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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Sep 17. 2024

박정희암살사건과 전두환의 집권(II)

 독재자의 사활은 미국에 달려있었다. 

3. 월남 파병과 존슨 미국 대통령, 김신조 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존슨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존슨의 힘에 의한 월남전 승리 정책은 박정희 정권에게 기회였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가 텍사스 댈러스에서 암살되고 부통령 린든 B. 존슨이 승계했다. 케네디는 월남 자체를 강하게 만들어서 월남군으로 하여금 베트콩을 제압하는 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존슨은 단시간 내에 아시아의 후진국을 강하게 만들어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전쟁을 하면서 경제 발전을 시키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박정희는 우리나라는 국방을 튼튼히 하면서 경제 발전을 시켜야 하는데 국방에 돈을 많이 쓰면 경제 발전이 어렵고 경제 발전에 투자하면 국방에 쓸 돈이 없게 되니 국민이 더욱 노력을 많이 해서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존슨은 대규모의 미군을 파병하여 전쟁에서 이겨 적을 물리친 다음에 민주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를 만났을 때, 최소 3개 사단을 월남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케네디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존슨은 미군의 파병을 점점 늘여 갔다. 월맹에 대한 폭격도 강화했다. 1965년 10 월에는 무려 200,000 이 넘는 미군이 월남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월맹과 베트콩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많은 미국 젊은이들의 희생은 물론, 한없이 들어가는 전쟁 비용도 문제였다. 


존슨 행정부의 극동 담당 차관보 번디(William Bundy)가 한국정부에 비전투부대 월남 파병을 요청함에 따라 1964년 9월 11일 박정희 정부는 130명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파병했다. 1964년 12월 19일 존슨 대통령은 주한 미 대사 브라운을 통해 비 전투 병력을 월남에 파병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1965년 3월 약 2,000명 규모의 공병대 등 비전투병력을 비둘기 부대라 하여 파병했다. 존슨 행정부는 1964년 말까지 월남에 대규모 미군 파병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체로 케네디 행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1964년 4 월 더 많은 깃발 운동을 벌여 제3 국의 월남전 참여를 독려했다. 존슨 대통령은 25개국에 서한을 보내 파병을 요청했으나 한국, 대만, 필리핀,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제외하고는 호응하는 나라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제3국의 지원도 비 전투 병력을 원했다. 


존슨 정부는 월남전에서 늘어나고 있는 국방비를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를 줄이고 주한미군을 감축하여 일부 충당하려 했다. 존슨 대통령은 1963년 12월 국무부와 국방부에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와 한국군 감축을 동시에 주진하기 위한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또한 존슨은 1964년 5월, 국가안보 비망록 298호를 하달하여 주한미군 1개 사단 재배치와 대한군사원조 감축에 대한 세부계획 마련을 위해 관련부처 간 합동연구를 지시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존슨 정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1964년 초부터 월남 파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1964년 1월 6일에 작성된 “월남파병 문제에서 고려되어야 할 문제점”이라는 제목의 대통령 비서실 문서는 파병의 이점과 단점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만약 한국이 미국이 요청하는 월남파병을 거절할 경우에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 경제원조 감축과 주한미군의 일부가 월남으로 이동할 것이 거의 확실했다. 박정희는 이문서의 마지막에 “파병은 불가피하나 의용군을 보낼 것, 충분한 대가를 받도록 할 것”이라고 쓰고 사인했다. 

한국은 월남 파병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기는 해야 하는데 대외적으로 설명할 명분이 필요했고 전쟁 당사국인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한국 정부의 목표였다. 


당시에 미국의 월남전 개입은 국제적으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이 미국과 같이 월남전에 뛰어들면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중립국가들이 한국을 지지하지 않을 위험부담이 있었다. 월남파병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의용군 파견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용군 파견은 군인 파병 보다 법적으로 훨씬 복잡했다. 군사 훈련, 처우, 보상 문제등이 군인의 경우에는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의용군에게는 전혀 이 법을 적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정부는 비둘기 부대 파병 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1965년 1월 28일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해 1965년 2월 14일 비둘기 부대가 월남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월남의 전세는 미군과 월남군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고 1965년 2월 27일 월남의 주요 미군기지가 베트콩에게 공격을 받자 대규모의 미군이 파병되었고 한국에도 전투부대 파견을 요청해 왔다. 

이후 한국과 미국은 전투부대 파병 협상을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월남파병을 통해서 가능한 한 많은 군사 및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고 했다.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서 태평양 전쟁 동안에 피폐한 일본을 부흥시킨 것처럼 ‘전장의 시장화’라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존슨 정부는 한일협정이 채결된 후에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하려고 했다. 1965년 2월에 한일협정이 가 조인됐고 5월경에 정식으로 조인될 예정이었다. 한국군 전투병 파병이 시급한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5.16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존슨은 미국 대통령 전용기 보잉 707을 박정희 대통령이 타고 오라고 서울에 보냈다. 워싱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를 환영하는 퍼레이드가 열렸다. 존슨 대통령은 5월 17일을 박정희 대통령 부부의 날로 선포했다. 1차 회담은 비교적 간단히 끝났다. 

백악관으로 들어간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례없이 자세한 곳까지 보여주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에 앞서 존슨 대통령은 정부기관에 박 대통령 환영 절차를 빈틈없이 거창하게 할 것과 언론이 박정희에 대한 기사를 크게 취급하도록 지시하고, 박대통령 일행이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성명발표는 보류해 달라고 당부했다. 백악관과 박대통령이 머무는 블레어 하우스에는 쌀밥과 김치를 준비하고, 박대통령에게 순금 대통령 문장, 은제 탁자 세트, 백악관 유화, 존슨의 저서, 자녀들에게 줄 휴대용 하이파이 전축 등의 선물을 주었다. 환영 만찬 후 무도회에서는 아리랑을 연주해 주었다. 전례 없는 환대였다. 

존슨 대통령은 한국이 1사단 규모의 전투병력을 월남에 파병할 것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개인적으로는 전투병력 파병을 하고 싶으나 국내 관계 인사들의 의견을 수렴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며 확답을 피했다. 그리고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가고 2차 5개년 계획에 많은 예산이 필요한데 미국의 원조와 차관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전투병력 파병과 미국의 경제원조의 본격적인 흥정이 시작되었다. 


