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의 각본대로 연극이 진행되지 않았던가?
1974년 10월 9일, 문세광이 한국청년동맹회(한청) 의장 김군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통일일보에 공개되었다. 편지를 보낸 시기는 김대중이 한국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 중이었다. “김대중 선생을 구출하기 위해서 오사카 주일 한국 영사를 인질로 잡고 영사관을 점거하자. 영사관을 폭파하기 위한 다이나 마이트를 준비하자.”는 내용이었다.
한국청년동맹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산하 기관이었으나 1972년 7월 민단은 한국청년동맹 산하단체 인정을 취소하였다. 민단이 친 박정희 정권의 노선을 견지했지만 한국청년동맹은 반 박정희 독재가 목적이었다. 문세광 편지의 수신자인 김군부는 김대중이 일본에서 반 박정희 독재 운동을 할 때 그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편지는 문세광이 원하는 김군부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수신자인 김군부의 주소가 한국청년동맹으로 되어있었는데 민단과 한국청년동맹의 주소가 같은 건물에 있었다. 이 편지가 민단으로 잘못 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편지를 열어 본 민단은 영사관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즉각 영사관에 이 편지를 보냈다. 물론 이 편지는 영사관에 근무하고 있는 중정 요원들에게 넘겨졌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이 장충동 국립극장 8.15 기념 행사장에서 박정희 암살을 기도하기 일 년 전이었다. 한국 중정은 문세광을 위험인물로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1973년 9월 7일경이었다.
문세광은 1951년 12월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면 제조업자였다. 그는 세이키 상업고등학교를 2학년 때 중퇴했다. 재학 중 그는 학급위원을 하는 등 과외활동, 정치활동, 학교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학교보다는 정치활동에 더 큰 관심을 가졌든 것으로 보인다.
그는 17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1968년 반 박정희 독재 단체인 민단 산하의 한국청년동맹(한청) 이쿠노구 지부에 가입했다. 그는 말 수가 적었고 착실하게 보였지만 흥분을 잘하고 감정이 격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는 1970년대에 일본 학생들 간에 유행했던 학생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폭력 혁명 고교생전선”이라는 극좌 단체에 가입하거나 “전국재수생공투회의”의 멤버이기도 했다. 대체로 좌익 사상이 강한 단체들이었지만 그가 공산주의 사상이 심취되었거나 북한하고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일본 수사 당국은 문세광의 자필 수첩을 압수하였었는데 수사 후에 문세광의 큰형이 보관하고 있었다. 이것을 MBC 취재진이 입수했다. 여기에는 통일혁명당 선언과 강령 등 공산주의 구호가 여기저기 적혀 있었다. 그의 수첩에서 북한과 김일성 사상을 찬양하는 내용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세광의 동료들은 문세광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떠들어 대는 데에 휩쓸렸을 뿐이라고 했다. 문세광의 집에는 공산주의, 마오쩌둥, 김일성 사상에 관한 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책을 읽은 흔적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는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장식용이었지 그가 골수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의 박정희 독재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었다.
그는 오사카 이쿠노구에 살았다. 제일 한국 교포들이 많이 사는 빈민촌이었다. 멧돼지 사육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가난했다. 5명 중 한 명이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민단과 총련으로 갈라져 있었다. 민단은 남한을 고국으로 인정하는 단체로 박정희 정권을 지지했다. 반면에 총련은 북한을 고국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총련과 한청은 박정희 정권 타도에 적극적이었다.
