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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y 06. 2024

김창룡 암살사건

한국의 맥카시즘은 무자비하고 처절했다.

김창룡(위키피디아)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미 상하 양원회의에서 공산주의 폭동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그리스와 공산국가 소련의 압력을 받고 있는 터키에게 경제, 군사원조를 제공할 것을 선언했다. 이는 앞으로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가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소수 정부의 지배를 거부하면 군사, 경제원조를 제공하여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미국이 세계 공산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팽창을 막아 자유진영 국가를 보호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의 시작이었다.  


이후 세상에는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이 대립하는 냉전시대가 도래했다. 미국과 미국 점령 지역인 일본 그리고 남한에서는 공산주의 축출 바람이 불었다. 미국에서는 레드 스켜어(빨갱이 공포)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매카시즘(McCarthyism)의 선풍이 불었으며, 일본에서는 레드 퍼지(Red Purge)가 일어났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조세프 매카시가 고위층 관리나 정치인들이 포함된 공산주의자 명단을 발표하여 이들이 체포되거나 기소되는 사건을 연출했는데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유지하기 위한 근거 없는 고발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빨갱이 덫을 씨 워 정적을 제거하는 행위를 매카시즘이라고 하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 총사령관 맥아터의 명령으로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의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여 해고했다. 


그러나 같은 미군 점령지였던 남한에서의 공산주의자 제거 정책과 방법은 미국과 일본에 비해서 거칠었다. 북한이 지척에 있고 한국전쟁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미군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려운 시기인 1947부터 1950년 대 말까지의 사건들은 무자비할 정도로 잔인했다.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들 다 공산주의자 제거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결백한 생명이 자국의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서 희생되었다. 


미 방첩대(CIC)의 관여가 크게 의심되는 김구 암살사건은 이승만이 메카시즘을 실천에 옮긴 첫 사례였다. 1992년 4월 13일 MBC 뉴스데스크는 “자신이 당시 특무 99 대장이었던 김창룡과 미군 OSS 모 중령의 세뇌를 받아서 백범 암살을 결행했다”는 안두희의 증언을 보도했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집요하게 추적했던 민중정기구현 회장 권중희가 받아낸 증언이었다. 김창룡은 특무대의 전신인 방첩대장이었고 미군중령은 OSS 소속이 아니고 미군 방첩대(CIC) 정보 장교였을 것이다. MBC는 이진숙기자와 권중희 씨의 인터뷰를 보도했다. 미국인 중령은 “김구는 국론통일을 반대하는 존재다. 김구 밑에서 수많은 빨갱이들이 연막을 치고 활동하고 있다”는 등의 말로 안두희를 여러 차례 회유했다고 보도했다. 그들은 “백범은 큰 나무인데 그 나무 밑에 있는 빨갱이를 소탕하려면 나무부터 쓰러뜨려야 한다”는 등 지령은 아니었지만 지령에 가까운 암시였다고 증언했다고 했다.  미군 중령이 김구를 블랙타이거라고 부르며 그를 살해해야 한다는 암시를 강하게 주었으며 자신도 이에 공감하여 암살을 결행하는 것이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믿게 되었다는 안두희의 증언을 보도했다. 안두희는 김구 암살 결행 후 김창룡에게서 “안의사 수고했소”라는 칭찬을 받았고 방첩대에 수감 중일 때에도 술, 담배, 고기 등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안두희는 1956년 김창룡이 암살당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MBC의 보도는 안두희가 미 방첩대 요원이었다는 실리 보고서를 뒷 바침하고 있고 김구 암살에 미 방첩대가 관여했음을 증명해 주는 현재까지의 유일한 증거이다. 그러면 대한민국 빨갱이 잡이의 주구 김창룡은 어떤 사람이었고 누구의 손에 암살당했을까?  


국사 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김득중 박사는 그의 논문 ‘한국전쟁 전후 육군 벙첩대(CIC)의 조직과 활동’이라는 논문에서 김창룡이라는 인물을 다음과 같이 특징적으로 요약하여 묘사하고 있다. 

“남한 방첩대 활동에서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방첩대의 정치적 개입이었다. … 정치개입은 김창룡 특무대장 시절에 절정에 달했다. … 이러한 임무는 정치 지도자와 반정부 조직을 뒷조사하거나 필요한 공작을 수행하는 임무였다. 특무대(방첩대)는 내무부장관이나 대통령으로부터 부여된 특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 나갔던 것이다.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은 이 같은 종류의 특무대 활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타공전선의 제1인자’ 김창룡을 당할 자가 없었다.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그는 참모총장도 어찌할 수 없었다. … 그는 이승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전국적 정보망을 가진 육군 특무대를 ‘경무대의 비밀경찰’로 만들었다. 김창룡이 허태영에게 암살된 1956년 1월까지 일어났던 큼직큼직한 정치적 사건이 그와 관련되어 있었다.” 


김창룡은 1920년 7월 18일 함경남도 영흥,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4년제 사립 덕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영흥공립실습학교 2년 과정을 마친 후 가다쿠라 제사공장에서 2년간 직공으로 일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서 남만주철도회사의 장춘역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1940년 신지 관동군 헌병교습소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고 1941년 4월 관동군 헌병조원으로 근무했다. 1941년 10월, 일본 중지군의 아마카스 사단 파견 헌병대에 배속되어 소만국경에서 중국공산당과 소련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싱안베이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국 공산당 거물 왕진리를 체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를 이용하여 소만국경에서 활동하던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다수의 조직원을 체포했다. 그 공로로 헌병 오장(하사)으로 특진했다. 1943년 9월부터 만주리 헌병대 및 면도하 헌병대 분견임무를 담당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그는 많은 항일조직을 적발했다. 당시에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군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군이 합쳐서 일본과 싸우고 있었다. 이를 국공합작이라고 한다. 많은 조선사람들이 중국군에 소속되어 항일 운동을 했다. 따라서 만주의 일본군대인 관동군에 소속되었던 조선인 일본 장병들은 직간접으로 중국군에 소속된 동족을 일본을 도와 체포하고 살상했다. 김창룡도 그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해방 후 김창룡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1945년 소련군이 만주의 관동군과 교전을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여 38선 이북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따라서 38선 이남과 달리 이북에서는 일본과의 적대 관계가 분명하게 형성되었고 친일파 청산은 즉시 진행되었다. 따라서 김창룡과 같이 만주 일본군에 소속되었던 조선인은 이북에 발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1945년 11월, 그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화물 열차에 실려 이동 중 탈출했으나 다시 붙잡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 또다시 탈출에 성공하여, 1946년 4월, 월남했다. 


그에게는 이북이 지옥이었다면 남한은 천국이었다. 미군정은 일본군 경력을 전범으로 취급하지 않고 능력으로 평가했다. 국군을 창설할 당시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또는 일본군경력이 있는 자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했다. 군사 교육이 잘 되어있고 친일 경력 때문에 충성심이 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김창룡은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의 추천으로 국방경비대(한국군 전신)에 입대하여 사병으로 시작, 정보 하사관으로 근무했다. 1947년 도선경비대사관학교(육사) 제3기로 단기교육을 마치고 그해 4월에 소위로 임관하여, 제1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일했다. 이때 군내 좌익세력 검거에 주력했다. 1948년 1월 중위로 진급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위로 진급하여 방첩부대 전신인 정보국 3과(SIS; 특별조사과)에서 좌익 혐의자 조사를 담당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터졌다. 군내 남로당 당원들이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건이었다. 이들을 제거하는 숙군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김창룡은 백선엽 정보국장 지휘하에 이 작업에 혁혁한 공을 세워 소령으로 특진했다. 


1949년 6월 김창룡은 육군정보국 방첩대장이 되어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옮기고 그를 비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남지구 방첩대장, 군검합동수사본부장을 거쳐 특무대장이 되어 각종 정치공작에 간여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 군 방첩대는 헌병이나 경찰을 무시하고 사상범 척결을 전담했다. 전쟁 중에 계엄이 발포되어 군대가 행정과 사법을 장악했기 때문에 방첩대는 경찰을 지휘할 수 있었다. 전쟁 초기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사상이 의심되어 이적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학살하는 사건들이 벌어졌다. 이 중에서 가장 위험분자로 분류된 사상범들은 보도연맹가입자들과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들이었다. 


