 의향을 보였다. 


여운형은 좀 더 적극적으로 국내에서의 궐기를 획책했다. 그는 선우 혁, 서병호, 김순애, 백남규, 한 송계등 신한 청년당 당원을 국내에 파견했다. 이중에 선우 혁은 국내 기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여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이 대거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그는 1월 25일에 상하이를 떠나 2월 초에 선천에 도착했다. 정주와 평양을 돌며 이승훈 장로, 양전백목사, 길선주 목사를 만나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가 파견되었음을 알리고 조선민족의 대궐기의 필여성을 역설했다. 그는 당대의 기독교 유력자들이었던 강규찬, 김동원, 김성탁, 도인권, 변인서, 한 세 항, 윤성도, 이덕환 등을 만나서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당시에 전국 각처의 교회는 조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잘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이 운동에 기독교인들의 참여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다. 김철은 천도교 본부를 방문하여 같은 소식을 전했다. 천도교의 조직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천도교 측은 3만 엔의 송금을 약속했다. 


김규식의 두 번째 부인 김순애는 결혼한 지 15일 만에 남편 김규식을 파리로 보내야 했다. 그는 국내에 파리 강회회의에 김규식을 조선 대표로 파견했다는 사실과 이에 따른 국민봉기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한 국내 잠입을 자청했다. 당시에 상하이에서 국내에 들어온 서병호는 그의 형부이고 김마리아는 그의 종고모이다. 그는 상하이에서 부산에 도착하여 백신영을 만나고 대구에서 김마리아, 서울에서 함태영을 만났다. 김순애는 국내에 남아 3.1 운동에 동참하려 했으나 한태영과 김성수가 말려서 2월 28일 만주로 망명했다. 


장덕수는 2월 17일 동경을 떠나 2월 20일 경성에 돌아온 뒤 이상재를 비롯한 사회지도층과 청년 동지들을 만나서 상하이와 도쿄의 현황을 전해주었다. 일경의 추격을 피하려고 인천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었다. 

장덕수는 여운홍을 2월 14일 우에노 공원에서 접촉하여 여운형이 준 편지를 전달했다. 여운홍은 그 편지에 담긴 형의 지시대로 국내에 잠입하여 이상재, 최남선, 함태영, 이갑성 등을 만나서 궐기를 촉구했다. 이는 장덕수가 만난 인맥과 같은 사람들이다. 


상해에서 파견된 선우 혁의 권유를 받은 이승훈은 기독교 측의 세를 모아서 궐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천도교 측에서 연락이 와서 이승훈은 2월 11일 상경했다. 2월 21일에 최남선이 이승훈을 찾아왔다. 그들은 같이 최린의 집을 찾아가서 거사를 논의했고 모두 같이 행동하기로 합의했다. 천도교 측은 이승훈에게 기독교 측 거사준비 자금으로 5천 엔을 주었다. 


천도교 측은 손병희를 비롯한 15명이 2월 25일부터 3일간에 걸쳐서 서명했다.  기독교 측에서는 2월 26일 이승훈, 양전박, 박히도등이 한강 인도교에서 만나 서명할 사람을 결정하고 16명이 서명했다. 여기에 불교 측에서 한용훈, 백용성 스님이 서명하여 33인이 완성되었다. 


독립선언문은 최남선이 2월 11일 탈고하였다. 그리고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2월 20일부터 인쇄에 돌입했다. 2월 27일 밤까지 3만 5천 매가 인쇄되어 28일 아침부터 전국 각지에 배포되었다. 당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교회, 학교, 병원뿐이었다. 자연히 기독교 계가 독립선언문 전달에 큰 역할을 했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 날에 하려고 했으나 그날 소란을 피우는 것은 황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3월 1일로 거사 날을 정했다. 처음 만세 운동이 시작된 곳은 서울의 파고다 공원과 기독교 신자가 많은 이북의  평양, 선천, 안주, 의주, 원산 등 6개 도시였다. 다음날, 3월 2일, 에도 함흥, 수안, 황주, 중화, 강서, 대동, 해주, 개성등 이북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이남에서는 충남 예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4일에는 전라북도 옥구에서 3월 8일에는 대구, 3월 10일에는 전라도 광주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만주, 미주, 일본등 해외 교민들의 만세운동은 3월 10일 이후에 이루어졌다.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이후 3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집회 횟수는 1,542회였고, 참가인원수는 202만 3,089명이었다. 사망자는 7,509명, 부상자는 1만 5,961명, 검거자는 4만 6,048명이었다.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가 불에 탔다. 


3.1 운동은 일제가 조선에 강압적인 무단정치를 비교적 유화적인 문화정치로 바꾸게 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에서의 무장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했다. 이 운동은 김규식이 제안하여 여운형괴 신한청년당이 국내의 지사들을 자극하여 이루어 낸 거사라고 생각한다. 


3.1 운동 후 조선에서 현순, 손정도, 신익희, 최창식이, 일본에서 이광수, 최근우가, 시베리아와 회북에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신채호, 김동삼 등 30여 명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여운홍도 상해로 와서 형 야운형과 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때까지 독립운동의 본거지는 만주와 연해주였다. 그러나 여운형이 상하이에서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파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독립지사들이 상해로 몰려들었다. 물론 여운형과 신한 청년당 당원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인사들에게 상해로 올 것을 권유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상해의 주인이었고 이들은 손님이었다. 여운형은 이들을 성심껏 맞이했다. 자신의 거처가 있는 하비로 부근의 보창로 329번지에 독립임시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들이 말해주는 각처의 독립운동 현황을 언론에 알림과 동시에 김규식에게도 이 현황을 전달했다.


여운형은 조선 사람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등사판으로 긁은 독립신보를 발간했고 영문판도 만들어 신문사와 외국인들에게 배포했다. 3.1 운동 직후 조선을 빠져나온 선교사등 외국인에게서 들은 목격담과 그들이 가지고 온 전단을 영문판에 실었다. 이 영문판 신문은 당시에 중국에 와 있던 뉴욕타임스, 뉴욕 이브닝 저널등의 미국신문과 차이나프레스, 패킹데릴리뉴스 기자들에게 조선의 3.1 운동 현황에 대한 기사를 쓰기에 충분한 소스가 되어 3.1 운동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4월 19일, 오전 10시, 프랑스 조계 하비로에 있는 어느 외국인 집에서 상하이에 망명한 독립지사들의 회의가 열렸다. 여운형은 회의의 목적이 독립운동을 총괄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기 위에서 라고 믿고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뜻밖에 조소앙이 회의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이라고 하자고 동의하고 신석우가 제청하여 가결되었다. 그리고 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와 백남칠이 선출되었다.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이 정부수립을 제안했다. 여운형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정부란 주권, 국토, 인민이 있어야 하는 데 세 가지가 모두 없고, 정부를 세우면 체면 유지비가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그 명의가 태중 하여 운영도 곤란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설명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국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가능성이 희박하고 일본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마당에 임시정부를 세우면 일본의 경계심만 자극하여 감시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안은 거수 표결에 부쳐져 통과되었다. 여운형은 “구한국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에도 반대했다. 그러나 표결에 부쳐진 결과 다수가 찬성하여 통과되었다.

신석우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하자, 여운형이 대한 이란 말은 조선왕조 말엽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이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부흥하자”라고 대응하여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신생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운형을 초대 외무부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여운형은 외무부 위원장 자격으로 프랑스 영사 윌당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서 설명하고 일제로부터의 보호를 의뢰했다. 프랑스 정부에게도 이를 알렸다. 이와 같은 여운형의 노력은 향 후 임시정부 요인들을 일경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5월 중순경에 미국에서 안창호가 상해를 방문했다. 그는 관제 개혁을 주장했고 6월에 그의 의견에 따라  관제가 바뀌었다.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 외무부 총장에 박용만, 외무부 차장에 여운형이 임명되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미국에 있어서 사실상 실무를 볼 수 없었다. 여운형은 외부부위원장에서 차장으로 격하된 것이었다.  여운형은 이후로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게 된다. 아마 해방 후에도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그의 행보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나는 임시정부의 조직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한 정부 따위는 만들지 않더라도 어떤 단체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는 한편 관제의 기안에 대해서도 대통령 이하 7등까지 여러 가지 규정이 정해져 있기에 복잡한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해서 반대했다. ….”


1922년 그는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조직했던 신한청년당의 모든 시설과 집기물을 임정에 반납하고 당을 자진 해산했다. 그는 명분뿐인 임시정부를 만들어서 감투싸움과 파벌싸움을 조장하느니 모두 힘을 합쳐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실익을 추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여운형 일본 정치인들 앞에서 연설하다


3.1 운동을 진압하느라고 신경이 곤두서있는 일본정부에게 상해임시정부의 설립 소식은 그들을 무척 당황하게 했다. 일본 정부는 그들에게 반항하는 불순한 조선인들의 대대적 검거에 나섰다. 일본 경시청 특수내선과의 이우명 경부, 조선총독부 황옥 경시, 한경순 경부등 민완형사를 상하이로 파견했다. 


프랑스 조계에서 일본경찰은 프랑스 영사관의 협조 없이는 효과적인 수사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밀정을 고용하여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요주의 인물 22인의 명단을 만들었다. 여운형도 이중에 하나였다. 

1919년 5 월 초, 조선 총독부는 22명 전원을 체포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서는 프랑스 영사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리요시 아키라 일본총영사가 앙리 A. 윌당 프랑스 영사를 방문하여 “귀 조계 안에서 활동하는 조선 가정부(임시정부) 요인 22명의 체포를 용인해 주면 우리는 귀국이 잡고 싶어 하는 재일 베트남 독립운동가 콩데를 넘겨주겠다”라고 제안했다.