귀국한 박정희는 이동원 외무장관에게 월남파병 조건에 대한 대미 협상을 일임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월남 전쟁의 시장화를 주장해운 장본인이었다. 그와 브라운 주한 미 대사의 협상은 미국의 월남 파병에 대한 절실함 때문에 한국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965년 말 미국은 184,000명의 미군을 월남에 파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월남과 미국에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국내 반전여론이 거세게 일어나 추가 파병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한국 전투병 파병이 절실했다. 

미국은 이동원 장관이 요구하는 조건을 거의 대부분 수용하고 1966년 3월 7일 그 약속을 정리한 <브라운 각서>를 한국정부에 제출했다.  한국군 근대화가 핵심인 군사문제에 관한 협조 10개 항과 경제문제에 관한 6개 항이 담겨 있었다. 여기에는 ‘북한이 한국을 침공하면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하고, 베트남에서 사용할 한국군의 군수품을 한국이 공급하고 미국의 한국의 월남 시장 진출을 지원한다는 약속도 포함되었다. 

1965년 8월 13일 월남 파병 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그다음 날 한일협정이 비준되었다. 이렇게 해서 한강 기적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1965년 10월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등 전투부대가 파병되었다. 


1966년 10월 존슨 대통령은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7개국 방문길에 올랐다. 존슨은 가는 나라마다 반전 시위대의 ‘어제는 죄 없는 아이를 몇 명이나 죽였냐?’, ‘존슨 고 호음’이라는 구호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마지막 방문지였던 한국은 완전히 달랐다. 

1966년 10월 31일 자 동아일보는 “존슨 대통령은 곧 박대통령과 리무진에 동승, 연도를 뒤덮은 180먄을 훨씬 넘는 환영 인파와 태극기 및 성조기 물결을 헤치며 서울로 들어왔다. 오후 4시 50분,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이른 존슨 대통령은 그곳에서 열린 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하고 박대통령과 무개차를 타고 중앙청까지 퍼레이드를 했다.”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2017.10.30. 존슨대총령 방한, 최고 예우 대접… 왜)

빌 모어스 백악관 대변인은 ‘가장 크고 가장 성대하며 가장 열렬한 환영이었다’고 평했다. 홍종철 공보부 장관이 개최한 리셉션에서 미국 기자들이 “다른 나라처럼 데모도 없고 존슨 고 홈의 아우성이 없어서 이상하다.’라고 노석찬 공보부 차관에게 물었다. 노 차관은 ‘한국에는 반미주의자가 단 한 사람도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존슨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서 275만 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당시의 서울 인구가 350만 명이었음을 상기하면 어마어마한 환영 인파 동원이었다. 존슨이 박정희를 워싱턴에서 환영했던 것처럼 서울에서의 존슨의 환영 또한 성대했다. 양국이 서로 얻고자 하는 것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65년 미국의 주선으로 한일협정이 맺어져서 한미일이 가까워졌다. 인공(북한)은 중공(중국), 소련과 한 축이었는데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서방과의 평화공존론을 주장하자 중공과 인공은 소련을 비판했다. 1962년 중공과 소련의 사이가 나빠지고 1966년 중공이 문화혁명 당시에 북한을 비판했다. 이래서 인공은 외톨이가 되었다. 


월맹(북 베트남)의 호지민은 월남에 한국군이 파견되어 베트콩과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인공에게 북 베트남 파병을 요청했다. 김일성은 중공과 소련이 인공을 남한의 북침과 같은 유사시에 도울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선뜻 파병에 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이 월남에 5만 병력을 파병하고 있는데 인공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김일성은 전투부대 같은 대량의 병력을 파견할 수는 없지만 한국군 병력을 월남에 파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규모의 공군 조종사들을 월맹에 보냈다. 


베트남 파병 이후 김일성은 대남 도발을 대폭 늘였다. 비무장지대 도발, 어선 납치 등이 자주 일어났다. 1967년 1월에는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650톤급 해군함정이 북한 해안 포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침투한 사건이 벌어졌다. 


1967년 4월 김일성은 특별한 대남공작을 위해서 인공 민족보위성 정찰 국 소속 124 부대를 창설했다. 일반 군부대에서 선발된 척후병, 통신병, 운전병 등과 제283군부대 및 집단군 도보 경찰서에서 엄선된 정예 병 2,400명으로 구성되었다. 1968년 1월 2일 민족보위성으로부터 124부대에게 청와대, 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을 일제히 습격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25명의 유격대원을 선정하여 황해도 사리원에서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동안, 1월 13일에 청와대 습격으로 작전이 축소되었다. 남파 특공대 규모는 31명이었고 전원 함경도 출신 장교였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1967년 10월부터 북한의 침투 계획을 어느 정도 알고 청와대에 여러 번 보고했다. 이 정보에 따라 1968년 1월 6일, 공비 침투 2주 전, 강원도 원주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의 경찰과 군인 200여 명이 참여하는 비상치안회의를 주제 했다. 그리고 1월 13일 한국 정부는 대한뉴스 방송을 통해 대규모 남파간첩 침투의 징후가 있으며 정부는 이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고 전 국민에게 알렸다. 바로 그날 북에서는 무장공비 침투 명령이 내려졌다.


한국군 군복을 입은 124부 대원 31명은 1월 16일 밤 10시 황해도 연산 제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 개성을 경유하여 임진강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1월 18일 꽁꽁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보로 건넜다. 19일 오후 2시쯤 그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나무꾼 우 씨 4형제와 마주쳤다.  공비 31명은 이들을 사살할 것인가 아니면 살려줄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통일하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평민 편이라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나무꾼을 사살하는 것은 사상에 맞지 않는 행위였다. 그러나 작전상 자기들의 침투를 알리지 않으려면 무조건 사살이 옳은 처신이었다. 자기들끼리 의견이 분분 하자 북에 무전을 쳐서 나무꾼 사살여부를 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부대 본부에서 암호를 해득하지 못하여 답이 오지 않았다. 결국 표결에 부친 결과 다수가 살려 주자로 나와 나무꾼 4형제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공비들은 4형제에게 자기들이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선봉대라고 자기들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신고하면 가족을 몰살시키겠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북에서 큰 포상을 해주겠다”라고 하며 우 씨 형제들을 풀어주었다. 