문세광은 민단 산하의 한국청년동맹(한청)에 가입하여 반 박정희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세광이 김군부에게 보낸 편지가 중정에 넘어간 직 후 한청에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동경에서 왔는데 무엇인가 한청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했다. 자기는 부모님이 물려준 아파트도 있고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월급은 받지 않아도 되고 활동비도 자신이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한국말을 가르쳤는데 한국말을 무척 잘 헤서 재일교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세광과 가까워졌다. 그러더니 문세광의 씀씀이가 점점 커졌다. 그는 오사카 항 부두에서 노동일을 하는 등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24만 엔이라는 큰돈을 현금으로 주고 자동차를 샀다. 1973년 11월 19일부터 22일까지 학창 시절 여자 친구 요시이 미키코와 함께 홍콩을 다녀왔다. 아내 강영숙은 집에 저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데 갑자기 돈을 물 쓰듯 하는 남편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강영숙이 돈이 어디서 낫느냐고 물으면 총련 정치부장 마에다가 주었다고 했다. 이 마에다가 갑자기 이쿠노구에 나타난 남자로 추정된다. 동경에서 왔다는 괴한은 금융업을 차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김군부는 총련 사람이 일본이름을 쓸 리가 없다고 했다.
1974년 8월 15일 사건이 벌어진 직 후에 그 사람은 종적을 감추었다. 1975년 8월 13일 자 아사이 신문은 ‘사건직후 사라진 금융업자’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작년 1974년 8월 16일 부인과 아이, 사무실을 팽개친 채 사라졌다. 1973년 도쿄에서 오사카로 와서 금융업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1973년 10월 중순경에 한청에 나타나서 약 10개월 정도 문세광과 가까이 지내다가 사라졌다.
1974년 2월 문세광은 도쿄에 있는 아카 후도 병원에 위궤양(장염?) 환자로 위장 입원하고는 한청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수첩에는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는 기록과 병원 입원 당시에 사용했던 도쿄의 주소가 적혀 있다. 이 병원을 알선해 준 인물은 조총련 의장 한덕수의 주치의였던 이해철이었다. 병원의 이사장은 조총련 상공회 이사장 강철이었다. 같이 입원했던 사람들은 그가 자주 외출했다고 증언했다. 문세광은 이 병원 옥상에서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고 진술했다. 병원이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고 옥상은 사방이 다 터져 있어서 사격연습을 했을 리는 없다. 그는 이 병원에 1974년 2월 12일부터 3원 11일까지 2달간 입원했다.
북한은 조총련을 통한 공작을 위해서 북한과 일본을 왕래하는 선박 만경봉 호를 운용했다. 1971년 8월 18일에 취항했다. 당시의 선적지는 청진 시였고 기항지는 일본 서쪽 해안(한국 동해)의 니가타 시였다.
문세광은 만경봉호에 승선하여 북한의 공작 지도원과 40분 동안 면담했다 고한다. 만경봉호가 어디에 정박했는지 언제 이 면담이 이루어졌는지 기록이 없다. 그는 문세광의 활동에 대해서 극구 칭찬한 다음, “남조선 민주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 남조선의 사회혼란을 조성해야 하는데, 박정희를 암살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사업은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시한 혁명 과업이니 생명을 걸고 성공시켜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문세광은 그에게 “김일성 주석을 위해 생명을 바쳐 박정희를 기필코 암살하겠노라”라고 답했다.
일본 측 수사 당국은 그가 1974년 6월경 폭력단에게 총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가 사건 발생 이후에 이들에게 더 이상 총이 필요 없다고 통보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문세광은 암살을 위한 권총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를 고심하다가 일본경찰의 권총을 훔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면 일본 경찰을 곤경에 빠트릴 수 있고 일본이 개입한 것처럼 보여 한일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세광은 1974년 7월 초순부터 오사카, 고베, 나라, 교토 등지에서 권총을 훔칠 파출소를 물색했다. 대부분의 파출소가 이층 구조로 되어 있어서 접근하기가 어려운데 오사카에 있는 다카쓰 파출소는 단층 구조였다. 타깃을 다카쓰 파출소로 정한 후 고베의 한 다방에서 성냥갑 2개를 준비했다.
1974년 8월 18일 새벽 4시경, 파출소 뒷문으로 접근하여 자물쇠를 파이프렌취로 자르고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면서 준비한 성냥갑 2개를 그 근처에 버렸다. 경찰들은 깊이 잠이 들어있었다. 권총은 가죽 벨트에 매달려 벽에 걸려 있었다. 케이스에 넣은 권총 2 정, 실탄 10발, 수갑 2개, 경찰봉 1개를 가지고 파출소를 빠져나왔다.