윌당 총영사는 여운형이 외무부위위원장 자격으로 자기를 찾아와서 임정에 관한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임정에 동정적이었다. “22명 대 1명은 너무 불공평하다” 며 이를 정중이 거절했다.


5월 13일, 아리요시 총영사는 다시 윌당 프랑스 총영사를 찾아가서 22명 대신 여운형, 이시영, 손정도 3명만 체포하겠으니 묵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윌당은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의 훈령을 얻은 뒤에 조선인에 대한 처분에 착수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사실상 아리요시의 요청에 대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오카모토 경시, 선우 갑 경부, 니 이사카 경부 등은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프랑스 조계 보창로 어양리 11번지의 여운형 집을 급습했다. 그런데 여운형은 집에 없었다. 윌당 총영사가 사람을 보내 일경이 체포하려 올 것이니 피신하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화가 난 오카모토 등은 우연히 수색 중 걸려든 신석우와 윤원삼을 영장도 없이 체포하여 5.15일 조선으로 이송했다. 여운형은 즉각 임시정부 파리대표부의 김규식에게 연락했다. 그는 프랑스 외무성에 ‘극사범에 대한 국제법 위반’이란 제목의 항의서를 제출했다. 프랑스 외무성은 신중히 조사해 보겠다는 답을 보냈다. 


여운형은 프랑스인 고문 변호사로 하여금 이를 규탄하게 함과 동시에 차이나 프레스, 상하이가제트 등의 영자신문에 “일본 경찰이 영장도 없이 자의적으로 정치범을 사기 강도 죄의 명목으로 체포하여 이송했다”는 기사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상하이 여론이 들끓었다.


5월 20일,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관은 공사 대리 모그라 서기관을 일본공사관에 보내”본건의 조선인은 사실상 정치범인데, 상하이에서는 대대적 물의를 일으킨 일본을 비방하고 있다”면서 일본 공사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곧이어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관은 앞으로 일본의 체포 교섭에는 응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후 프랑스 측은 단순한 형사범 체포에도 증서작성을 거부함으로써 일본 측의 프랑스 조계에서의 수사 활동에 커다란 제한을 주었다. 반면에 여운형의 재빠른 외교적 조치에 힘입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임시정부는 프랑스 상하이 총영사관의 보호로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3.1 운동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무단정치를 회유적인 문화정책으로 바꾸게 한 원동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 내에서도 1910-1925년 사이에 소위 다이쇼 데모크러시라고 하는 민간인 주도의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당시의 하라 다카시 수상은 평민출신이고 일본 역사상 최초의 의회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선출된 수상이었다. 물론 3.1 운동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문화정책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대의 조류에 어긋나는 정책은 아니었다. 


조선의 선교사들은 일본에 가사 하라 수상을 예방하고 총독부의 학정이 만세운동을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국제적인 압력이었다. 하라 수상은 척식국 장관 고가 렌조 오를 불러 조선에 자치운동을 벌일 사람을 물색하라고 지시했다. 고가 장관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에게 이 일을 맡겼다. 당시에 조선인과 일본인들 사이에 조선에게 자치권을 주어 통치하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외교권과 국방은 일본이 맡고 조선인이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이었다. 


1919년 2월 20일, 그는 기무라 겐지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은밀히 인천에서 검거된 장덕수와 접촉하여 여운형이 3.1 운동의 촉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확인했다. 일본은 아마 그를 회유하여 조선에게 자치권을 주고 그로 하여금 조선을 다스리게 하면 한반도를 조용하게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중의원 의원 야마미치 죠오이치는 “…. 당시 외무 총장이었던 여운형이 외무부차장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여운형이 임시정부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독립운동에 염증을 낼지 모른다는 장덕수의 말에 따라 여운형을 끌어들이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26년 후, 1945년 8월 15일 총독부가 치안권을 여운형에 맡긴 것을 상기하면 일본지도층이 여운형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이 교회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조선 총독부는 일본인 목사를 동원하여 여운형 포섭 작전에 나섰다. 일본정부로부터 공작비를 타내기 위해서 이런 일을 나서서 하는 목사들이 있었다. 조합교회의 와타세 쓰네기치 목사와 무라카미 다다키치목사가 자원했다.  와타세 목사는 조선 안에서 활동했다. 무라카와가 상해로 갔다. 조선인 유력자들을 만나서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입국할 수 없는 망명자다. 총독부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여러분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라고 하여 자신의 신분을 감추었다. 그리고 여운형과 수년 동안 기독교청년회에서 같이 활동을 하면서 친분이 있던 후지타 유우코우 목사에게 여운형을 포섭하는 일을 맡겼다. 후치타의 소개로 협화서국의 사장 피치박사의 둘째 아들 비오생을 대동하고 6월 22일 북경로 제18호에 있는 한인 교회로 여운형을 찾아갔다. 


여운형은 한인 신도 170명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당시 상하이에 교민 수가 700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70명은 상당한 숫자였다. 여운형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무라카미 목사는 여운형을 포섭하면 조선독립운동자들 내부의 분열을 조장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6월 30일 본국으로 돌아가서 정부에 조선 독립운동을 저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강압이 아니라 내부 분열이라고 보고했다. 


무라카미는 7월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는 후지타 목사와 후루야 마고타로오 목사를 앞세워 여운형 포섭을 계속했다. 후루야는 상하이 기독교청년회 총무 비오생에게 부탁하여 여운형을 설득했다. 여운형이 이에 응하지 않자, 이번에는 후지타 목사가 상하이 일본기독교 청년회 총무 기무라 기요마스 목사로 하여금 여운형에게 “일본정부가 조선의 민족문제를 상담하고자 당신을 초청하는 것이니 응하라”하며 접근하게 했다. 일본 측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여운형은 신변보증을 요구했다. 다음날 고가 척식장관으로부터 신변안전을 보증하겠다는 답이 왔다. 야마사키 게이이치 신임 일본 총영사도 프랑스 윌당 총영사를 통해 신변안전을 약속했다. 


그래도 선뜩 나서기가 힘들었던 여운형은 손문을 찾아갔다. 그는 “가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일본인들에게 알리라”라고 하며 여운형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중국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기무라 목사, 후지타 유우코우 일본기독교청년회 총무, 조설경 중국기독교청년회 총무,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서양신문사 기자 3명 등과 상의한 다음 일본에 갈 결심을 했다. 


이 사실이 임정에 알려지자 임정요인들은 찬반으로 갈렸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임정 포고령 1호를 발동하여 여운형 일본 방문 금지령을 내렸다.  신채호와 한위건은 원수와 무슨 대화를 하느냐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광수와 윤현진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안창호는 적을 알아야 한다며 방문 비용으로 쓰라고 3백 원을 내놓았다. 


일본 방분 초청을 수락하기로 결심한 여운형은 하위도에 유배 중인 장덕수가 통역으로 꼭 수행해야 하니 그를 석방시켜 주면 초청에 응하겠다고 일본 영사관에 통고했다. 일본 측에서 좋다는 답이 왔다. 임시정부는 여운형을 감시하기 위해서 최근우를 딸려 보냈다. 이외에 승려 신상완을 대동하고 여운형은 1919년 11월 14일 아침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우편선 가스가 마루에 몸을 실었다. 


동경에 도착한 여운형은 일본 고위층 관료들과 여러 번 만났다. 일본 측은 하나 같이 여운형에게 조선을 일본의 자치국으로 하는 것이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 최선이라고 설명하려 했다.

여운형은 고가 척식국 장관을 6번 만났다. 그는 “한 회사가 실력이 부족하면 실력 있는 다른 회사와 병합하는 것이 쌍방의 이익이듯 일한합병 또한 그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여운형은 “회사는 영리를 위해서 설립한 것이지만… 국가는 사회의 실체요 역사의 장성이며 도덕의 존재요 사법의 실체이니 개인은 죽음이 있지만 국가는 영속하는 것인 즉 국가를 위해 이익을 희생시키는 애국이라는 의가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여 이를 반박했다.  


다나카 육군장관은 두 번 만났다. 다나카가 “우리 제국 군대는 조선인 2천만을 다 도륙할 실력이 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운형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논어에 나와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하여 그의 협박에 응수했다.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어도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는 논어의 구절을 들어 “자신의 목숨은 빼앗을 수 있어도 조선독립의 의지는 빼앗을 수 없다”라고 받아쳤다. 동행한 최근우는 이러한 여운형의 발언을 임시정부 기관지에 알려 연재했다. 1919년 11월 27일 오후 3시, 여운형은 제국호텔에서 홀에 가득 찬 각계인사 500명이 모인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었다. 6척의 키에 80 킬로의 몸무게, 균형 잡힌 체격, 잘 생긴 얼굴을 가진 여운형은 장내를 압도했다. 여운형은 조선말로 말했다. 그리고 장덕수가 일본말로 번역했다. 


“….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 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 새벽 어느 집에 닭이 울면 이웃집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다른 닭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때가 와서 우는 것이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적으로 발작된 것이 조선의 독립운동이다. 결코 민족자결주의에 도취된 것이 아니다. 신은 오직 평화와 행복을 우리에게 주려 한다. 과거의 약탈, 살육을 중지하고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 신의 뜻이다. 세계를 개척하고 개조로 달려 나가 평화적 천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여운형 도쿄 제국 호텔 연설문 중에서(여운형 평전 이기형 지음 실천 문학사 P135)


연설이 끝나자 청중은 모두 일어나서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서양기자들의 질문에 여운형은 영어로 대답했다. 질의응답은 1시간 반 가량 계속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크게 당황했다. 사전에 여운형과 고가 장관은 연설 내용에 대해서 사전 조율을 했었는 데 여운형은 전혀 다른 내용의 연설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여운형을 회유하기 위해서 써먹었던 정치운동이나 참정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조선 총독부는 여운형이 언론에 대서특필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이강의 상하이 망명사건을 터뜨리고 여성독립단 적발사건을 공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의 국제호텔 연설은 동경아사히신문, 동경일일신문, 오오카마이니치 신문등에 중요한 뉴스로 다루어졌으며 영자신문 더 재팬 어드버타이저에 자세히 보도되었다. 최근우는 여운형의 활약상을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상세히 보도했다.

