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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Sep 18. 2024

박정희 암살사건과 전두환 집권(III)

독재자의 사활은 미국에 달려 있었다.



5. 인권 대통령 카터와 독재자 박정희; 김형욱 암살 그리고 10.26 사건


박정희 대통령과 카터

1976년 11월 대선에서 조지아 주 주지사 지미 카터가 닉슨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를 이기고 39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닉슨이 워싱턴 정계의 주류였다면 그는 조지아 시골 출신의 워싱턴 정계 밖에 있던 인물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인도주의자였다. 닉슨이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이었던 반면에 카터는 정직이 자산이었다. 부도덕한 닉슨에 정직한 카터의 대비는 카터에게 유리한 국면이었다. 

카터는 1976년 대선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에 배치된 미군의 핵무기 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유권자들에게 베트남 전은 미국이 더 이상 이역만리 아시아 국가의 전쟁에 개입하여 피를 흘리고 국가의 세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당연히 카터의 공약은 그의 당선에 도움이 되었다. 

카터는 타국에게 인권을 강조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되도록 내정간섭을 하지 않으려는 닉슨과는 다른 외교 노선이었다. 이는 선거와 같은 민주주의 제도를 폐기하고 안보를 앞세워 독재를 합리화시키려는 박정희의 정책과 정면 충돌했다. 


1977년 3월 9일, 카터는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점차적으로 철수시킬 것임을 재 확인했다. 그리고 한국이 궁극적으로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자국의 군대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카터의 정책은 미군부의 반발을 샀다. 1977년 5월 19일, 워싱턴 포스트는 주한 미군 참모장 존 K. 싱글라우브(John K. Singlaub)가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비판하는 의견을 인용 보도했다. 그날 카터는 싱글라우브를 백악관으로 호출하여 워싱턴 포스트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5월 21일 카터는 싱글라우브를 파면했다. 


미국의 군사 외교정책은 대체로 펜타곤의 장성들과 국무부 관리들에 의해서 대통령의 의견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카터는 당시의 국민의 여론에 따라서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려고 했으나 펜타곤의 군 장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방위 산업체도 카터와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터도 펜타곤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1977년 5월 26일 카터는 한국이 감축된 미군으로 분쟁이 일어날 경우에 방어할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커터는 1977년 주한미군 1000명을, 1978년에는 500명을 철수시켰다. 1978년 4월 21일 카터는 미군 철수를 보안하기 위한 대 한국 군사원조를 의회가 통과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연말까지 나머지 철군을 완료하고 2/3의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카터는 1979년에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을 중단했다. 이는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계획을 포기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박정희는 1978년 한미연합사가 창설되자 핵무기 개발을 철회했다.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지게 되어있어서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경우 미군은 자동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CIA는 미국이 주한 미군을 일방적으로 철수시키면 한국이 다시 핵무장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통일뉴스: 키신저, 박정희의 핵무기 제도 비밀계획 무산시켜, [연재] 고승우의 “미국의 한반도 개입 151년(33), 2022.0704)


독재를 하면 민중이 자유를 찾기 위해서 봉기한다. 그러면 혼란이 온다. 민중은 민주주의를 원하지만 다음에 오는 것은 더 강력한 독재가 나타난다. 그리고 한동안 질서가 잡힌다. 민중은 또다시 독재에 항거한다. 혼란이 오고, 다시 독재가 오고,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다가 어느 날 민주주의가 찾아온다. 프랑스에서 그랬고, 한국에서도 그랬다. 


1951년 선거에 의해서 모하마드 모사데그가 이란의 총리로 취임했다. 영국과 미국의 석유 회사들이 이권을 가지고 있던 유전을 국유화했다. 그는 이란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1953년 미국 CIA와 영국이 조종한 쿠데타로 이란 최초의 민주 정권은 몰락했다. 그리고 미국은 팔라비 샤를 이란의 왕으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산유국인 이란을 친미 국가로 바꾸었다. 팔라비 샤는 개방정책을 써서 이란 국민에게 서구문화를 만끽하게 했다. 그러나 팔라비는 서구화와 근대화를 내세워 이란에서 이슬람교의 영향을 제거하고 세속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소위 백색혁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사바크(SAVAK)라는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정치적 반대파를 임의체포, 고문 등으로 탄압하는 등 독재정치를 했다. 이런 가운데 율법학자인 루홀라 호메이니가 팔라비 왕의 반대파로 급 부상했다. 1973년에 석유가격이 올라 이란으로 달러가 쏟아져 들어왔다. 1974년에는 이란에 두 자리 수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한편 팔라비 정부는 엄청난 규모의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1975년 1976년의 경기 침체로 청년들의 실업률이 급상승했다. 1970년대 초 건설 붐으로 도시로 이주한 청년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방황했다. 1970년 대 후반에 이르자 이들은 팔라비에게 불만을 품고 시위에 나섰다. 

팔라비 샤에 항거하는 시위는 1977년 10월에 시작되었다.  1978년 1월에 격화되어 1978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파업과 시위로 전국이 마비되었다. 팔라비 샤는 1979년 1월 16일, 이란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권한은 의회와 야당에 기반을 둔 샤푸르 바크티아르에게 맡겼다. 그는 종교 지도자인 루홀라 호메이니를 이란으로 초청했다. 2월 11일 게릴라들과 반란군이 샤에 충성하는 군대를 격퇴하여 호메이니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란은 1979년 4월 1일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여성을 포함한 이란의 젊은이들과 시민들은 팔라비의 독재를 타도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원했다. 그러나 혁명의 결과는 신정 국가의 이슬람 율법에 의한 여권 탄압과 현대문명에 대한 제한적인 접근이었다. 당시에 시위에 나섰던 많은 이란 사람들은 지금 후회하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지 열흘 후 1979년 11월 4일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에 있던 52명의 미국인이 인질로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9년 이란과 1979년 한국은 카터 행정부의 골치 거리였다. 이란 사태는 미국이 12.12 사태와 광주 항쟁을 다루는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박정희는 안보를 내세워 유신독재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권과 도덕을 강조하는 카터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카터의 외교 노선을 도덕외교라고 한다. 


“나는 그 나라 국민이 격렬하게 반대하거나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전적으로 반하는 국가를 공개적, 비공개적 혹은 합법적, 비합법적으로 결코 지원하지 않겠다.” -지미 카터


1979년 한국은 유신독재 반대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카터의 말 대로 하면 미국은 한국을 지원하지 말아야 했다. 


1978년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권의 득표가 여당인 공화당을 압도했다. 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은 민주공화당 68석, 신민당 61석, 무소속 22석, 민주 통일당 3석, 도합 154석이었다. 그러나 유신 헌법은 대통령이 유신정우회 소속 77석을 임명했다. 따라서 여당은 도합 145명으로 야당 86명 보다 많았다.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김영삼이 박정희 정권에 협조적이었던 이철승을 꺾고 당선되었다. 

당선 연설에서 김영삼은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1979년 6월 11일 김영삼은 외신기자 클럽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된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는 “민중의 귀와 눈과 입이 한꺼번에 열릴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이란의 혼란과 보복이 이 땅에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습니다.”라고 박정희 정권의 언론과 인권 탄압, 정보정치를 비난했다. 그는 이어서 “카터 대통령의 방한이 특정 정권을 도와주는 데 그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우리 국민은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카터 대통령이 나와 단독으로 만나 국민이 주장하는 바를 듣는 기회를 갖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끝을 맺었다. 김영삼은 이란의 팔라비 정권의 몰락을 보고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견했을 까? 


박정희는 인권문제를 들먹이며 미군 철수를 고집하는 카터를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1978년 7월 위리엄 글라이스틴이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했다. 1978년 중반 무렵, 한국과의 마찰이 거의 해소되어가고 있었다. 카터가 더 이상의 주한 미군 철수를 포기하고, 한미연합사가 창설되어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군의 자동개입이 확실해지자 박정희는 핵개발 계획을 중단했다. 박동선의 코리아 게이트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어가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은 서울에 부임하기 전 1979년에 한국과 미국이 정상회담을 해서 지금까지 불편했던 관계를 해소하자고 사이러스 벤스 국무장관에게 건의했다. 1978년 10월에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게 1979년에 정상회담을 하자는 의사를 전달했다. 박정희는 1979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카터와의 정상회담을 희망한다고 발표했다.  1979년 4월, 카터 대통령이 6월 말에 일본을 거쳐 한국을 방문하기로 양국이 합의했다. 

정상회담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인권문제를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논의가 진행되었다. 1979년 초에는 미국무부가 정상회담을 인권문제와 연계하려고 했다. 1979년 3월 미 국무부 차관보 홀브룩(Richard Holbrooke)이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에게 인권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할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1979년 3월 말 최종적으로 정상회담 개최 장소와 시간을 결정하기 전에 한국 인권을 향상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보고하라는 훈령을 주한 미대사관에 보냈다.  특히 정상 회담 개최가 박정희 정부에게 현재 한국정부의 정치적 자유 허용 정도에 미국이 만족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한국정부가 주요 정치범의 석방, 긴급 조치 9호의 해체 등 좀 더 가시적인 조치를 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반해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좀 더 실리적인 외교를 주장했다. 인권문제를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삼으면 또 한-미가 서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권위주의적인 박정희 정권이 미국이 제의하는 인권문제 해법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보았다. 