문세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뒤 뚜껑을 열어 속을 비우고 그 공간에 권총과 총알을 넣고 다시 뒷면을 감쪽같이 봉했다. 검색 엑스레이 시설이 없던 시대에 검색을 피하기에 족한 속임수였다.
문세광은 1974년 7월 여자친구 요시이 미기코의 남편 요시이 유키오의 이름으로 허위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리고 오사카 한국영사관은 그에게 한국입국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8월 6일 김포공항을 무사히 통과하여 조선호텔에 투숙했다. 문세광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여행사에 전화하여 서울 야간관광을 알아보았다. 여행사 직원이 야간관광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서 문세광 방에 전화했더니 한국 남자가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았다.
1974년 8월 14일, 국립극장에서 시경과 청와대 경호 팀의 합동회의가 있었다. 여기서 청와대 측은 경비완화를 지시했다.
그는 8월 15일 오전 7시, 호텔 프런트 데스크로 전화를 걸어 “8.15 광복을 기념하는 국립극장에 가야 하는데 오전 8시까지 승용차를 대기시켜 주세요. 출발은 오전 9시입니다.”라고 일본말로 주문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권총을 꺼내 5발의 총알을 장전한 다음 허리에 찔러 넣고 승용차를 기다렸다. 오전 8시 40분 포드 20M 호텔 택시가 문세광을 태우기 위해서 호텔 정문에 도착했다. 뒤 좌석에 탄 그는 운전사에게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문을 열어 주세요. 이거 팁입니다.”하며 1만 원을 주었다. 운전사는 “네, 알겠습니다.”하고 일본말로 대답했다. 자신을 높은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가는 도중에 왼쪽 허리춤에 있는 권총의 공이치기를 올려놓았다. 권총을 뽑자마자 발사하기 위한 준비였다. 9시 정각에 국립극장 정문을 검문 없이 통과하여 국립극장 건물 계단 앞에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차에서 내려 뒷문을 정중하게 열었다. 차에서 내린 문세광은 계단을 올라가 왼쪽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에는 대통령 경호원이 3명 경찰관 8명이 근무 중이었다. 그들은 문세광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175cm의 키에 통통한 몸집,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안경, 중절모를 쓴 그의 모습은 상당히 높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들은 문세광을 검문 없이 그냥 장내로 들어가게 했다. 지난 3.1절 행사에서 경호원들이 외국인들에 대한 검색을 너무 심하게 했다는 지적을 받고 이번 행사에는 외국인에 대해서 검색을 느슨하게 했다. 문세광의 여권이 일본 이름으로 돼있고 그가 일본말을 쓰기 때문에 경호원과 경찰은 그가 일본 고위층 인사라고 믿었다.