집에 돌아온 우 씨 형제들은 좀 망설이다가 파출소에 출두하여 공비 출현을 신고하였다. 경찰은 군에 이 사실을 알리고 군경은 즉각 수색에 나섰다.  무거운 완전 무장을 하고 산길을 시간당 10킬로라는 초인적인 속도로 움직였다. 군경이 포위망을 쳐 놓으면 공비들은 그 지역을 이미 통과한 후였다. 1월 21일 오후 7시경 서울 시내에 들어왔다. 그들은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9시 50분, 공비들은 청와대에서 불과 300 미터 떨어진 지하문 초소에 도달했다. 초소를 지키던 정종수 순경과 박태안 순경이 이들을 검문했다. 공비들은 “우리는 CIC(육군 방첩대) 소속 대원이다.”라고 협박하며 서로 옥신각신 하며 시간을 끄는 동안 종로경찰서장 최규식과 무전연락이 되어 경찰 병력이 출동했다. 이때 시내버스 2대가 초소를 향해 달려오자 공비들은 군 병력이 출동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버스를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공비 조장 김종용이 최규식 총경에게 총을 난사하여 현장에서 즉사했다. 검문을 하던 정종수 순경도 총상을 입고 치료 중 사망했다. 경찰의 공격을 받은 공비들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민간인 5명도 사망했다. 인왕산, 비봉산, 의정부시로 도주한 공비들은 대부분 사살되었다. 29명이 사살되었고, 1명은 미상이며 김신조가 투항했다.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1968년 1월 23일, 김신조 사건이 일어 난지 겨우 이틀 만에 원산 앞바다에 있던 미 함정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에 의해 납치되었다. 푸에블로호는 북한 영해를 넘나들며 정보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푸에블로호 사건 일주일 후인 1968년 1월 30일 구정 새벽 베트남 인민군(베트콩)이 월남 전역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를 대 구정공세라고 한다. 결국 미군과 월남군은 베트콩의 공세를 막을 수 있었다. 전투에는 승리했지만 구정대공세는 미국 내의 반전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더욱이 미국 정보당국이 베트콩과 월맹의 전력을 그동안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미국은 전쟁을 회담으로 끝내고 철군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이 김신조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을 구정공세 전에 일으킨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까지 확실한 동기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월남에서 베트콩의 구정 대공세로 미군과 한국군이 전투에 몰두하는 동안, 한국에서의 북한의 도발에 대한 미군과 한국군의 보복이 평소보다 미약할 것을 기대했거나 아니면 한국이 국내 안보를 우려하여 월남파병을 꺼려하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과 한국의 국익이 서로 어긋나게 했다. 박정희는 김일성의 사과와 1.21 사태에 대한 보복을 원했다. 엄청난 도발을 겪고 나니 집안 단속이 중요했다. 월남파병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반면에 미국은 구정공세로 월남전에 대한 국내여론이 나빠져 추가 파병이 어려웠다. 존슨 정부는 한국에 전투부대 추가 파병을 요청했으나 박정희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푸에블로호에는 승조원 83명이 타고 있었고 나포 도중 1명이 사살되어 82명이 북한에 억류되었다. 존슨 정부는 이들을 무사히 귀국시켜야 했다. 북한과 미국은 한국을 제쳐놓고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1.21 사태 보복을 위해서 북한 침투 특수 부대인 선갑도 부대, 장봉도 부대, 실미도 부대, 마니산 까치부대를 창설했다. 밀월 관계에 있던 박정희 정부와 미국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21 사태를 빌미로 반공주의를 강화하여 독재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 주민등록 번호를 가지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병사 복무기간을 연장했다. 향토 예비군이 창설되었다. 


1968년 초에 남한에서는 김신조 사건이, 북한에서는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졌고 월남에서는 구정공세가 있었다. 남 베트남(월남)에는 베트콩이 있었다. 한국의 빨치산에 해당한다. 베트콩은 북 베트남(월맹)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북 베트남과 월남에 침투해 있는 베트콩은 구정을 기하여 월남 내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도시를 동시에 공격하여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68년 1월 30일과 31일에 베트콩은 총공격을 계시했다. 전투 상황이 적 나나 하게 미국 TV 뉴스에 보도되었다. 특히 CBS 뉴스 월터 크랑카이트(Walter Cronkite)의 보도는 월남전의 실상을 미국 국민에게 알려주었다. 미국 미디어는 1968년 2월, “미국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로 선정되었다. “이길 수 없는 전쟁, 비인간적인 전쟁”이라는 여론이 퍼지면서 반전운동이 확산되었다. 전투에서는 미군이 승리하여 베트콩을 섬멸시킬 수 있었으나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당장 전쟁을 그만두고 철군해야 한다는 믿음을 주게 했다. 월맹의 관점에서는 미국 국민이 전의를 상실한 것이었다. 


존슨 대통령의 월남전 수행에 찬성하는 국민이 겨우 26%이고 지지하지 않는 국민이 63%나 되었다. 1968년 존슨이 동의한 월남전 파병 규모는 겨우 22,000명이었다. 합참의장은 이 인원의 10배를 요구했다. 1968년 3월, 존슨은 비밀리에 명예롭게 월남에서 철수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국방장관 킅라크 크리포드(Clark Clifford)는 “지는 전쟁이다” “사상자를 줄이고 철군하자”고했다. 1968년 3월 31일, 존슨은 “베트남 전을 끝내는 수순”이라는 제목으로 전 국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북 베트남 폭격을 중단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평화 회담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재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2월 5일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북한에게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을 일으켰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또다시 이러한 사건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이에 불응하면 한미 양국이 상호 방위조약에 따라 즉각 보복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했다. 1968년 2월 9일 존슨은 군사적 보복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사이러스 벤스 국방차관을 개인특사로 서울에 보냈다. 그는 "그와 상의해 보라"는 내용의 서한을 박정희에게 전달했다. 2월 28일 자 편지에서도 “본인 역시 이 사태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으나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라고 하며 대북 군사 공격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조선일보 동북아 연구소: 청와대 공개사료, 박정희 대북 응징 요구; 입력 2002.01.09; 조희천 기자)

 

1.21 사태와 푸에블로 호 납치 사건에 대한 대책마련을 위해서 한미 정상 회담이 1968년 4월 17 일 호놀룰루에서 열렸다. 두 정상은 ‘한미 연례 국방 각료 회의(Annual ROK-U.S. Defense Official Meeting)를 양국 간 교대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1968년 5월 워싱턴에서 제1차 회의가 열렸다. 1971년 제4차 회의에서 그 명칭이 한미 안보협의회의(ROK-US Security Consultative Meeting)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열리고 있다. 