결국 글라이스틴 대사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미 국무부는 정상회담과 인권문제를 연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카터와 그의 참모들은 박정희 정권의 인권문제에 대한 압박을 늦추지 않았다. 다만 인권문제를 거론하여 정상회담을 취소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1979년 5월 중순 박정희 정권은 16명의 긴급조치 위반자를 석방하였다. 뉴욕 타임스는 이를 “카터 행정부에 대한 우호적인 의사표시”라고 보도했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는 카터에게 회담 중 특정 정치인, 정당, 교회 등을 지칭하여 인권문제를 거론하지 말고 미국은 인권을 중시한다, 한국은 정치참여를 확대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등의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카터는 막상 정상 회담이 열리자 철군 정책과 인권 문제를 연계하여 들고 나왔다. 미국이 철군을 중지할 터이니 한국의 국방비를 늘이고 인권조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카터는 한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 오히라 수상에게 한국에 가면 야당인사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박정희에게 압력을 가하겠다는 의미였다. 


1979년 6월 29일, 카터는 도쿄에서 열린 서방 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한국에 왔다. 카터는 굳은 표정으로 비행기 트랩을 내려왔다. 도착 성명도 내지 않았다. 마중 나간 박정희 대통령과도 그저 악수만 하고 말았다. 김포 공항에서 열린 환영회가 끝나자 헬기를 타고 동두천 미군 2사단 켐프 케이시로 가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미군 병사들과 조깅을 했다. 그날 한국군 기지 시찰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날씨가 나쁘다고 취소했다. 


회담이 열렸다. 박정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굳이 가겠다면 (주한미군을) 빼내가라” “그러나 미군의 무기와 장비는 남기고 가면 좋겠다. 그냥 주면 좋지만 돈을 달라고 하면 주겠다” 인권문제에 관해서도 “인권문제는 내가 먹여 살리는 내 국민인데 내가 더 잘 안다. 간섭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이런 식의 말이 3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카터는 단단히 화가 나서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당장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소위 국가의 수반이 화만 내고 회담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카터가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요구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는 것은 어렵지만 지금 한 말씀은 유의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벤스 국무부 장관과 글라이스틴 대사가 박정희와 마주 앉았다. 박정희는 ‘한국 정부의 방위비 지출을 GDP의 6% 이상으로 올리겠다. 그리고 인권에 대한 카터 대통령의 생각을 이해한다. 가능한 한 빨리 민주화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도 만족해했다. 한국 측이 원하는 주한 미군 2사단과 연합사령부 계속 주둔에 관해서는 ‘만족할 만한 결실을 얻을 것’이라고 답했다. 7월 20일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은 주한 미군 전투부대 추가 철수를 1981년까지 연기한다고 한국 정부에 알려왔다. 


혹시나 카터와 접촉하나 해서 박정희 정권은 재야인사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러나 인권문제를 중요시하는 카터는 재야인사들을 만났다. 카터의 압력 때문이었는지 박정희는 카터가 국회를 방문하는 형식으로 김영삼과의 만남을 허락했다. 김영삼은 “귀하가 국회연설에서 ‘인권탄압은 내정간섭이라고 했는데 나도 동감이다,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카터에게 말했다. 그리고 카터는 강원용, 한경직, 김수환 등 종교계 지도자들 12명을 접견하는 형식으로 만났다. 김추기경과는 미 대사관에서 단독으로 만났다. 카터는 김대중과 만나고 싶어 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귀국했다. 


YH 무역은 1970년대 초반에 수출 15위의 가발 수출 업체였다. YH는 사장 김용호의 이름 Yong Ho의 약자이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가발 수출 둔화, 업주의 자금 유용, 무리한 기업 확장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지더니 1979년 3월 폐업을 공고했다. 사장은 회사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노동조합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회사 측과 정부 당국이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 1979년 4월 13일 노동자들은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1979년 8월 9일, YH 무역 노동자 172명는 마포구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도시산업선교회가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신민당 당사를 농성의 장소로 알선해 주었던 것이다. 당 총재 김영삼은 이들을 대 환영했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다고 노동자들에게 약속했다. 김영삼과 신민당 의원들은 당사 주변을 순찰하며 현장에 맴돌던 형사들을 보는 쪽 쪽 멱살을 잡고 따귀를 때리고 발길로 차서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8월 11일 새벽 2시경 1,2천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시위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했다. 옥상으로 올라간 노동자들을 연행하는 과정에게 김경숙이라는 노동자가 경찰의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다. 그런데 경찰은 김경숙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주장했다. 김영삼은 상도동 집으로 끌려갔다. 여성 노동자 10명, 신민당 당원 30명, 취재 기자 12명이 부상을 입었다. 8월 17일 노조간부가 주동자로 구속되고 도시산업선교회 소속 인명진 목사 등 7명이 배후조종자로 구속되었다. 사장 김용호는 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친구였다. YH 무역 노동자들은 일당 220원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에 커피 한잔 값이었다. 그는 미국 뉴욕 한인회장을 지냈다. 


1979년 9월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자택에서 뉴욕타임스 기자 헨리 스콧 스톡스와 인터뷰를 했다. 그 내용이 9월 16일 일요일판 17면 국제면에 실렸다. 김총재는 “이란은 미국의 최대 외교적 재앙이었다. 이란주재 미 대사관이 미국 국무부에 팔레비 정부의 취약함을 경고하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다. 미 대사관이 한국에서 똑같은 전철을 밟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서 “내가 미국 관리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미국은 그를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미국 관리들은 한국 국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고 했다. 그건 위선적인 이론이다. 미국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 미군 3만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게 국내 문제에 대한 개입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미국을 질책했다. 김 총재는 “나는 북한에 대항하는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은 언론 집회의 자유, 우리의 정부를 자유선거를 통해 고를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민주적이고 더 자유스러운 체제가 들어서야만, 한국은 이 지역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는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뉴욕타임스 인터뷰 기사에 대해서 여당은 헌정을 부정하고 사대주의 발언을 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김영삼은 미국이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여 민주화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했다. 9월 22일 공화당과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 160명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징계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9월 29일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은 징계의 종류를 제명으로 하여 정기국회 회기 중에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1979년 10월 4일 공화당과 유정회는 여당 단독으로 야당 의원들의 접근을 사복경찰 300여 명을 동원하여 막고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했다. 삭탈관직당한 김영삼은 자택에 연금되었다.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 통일당 의원 3명이 집단 사퇴했다. 이에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이 사퇴서 선별 수리론을 제기하여 부산과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 민심을 자극했다. 10월 15일 부산광역시 부산대학교 학생들에 의해서 민주선언이 배포되고 10월 16일 다른 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가담하여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10월 18일과 19일에는 마산과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18일 부산시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현지를 방문했다. 학생들의 데모라고 생각했던 그는 경악했다. 160명 연행자 중 16명만 학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반 시민이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데모대를 돕고 있었다. 주민들은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주먹밥, 콜라 등을 가져다주고 경찰에 쫓기는 사람들을 집에 숨겨 주고 있었다. 구호는 완전히 반정부, 반체제, 조세에 대한 불만이었다. 시위대는 경찰서 11개에 방화하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나 파괴했다. 


김재규는 사태의 심각성을 박정희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하려 했다. 김재규가 말하는 도중에 박정희는 격앙된 어조로 김재규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머야? 계엄령이 떨어졌는데도 소요사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경찰들은 그렇다 치고 … 군인들은 뭣하고 있는 게야? 다들 정신들 똑똑히 차리라고, 정신을!”


김재규가 “각하, 그게 아니라…”고 변명을 하려 했지만 박정희는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건 뭐가 아니야. 중정부장이 그렇게 어정쩡하니까 애들이 우습게 알고 덤비는 거지.”


옆에 있던 차지철이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각하.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미쳐 날뛰는 놈들에게 몽둥이가 약입니다. 초기에 강력하게 때려잡아야 합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 죽어도 까닥 없는데, 우리도 데모하는 놈들 100-200만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박정희가 차지철의 말에 동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앞으로 부산사태 같은 게 나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어.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박영주가 내려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내리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어?” 그야말로 박정희는 자신을 아무도 범할 수 없는 절대 권력자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도와 같은 시민들의 저항을 과소 평가하고 있었다.  


1976년 11월 말, 박동선 사건이 터 진지 한 달여 후였다. 주미 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이었던 김상근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한국 중앙정보부 미국 활동 부 책임자였다.  그는 김형욱의 비서였고 그의 망명을 김형욱이 도왔다. 이 사건으로 중앙정부부장 신직수가 사임하고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김재규의 첫 임무는 김형욱을 귀국시키는 일이었다. 1977년 1월 17일 자로 되어 있는 편지로 김재규는 김형욱에게 귀국을 종용했다. 동년 4월 5일, 김종필이 중남미 11개국 순방 길에 북 가주 페블비치 골프장에서 김형욱을 만나서 브라질 대사 자리를 주겠으니 귀국하자고 달랬다. 그러나 1977년 6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뉴욕 타임스에 김형욱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김형욱은 박정희가 박동선을 로비스트로 활용한 공작 내용을 자세히 폭로하고 그가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7년 6월 22일 김형욱은 재미교포 미국 언론인 문명자의 도움으로 미국 하원의 박동선 사건을 위한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했다. 그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했다. 김형욱은 1977년 6월 말부터 당시에 유학생이었던 김경재 민주당 전 의원의 도움을 받아 회고록을 쓰고 있었다. 