당대의 사상가로 잘 알려진 동경제대 정치학 교수 요시노 사쿠조오는 “여씨의 주장 가운데는 확실히 하나의 침범하기 어려운 정의의 섬광이 엿보인다. 그 품격에 있어서 나는 드물게 보는 존경할 만한 인격을 그에게서 발견했다”라고 여운형을 극찬했다. 각 신문과 잡지에 그의 연설과 일본방문 행적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일본 열도를 놀라게 했으며, 문인, 학자, 사상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일본 의회 또한 크게 동요했다. 하라 수상과 관계 장관을 의회로 불러 이 문제를 격렬히 추궁했다. 귀족원 의원 다카하시 사쿠에를 비롯한 5명의 대의원이 14회에 걸쳐 대정부 질문을 했다. 하라 수상을 비롯한 7명의 대신이 답변을 하기 의해서 12회나 의정 단상에 나가야 했다. 결국 하라 내각은 “불령선인(일본에 복종하지 않는 불순한 조선인) 제1호 인물을 일본에 불러들여 독립을 외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내각 사퇴 압력을 받았다. 여운형의 일본행을 강력히 반대했던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는 국무총리 포고령 제2호를 발표하여 여운형의 일본방문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임시정부의 첫 대외적 성과였다. 


여운형 레닌 만나다


1920년 3월 1일 여운형은 우리 민족 최초의 3.1 운동 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상하이 교민 단장이었던 그는 어느 중국인 학교 운동장에서 동포 700명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게양하고 올드랭사인 곡의 애국가를 부른 다음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 민족이 노예가 된 지 어언 10년, 앞서 감옥에 갇혀 목숨을 바친 많은 지사들과 2천만 동포가 독립을 선언 한지 이미 1주년이 되었습니다. 나는 나라를 떠난 이래 7년 동안,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중국의 쌍십절인 10월 10일 등 남의 나라 경축식에 참석할 떼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제 10년 동안 보지 못했던 국기를 다시 계양하고, 10년 동안 입에 올리지 못했던 애국가를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포 여러분, 게양대에 높이 올린 저 태극기를 다시 장롱 속에 처 박아 놓을 것입니까? 한번 높이 게양한 깃발은 이제로부터 영원히 빛나게 합시다.”


3.1 운동의 기획자 다운 말씀이었다. 그는 3.1 운동을 기획했고 임시정부의 초석을 다진 우리 민족의 영웅이었다. 


나라를 다시 찾으려는 독립운동가들은 그 근거지를 러시아와 중국 대륙에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광대한 대륙에 공산주의가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지주를 부정하고 소작농에게 토지를 약속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한 다는 공산주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적어도 배척할 아무런 이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7년 11월 15일, 레닌은 러시아 내의 100여 개의 소수민족에게 민족 자결을 원칙으로 하는 <러시아제민족의 권리선언>을 선포하였다. 그후 그는 코민테른 등을 통해서 세계의 모든 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윌슨 대통령의 1918년1눨 8일 연두교서 연설에서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기 불과 2달 전의 일이다. 따라서 연해주와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가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이동휘이다. 


이 무렵 중국 또한 공산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기폭제가 5.4 운동이다. 1884년부터 1894년까지 조선을 사실상 지배했던 위안스카이는 1911년 청나라를 접수했다. 말하자면 혁명(신해혁명)은 쑨원(손문)이 일으키고 그 열매는 위안스카이가 따먹은 격이 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이 유럽 전선에 골몰하고 있는 동안 일본은 청도 주위의 산둥반도와 남양군도등 독일의 아시아 식민지를 접수했다. 그리고 1915년,  위안스카이에게 21개 조 항의 요구를 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만주, 산동성, 푸젠 성, 내몽고가 일본의 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과 싸울 군사력도 없었지만 일본이 그의 황제 등극을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황제에 등극하기 전에 사망했다. 그를 승계한 군벌정부는 연합국으로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일본과 같은 편이었다. 승전하면 산둥반도를 일본으로부터 돌려받고 21개 조 요구 사항 취소를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리 강화 회의 분위기는 중국이 기대했던 것과는 멀었다. 승승장구하는 일본의 요구는 관철되었지만 힘이 없는 중국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1919년 5월 4일, 이 소식을 들은 북경대학생들은 분개했다. 약 3000명의 학생과 교수들이 텐엔만 광장에 나와 파리강화대회 결정에 대한 항의 시위의 불을 댕겼다. 이후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은 물론 향 후 수년에 걸쳐 새로운 개혁이 진행되었다. 구미국가에 대한 불신, 이에서 비롯한 반 기독교 운동, 유교문화 배척, 그리고 새로운 중국인의 정신적 지주로 공산주의를 택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중국 내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레닌의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이 중국에 파고들었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고 마오가 등장한다. 


상하이에 본부를 둔 임시정부도 이러한 조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걸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으나 승전국들은 모두 일본 편이었지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3.1 운동 또한 승전국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은 일본과 러시아와의 관계에 따라 그 흥망이 좌우되었다.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동안 독일과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러시아 국내에서 조선 독립군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러시아가 1 차 대전 참전을 중단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볼셰비키 적군과 우파 백군이 싸우는 내전에 휩싸였다. 이때 영국, 미국, 캐나다와 일본은 우파를 지원했다. 따라서 레닌의 볼셰비키 적군은 일본의 적이었다. 당시에 일본은 시베리아와 외 몽고 지방을 점령할 호기로 보고 가장 많은 군대를 동 러시아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자연히 적군은 조선 독립군을 이용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했고 조선독립군은 적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저항하려 했다. 참고로 이차대전 동안에는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소련 내의 독립운동은 찬 바람을 맞게 된다. 이때 희생된 분이 홍범도이다. 불행하게도 냉전과 남북 분단은 이 모든 것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또는 좌와 우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혼돈스럽고 선과 악, 공과 과가 분명하지 않아서 왜곡된 역사를 후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여운형은 일본 방문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후 1919년 말부터 1929년 7월 일경에게 체포되기까지 독립운동을 위해서 소련과 중국의 협조를 얻으려고 동분 서주 했다. 여운형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두 나라가 모두 일본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1921년 11월 12일 미국 대통령 하딩의 제의로 워싱턴 회담이 열렸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달라진 안정적인 국제관계를 설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제정러시아가 망하고, 독일이 패전했고, 영국과 프랑스의 국력이 약화되어 미국이 세계의 지도적인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은 과도한 군비 경쟁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고 있어서 군축이 필요했다. 군축의 핵심은 군함 건조 제한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동아시아 열강들 사이의 질서를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대 러시아 용이었던 영일동맹이 제정 러시아가 멸망하여 필요 없게 되었다. 일본에게 힘을 실어 주어 일본의 지나친 중국 침략을 부추겼다. 구미 열강들은 영일동맹을 해소시켜 일본의 지나친 동아시아 진출을 견제했다. 1922년 2월 6일 회담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질서인 “워싱턴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체제에 커다란 허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러시아의 완전한 배제였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한 레닌은 워싱턴 회담에 대응하기 위해서 1922년 1월 21일에서 2월 2일에 걸쳐서 극동인민 대표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려는 독립운동 세력은 양 쪽 회의에 참석하여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려 했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이승만은 워싱턴 회의를,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동휘는 극동인민회의를, 조선 독립을 세계만방에 호소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 등은 워싱턴 회의 참석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완전히 무시당했다. 반면에 레닌은 조선 대표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실질적인 원조를 약속했다.  


여운형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으나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3.1 운동 또한 독립을 성취하는 데는 실패했다. 여운형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 국제회의인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희망을 걸었다. 이것은 대다수 임정 요원들의 의견이기도 했다. 

레닌 정부로부터 임정에 초청장이 왔다. “약소 민족은 단결하라. 조선, 중국, 일본 및 몽고의 동지 들이여!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시작된 세계해방투쟁과 결합하라.” – 극동인민 대표회의


한편 워싱턴 회의에서는 이승만 등의 조선 독립 청원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조선 통치를 재확인했다. 

이에 분노한 여운형은 1921년 11월, 김규식, 나용균, 박헌영, 원세훈 등과 함께 극동인민대표회의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이르쿠츠크로 향했다. 열차에 탔는 데 밀정이 따라붙었다. 따돌리기 위해서 1등석으로 옮겼으나 밀정은 떨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열차를 포기하고 중고차를 구입하여 고비사막을 건너 몽고를 통과하여 시베리아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에 썰매와 마차로 바꿔 타야 했다. 더구나 러시아 내전으로 곳곳에 적군과 백군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8일 만에 차량으로 몽골 울란바토르에 도착했다. 여기서 양털가죽, 낙타가죽 장화, 모피등을 구입하여 한파에 대비하고 마차로 6일 만에 극동공화국 수도 우딘스크에 도착했다. 여기서 3일 만에 목적지 이르쿠츠크에 도달할 수 있었다. 


1921년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볼셰비키(적군)에 의해, 자유시 참변으로, 체포된 독립군들 재판의 배심원 노릇을 김규식과 함께 해야 했다.  피고는 1921년 6월 자유시 참병으로 생포된 독립군들과 백러시아(백군)에 가담해서 활동하던 조선인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징역등 유죄 판결이 났다. 그동안에 개최지가 모스크바로 변경되었다. 