그렇게 좋던 존슨과 박정희의 관계도 미국 내의 반전운동으로 존슨이 재선을 포기한 후 서로 서먹 서먹해졌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존슨은 전쟁 판을 더 이상 크게 벌릴 수가 없었다. 월남도 버거운데 한반도에서 무력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전쟁이 지속되기를 원했고 자신의 목을 따러 온 특공대를 보낸 김일성에 대한 보복도 해야 했다. 그러나 존슨은 이 두 가지에 더 이상 크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참고

1.      중앙일보, 2015.04.08: 이길주; 역사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 8. 박정희와 존슨의 전략적 눈 맞춤- 존슨 “전쟁 승패는 전장에서”-미군 월남 파병

2.      한국 현대 사료 DB: 박정희-존슨 회담; 1965년 5월 17일, 48. 대담비망록

3.      마상윤; 한국군 베트남 파병결정과 국회의 역할; 2010년 한국연구재단 지원 연구 논문

4.      World Korean: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18] 베트남 파병

5.      행정안전부 대통령 기록관: 한국에 미 대통령 전용기 보낸 린든 B 존슨 대통령

6.      University of Hawaii System: Center for Korean Studies: 태평양 주보; 1968.04.19; 아로하! 존슨 대통령 환영!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16일에 내항 존슨 대통령과 17일 회담  

7. 위키피디아: 1.21 사태, 푸에블로호 사건

8. 나무위키: 1.21 사태, 푸에블로호 사건



4. 닉슨의 월남전 종식과 주한미군 감축에 고전하는 박정희


박정희 닉슨 샌프란시스코 회담(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1968년 11월에 실시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당선되었다. 존슨의 재 출마 포기 선언으로 고 존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유력한 민주당 주자로 등장했으나 캘리포니아 경선에서 승리한 직 후 로스 안젤레스에서 암살되어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선거 초반에는 분명하지 못한 존슨 행정부의 월남전 종식에 관한 태도로 고전했으나, 9월 30일,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즉각 북 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닉슨은 ‘아시아에서의 명예로운 평화’라는 두리뭉실한 공약만 하고 자세한 내용은 대통령에 단선되면 발표하겠다고 했다. 험프리의 지지도는 급격히 상승했다. 누가 이길지 모르는 박빙의 선거였다. 표 차이는 겨우 500,000이었다. 전체 유권자 수의 1%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거인단 수는 닉슨 301, 험프리 191, 조지 월리스 46이었다. 


닉슨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1년 전에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라는 잡지에 ‘ 잠재적으로 가장 능력 있는 일천만 명의 인구가 분노에 차서 고립되어 살고 있는 지역은 이 작은 지구상에 (중국외에는) 아무 데도 없을 것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은 중공에게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닉슨은  중공의 북 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줄여 월남전을 미국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중공을 소련으로부터 분리시켜 소련을 약화시키는 두 가지 효과를 노렸다. 


1966년 9월 닉슨이 한국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부통령이었던 그는 1960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에게 패했다. 그 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패하여 닉슨의 정치생명이 다 했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는 이동원 외무장관에게 닉슨이 박정희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이동원 장관의 말을 들은 박정희는 닉슨과의 만남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그저 커피 한잔 하는 정도의 만남을 가졌다. 오찬이나 만찬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뉴시안: [우연히 바꾼 한국 정치사]16 박정희 운명 바꾼 ‘닉슨의 1박 2일, 소종섭 편집위원, 2018.05.30)


박정희가 푸대접했던 닉슨이 의외로 1968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37대 미국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동원 외무장관은 1969년 초부터 박정희-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명예로운 평화’라는 공약을 내세운 닉슨이 한반도 평화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정상회담을 요청한 지 6개월 후에 답이 왔다. 닉슨이 여름휴가 중인 1969년 8월 21일에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만나자고 했다. 

닉슨은 1969년 7월 25일 아시아 순방길에 괌의 앤더슨 공군 기지에 도착하여 기자회견을 갖고 닉슨 행정부의 아시아 전략의 기본정책을 발표한 바 있었다.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잠재우고 전비의 과다 지출로 인한 국가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동안의 미국의 국제적 역할을 줄이고 당사국의 부담을 늘린다는 내용이었다. 

닉슨은 다음 4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1.      미국은 우방 및 동맹국들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는 지킨다,

2.      … 핵보유국의 위협에 대해서는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한다. 

3.      핵 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하고 미국은 군사 및 경제원조만 제공한다.

4.      군사적 개입도를 줄인다. 


이를 괌 독트린 또는 닉슨 독트린이라고 한다. 1970년 2월 국회에 보낸 외교 백서를 통해 닉슨 독트린을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확대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미군을 점차적으로 철군시키면서 월남군의 전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 안보의 한국화’라는 논리를 앞세워 미군 7사단 병력 2만 명을 1971년 3월 철수시켰다. 