해방 후 남한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미군정이나 신생 대한민국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누가 공산주의자인지 알기가 힘들었고 이들을 모두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보다는 전향시켜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 방편으로 1949년 4월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서 오제도 검사의 제안에 따라 보도연맹이 조직되었다. 공산주의 경력을 신고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소정의 교육을 받아 전향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준다고 하여 가입을 독려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서 처벌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가입자가 예상보다 적었다. 그러자 정부는 직장, 행정단위로 배당제를 실시했다. 직장의 장이나 통, 반장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사상과는 관련이 없는 부하 직원, 친구, 친지들을 회유했고 이들은 별생각 없이 가입했다. 좌익 사람들에게 물자나 식량을 제공한 혐의로 강제로 가입한 사람들도 있었고, 주민 간의 사적 감정으로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전쟁이 터지자 보도연맹가입자들은 모두 적과 내통할 수 있는 위험인물로 분류되었다. 전쟁 전에는 보도연맹이 검찰과 경찰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전쟁 후에는 방첩대(CIC)와 경찰 사찰계가 주도했다. 


전쟁 발발 직후 국군이 너무 빨리 후퇴했기 때문에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의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학살할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희생은 충남 서부, 충북 괴산 및 청원 지역, 경산 코발트 광산 집단 학살 등 남쪽에서 일어났다. 충남 서부 지역에서는 방첩대의 관여가 비교적 미약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방첩대의 명령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방첩대는 헌병, 지역 경찰과 함께 연행, 체포, 학살을 주도했다. 

이들은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면서 서울, 대전, 마산, 대구, 진주의 형무소 재소자들을 학살했다. 학살은 이들이 인민군을 도울 것이라는 근거를 분명히 하지 않고 무차별로 이루어졌다. 죽이느냐 살리느냐는 방첩대가 임의로 결정했다.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은 1950년 8월 29일 모든 조사기관을 일원화하여 경남지구 방첩대에 종속시킬 것을 지시하고 김창룡을 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당시에 대한민국이 통치하는 영토가 경남이었기 때문에 김창룡이 사실상 대한민국 방첩대장이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인민군이 3개월 동안 서울을 통치하고 있는 동안 그들을 도운 사람들을 부역자라고 한다. 서울 수복 후 즉시 경인지역 방첩대를 조직하고 김창룡을 부대장으로 임명하여 부역자 색출을 시작했다. 인민군에게 쫓겨 피난하던 시기의 보도연맹 가입자와 형무소 재소자 등의 학살이 인민군을 쫓는 과정에서는 부역자 처벌로 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적자 처별이라는 명분은 같았다. 10월 7일에 군, 검, 경 합동수사반이 조직되었다. 경인지구 계엄사령부 명령에 의해서 국일관에 본부가 설치되었고 김창룡이 본부장을 맡았다. 지휘부에 오제도, 안문경, 정희택 등의 검사와 경찰이 참여했으나 김창룡과 정보장교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김창룡과 정보장교들은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었고, 국회에서 많은 사건을 조작하여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비난을 받고 1951년 5월 해체되었다. 그러나 김창룡은 부역자 처벌의 공로로 육군 특무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육군 특무대는 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의 작전지휘를 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 권력이 커지면서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는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되어갔다. 김창룡은 육군참모총장에게도 일상적인 보고를 하지 않았다. 특무대가 정치공작에 관여하면서 이승만의 비밀경찰이 되어갔다. 


한국 육군 방첩대와 미군 방첩대는 서로 거의 구분 없이 함께 일했다. 육군 방첩대 요원이 미군 방첩대 지대에 배속되어서 조사관, 정보원, 피난민 심사, 통역, 연락 요원 등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기적인 연락망을 통해서 서로 협조했다. 한국전쟁이 전적으로 미군 지휘하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한국 육군이 독립적인 군 작전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두 방첩대의 관계는 그리 예외적인 것인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군 작전권이 미군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 방첩대가 한국 육군 방첩대 우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미군은 한국 방첩대의 비행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군은 한국 방첩대원들이 남한정부를 전복하려는 세력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가 아닌 반대자들까지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남한 방첩대가 비효율적이고 비협조적이며 잔인하다고 비난했다. 미군은 정부를 전복하려고 한 적도 없고 공산주의자도 아닌데 단순히 이승만에 반대했기 때문에 처형된 사람들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인민군이 남한 전 지역을 점령하면서 부산형무소에는 남한 각지의 형무소에 가두어 놓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사상범을 제외한 모든 재소자들을 석방했다. 주로 보도연맹 가입자들, 남로당원, 정치범들만 남았다. 겨우 1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에 4,50명이 들어갔다. 잠을 서로 포개서 자야 할 정도였다. 이들은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굶어 죽고,  수용 후 고문과 열악한 환경 때문에 죽기도 했다. 헌병이 와서 한 방씩 모두 털어 내갔다.  트럭을 타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들은 모두 총살되거나 수장되었다. 미군이 이들을 재판도 없이 무작위로 처형하는 것을 알고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학살은 전쟁 초기부터 9월 서울 수복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민군이 후퇴한 후에는 부역자 학살이 진행되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1951년 3월 25일 첩보부대(HID;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tchment)가 창설되었다. 방첩대가 맡았던 대북간첩 파견, 정보, 첩보 수집을 첩보부에서 전담하고, 비대해진 방첩대는 고위급 정치인이 지시하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조직이 되었다. 정치지도자를 개인사찰하고 반정부조직의 뒷조사를 했다. 특무대는 내무장관이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치공작에 동원되었다. 이 일은 김창룡이 주도했다. 


김창룡은 조봉암의 국회의원 출마를 두 번이나 방해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공산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 후 전향해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농지개혁을 주도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이 되어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게 도전하는 등 이승만의 경쟁자가 되자, 이승만은 1958년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사형시켰다. 


이범석은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하여 민족주의적인 정치활동을 했다. 해방 후 청년 100만이 이 조직에 가입할 정도로 인기 있는 청년 단체였다. 서북청년단과 쌍벽을 이루는 우익 단체였지만 이들과 같이 과격한 폭력 행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조직은 이승만의 자유당을 창당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1953년 정국은 이 간첩사건으로 김창룡에게 체포되자 조선민족청년단 계열의 정치인들을 이 사건에 엮어 넣어 숙청했다. 정국은은 아사히 신문기자로 친일 언론인이었고 해방 후 남한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조선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간첩으로 활동했다.  그는 군법회의에서 이승만 정부 전복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54년 2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최능진 숫사국장(경찰청)

1948년 5월 10일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에 대적하여 동대문구 후보로 출마를 시도했던 최능진은 1950년 11월 특무대 김창룡에 의해 구속되어 1951년 1월 20일 당시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 파도에서 총살되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최능진은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 중이었다. 인민군은 점령 즉시 서대문 형무소 재소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승엽은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정치인들을 성남호텔에 수용했다. 이중 중도파 정치인들이 한강선에서 전쟁을 중지하자는 안을 김일성에게 제안하자는 결의를 했다. 최능선은 성남호텔을 드나들면서 전쟁을 중단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렇게 당시에 정전 운동을 했던 사람은 최능선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적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당한 사람은 최능선 밖에 없었다.   

그의 장례식은 4.19 후 1960년에야 치러졌다. 2015년 8월 27일 서울지법 형사합의 28부는 국방경비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최능진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였다. 