여운형 일행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조선 대표는 여운형, 김규식, 조봉암, 김강덕 등 도합 56명이었다. 중국이 42명, 일본이 16명, 몽골이 14명, 부리아트 3명, 인도가 2명이었다. 조선이 가장 많은 대표를 파견하고 있었다. 


여운형과 조선 대표단은 주최 측의 열열한 환영과 정성스러운 대접에 놀라기도 했지만 너무나 감격했다. 물론 레닌과 트로츠키의 조선민족의 현 상황에 대한 이해에 만족했다. 레닌은 임정에게 거금의 원조를 약속했다. 

대표단이 돌아온 다음 레닌의 자금을 타오는 과정에서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터졌다. 고려공산당 당원이었던 김립이 임정으로 레닌이 준 자금의 일부를 받아오기로 돼 있었는 데 이를 고려공산당으로 가져갔다. 이에 분노한 김구는 김립을 암살했다. 이로 인해서 임정 내의 좌파가 전부 임정을 떠났다. 그리고 레닌은 임정과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 이후 임정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고 김구는 좌파 세력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여운형 일경에게 체포중앙일보 사장손기정 일장기 사건일본 패망 예견


여운형 또한 임정을 떠나 독자적으로 여러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창당된 중국공산당 초기 당원들과 만났고 마오, 쑨원, 호찌민과도 접촉했다. 장제스의 경쟁자였던 왕징웨이와도 만났다. 1926년 1월 광저우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2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여운형이 연설했는 데 이때 베트남의 호지민도 연설했다. 


여운형은 중국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하면 조선독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에 여운형은 소련의 타스 통신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중국공산당혁명을 독려하는 기고문을 여러 차례 내기도 했다. 또한 장제스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서 국민당 군대가 그를 체포하려고 그의 집 담을 넘어 덥 치기도 했는데 제 빨리 도주하여 무사했다.


거기 다가 자신과 교류하던 왕징웨이가 체포되는 등 독립운동하기가 힘들어졌다. 여운형은 상하이에 있는 푸틴대학 체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1927년 푸틴대학 남양원정 축구단을 데리고 동남아시아를 순방했다. 여운형은 조용히 축구단을 인솔하지 않고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싱가포르에서는 영국 제국주의를 비난하다가 추방되었다. 필리핀에서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과 민족해방을 촉구하는 혁명자 대회를 개최하려 하다가 추방되었다.


1929년 동남아 순회를 마치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 날 랴오둥 운동장에서 축구경기를 관람하고 있다가 영국경찰의 협조를 얻은 일본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중국경찰은 여운형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영국경찰과 일본경찰은 중국경찰의 주장을 묵살하고 여운형을 조선으로 송환했다. 여운형은 체포하는 경찰에 저항하여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한쪽 귀 고막이 상해서 그쪽으로 소리가 잘 안 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여운형의 체포 소식은 국내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원래 서울역에 내릴 예정이었으나 밀려드는 인파를 우려하여 용산역에서 미리 내렸다. 공판과정을 관람하기 위해서 수 백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1930년 4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였다. 검사 측의 공소가 받아들여져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결국 복역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신경통과 치질이 심해서 밤새 신음할 정도가 되고 겨울이 다가오자 그나마 대우가 좋은 대전형무소로 옮겨 주었다. 그곳에서 건강이 호전되어 책 읽기와 그물 뜨기로 소일하다가 형 만기 4개월 전인 1932년 12월 3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석방 뒤 그는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신문 이름을 ‘조선중앙일보’로 바꾸었다. 그는 망하기 직전에 있는 중앙일보를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경쟁할 수 있는 3대 일간지로 성장시켰다. 월간 <중앙>을 발간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했다. 여운형은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자본을 늘리고 사옥을 증축하고 윤전기를 더 많이 사들였다. 경비행기를 구입하여 백두산을 탐방하기도 했다. 당시 중앙일보는 일본의 탄압정책을 비판하는 중도좌파적 논조의 신문이었다. 중앙일보는 이순신장군 묘소를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사회에 기여하는 사업을 많이 했기 때문에 조중동 3사 중 가장 가난했다. 그래서 시중에 다음과 같은 속담이 떠돌았다.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덕꺼덕,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1936년 8월 13일 자 조선중앙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보도했다. 악화된 재정 문제도 있었지만 일재는 이를 이유로 정간을 시켰고 이후 속간되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37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조작하여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여운형은 이로 인해서 일본이 조만간 패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대단한 혜안이었다. 

 

구미 강대국들은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기를 포기했다. 중국은 방대한 국토, 어마어마한 인구, 그리고 중국인들은 외세에 대한 끈질긴 저항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은 중국사람들이 아무리 억압해도 자기들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중국의 황제가 무능하고 관료들이 부패했어도 그들의 말은 잘 듣는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래서 우선 구미 강대국들은 중국 나누어 먹기를 서로 약속했다. 그리고 중국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유지하여 그들이 중 국민을 통치하게 끔 허락하고 자신들은 그 중국정부를 조종하여 이권을 차지하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중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중국에 상당한 이권을 가지고 있는 구미국가들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여운형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읽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 중국, 미국이 중국에서 장거리 경주를 하는데 제1차 세계대전 까지는 영국이 패권을 잡았고, 전쟁 중에는 일본이 잡았고, 전쟁 후에는 미국이 잡아 미국의 차관이 단연 증가하니 일본은 자기가 독점하지 못한데 분개하여 노구교 사건(중일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점은 영미가 절대 불허한다. 이때에 양국은 합작하여 일본에 대항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요소인 원료시장, 소비시장, 투자시장 이 3가지가 중국에는 구비되어 있다. 이런 좋은 시장인 중국이 경제적 자립을 못하였으니 저기압이 생긴 곳에 공기가 밀려들 듯 자본주위 세력은 이 저기압시장으로 밀려들어갈 것이고, 어느 일국의 독점은 불가능할 것이다. 각국이 침입하는 중에 일국의 세를 저지하고 중국은 갱생의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나 영국이 이런 시장을 어느 한나라의 독점에 맡겨 둘리가 없는데 더욱이 저들이 만만히 보고 있는 일본의 독점이야 말로 허용할 리가 절대 없다. 영미는 반드시 중국의 운동을 빌려 가지고 일본과 싸울 것이다. 미국 혼자서도 일본을 대항하기에 넉넉할 터인데 황차 3국 이리오. 그러므로 일본은 자멸하고 조선은 해방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준비해야 한다.” – 이만규, 여운형 투쟁사(나무위키)


이 무렵 여운형은 일본에 가 있었다. 그의 아들이 일본 호세이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아들을 보살피려고 일본에 갔다고 했으나 사실은 중일전쟁과 관련하여 일본정계의 동태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에게 조선은 꼭 독립할 것이라고 역설하여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일본 고위 관료들을 만나 중국에서 일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일본 극우 지식인 오카와 슈메이를 만나서 시국을 논했다. 둘은 중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중국과는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하며 혈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외의 정치적 입장에서 서로 거리를 두었지만 인간적으로 서로 친했다. 오카와는 무직인 여운형을 만철의 한 단체인 ‘동아회’의 고문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동아회는 1928년에 조직된 단체이다.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실태를 분석하고 논책하고 제언하는 연구를 하는 단체였다. ‘동아’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1941년 일본정부는 여운형을 다시 초청했다. 당시에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강한 군사력으로 점령은 했지만 점령지를 일본이 직접 통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징웨이를 앞세워 친일 허수아비 정부를 만들어 통치하려고 했다. 일본정부는 여운형에게 왕징웨이와 함께 활동하여 중화민국과 화해를 위해 힘써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정부는 여운형에게 중국 측 인사들을 설득하여 휴전협상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이미 때가 늦었다고 거절했다. 일본정부는 1940년에서 1942년까지 무려 5번이나 여운형을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화평공작에 응할 듯 말 듯하며 이들과 자주 만났고 그러는 동안에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때 여운형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이정구에게 ‘장차 조선이 해방될 때를 대비하여 국민이 먹어야 할 식량조사와 그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고 장권에게는 ‘해방 시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치안대를 조직할 상세한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두리틀 대원(*Doolittle Raiders)’ 공습을 보고 일본의 패망에 대한 심증을 굳혔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일본 도쿄에 미국 폭격기가 출현하여 사상 최초로 일본 본토가 폭격당했다. 이 폭격기 편대의 대장의 이름 James Doolittle을 본떠서 편대원을 ‘두리틀 대원’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도쿄 폭격 후 하와이로 다시 돌아올 연료가 없었다. 당시의 폭격기가 한 번의 연료 공급으로 항해할 수 있는 최대 거리를 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에 불시착했다.


“지난 4월 18일 미국 비행기의 동경 공습을 목격했는데 미국기의 성능은 일본기의 성능보다 우수해 미국기를 추적하지 못했다. 동경에서 미국방송을 들으니 미국도 전쟁 준비에 광분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에 있게 될 것이고, 미영이 승리하면 조선의 독립이 확실히 가능하고,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여운형이 친구 오건영에게 전한 말, 사상휘보 속간 26호, 1943년; 나무위키)


여운형이 미공군 전투기들이 도쿄를 공습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일본이 곧 망한다고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 헌병대의 귀에 들어갔다. 1942년 12월 21일 일본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와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시모노세키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일경은 90시간 동안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을 했다. 여운형은 신경쇠약에 걸렸다. 일제의 조선인 징병을 독려하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1943년 7월 2일에 석방되었다. 신경쇠약이 심해서 요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7월 5일 일본검사가 전향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일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라는 뜻이다. 여운형이 말을 듣지 않자, 경성 지방 법원판사 백윤화가 전향하지 않으면 집행유예를 최소하고 다시 형을 집행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래도 여운형은 거절했다. 검사는 여운형의 가족을 협박하여 전향문에 서명하게 하였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여운형은 이를 묵인했다. 이후에도 그는 가택연금을 당하고 지속적인 감시를 면할 수 없었다. 


