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기철 James Ohn Feb 03. 2024

3. 설산 장덕수 암살과 김구 그리고 이승만

한반도 분단의 길로 가다


장덕수(위키피디아)

1947년 11월 29일 저녁에 장덕수를 비롯한 한민당 수뇌부는 이승만을 만났다. 그들은 이승만에게 그를 지원할 수 없다고 알렸다. 이승만은 대로했다. 문을 잠그고 그들을 그와 국가의 반역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장덕수는 이승만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경향신문:(9) 박태균의 버치보고서 ; 줄어든 미군정의 선택지 ‘유일한 대안’ 장덕수 암살자 되자 기댈 곳은 ‘껄끄러운’ 이승만 남아 2018


1945년 9월 17일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시국문제에 관한 기자회견을 했다. 9월 8일 서울에 들어온 지 10일이 채 안 되어서였기 때문에 미군정의 통치 방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모임이었다. 그는 “정당의 건전한 발전이 신정부 수립의 기본조건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고 밝히고, 정당대표가 군정청에 면담을 신청하여 정부수립에 관한 구상을 직접 피력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를 발표했다. 

물론 이것은 한반도에 미국식의 정당 정치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첫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지의 이날 발표는 일제 강점기 동안 억눌렸던 한국인들의 정치적 욕망을 폭발하게 했다. 


나라의 주권이 군주(왕)에게서 국민으로 바뀌기 시작한 시대는 18세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독립은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효시이다.  왕국의 민주화는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은둔의 나라 조선은 이러한 세계적인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일제 강점기를 맞이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사람의 정치 활동은 금기였다. 그러나 양반, 중인, 백성, 노비, 천민의 사회 계급과 사농공상과 같은 직업의 차별은 없어졌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스러운 새 나라를 원했다. 정치가 양반 만의 특권이었던 나라의 양반 아닌 다른 계급의 사람들도 새 나라에서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왕권이 민권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공산주의라는 괴물이 나타났다. 공산주의는 경제적인 평등을 의미한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경제적인 차등을 인정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빈부의 차이가 없이 모두 잘 살고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이상국가를 표방했다. 공산주의는 20세기 초반, 전 세계를 휩쓸었다. 제정 러시아가 망하고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하여 거대한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탄생하고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조직되었다. 공산주의는 코민테른을 통해서 중국에 파고들었고 한반도도 이와 같은 대륙의 변화에 빨려 들어갔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레닌의 원조에 의지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조직에 능한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에서도 가장 먼저 정당을 만들었다.  1925년 4월 17일, 박헌영, 김약수, 김찬(김낙준), 조봉암, 조동호, 강달영, 허정숙, 정칠성 등은 비밀리에 소공동에 있는 중식당 아서원에 모여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헌영이 주도권을 잡았다. 


일제는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공산주의는 왕권과 제국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제는 공산주의 혁명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공산주의 혁명 활동은 자연히 독립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4차에 걸친 재건 운동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그 조직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재유를 중심으로 1933년에 경성트로이카 그룹이 만들어져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이재유가 1936년 12 월에 체포되자 이관술이 바통을 이어받아 1938년에 경성콤(경성콤뮤니스트) 그룹을 조직하였다. 박헌영도 이 조직에 참여하였다. 경성콤은 1940년 12월, 1941년 가을, 1942년 12월 등 3차에 걸친 일제의 검거로 조직이 무너졌지만,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의 기본핵심세력이었으며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의 핵심세력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밤, 서울 장안빌딩에 서울파의 이영, 정백, 화요파의 이승엽, 조두원, 조동호, 상해파의 서중석, ML파의 하필원, 최익한 등이 모여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장안빌딩에서 조직되었다고 하여 이들을 장안파라고 한다. 5일 후인 8월 20일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이형상 등 경성콤 소속 단원들이 모여 조선공산당 제건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9월 8일 장안파가 해산하고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에 합류하여 9월 11일에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우리 역사 넷; 남과 북, 모두에게 지워진 이름)


1945년 8월 15일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은 여운형은 해방직전에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직한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해방과 거의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했다. 

건준은 여운형, 안재홍, 박헌영 이 주도하여 좌우가 모두 참여했다. 8월 15일 당시에는 서울에 소련군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운형은 많은 좌파를 환영했다. 그러나 8월 22일경 소련군이 서울에 들어오지 않고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운형은 북에 들어온 소련군이 건준의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인정해 주고 조선사람들 스스로가 새나라를 만들어 나가게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련과 미국이 같은 연합군으로 일본과 싸웠기 때문에 미군이 남한에 들어와도 소련과 같이 민족의 조직을 인정해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여운형은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남한에서도 조선사람들이 자체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미국도 북의 소련처럼 “당신들 알아서 하시오”라고 할 것을 예상했다. 9월 6일 건준은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노동자, 농민, 모든 근로인민대중을 위한 새로운 국가”와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결정하고,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 결정하였다. 인공의 주석은 이승만, 부주석은 여운형으로 하고 각 부서의 장관도 임명되었지만 이승만 등 많은 인사들이 해외에 있었고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군이 서울에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 8일이다. 일제가 패망했지만 38 이남의 주인은 한국사람들이 아니고 미국이었다. 좌파세력이 인공을 선포하여 점령군에게 자기들이 마치 한반도를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로 인정받으려 하자, 우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7일,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옥에서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했다. 송진우가 위원장에, 김성수, 서상일, 원세훈이 부위원장에, 김상연이 총무부장에, 장택상이 외교부장에, 설의식이 정보부장에, 윤치영이 경호부장에 임명되었다. 국민대회준비회는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9월 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했다.


해방직후 한민당에 참여했던 중요 인물은 장덕수, 허정, 백남훈, 윤치영, 윤보선, 원세훈, 김병로, 백관수, 조병옥, 성상훈, 김약수, 이인, 송진우, 김성수, 서상일, 김준연, 장택상, 설의식이었다. 

한민당은 인공을 반대하는 우파 정당이었다. 미군정과는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한민당 지도층에는 일제 때 일본이나 미국에서 유학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영어에 능통한 사람들도 많았다. 1945년 10월 초 미군정이 설치한 고문회의 전체 10명 중 7명이 한민당 당원이었으며 미군정 내의 국장(지금의 장관)과 도지사 역시 한민당 사람들이 많았다. 


한민당은 부자들의 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곡창지대였던 전라도 지주와 자본가들이 당에 다수 참여했다. 자연히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개의치 않고 당에 합류하게 했고 친일파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토지개혁도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주장했다. 신탁통치는 근본적으로 반대 입장이었으나 미소공동위원회는 미군정과 협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친일파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고 토지개혁에 유보적이었던 한민당은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약속하는 공산당에 비해서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중적 인기가 높은 김구와 이승만이 당에 들어오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이화장을 마련해 주고 한민당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으나 이승만은 거절했다. 1945년 11월 19일 김구가 귀국했다. 송진우는 임정이 새나라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한민당의 엄격한 노선이었다. 한민당은 자금을 모아 귀국한 김구와 임정에게 정치 활동에 쓰라고 주었다. 그러나 임정은 그 자금 중에 친일파의 돈이 섞여 있다고 거절했다. 이와 같이 한민당과 김구의 관계는 한민당이 기대했던 것 같이 돌아가지 않았다. 한민당은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등 동아일보 인맥이 이끌어 나갔다. 그러다가 총무(당수) 송진우가 1945년 12월 30일 자택에서 암살되었다. 암살의 배후로 김구가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후로 김구의 임정과 한민당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민당은 당수 김성수와 외교부장 겸 정치부장이었던 장덕수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장덕수는 1894년 12월 10일 황해남도 재령 남으면 강교리 나무리벌 어느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복형인 장덕주, 친형 장덕준, 동생 장덕진이 있었다. 장덕준과 장덕진은 독립운동가였다. 형 장덕준은 1920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만주의 간도, 훈춘 등에 파견되어 취재하던 중 일본군에게 사살되었다. 동생 장덕진은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중국인이 운영하는 카지노를 털 다가 사살되었다. 