1978년 11월 말 어느 날,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 윤일균은 남산 중정 본부 식당에서 김재규 부장, 이철희 차장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직원이 윤일균에게 다가와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받아보니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대통령이 “자네 미국에 좀 다녀와야겠어” 하기에 준비가 되는 대로 가겠다고 하니 “아니야, 당장에 가”라고 했다. 김재규 부장에게 전화 내용을 알리고 그의 허락을 받아 즉시 부하 직원에게 연락하여 뉴욕행 비행기표와 가짜 여권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윤일균이 뉴욕에 도착하여 김형욱에게 전화를 하고 뉴저지 그의 집으로 가는데 그를 의심한 김형욱은 그를 직접 오게 하지 않고 이리저리 돌리더니 어느 지점에서 그의 아들이 차를 몰고 마중을 나와 김형욱의 자택에 도착했다. 


그동안 김재규는 6-7명을 김형욱에게 보내 회고록 원고 회수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윤일균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김형욱은 7,8개의 총구멍이 윤일균을 겨냥하고 있는 방으로 안내하고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윤일균이 총을 치우기 전에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김형욱은 권총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둘은 사흘동안 하루에 7-9시간 동안 담판을 했다. 김형욱은 원고를 주는 대가로 현금 50만 달러, 자신과 가족들의 대한민국 여권 발급, 서울에 있는 집 두 채을 매각하는데 필요한 서류 준비등의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에 김형욱과 그의 가족들의 여권이 만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50만 달러는 김형욱의 은행계좌에 서너 차례 나누어 입금하는 방식으로 1979년 3-4월까지 지불 완료되었고 나머지 요구 사항도 김형욱이 원하는 대로 모두 처리되었다. 그런데 1979년 4월쯤 창이라는 일본 출판사가 김형욱 회고록의 축약 평론판(문고판)을 출간했다. 일본 중정 요원이 이 책을 중정에 보내왔다. 


윤일균과 김재규은 김형욱 회고록 회수 공작에 완전히 실패하여 박정희 한태 면목이 없게 되었다. 김재규의 남은 선택은 김형욱 암살이었다. 


김형욱에게는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 한국에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가수였다. 영화배우 최지희 씨의 친구로 알려져 있다. 1979년 9월 중순경 이 여자로부터 편지가 왔다. 같이 세계여행이나 하면서 즐겁게 살자는 내용이었다. 그 여인은 파리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김형욱은 1979년 9월 30일, 김형욱 회고록 저자 김경제 전 민주당 의원에게 전화를 하여 “여행 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알렸다. 


1979년 10월 1일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의 호텔 리츠에 투숙했다. 최 고급 호텔이었다. 김형욱은 평소에 신변 보호를 위해서 장남 존을 데리고 다녔으나 애인을 만나러 가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인지 존은 따라가지 않았다. 당시 26세인 그는 태권도 3단 유도 2단에 거구였다. 

호텔에 체크 인한 다음 뉴저지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알렸다. 김형욱은 10월 6일까지 호텔 리츠에 투숙하고 10월 7일 오전 10시경 근처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웨스트엔드 호텔로 옮겼다. 평범한 호텔이었다. 5일간의 숙박 대금을 미리 지불하고 10월 12일 체크 아웃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10월 7일 오전, 아들 존이 리츠 호텔에 전화를 하니 웨스트엔드 호텔로 옮겼다고 했다. 웨스트엔드 호텔에 전화하여 아버지의 투숙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30분쯤 김형욱은 웨스트엔드 호텔에서 나와 카지노 르 그 랑세르큐에서 저녁 7시까지 도박을 했다. 1979년 10월 7일 7시 김형욱은 카지노를 나왔다. 


1974년 8월 22일, 문세광 사건으로 육영수가 사망한 책임을 지고 박종규 경호실장이 사임하고 차지철이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취임했다. 차지철은 경호실을 박정희 친위대처럼 확장했다. 30 경비단과 4개 대대 병력을 가지게 되었다. 탱크, 장갑차, 헬기 등 중화기까지 갖추었다.   차관급이던 경호실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했다. 그리고 경호 차장 자리를 만들어 육군 중장 또는 소장을 임명했다. 차장보는 육군 준장이었다. 편제 상으로 경호실은 수도경비사령부 예하였는데 차지철은 유사시에 경호실장이 수도경비사령부까지 지휘할 수 있게 법령을 바꾸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하나회 회원들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경호대원들은 나치 독일의 친위대인 슈츠슈타별의 제복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경복궁 제30 경비단 연병장에서 전 병력이 동원되어 국군의 날 서열식을 모방한 하기식을 거행했다. 차지철은 국회 및 정부 요인들을 이 행사에 초청했다. 


차지철은 경호실 예산으로 자체적인 정보기관을 운영했다. 중앙정보부, 국군보안사령부에 버금가는 정보기관이었다. 자연히 김재규와 차지철은 정보를 놓고 박정희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차지철은 이승만 정권 밑에서 헌병감을 지냈던 이규광을 팀장으로 하는 경호실자체의 정보기관을 운영했다. 차지철은 중앙정보부가 얻은 정보를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보고하면 자신의 정보기관을 통해 다시 검증하여 그 약점을 잡아 부정확한 정보라고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김재규와 중정 요원들은 차지철에게 분노했다. 박정희는 점점 차지철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차지철은 대통령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각 분야의 인사들이 박정희와 만나려 하면 자신을 거치게 했다. 따라서 박정희와 접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우선 차지철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차지철은 김재규를 점심을 대접한다고 불러놓고 김영삼과 야당의 반체제 투쟁에 김재규가 미온적이라고 비판했다. 차지철은 1979년 2월 제10대 국회개원을 앞두고 국회와 여당의 요직개편 문제에 간여하고 국회 상임위원장 들도 자기 사람을 임명했다. 김재규은 차지철의 이러한 월권행위에 분개했다. 차지철은 ‘정보부에는 미 중앙정보국 첩자가 많다, 정보부의 정보보고은 경찰이 수집한 정보를 복사한 것이다, 정보부가 야당과 반체제 세력에 너무 미온적이다’라고 김재규와 정보부를 비난했고 김재규는 이에 분노했을 뿐만 아니라 수모를 느꼈다. 김재규는 청와대에서 나가는 길에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차지철, 이자를 죽여 버리겠다”라고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김계원은 그냥 듣고 말았다. 차지철과 정보 경쟁을 하는 마당에 김형욱 제거 공작은 김재규의 사활을 건 중대사였다.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하는 데 성공한 김재규는 주불 이상렬 공사에게 김형욱 살해를 비밀리에 지시했다. 이상렬은 김재규가 3사단 부사단장일 때 그의 부관이었다. 김재규가 보안 사령관이었을 때 이상렬도 보안사에 근무했다.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와는 오랜 친구였다.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 시절 중동 건설에 한국 기업이 많이 참여하고 있을 때 이상렬은 주 사우디 아라비아 한국 대사관의 참사관과 공사를 지냈다. 이상렬은 원충연 반혁명사건을 고발하여 출세 가도를 탔다. 박정희 정권은 수많은 반혁명 사건을 조작하여 반 박정희 파를 제거했는데 원충연 사건은 실제로 박정희를 제거하려 한 사건이었다. 