여운형 국내 해방  수권준비해방정국과 좌우합작운동암살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여운형은 일본이 항복하면 조선민족이 일본 총독부로부터 통치권을 인수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다. 1944년 8월 10일, 현우현의 집,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에서 측근들과 조선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조직의 명칭을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직 중 1명이라도 체포되면 조직전체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조직의 원칙은 3불이었다. 말하지 않는다(불언),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불문),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불명)이었다. 여운형은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언론사 시절의 인맥, 체육인들, 진보적 청년 학생들, 결혼 주례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 등등을 총 동원하여 동년 10월에는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경기도 용문산에서 여운형을 찾아온 청년 13명을 도와 경기도 북부지역 비밀결사 단인 농민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태평양 전쟁 말 일제의 강제 징병을 피해서 산속으로 들어온 청년들을 보호하고 일제의 강제 공출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를 막는 활동을 했다.  


1945년 3월에는 건국동맹 안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군대를 만들려고 했다. 해방 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채병덕이 경기도 주안에 있는 조병창의 공장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 포병 중좌였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은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통치권 인수를 위해서는 군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군대를 만드는 데 무기는 필수였다. 여운형은 일장기 말소 사건과 조선체육회장을 지내면서 손기정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손기정을 채병덕에게 보내어 명월관에서 만나자고 제의했다. 물론 그에게 군대를 만들기 위한 무기조달을 부탁할 예정이었다. 손기정이 두 번이나 채병덕을 방문하여 사정했으나 거절당했다. 


여운형은 해외 각지에 흩어진 수많은 독립단체에 건국동맹에 대해서 알리고 연대를 추진했다. 그 예로 중국 옌안(연안)에 있었던 연안(화북) 독립동맹과의 연대 모색이었다. 연안은 마오의 공산당군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쫓겨 대장정 끝에 겨우 살아남은 패잔병들이 둥지를 튼 곳이다. 이곳에 조선의 좌파 독립운동가들이 마오의 군대와 협조하여 항일 투쟁을 했다. 이들이 만든 조직이 연안독립동맹이다. 북한 건국 후 이들은 연안파라고 불렸고 소련파인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국내에도 건국동맹과 비슷한 조직이 있었다. 이들이 좌파 조직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박헌영이 주도했던 경성콤그룹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 자유독립그룹 등이다. 여운형은 이들 과도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긴밀히 연락하고 있었다. 

건국동맹은 1만여 명의 요원을 확보하고 국내외 연대를 총동원, 1945년 8월 29일 국치일에 국내로 진공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 9일 만주의 관동군을 공격했다. 8월 11일 소련군은 웅기와 나진을 점령하고 8월 13일 청진에 상륙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서울에 소련군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공포에 떨었다. 자신들의 안전이 문제였다. 치안권을 주고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만한 조선인 인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송진우에게 부탁했으나 조선민족과 자신을 핍박한 당신들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느냐고 거절했다. 


좌파 와도 잘 지내고 민중의 인기가 높은 여운형과 접촉했다. 1945년 8월 14일, 여운형은 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로부터 일본의 패전소식과 함께 15일 아침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관저로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여운형은 약속대로 1945년 8월 15일 아침, 필동에 있는 엔도의 관저로 가서 엔도와 마주 앉았다. 엔도는 치안권을 줄 터이니, “자신들을 포함한 조선에 거류 중인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게 해 달라”라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다음 5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1.      모든 정치범을 즉시 석방할 것

2.      당장에 경성시민이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확보해 줄 것

3.      우리 조선이 주체적으로 치안을 맡는다.

4.      치안유지와 건설공사에 총독부는 방해하지 않는다.

5.      학생들과 청년들의 활동을 총독부가 방해하지 않는다. 


같은 날 송진우에게 사람을 보내 새 나라 건설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고 여운형의 요청을 거절했다. 송진우는 찾아온 여운형에게, “경거망동을 삼가라. 중경 정부(임정)를 지지해야 한다.”라고 충고했다. 여운형은”일제의 탄압아래서 직접 싸워온 거대한 세력은 국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국내에 있는 3천만 민중”이라고 반박했다. 여운형은 이어서 “임정이 해외에서 30년간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업적이 없고, 국내에 인민적 토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로 군림할 수 없으며, 임정은 많은 해외독립단체가 만든 정부 가운데 하나일 뿐”라고 말했다.

그날 항간에는 8월 16일에 소련군이 경성에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조선총독부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그날 밤, 1944년 8월에 결성되었던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다음날 계동 여운형의 집 앞에 시민들이 몰려와서 연설을 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는 집 앞에 있는 휘문 중학 운동장에서 해방연설을 했다.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이 왔습니다. …..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총독으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해야 합니다.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일사불란한 단결로 나아갑시다. ……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8월 16일 YMCA(기독교청년회) 건물에서 건준 강령을 발표했다. 건준의 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 건준은 민중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100여 개의 지부가 만들어졌다. 각 지역의 지부를 인민위원회라고 하였다. 여운형과 안재홍은 건준을 공식적인 정부로 선포하여 소련군이 들어오면 그들의 인준을 받을 계획이었다. 소련군이 경성에 들어온다는 소식은 여운형과 건준 지도층으로 하여금 사회주의 계열의 건준 참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하였다. 그래서 여운형은 박헌영을 건준에 참여시켰다. 건준에 들어온 박헌영은 건준 안에 민족주의자들이 너무 많다 고 하며 개조를 요구했다. 여운형은 안재홍과 이를 협의헀다. 안재홍은 여운형에게 박헌영을 멀리하라고 충고했으나 여운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건준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미군이 38선 이남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총독부에 알려진 것은 8월 20일경이었다. 총독부의 태도는 돌변했다. 같은 적대국이지만 미군은 소련군처럼 자기들을 함부로 체포하거나 처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건준에게 주었던 치안권과 행정권을 다시 빼앗아갔다. 부족한 경찰 인력을 군대로 대신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건준은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했다.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이 선출되었다. 한 국가의 조직인 각 부처의 장관까지 임명했으나 많은 인사들 본인이 수락한 자리도 아니었다. 우파, 좌파, 외국과 국내인사들이 총 망라했다. 그야말로 실체 없는 국가 건설이었다. 여운형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각도 관공서와 일본인 공사 재산을 압수하고 일군을 무장해제시켜, 모든 것을 조선인민에게 맡길 뿐 그 목적이 없는 듯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소련군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군의 공동한 방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미군도 38도 이남에 진주하여 오면 역시 조선 인민에게 모든 것을 맡으라 할 줄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맡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급히 인민대표회의를 열어 국호를 결정하고 정부조직법을 결정하여 인민위원을 선거하였다.”


38선 이북에서는 건준조직에 바탕을 둔 인민위원회가 잘 운영되고 있었다. 소련군은 일본군과 직접전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그들의 적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물론 일본관리와 일본인들은 조선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처리되었다. 이들과 협조한 조선사람들 즉 친일파도 척결되었다. 말하자면 조선사람들이 하는 대로 놓아두어도 소련이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질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운형은 이러한 38 이북의 상황 전개가 38 이남에 미군이 진주한 이후에도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커다란 오산이었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중장과 미 24사단이 인천에 상륙,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미군정을 선포하였다. 미군정은 9월 11일 송진우를 비롯한 한민당 대표 조병옥, 윤보선등과 만났다. 그들은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 집단’에 의해 조직되었고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라고 알렸다.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의 한국인 비서였던 이묘묵은 미군정 관리들을 명월관에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여운형은 잘 알려진 친일파이며 인공은 공산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한민당 대표 9명은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하지는 여운형과 인공에 대한 이들의 보고를 믿었기 때문에 여운형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 24사단이 서울에 진주할 당시에는 미국정부의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정책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소련은 이차대전 중 미국, 영국, 중화민국과 함께 연합국 중의 한 나라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유화적이었고 그의 사망으로 1945년 4월 15일에 대통령이 된 트루먼도 소련과 스탈린에 관한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에 따른 확고한 정책이 없었다.  1946년 2월 소련 주재 미대사관 이인자였던 조지 케넌(George Kennan)의 보고를 받고 서서히 공산주의 팽창 저지 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해방정국 초기에는 좌익세력이 운신하기가 비교적 용이했다. 그러다가 1946년 5월부터 좌익 제거 우익선호로 미군정의 태도가 바뀌었다. 


1945년 10월 초 여운형은 미군정을 방문하여 하지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하지의 태도는 불쾌할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는 여운형이 일본 정부로부터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았느냐고 캐 물었다. 여운형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물론 미군정의 수사도 여운형의 결백을 증명했다. 건준이 총독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본인 관리, 일본 거류민과 군대를 본국으로 안전하게 보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적을 용서해 주는 행위로 볼 수 있다. 한민당이 이를 친일 행위라고 공격할 수도 있었다. 


1945년 10월 20일 이승만이 귀국했다. 맥아터의 명령에 따라 하지의 미군정은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주최했다. 이승만은 일찍이 자신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임을 내세워 맥아터와 친분을 쌓았다. 맥아터는 이승만을 미래의 한국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승만은 맥아터가 가장 아끼는 한국의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여운형은 이승만을 찾아가서 인공이 선포된 경위를 설명하고 주석에 취임할 것을 종용했으나 허사였다. 