최능진은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성사리에서 부유한 지주 최경흠의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기독교인이었다. 안창호와 동향이다. 집안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고 형 최능찬과 최능현은 모두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1915년 최능진은 중국으로 건너가 금륭대학을 다니다가 1917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스프링필드 대학과 듀크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워싱톤 YMCA 체육담당 간사로 일했다. 그는 미국에서 안창호의 흥사단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연히 이승만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고, 이승만이 사대주의적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하며 파벌을 만들고 분열을 조장한다고 생각했다. 30세 되던 해인 1929년에 귀국하여 평양숭실전문학교 체육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조선 젊은이들에게 육상, 수영, 축구 등을 보급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특히 1932년 평양축구단을 만들어 경평(서울-평양) 축구경기를 궤도에 올려놓았다. 1937년 6 월 수양회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조병옥도 같은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출소 후 잠시 중국으로 피신했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익 지도자 조만식의 권유로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 치안부장을 맡았다. 그때 나이 46세였다. 1945년 9월 3일 현준혁 암살사건으로 우익세력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자 이틀 후 동료 10여 명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 도중에 신문을 보고 남한에서 친일경찰이 다시 고용되어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경찰이 되어 이들을 축출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미국 유학을 했기 때문에 영어를 잘했다. 미군정을 직접 찾아가서 설득하여 경찰관강습소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강습소에 일하는 일제 총독부 경찰이었던 사람들에게서 사표를 받아내었다. 미군정이 경무부를 창설하자 수사국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상관은 조병옥 경무 부장이었다. 


그는 노덕술, 이익홍, 최운하, 최연 등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주구로써 같은 민족을 탄압했던 친일 경찰이 요직에 있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 즉시 이들의 퇴진을 주장했다. 이러는 가운데 1946년 10월 1일 대구항쟁이 일어났다. 사건 진압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10월 7일 “대구지방소요사태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서 일반시민이 가담한 폭동사건이라는 내용이었다. 최능진은 현지를 방문하여 자초지종을 면밀하게 조사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친일경찰의 행패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터진 것 또한 묵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규식등과 함께 미군정에게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미군정은 이 요구를 수용하여 덕수궁에서 미군정, 한국인 관계요인들이 모여 진상규명과 대책을 논의했다. 


일제 말엽에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일제는 양곡을 징수하여 배급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양곡 징수는 경찰이 담당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은 온갖 행패를 부렸다. 미군정은 양곡 배급제를 패지 하고 양곡 수급을 시장경제에 맡겼다. 그러자 양곡을 쌀 때 잔뜩 사놓았다가 비싸 지면 파는 매점매석이 성행하여 쌀 값이 치솟았다. 미군정은 할 수 없이 배급제를 다시 실시했다. 그 지긋지긋한 경찰 그것도 일제 때 보았던 경찰이 나타나서 수확한 양곡을 빼앗아 갔다. 민중의 친일 경찰에 대한 분노는 건드리면 터질 것 같았다. 


최능진은 대구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은 인정하면서 친일경찰에 대한 민중의 참을 없는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친일 경찰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규식 등의 주장으로 미군정은 덕수궁에서 한국인 관계 요인들과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여기서 최능진의 친일경찰 퇴진 주장이 관철되어 1946년 12월 5일 하지중장은 경찰 내 친일 경력이 있는 자들을 파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김규식은 이 회의에서 미군정에게 대구 사태에 대한 경무국장 조병옥의 책임을 물어 그의 퇴진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월 2일 겨우 파면을 면한 조병옥은 상관인 자신에게 대들은 최능진에게 사직을 요구했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계속 출근했으나 조병옥은 그를 강제로 끌어내었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12월 5일 최능진은 조병옥의 비리를 들추어내며 파면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기 전과 3 범인 동시에 민족운동자를 잡아주던 인간을 고관대직에 채용하고 순수한 독립운동자를 무경험자라고 배척하는데 찬동하지 않았다는 의미 이외에 (내가 파면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1946년 12월 6일 조병옥은 “최수사국장이 신문지상에까지 공개성명을 발표한 것은 국립경찰의 불명예를 초래했다. 미국인으로 조직된 조사위원회에 엄중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라고 맛 받아쳤다. 12월 7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조병옥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대도 조 부장과 같은 운명에 닥쳤으나 살아갈 길 이 하나 있다. 그것은 현 간부급을 전부 파면하고 중국에서 건너온 애국자나 국내에 있는 단체의 간부로 경찰 수뇌부를 조직하여 강력 경찰을 나타내라” 12월 13일 최능진은 “금일의 경찰은 친일경찰이 아니고 무엇일까? 김성숙 씨를 위시하여 서대문형무소에는 그들에게 검거, 투옥된 애국자가 얼마인가? 그들의 마수에 희생된 순국열사는 지하에서 비분함을 또 한 번 참지 못하리라 나는 믿는다.”라고 답했다. 조병옥, 장택상, 최능진의 성명 전은 신문에 매일 보도되었고 대단한 사회의 물의를 일으켰으나 미군정은 친일파를 능력 있는 집단이라고 믿고 중용했으며 이들이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결국 1946년 12월 24일 최능진은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미국 유학시절 이승만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최능진은 해방 후에도 반 이승만 노선을 견지했지. 이승만이 원하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김구, 김규식등과 같이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운동을 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통일정부 수립이 좌절되고 이승만이 주장하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확정되었다. 이승만은 동대문구에서 단독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을 획책했다. 최능진은 이승만이 단독 출마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동대문구 출마를 결심했다. 동대문서가 유권자 지지도를 조사해 보니 최능진이 이승만보다 높았다. 상부에서 이승만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지시를 받은 동대문 경찰 서장 윤기병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자로 등록하려면 유권자 200명 이상의 추천서를 동선거위원회에 제출해야 했다. 최능진의 선거운동원이 추천서를 가지고 동선거위원회에 가면 지금 선거위원이 없다며 다음에 오라고 돌려보내어 입후보자 등록을 연기시켰다. 등록 마감일이 다가왔다. 등록 마감 전날인 1948년 4월 15일 동선거위원회 입구에서 두 명의 괴한이 지키고 있다가 최능진 선거운동원이 들고 있던 추천서 가방을 탈취하여 도주했다. 서북청년단 리더였던 문봉제가 중앙일보 1973년 2월 8일 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당시의 범인은 서북청년단 성북 지부장 계호순과 다른 한 사람이었다고 폭로했다. 이 사건을 사주한 주범은 이화장을 이승만에게 기증했던 백성욱이었다. 백성욱은 4대 내무부장관. 문봉제는 6대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이 사건에 관련되었던 서북청년단원 이성수는 백성욱의 공보비서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영어를 잘하는 최능진은 미군정의 협조를 얻어 어렵게 후보등록을 하여 기호 2번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여론은 예상을 뒤엎고 최능진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이승만은 최능진에게 장관직, 또는 주미대사를 시켜주겠다고 하며 후보사퇴를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선거 하루 전인 5월 9일 갑자기 후보등록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의 후보 추천서 중에 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승만은 5월 10일 무투표로 사울 동대문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선거 후 최능진은 이승만이 대권을 잡으면 독재를 할 것이고 통일정부 수립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서재필을 대통령 추대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 중장이 이승만을 미군정을 계승할 미국이 원하는 새나라의 지도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서재필을 초청하여 1947년부터 그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최능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은 대권을 원하지 않았다. 1948년 9월 11일 서재필 박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최능진의 이승만에 대한 도전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미군정은 그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미국으로 갈 것을 종용했으나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하며 거절했다. 


이승만이 국회의원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되고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했다. 1948년 10월 1일 갑자기 최능선이 구속되었다. 최능선 일당이 여수 14 연대 연대장 오동기 등과 결탁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이를 혁명의용군 사건이라고 한다. 


여순사건의 발원지는 여수 14 연대이다. 1948년 9월 28일 육군총사령관 송호성은 14 연대장 오동기에게 소환명령을 내렸다. 서울로 상경한 오동기는 즉시 육군정보국에 구금되었다. 10월 1일에는 최능진, 서세충, 김진섭이 체포되었다. 정부는 이들이 1947년 12월 이후 육군경비대 (현재의 국군에 해당) 오동기소령 등 젊은 장교들과 공모하여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쿠데타를 음모했다고 발표했다. 20일 후에 여순사건이 14 연대를 중심으로 발생하여 마치 정부가 여순사건 이전에 낌새를 알고 미리 수사를 했던 것처럼 보여서 이 사건이 항간의 주목을 받았으나 이 사건은 실체가 없는 완전한 소설이었다. 목적은 이승만의 정적 최능진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공작이었다. 