“안악에 와서 나는 양산학교 소학부의 유년반을 담임하면서 재령 군 북률면 무상동 보강학교 교장을 겸무하였다. 이 학교는 나무리벌의 한 끝에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내어 세운 것이었다. 전임 교원으로 전승근이 있었고, 장덕준은 반 교사였는데 그 아우 덕수를 데리고 학교 안에서 숙식하고 있었다”(위키문헌: 백범일지, 2.5 민족에 내놓은 몸)


장덕수 암살사건 공판에 피고인 증인으로 김구가 출석했다. “장덕수를 언제부터 알았는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김구는 “7살 때부터 알았소”라고 대답했다.  김구가 장덕수의 고향나무리벌 근처의 보강학교 교장을 할 때 장덕수의 형 장덕준이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어린 장덕수는 학교에서 숙식하며 형과 함께 살았을 때를 회상하며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장덕수는 김구가 가르치는 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해주에 있는 연의학교에 진학하였다. 졸업 후에 진남포 이사청(영사관) 급사로 일했다. 평안남도 진남포는 황해남도와 접경하고 있는 도시이다. 노동과 막일을 하며 문관시험(공무원) 준비를 하여 1911년 9월에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판임문관 시험에 합격했다. 조선총독부 판임관에 임용되었다. 판임관은 하급공무원으로 요지음 9급공무원 정도라고 한다. 


1912년에 판임관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그는 노동 일을 하며 공부하여 중학교 졸업학력을 검정고시로 취득했다. 그리고 1912년 가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1913년에 예과를 수료하고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에 신익희, 김성수, 송진우를 만나서 평생 친구가 되었다. 


같은 정경학부에 다니는 신익희와 같이 독립운동을 했다.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학우회)에 가입하여 이 단체의 기관지 <학지광>의 편집부장과 평의원 등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신익희와 함께 독립운동에 일신을 바칠 것을 맹세하기도 했다. 그는 신익희, 윤홍섭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는 등 학생회 간부가 되어 학생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15년 일본 전국 대학생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여 1등을 했다. 1916년 봄 한인 유학생과 중국인 유학생이 연합하여 비밀지하 정당인 신아동맹당을 조직했다. 당의 목표는 일제의 타도와 새 아시아의 건설이었다.1916년 7월 그는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졸업 무렵 와세다 대학 교수는 조선 총독부 관리가 되라고 권유하면서 추천서까지 써주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제 형사들은 귀국한 그를 요시찰 인물로 지명하고 감시했다.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와 연락하기도 했지만 형사들의 감시가 심해서 독립운동에 제약이 많았다. 상하이 망명을 결심하고 배편으로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운형과 합류했다. 


1917년 상하이에서 신해혁명 주체 세력이 만든 중국 혁명조직인 신아동제사에 가입했다.  신아동제사는 한국의 독립운동 인사들과 중국의 혁명인사들이 협력하여 일제에 항거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1918년 8월 20일경 여운형, 신채호, 조동호, 김규식, 신성모, 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다. 1918년 11월 27일 여운형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홍보하기 위해서 상하이를 방문한 윌슨의 특사 찰스 크레인과 만났다.  그의 연설을 감명 깊게 들은 여운형은 윌슨에게 조선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여운형은 장덕수와 함께 이 청원서를 작성했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김규식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나 혼자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을 외쳐봐야 큰 효과가 없을 것이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노력하여 국내에서 조선의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 릴 만한 큰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는 취지의 제안을 했다. 


여운형은 이에 동의하고 즉시 신한청년당과 함께 국내의 대규모 시위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여운형 자신이 간도와 연해주를 방문하여 독립운동가들과 교민들에게 세계정세와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알리는 한편 국내와 일본 각지에 신한청년당 당원 등 독립운동가들을 파견하였다.  장덕수는 일본에 들어갔다. 일본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을 도왔다. 1919년 2월 14일 우에노 공원에서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을 만나서 여운형이 준 편지를 전달했다. 여운홍은 그 편지에 담긴 지시대로 국내에 잠입하여 이상재, 최남선, 함태영, 이갑성 등을 만나 궐기를 촉구하였다. 


장덕수는 2월 17일 동경을 떠나 2월 20일 경성에 들어와서 여운홍이 만났던 사람들과 접촉하여 상하이와 도쿄의 현황을 전해주었다. 이때 장덕수는 기무라 겐지라는 가명을 썼다. 그리고 인천으로 가서 숨어 지내려 했으나, 오사카에서 살인하고 조선으로 도주한 기무라 겐지라는 살인범을 잡기 위해서 조선에 들어와 수사 중이던 일본경찰에 우연히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일본경찰의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3.1 운동 주모자를 대라는 경찰의 심문에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파하여 답하지 않았다. 


“조선사람이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그런 의사를 청원서에 담아서 신한청년당 대표 한 사람을 파리로 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상해는 일본 법률 권외에 있는 국제도시요 외국 땅이다. 이곳에서 조선사람들이 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함께 토론하고, 어떤 문서를 만들어서 또 다른 제국으로 보냈다 한들 일본의 법률조문 어디에 저촉된단 말인가? 그리고 동경과 서울에 들어온 것은 이곳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신문사 통신원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이것 역시 일본 법률 어느 조문에 위배된단 말인가?”


유창한 일본말로 진술을 거부하여 장덕수는 옥살이를 면하고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 유배되었다. 하의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일본정부는 조선에 자치권을 주는 회유정책에 관심이 많았다. 3.1 운동이 일어나고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포되자 일본정부는 조선과 일본 내에서 조선자치운동이 일부 인사들 사이에서 거론되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조선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 여운형이 임정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일본 중의원의원 야마미치 죠오이치는 “… 당시 외무 총장이었던 여운형이 외무차장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여운형이 임시정부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독립운동에 염증을 낼지 모른다는 장덕수의 말에 따라 여운형을 끌어들이기로 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정부는 여운형을 일본에 초청하여 조선 자치정부안을 설명하고 그에게 자치정부의 수반을 맡아 달라고 회유하기로 결정했다. 여운형은 각계인사를 만나서 일본정부의 초청에 응할 것인가를 저울질하다가 조건부 승낙을 했다. 그 조건 중에 하나가 하의도에 있는 장덕수가 통역으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의 일본어 실력과 웅변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여운형의 연설을 장덕수는 일본어로 훌륭하게 번역하여 청중을 매료했다. 


일본에서 여운형 일본어 통역일을 마치고 1919년 11월 말 국내에 잠입했다. 신익희를 만나고 부산의 백산상회로 가서 안희제와 접선했다. 그는 안희제에게 상하이의 형편을 알리고 2천 원을 받아서 상하이로 돌아갔다. 여운형은 일본에서 장덕수와 헤어지면서 보다 나은 환경에서 독립운동을 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을 줄은 몰랐다.


1920년 4월 1일 김성수, 송진우 등과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동아일보 제1대 주필이 되었다. 

1920년 6월 조선교육회 결성에 참여하여 평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가을 사회혁명당에 참여하여 조선청년연합회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사회주의혁명당은 러시아에서 창립된 사회주의 단체이다. 