1945년 11월 3일, 김구가 이끄는 임정 요인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미군정은 한국사람들이 조직한 통치기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정책기조를 이미 발표했기 때문에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귀환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고향에 온 것이었다. 미군정이 인공을 인정하지 않은 것과 똑 같이 임정도 미군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38 이남의 지배자는 미국이었다. 


여운형도 임정을 ‘새나라의 유일한 정부’라는 임정봉대론을 부정했지만 그들을 마중 나갔다.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 중 김원봉, 장건상, 김성숙 등이 여운형을 찾아왔다. 그들은 여운형과 면담 후 인공에 합류했다. 


여운형은 1945년 11월 12일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다. 건준에서 출발하여 인공 선포에 이른 좌경화로 인한 분열을 막기 위해서 중도 정당을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 중앙 대교당에서 창당했다. (반공시대를 살아온 한국사람들은 ‘인민’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공산주의’를 연상하지만 사실은 ‘인민’은 people의 올바른 번역이다. 오히려 ‘국민’은 ‘국가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가라는 구속력을 가진 개체에 예속되었음을 의미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일본제국주의 시절에 흔히 사용하던 단어이다. ‘인민’은 ‘인권’과 마찬가지로 아무 구속이 없는 뜻을 내포한 단어이다. )


창당 대회에서 여운형은 말한다.


“해방된 오늘, 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들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손을 들어 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통치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소수 친일파를 제외하고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합시다. ….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 가? 과거 지하운동시대 어두컴컴한 감방을 걷다 만나 껴안고 감격하던 혁명투사 간에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 아닌가?”


여운형은 민족의 단결을 위하여 좌우 양진영 모두를 참여시켰다. 지주와 보수층,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 모두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박헌영의 프락치들이 다수 칩투하여 분란을 일으켰다. 


조선일보 복간에 축사를 하고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는 등 동분서주하고 있는 데, 1945년 12월 23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처음에는 좌우할 것 없이 모두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좌는 친탁, 우는 반탁으로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은 무조건 ‘조선 신탁통치’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우선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과 소련이 조선사람들의 임시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와 조선의 지도자들이 상의하여 조선임시정부를 만든다. 이 임시정부와 미소공동위원회는 조선의 신탁통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신탁통치는 5년 이하로 한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와 조선임시정부의 결정사항을 신탁통치 당사국인 4개국에 알려서 의견을 묻는다.”는 것이 그 내용의 요점이었다. 좌가 주장하는 찬탁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우의 반탁은 “삼상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새나라 건설이 강대국의 결정에 달려 있음을 감안할 때 무조건 반탁은 우리 민족 중심의 임시정부 구성을 포기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련은 조선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하게 하면 친소 정권이 들어서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좌파들로 하여금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 쪽으로 선회하도록 지령을 내린 것이었다. 여운형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임시정부 구성’에 방점을 두었다. 그 후 신탁통치는 약소국이 견뎌야 할 고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6년 1월 8일, 여운형은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지도자들과 임정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이 회합에서 여운형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 데 전적으로 지지하며, 신탁은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해결하게 하자’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는 해방 정국 당시의 각 정치세력의 유일한 합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도 가지 못하고 깨졌다. 여운형은 통탄했다. 

“참담한 심정이다. 이를 비롯해 지도층을 자칭하는 이들이 총퇴각을 할 때라 생각한다. 우리 같은 지도층이 없었던 들 통일은 벌써 성공했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제1차 시험에서 전부 낙제다.”


1945년 12월 중경에서 돌아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임시정부만이 신생국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운형은 이와 같은 임정의 법통성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장덕수에게 왜 임정 법통론이 부당한가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임시정부는 30년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에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연합국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미주, 연안,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정부보다 몇 배 크고 실력 있고 맹활약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정부가 없다는 점, 국내에서 투옥된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 고생만 한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라는 점, 중경 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아무런 혁명 공적이 없는 호가호위 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중경 임정만을 환영하는 것은 해내 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


임정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미군정마저 부정했던 김구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다. 극우세력의 보수 역할을 했던 김구를 크게 자극하는 태도였다. 따라서 김구는 여운형을 매우 싫어했다. 임시정부 세력은 여운형과 협력하지 않았다. 1945년 11월 임정 제1진이 귀국했을 때 여운형이 협조를 구하려고 경교장에 갔다. 임정의 옛 동지들과 담소를 나누며 그와 만나기를 기다렸지만 김구는 만나주지 않았을뿐더러 수위에게 몸수색을 지시하여 끌려 나와 몸수색을 당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1946년 2월 13일, 김구와 이승만이 주관하여 명동성당에서 비상국민회의가 결성되었는 데 여운형은 최고 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신탁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극우 세력이 곧 열리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한민족의 대표적인 기관으로서 기능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비상국민회의는 민주의원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김창숙, 함태영,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참여를 거부하였다. 민주의원 대부분이 김구와 이승만 지지 세력인 우파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46년 2월 16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식에 참여했다. 여운형은 허언, 박헌영, 백남운, 김원봉과 함께 5인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주의원이 우파의 모임이었다면 민전은 좌파와 중도 좌파의 모임이었다.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와 같은 여운형의 행보를 보고, “(조선) 인민당이 소련 지령하의 조선공산당에 완전히 팔려간 증거로 해석하며, 이것은 여운형이 공산주의자라는 최초의 확증을 제공했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미군정청이 여운형을 공산주의자라고 의심했으나 점차 그가 좌우를 통합하여 민족의 분열을 막고 한반도에 한나라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중도적인 지도자라고 믿게 죈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한반도 신탁통치의 선행 조건인 한반도에 한국사람들의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구성되면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 문제를 한국 사람들의 임시정부와 상의해서 결정하기로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합의한 바 있다. 이 회의에서 소련은 모스크바 3 상회의 협정지지 세력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고 주장했던 반면에 미국은 모든 정치세력에게 참여할 자격을 주자고 소련의 의견에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소련이 한발 물러서, 반탁운동을 했다 하더라도 이후에 반탁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하여 이것을 토대로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와 민주의원 의장 대리 김규식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는 것이 곧 신탁에 언질을 주는 것이 아니다”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여 이들의 서명을 촉구하였다. 즉 서명이 신탁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승만, 한민당, 김구가 모두 서명했으나 소련 측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여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5월 6일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 


여운형은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지정학 상으로도 남방세력이자, 해양세력인 민주주의의 맹주인 미국, 북방세력이자, 대륙세력인 사령탑 소련이 접합하고 있다. 때문에 자주국가건설과 유지발전은 조선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좌우협력에서만 가능하다.”


1946년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 불참을 선언하였다.  그 후 한 달이 체 지나지 않은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삼남지방 유세 중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여운형은 


“결코 반대다. 그 결과는 민족분열로 오고, 10년이 지나도 고칠 수 없는 분열의 원인이 된다. 현재, 통일의 암은 신탁이 아니라 결국 각 진영의 이해관계다.”라고 말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1946년 5월 중순 이후 미국무성과 미군정의 한국에 대한 전략은 중도파를 지원하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이었다. 1946년 5월 24일 미국무성에서 미군정청에 온건중간파를 지원하라는 소위 ‘대중간파 정책’이 시달되었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여운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운동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반도에 우파중심의 친미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고 여운형과 중도파는 좌우 합작을 통해서 미국과 소련에 상관없이 민족 자주적인 통일 정부 수립이 목표였다. 미국은 여운형이 박헌영과 같이 좌우합작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또한 그가 높은 대중적 인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주, 부유층 등 보수세력에 기반을 두고 친일파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은 우파가 인기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미군정청은 우선 대중의 지지도가 높은 중도파를 껴안아야 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인 박헌영을 중도좌파에서 분리시켜 힘을 못쓰게 만들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 여운형과 박헌영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리고 김규식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중도 우파를 키우고 점차적으로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우파와 우파가 연합하도록 만들어갔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남북 분단을 막고 민족 통일을 지향했지만 미국무성과 미군정청은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서든 남북통일정부가 들어서든 크게 관계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우파 친미정권이 수립되면 만족이었다. 


좌파 탄압의 첫 사건은 1946년 5월 애 터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좌파들이 주인인 좌파 출판사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5년 임성욱 박사 학위 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연구>가 발표되어 이 사건이 미군정에 의해서 조작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피의자는 ML 파 공산당원과 정판사 직원들이었다. 출판사 직원들은 이 출판사에서 일하려면 공산당에 가입해야 하기 때문에 명목상의 공산 당원이었다. ML 파 공산당원 은 마르크스 레닌 파라는 뜻이다. 일제 강점기에 고려공산당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파 로 갈라져 있었는데 후자가 ML 파이다. 두 파 모두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상보다는 독립과 해방 후 통일된 하나의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들이었다. 피의자 고문 등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서 동원된 사람들은 미군정하의 서울시경의 친일파 경찰들이었다. 장택상-노덕술 지휘하에 미군정에서 파견된 미군직원이 보는 앞에서 고문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사건은 친일파가 반공의 투사로 둔갑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친일파라는 약점 때문에 그들의 미군정에 대한 충성은 지극했고 그들의 능력은 일제 때의 경험으로 높이 살만 했다. 미군정은 친일파가 국민의 공분을 산다는 것은 무시하고 그들의 능력과 충성심을 이용하려 했다. 미군정에 대한 충성은 시샜 말로 친미라고 한다. 친미-반공은 애국이라는 구도의 시작이었다. 미국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반공을 따르지 않는 공산주의자와 미국에 충성하지 않고 자국에 충성하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여운형은 확실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민족주의자였다. 