닉슨 독트린 발표 후 박정희는 불안했다. 주한 미군 감축이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1969년 8월 21일, 불안한 마음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박정희는 닉슨의 푸대접에 놀랐다. 닉슨이 휴가 중에 만나준 것도 불쾌한데 호텔 밖으로 마중 나오기는커녕 방안 책상 앞에 앉아서 박정희를 맞이했다. 그러나 회담 내용은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닉슨은 한국은 닉슨 독트린의 예외 지역이라고 했다. 주한미군의 감축 또는 철수 계획이 있으면 미리 한국 정부에 그 일정을 알려주고 베트남 전쟁 평화협상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는 존슨 행정부와의 약속이 닉슨 행정부에서도 계속 이행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미국 정부나 베트남 정부가 철수를 요구할 때까지는 한국군을 베트남에 주둔시키겠다고 닉슨에게 말했다. 존슨이 중지한 북 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재개할 계획이라는 닉슨의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한국군을 베트남에 계속해서 주둔시키겠다고 닉슨에게 말한 것은 닉슨에게 큰 수확이었다. 한국군 5만 명이 베트남 주요 작전지역에 지속적으로 주둔하고 있으면 미군이 적과의 힘의 균형을 유지한 상태에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다는 구상을 닉슨으로 하여금 할 수 있게 했다. 


닉슨은 박정희를 만나서 한국은 예외지역이라고 말한 지 3개월이 조금 지난 1969년 11월 24일, 주한 미군 감축 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닉슨의 관료들은 주한 미군 7사단의 철수를 결정했다. 1970년 3월 20일 키신저는 주한미군 2만 명(7사단)을 1971년 말까지 철수시킨다고 국무부를 통해서 박정희에게 통고했다. 당황한 박정희는 1970년 4월 20일 직접 친필로 쓴 편지를 주미한국 대사를 통해 키신저에게 보냈다. 한국군 월남파병의 명분이 없어진 것이었다. 주한 미군을 월남에 보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국군이 대신 월남에 가서 싸우고 있다고 박정희 정부는 주장해 왔었다. 

박정희의 친필 편지를 받은 닉슨은 사흘 만에 답장을 보냈다. “주한 미군 총 병력중 겨우 1/3만 감축하는 것이니 안심하라. 박정희 정부가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북한을 능가하게 되었고 베트남 파병을 통해 한국군의 규모가 지난 10년 동안 큰 규모로 성장했다. 자신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은 당신 나라와 전 세계에 한국이 이룩한 뛰어난 진전의 당연하고 자랑스러운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주한미군의 감축은 박정희정부가 한국을 발전시킨 결과물이니 자랑스럽게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주장해 왔던 월남파병의 대의명분을 따르자면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답은 월남에서 한국군을 철수시켜 한국 안보를 튼튼히 해야 했다. 그러나 월남 파병의 진정한 의미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있었다.


미국에서 닉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1969년에 한국에서는 3선 개헌이 이루어졌다. 1967년 5월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가 두 번째 출마하는 선거여서 1971년 선거에는 세 번째가 되어 중임만 허락하는 당시의 헌법에 의하면 출마할 수 없었다. 삼선개헌 작업은 공화당 내의 반대 세력이었던 김종필 계를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제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김종필은 1968년 6월 2일 부로 공화당 탈당계가 수리되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1969년 9월 14일 3선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개헌 찬성 77.1%로 확정되었다. 


1969년 6월 티에우 월남 대통령이 한국을 거쳐 미드웨이 제도에서 닉슨을 만났는데 여기서 미군의 월남 철수가 논의되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베트남 정부가 철수를 요구할 때까지 월남을 떠나지 않고 전후 복구 사업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미군이 철수한다는 정보를 알게 된 필리핀 정부는 1969년 12월 31일까지 공병단 1500명을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미군 지원 없이 기술 지원 부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타이 정부도 1970년 8월 28일까지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1970년 한국정부는 2만 5000명 추가 파병을 미국에 제시했다. 미국정부는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하는 동안 한국군이 남아서 월남정부를 보호해 주기를 바랐다. 


1970년 4월 주한미군 1개 사단 감축을 한국 정부에 통보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언론에 이 사실을 부인했다. 1970년 7월 9일 미 국무부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열고 ‘… 포터 주한 미국대사가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주한미군 감축계획을 공식적으로 통고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주월한국군의 철수를 미적거리고 있는 동안 미군은 빠른 속도로 철수하고 있었다. 1969년에 미군 약 50만, 한국군 약 5만 명이 있었다. 그런데 1971년에는 미군 약 16만, 한국군 약 5만이 월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1972년이 되면 한국군 약 4만에 미군 약 2만 5천 명으로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많았다. 

미군 지원이 미약한 상황에서 한국군의 전투력은 점점 약화되었고 피해만 늘어났다. 한국군은 열심히 싸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철군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이러는 가운데 1971년 4월 27일 7대 대통령선거가 이루어졌다. 3선 개헌으로 박정희가 합법적인 공화당 후보가 되었다. 상대는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였다. 정부와 여당은 막대한 선거 자금을 살포했다. 당시 국가 예산의 1/8에 해당하는 700억 원을 썼다고 한다. 미 하원 소위 보고서에는 미국계 정유사 걸프, 칼 텍스, 유니언 오일이 한국 정부로부터 향후 막대한 특혜를 약속받고 한국 공화당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강남 30평 아파트 값이 400만 원이었다. 부재자 투표가 박정희 몰표로 나왔다. 공무원과 군인은 대부분이 박정희 표였다. 설명하기 어려운 무효 표 처리가 많았다. 1977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부정선거가 아니었으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을 것이며 그 엄청난 부정선거 공작에도 큰 표 차가 없는 결과를 낸 김대중 후보를 상당히 두려워하고 경계했다는 증언을 했다. 


선거 다음날 박정희는 유신을 작심한 듯한 발언을 했다고 김종필은 증언했다. 