1921년 1월 사회주의 단체인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가하여 이사가 되었다. 그해 4월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노동공제회 의사에 선출되었다. 그는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921년 4월 조선교육조사위원회 개선안 편집위원을 맡았다. 동년 5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 및 내지(국내) 간부로 선정되었다. 1922년 3월 세계협회조직에 참여했다. 동년 11월, 안재홍, 조만식 등과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준비위원으로 실력양성운동에 참여했다. 


1917년 10월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 내전이 볼셰비키 적군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1922년 소련이 탄생했다.  레닌은 코민테른을 통해서 강대국의 식민지가 된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1차 대전 동맹국(패전국)의 식민지를 독립시켜서 동맹국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다는 것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드러난 후, 레닌의 약소국에 대한 원조는 독립운동가들에게 구세주 같은 것이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처럼 빠르게 확산되었다. 조선과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0년대 중반 조선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사회주의학설대요”라는 책이 있었다. 일본의 사회주의자 사카이 도시가코가 쓴 책을 정백이 번역했다.  개벽사가 출판했는 데 자사 잡지 개벽과 병곤건에 이 책의 광고를 냈다. 이 광고는 “사회주의는 처세의 상식”이라고 책을 선전했다. 당시에 지식인으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꼭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1922년 일본공산당이 1925년 4월 고려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연해주에서 만들어진 한인사회당과 국내에서 만들어진 사회혁명당이 합쳐져서 고려공산당이 탄생했다. 

 

장덕수도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1 운동의 파고가 가라앉은 지 얼마 안 된 1920년 6월 국내에서 사회혁명당이라는 조직이 나타났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계급과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 정당의 출현이었다. 일본 유학생이었던 김명식, 김철수, 장덕수, 최팔용, 이봉수 등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윤자영, 한위건 등이 주축이 되었다. 


장덕수를 비롯한 사회혁명당에 참여했던 일본유학생들은 유학시절 신아동맹단이라는 조직의 일원이었다. 이 조직은 1916년에 조선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중국, 타이완, 베트남 등 아시아계 유학생 30여 명이 만든 비밀 결사였다. 중국인 유학생들은 중국으로 돌아가서 대동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내지(한국)으로 돌아와서 신아동맹단 조선지부를 해체하고 1920년 6월 5차 대회를 열고 조직의 명칭을 사회혁명당으로 바꾼 것이었다. 


한편 1917년 볼셰비키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러시아가 내전의 혼란 속으로 접어들 무렵 러시아의 한인들도 볼셰비키가 되어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18년 4월 28일 이동휘와 김 알렉산드라를 중심으로 한인사회당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러시아 내전에 휘말렸다.  100여 명의 한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어 볼셰비키군(적군)에 소속되어 백군과 싸웠다. 그러나 대규모의 일본군이 개입하여 적군의 극동 소비에트 정부가 붕괴되었다. 한인사회당 부대는 흑룡강을 따라 후퇴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김 알랙산드라는 백군에게 처형당했다. 유동렬과 김립은 중국인 노동자로 가장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물론 한인 사회당은 괴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19년, 러시아 내전이 적군의 반격에 백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3.1 운동으로 연해주 한인사회도 적군에 가까워졌다. 일본이 백군을 돕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괴멸 직전의 한인 사회당이 살아날 수 있었던 계기는 이동휘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된 것이었다. 


당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나라는 러시아의 소비에트 정부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동휘만큼 소비에트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은 없었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동휘는 1920년 5월 초 상해로 건너온 대한국민의회(연해주 임시정부) 부의장 김만경과 함께 ‘한인공산주의그룹’을 형성하였다. 이 그룹은 박진순, 김립, 이한영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 여운형, 조완구, 신채호, 안병찬, 조동호, 선우 혁, 윤기섭, 김두봉 등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참여하여 한인공산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리고 1921년 5월에 고려공산당이 창당되었는데 이를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임정관계자들과 원래 한인 사회당이 아니었던 김만겸, 안병찬, 여운형 등이 이탈했다. 

이 빈자리를 국내에서 조직된 사회혁명당 세력이 채웠다. 고려공산당 창당 대회에 국내의 사회혁명당은 김철수, 이봉수, 주종건 등 8명을 대표로 파견했다. 중안위원 12인 중 7명이, 내지 간부 전원, 기관지 담당 모두가 사회혁명당 출신이었다. 결국 연해주에서 시작한 한인 사회당과 국내에서 조직된 사회혁명당이 힘을 합쳐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형성되었다. 


러시아 내의 볼셰비키 한인들도 고려공산당을 조직했는데 이를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했다. 이중 상해 파 고려공산당이 주도권을 잡았다. 당수 이동휘는 임정의 국무총리였고 소비에트정부와의 외교는 박진순, 한형권, 김립 등 고려공산당 당원이 맡고 있었다. 레닌 소비에트 정부는 200만 루블의 자금지원까지 해 주고 있었다. 


국내의 사회혁명당 조직은 고려공산당 국내 지부로 바뀌었다. 장덕수, 김명식 등이 중심이 되었다. 장덕수가 편집장으로 있는 동아일보를 당의 표현기관으로 활용하였다. 장덕수가 깊숙이 관여했던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는 고려공산당의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렇게 해서 1920년 대 국내의 청년운동은 상해 파 고려공산당이 주도했다. 


상해 파 고려공산당이 이르쿠츠크파를 실세면에서 앞서기는 듯했지만 상해 파는 이념적인 면에서 문제점이 많았다. 이르쿠츠크 파 고려 공산당이 레닌의 사상에 투철했던 반면에 상해 파는 공산주의 이념보다는 공산주의를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이 깊었다. 조직적인 면에서도 이르쿠츠크 파에 비해서 느슨했다. 


이동휘 자신이 계몽운동 시절 기독교인으로 행세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국내사회혁명당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장덕수도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영국의 신자유주의자 홉하우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소득 분배 구조를 개선하여 합리적으로 통제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자는 주장을 했다. 경제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대응하는 한 방편이 신 자유주의였다. 따라서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러한 장덕수의 이념적 취약성은 골수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에 휩싸이게 되는 원인 제공을 했다. 

상해 파 고려공산당은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혁명자금을 수령했다. 그런데 이동휘가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하고 있어서 이 돈이 임정에게 준 것인지 고려 공산당을 지원하기 위한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이 자금의 수령을 맡은 김립은 이 자금을 고려 공산당에 전달하였다. 이는 임정의 반발을 샀고 임정 경무부장 김구는 김립을 암살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사기 공산당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장덕수의 인생에 큰 변환 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레닌의 혁명자금은 국내에도 들어왔다. 국내 상해 파 고려 공산당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사회혁명당 계열의 인사들이 이 자금을 주무를 수밖에 없었다. 골수 당원들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도 아닌 자’들이 공산당인 척하면서 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고 비난했다. 말하자면 사기 공산당이 레닌 자금을 횡령했다는 모략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인물은 장덕수였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대회가 열렸다. 이때 국내 공산당 대표로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 이봉수가 있었다. 대회 주최 측인 이동휘 일파는 레닌에게서 받은 혁명자금의 일부를 국내공산주의자들의 활동비로 쓰라고 그에게 주었다. 


김사국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다. 1921년 이영, 장덕수, 김명식과 함께 서울 청년회를 조직했다. 1924년에는 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김사국은 그 자금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장덕수, 최팔용, 오상근 등 문화운동가들에게 전달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 문화운동가라는 말은 그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투철하지 못한 사이비 공산주의자라는 뜻이다. 김사국, 김한 등 강경파들은 장덕수가 거액의 돈을 개인적으로 남용했다고 비난하였다. 장덕수는 1922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 제3차 정기총회에서 누명을 쓰고 제명되었다. 