미군정청의 대중간파정책의 대 한국인 창구는 Leonard M. Bertsch(버치) 중위였다. 그는 미군정청 정치고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10년에 태여 났고 하버드 법대를 졸업했다. 오하이오 주 아크론에서 변호사로 개업하고 있다가 2차 대전 동안에 미육군에 지원하여 태평양 사령부에 근무하던 중 1945년 12월에 한국에 와서 미군정청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에 임명되었다.


1946년 5월 22일, 버치 중위가 여운형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여운형의 60세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생일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임시정부 설립이 전혀 진척이 없으니 좌우 합작을 위해서 나서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위해서 중도파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극우파인 김구와 이승만 그리고 극 좌파인 박헌영은 미군정청의 좌우합작운동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버치는 김규식과 같이 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여운형은 임정인사들 중 가장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라고 답했다. 


1946년 5월 25일 버취중위의 주선으로 덕수궁에서 우측대표 김규식, 안재홍, 원세균, 좌측대표 여운형, 황진남이 회합을 가졌다. 6월 14일, 3차 모임 후 하지 군정청장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7월 19일에 우익과 좌익 대표가 결정되었다. 7월 25일에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 위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좌우사상을 뛰어넘어 하나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좌익과 우익세력이 먼저 연대하는 합작운동을 전개한 다음 “서울과 평양사이에 남북연합을 추구하여 최종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좌우합작의 원칙을 정해야 했다. 좌파는 5원칙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즉각 이양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미국과 우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9월 총파업, 10월 항쟁이 일어나 좌우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여운형을 제외한 좌익인사들이 좌우합작위원회를 탈퇴하였다. 여운형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설득하고, 좌익과 우익의 의견차이를 좁히려고 동분서주했다.


1946년 10월 7일, 좌우 합작위원회는 좌익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을 절충하여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했다. 그리고 10일에 양측 대표가 만나서 최종 결정을 짓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여운형이 김규식의 자택 삼청장으로 갈려는 찰나에 극좌 세력에 의해서 납치되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운형 없이 양측 대표가 최종 결정을 하여 7원칙이 발표되었다. 


첫째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셋째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여하고 중요한 산업은 국유화하여 지방자치단체를 확립한다. 넷째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한다. 다섯째 정치운동자를 석방하고 남북, 좌우의 테러 행동을 제지한다. 여섯째 입법기구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한다. 일곱 번째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의 자유를 보장한다.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과 한민당은 이를 반대했고 김구의 한독당은 이를 적극 지지했다. 미군정의 최고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은 이를 지지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의 효력이 의문시된다고 하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군정은 10월 8일 좌우합작 7원칙을 찬성한다는 성명을 냈다. 10월 12일에는 법령 118호를 공표했다. 남조선과 도입법의원을 창설한다는 내용이었다. 입법 의원의 반은 미군정이 지명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추천한 인물들이 다수 임명되었다. 나머지 반은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는데 대부분 극우성향 인사들이 당선되었다. 좌익세력은 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과도 입법의원은 일종의 국회 역할을 하기 위해서 미군정이 만든 기관이었다. 미군정은 김규식에게 힘을 실어주어 우파 위주의 입법기관 설립을 원했다. 


7원칙 발표 이후 김규식과 중도우파들은 좌우합작위원회를 확대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우파 위주의 입법의원 구성 후 좌우합작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극좌 박헌영 세력이 입법의원에서 사실상 제외되고 중도좌파의 세력도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도 1946년 12월 입법의원 불참을 선언하고 잠시 몸담았던 남로당에서 탈당했다. 그리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미군정은 중도좌파인 여운형을 이용하여 극좌 박헌영 세력을 입법위원에서 제외시키고 우파 주도의 입법위원으로 만든 후 에는 여운형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운형은 바야흐로 황야에 홀로 서게 되었다. 미군정 즉 경찰의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여운형이 살려면 미군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든 남과 북, 좌와 우를 하나로 통일하여 한반도에 하나의 정부를 만들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1946년 12월 28일부터 1947년 1월 8일까지 북한으로 들어가서 김일성을 만났다. 좌익진영의 단결과 자신의 정계복귀문제,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문제 등을 논의했다. 그의 생각은 소련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었다. 오직 우리 민족이 만든 통일국가의 탄생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남로당을 친소 좌익으로 보았다. 그래서 남로당에 들어가지 않은 좌익을 모아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 등을 창당했다.


공개된 소련군정 문서를 보면 여운형이 미군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북한에서 여운형은 북한 소련군 사령부 민정담당 부사령관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과 대담했다. 


여운형: 조선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여기에 비합법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미넨코: 어떻게 해방이 안 됐습니까?

여운형: 해방이라고 되기는 했지만 미국인들로부터 다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넨코: 왜 그렇습니까? 

여운형: 최근 남한의 반동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왜냐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여운형: 1945년 8월 15일 오전 7시에 전 정무총감인 엔도가 조선인민대표를 불러 “4-5일 후면 서울에 붉은 군대가 도착할 것이며,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우리가 무장해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8월 15일 오후에는 붉은 군대가 서울에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시민들은 붉은 군대를 조용히 맞이하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실망했으며, 38선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더욱 불만스러워했습니다.

로마넨코: 당신은 우리의 활동이 군사적인 것이며, 우리는 명령받은 바로 까지만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운형; 나는 38선 이남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감옥에 있는 정치범을 석방시키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치범들이 주축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당신은 북조선에서 인민위원회가 발전해 가는 것과 같이 미군이 진주한 남한에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까? 그러나 실제 사실은 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넨코의 보고서에는 여운형과 김일성이 “조선은 소련의 원조하에서 만이 독립을 얻을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1947년 3월 17일 새벽 1시, 여운형의 계동 집이 폭탄 테러에 반파되었다. 여운형은 미군정청에 자신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으나 “서울을 떠나서 지방에 가 있으라”라고 만하고 아무런 조치도 해주지 않았다. 이렇게 가족의 생명이 위협을 받자 여운형은 두 딸, 여원구와 여연구를 북으로 보냈다. 중도를 고집하는 여운형은 좌와 우의 미움을 받아 양측 모두의 테러의 표적이 되었다. 물론 여운형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1947년 4월 3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 청년들로부터 권총 저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무사했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렸다.  당시의 미국은 반공 정책이 확고 해져서 한국에서도 공산주의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중도파인 좌우합작위원회의 김규식은 5월 23일 합작 7원칙에 명시된 바와 같이 우리의 최대 목표인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렸으므로 이에 적극 참여하여 빠른 시일 내에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성취하자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거부했던 우익진영은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는 신탁통치를 거부한다”는 조건으로 참여를 결정했다. 이렇게 일단은 좌익, 중도, 우익 모두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통일정부 구성에 대한 국민적 기대 또한 컸다. 5월 21일에 시작한 공동위원회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6월 7일에는 협의대상 규정문제에 합의했고, 6월 11일에는 공동성명 제11호가 발표되었고 6월 25일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양측대표단과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7월 초순 협의 대상 정당, 사회단체의 명부 작성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견 대립이 시작되었다. 소련 측은 정당 친일파, 민족 반역자, 유령단체, 반탁투쟁위원회 가입단체들을 협의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했고 미국은 협의에 청원한 단체 전부를 협의 대상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의 비율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8월경 미소공동위원회는 사실상 결렬 상태가 되었다.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9월 21일 유엔총회는 한국문제 유엔총회 상정안을 가결했다. 10월 21일 소련대표가 귀국하여 미소공동위원회는 공식적으로 결렬되었다. 

동년 7월 1일, 이승만과 대립했던 하지는 서재필을 미국으로부터 초청하여 미래의 지도자로 지원하려 했다. 여운형은 김규식과 함께 공항에 나가 그를 환영했다. 


1947년 7월 19일 아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임시정부 수립 논의에 참여할 조선 단체 정당, 단체 명단 작성으로 미소 간 의견대립이 한창이던 때, 여운형은 재미 독립 운동가이며 언론인 김용중에게 영문편지를 보냈다. 


“북조선에서 소련이 국좌분자만을 선호한다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반대로 가려하고 있소.

(중략)

극우파가 아닌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

(중략)

친애하는 김 선생. 

나는 공포로부터 자유가 업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을 받고 있소이다. 


이 편지는 미군정이 반공정책을 강화하여 공산주의자 탄압과 우파 적극지원으로 중도파가 설 자리가 없음을 잘 나타내고 있고 중도 좌파인 자신이 미군정하의 친일파 국립경찰의 위협을 받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운형의 그날 아침 심정을 뒷 바침 하듯 버치는 그이 일지(보고서)에서 여운형의 경호에 대한 미군정의 이중적인 태도를 실토하고 있다. 


"첫째로 중도파나 좌파 정치인들에 대한 탄압 문제였다. 여운형의 경호원들은 수시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여운형을 경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운형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를 심문하는 것 같았다. 1946년 3월 1일에 자행된 여운형 경호원 불법 연행에 대한 청원서들이 버치 문서군에 포함되어 있다. 여운형이 암살된 뒤에 경찰은 암살범과 그 배후를 조사하는 것보다 여운형이 타고 있었던 차의 운전사와 경호원을 체포해 조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버치 문서군 박스 3과 4)" - 경향신문;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 11 서로 이용한 미군정, 경찰; 2018.6.10


당시 조선체육회장 겸 한국 올림픽 위원장이었던 여운형은 이날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리는 한국 IOC 가입기념 한국 대 영국 축구경기를 참관할 예정이었다. 여운형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명륜동에 은신처가 있었다. 여운형이 탄 리무진은 명륜동 집을 출발하여 혜화동 로터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혜화동 로터리 입구 파출소 앞에 있던 트럭이 나와 리무진 앞을 막아섰다. 리무진도 섰다.  경찰은 이 상황을 교통사고가 벌어졌다고 했다. 그 순간 한 청년이 리무진을 향해서 달려오더니 뒷좌석에 탄 여운형을 향하여 2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한 발은 여운형의 심장에 다른 한 발은 복부를 관통했다. 여운형을 수행했던 경호원 박성복이 범인을 추격했다. 그런데 동대문경찰서 소속 경위 최태화가 박성복을 저지했다. 그동안 범인은 도주했다. 