민간 법정에서는 최능진, 서세충, 김진섭이, 군법정에서는 오동기외에 9명의 군인이 재판을 받았다. 최고책임자는 서세충이었고 재정담당은 최능진, 군내 최고 책임자는 오동기 소령, 경비대 외곽은 김진섭, 강원도 원주 부대 동원책임자는 안종목외 3명, 춘천부대 동원책임자는 박규일 외 2명이었다. 오동기와 최능진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오동기는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14 연대 연대장이었다. 혁명군에 동원되었다는 병력은 원주와 춘천의 8 연대였다. 오동기는 8 연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었다. “오동기 소령 등 국군소속 젊은 장교 다수가 공모하였다”는 사건의 원주부대와 춘천부대 동원 책임자로 지목된 안종옥과 박규일은 이등병과 일등병이었다. 혁명군의 총 병력 수는 고작 200-300명이었다. 1949년 1월 29일 군사재판 고등군법회의에서 오동기 소령 10년, 안종옥 이등병 5년, 박규일 일등병 3년, 김봉수 일등병 3년, 김용안 일등병 2년, 오 필부 일등병 1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군사 쿠데타의 주범들 치고는 너무나 가벼운 판결이었다. 


1949년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최능진에게 3년, 김진섭에게 3년 6개월, 서세충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실제로 쿠데타를 음모했다면 물론 사형 감이었다. 서세충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무죄 석방되었다. 

최능진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살이를 한 지 6개월 만에 6.25 사변이 일어나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인민군은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최능진도 감옥에서 나왔다. 3개월 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어 국군이 들어왔다. 김창룡이 이끄는 합동수사본부는 인민군 점령 시에 서울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에게 부역한 사람들을 골라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최능진은 피신처를 찾아야 했다. 친구인 이필석의 집에 숨었다. 그는 이곳에 은신하면서 이승만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1950년 11월 초 어느 날 밝은 얼굴로 외출했다. 이승만과의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믿은 그는 당국에 출두했다. 그는 즉시 체포되었다. 1951년 2월 11일 사형이 집행되기 전 그는 자식들에게 유서를 남겼다. 


“가아 필립, 봉립, 만립, 화선, 자립과 애처요 친우인 이풍옥에게 끝으로 부탁과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부의 금일의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됨인데, 너희들은 조금도 누구에게 반감을 갖지도 말고 또한 부의 원수를 갚을 생각도 말고, 오직 너희 5남매는 부가 있을 때 보다 더 서로 사랑하며 외로운 모를 봉양하여라. 우리 국가가 이모양으로 간다면 너희들의 생명도 안전 치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필립, 봉립, 만립 너희 3인은 UN군과 끝까지 행동을 같이하여라. 처 풍옥에게는 사과할 뿐이오. 아이들 잘 길러 주시오. 

생각할 점 몇 가지

1.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

2.      정치경제 기타 문화는 인격을 조성 치는 못하는 바이고, 오직 내부 즉, 양심적 변화가 있어야 하는 데, 그것은 종교이다. 기독교를 신봉하기 바란다.

3.      친동생끼리 상부하고 국가, 민족에 충성하라.

4284년 2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부 능진 서


민족주의자이며 우익 보수 정치인 최능진은 인민군에 부역한 대한민국의 반역자이며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출세에 눈이 어두운 친일파 김창룡의 손에 총살당했다. 그는 친일파 청산, 이승만 타도, 서재필 추대, 통일정부 수립, 정전운동에 도전했다. 그의 도전은 당시의 우리 민족의 과제였다. 그러나 그 시대에 우리 민족이 그의 주장에 부응하기에는 너무나 힘이 없었고 무지했다.   


김창룡은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적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나, 사실 진짜 빨갱이는 이북으로 가고 적발해야 할 부역자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없는 빨갱이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부역자 적발과 처벌을 위해서 군, 검, 경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고 김창룡이 수사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였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사는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할 것이라고 하여 모두 죽였다. 아무 죄 없는 주민들을 공비로 만들어 사살한 사건이었다. 이를 삼각산 사건이라고 한다. 

1950년 10월 1일 북진하여 평양을 수복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주고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 라인(37도선)으로 후퇴했다. 


인민군과 국군의 싸움이 미군의 개입으로 인민군과 미군(유엔군)의 전쟁으로 변하더니 결국은 미군과 중공군의 전쟁이 되었다. 이러는 동안 한국의 정치인들은 전쟁에는 아랑곳없는 듯 정쟁에 몰두했다. 여기에 일부 지각없는 군인들이 합세했다. 전쟁으로 인해서 ‘빨갱이가 악’이라는 국민 정서는 더욱 확고 해졌다. 일부 정치군인들과 이승만 정권은 이 점을 십분 이용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당시에 한국의 경제는 미국의 국군에 대한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정치 자금 줄이 군에 있었고 박봉에 시달리는 군 장성들은 군사물자 횡령에 약했다. 


국민방위군(위키피디아)

1950년 11월, 북으로 진격하여 평양을 비롯한 북한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개입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점령하고 있을 때 국군은 보충병 조달에 무척 애를 먹었다. 인민군은 점령지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징집하고 국군은 제한된 지역에서 청년들을 모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이 개입할 경우에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1950년 11월 20일 한국정부는 청년방위대를 국민방위군으로 대체하기 위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949년 12월 19일, 이승만은 수많은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을 만들었고 전쟁 중에 대한청년단원을 중심으로 청년방위대를 조직했다. 


이 법안의 내용은 군인, 경찰,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들을 제2 국민병에 편입시키고 이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되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민간인 대한청년단 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고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최소한의 기간요원만이 현역에서 차출되고 대부분의 방위군 지휘관은 청년단 출신이었다. 불과 몇 주 만에 무려 5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 모였다. 이들은 인민군에게 끌려 가느니 미리 입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우선 의식주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내주고 37도선으로 후퇴했다. 서울, 경기 지방에서 모집한 방위군을 대구, 부산등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그런데 이들에게 급식은 물론 군인에게 필요한 일반 보급, 방한복, 군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방위군의 고급지휘관과 장교들이 장병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보급품을 착복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1월 혹한에 방한복은커녕 군복조차 제대로 입지 못하고 장갑과 군화도 없이 일반인 옷을 입고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도보로 산길을 따라서 남쪽으로 향했다. 


경상도 지방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이곳에 병력을 이동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1개 교육대당 약 만 명의 병력을 수용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각 교육대의 책임자들은 병력이 도착하면 수용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김해로 가면 마산으로 가라고 하고 마산에서는 진주로 가라는 식으로 뺑뺑이를 돌렸다. 그리고 며칠씩 병력을 수용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정부에서 지급한 예산과 식량을 착복했다. 어쩌다 훈련소에 입소해도 보급품이나 식량도 없이 훈령소에 갇혀 지내다가 굶어 죽거나 동사했다. 혹한 속에서 수많은 장병들이 죽어 나가고 손발에 동상을 입어 불구자가 되어가는데 방위군 고위 간부들은 군수품과 보급품을 횡령, 착복하여 돈을 챙기고 장부상으로는 ‘장병들을 위하여 젤리공장을 짓는다’고 써 놓는 등의 부정을 저질렀다. 굶주림을 참지 못한 병사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칫집과 굿판을 습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불과 100여 일 동안에 50만 명의 장병 중 12만 명이 사망했고 20만 명이 동상에 걸려 불구가 되었다. 


방위군 부사령관 윤익헌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여러 청년단에서 총무국장직을 역임하며 돈을 만들어 내는데 수단이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해방 후 전혀 군 경험이 없는데도 대령 계급장을 달 수 있었다.