이 공사는 파리에서 유학하고 있던 중정 연수생 중에서 신현수(가명) 이만수(가명) 2명을 선발했다. 10월 1일 이 공사는 파리 어느 카페로 이들을 불렀다. 이상렬은 이들에게 “김형욱이 파리로 온다.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카지노에 탕진하고 국가의 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다. 꼭 제거해야 할 인물이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라고 하여 그들이 할 일을 넌지시 알렸다. 이공사는 좀 더 믿음직스러운 신현진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푸케 카페로 불렀다. “자네에게 부여할 임무가 있네. 일단 임무를 부여받으면 자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네. 이 일은 자네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 이 일은 김재규 부장님 지시인데 자네가 꼭 해줘야 되겠네” 고 임무가 엄중함을 강조하자, 신형진은 “목표가 김형욱이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리고 곧장 평소에 알고 지내던 루마니아 사람 2명과 접촉하여 10만 달러에 김형욱 살해를 청탁했다.  같이 임무를 수행할 이만수에게 이들을 소개해 주었다. 1979년 10월 7일, 이상렬 공사는 신현진에게 “김형욱에게서 돈을 빌려달라고 전화가 왔어. 그래서 돈을 빌려줄 사람을 소개해 주겠으니 만나자고 했어. 좋은 기회야”라고 연락했다. 신현진은 즉시 이공사에게 달려갔다. 이공사는 그에게 “두 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로 오라고 했어. 오늘 처치해야 하니 일꾼들을 빨리 부르게”라고 지시했다.  신현진은 바로 이만수와 루마니아 사람 2명을 불렀다. 이상렬, 이만수, 신현진, 루마니아 사람 2명 도합 5명은 이상렬 공사가 운전하는 푸조 604에 타고 차 안에서 김형욱 살해 계획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만수는 10만 달러가 든 가방을 들고 호텔 방으로 갔다. 나머지 4명은 리도 극장 근처를 향해서 차를 몰았다. 김형욱이 카지노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밤을 새우며 노름을 한 탓에 초췌한 모습이었다. 약간 술에 취한 듯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 공사가 차에서 내려 김형욱에게 뒤 자리에 앉아 있는 외국인을 돈을 빌려줄 사람이라고 인사시키고 김형욱을 조수석에 앉힌 다음 볼일이 있다고 자리를 떴다. 신현진이 운전석에 앉자 차는 파리 시내를 빠져나가 외곽 순환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뒤 좌석에 앉아 있던 루마니아 인 중 하나가 주먹으로 김형욱의 뒤통수를 강하게 쳤다. 김형욱은 의식을 앓고 앞으로 쓰러졌다. 승용차는 어느 작은 숲 속에 도착했다. 루마니아 인 두 명은 김형욱을 약 50 미터 떨어진 숲 속으로 끌고 갔다. 신현진은 차에서 기다렸다. 그들은 실신한 김형욱을 땅에 내려놓고 소리 안 나는 권총으로 그를 향해서 7발을 발사하여 살해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 놓고 차로 돌아왔다. 그들은 김형욱의 바바리코트에 여권, 지갑, 시계를 싸서 벨트로 묶은 다음 신현진에게 주었다. 그는 루마니아 인 두 명이 차에 앉자 이만수가 기다리고 있는 호텔로 가서 약속한 대로 10만 달러가 든 가방을 건네며 “내일 중으로 파리를 떠나라”라고 했다. 신현진은 이상렬 공사에게 성공한 공작을 보고했다. 그는 신현진을 칭찬하면서 증거를 철저히 인멸한 후 귀국하라고 당부했다. 신현진은 수거한 김형욱의 물건들을 없앤 후 10월 10일 귀국하여 김재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김재규는 금일봉이 든 봉투를 주고 중정 정책 연구실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봉투 4개를 주었는데 그중 두 개는 이만수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40-50평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다. 김형욱이 20일만 더 살았으면 무사할 수도 있었다. 김재규는 19일 후 박정희를 직접 사살하게 된다.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사사건건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직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박정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는 미국이 자기편이라고 믿고 있었는지 모른다. 

1979년에 김재규는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 CIA 한국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를 자주 만났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김재규에게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비판하고 미국은 이를 시정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1979년 6월 말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 김재규와 글라이스틴은 적어도 3번 만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1979년 6월 20일 글라이스틴은 본국 국무부에 김재규와의 면담 내용을 보고했는데, ‘카터가 한국을 방분하기전에 인권향상을 상징하는 제스처가 있었으면 졸겠다.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인권탄압으로 생각될 수 있는 행동을 피해 달라는 등 대부분이 인권문제였다. 6월 26일에 이들은 또 만났다. 글라이스틴은 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그는 김재규에게 ‘반체제 인사들의 가택연금 같은 행동은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갑제닷컴: 미국이 과연 김재규를 조종, 박정희를 죽였나?; 조갑제; 2019.10.27)


1979년 9월 26일, 10.26 사태 한 달 전이다. 김재규와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이 만났다. 이 자리에서 글라이스틴은 당시의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며 “현 헌법이나 정치제도는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없게 되어 있고 한국 국민은 이것을 우려하고 있다”라고 유신체제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1979년 10월 13일로 되어있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카터 대통령의 친서에는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을 언급하며 “최근 몇 주간 나는 이러한 사건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라고 넌지시 사건의 부당함을 표현하고 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타락을 크게 우려하여 바로잡으려고 바른말을 많이 했다. 차지철은 박정희가 하는 행위를 무조건 잘한다고 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차지철을 칭찬하고 김재규를 나무랐다. 나중에는 김재규가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에 들어오는 것까지 제한하려 했다. 그 좋은 예가 최태민-박근혜 관계에서 비롯된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이다.   


최태민은 자칭 ‘태자 마마’ 또는 ‘도사’라고 했다.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꿈에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자기에게 박근혜를 잘 보살펴 달라’고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머니가 나타나 박근혜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찾아올 테니 도움을 받으라고 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자연히 박근혜는 답장에 그 꿈 이야기를 최태민에게 전했고 그 이후로 둘은 매우 가까워졌다고 한다. 최태민과 박근혜가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3월 최태민이 임진강에서 구국 집회를 열었을 때였다.  박근혜는 졸지에 최태민이 운영하는 구국선교단의 명예 총재가 되었다. 1975년 4월 구국선교단은 구국여성봉사단으로 바뀌었다. 박근혜의 청와대 영향력을 이용하여 최태민은 회원 수를 확장하고 어마 어마한 기부금을 거두어들였다. 재벌은 물론 중소기업까지 청와대에 줄을 대려고 엄청난 기부금을 냈다. 만약 최태민이 기부금을 요구했는데 거절하면 세무사찰을 당하거나 치안국 특수대 같은 곳에서 호출했다. 유정회 국회의원 공천, 군 장성 진급에도 최태민의 손이 뻗쳤다고 한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은 청와대 비서실에 최태민-박근혜 비리에 대해서 알렸지만 청와대 출입을 금해 달라는 답뿐이었다. 경향신문 기자였던 김경래 씨의 ‘최태민에 대한 100가지 의문’이라는 메모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전달되었다. 이때 김재규는 박승규 민정수석으로부터도 똑같은 보고를 받았다. 박승규 민정수석은 이미 이 건에 대해서 박정희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다. 보고 내용을 심각하게 글자 하나 빼지 않고 읽어 보더니 “나 한태 얘기 안 한 걸로 하고 근혜에게 직접 물어보라”라고 했다. 박승규 민정수석은 박근혜를 만나 보고서를 보여주며 주의를 주었으나 비행은 계속되었다. 김재규와 박승규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사건에 대한 민정실의 자료를 중정이 가져가서 수사에 착수했다. 백광현 안전국장 주도로 면밀한 수사가 이루어져 보고서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출되었다. 


보고서를 읽은 박정희는 대단히 노했다. 딸의 비리에 수치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정보부는 그런 일도 조사하나”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두고 나가”라고 했다. 박정희는 당 사자들을 모아 놓고 직접 대질신문을 했다. 1977년 9월 12일 밤, 박근혜, 김재규, 백광현 국장, 최태민이 박정희 앞에 모였다. 박정희는 수사기록을 보면서 중요한 부분을 주로 최태민에게 물었다. 그는 청탁, 금품수수 등을 모두 부인했다. 일주일 뒤 박정희는 선우연 공보관에게 “최태민이 근혜와 청와대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 하라”라고 지시했다. 선우연이 박근혜에게 알리자 눈물을 흘리며 억울해했다. 마음이 약해진 선우연은 며칠 후 박정희에게 “큰 영애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는데, 하고 있던 단체들을 모두 해체해 버리면 큰 영애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여성봉사단만큼은 존속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요청했다.  박정희는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조건부로 박근혜의 여성 봉사단을 허락했다. 이후 최테민은 한동안 자제하는 듯했다. 그러나 1979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은 사단법인 새 마음봉사단으로 바뀌고 총재는 박근혜가 맡고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되었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박근혜와 최태민이 어마 어마한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한 달에 적어도 10번씩 궁정동 안가에서 젊은 여자 2명과 4,5명의 측근을 불러서 술파티를 하고 무조건 박정희 의견에 동의하는 차지철 편을 들면서, 직언을 하는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는 박정희를 김재규는 지도자의 역량을 상실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차지철이 경호실의 역할을 확장하고 주어진 임무와는 전혀 관계없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박정희는 그를 두둔하고 있었다. 김재규의 눈에 박정희는 지치고 타락한 지도자였다. 박정희에게 그렇게 충성스러웠던 김형욱의 최후를 본 그는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이후락, 경호실장 박종규, 보안사령관 김재규, 육군방첩대장 윤필용 등을 서로 경쟁시켜 아무도 자신에게 도전하는 하나의 권력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해 왔다. 그러나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후로는 박정희도 그 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정권 말기에 박정희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인물들은 경호실장 차지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비서실장 김계원이었다. 박정희는 저돌적이고 악질적으로 권력을 남용하는 차지철 편을 들어서 합리적이고 박정희를 올바른 길로 가게 하려고 직언하는 김재규를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고 자주 꾸짖었다. 김재규는 이러한 박정희에게 점점 분노했고 결국 원한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자기에게 잘 보여서 경쟁에서 이기려는 부하의 의욕을 적개심으로 바꾸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적개심을 부추겨서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 암살을 결심하게 한 촉매는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김재규는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 미 중안정보국 한국 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를 자주 만났다. 이들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상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재규가 박정희와 한국의 정세에 대한 미국의 생각이 어떤 지는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김재규는 10.26 사태 며칠 전에 로버트 브루스터를 만났고 재미 언론인 안치용에 의하면 10.26일 당일 오후 2시경에 글라이스틴 대사를 만났다고 한다. 대화 내용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오전 10시 27분 헬리콥터를 타고 11시에 충남 당진에 있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고 12시 10분에 KBS 당진 송신소 보강 공사 준공식을 시찰한 다음 12시 45분에 근처 도고 호텔에서 점식 식사를 한 다음 1시 50분에 헬기에 탑승하여 청와대로 향했다.  헬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아산만 현충사 상공을 한 바퀴 돌아 2시 30분에 청와대에 도착했다. 