급히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분 만에 차 안에서 사망한 뒤였다.  당시 옆에 앉아 있었던 비서 고경흠에 의하면 여운형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라는 두 마디를 남기고 미소 띤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여운형은 축구 경기 참관 후 창경궁에서 미군정 경제 협조처의 존슨과 만나 안재홍의 뒤를 이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민정정관(국무총리 격) 수락을 논의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여운형 경호원의 무지로 체포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도주할 기회를 주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암살 사건이 발생한 지 5분 만에 우익단체의 소행으로 보이는 벽보가 붙기 시작했다. 5일 후에 수도경찰청은 범인 한지근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그가 얼마 전 남하한 평안도 영변 출신의 19세 청년이라고 밝혔다. 사건 발생 11 후인 7월 30일 공범으로 함경도 흥원 출신 신동운이 체포되었다. 8월 6일 서울지검 조재천 검사는 이 사건을 “북한괴뢰의 지령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라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신동운은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신동운은 노덕술의 끄나풀이었다. 노덕술로부터 용돈을 받고 노덕술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일을 했다고 한다. 한지근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세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며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개성 형무소에서 복역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여운형 암살사건의 수사는 서울경찰청이 했고 수사과장이었던 노덕술과 경찰청장 장택상 책임하에 진행되었다. 실무진이 공범 수사를 하려 했으나 노덕술과 장택상은 이를 못하게 했다. 

당시의 서울경찰청은 한국정부의 경찰이 아니었다. 당시의 통치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미군정 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이었고 경찰의 상관은 미군정청의 미국 군인 관리들이었다. 


1974년 2월 4일,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4명의 중년 남자가 세상에 나타나서 자신들이 여운형 암살사건의 공범이라고 했다. 15년 공소시효가 12년 지난 27년 만이었다. 범행의 총지휘자는 김흥성이었고 제1저격수는 한지근, 제2저격수는 김훈이었고 김영성과 유순필은 저격 후의 현장확인, 수사상황파악 및 도피로 등을 맡은 확인조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들은 “배후에 아무도 없다. 민족의 분열과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 암살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범행직후 한지근의 체포 과정 및 진술은 사전 각본에 따른 연출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한지근의 본명은 이필형이며 그의 실제 나이는 21세였다고 폭로했다.  암살조를 총 지휘했던 김흥성과 범행 11일 만에 체포되었던 신동운은 백의사 단원 김영철이 이필형에게 권총을 제공했다고 진술했다. 


1985년 8월 31일 백의사 부사령관 박경구는 그의 녹취록에서 그와 김영철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김영철 씨는 원래 만주에 있을 때 우리 분대장이야. 그런데 여기 나와서 내가 (백의사) 부사령관이고 그 양반(김영철)이 집행부 장했단 말이야. 본래 김영철 씨 권총 잘 쏩니다. 그래서 집행부장이 하수자를 선정했을 것 아닙니까.”


백의사가 여운형을 암살 계획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운형에게) 물었더니 이 양반말이 뭐라고 하느냐 먼 과거 임시정부 시절은 이미 쓰레기이다. 지나갔다. 이제부터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이런 말을 했어 “큰일 났구나” 그런데 청년들은 전부 이 사람을 따르고 내 그래 이야기하던 것을 그냥 그대로 염  선생(염동진)에게 보고했어. 그러니까 염 선생이 탁 치면서 “그렇다니까 그 틀림없다” “그렇다면 저 놈 없애야 되지 않겠느냐” “그럽시다. 없앱시다”


백의사 부사단장 뱍경구는 백의사 단장 염동진이 여운형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김영철은 박경구의 명령을 받고 권총을 구해서 이필형에게 준 것이었다. 이외에 뚜렷한 증거는 없으나 박경구와 백의사가 이 4인조 암살단을 조직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건 발생 현장에서의 경찰은 암살조와 이미 짜 놓은 각본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경찰과 암살조는 한 편이었다. 사건 발생 후 수사와 재판도 배후를 밝히지 않고 한지근 단독범행으로 종결지었다. 이것도 각본이었을 것이다. 이 각본의 연출자는 서울시경 수사과장 노덕술과 경찰청장 장택상이었다. 그러면 장택상의 상관은 누구였나? 당시에 장택상은 경무총감과 수도경찰청장을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위선은 미군정 청이었다. 


미군정-경찰-백의사-극우 테러리스트가 어떻게 연결되어 여운형을 암살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군정 경찰, 미군정 특히 CIC (방첩대), 백의사가 서로 협조하며 많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백의사는 염동진이 만든 극우 파시스트 테러 단체이다. 염동진은 상해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성장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특히 신익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가 만주로 이동한 후 관동군에게 체포되어 고문에 못 이겨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 고향 평양으로 돌아가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평양에서 대동단이라는 우익 테러 단체를 조직하여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현준혁을 암살하고 김일성 저격에 실패한 후 1946년 가을에 남하하여 서울에 백의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서울의 아지트가 여럿 있었으나 본부는 궁정동에 있었는데 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던 궁정동 안가가 바로 그곳이었다. 염동진의 본명은 염응택이고 맹인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고문으로 시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군정에서 가장 막강한 부서는 CIC(Counter Intelligence Corp)였다. 미군 방첩대로 불린다. 그들은 백의사를 통해서 북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입수했다.  또한 한국인 정치 지도자들과 미국인에 대한 사찰도 했다. 

1946년 9월에 좌파들의 책동으로 일어난 총파업, 미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로 인한 대구 10월 항쟁 등의 사회적 불안을 경찰력 하나만으로 진압하기는 역 부족이었다. 미군정 하의 한국인 경찰은 극우 테러 단체들을 이들의 진압에 동원시켰다. 물론 미군정은 경찰의 불법행위를 묵인했다. 특히 1946년 봄부터 시작된 공산주의 탄압은 점점 거세 졌고 그럴수록 경찰과 미군정은 더욱 극우 테러 단체들에게 우호 적이었다. 

따라서 미군정-경찰-백의사는 서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경찰과 백의사가 미군정 몰래 여운형 암살 같은 중대한 사건을 저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염동진과 김구는 아주 돈독한 관계였다. 신익희와 유진산은 백의사의 간부였다.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은 공산주의 자였다. 염동진이 그에게 “너희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되었는데 어떻게 네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느냐고 질책하여 전향했다고 한다. 그도 백의사 요원으로 활동했다.


아마 여운형은 미군정청이 알고도 모른 척했기 때문에 암살되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자초지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42년 후에 일어날 박정희의 죽음과 너무나 흡사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외세 의존이 낳은 비극이었다. 


거인 여운형은 62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1947년 10월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었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기고 1947년 12월에 좌우합작위원회를 해체시켰다. 결국 남한 만의 단독정부수립 안이 확정되었다.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다. 영결식은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에는 6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흰옷을 입고 나와서 서울시내가 눈이 온 것처럼 하얗게 뒤 덮였다고 한다. 해방 후 최대의 인파였다. 서울운동장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 선수 김성집 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 


1947년 6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이승만과 김구가 계획 중이라는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은밀히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냈다. 이후 미군정의 태도를 보면 여운형의 암살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경고만 하고 방관하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견해가 있다. (위키 백과 여운형: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 편 2권; 51쪽 과 <남, 북협상: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서중석 지음 20쪽)


미군정청 직원이었던 리처드 로빈슨은 “미국무성은 여운형을 해방 이후 조선에서 인기 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정치기구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 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 편이었다.”라고 여운형을 평가했다. 


주한 미국 총영사를 지냈던 윌리엄 랭던은 “몽양(여운형)은 개인적으로 소련보다 미국에 더 가까웠지만, 이들 양국에 대해 절대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국, 소련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라고 그가 민족주의자였음을 확인했다.


2차 대전 후 많은 강대국의 식민지였던 약소국이 독립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소 양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 양자택일을 거부하는 민족주의자들은 미소 양국의 표적이 되었다. 여운형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여운형을 감히 “거인”이라고 말한다. 그는 너무나도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크고, 잘 생겼고, 현명하고, 많이 알고, 관대했고, 여러 사람을 포용했고, 멋이 있고, 참고 견딜 줄 알았고, 용기 있는 남자였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참고:

1.      위키백과: 여운형

2.      나무위키: 여운형/일생

3.      (인터넷) 기독교사상: 문화, 신학, 목회 2020년 8월호;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1); 9월호;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2); 윤경로, 한성대학교 교수

4.      (유튜브) 여운형은 왜 암살 당 했나? /여운형 바로 알기 1,2부/허태근 교수

5.      (유튜브) 몽양 여운형, 정치암살의 희생자[추억의 영상] KBS 1994.2.13 방송

6.      (인터넷) 울산저널: 정판사 사건조작, 여운형 암살, 반민특위 테러를 주도한 ‘악인 노덕술’ 기획 특집 배문석 2022-03-02

7.      (유튜브)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6회 비밀결사 백의사; 2002-01-20

8.      (인터넷) 동양학 제25편(1995년 10월)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미군정의 중도정책과 군정 내 추진기반: 정용욱 단국대 한국현대사 전공

9.      (인터넷) 우리 역사넷: 좌우합작위원회; 통일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노력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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