1월 말 내무장관 조병옥, 장택상, 유진산은 시체들의 사진 등 증거물을 가지고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에게 국방장관 신성모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신성모는 이승만에 대한 여론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사건의 수사를 집요하게 방해하여 진상을 축소하려고 했다. 군사 법정은 3일 만에 사령관 김윤근은 무죄, 부사령관 윤익헌에게는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여론이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이 사건을 알게 된 미군 지휘관들은 이승만을 찾아가서 국방장관 신성모를 당장 해임하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와중에 1951년 2월 10-11일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다급해진 이승만은 국방장관  신성모, 내무장관 조병옥, 법무장관 김준연을 해임하고 이기붕을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회에 이 사건에 대한 중간발표를 중지할 것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거창양민학살사건, 방위군 사건 모두 공비의 소행이라고 일축하려 했다. 그러나 국회진상조사위원회 서민호 의원은 국민방위군 간부들 대부분이 상부의 명령을 빙자하여 예산을 착복했다고 발표했다. 


국회 조사위원회 보고에 의하면 1950년 12월 17일부터 1951년 3월 31일까지 착복한 액수가 23억 원, 쌀 5만 2 천섬이었다. 식료품비의 조달 액수와 실제로 집행한 액수의 차이가 무려 20억에 달했다. 따라서 3개 월동안 방위군 고위 간부들이 착복한 액수는 55억 원으로 추정된다. 1951년 4월 30일 국회는 국민방위군 해체를 결의하였다. 관련된 국민방위군 고위 간부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7월 19일 중앙고등군법회의는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이하 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8월 12일 김윤근, 윤익헌, 김석한, 박창언, 박기환 등이 공개 총살되었다.  


김창룡은 국민방위군 사건을 예의 주시했다. 전시에 군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정치인들의 자금줄이 군의 부정에서 나왔다. 국민방위군 사건에 군 상층부의 관련이 의심되었다. 당시의 군은 함경도 출신 장성들이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김창룡은 군내 함경도 출신자들에 대한 북한의 국가전복 공작을 생각하고 있었다. 함경도 출신 정일권은 육군 참모총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김창룡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이를 눈치챈 정일권 등 군 상층부는 김창룡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정국이 불안하고 이승만 정권이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는 가운데 거창양민학살사건이 발생했다. 1950년 9월 15일은 많은 한국사람들이 인천상륙작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더욱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이 거의 괴멸상태에 이르러 총퇴각을 결정한 시기이다.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의 낙동강 방어 작전의 결과였다. 이를 확인한 맥아터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명령했다. 북으로 퇴각하려는 인민군은 남쪽에서 쫓는 유엔군과 북에서 기다리는 인천에 상륙한 병력사이에 끼어 북한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자연히 이들은 지리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후 북진했던 유엔군과 국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38션 이남으로 후퇴하여 1951년 1월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37도선에서 병력을 재 정비하여 총반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지리산 속의 빨치산들은 미처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의 합류로 병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보급이 필요했다. 야간에 지리산 자락의 마을에 내려가서 식량을 약탈해 갔다. 날이 새면 경찰과 국군이 와서 적과 내통했다고 잡아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군 작전면에서 보면 지리산 자락 마을이 빨치산에게 그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보급을 해주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낀 주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밤에 나타나는 인민군의 요구를 거절하면 그들에게 죽고,  도와주면 낮에 찾아오는 경찰과 국군의 처벌을 면할 수 없었다.


구창민간인학샇사겅(한게레)

적의 보급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작전지역 초토화는 전쟁 중 흔히 쓰는 작전이다. 적이 쓸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고갈시키는 것이다. 국군은 빨치산을 토벌할 목적으로 제11사단을 창설하였다. 사단장으로 최덕신 준장이 임명되었다. 진주에 본부를 둔 9 연대(연대장 오익경 중령)가 산청, 함양, 거창을 담당했으며 거창은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가 맡았다. 9 연대는 제주 4.3 사건 당시 많은 민간인 학살의 전력이 있는 부대였다. 

11사단의 빨치산 토벌 작전명은 “견벽청야”였다. 벽을 견고히 쌓고 들판의 곡식을 불사른다는 뜻이다. 작전은 1950년 11월 22일부터 진행되었다. 거창군에 3대대가 들어왔다. 그들은 거창군민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3대대 군인들은 우익청년단을 동원하여 주민들에게 장작과 농작물, 김치, 현금 까지도 빼앗아갔다. 마을을 불태워 강제 이주시키고 소를 잡아먹었다. 빨치산에게 밥을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총살이었다. 12월 5일 거창군 신원 지서가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경찰 4, 5명이 사망했다.


1951년 2월 9일 9 연대는 빨치산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다. 2월 4일부터 8일까지 지리산의 빨치산을 포위 공격하기 위해서 1대대는 함양에, 2대대는 순천에 포진하고, 3대대는 거창에서 산청으로 이동했다. 이때 내려진 작전명령 부록에는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식량과 가옥을 확보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적의 손’을 빨치산 점령지역이 아니고 ‘미 수복지역’으로 해석하여 작전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3대대의 작전구역은 거창읍, 산청읍, 함영읍을 연결하는 삼각지대 내부지역으로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거창군 신원면이 포함되었다. 거창읍에 주둔하고 있던 3대대는 1951년 2월 5일 새벽 신원면을 공격했다. 신원면은 감악산에 가로막혀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운 오지였다. 1950년 12월 5일 빨치산이 신원지서를 습격했지만 신원면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국군이 장악한 상태도 아니어서 ‘미 수복 지역’이었다. 3대대는 신원면에서 빨치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산청으로 향했다. 이들은 산청에서 500여 명, 함양에서 590명의 양민을 학살한 다음 8일 저녁에 연대장 오익형의 명령으로 신원 군 과정리에 들어왔다. 


1951년 2월 9일 3대대는 거창군 신원면에서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을 시작했다. 청연 마을에 들어온 군인들은 빨치산으로부터 피난을 시켜준다고 하여 집을 비우게 했다. 집을 나간 그들은 마을 앞 논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군인들은 집을 태우고 논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총살했다. 84명이 죽었다. 2월 10일에는 중유리, 대현리, 외룡리에 군인들이 쳐들어왔다.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로 끌고 갔다. 날이 저물자 미처 따라오지 못한 사람들 100여 명을 탄 양골에  몰아넣고 사살했다. 


신원초등학교에 끌려온 마을 사람들은 1000여 명이었다. 교실과 복도를 가득 매웠다. 이들은 추위와 공포에 바들바들 떨었다. 경찰과 면장을 앞세워 군인, 경찰, 공무원 가족을 대강 가려내어 귀가시켰다. 11알 날이 밝을 무렵 나머지 사람들을 학교 근처 박산골로 끌고 갔다. 가는 도중 뒤처지는 사람들에게 총기를 난사하여 16명이 사망했다. 미리 파놓은 구덩이가 있는 학살현장에 도착했다. 군인들은 끌려온 주민들을 구덩이에 밀어 넣고 총기를 난사했다. 그리고 시신을 나무로 덮었다. 휘발유를 뿌린 다음 불을 댕겼다. 여기서 517명이 죽고 3명이 살아남았다. 


다음은 살아남은 신현덕 씨의 증언이다. “…그런데 지휘관인 듯한 젊은 군인이 나를 포함해 젊은 사람 대여섯을 손가락으로 불러내요. 나중에 알았지만 시체 뒤처리를 시킨 뒤 죽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서있는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자 기관총소리가 천지를 진동 시켰 서요. 엉겁결에 아래쪽을 보니까 차마 눈뜨고 못 볼 참상 … 총소리가 멈춘 후 군인들이 우리를 불러 나무를 져다 나르라고 명령했어요. 겁에 질려 시키는 대로 했어요. 불길이 한참 시체 더미를 태우는 데 갑자기 총구가 우리를 겨냥했어요. 본능적으로 엎드렸는데 … 모두 죽고 문흥준과 나만 무사했어요. 우리 두 사람은 손이 발이 되도록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 그러자 군인들은 ‘지독하게 명이 긴 놈들이군’하면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입 밖에 내면 죽을 줄 알라’는 협박을 한 뒤 풀어줬습니다.”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희생된 719명 중 15세 이하의 어린이가 362명, 여자가 391명이었고, 61세 이상 노인이 64명이었다. 장정이 전쟁터에 나가고 남아있는 여자,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1951년 2월 13일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신원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외부와의 왕래를 봉쇄했다. 그러나 소문은 막을 수 없었다. 거창 지역구 국회의원 신중목이 국회에서 사건을 폭로했다. 국회와 정부는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여 현지에 파견했다. 4월 7일 합동조사단이 신원면 입구 수연더미재 근처에 도착했다. 갑자기 그들에게 총알이 날아왔다. 빨치산을 가장한 국군의 공격이었다. 조사단은 사건 진상조사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군과 정부의 사건 은폐 공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건 희생자들이 모두 빨치산과 내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매장된 희생자 중 어린이 시체 100구를 골라 홍동골에 암매장한 사실이 밝혀졌다. 