여기서 문세광이 타고 왔다는 포드 20M을 좀 알아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영화 ‘택시 운전사’의 주인공 김사복 선생의 아들 김승필은 그 차의 주인이 부친이라고 증언했다. 1980년 5.18 광주 항쟁 당시 독일기자 한츠 페터와 함께 광주에 있었던 택시 운전사 김사복이 이 포드 20M의 주인이었다. 호텔고객 전용 고급 택시였다. 외국인 관광 전용으로 차량 등록이 안돼 있었다고 한다. 그날 이차를 김사복이 운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통로에 카펫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 박정희가 지나갈 때 저격하려고 카펫 옆 의자에 앉아 있다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되면 경호원이 의심하여 검문을 받을 까봐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경호원 10여 명이 모여서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일본말로 “우시로쿠 도라오 일본대사를 기다리는데 혹시 오지 않았습니까?”하고 물었다. 경호원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극장 로비는 여기뿐 인 가요?”라고 묻자 경호원이 “이층에도 있습니다.”말하며 친절하게 그를 이층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층에서 문세광은 머뭇거리더니 “아,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지”하며 1층으로 다시 내려갔다. 이층으로 문세광을 안내했던 경호원은 다른 경호원에게 “이분이 일본대사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며 문세광을 인계했다. 인계받은 경호원은 문세광에게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문세광이 앉아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들어왔다. 경호원은 문세광의 팔을 잡고 기둥 뒤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 서 있으라고 했다. 문세광은 그들이 입장하는 것을 로비에서 10분 정도 보고 있었다. 문세광은 경호원에게 박정희 대통령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은데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일본말로 물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경호원은 문세광의 요청에 부정도 긍정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문세광은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제스처로 인식하고 들어가려 하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근무자가 비표를 달지 않은 문세광을 제지했다. 문세광은 로비 근무자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고 둘러댔다. 출입구 근무자도 문세광의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로비 근무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로비 근무자는 멀거니 문세광을 바라보고만 있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출입문 근무자는 그도 문세광의 입장을 개의치 않고 있다고 판단하여 문을 열고 문세광을 극장 안으로 안내하여 1층 C석 맨 뒤 열의 재일 교포 석 오른쪽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혔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 중이었다. 이 행사는 대한민국 모든 TV와 라디오 채널을 통해 생 중계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오전 10시 6분에 시작되었다. 경축사의 내용은 “평화통일 3단계 기본원칙”이었다. 문세광은 약 10분간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다가 저격을 결심하고 허리춤의 권총을 배 밑으로 옮기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은 계속되었다.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때 탕 하는 소리가 났다. 총소리라고 하기에는 좀 둔탁한 소리였다. 10시 23 경이었다. 공이치기를 눌러 놓았던 권총이 배 밑으로 옮기는 동안 격발 된 것이었다. 총알이 왼쪽 허벅지에 경상을 입혔다. 수사 보고서에는 ‘대퇴부 관통상’을 입었다고 되어있는데 이런 중상을 입고 통로로 뛰어나가서 권총을 발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출혈도 대단했을 것인데 핏자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건우에 의하면 문세광은 오발로 오른쪽발 오른쪽에 경상을 입었다고 증언했다.
당황한 문세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B석과 C석 사이 통로로 나와 연단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 하는 순간 탕.. 탕 하고 총소리가 연달아 났다. 총알 하나가 연설대를 맞추었고 박대통령은 연설대 밑으로 숨었다. 그제야 관중들은 문세광이 단상을 행해 달려오면서 총을 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내는 웅성거렸고 여기저기서 저놈 잡아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세광은 단상 시립교향악단 앞 2 미터까지 접근했다. 연단의 박정희 대통령 까지는 불과 10 미터였다. 여기서 사격자세를 취하고 3발을 발사했다. 오른쪽 18.2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서대문 세무서 재산세 계장 이대산이 문세광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연단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있는 연설대를 둘러쌌고 그 아래에서는 경호원들과 독립유공자들이 문세광을 덮쳤다. 그가 넘어지면서 권총이 튀어 서울시교향악단 바이올리니스트 김영목의 왼쪽 뺨에 맞아 찰과상을 입혔다.
장내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고함소리, 흐느끼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머리에 총을 맞은 육영수 여사는 의자에 앉은 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중계 카메라는 연단으로 뛰어오다가 넘어져 청중에 둘러싸여 있는 문세광의 모습을 2초간 클로즈업했다. 연단 마이크는 꺼지지 않고 몸을 연설 대 밑으로 숨긴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원의 대화를 송출하고 있었다. 이때 또 총성이 울렸다. 단상에서 경호원이 문세광을 겨냥하고 쏜 총알에 합창단원이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 양이 맞아 사망했다. 쓸어져 있는 육영수 여사를 독립운동가 박혜근의 아내 탁금선이 단상에 올라가서 부축하자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이 거들어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라디오 방송은 중계를 멈추고 음악을 틀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대통령은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연설을 계속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원하는 평화 통일의 기본 원칙을 명백히 천명하고자 합니다. 통일의 기쁨으로 승화되는 진정한 광복 조국 통일의 그날을 자랑스럽게 맞이합시다. 감사합니다.”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된 육영수 여사는 신경외과 과장 심보성 교수의 집도로 5시간이 넘는 수술을 했으나, 1974년 8월 15일 오후 7시 수술 후 3시간 만에 사망했다.