오후 4시 10분경, 정보부 남산 분청 사무실에 있던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오후 6시에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이 있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안 가는 안전가옥의 줄인 말이며 ‘사람 또는 물건을 위험이나 적대적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여 숨기기 위한 장소’를 말한다(나무위키). 궁정동 안 가는 해방 후 염동진이 수령이었던 극우 폭력 단체인 백의사의 본부가 있던 곳이다. 약 20년 뒤에 박정희 정부가 구매했다. 궁정동 일대에는 안 가 5채가 있는데 그중 한 채가 중앙정보부 부장의 집무실이다. 부장 집무실 동쪽 옆에 구관, 골목 건너 북쪽에 신관, 신관 남쪽의 2층 양옥이 나동, 나동 남쪽의 한옥이 다동이다. 이 건물들은 중정 부장의 집무실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에 중정 안전가옥은 모두 12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정동에 외에 청운동, 삼청동, 구기동과 한남동에 있었다고 한다. 


차지철의 통보를 받은 김재규는 수행비서관 박홍주 대령과 함께 남산 부장실을 출발하여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다.  중정 의전과 과장 박선호가 김재규를 맞이했다. 회식이 있을 때마다 그는 여자 손님을 준비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가 여자들을 선택하면 차지철이 선별하여 결정했다. 아마 그는 여자 손님이 준비되었다고 김재규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김재규은 박홍주 대령과 윤병서 비서를 데리고 집무실로 올라갔다. 그는 사무실 금고를 열고 권총에 실탄을 장진하고 잘 작동하고 있는지를 검사한 다음 서가 뒤에 숨겨 놓았다.


오후 4시 40분경, 김재규는 1층 윤병서 의전 비서의 방에 있던 박홍주 대령에게 인터폰으로 정승화 참모총장과 김정섭 중정 제2차 장보(국내담당)에게 전화하라고 지시했다. 이 두 사람과는 오후 6시 30분 궁정동 안 가 ‘가’ 동에서 저녁 약속을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김재규는 겹치기 저녁 약속을 했다.


오후 5시쯤 김재규은 부하들에게 라이터 주머니가 큰 양복바지를 가져오라고 했고 20분 뒤에 6시 30분에 올 손님들을 위해 식사 3인분을 주문했다. 박홍주 대령은 그날 오후 잠깐 외출해서 검은색 구두를 사 가지고 들어왔다. 


5시 10분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도착했다. 연회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재규가 김계원을 맞이했다. 둘은 안가 정원에 쪼그리고 앉아 시국 이야기를 했다. 김재규는 부마사태가 단순한 시위가 아니고 민란인데 차지철이 중간에서 각하에게 잘못 보고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그러자 김계원이 “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이지”하고 맞장구를 쳤다.  이때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형님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라고 물으니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규는 김계원이 차지철의 제거에 동의한다고 믿고 “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김계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규와 김계원은 호형 호제하는 막역한 사이였다. 1960년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있을 때 김계원이 총장으로 부임했다. 하루는 김재규가 마산에서 해군 장교들과 회식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오는 도중 김재규의 지프가 낭떠러지로 글러서 크게 다쳤다. 이때 김계원이 벼랑 밑에서 김재규를 등에 업고 올라와서 병원으로 후송시켰다. 이후부터 둘은 아주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김계원은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여 1969년 10월 김형욱의 후임으로 중정부장에 임명되었으나 1970년 12월에 경질되었다. 그리고 대만대사로 가 있었다. 오랫동안 박정희 대통령 비서 실장이었던 김정렴이 사퇴하자, 김재규가 김계원을 후임으로 추천하여 당시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저녁 6시 5분쯤, 박정희와 차지철이 오자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 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의 바지 주머니에는 권총이 들어 있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정과장 박선호는 하루 전 오라고 했던 모델 신재순과 당일 날 연락했던 심수봉을 경호원 대기실에서 보안 서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한국식 전통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박정희가 중앙에 앉고 그 양 옆에 심수봉과 신재순이 앉았다. 박정희 앞에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이 착석했다. 


김재규는 저녁 7시 10분경 정승화와 김정섭이 있는 ‘가’ 동으로 가서 양해를 구하고 저녁식사를 먼저 하라고 하고 다시 연회장으로 갔다. 연회장 문 앞에서 권총 점검을 하고 있는데 차지철이 나타났다. 김재규는 얼른 총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다행히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은 경호원이 있는 주방에 내려갔다가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김재규와 차지철이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7시 30분경, 모든 준비를 마친 박선호는 안가 ‘나’동 지배인 남효주에게 연회장에 들어가서 김재규에게 부장님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전하라고 했다.  남효주의 전갈을 받은 김재규가 연회장 밖으로 나와서, 박홍주와 박선호에게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 처장)과 인재송(대통령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대령(박홍주)은 경비원과 한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라고 명령했다. 


7시 38분경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김재규가 자리에 앉자마자 “건방져”하고 소리를 지르며 차지철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차지철은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들었던 모양이다. 오른쪽 손목을 총알이 꿰뚫었다. 김재규는 곧장 박정희를 향해 쏘았다. 총알은 박정희의 가슴에 명중했다. 


김재규는 일어서며 다시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었다. 당황한 그는 바로 방에서 나갔다. 차지철은 “저 사람 왜 저래” 하며 화장실로 도망갔다. 손목에서는 피가 줄줄 흘렸다. 그때 전기가 나갔다. 신재순이 박정희에게 괜찮냐 고 물으니 박정희는 똑똑히 괜찮다고 대답했다.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대통령 경호처장 안재송과 부처장 정인형을 사살했다.  김재규의 수행비서 박홍주는 경비원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을 쏘아 죽였다. 연회장에서 나온 김재규가 1층 로비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을 본 박선호가 고장 난 김재규의 권총을 다른 권총으로 바꾸어 주었다.  


차지철이 방으로 다시 돌아와 박정희에게 안부를 물으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차지철은 경호원을 부르려고 방을 나갔다. 그 순간 박정희의 상체가 쓰러졌다. 심수봉이 쓰러지는 대통령을 부축하려 했으나 박정희는 끄르륵하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의식을 잃었다. 


갑자기 방의 불이 켜지며 차지철이 뒷거름질을 치며 방으로 들어왔다. 차지철의 앞에는 김재규가 그의 코 앞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차지철이 옆에 있는 가구를 집어 들고 김재규에게 돌진했다. 김재규는 뒤로 물러 나면서 연달아 4발을 차지철을 향해서 쏘았다. 총알은 차지철의 가슴과 복부를 명중했고 그는 퉁기듯 뒤로 나자빠졌다. 


차지철을 처치한 김재규는 신재순의 무릎에 있던 박정희 후두부에 총을 대고 불과 50 cm 거리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김재규가 심수봉을 향해서 총을 겨누었으나 다행히 총알이 없었다. 두 여인은 황급히 다른 방으로 피신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김재규의 첫 총소리에 놀라 방에서 나가 대기실에 피신해 있었다. 심수봉이 방밖 복도에 나와서 보니 김계원이 벽에 등을 대고 서있었다. 조금 있으니 “각하 괜찮으십니까? 각하 괜찮으세요?”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박정희가 들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동네방네 들리게 하는 그런 큰 소리였다. (심수봉, 사랑 밖에 난 몰라>, 1994 문예당 출판-위키백과 참고)


밤 10시 30분경 남효주와 박선호가 나타나 심수봉과 신재순을 별채로 데리고 가더니 20만 원씩을 주고 이 사건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다음 남효주가 내자 호텔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 


김재규가 연회장 밖으로 나오니 김계원이 마루에 서있었다. 김재규가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젠 다 끝났습니다. 보안을 유지해 주십시오”하니 김계원이 “뭐라고 하지?”하고 물었다. 김재규는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든지 적당히 하십시오”라고 하고 황급히 지나갔다. 김계원은 “하여튼 알았 소”라고 답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이 현장 수습을 할 것으로 기대했는지는 몰라도 부하들에게 현장 수습에 대한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의 와이셔츠 자락은 바지 밖으로 나와 있었고 피투성이였다. 그는 본관 1층 식당으로 뛰어들어갔다.  “물, 물”하고 외쳤다. 비서가 준 물주전자 채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차량, 차량, 손님 나오라고 해”라고 외쳤다. 


7시 45분경, “가”동에 있던 정승화와 김정섭은 총소리가 나고 밖이 소란하더니 김재규의 비서가 주방에서 물 주전자를 들고나가는 것을 보고 방 밖으로 나가니 김재규가 식당 문 앞 복도에서 주전자 물을 들이켜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김재규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정승화의 팔을 붙잡고 ‘총장 큰일 났습니다’라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무슨 일인가?’ 여러 차례 물었으나 그는 답변하지 않았다. 7시 50분경 현관 앞에 있는 김재규의 차에 탔다. 뒤 좌석 가운데에 정승화, 좌측에 김정섭, 우측에 김재규가 타고 조수석에 박홍주가 동승했다. 차는 중정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김재규가 육본과 중정을 놓고 망설였다. 정승화가 군 동원을 위해서 육본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박홍주도 이에 동의했다. 차는 유턴하여 육본으로 향했다.  