“이것 봐. 내가 그래도 그동안 잠자고 있던 국민이 일어서서 일하는 세상을 만들고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여했다고 생각하는데, 김대중 씨가 뭐를 했다고 95만 표차이 밖에 안나? 내가 이름이 나도 김대중보다 낫고, 선거비용을 써도 김대중보다 훨씬 더 많이 썼는데 말이야. 행정력은 또 얼마나 사용했나? 선거라는 게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긴 하지만 이게 큰일 날 수도 있어.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선거를 하자 보면 앞날을 제대로 내다보고 건전하게 나라를 열어 갈 위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뽑힐 수 있어. 그럴 땜 조국 근대회라는 혁명과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어. 그러니 내 좀 특수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위키피디아: 제7대 대통령 선거. 2024.07.27)


1969년 3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닉슨은 헨리 키신저를 국가 안보 담당 보좌관에 임명했다. 1969년 2월 1일 닉슨은 키신저에게 중국과의 화해 가능성을 탐색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 적대 관계였다. 더구나 유엔은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는 물론 요즈음 경제 제재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 있었다. 물론 유엔 상임 이사국은 중공이 아닌 중화민국 즉 타이완이 차지하고 있었다.  


키신저는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 니 콜라애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대통령, 모하메드 야한 칸 파키스탄 대통령 등을 중간에 넣어 중국에게 미국과의 화해 의사를 타진했다. 

마침 중국은 중-소 국경분쟁으로 소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미국의 화해의사는 중국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1970년 1월 20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중국 대사관에서 중국과 미국의 외교관들이 만나서 언론인, 학생, 과학자들을 교환하자고 합의했다. 


이후 파키스탄의 야히아 칸 대통령의 주선으로 키신저와 저우 앤 라이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키신저는 1971년 7월 1일 대통령 전용 제트기를 타고 앤드류 공군기지를 출발하여 7월 3일 사이공에 도착, 7월 4일 방콕, 7월 6일 뉴델리를 경유, 7월 8일에 파키스탄에 도착했다.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다. 7월 9일 새벽 3시 키신저는 파키스탄 국제항공 소속 보잉 707을 타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7월 9일 오후 4시 30분 역사적인 저우언라이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둘은 1972년 5월 이전에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다는데 합의했다. 키신저의 중국 방분은 대 성공이었다. 1971년 11월 30일 닉슨 대통령의 공식 방중 일정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1972년 2월 21일부터 28일까지 닉슨과 마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1970년 8월 27일 자 뉴욕 타임스는 한국군 현대화가 완료되는 5년 후에는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게 될 것이라는 스피로 애그뉴(Spiro Agnew) 미국 부통령의 발언을 보도했다. 이에 당황한 한국정부는 1970년 9월 25일 자 워싱턴 타임스에 미군 철수 번복을 요구하는 광고를 냈다. 사건의 중대성에 비해서 너무나 미미한 대책이었다. 


1971년 7월 12, 13일 양일간 제4차 한미연례안보회의가 열렸다. 키신저가 저우엔 라이와 만나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 지 이틀 후였다. 그런데 키신저와 저우엔 라이 사이에 한반도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이 회의에서 전혀 언급이 없었다. 중국과 미국은 당사국인 한국을 아예 배재한 체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 

저우엔 라이는 키신저에게 남한에서 미군을 완전히 철수하고 한반도에 두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두 가지 요구 모두 북한이 원하는 바였다. 미국에게는 기왕에 닉슨 독트린으로 주한 미군의 점진적인 감축과 완전 철수를 고려하고 있었고 인공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해 주고 한국과 인공이 평회적으로 공존하는 정책을 선호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평화는 미군 철수의 명분이 될 수 있었고 미국의 한국 방위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럴듯하지 만 미군 철수는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군의 자동 개입을 보장받을 수 없게 하여 김일성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굳게 믿었던 미국의 배신에 가까운 행위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 안보의 중대사를 한국에 알리지도 않고 그것도 적대적인 북한에 유리한 조건으로 중국과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 다니 가공할 노릇이었다. 

김용식 외무장관은 1971년 9월 16일 자로 된 박정희 대통령 친서를 가지고 워싱턴에 가서 양국 정상회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1월 30일 김동조 주미 한국 대사가, 12월 1일 김용식 외무장관이 다시 정상회담을 요구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키신저와 닉슨이 본격적으로 중공과 관계 정상화 노력을 하는 동안 1971년 10월 25일 유엔은 중화민국(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하고 중공을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고 그동안 중화민국이 가지고 있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격을 얻게 되었다. 

1972년 2월 21일 닉슨을 비롯하여 키신저 국무장관 등 일행 14명이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마오, 저우엔 라이 등 중국 관리들과 비밀 회담을 통해 대만 문제등 여러 가지 외교적 사안을 다듬은 다음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영토와 주권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 호혜, 평화공존 등 5원칙에 합의했다. 이중 가장 중요한 사안은 ‘중공이 중국을 대표하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중공의 주장을 미국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대만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점진적으로 철수시킬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미국은 한국에게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존슨 전 대통령과 월남전 파병을 논의하고 혈맹처럼 가까웠던 양국의 관계는 서로 의심하는 관계로 변화하고 있었다. 1972년 2월 28일 상해공동성명이 발표된 후인 3 월 에야 미국무부 동아태차관보 마셜 그린(Marshell Green)이 한국에 와서 회담결과를 한국정부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는 동안 두 나라 사이에 한국에 관한 아무런 비밀 흥정도 없었으며 미국은 한국을 계속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저우 앤 라이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키신저에게 요구했다. 그는 또한 미군이 나간 자리에 일본군을 주둔시키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대접하는 의미에서 북한의 국명 즉 인공(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불러 줄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야 한반도에 동등한 자격의 두나라가 평화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키신저와 닉슨은 이러한 저우엔 라이의 요구에 동의했다. 그런데 미국은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한국 정부에 알리지 않았다. 


미국은 주한 미군 감축을 보상하는 의미에서 한국에 2억 달러 정도의 군사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71년에서 1975년까지 69%만이 이행되었다. 나머지는 1976-1977년으로 이월되었다. 더구나 미국은 한반도 위기 시 미군의 자동개입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극도의 안보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미국의 한국 안보를 등한 시하는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한 월남 군 철수 카드를 쓰려고 했지만 미국은 이미 중국에게 주월 한국군과 미군의 철수를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박정희는 미국을 믿고 한국을 북의 침략으로부터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주국방을 주장하고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구도 및 핵무기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집중 견제했고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닉슨 정부는 중국과의 협상을 하는 동안 한반도 두 개 국가 정책을 추진하였다.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함으로써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공존하게 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자는 정책이었다.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 미국은 북한과 중국의 요구에 따라 유엔한국통일재건위원단의 해체를 용인했다. 1972년 2월 상해공동성명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서가 아니라 남북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되어있기 때문에 유엔한국통일위원단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데 미중양국이 합의한 것이다. 이는 북한이 중국에게 유엔기구에서 남북한을 동등하게 대우하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을 중국이 미국에 제안하여 성사되었음을 의미했다. 유엔한국통일위원단은 1973년 제28차 유엔 총회에서 해체가 결정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은 미국과 협상하는 동안 북한에 진행 상황을 알리고 북한의 의견을 회담에 반영했다. 반면에 미국은 한국을 도외시하고 미국 일방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중국과 상의했다. 