이 사건으로 장덕수는 그 명성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국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된 장덕수는 1923년 4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도쿄에 들른 장덕수는 지요다구 간다 에서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했다. 이 사건 이후 장덕수는 사회주의자들과 상대를 하지 않았다. 


장덕수의 누명은 37년 후인 1980년 5월 16일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김철수가 그 돈을 받은 사람은 장덕수가 아니라 최팔용이었다고 밝힘으로써 벗겨졌다.  


장덕수는 미국유학을 떠나면서 동아일보 부사장 겸 주필의 직위를 유지했다. 미국 유학 13년 동안 그 직위에 해당하는 월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식당의 웨이터, 상점 점원일도 해야 했다.  1923년 오리건 주립대학 신문학과에서 일 년 동안 공부하고 1924년부터 1936년까지 뉴욕 컬럼비아대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수학하였다. 

미국 유학 중 그는 허정, 이기붕, 조병옥 등과 친하게 지냈고 안창호, 이승만, 김규식, 서재필 등을 만났다. 1925년에 이승만이 만든 대한인동지회에 가입했다. 유학 중 32세였던 장덕수는 25세의 김할란에게 구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김할란은 초대 이화 대학 총장을 지냈다. 1928년 2월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를 창간하고 주필로 활동했다. 삼일신보는 뉴욕에서 한인 미주 유학생과 교포 지도자들 25명이 참여하여 만든 주간 신문이었다. 이승만, 서재필이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허정이 사장이었다. 1929년 6월, 런던으로 건너갔다.  런던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런던에서 공부하는 동안 윤보선, 윤치왕 등을 만났다. 1930년에는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중 런던에 들른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를 다시 만났다. 


1932년 조선에 잠깐 들어와서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 윤치소의 사촌 윤치호에게 인사를 가서 윤보선이 졸업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윤보선은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에게 학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고 귀국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유럽 여행을 하고 있는 윤보선에게 아버지가 학비를 보내지 않겠다고 하여 할 수 없이 귀국했다고 한다.


1932년 장덕수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 대학원 신문학과에서 언론 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4년 4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 제5행서 재무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임정의 재정문제로 9월 15일에 해임되었다. 1936년 5월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의 제목은 ‘영국의 산업평화’였다. 


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서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8월 29일부터 무기 정간되었다. 이 기사를 보도한 이길용 기자는 9월 25일에 해직당했고 사장 송진우,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정간 중에 귀국했던 부사장 장덕수도 사퇴했다. 장덕수는 송진우와 함께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공보국을 드나들며 로비를 하여 9개월 만인 1937년 6월 3일 자로 속간되었다. 


장덕수는 1936년 12월부터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 전신)의 교수로 일했다. 1937년 10월에 박은혜와 재혼했다. 박은혜는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했으며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교육자, 철학자, 종교인이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은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1937년 가을 조선총독부는 청구구락부 인사인 윤치호, 장덕수, 유억겸, 신흥우, 장택상 등을 검거했다. 그리고 1938년 2월 경성서대문 경찰서는 흥업구락부 관계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된 인사 52명이 체포되었다. 이 들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검사국에 송치되었는데, 강제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게 하고 기소유예로 감경되었다. 감경은 법에 정해진 형량보다 낮추어 언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흥업구락부는 해산되었다. 이를 흥업구락부 사건이라고 한다. 청구구락부는 흥업구락부 안의 장택상 중심의 소그룹이 아닌가 추측된다. 흥업구락부는 실업단체로 위장한 비밀 항일 결사이다.  1925년 3월 23일 서울에서 기독교 계열의 인사들이 주동이 되어 조직되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이끄는 대한인동지회의 국내지부역할을 했다. 신흥우, 이상재, 구자옥, 유억겸, 이갑성, 박동완, 안재홍 등이 주축이 되었다. 종교인, 변호사, 교육자, 의사, 실업인들이 참여했다. 


안창호 계열의 수양동우회가 서북파(평안도와 함경도) 인사들로 구성되었던 반면에 흥업구락부는 기호파(경기도와 충청도) 기독교인사들이 많이 참여했다. 이승만과 상의해서 이 단체를 조직했던 신흥우는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한국 YMCA) 총무였다.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애국계몽과 실력양성 운동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3.1 운동 이후 일본정부의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일본과 조선에서 유행하고 있는 자치운동에 대항하고 이승만의 미주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 정부가 조선사람에게 국방과 외교권을 제외한 자치권을 줄 터이니 독립을 포기하라는 회유 정책을 내세웠는데 이에 호응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이광수가 중심이었던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는 천도교 신파의 최린 계열과 함께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포기하고 항일운동의 목표를 자치권 획득으로 하향 조정하는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윤치호, 신흥우, 유억겸, 정춘수, 장덕수 등은 친일파로 전향하여 전쟁기간 중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전향을 약속하고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나온 장덕수는 일제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일본에게 협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민족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보성전문에 제출하고 교수직을 사퇴했다. 


1938년 일본은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조직하여 사회주의를 제거하려 했다. 조선인 공산주의 전향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일본군 위문, 국방헌금 모금, 비전향자 포섭과 반공좌담회 등을 개최했다. 

1940년 10월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발족되었다.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관제 비정부 기구였다. 조선의 모든 단체가 이 단체 산하에 들어가서 조직되었을 정도로 전국적인 기구였다. 조선인의 황국 신민화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 연맹의 소속기구는 조선총독부의 보조기관으로 기능했다. 1945년 7월 10일 해방직전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1년 1월, 총독부는 사상범의 보호 관찰과 집단수용, 그리고 조선인의 황국 신민화를 위해서 전향자를 중심으로 야먀토주쿠(대화숙)를 만들었다. 1938년에 조직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전면 개편하여 만들었다. 황도정신의 수련을 위한 도장과 일본어 강습을 위한 교육기관, 호전작적인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미술제작소 등이 운영되었다. 전시의 물자 공급을 위한 생산시설도 설치했다. 전향지들을 동원하여 강연회와 좌담회, 군가 부르기 행사 등을 개최하여 사상교화를 시켜서 전쟁 지원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전향하지 않은 사상범은 감금했다. 


장덕수는 이와 같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민관 어용단체에 적극 협조했다.  단체의 필요에 따라 시국강연에 나섰고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수많은 글을 써서 기고하거나 발표했다. 1937년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 제2차 시국순회강연을 시작으로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비상시 생활개선위원회 의식주부위원에 선임되었고, 11월에는 평안남도 대표로 ‘시국 재인식, 생활쇄신’을 위한 순회강연을 했다. 


1939년 1월 내선일체(조선과 일본이 한 몸)를 적극 지지하는 잡지사 동양지 광사가 창립되어 이 회사의 이사가 되었다. 2월에는 이 잡지 창간 기념으로 열린 행사 ‘강연과 영화의 밤’에서 ‘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이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7월에는 시국대응전선보국연맹 경성지부 제4분과 회장을 맡았다. 이후 그는 이단체의 상임간사로 활동하면서 기관지 <사상보국>의 발간을 주도했다. 1939년에 그는 일제전시체제하에서 관면 통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참사를 맡았다. 


1940년에 보성전문 교수로 복귀했다. 동년 5월에 은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내지(일본) 순례단의 일원으로 일본각지의 성지순례 및 ‘총후’ 각오를 다지는 참선 등을 하고 귀국했다.  ‘총후’라는 말은 남자들이 총을 들고 전장에서 싸울 동안 여자들이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돌본다는 뜻이다. 이렇게 일제의 전쟁 돕기에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동아일보 주식회사의 일에 관여했다. 