한편 현장에 남아 있던 김계원은 7시 55분경 궁정동 안가 근처에 있는 미국인 의사가 경영하는 병원으로 숨이 다 넘어간 박정희를 옮겼다. 박정희는 병원 도착 5분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계원은 미국인 병원에서 박정희의 시신을 등에 업고 나와 차에 싫고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다시 옮겼다. 거기서 박정희의 사망을 확인했다. 


청와대로 돌아온 김계원은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각료, 비서, 경호실 등에게 각하의 유고를 알리고 비상소집을 했다. 8시 25분부터 8시 40분 사이에 대부분 모였다. 최규하 국무총리와 독대한 후 김계원은 “오늘 만찬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다가 김재규가 잘못 쏜 총에 맞아 각하가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김계원은 경호실 차장 이재선 육군 중장에게 “각하가 지금 유고입니다. 지구병원에 모셔놓고 오는 길이오. 차지철 실장은 지금 경호실을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이 장군이 경호실장 직무대행으로 경호실을 장악하시오. 이 사실을 절대 외부에 알리지 마시오. 경호실 병력 출동은 금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이재선은 김계원의 지시에 따라 8시 40분경 제22 특경대에게 안가 접근을 금지시켰고 안가로 출동하던 태양요원들이 되돌아왔다. 법대로 라면 그는 경호실 병력을 사고현장으로 출동시켜 박정희와 차지철의 신병을 확보해야 했다. 그는 사실상 경호실 병력이 사건현장에 출동하여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고 범인을 체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또한 그가 계엄령 선포를 최규하에게 건의한 것은 쿠데타를 의미할 수도 있었다. 이로 인해 김계원은 10월 29일 체포되었다. 12월 20일 군법회의에서 김재규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며칠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82년 5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8시 5분경 육군 B-2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도 거의 같은 시각에 이재선에게 전화를 걸어 경호실 병력 출동금지 명령을 내렸다. 정승화는 이때 차지철이 일으킨 우발적인 사고로 박정희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차지철이 경호실 병력을 동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조치를 한 것이었다. 


9시 5분경 구자춘 내무장관, 김치열 법무장관이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각하가 변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청와대로 들어와 김계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김계원은 “간신배를 제거한다는 것이 각하가 다쳤다”라고 둘러댔다. 김치열 법무장관이 “차지철 그 새끼 무엇을 했어”하고 묻자 김계원은 “죽었을지 모른다”라고 답했다. 그제야 모두 박정희와 차지철이 사망했음을 알게 되었다.


김계원은 자기 나름대로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뒤 수습을 하고 있었다. 국군 서울지구 병원 당직 군의관이던 송계용 육군 소령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들어온 박정희 주치의이며 병원장 김병수 공군 준장이 박정희의 시체를 확인했다.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육군준장은 병원장 김병수에게 전화하여 이미 죽어서 들어온 환자가 박정희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보안 사령관 전두환은 사건 현장에 없던 인물로서 가장 먼저 박정희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오후 8시경 육본벙커에 도착한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전화로 최규하를 데리고 오라고 연락했다. 최규하 총리를 비롯하여 신현학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 구자춘 내무장관, 김치열 법무장관, 유혁인 정무 1 수석비서관 등이 벙커로 들어왔다. 국방부 복도에는 중정 요원들이 무장을 하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각 군 참모총장까지 모이니 벙커가 너무 좁았다. 밤 11시쯤 국방부 회의실로 장소를 옮겼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최 총리에게 박 대통령 유고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김재규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대통령 유고다. 보안을 유지하고 각의를 열어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을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계엄령 선포를 위한 국무회의 개최를 요구했다. 이에 동의한 김계원은 최 총리에게 계엄령 선포를 위한 국무회의 소집을 건의했다. 


육본 대회의실에서 긴급 국무회의가 열렸다. 김재규는 “각하가 지금 유고 상태입니다. 이 사실을 최소 48시간 동안 보안에 부치고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 김일성이 알면 큰일 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이 김재규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신현학 부총리가 회의 진행 중 늦게 도착했다. 최규하 총리가 그를 회의실 옆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김재규가 따라 들어왔다. 그는 신현학에게  “대통령이 유고이니 비상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신현학은 탁자를 치며 “아니 밑도 끝도 없이 계엄이라니요! 국무위원이 대통령 유고의 내용도 모르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소리 질렀다.   신현학의 반발에 김재규는 크게 당황했다. 신현학은 유고 내용을 밝히라고 김재규를 다그쳤다. 김재규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 다 알만한 분이 왜 따지고 드십니까?”라고 대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김재규의 태도를 보고 신현학은 그를 더욱 의심했다. 신현학과 김재규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큰소리에 놀란 장관실에 있던 국무위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들도 신현학과 합세하여 김재규에게 대들었다. 김재규는 권총까지 뽑아 들고 신현학과 국무위원들을 위협했으나 신현학은 물러나지 않았고 반발하는 국무위원들의 수는 더 늘어났다. 11시 30분경 최규하의 제의에 따라 정식 국무회의가 열렸다. 신현학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김재규가 수상하니 헌병대에 연락해서 그를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김계원 비서실장, 이규현 총리 비서실장, 서병기 총무처 총무국장이 회의장에서 나가고 국무회의가 시작되었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계엄령 선포를 제의했다. 그러나 신현학이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대통령이 유고라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 (대통령의) 시신을 확인하기 전에는 나는 부서(서명)할 수 없습니다”

이에 다른 국무위원들이 동의했다. 결국 김성진 문공부 장관 등이 정회를 요구하여 국무회의가 중단되었다. 


김재규는 이러한 국무위원들의 반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 김계원은 김재규가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일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사건의 진실을 털어놓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11시 40 분 회의가 중단되자 김계원은 슬며시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국방부 장관 보좌관에게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러오라고 했다. 노재현과 정승화가 오자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을 사살했다고 털어놓았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정승화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둘은 김재규의 체포는 육군 헌병이 하고 수사는 보안사가 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정승화는 헌병감 김진기에게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위장하고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명령하고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는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하게 모시라고 지시했다. 


정승화로부터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말을 들은 전두환은 육군본부 보안대장 오일랑 중령에게 전화하여 “지금 빨리 헌병복으로 갈아입고 헌병대장인 척하고 장관실에 가서 총장이 벙커에서 부른다고 유인해서 곧장 체포해. 그리고 정중하게 모셔라”라고 지시했다. 


정승화 총장 비서실장으로 위장한 김진기 헌병감과 헌병감으로 위장한 육군본부 보안대장 오일랑이 국방부 장관실에서 만났다. 김재규는 이곳에서 국무위원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둘은 김재규에게 각각 변장한 계급을 밝히며 경례를 하고 김재규를 정 총장이 만나자고 한다고 알렸다. 김재규는 순순히 이들을 따라나섰다. 


김재규는 정동 보안사 실로 연행되었다. 허화평 대령이 2층 응접실로 안내했다. 김재규는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나에게 협력하라.””내가 박정희를 살해했다. 내일이면 세상이 바뀐다”라고 떠들었다. 이날을 들은 수사관 들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살해 범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전두환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전두환은 정승화에게 김재규가 박정희의 살해범이니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정승화가 이에 동의하여 체포를 지시했다. 전두환은 오전 1시 30분에 김재규를 체포했다. 동행하던 박홍주 대령은 도주했다. 김정섭 차장보는 부하를 동원해서 안가를 습격하여 안가의 중정 요원들을 체포했다. 박선호와 박홍주 대령도 그 다음날 체포되었다. 


10월 27일 새벽 2시 비상 국무회의가 다시 열렸다. 김계원은 사건 경위를 실토했다. 국무 위위원 들은 국군서울지구병원을 방문하여 대통령 유해를 확인했다. 새벽 3시 국무회의는 계엄령 선포를 의결했고 4시 10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사령관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무위원 중 아무도 그가 김재규의 요청으로 사건현장 근처에 있었던 사실은 몰랐다. 


체포된 김재규를 정동 보안사 실에서 서빙고 분실로 호송하던 마이크로버스가 잠수교에서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모두 무사했다. 새벽 2시 30분경에 서빙고 분실에 도착했다. 피의자 복장으로 갈아입은 김재규는 “내가 각하를 살해했다. 이제 세상은 끝났다. 수사관 자네들도 살 궁리를 찾아야 돼”하면서 정승화 총장도 사건현장에 있었고 같이 차를 타고 육군 본부로 왔다고 했다. 수사관들은 그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나 의심하여 심문하기를 주저했다. 보안사는 방첩기관이지 전투무대가 아니어서 전투부대가 공격하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학봉 수사과장이 수사관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 손에 지금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다. 목숨을 걸고 수사를 철저히 하여 빨리 김재규의 공모자를 색출해야 한다”라고 수사관들을 독려했다. 신동기 준위가 김재규를 철제 의자에 묶어 놓고 폭력을 가하며 어느 군대를 동원하려 했느냐? 미국과 결탁했느냐? 등을 추궁했다.  