수사본부는 발사된 총알이 모두 6 발이라고 발표했다. 문세광은 5발을 장전하고 현장에 왔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이나 소리 분석 결과를 참고하면 6, 7발의 총성이 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세광이 쏜 총알 중 한 발은 불발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발사된 총알은 4 발이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발사한 총알이 2,3발 존재한다. 첫 번째 탄흔은 문세광이 앉아 있던 좌석에 있었다. 허리에 찬 권총을 아래 배 쪽으로 옮기면서 오발한 탄환이 문세광의 허벅지에 상처를 입히고 박힌 탄흔이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어나가면서 탕 탕 탕 3 발을 쏘았다. 한 발은 대통령 연설대의 좌측, 3번째가 벽에 걸려있는 태극기, 마지막 4번째 탄흔이 천장에 있었다. 불발한 한 개의 총알을 합해서 모두 5 발이니까 육영수 여사가 맞은 총알은 분명히 문세광이 쏜 총알이 아니다.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건우는 8월 16일 날 현장검증을 나갔다. 4발의 탄흔은 찾았으나 총알은 한 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극장 내 구석구석을 뒤지며 찾고 있는데 국립극장 소도구 주임이 다가오더니 “헛수고예요. 그거 어젯밤에 청와대에서 다 쓸어 갔어요”라고 알려주었다. 이 계장이 “청와대라니?”하고 반문하자 주임은 “경호실이지 어디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경호실은 수거한 총알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넘겼다. 그러나 경호실이 국과수에 감정 의뢰한 총알은 모두 4개였다. 나머지 2,3개의 총알의 종적이 묘연했다. 그런데 사건 나흘째 되던 8월 18일 무대 동북쪽 장막 밑에서 총알 하나를 발견하여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다. 감정서에는 이 총알이 문세광의 권총에서 발사되지 않았다고 되어있다. 이 탄환은 탄신 부분이 없고 바깥 구리 자투리만 있었다고 한다. 30년 후에 극장 안에서 찾은 총알이 하나가 더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건 당일 모 과장이 국립극장에서 청와대 경호원 몇 명과 같이 총알을 찾다가 무대 뒤 벽에서 총알 한 개를 습득하여 동 경호관들에게 주었다고 하나 이 총알을 인수한 경호관의 성명은 알 수가 없어서 회수를 못했다.”는 기록이었다. 수사 보고서에는 경호실장 박종규가 육영수 여사 머리를 관통한 총알을 습득해서 이틀 후에 중정에 넘겼다고 되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정은 이 총알의 감정을 국과수에 의뢰하지 않았다. 아무튼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에 맞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2005년 1월 8일, 숭실대 소리공학 연구소 배명진 교수(정보통신전자공학) 팀이 당시 녹화된 비디오와 총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사용하여 총소리의 타임을 분석했다. 그 결과는 “육영수 여사는 문세광의 왼쪽 뒤편에 있던 경호원이 문세광을 저지하기 위해서 쏜 총알에 피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교수는 1974년 8월 15일 경축식장에서 들린 총소리는 도합 7 발이었고 그 증 4발은 문세광이 3발은 경호원이 쏜 총소리였다고 밝혔다. 경호원들이 발사한 총소리는 네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였는데 네 번째로 쏜 총소리 직후 육영수 여사가 쓸어졌다고 주장했다. 네 번째 총소리는 “뛰어나오면서 박정희를 겨냥하고 총을 쏘고 있는 문세광을 향해 문세광의 후방 죄 측 5-10 미터 거리에 배치된 경호원의 총에 의해 발사된 총소리”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 번째 총소리를 0초로 가정하면 네 번째 총소리가 6.91초경에 들렸는데, 문세광이 처음 3발을 발사할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자리를 지키던 육영수 여사가 네 번째 총성 후 약 0.17초 이후인 7.08초부터 총격으로 인한 미동이 시작돼 *오른쪽으로 넘어지는 것을 볼 때 이 탄환에 맞은 것이 틀림없다”(*관중석에서 볼 때 오른쪽이다). 육영수 여사는 네 번째 총탄을 우측 머리에 맞고 절명했다.