4월 24일, 이승만은 거창사건을 ‘공비와 협력한 187명을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고 발표하였다. 워싱톤 프스트를 비롯한 외국 언론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국제적 비난이 쏟아 지자, 7월 27일 진상조사를 다시 실시했다. 학살 주범들이 군법회의에 넘겨져서, 12월 16일 연대장 오익경은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년, 계엄사령주 민사부장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1년 후 모두 사면되어 경찰 간부로 중용되었다. 


1951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초상이 나서 관을 매고 지리산으로 가고 있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체포했다. 관을 압수하여 그 안에 총기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승만에게 관에 총을 숨기고 지리산 공비에게 가고 있는 빨갱이들을 체포했다고 보고했다. 이승만은 기뻐하며 아무 날 국무회의에 관을 가지고 와서 장관들에게 보여주라고 지시했다. 이승만이 그날 국무회의에서 김창룡이 무기가 들어있는 관을 가지고 와서 국무위원들에게 보여준다고 하자 내무장관 조병옥은 김창룡이 국무회의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하며 반대했다.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김창룡을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이승만은 관속의 녹슬 은 무기를 보며 만면에 미소를 뗬다. 그날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공안검사 선우종원은 그의 회고록에 “빨갱이한테서 압수했다는 무기라는데 개머리판도 없고 낡아 저게 살상용으로 제대로 쓰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물건을 보는 이박사의 입가에는 흐뭇한 웃음이 배어 있는 것을 어쩌랴”라고 이승만의 김창룡에 대한 의심 없는 신임을 지적하고 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단락된 후 1951년 6월 이승만은 육군참모 총장 정일권을 해임하고 미국 유학을 보냈다. 국민방위군 사건에 정일권이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여론이 그에게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후임에 이종찬장군이 임명되었다. 


1952년 5월 24일 부산 금정산에 무장한 인민군 7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순식간에 사살되었다.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한 지 한참 지난 시기에 부산에 다시 인민군이 출몰한 것은 사회적 불안을 초래할 만한 큰 사건이었다. 다음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5월 26일 헌병대는 국회의원 통근 버스를 납치했다. 부산정치파동의 시작이었다. 부산 금정산에 나타난 인민군은 대구 형무소애 수감되어 있던 무기수, 중 형수 들이었다. 김창룡이 이들에게 ‘큰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고 꼬여서 인민군 복장을 입히고 무장을 시켜서 금정산에 나타나게 한 다음 사살하고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여 계엄령 선포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장면을 집권하게 하려 했다. 


부산정치파동(한국일보)

이승만은 새로 임명된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명령했다. 이종찬은 국군 작전권이 미군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미군 측은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한 후 국회의원들을 협박하여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만약 이승만이 이것을 강행하면 그를 군 쿠데타로 제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부대가 있었다. 헌병대와 특무 대였다. 이승만은 헌병사령관 원용덕을 불러 계엄령을 선포하게 하고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이후 군 내부에서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이종찬이 군은 절대로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견지하여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미군 측은 이승만을 바꾸어 봐야 전쟁을 수행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쿠데타 계획을 보류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부산정치파동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25일 6.25 전쟁 1주년 기념식이 부산 충무로에서 열렸다. 의열단원이었던 당시 62세의 유시태는 내빈석에 앉아 있다가 이승만이 연설을 시작하자 단상으로 다가가서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어 이승만 암살에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범행 2시간 만에 그에게 대통령 저격을 사주했다는 70세의 국회의원 김시현이 잡혔다. 그는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 당원이었다. 의열단에 가입하여 1923년 3월 제2차 대암살파괴계획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는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26년간 독립운동을 했다. 4번이나 일제에 체포되어 1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 후 김규식계열의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반이승만 계열의 민국당에 입당하여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동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유시태도 의열단원으로 대암살파괴계획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복역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간선 내각 책임제를 추진하고 있던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협박하여 1952년 7월 4일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장택상이 내각제 책임제와 대통령 직선제 중 장점을 뽑아서 만든 개헌안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1952년 8월 5일  국민의 직접투표로 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은 장기집권 독재 체제를 마련했다. 


1952년 8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승만암살미수사건의 제1회 공판이 열렸다. 김시현은 공판에서 범행동기를 밝혔다. ‘이승만은 민생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정실인사를 자행하고 권력을 남용한 독재자이다. 북한이 상당기간 동안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쟁이 발발한 후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하고 혼자 남쪽으로 도망쳐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시원치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과한마디 하지 않았다. 국민방위사건과 거창 양민학살을 일으킨 민족의 역적 신성모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주일대사로 발탁했다.’등등이었다. 당시의 이승만에 대한 민심을 잘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김시현의 동기가 의심되는 진술이 나오고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 


김시현은 유시태와 이승만 암살에 대해서 논의하기 전에 인천교도소장이었던 최안옥과 암살계획을 논의했다.  최안옥은 이 사실을 치안국 정보수사과에 고발했다. 그 결과 사건발생 3일 전인 6월 22일, 치안국 정보수사과 형사들이 김시현을 체포하여 문초한 결과 혐의가 짙다고 판단하여 구금하려 했다. 그러나 치안국장 윤우경이 30분간 독대하고 풀어주었다. 관련 경찰관들의 증언이었다. 


김시현은 또한 원래부터 이승만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탄환 4발 중에 2발이 불발탄이었고 나머지 2발도 물수건에 적셔 싸가지고 다니면서 불발탄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원래부터 저격의 목적이 살인이 아니고 이승만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그가 각성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52년 7월 3일 이범석 내무부장관은 유시태가 가지고 있던 권총과 탄환이 불발될 상태였음을 인정했다. 김시현의 변호사 장후영은 이 사건이 민국당을 파괴하기 위해서 김시현이 경찰의 양해아래 연출한 연극이라고 하여 김시현의 무죄를 주장했다. 

1954년 1월 30일 대법원은 김시현과 유시태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4.19 혁명직후인 1960년 4월 28일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김시현은 “모경사(경찰관)로부터 구입한 총을 미리 검사하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이 사건이 연극인지 실제로 이승만을 암살하려 하다가 권총 불발로 실패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김창룡은 부산정치파동까지 모두 자기 손으로 처리하려 했다. 그러나 김창룡은 부산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승만이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계엄령선포를 요구하자 작전권이 유엔군에게 있기 때문에 군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훈령 217호를 발령하여 “모든 군은 일체의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라”라고 했다. 동시에 대구 남쪽으로의 전 병력 이동을 금지했다. 당시에 김창룡의 상관은 육군정보국장 김종평 준장이었다. 그는 훈령 217호에 따라 김창룡을 부산에 가지 못하게 했다. 결국 부산정치파동은 계엄 사령관이었던 헌병대장 원용덕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공을 빼앗긴 김창룡은 김종평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또 다른 공작을 도모했다. 1953년 김창룡은 동해안 반란사건을 조작했다.                                                                    

속초에 있는 1군단을 이승만이 방문하면, 이승만을 사살하고 김종평 육군정보국장이 병력 1000명을 동원하여 부산을 장악한 다음, 정부요인을 처단하고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군법회의에서 여러 증인들이 김창룡의 조작임을 증언하여 사건은 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53년 9월 김종평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46년 김창룡이 3 연대 사병이었을 때 김도영이 그의 소대장이었다. 김창룡이 야간순찰 후 보고하라는 명령을 위반했다. 소대장 김도영이 그를 때리고 꾸짖었다. 김창룡은 이것을 잊지 않고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49년 김창룡은 김도영이 제주도 좌익 세력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만들어 수사했다. 김도영은 6개월 동안 구금 당했다가 간신히 풀려나왔다. 그러나 김창룡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54년 김창룡은 김도영이 야당 국회의원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논산훈련병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김도영은 4개월 후에 석방되었다. 그는 김창룡의 방해로 진급이 잘 되지 않았고 좋은 보직을 받지 못했다.  