수사관들로부터 1차 심문 결과를 보고 받은 이학봉은 현장에 정승화와 김계원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7일 11시에 이학봉 수사과장은 오희명 과장과 함께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에게 수사보고를 하고 김계원, 정승화 두 사람을 구속 수사하겠다고 했다. 이학봉이 막 방을 나가려 하는데 전두환이 다시 불렀다. 그리고 김계원 실장만 구속 수사하고 정승화는 계엄 사령관이 되었으니 함부로 할 수 없다. 극비리에 내사만 하라고 지시했다. 


최규하는 계엄령에서 제주도를 제외했다. 소심한 그는 복잡한 시기에 권력의 정점에 서기를 9 꺼려했다. 예외 없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면 자신이 계엄사령관을 지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보고하는 명령체계가 만들어졌다.


참고

1.      카터 행정부의 도덕주의 외교와 한국정책, 카터 대통령 방한의 재해석; 박원곤,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정책연구센터

2.      프레시안 2024.0819: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173> 유신의 몰락, 네 번째 마당; 박정희 만난 카터, ’ 당장 짐 싸라’ 펄펄 뛴 사연

3.      월간조선 2005.03: 송승호; [결정적 증언]26년 만에 드러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존 미스터리, 김형욱 유인 살해는 이 사람이 했다. 

4.      한겨레 2013.04.26: 그것은 김재규의 마지막 충성이었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37> 김형욱의 실종과 죽음

5.      매일일보 2005.06.08: 나정영 기자; 김재규 살해 사건 풀 스토리-김재규가 지시했다.

6.      시사저널 2005.04.11: 정희상 전문기자; “김형욱은 내가 죽였다”

7.      동아일보 2023.09.05: 이소연; 10.26 사태, 미정부 사전공모는 없었지만 묵시적 동조 있었다

8.      매일신문 2023.12.29: 유광준; 10.26의 진실 방아쇠 당긴 김재규… 배후는 미국

9.      일요신문 1142호 2014.04.01: 김일수기자; 10.26 씨앗 김재규 vs 차지철

10.      News Peppermint: 2015.11.24: 신호철;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1979년 뉴욕 타임스 인터뷰전문 

11.  위키백과: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12. 위키백과, 나무위키: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 시태

13. 위키백과, 나무위키: 최태민과 빅근혜

14. 위키백과, 나무위키: 10.26 박정희 암살사건


6. 테헤란  대사관 인질 사태와 전두환의 집권카터 인권보다 안보를 우선으로


전두환과 레이건(정부기록 사진집)


1979년 10월 27일, 주한 미군 사령관 위컴(John A. Wickham) 장군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주한 미대사관에서 만났다.  글라이스틴은 위컴에게 미 중앙정보국 한국 지부장 밥 브루스터(Robert Brewster)가 “(10.26 사태)는 한국중앙정보부장에 의해서 계획된 사건이라고 결론 내릴만한 충분한 증거를 모았다”라고 말했다. 위컴 장군에 의하면 전두환은 오랜동안 밥 브루스터의 친구였다. 


도덕 외교를 표방했던 카터 행정부로서는 10.26 사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독재자 박정희를 제거한 김재규는 미국 정부가 원하는 일을 한 것이었다. 독재자가 사라졌으니 다음 수순은 당연히 한국의 민주화였다.  그런데 카터 정부는 표면상으로는 민주화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독재자 전두환의 행보를 방관하는 태도를 보여 결과적으로 그가 권력을 장악하게 했다.  왜 그랬을 까?


미국은 독재자 팔라비 2세를 전통적으로 지지해 왔다. 도덕외교를 주창하던 카터 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민을 억압하는 팔라비를 그가 친미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미국을 이란국민들은 혐오했다. 1978년 반정부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휴양을 이유로 해외로 망명했다. 정권은 팔라비 정권의 이인자인 바크티아르에게 넘어갔지만 과도정부에 불과했고 아무런 힘이 없었다. 민주주의 세력, 민족주의 세력,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3파전을 벌렸다. 1979년 2월, 15년간 망명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귀국했다. 그는 엄청난 대중의 인기를 모았다. 결국 그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과도 정부를 무너트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1979년 3월 30, 31 양일간에 걸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9.3%의 지지를 얻어 이슬람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한편 망명 중인 팔라비는 프랑스 의료진에 의해서 암 진단을 받고 미국에서 치료받기 위해서 입국 신청을 했다. 카터 행정부는 그의 입국을 허가했다. 호메이니는 팔라비를 이란으로 송환할 것을 강경하게 요구했다. 그는 팔라비가 암에 걸렸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의사를 파견하겠다고 미국 측에 요구했으나, 팔라비의 암진단이 거짓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마저도 거절했다. 

미국이 팔라비를 이란에 보낸다면 미국이 지지하는 모든 독재자들에게 미국은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꼴이 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송환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이란의 이슬람 급진 세력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1979년 11월 4일, 10.26 사태가 일어나고 8일 되던 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과격파 학생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으로 들어와 대사관을 점거하고 약 70명의 대사관 직원을 인질로 삼았다. 

미국과 이란은 석유 수출입을 중단했고 미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아라비아만과 인도양에 무력시위를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온건파 중재에 의한 협상이 결렬되자 1980년 4월 7일 미국은 이란과 단교하고 미국 주재 이란 외교관을 추방했다. 미국은 특수부대를 동원하여 인질을 구출하는 작전을 시도했으나 계획 차질과 항공기 충돌 사고로 미군 수송기 승무원 8명이 사망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1980년 11월 대선에서 카터는 재선에 실패하고 로널드 레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1년 1월 20일, 레간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대사관에 억류되었던 인질이 444일 만에 석방되었다. 알제리의 중재 하에 이루어진 협상에서 미국 정부는 미국에 있는 동결된 팔라비의 재산을 이란에게 돌려주기로 하고 이란은 인질을 석방했다. 


세계 최대의 원유생산지인 중동에 미국에 적대적인 이란의 존재는 미국으로 하여금 중동 지역에, 특히 인도양과 아라비아해에 군사력을 증강하게 했다.  이를 우려한 소련은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10.26 사태 이후에 발생한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카터 행정부의 도덕 외교 우선 원칙에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10.26 사태 이후에 한국의 정국은 언제 어느 때 한국군끼리 싸우게 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한국군들이 서로 싸우면 북한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남침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 한국군 내의 분쟁을 방지하는 한편 한국의 민주화를 도와야 했다. 결국 한국 국민과 야당 지도자 편에 서느냐 아니면 정권욕에 혈안이 되어있는 군부세력을 지지하여 군내의 안정을 도모하고 북한의 도발을 방지하느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미 대사관 인질사건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인권 우선을 주장하던 카터 행정부가 안보를 우선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카터 정부는 당시의 야당 지도자를 선택하지 않고 전두환의 신군부를 지지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최규하 대통령을 지지하여 민주화를 이루 도록 노력했다고 주장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에 미국이 어떻게 얼마나 개입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군사 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주한 미군은 쿠데타를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 직후에 박정희는 미군과 한국군의 레이장 역할을 했던 제임스 하우스만의 집을 찾아가서 자신의 반공 의식을 미국 고위층에 알려달라고 부탁했고 그가 이를 위해서 이미 출국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임스 하우스만이 사전에 박정희의 쿠데타를 지원하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5.16 쿠데타 당시의 케네디 행정부는 장면 정부의 무능과 혼란으로 인한 안보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민이 선출한 민주 정권을 물리치고 군사 독재정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미국은 군부에게 2년간의 시한부 권력을 주고 정국을 안정시킨 다음 민정으로 이양할 것을 약속받은 것으로 보인다. 군부는 김종필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변신하고 장기 집권을 하기 위한 준비를 쿠데타 직후부터 했다. 이러한 군부의 태도는 쿠데타 초기부터 미국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고 존슨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월남전이 확전 되는 동안은 박정희 정권과 미국이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한국은 월남파병이 경제개발에 도움이 되었고 미국은 국내 반전 여론에 더 이상 파병하기가 어려운 시국에 대량의 전투력이 좋은 한국군 파병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거센 미국 내 반전여론과 미군의 월남에서의 고전은 닉슨으로 하여금 월남전 종전을 공약으로 내걸게 하였고 더 나아가서 미국의 아시아 각국의 안보에 대한 책임을 대폭 줄이고 당사국의 부담을 늘리겠다는 닉슨 독트린의 발표는 박정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더더구나 닉슨은 월남을 버리고 중공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중화민국(대만)을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닉슨의 대중국 정책이 진행되는 동안 닉슨은 남한에서 주한 미군 1개 사단을 철수시켰다. 


박정희는 닉슨의 대 아시아, 대 남한 정책이 남한에 안보 불안을 초래한다는 가정아래 3선 개현과 유신으로 영구 집권의 기틀을 마련하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로 변신했다. 닉슨이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부통령이었던 제랄드 포드 (Gerald Ford)가 대통령이 되었다. 1975년 월남이 멸망하고 월남은 월맹(북 베트남)에 의해서 통일되었다. 