국립극장이 아수라장이 되고 있던 10시 30분에서 11시 사이, 중정 요원들이 조선호텔 문세광이 투숙하고 있던 방을 급습하여 총을 넣어 왔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약 일주일 분량의 수첩 등 방안에 있던 증거물들을 수거해 갔다.
한편 일본 오사카, 8월 15일 밤에 문세광의 한청 동료였던 김우식이 동경에서 오사카 집으로 돌아오니 일본경찰 여러 명이 자기 집에 모여 있었다. 경찰이 그에게 문세광이 너의 집에 며칠 날 왔지 하고 물어서 그는 깜짝 놀랐다. 사고 당일인데 일본경찰은 문세광이 한국으로 가기 5,6일 전에 자기 집을 방문했던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일본경찰은 문세광이 무엇을 가져왔느냐고 캐 물었다. 멜론을 가져왔다고 하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지 하고 되물어서 생각해 보니 자동차 키를 맡기고 간 것이 생각났다. 다 알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가기 전에 문세광은 이들에게 자신이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맡겨 놓았다. 이 차의 트렁크 안에서 고쯔 파출소 뒷문을 따고 들어갈 때 썼던 공구들이 나왔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1974년 8월 15일 저격사건 당일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무렵에 문세광이 김군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적혀 있었으며 김군부가 이 편지를 받지 못한 사실도 명기하고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 법률 보좌관이었고 문세광을 심문했던 김기춘 검사는 문세광이 남조선 혁명을 하려면 박대통령을 제거해야 된다고 일본 조총련 간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문세광이 소영웅 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조총련 간부들은 이와 같은 그의 약점을 이용하여 문세광을 포섭했다고 부연했다.
사건 후에 문세광은 “혁명가는 스스로가 무기를 조달하여 혁명을 성공시켜야 된다”는 김호룡의 지시에 따라 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쳤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호룡은 이를 전적으로 부인했다. 일본경찰이 파출소 현장에서 발견한 발자국은 문세광의 것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채취한 지문들 중에 문세광의 것과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본경찰은 문세광이 파출소에 남겨놓은 물건들에 대해서 한국 수사당국에 물었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1974년 8월 15일 사건당일 문세광이 사용한 권총을 일본 파출소에서 훔쳤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중정이 7월 18일 문세광의 총기 절도사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조총련의 영향을 받은 재일교포가 한국 대통령의 부인을 사살했다는 사실은 한국 국민의 반일 감정을 자극했다. 사람들은 민비 시해를 연상하며 거리에 나와 시위에 나섰다. 급기야는 시위군중이 일본대사관에 난입했다. 남녀노소 모두가 시위에 참여했다. 심지어 손가락을 잘라 일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으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하며 궁지에 몰렸던 박정희 정권은 문세광 사건으로 인해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974년 8월 30일 오후 2시 박정희 대통령은 우시로쿠 일본대사에게 이번 사태가 한일 간의 단교까지 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시이나 자민당 부총재가 다나카의 친서를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하여 사죄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조총련이 관여했다는 말은 친서에 담지 않았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문세광을 세뇌하여 박정희를 암살할 결심을 하게 했다는 조총련 정치부장 김호룡에 대한 수사당국의 발표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문세광과 김호룡이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9월 3일 오사카 페스티벌 홀에서 열린 민단과 조총련의 단합 대회였다. 문세광은 한청 대표, 김호룡은 조총련 대표로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틀 후에 김호룡이 문세광을 찾아와서 자신이 조총련 이쿠노구 정치부장이라고 소개하며 단합대회에서 문세광이 보여준 활약상을 극구 칭찬하며 자주 만나자고 했다. 이후 김호룡은 문세광의 집을 한 달에 두 번 정도 드나들었다. 조총련 대표 한덕수가 주었다며 과실주와 인삼주 등을 전달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남한과 일본을 비난하고 북한을 칭송하는 세뇌를 해왔다. 1973년 9월부터 남한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박정희를 암살해 이를 민중봉기의 기폭재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문세광이 이런 영웅적 과업을 수행해야 된다고 선동했다. 문세광은 이에 동조하여 박정희 저격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문세광이 진술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중정이나 한국의 수사당국은 김호룡을 소환 조사하지도 않았다. 김호룡은 문세광과의 관계를 ‘그저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이지 이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일본 수사당국은 아무런 증거가 없기 때문에 김호룡을 조사하지 않았다고 했다.