1944년 11월 5일 밤 부민관 대강당에서 학병제도 실시 사기앙양대회가 열렸다.  김순성(가나가와), 장덕수, 김윤정이 열변을 토했다. 이날 장덕수는 “이 전쟁은 반드시 이긴다. 제군은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황국의 역사를 쌓아 올리는데 피를 흘려라, 그리고 내지 학도와 어깨를 겨루고 같이 죽으라”라고 뛰어난 웅변술로 조선 학생들에게 일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호소했다. 


일제에 협조하는 동안에도 보성전문학교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가르쳤다. 그의 형 장덕준과 동생 장덕진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장덕수는 일제에 성심성의껏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총독부 경무국의 감시를 받았다. 


1942년부터 그는 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을 송진우, 장택상, 안재홍, 여운형, 김성수 등과 같이 도청했다. 

당시에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경성일보는 각 학교의 학도병 지원자가 속출했다고 보도하였고, 각계지도층의 이름을 도용하여 학도병 지원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학도병지원이 부진하자 총독부는 교수들을 소집하여 학생들에게 학도병지원을 독려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장덕수는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척하면서 칼럼기고 압력을 기피하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도청을 통해서 일제의 패전을 예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3년 겨울 총독부의 오오노 학무국장과 단게 경무국장이 보성전문 전임교수 전원을 부민관(현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열린 만찬회에 초대하여 학병 강요를 독려하려 했다. 이 자리에는 당시 친일 기업인 한상룡과 조병상도 참석했다. 


회의 전에 음식과 술이 나왔지만 참석자들은 그리 탐탁하지 않은 자리여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런데 장덕수는 동석했던 상과 과장 이상훈에게 술을 권하고, 평소에 마시지 않던 술을 혼자 딸아 마시더니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회의가 한참 진행 중이었는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더니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너희들이 나쁜 놈들이다. 관등 하나를 승진하려고 그런 무리한 짓을 하고 있는데 조선청년들이 무엇이 답답해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던지려 나가겠는가? 너희들이 그렇게 애국심이 불타면 연령이 많고 적고 간에 너희들이 솔선수범해서 출정해야 할 것이 아닌가? 

지원이면 지원에 맡기는 것이지 왜 강요하는가? 만주국의 생성, 대동아공영권의 형성 등등은 모두 일본의 속임수에서 나온 것이고, 표방하는 아시아 제 민족의 공영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천황은 실은 인자한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너희 놈들이 잘못 보좌해서 욕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일본의 집권자라면 이런 모든 협잡은 안 시키겠으며, 만주국, 남양, 기타 대동아 각민족에 대해서 정말로 공영할 정책을 취하겠다.”


장덕수는 40여 분동 안이나 열변을 토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동료교수들은 사색이 되었다. 안절부절하던 경무국장 단게는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서울역에 손님을 맞이하러 나가야 한다’고 하고 황급히 장화를 찾아 신고 자리를 피했다. 학무국장 오오노는 초청자였기 때문인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장덕수의 말이 옳다는 듯이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래서 장덕수의 연설은 더욱 길어졌다. 


연회는 자정을 넘어 새벽 두 시에 끝났다. 보성전문 교수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장덕수의 발언이 너무나 당돌하고 강경했기 때문에 그의 신상이 걱정스러웠다. 내일 아침에는 일경이 그를 잡으려고 학교로 들이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성수 좌우에 장덕수와 이상훈이 서서 광화문을 지나 북쪽으로 함께 걸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김성수: 속 시원하긴 해도 지나치지 않았어?

장덕수: 괜찮습니다. 제놈들이 일구이언은 못할 것이 아니겠소?

김성수: 자네가 오늘따라 술을 많이 마시기에 무엇인가 벌어질 것으로는 짐작되었지만 그 경무국장이라는 놈 꽁무니 빼는 것이 가관이긴 하더군.

장덕수: 저희들 입으로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했으니까 그게 후회됐겠죠. 아무튼 이런 자리에서 우리 쪽 생각을 분명히 말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를 점점 더 얕잡아 볼 겁니다.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가건 강요에 따라 지원형식으로 취하건 간에 왜놈들 생각과 같은 생각에서 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못 박아 줘야 합니다.

김성수: 바로 그것이 중요한 점인데… 아무튼 자네의 그 아슬아슬한 발언에 모두들 식은땀을 흘렸을 거요.

장덕수: 날씨도 추운데 땀을 흘렸다면 잘됐구먼요.

 

다음날 아침 등교하여 장덕수를 만난 교수들은 그가 체포될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경무국장 단게와 학무국장 오오노는 좌담회를 시작할 때 약속한 “고노 바쇼 가기리” 즉 이 자리에서 한 이야기는 추후에 따지지 않겠다”를 지켰다. 장덕수는 그 일로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1945년 초 조선총독부가 요시찰로 분류된 인사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자 그는 지하로 은신했다. 


1945년 8월 15일 고대하던 해방이 되었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아 정국을 장악할 기세였다. 건준은 중도 좌파인 여운형과 중도 우파인 안재홍이 시작했지만 이미 38 이북을 점령한 소련이 경성에 들어온다는 소문으로 건준은 좌파를 의도적으로 많이 받아주었다. 극좌인 박헌영이 건준에 참여했다. 이에 반발하여 안재홍이 건준에서 털 퇴했다. 


8월 22일경 이후 경성에 미군이 진주할 것이 확실 해졌다. 여운형은 미국과 소련이 이차대전 중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기 때문에 38 이북에서 소련이 우리 민족 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를 인정해 준 것처럼 38 이남에서 우리가 자치기구를 선포하면 미군도 이북의 소련처럼 이를 인정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여운형은 좌파가 건준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바뀌었고 미군이 들어오기 이틀 전인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선포되었다. 현실적이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한 나라의 건국을 선포한 것이었다. 곧 들어올 미군이 이를 인정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없는 자의 가진 자에 대한 혁명을 의미했다. 국민의 80%가 소작인인 농경중심의 사회에서 공산주의는 지주들에게 커다란 도전이었다. 건준, 인민위원회 그리고 인공의 선포, 박헌영의 부상을 지주 등 가진 자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45년 8월 18일 독립운동가 원세훈이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다.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진보정당이었다. 경성에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확실해 지자 그동안 관망했던 우익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8월 28일 김병로, 이인이 조선민족당을 창당하고 원세훈의 고려민주당이 합당했다. 장덕수는 유학 파들을 총망라하여 한국국민당을 만들었는데 김도연, 김성수, 송진우, 유억겸, 윤보선, 윤치영, 허정 등이 참여했다. 


9월 4일 조선민족당과 한국국민당은 통합에 합의했다.  9월 6일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 모인 청중은 200-300명에 불과했는데,  같은 날 인공의 선포를 위해서 좌파들의 계동 경기여고 강당에서 열린 인민대표자 회의가 에는 1000명가량이 모였다.  


1946년 9월 7일 송진우, 김성수, 서상일, 김준연, 장택상, 설의식 등 동아일보 계열 우익인사들이 모여 국민대회준비회(국준)를 발족했다. 한국민주당과는 별개로 좌익의 건준에 맞서기 위해서 우익 세력을 총 망라한 단체였다. 국준의 주 멤버는 한민당 사람들이었다. 