미국이 한국의 안보에 신뢰를 주지 않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화해 무드와 미국의 한반도 두 국가 정책은 남북한이 평화 회담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1972년에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어 한국 국민들이 곧 통일될 것 같은 분위기로 들뜨게 했지만 이것은 결코 자생적인 평화 무드가 아닌 강대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평화 무드 가운데서도 북한의 도발은 지속되었고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남북 관계는 다시 경색되었다. 


장제스(장개석)의 중화민국(대만)을 버리고 중공을 선택하는 미국, 월맹의 침략으로부터 월남을 보호하지 않으려는 미국, 북한이 원하는 주한 미군의 점진적인 감축이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마당에 박정희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안보를 불안하게 하는 국제정세는 박정희로 하여금 안보를 앞세워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키고 현행 헌법을 정지시켰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 유신헌법을 선포했다. 새 헌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        대통령 직선제의 폐지,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

-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

-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의 임기는 3년

-        국회의 연간 개회 수를 150일 이내로 제한하고 국회의 국정감사 권한을 폐지함

-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도 정지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함

-        국회해산권 및 모든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한다.

-        대통령 임기는 6년이고 연임에 제한이 없다. 


유신 헌법은 11월 21일에 국민투표에 부쳐져 투표율 91.9%, 찬성 91.5%로 확정되어 12월 27일에 공고되었다. 11월 28일 대학에 대한 휴교 조치를 철회하고 12월 14일에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다음날인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2,359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12월 23일 박정희가 단독 입후보한 가운데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박정희는 2,357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2표는 무효였다. 박정희는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민 투표에서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관제 선거로 무서워서 찬성표를 던졌을 뿐이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심각했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국민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학생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민청학련)을 조직하여 전국적인 연대 투쟁을 벌였다. 언론인들도 자유언론수호투위를 결성하는 등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74년 11월에는 정치인과 종교인이 중심이 되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에 저항하는 정치인, 언론인들을 탄압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경쟁자였던 김대중을 1973년 8월 일본에서 납치하여 동교동 자택에 연금했다. 1975년 8월 개헌청원운동을 하던 장준하가 등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박정희는 1974년 1월부터 유신헌법에 규정한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여러 차례 발동하여 교수, 학생, 언론인, 종교인, 문인 등을 투옥하거나 해직시켰다. 박정희가 김일성에게 유신체제의 확립을 알리자 평양정권은 1973년 8월 남북대화의 중단을 선언하였다.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는 무사했으나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다. 


1975년 4월에 월남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월맹은 베트남을 통일했다. 사실상 미군은 월맹과의 전쟁에서 패전하고 월남을 떠났다. 박정희는 월남 패전을 계기로 각 대학에 학도 호국단을 조직하고 민방위대를 창설하는 등 군사통치를 강화했다. 


1974년 8월 9일 닉슨 미국 대통령이 하야했다. 닉슨 행정부가 워싱턴 D C의 워터 게이트 호텔에 있는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 본부를 도청하려고 침입한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혐의로 닉슨 대통령이 탄핵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 직전에 자진해서 하야했다.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 Gerald Ford)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9월 8일 포드 대통령은 닉슨의 워터 게이트 관련 혐의를 사면했다. 


1969년부터 미국은 월남에서 지상군을 조금씩 철군하기 시작했다. 월맹의 공세가 있을 때마다 월맹 내에 폭격을 하는 등 간헐 적인 공격을 하면서 파리에서 월맹과의 종전 협상을 계속했다. 1973년 1월 북 베트남(월맹), 남 베트남(월남), 미국이 파리강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은 남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1973년 3월 한국군도 월남을 떠났다.


미군은 남 베트남에 각종 무기를 주어 자체적으로 북 베트남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남 베트남 군은 부패했고 전투 능력이 취약했다. 거기다 미국은 남 베트남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유지할 비용을 주지 않았다. 대포는 있으나 포탄이 부족했고 총은 있으나 탄환이 부족한 형편이 되었다. 포드 정부는 9억 7천2 백만 달러의 남 베트남 지원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통과에 실패했다. 


1975년 3월 북 베트남은 남 베트남을 침공했다. 그리고 5월 3일에 남 베트남 전역이 북 베트남에 함락되었다. 남 베트남 국민 13만 8869명이 베트남을 탈출했다. 1976년 통일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공산화되었다.  


1971년 3월 27일 주한미군 7사단 2만 2천 명이 한국에서 떠났다. 박정희 정부는 1972년 12월 초 국방목표를 자주국방으로 설정하고 국방정책과 군사전략 수립의 방향을 명문화했다.  파리 강화 협정으로 미국과 한국군이 월남에서 철군한 후 월남의 멸망이 거의 확실하게 되자 박정희 정부는 무기의 국산화를 복표로 하는 율곡사업을 추진했다. 임진왜란 때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데서 비롯한 명명이었다. 이 사업은 오늘날 한국이 무기 수출국이 되는 기초 작업이었다. 당시에 미국이나 영국의 군사전문가들은 북한의 군사력이 한국의 군사력 보다 3:1로 우세하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닉슨 독트린, 중공과 미국의 화해무드, 대만의 고립화, 월남의 패망은 박정희 정부를 극히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드디어 미국의 금기 사항인 핵무기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1년 주한미군 7사단 철수 직후 핵무기 개발계획을 생각하고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구입하려 시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말 핵무기를 1977년까지 개발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라고 청와대 재 2 비서실에 지시했다. 1975년 1월, 프랑스의 CERCA사와 핵연료 시설공급계약이, SGN사와는 핵연료 재처리 건설 용역 계약이 맺어졌다. 그런데 이 사실이 미국에 알려졌다. 