1973년 11월 2일 김종필 국무총리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사과를 하기 위해서 일본을 방문했다. 시이나 자민당 부총리가 한국을 방문하기 불과 10개월 전이었다. 일본 측은 한국이 일본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항의했다. 그리고 일본국민들의 반 박정희 반독재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다. 박정희 정권을 지지했던 민단 내에서도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그룹들이 생겼다. 일본 언론은 김대중 납치가 한국 중앙정보부의 공작이라는 기사를 연일 보도했다. 이 사건은 미국이 깊숙이 개입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미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박정희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이 사건으로 인한 많은 압력을 받고 있었다. 한국의 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은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이 탄생한 이후 대내외적인 위기에 봉착했다고 볼 수 있다.
1974년 8월 14일, 문세광 사건 하루 전에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게 김대중 체포 감금 사건의 수사 중지를 통보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박정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졌다. 8월 15일 자 일본 신문은 한국 정부의 김대중 납치사건 수사 중지 발표를 일제히 비난했다. 그러나 하루 후 8월 16일 자 신문은 8월 15일 사건의 범인이 재일교포였고 8월 17일에 일본 수상이 한국을 방문하여 조의를 표한다고 대서 특필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완전한 반전이었다. 그동안 일본의 공세에 몰렸던 박정희 정권은 일본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육영수 여사가 응급차에 실려 서울대학 병원으로 후송된 후 박정희 대통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경축사를 계속했다. 연설을 마친 다음 손을 흔들며 식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문세광은 수사 도중 “바깥은 아무 일 없느냐?”며 민중봉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말을 했다. 그는 옥중에서 교도관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재판 중에도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아내에게 “모범수로 살면 7,8년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박정희는 저격사건을 통해 국민총화가 굳건히 이루어졌다며 1974년 8월 23일 오전 10시 *긴급조치 1,4호를 해제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저격사건의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12월 17일 문세광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 선고를 듣고 문세광은 환하게 웃었다. 마치 사형이 되리라고 믿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 53조에 규정되어 있던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를 말한다. 이로서 대통령이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긴급조치 제1호는 1974년 1월 8일에 선포되었고 주로 유신헌법반대 금지에 관한 것이고 제4호는 1974년 4월 3일에 선포되었고 민청학련에 관한 것들이었다.
문세광은 옥중에서 ‘나는 살고 싶다’ 암살목적으로 조국의 땅을 밟았을 때 조국의 하늘이 이처럼 푸른 것을 처음 알았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수기를 썼다. 어렸을 때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았던 괴로운 경험에서 오는 소외감을 없애기 위해서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고 김대중 구제와 반 박정희 활동을 했다고 적었다. 범죄에 대해서 깊이 후회한다고 했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살아서 또 다른 인생을 개척하고 싶다’라고 말하여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표현했다.