한민당 창당 멤버의 한 사람이었던 조병옥은 한민당의 주목적은 건준 타도라고 하였다. 한민당은 건준, 인민위원회, 인공,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의 좌익집단을 성토하고 타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에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있었고 대중적 인기 또한 대단했기 때문에 이에 맞서 싸우기 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1945년 9월 8일 한민당 발기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의 정권을 참칭 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어떤 종류를 불문하고 단호히 배격함”을 선언했다. 임정봉대론의 선언이었다. 임정을 인정하지 않는 건준과 인공에 대한 반기였다. 


9월 8일 미 24사단이 남한에 들어와서 9월 9일 미군정을 선포하였다. 정부를 표방하는 어떤 민족 단체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포함으로써 미군정이 당분간의 유일한 통치자임을 확인했다.


1945년 9월 10일 오긍선이 미군정에 송진우와 한민당을 소개해 주었다. 다음날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과 미군정보참모부는 한민당을 대표해서 미군정을 찾아온 조병옥, 윤보선, 윤치영 등을 만났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건준을 비롯한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 집단에 의해서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 협력 정치인이라고 모함하였다. 미군정의 인정을 받으려는 헤게모니 싸움의 시작이었다.


오긍선은 1878년에 공주에서 출생하여 1963년에 사망했다.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협성회와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했고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와 함께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약했다. 만민공동회에서 활동 중 조정의 체포령이 내려져서 고향 공주에 있는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의 집으로 피신했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에 스테드만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다. 스테드만이 귀국하면서 남장로교 선교사 불(Bull)을 소개해 주어서 그의 한국어 교사와 조사로 일했다. 1902년에는 군산 야소병원 의료 선교사 알랙산더의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 알랙산더 선교사가 그에게 미국 유학을 권유하여 미국에 가게 되었다. 1903년 알랙산더의 부친 사망 소식을 듣고 알랙산더가 귀국하면서 오긍선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학비일체를 부담하여 오긍선은 켄터키 대학교 센트럴 의과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오긍선은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첫 크리스마스이브 행사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아펜젤러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미국에 유학하면서 장로교도가 되었다. 1907년에 미국의사 면허증을 취득했는데 서재필, 김점동(박에스터)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3번째이다. 


1907년 10월 미국의사가 된 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선교사자격을 얻어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군산에 세워진 야소병원에서 다니엘의 조수로 근무를 시작했다. 1909년 사재를 털어서 옥구 군에 구암교회를 설립하였다.  군산에 안락학교와 영명학교를 세웠다.

1908년 11월, 선교부 지시로 전남 목포진료소장으로 취임하였고 1909년 5 월에 군산 야소병원원장이 되었다. 1911년 9월, 목포 앳킨슨병원장으로 일했다. 목포의 영흥학교 교장직도 맡아서 하다가 남장로교 선교부 대표 자격으로 세브란스의 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로 전임하였다. 1913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최초의 조선인 교수가 되었다. 일본정부의 주선으로 1916년 4월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를 전공하여 1917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교실을 신설하고 주임교수가 되었다. 1918년에는 뜻있는 사람들과 토요구락부를 조직하여 시국문제를 토론했다. 1920년에는 경성 고아 구제회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경성보육원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경성보육원의 원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경성 양로원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20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감이 되었다.  1929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교장, 1934년 제2대 교장에 임명되었다. 교장 재직동안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일본 문교 성 지정학교로 승격시켜 인력과 시설을 확충하였다. 1930년대 초반부터 일제가 황민화를 위해 설립된 조선교회단체연합회에서 활동하였다. 사상범을 감시하는 사상보호관찰소 보호 사 직무 촉탁에 임명되었다. 일제 어용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여 강연과 기고를 통해서 일제의 전쟁동원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창 씨 개명은 거부했다. 


그의 사회사업과 선교, 의료 봉사 활동이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를 통해서 모교에 알려져 1934년 센트럴 대학은 그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추대하고 명예 이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같은 헤에 루이빌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브란스 의대 내과, 피부과 교수 병원장을 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을 옹호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과 갈등을 빚어 1942년에 총독부의 압력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직을 사임했다. 


그는 해방 직 후 한민당 계열에 합류하였다.  그의 한국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 의료인 들과의 인맥은 군정과 한국 정치인 들과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지주와 실업인들이 주도하는 보수 정당인 한민당을 미군정 당국에 소개해 주었고 하지는 남한에 한민당 같은 보수정당이 존재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오긍선에게 친서를 보내 미군정 민정장관(국무총리에 해당)을 권했지만 사양했다. 이로써 미국 정부의 한국인을 미군정 민정장관으로 하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그러나 장덕수와 한민당은 그의 소개로 미군정의 여당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16일 천도교 강당에서 당원 16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민주당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장덕수는 외무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송진우가 총무(당수)가 되었다.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 당의 총무 송진우가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일당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원세훈이 송진우의 빈자리를 임시로 메꾸었다. 미군정은 한현우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고 1946년 1월 김구를 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했다. 수사를 맡았던 장책상도 김구를 의심했다. 한민당도 김구를 의심하여 임정 세력과 한민당 계열은 서로 갈등하는 관계로 치닫기 시작했다. 1946년 1월 7일 한민당은 당의 총무로 김성수를 선출하였다. 


1946년 1월 한반도에 조선사람들로 구성된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합의한 한국 신탁통치에 관한 건의 첫 번째 순서였다. 이 합의에 의하면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 구성된 조선사람들의 임시정부와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하기로 되어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합의가 무조건 5년 동안 4개국 신탁통치를 하기로 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반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신탁이라고 생각하고 반탁을 했던 반면에 소위 친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다는 뜻이었지 무조건 신탁에 찬성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장덕수는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조선사람들의 의견을 미국과 소련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민족의 문제를 저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참가 이유를 설명했다. 


장덕수와는 달리 당의 총무였던 김성수는 반대했다. 장덕수는 이승만과 김구를 찾아가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자연히 장덕수와 그들과의 관계도 소원하게 되었다. 나빠진 그들과의 관계를 염려했던 김성수는 장덕수에게 신변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우익정당통합을 위해서 한국민주당과 한국독립당(김구 임정세력)의 통합이 김성수와 김구사이에 추진되었는데 장덕수는 당을 한독당에 갖다 바치는 일이라고 하며 반대했다. 결국 장덕수의 의견대로 합당은 무산되었다.


표면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한반도에 임시 단일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소련과 미국의 대립은 냉전으로 인한 한반도의 영구적인 분단을 예고했다. 


1947년 3월 2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상하 합동회의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천명하는 내용의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다. 미국이 나서서 공산주의 확산에 대항하는 반공방위지대를 구축하여 소련이 주도하는 진영에 맞서겠다는 미국 외교정책의 원칙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미 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과 어떤 합의가 이루어져 한반도에 하나의 정부가 수립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6월 4일 신탁을 반대하는 진영의 대표자 회의가 열렸는데, 좌익이 찬탁을 하고 있어서 이는 우익진영의 모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익진영은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하는 단체와 대표는 한국민주당 장덕수, 대한노총 전진한, 천년총동맹 유진산, 전청 이성수, 전여총맹 횡애덕, 독촉부인회 박승호, 전도교보국당 이진해, 을미독립 류홍, 유도회 이재억, 황해회 함석훈이었다. 6월 10일 한민당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면서 우익진영의 참여를 종용했다. 6월 20일 한민당은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기 위해서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위를 앞세운 임정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정작 임정은 이에 불참했다. 여기서 임정수립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미소공위가 조선사람들과 협의해서 조선사람으로 구성된 정부를 말한다. 