김창룡은 비밀요원(undercover agency)을 이용하여 사건을 만들어 상대를 일망타진하는 고급 기술도 발휘했다. 1955년 이승만 암살음모사건이 그 예이다. 1955년 이종태라는 청년이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 김재호, 김익중, 이범륜, 유성연, 김동혁, 김동훈 앞에 나타났다. 이들은 젊은 시절 열열한 독립운동가였고 이승만의 실정에 불만이 많았다. 이종태는 이들에게 이승만을 비판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토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들은 이종태에게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수류탄을 던져 이승만을 죽일 터이니 수류탄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특무대는 거사 직전에 이들을 체포했다. 이들이 김창룡 방에서 얻어맞아 가며 취조를 받고 있는데 이종태거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이들은 망연자실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범륜과 김동훈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1953년 5월 김창룡은 육군 준장, 1955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김창룡은 어느덧 이승만의 오른팔, 이승만의 양자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는 권력 투쟁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반공검사 오제도는 김창룡의 경쟁자였다. 1950년 10월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척결을 위해서 만들어진 군, 검, 경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했다. 반민특위, 국가보안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을 사형시킨 인물이다. 김창룡은 이승만에게 ‘오제도가 빨갱이입니다’고 보고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제도는 ‘아닙니다. 김창룡이 빨갱이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승만은 그냥 듣고 말았다. 


미군정 당시 서울 경찰청장 장택상 밑에서 빨갱이 잡이로 악명 높았던 친일 경찰 노덕술은 육군 중령으로 헌병사령부 범죄수사단장이었다. 당시에 많은 친일경찰들이 헌병이 되어 그들의 친일경력을 감추었다. 이승만의 노덕술에 대한 신임도 각별했다. 김창룡은 노덕술이 군수물자를 빼돌린 사실을 들추어 언론에 폭로했다. 1955년 11월 노덕술이 파면되었다. 


김창룡이 이승만의 심임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자를 내치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적은 많아졌다. 한편 이승만은 심복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들어서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여 자신에게 도전을 미리 예방하려고 했다.  부산정치파동을 육해공군 헌병총사령부 사령관 원용덕이 주도하면서 김창룡과 원용덕은 이승만의 신임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원용덕은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한 내과 의사였으며 만주국 일본군대의 군의관으로 일했다. 당시에 국군 작전권은 미군에게 있었지만 헌병대와 특무대는 예외여서 대통령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그는 작전권 밖에 있었던 헌병 총사령관이었던 덕분에 부산정치파동과 반공포로석방을 주도하여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 이승만은 만주군 출신인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을 번 갈아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여 서로 견제하게 했다. 정일권은 함경도계의 좌장 격이었다. 도합 75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정일권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평안도 계는 40명 정도였는데 백선엽이 그 중심이었다. 그는 정일권처럼 자기 파벌을 챙기지 않았다. 나중에 장도영이 주도했다. 일본 육사 출신이 중심이 되었던 이형근 계는 겨우 10명이었고 파벌로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김창룡은 함북 출신이었지만 정일권 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창룡은 그들의 비리를 자세히 조사하여 알고 있었다. 한편 정일권 계 장교들은 김창룡이 “같은 함북 출신이면서 인기 없는 이승만에게만 충성하는 석두”라고 비난했다.


정일권은 1951년 6월 국군방위사건과 거창민간인 학살 사건 등에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 직과 군 총사령관 직을 사임했다. 중장으로 진급한 그는 미국 육군참모 대학에 입교했다. 백선엽 장군이 그 뒤를 이었다. 귀국한 그는 2사단 장으로 근무하다가 1954년 2월 장군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백선엽 장군을 대신하여 제8대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1954년 5월 정일권 참모총장은 그와 가까웠던 공국진을 육군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군내부패의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을 지시했다. 공국진은 이 과제를 수행하는 중에 직무한계를 무시하는 김창룡과 자주 충돌했다. 김창룡은 공국진을 해임시키기 위해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수출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이승만의 지시를 앞세우는 김창룡을 정일권도 당할 수가 없었다. 정일권은 공국진을 해임했다. 그리고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2군 참모장으로 발령하려 했으나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그는 공국진의 보좌관을 연행했다. 이러한 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이승만을 직접 찾아가서 김창룡의 전근 내지는 유학을 건의했다.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창룡은 곧장 이승만에게 달려가서 이제까지 분골쇄신해서 일했는데 이게 무슨 말씀이냐고 하소연하자 이승만은 김창룡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정일권과 강문봉은 김창룡 제거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고 한다. 


정일권이 중장으로 2 사단장을 하던 시절 중령인 허태영과 자주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하는 등 친하게 지냈다. 호방한 성격의 허태영은 다른 부하들과는 달리 상관인 정일권을 허물없이 대했다. 허태영이 중령으로 진급하여 대전지구 특무대장으로 나가 있을 때도 정일권은 그를 찾아가서 금일봉을 주기도 헸다. 허태영은 평안남도 중화 출신으로 평양농림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당시에는 일본군 헌병보를 하고 있었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특 8기로 임관했다. 1950년 육군포병학교 2기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허태영은 상관인 김창룡을 비난하고 다녔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인 그가 군대 선후배를 모른 체하고, 너무 독재를 한다”는 등의 막말을 하며 술이 취하면 “언젠가는 나도 특무대장을 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그는 군인이 아닌 자들을 4-5명씩 운전사 등이라고 하며 몰고 다녔다. 

결국 김창룡은 허태영을 일반부대로 전출시켰다. 특무대를 떠나던 날 김창룡 부대장에게 신고를 하고 부대장실을 나온 후 부대장실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다행히 엄재림 부관이 오발 사고였다고 하여 무사했다. 


김창룡에게 버림받은 허태영을 정일권이 거두어 주었다. 1954년 11월 허태영은 서울지구병사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요 지음 서울지방병무청장에 해당하는 자리로써 대령이어야 자격이 있었다. 중령인 허태영은 임시 대령 계급장을 달고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1년 뒤에 해임되었다. 그는 김창룡 때문이라고 분노했다. 


1955년 6월 2일 하오, 173차 금융통화위원회가 열렸다. 여기서 한국은행감독부의 미국대외사업자금에 의한 ‘원면인수자금대출금 사후 괸 리 상황검사 보고 급 조치에 관한 건의서’가 논의되었다. 원래는 미국 원조 자금 50만 달러를 민간인들을 위한 원면(솜)을 수입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국방부가 갖은 압력을 동원하여 1953년 11월 9일부터 1954년 6월 24일까지의 1954년도 3군 장병의 월동용 침구와 방한복 제작을 이유로 긴급군수물자로써 할당을 받았다. 말하자면 민수용 원면을 전쟁 수행이라는 미명 아래 군수용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래놓고 이중 97%를 시장에 매각했다. 여기서 생긴 10 수억환의 이윤은 이기붕 수중으로 들어가서 자유당 선거자금으로 유용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회, 국회원 면사건조사보고, 월동용 원면 50만 달러 어지 중 97% 시장매각)

미국에서 들여온 고 급원면을 팔아먹은 군은 저질의 인도산 원면을 사들여 군인들의 월동에 대비했다고 한다. 