1974년 12월 20일 문세광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구치소장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문세광은 “지금부터 사형을 집행하는 겁니까? 하고 되물었다. 구치소장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문세광이 입을 열었다. “나는 바보였습니다… 참으로 박대통령과 육 여사에 대해서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재일 동포로서 무엇 하나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대통령에게 깊이 사과드립니다. 대통령에게 총을 겨냥해서 잘못했습니다. 나는 일본에서 그들에게 속았습니다. 내가 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 됐습니다. 참으로 대통령에게 미안합니다. 육 여사와 죽은 사람 곁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는 보리차를 청해 마신 다음 말을 계속했다. “나의 처에 말씀 전해주십시오. 아직까지 젊은 나이이므로 재혼하여 제2의 인생을 걸어가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장남은 2살이므로 형님 부부가 맡도록 해 주십시오. 어머니께는 자식의 불효와 기대에 어긋난 점에 대해 죄송하다고 전해주십시오. 형제에게는 참으로 미안하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사실 바보였습니다. 처에게는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리고 박대통령과 국민에게 미안합니다. 나는 속았습니다. 미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만약 한국에서 커왔다면 그들에게 속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바보였습니다. 사형을 당하여도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과 처 사진을 보여주십시오. 처에게는 될 수 있으면 육여사 묘소를 참배하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김치연 목사가 성경 낭독을 하고 오전 7시 30시경 문세광의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고, 7시 56분 의무관이 문세광의 사망을 확인했다. 이후 가족이 시인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문세광은 누군가에게 속았다. 소영웅적 성격을 가진 그가 반 박정희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이용하여 누군가가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한 것이다. 1973년 10월에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에 나타난 동경에서 왔다는 괴한의 정체가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단서가 없으니 그가 조총련을 가장한 한국 중앙정보부가 보낸 첩자라고 가정해 보자. "이 괴한의 목적은 문세광을 꼬드겨 ‘박정희 암살 연극’을 연출하게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박정희를 죽이지 않고 헛발을 쏘아 암살을 시도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연극의 시나리오에는 문세광의 사형은 없었다."는 가설을 설정하고 사건을 복기해 보면 그럴듯하다.
오사카 주재 한국 영사관은 가짜 여권을 가진 문세광에게 한국 입국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그는 가짜 여권을 가지고 김포 공항을 무사히 통과하여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권총을 소지하고 식장에 검문 없이 들어갔다. 경호관과 경찰이 행사 관중 5명 당 1명이 장내를 감시하고 있는데 권총을 가진 문세광은 들키지 않고 관중석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대통령의 경호관들은 아주 미숙하게 저격범에 대항했다. 그 결과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와 장경화 양이 경호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사건 후 수사 당국은 사건 전부터 문세광을 추적하며 가지고 있던 중앙정보부의 정보와 문세광의 진술에 맞추어 수사결과를 발표했고 문세광의 재판도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문세광을 처형했다. 문세광은 자신이 사형당할 것을 예측하지 않았던 것 같은 태도를 재판정과 옥중에서 보였다. 그리고 사형 직전에도 자신이 처형당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문세광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속았다는 말과 자신이 바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일본과 미국의 압력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박정희 정부는 문세광 사건으로 일시적이나마 반전할 수 있었다. 특히 인권문제에 대한 미국의 압력이 대단했을 것이다. 사건 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하는 여유를 보였다. 미국 언론은 박정희 정권이 인권문제를 완화했다고 대서 특필했다. 만약 그날 장내에서 문세광이 박정희를 향해 헛발을 쏘고 육영수 여사가 무사했다면 문세광이 처형되었을 까? 동경에서 왔다는 오사카 이쿠노구에 나타난 괴한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다.
참고:
1.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87회 육영수와 문세광 1부 중앙정보부는 문세광을 알았다.
2.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88회 육영수와 문세광 2부 문세광을 이용하라
3. SBS: [꼬꼬무 2] 요약’ 누가 육영수 여사를 저격했나?’ 8.15 저격사건의 진실
4. 유튜브 야담야담: [고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의 전말] 완벽정리
5. 이 사람 블로그 한완상;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 5대 미스터리(프레시안 2005.02.14)
6. 나무위키: 문세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