6월 22일 김구의 임정세력이 만든 한국독립당(한독당)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 셋으로 갈라졌다. 한독당이 미소공위 불참을 선언하자, 이에 반발한 박영희, 안재홍 등은 신 한국민당을, 권태석 등은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여 미소공위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김구와 이승만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는 것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미소공위 참가를 반대했다. 그러나 장덕수는 한국의 독립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힘으로 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들 마음대로 우리들의 장래를 결정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당당히 그들 앞에서 우리들이 원하는 바를 주장해야 된다고 하며 이들을 설득하려 했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반탁 기류가 극심했던 1차 때와는 달리 통일정부 구성이라는 국민적 기대가 컸다. 첫 한 달 반 동안은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7월 초순에 미국과 소련이 입장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소련 측은 친일파 단체,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했던 단체들을 협의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우익정당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소련의 술책이었다. 반면에 미국 측은 협의를 청원한 모든 단체를 참여하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 협의 대상 단체들의 남북한 비율에도 이견을 보였다. 이로 인해서 8월경에는 사실상 결렬 상태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미소공동위원회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있는 동안에 미군정 당국과 워싱턴의 대한정책 담당자들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1947년은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이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리고 있었다. 미국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원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제스와 국민당이 부패하여 미국의 원조가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않아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유리하게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정부는 한국과 중국문제에 대한 정책변화를 위해서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마샬 국무장관의 추천으로 알버트 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가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가 되었다. 그의 임무는 한국 정세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후의 대한정책에 대한 미군정과 한국의 각계각층 인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웨드마이어 사절단은 동경을 거쳐 1947년 8월 26일 한국에 도착했다. 웨드마이어가 한국에 있는 동안인 8월 29일 미국은 소련에게 한국문제를 4 대국 회의에 넘기고 양 점령지역에서 인구비례에 의해 각 지역의 전체의사를 대표하는 임시 입법기관을 선거하여 이들 대표가 통일조선임시정부를 수립케 하고 이 정부로 하여금 모스크바 결정에 참여한 4 대국 대표와 조선독립을 위한 원조를 논의하자고 제안하면서 임시입법기관선거는 남조선 입법의원에서 채택된 법률에 의거하자고 요청했다. 미국은 소련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 제안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무산시키고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기 위한 수순에 불과한 아무 의미 없는 제안이었다.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국과 통일임시정부수립을 협의하면서 자기들의 점령지역인 38선 이북에 사실상의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 10일 38선 이북에는 조선노동당이 창당되었고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선포했는데 이는 소련 군정이 조정하는 조선인 자치정부였다. 3월 5일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친일파 청산, 경제적 평등을 위한 지주와 자산가의 탄압과 종교인 탄압이 진행되어 공산주의 국가건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1947년 8월 말의 한반도는 국민의 통일된 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에 반하여 분단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냉전은 이미 시작되었고 북한에 사실상의 공산주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마당에 남한이 선택할 유일한 길은 미국이 뒷받침하는 자본주의 단독정부 수립이었다. 


통일정부 대신에 남한과 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될 것을 알고 제일 먼저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남한의 정치인은 이승만이었다. 1946년 1월 16일 덕수궁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2월 6일 결렬되었다. 1946년 6월 3일 삼남지방을 순회 방문 중이던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이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 


남한 단독정부의 설립목적이 북한에서 소련이 물러나게 하여 남한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에 있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다시 말해서 선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남한정부 주도의 통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남한정부에 의한 통일은 불가능했다.  국민의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을 무시할 수 없었고 한반도에 하나의 정부를 주장하는 김구 등의 우파 세력을 무마하기 위한 정략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구는 이승만의 행보에 당분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이때 김구는 용산 성모병원에 탈장증으로 입원하고 있었다. 그의 제자이며 실업인 강익하가 병원으로 찾아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쓰라고 건넸으나 “국사에 쓸 돈이면 이승만에게 주고 내가 필요하면 이승만에게서 타 쓰겠다”라고 하며 받지 않았다.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김구가 이승만의 연설에 답사를 하였다. 6월 29일 이승만에 의해서 민족통일본부가 설치되자 부총재에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하지와 미군정이 미국무부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 삼상회의 협정의 틀 안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불만이었다. 북한이 이미 공산주의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시점에서 미소가 동의하는 통일정부수립은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하지의 중도파인 김규식과 여운형을 앞세운 좌우합작운동을 반대했다. 반공의식이 강한 자신의 우파를 등한시하는 하지와 대립했다. 이승만은 1946년 가을부터 1947년 봄까지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정계인사들 설득하여 미군정의 정책을 바꾸어 보려는 노력을 했다. 하지는 그의 미국행을 도와주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도쿄의 맥아터와 접촉하여 그의 도움으로 미국에 갈 수 있었다. 맥아터는 미국무부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힐드링(John R. Hildring)과의 면담도 주선해 주었다.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은 힐스링 외의 미국 정계인사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언론을 통해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므로 남한에 반공 친미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이정부로 하여금 북한과 합쳐서 통일정부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알렸다. 이승만의 노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 이후 미국의 대한 정책은 이승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구는 이승만의 미국 방문과 미소공동위원회 무용론에 찬성하여 사실상 이승만을 지지했다. 


1947년 8월 29일 이승만은 웨드마이어와 만났다. 우익 인사 중 가장 논리 정연하게 우익이 원하는 바를 표명했다. 그는 먼저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이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합법정부는 또 한 번의 남북한 총선에 의해서 통일정부가 수립될 떼까지 과도 정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지의 의견을 피력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힐스링 미국점령지 담당 차관보를 만났는데, 그가 이승만에게 6개 항의 정책을 주었는데 하지가 너무 정책 세부에 얽매여서 정책 추진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하지를 질타하기도 했다. 그러나 힐스링이 주었다는 6개 항의 정책은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8월 30일 웨드마이어는 김구와 면담했다. 김구는 행정권이 조속히 한국인에게 이양되어야 한다. 38선이 철폐되어야 한다. 현재의 과도정부가 법 집행을 단호하게 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 


9월 1일에 한민당의 김성수와 장덕수가 웨드마이어를 만났다. 김성수는 좌우분열의 책임은 좌익에 있다고 했다. 우익은 정치적 통일을 지향해 왔다.  중도파는 좌익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견을 말했다. 

장덕수는 웨드마이어에게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한국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여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여 유엔이 인정하는 합법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웨드마이어가 본국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미국무성, 상하원, 유엔 등에 이와 같은 그의 의견을 담은 편지를 써서 전달했다. 이와 같은 장덕수의 주장은 그가 이미 미국의 정책변화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는 미국의 새로운 정책에 동의했을 뿐이지 그가 새로운 정책을 웨드마이어와 미국 각계각층에 제안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947년 초에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플랜을 발표했다. 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련과 협조하여 국제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방식을 벗어나서 공산주의를 앞세운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는 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즉 미국과 소련,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 구도인 냉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에 발맞추어 1947년 2월에 대한정책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가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로 결정한 시기는 1947년 4월이었다. 그리고 7월 초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웨드마이어 사절단 파견이 결정된 것이었다. 8월 말 그가 한국에 와서 장덕수와 면담을 했을 때는 이미 미국의 정책 변화에 대한 소문이 한국 정계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10월 2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한국총선거안을 가결했다. 1947년 11월 24일 이에 반응하여 김구는 남한에서 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면 영구적인 분단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11월 30일 이화장에 가서 이승만과 한 시간 회동한 후 자신과 이승만 사이에 근본적인 이견이 없다고 11월 24일 성명을 번복하는 성명을 냈다. 이 성명서 발표 후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했다.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 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라고 했다. 