당시 군내에서는 크고 작은 비리가 수 없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후생 사업이었다. 명목은 부족한 부대 운영자금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장병을 동원하여 부대 주위의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장작이나 목재를 만들거나 심지어 숯까지 구웠다. 두부를 만들고 콩나물을 길러 내다 팔았다. 어느 날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 공관으로 가는 도벌 장작을 실은 트럭이 특무대원에게 적발되었다. 특무대원이 김창룡에게 이를 보고했다. 김창룡은 부대로 연행해서 원칙대로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국방부 원면 부정사건 수사를 맡은 김창룡 특무대장은 2군 사령부를 수사했다. 2군 사령부가 군수지원 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군 사령관은 강문봉 중장이었다. 그는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의 직계였다. 

특무대 수사관들은 2군 사령부에서 인도산 원면 수입면장을 복사해 갔다. 그들은 한국은행에서 고급 미국산 고 급원면이 저급 인도산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5억 환 상당의 수표가 발행된 사실을 확인했다.  특무대는 이 자금이 정치권에 들어갔음을 알게 되었다. 김창룡은 궁지에 몰린 군 고위층과 정치인들이 고령의 이승만에게 반기를 드는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었다. 


군 고위층은 김창룡의 비리를 캐려고 했으나 큰 부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자금의 대부분을 받은 이기붕 또한 불안했다. 특무대 국회 연락장교가 국회의장 이기붕의 집에 드나들었다. 어느 날 이기붕이 “김창룡장군이 월남하기 전에 북한정보기관에서 근무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냐?”라고 물었다. 연락장교가 그런 일 없다고 대답했더니, 이기붕은  “대통령께서 정일권 총장에게 김창룡을 조사하라고 하명했다” “김창룡에게 몸조심하라고 전해라”라고 했다. 


코너에 몰린 강문봉 2군 사령관을 비롯한 군 고위층은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하고 허태영을 사주했다. 

허태영에게는 항상 그를 따라다니는 사병들이 있었다. 이들은 허태영이 특무대에 근무할 때 그의 부하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병적에 없는 허태영 개인의 사병들이었다. 


1955년 9월 어느 날, 허태영은 부하들에게 김창룡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밝히면서 “이번 일은 높은 분들과 합의가 있었다. 김창룡을 없애도 절대 체포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에 체포되어도 일주일 안에 석방될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1955년 12월 3일 김창룡과 강문봉 2군 사령관 등 군 고위층 장성들이 서울 회현동에 있는 요정에서 회식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가장 계급이 높은 강문봉 중장이 가운데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그 자리를 김창룡 특무대장에게 양보했다. 다른 장성들은 그 옆자리를 슬슬 피했다. 

이날 허태영의 사병 신초식이 회식 자리를 습격하여 김창룡을 암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창룡의 부관이 원래 예약한 방을 바꾸었기 때문에 신초식은 방을 제때 찾지 못해서 암살에 실패했다. 


1956년 1월 28일 오전 7시 30분, 허태영 일당은 원효로 1가 삼거리에서 출근하는 김창룡을 저격하려 했으나 김창룡이 이미 출근해서 또 실패했다.


이틀 후 1월 30일 오전 7시, 이들은 김창룡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날 김창룡은 이승만에게 국방부 원면 부정사건 조사에 관한 보고를 할 예정이었다. 보고서가 들어 있는 노란 봉투를 들고 지프차에 탔다. 

7시 30분 김창룡이 탄 지프가 원효로 삼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허태영의 사병 신초식과 송용고가 탄 지프차가 나타나 가로막았다. 김창룡 부대장의 운전병 박대복 중사가 경적을 울렸다. 육군 소령 계급장을 단 송용고와 중위 계급장을 단 신초식이 지프에서 튀어나왔다. 송용고는 두발, 신초식은 4발을 쏘았다. 김창룡은 총에 맞아 쓰러졌다. 총에 맞은 박중사는 필사적으로 차를 몰아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 도착했다. 김창룡 특무대장은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향년 40세였다.


엄재림 김장룡의 부관이 달려왔다. 그는 김창룡과 같이 경무대로 가서 원면 부정사건에 대한 보고를 하려고 옥인동 특무대장 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연락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시신을 특무대로 이동하도록 조치하고 이기붕 국회의장 집으로 가서 사건을 보고한 다음 경무대로 들어가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승만은 “나라가 망했군! 나라가 망했어”라고 탄식하며 그 애통함을 감출 줄 몰랐다. 잠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외투만 걸치고 특무부대 본부로 향했다. 김창룡 시신 앞에 선 이승만은 “내가 수차 몸조심 하라고 했지만 그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라서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고 하더니만…”라고 하며 애통해했다. 그리고 서울 지구 특무부대장 조서길 중령에게 범인을 빨리 잡으라고 독려하고 경무대로 돌아갔다. 

1956년 2월 3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방장(국군장)으로 치러졌다.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서울지구 특무대에 군, 경, 검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합동수사본부는 김창룡과 경쟁관계에 있던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을 의심했다. 그러나 수사는 오리무중에 빠져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범인의 차가 오리를 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수사본부는 궁여지책으로 원용덕의 부관이 타고 다니는 지프차 바퀴에 오리털을 붙여 증거로 쓰려고 했으나 탄로가 나고 말았다. 수사본부가 원용덕에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동안 엄재림 부관은 김창룡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허태영을 의심했다. 특히 그가 특무대를 떠날 때 부대장실을 향해 권총을 쏜 사실을 기억했다. 2월 10일, 허태영의 심복인 신초식이 1월 29일 허태영의 지프차를 타고 의정부에서 서울로 온 후 행방이 묘연하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2월 23일 특무대는 허태영과 그의 운전사 이유회 중사를 검거했다.  이어 범인 신초식, 송영 고를 체포하고 이진용 대령(전 특무대 처장), 도진희 국회의원, 김기상동대문 경찰서장 등을 방조혐의로 구속했다. 도진희 국회의원은 범인이 사용한 지프차를 숨겨주었다. 

허태영이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인 1956년 11월 12일, 그의 아내 황운하 씨가 육군 당국에 남편의 배후에 2군 사령관 강문봉이 있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강 중장이 남편 허태영에게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는 등 암살을 교사했다고 주장했다. 허태영도 강 중장의 간여를 재판정에서 시인했다. 

허태영, 이유회, 신초식, 송용고 등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주한 강문봉 중장에게는 사형, 공모한 공국진 준장에게는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강문봉은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4.19 후에 석방되었다. 


강문봉 중장의 윗선이 정일권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엄재림 김창룡 부관에 의하면,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이승만이 수사본부장인 조서길 서울지구특무대장을 경무대로 불렀다. 이승만이 말했다. 

“조 수사본부장, 내가 다 알고 있어. 바른대로 이야기해. 정총장이 맞지?”

조서길 중령이 머뭇거리다가 “예, 그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승만은 “국제적으로 나라꼴이 창피스럽다. 죽은 사람이 살아오는 것도 아닌데, 현명하게 처리하라”라고 하여 정일권으로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 1957년 5월 정일권 대장은 예편되었다. 그리고 주 터키대사로 떠났다. 


이승만은 김창룡과 정일권을 서로 경쟁하게 하여 권력을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차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 다 이승만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재규를 홀대하고 차지철을 선호했다. 그래서 이승만의 충복들은 주인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지만 박정희의 경우는 달랐다. 


참고

1.      유튜브: KBS 인물현대사-누가 권력의 심장을 쏘았나, 특무대장 김창룡 2004.12.03 방영

2.      유튜브: KBS 다큐멘터리극장-대통령에 도전하다, 최능진 수사국장/1994.01                                                                    

3.       인터넷: 디지털 거창문화대전, 거창토문화백화; 진실과 화해의 이름으로 기억될 거창사건

4.      인터넷: 민족문화연구소: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의 진실. 조한성 선임 연구원, 2017.04.20

5.      인터넷: 경남도민일보: 임종금 기자: 6화. 빨갱이는 만들어지는 것, 용공조작의 달인 김창룡

6.      인터넷: 월간조선 2016.06; 배진영의 기무사 비록 <2>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사건

7.      유튜브: KBS 다큐멘터리극장-부산정치파동과 이승만 제거계획/1993.07.04

8.      유튜브: KBS 역사저널 그날, 친일파 청산하려다 이승만 정권에게 총살당하다. 2003.11.21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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