1974년 주한 미대사관은 본국에 “한국 국방정책 담당자들은 미국의 한국 방어에 대한 이중적 태도 등에 자극받아 독자적 방어 능력을 키우기 위해 핵무기 개발 능력을 키우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미국무부는 “한국의 핵무장은 동북아 균형을 파괴할 영향력을 지닌 것으로 미국은 한국이 핵 공격력을 갖추지 못하도록 적극 저지해야 한다”라고 답했다. 


포드 행정부의 키신저는 캐나다, 프랑스 정부와 협조하여 박정희의 핵 개발 계획을 중단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1975년 4월 베트남이 함락되자 박정희는 그해 6월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핵 개발의 포부를 밝혔다. 

포드 행정부는 수개월에 걸쳐서 상황을 파악한 후 한국 관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프랑스로부터 핵물질 재처리 시설을 구입하는 것을 미국이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미국은 한국이 핵무장을 할 경우 미국과의 결별, 국제적 제재, 외교와 무역 타격, 일본의 비핵정책파기 위험, 중국과 러시아의 한국 핵 공격 등이 발생할 위험이 크다고 한국을 설득하려 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4년 4월 캐나다에서 원자로를 구입하기 위해서 핵비확산조약에 가입했다. 이 조약에 가입하면 한국은 핵 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한다는 원칙을 따라야 하고 공인된 안전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이는 한국이 핵개발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핵개발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키신저 장관은 박정희 정부의 인권 탄압 문제에 미국이 압력을 가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한국의 핵개발 계획 포기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미국 관리들은 박정희와 핵문제에 대해서 직접 대화하지 않고 핵연료 재 처리 시설 구입에 깊이 관여한 고위 보좌관들과 접촉했다. 결국 한국은 프랑스에서 재처리에 필요한 기계를 구입할 수 없게 되었다. 

키신저는 캐나다 정부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캐나다는 일부러 원자로 판매를 지연시켰다. 협상 과정에서 한국 측은 핵 재처리 계획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캐나다 측에 제공했다. 그러자 캐나다는 한국이 재처리 공장 시설을 건설하면 원자로 판매를 할 수 없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키신저는 캐나다 국무장관으로부터 그 말을 듣고 ‘한국에 결정타가 될 것’이라고 기뻐했다. 

1976년 7월 프랑스 주재 미대사관이 미국무부에 보낸 전문에 의하면 프랑스 정부는 대만 중개상인이 한국에 보낼 재처리 기술을 프랑스로부터 구입하려는 것을 파악하고 거래를 중단시켰다. 1976년 1월 프랑스에서 재처리 시설 도입 계약이 파기되었다. 그 헤 12월에 박정희 정부의 핵 개발 계획은 중단되었다.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는 박동선 미국 국회의원 로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닉슨 행정부의 주한 미군 철수로 인한 안보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박정희 정부는 1970년부터 워싱턴 정가에 로비스트 팀을 조직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주한미군철수 방지, 미국의 대 공산권 접근 억제, 한국 내 인권문제 제기 방해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박동선과 한국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의 지시로 미국 상하원과 공직자들에게 매년 50만 달러에서 백만 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건네는 등 불법 로비를 통해 한국 정부가 원하는 바를 관철하려 했다고 밝혔다. 미국 중앙정보국을 비롯한 미국의 모든 정보기관과 법무부가 총동원되어 수사에 나섰다. 미 하원에서는 프레이저 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문회가 열렸다. 1977년 6월 전 한국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정희 정권에 불리한 비밀을 낫낫이 폭로했다. 1977년 6월 5일 김형욱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도 박정희에게 불리한 비밀을 밝혔다. 


김형욱은 황해도 신천 출신이다. 광복 후 월남하여 육사 8기로 졸업하고 군에 입문하여 육군 중령 시절 1961년 5.16 군사 정변에 참여했다. 1963년 7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여 6년간 박정희의 충복이 되었다. 여러 정치적인 사건에 간여하며 각종 악역을 도 맡아했다. 이후락 비서실장과 함께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부정부패를 일 삼아 이후락, 윤필용과 함께 부정부패 삼인방으로 알려져 국민의 원성을 사고 비난을 받았다. 김형욱은 대통령의 신망을 업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선거철에는 금권과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선거에 앞장섰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을 사찰하여 축첩등 사생활의 비리를 알아내서 필요한 경우에 협박하여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김형욱의 권력남용과 의회활동 간섭이 정도를 넘게 되자 1969년 7월 29일 이만섭의원의 제안으로 공화당이 김형욱과 이후락의 해임을 3선 개헌의 선행조건으로 제시했다. 김형욱은 3선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국민투표로 확정된 지 3일 만인 1969년 10월 20일 해임되었다. 1971년 김형욱은 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72년 유신이 선포된 후 1973년 3월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에서 제외되었다. 총선에서 공화당 공천을 받는데도 실패했다. 이후 그는 박정희에게 원한을 품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참고

1.      위키피디아: 닉슨 독트린

2.      한겨레 2014.10.03: 닉슨, 박정희의 뒤통수를 치다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20) 발 빼는 미국, (21) 외로워진 한국군

3.      서정경;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전임 연구원: 미-중 관계에서의 맥락에서 본 한국 안보, 1970년대 미증 데탕트 시기를 중심으로

4.      고승우 민언련 고문, 언론 사회학 박사; 2023.06.17: 박정희 핵무기 기밀계획 무산시킨 CIA 거물 최근 서울 방문; 한미관계 탐구 28, 한국 핵보유 시 일본 핵무장 우려 한국 측에 경고

5.      한겨레 2023.03.12: 이재봉; 5.18 민주화 운동 전후 한국정치와 미국의 개입 2

6.      유튜브: 황태순 TV; 박정희 암살 

7. 나무위키 2024.07.23: 키신저-저우엔 라이 회담

8. 위키백과: 닉슨 대통령 중국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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