한민당이 장덕수를 매개로 미군정에 협조적이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반면에 김구와 미군정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구는 미군정을 귀국한 이래 인정하려 하지 않고 중경임시정부를 복귀하여 국내에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도 이승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도 우익단체의 단결을 유지하여 임정의 복귀가 최종 목적이었을 것이다.

유엔총회에서 한국 총선거안이 가결되자 한민당은 크게 환영했던 반면에 김구 측은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다. 통일정부의 실현이 사실상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미군정, 한민당은 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했고 김구의 임정세력은 이를 반대했다. 


한민당이 이승만의 국민적 지지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장덕수와 한민당이 당시 권력의 중심이었던 미군정과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 정국이 되면서 장덕수는 각 정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구뿐만 아니고 이승만과의 관계도 경쟁자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유엔결의에 상관없이 조기 총선을 주장했고 한민당은 유엔의 계획에 따른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하여 미국의 정책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민당 정치부장이었던 장덕수는 즉각 당의 조직을 선거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지방조직, 후보자 인선, 자금 등의 문제를 당내 인사들과 의논하고 기획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장덕수는 동대문 제기동 자택에서 당원들과 선거 대책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경찰 한 명과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젊은이 한 명이 집 대문을 두드렸다. 가정부가 대문을 열어주고 어찌 오셨냐고 하니 장덕수를 뵈려 왔다고 했다. 가정부는 그들을 현관으로 안내하고 장덕수에게 손님이 오셨다고 알렸다. 장덕수가 누구냐 고 물으니 경찰이라고 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 그들을 만났다. 그들은 장덕수와 약속이 있어서 왔다고 했다. 장덕수는 그런 약속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닷 세후에 찾아오라고 하고 뒤돌아서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경찰은 그의 등 뒤를 겨누고 칼빈 총을 발사했다. 장덕수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저녁 7시였다. 향년 53세였다.


이 사건의 수사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수가 맡았다. 범인이 경찰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서울 시내 전 경찰에게 소집 명령을 내리고 소집에 응하지 않은 경찰을 추적했다. 2800명 경찰 중 유일하게 소집에 응하지 않은 경찰은 종로경찰서 외근 감독이었던 경사 박광욱이었다. 사건 발생 이틀 후인 12월 4일 박광옥과 배희범이 장덕수 암살의 범인으로 체포되었다. 배희범은 연대 상과 2년생으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칭 대한혁명단의 단원이었다. 


당시에는 수많은 청년 단체들이 있었다. 그중 우익 청년단체로는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전국학생 총 연맹, 대한학생 총 연맹 등이 있었다. 대한혁명단은 대한학생 총 연맹 소속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단체였다. 대한혁명단 단원이었던 박정덕에 의하면 대한혁명단은 대한학생 총 연맹 위원장이었던 최중하(최서면)가 주동이 되어, 총무부장이었던 자신, 평의원이었던 박광옥과 배희범이 참여해서 1947년 8월경에 조직되었다고 했다고 한다. 한 달 뒤 1948년 1월 16일, 한독당 중앙 상무위원 김석황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한독당은 김구 임정 계열의 정당이었고 자연히 김구가 배후로 의심받기 시작했다. 


대한혁명단 조직의 주동이 되었던 최중하에 의하면 대한혁명단 단원이 하나 둘 체포되어 사건의 배후 수사가 한독당과 김구로 확대되자, 그들은 앞 다투어 자신이 사건에 참여했다고 진술하여 더 이상의 배후를 부정했다고 한다.


김구의 측근 김석황이 경찰의 심문을 받고 있는 동안 신일준 등 한독당원도 하나 둘 체포되었다. 배후가 김구라는 심증이 깊어지고 있던 때, 1948년 1월 18일 유엔한국 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들어와 정계인사들을 만나 정세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총선의 범위를 결정해야 했다. 물론 남한 만이냐 아니면 남북한이냐 양자택일인데 북한이 이에 동조 할리가 없어서 남한만의 총선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1948년 1월 26일, 성명을 통해서 이승만은 1948년 3월 1일 이전에 남한만의 조기 총선을 주장했고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북한과의 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고집했다. 1948년 2월 19일, 하지는 둘을 미군정청에 불러 유엔 감시하에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을 종용했다. 그러나 둘은 하지에게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1948년 2월 26일 군정장관 윌리암 F. 딘은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종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조엽, 박정덕이 정덕수 피살 사건의 범인이라고 발표했다. 1948년 3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 제1회 공판에서 미군 검찰은 권총, 사진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하였다.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의 배후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만약 김구를 체포하면 거족적으로 군정에 대항하겠다”라고 알리는 한편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며 한민당과 연대하여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는 듯한 태도를 오해하여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고 한다. 장덕수 암살 이후 이승만과의 관계가 무척 나빠지게 되었다. 


1948년 3월 8일 미국군율재판 위원회는 미국대총령 트루먼의 명의로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에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했다. 재판은 미군정 당국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미군 검사는 한독당 당원들과의 관련을 집요하게 물었으나 김구는 강하게 이를 부인했다. 그의 증언은 신빙성이 있었고 태도는 당당했다. 


1948년 4월 1일 제21회 최종 공판에서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에게 교수형이 조엽, 박정덕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 김석황, 박광옥, 배희범은 한국전쟁 중 대전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모두 미군정과 협조하여 새나라를 건설하려던 인사들이었다. 여운형은 중도 좌파로 분류되었지만 미군정이 중도파를 내세워 좌우 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할 때 김규식과 함께 미군정의 지지를 받던 인물이었다.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로 공산당 봉쇄로 미국의 정책이 바뀐 이후 미군정은 장덕수와 한민당을 신뢰했고 그들과 협조하여 남한에 새나라를 건설하려 했다. 암살 직전의 장덕수는 이승만에 도전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피살됨으로써 이승만에게 남은 경쟁자는 김구 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구는 미국이 추진하는 유엔 대표단 감시하의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있었다. 이승만을 싫어하던 하지도 이승만을 미국에 이용가치가 있는 인물로 한국을 방문한 트루먼의 특사 웨드마이어에게 보고했다. 장덕수 암살의 최대 수혜자는 이승만이었다. 1947년 11월 29일 장덕수와 한민당 수뇌부가 이승만과 만나서 더 이상 그를 도와줄 수 없다고 하자 대로했던 이승만은 이제 아무도 그를 막는 경쟁자가 없게 되었다. 그에게 도전했던 마지막 경쟁자를 김구의 추종자들이 이틀 후에 제거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참고


1. [추억의 영상] KBS 1994.2.20 방송: 정치암살의 희생자들 설산 장덕수

2. 위키백과; 장덕수

3. 나무위키: 장덕수

4. 위키백과: 김구

5. 위키백과; 한국민주당

6. 우리 역사넷: 미소공동위원회의 최종적 결렬과 한국문제의 유엔이관

7. 위키백과: 오긍선

8. 미군정기 웨드마이어 사절단 방한과 미국의 대한정책; 정용욱, 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 동양학 제30편 2000.6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9. 1945-1948년 남한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연구 심지연 경남대학교 정치학 교수

10. 하남타임스; 독자마당; 장덕수, 고려공산당, 사회주의와의 첫 번째 만남,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 중앙연구원)

11.경향신문: 박태균의 버치보고서 (9) 줄어든 미군정의 선택지'유일한 대안 장덕수 암살되자 기댈 곳'은 껄끄러운 이승만만 남아, (10) 김구의 권위를 떨어뜨려라 (11) 서로 이용한 미군정-경찰




이전 21화 2. 몽양 여운형 암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