안보를 미국에 의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핵무장을 시도하는 한편 자주국방을 주장했다. 박정희의 원폭 프로그램을 알게 된 닉슨 행정부의 키신저 국무장관은 프랑스 및 캐나다 정부와 협조하여 이를 중단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남한의 핵무장은 절대로 미국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북한, 대만, 일본 등으로 핵 확산되는 것을 의미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금단의 지역을 건드린 것이었다. 


1976년 11월, 거짓말로 워터 게이트 사건에 자신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숨기려 드는 닉슨을 보고 미국 국민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인권을 중요시하고 도덕 외교를 주장하는 조지아 주지사 카터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닉슨과 포드는 박정희의 인권탄압과 독재에 대해서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터는 박정희의 반 민주적인 통치를 방관하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주한 미군 전면 철수를 주장하고 박정희의 핵무장 시도를 중단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박정희 자신의 타락과 부패, 야당 탄압, 인권 유린이 극에 달하고 야당과 국민의 저항이 심해지는 가운데 카터 행정부는 야당 인사들과 한국 국민의 편에 서서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가했다. 


김영삼이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 문제로 국회에서 제명되기 하루 전날인 1979년 10월 3일, 장충동 중앙정보부장 공관에서 김재규를 만났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제명, 구속은 물론 죽일 수도 있다고 하며 기자회견에 대해서 사과하라고 충고했다. 


10월 4일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되었다. 카터는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다음날 10월 5일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을 본국으로 소환했다. 그리고 10월 18일 브라운 국방장관이 글라이스틴을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 

브라운 장관은 박정희를 만나서 야당 탄압이 가져올 결과를 거론하며 박정희를 압박했다. 이에 박정희는 미국 측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난과 글라이스틴 대사 소환에 대해서 강력히 항의했다. 


10월 26일, 박정희가 시해되던 날, 글라이스틴은 그의 관저에서 김영삼과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김영삼은 민중 시위가 박정희 정권을 무너트릴 것이라고 예견했고 글라이스틴은 아직은 현 정권이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글라이스틴은 그날 오후 2시에 김재규를 만났다. 그리고 박정희는 그날 저녁때 암살되었다. 미국은 분명히 야당 지도자 그리고 김재규와 소통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다음날부터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11월 6일 최규하는 현행 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이 조속한 시일 내에 유신 헌법을 개정한다는 시국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다. 재야 정치인들은 3 개월 이내에 민주 헌법을 제정하고 이 헌법에 의해서 선거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며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강경하게 반대했다.

최규하는 재야의 요구를 무시하고 12월 6일 유신 헌법에 의한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2월 21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은 최규하였지만 계엄령법 9조에 의하면 전국을 계엄지역으로 선포하는 경우에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지만 당시에 제주도가 계엄지역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면 그만이었다. 다시 말하면 군 통수권이 정승화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있었다. 


권력의 중심인 계엄사령부에 합동수사본부가 있었다. 수사 본부장은 전두환이었고 그는 10.26 사태를 수사하고 있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육사 11기 하나회 회원들은 알게 모르게 군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막강한 정보기관이었던 차지철의 경호실과 김재규의 중앙정보부는 차지철의 사망과 김재규의 구속으로 약화되었다. 보안사가 최고의 정보기관으로 부상했다. 자연히 전두환의 군내 위상은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급기야는 차지철과 김재규가 하던 것처럼 전두환도 정치에 간여하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의 비리를 알아내서 협박하여 원하는 일을 관철하거나 10.26 사건의 수사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하여 보고하는 등 월권행위를 하기 일쑤였다. 전두환은 10.26 사건 다음날 윤일균 즁앙정보부 제1차장, 겸 직무대리, 오탁근 검찰총장, 손달용 치안 본부장 등을 보안사로 불렀다. 그는 국가 원수 시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신들을 모두 처벌해야 하지만 자신에게 협조하면 체포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이렇게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헌병, 군검찰을 장악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이런 전두환을 그냥 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전두환의 처벌을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하나회 측의 불온한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한 인사 조치를 계획하고 있었다. 

정승화는 청렴하고 강직한 장태완 소장을 수도 경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정승화는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이동시킬 것을 건의하는 한편, 하나회 인사들을 군 요직에서 밀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군 내부에 정보망을 통해서 정승화의 계획을 알게 된 하나회와 전두환은 정승화를 제거하고 군을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북한이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마당에 한국군은 전두환 지지 세력과 정승화 지지 세력으로 분열되어 전투를 벌일 위기일발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국군의 작전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따라서 군의 이동은 몇몇 예외적인 부대를 제외하고는 주한 미군사령관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정승화 세력이 이기느냐 전두환 세력이 이기느냐는 주한 미군사령관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달려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은 흥선 대원군의 민비와 고종에 대한 쿠데타였다. 당시의 종주국이었던 청나라는 대원군을 체포하고 대원군에게 쫓겨 갔던 민비를 복권시켰다. 청의 이홍장은 조선을 종래의 전통적인 종주국-조공국 또는 군신 관계에서 근대식 식민지화하여 다른 강대국으로부터 보호할 목적으로 대원군을 체포하고 청군을 지금의 용산에 주둔시키기 시작했다. 향 후 12년간 청일전쟁 때까지 조선은 청의 좀 더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당시에 군사정권이 또다시 계속되느냐 아니면 제야 정치인들과 국민이 열망하던 민주화가 이루어지느냐는 미군 사령관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달려있었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국제적인 미국의 입장에서 이루어졌지 한국의 장래를 위한 최선의 것이 아니었다. 


12.12 사태는 전두환이 군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를 제압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주한 미군 사령관은 존 A. 위컴(John A. Wickham)이었다.  당시의 그의 태도를 자세히 복기해 보면 그는 알게 모르게 전두환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11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1980년 8월 27일 존 위컴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피살 이후 가장 성공적인 미국의 한국 정책가운데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수립이었다. 우리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그 보람도 크다”라고 말했다. (민플러스: 12.12쿠데타, 그날주한미군은 뭘 했나?; 강호석, 2023.12.11) 


1979년 12월 12일 저녁 7:30분경, 위컴은 용산 미군 지휘 본부 지하 벙커에 도착했다. 위기 상황 때 필요한 인원이 속속 들어왔고, 빌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도 8시 조금 지나서 합류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최규하는 물론, 한국군 장성들과 전혀 통신이 되지 않았다.  몇 시간을 통화하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다가 밤 11시쯤 갑자기, 로제현 국방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이 몇 명의 보디 가드를 동반하고 벙커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민간인 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잿빛이었다. 옷은 지저분했고 얼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승화 계엄사령관 집 근처로 짐작되는 곳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가족을 피신시킨 다음 집 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맨발로 밤중에 용산 벙커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위컴은 그들에게 서너 개의 방을 마련해 주고 다른 한국군 장성들과 통신할 수 있는 장비와 인원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는 어두운 밤에 군이동을 하면 잘 보이지 않아 충돌할 가능성이 있으니 새벽까지 병력의 이동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라고 로재현 국방장관에게 촉구했다. 그 말을 듣고 로 국방장관은 “이미 1군 예비 사단인 수도 기계화 사단과 26 보병사단에게 서울로 출동할 준비 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 부대를 서울의 중요시설을 보호하고 반란군을 진압하는 임무를 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위컴은 만약 로 국방장관이 명령한 부대가 서울로 들어오면 한국군이 서로 싸우게 될 것이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북한이 도발할 우려가 있으니 당장에 군을 동원하지 말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상황을 좀 더 확실하게 판단한 다음 결정하라고 로 장관을 설득했다. 

로 장관은 할 수 없이 위컴의 요구에 따라 두 사단에 대한 출동 명령을 취소했다. 그리고 로 장관과 김 합참의장은 전군의 중요 본부와 접촉하여 그들의 충성을 확인했다. 많은 부대들이 충성을 약속했다. 그러나 몇몇 사단은 예하 부대가 이미 서울로 진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보안 사령관 전두환과 그의 추종자들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로 장관은 크게 실망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듯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전두환과 접촉하려 했으나 전두환 측은 미국 측과 일체의 통신을 하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에 노태우의 9사단 소속 몇 개 대대가 서울로 들어가고 있었다. 9사단은 한미연합사 소속이었고 병력의 이동은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했다. 그러나 노태우는 허락 없이 병력을 이동하고 있었다. 위컴은 노태우의 9사단 병력 이동을 중지하라고 명령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명령해도 듣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다. 


위컴은 “한국군 내부의 분쟁”은 북한이 남침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으니 12월 12일 밤에 전두환이 무슨 일을 하든 두고 보다가 내일 아침에 어떻게 해보자”라고 하고 있었다. 그날 밤에 노 장관이 명령했던 부대가 출동할 수도 있었고 노태우의 9사단의 서울 진입을 중지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컴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본국으로부터 전두환이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금치 못하게 한다. 


참어스 존슨(Chalmers Johnson)은 그의 저서“역풍: 미 제국이 치러 야할 값과 결과(Blowback: The Costs and Consequences of American Empire)”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위컴에게 9사단 이동을 알렸고 위컴은 이를 허락했다고 믿을 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고 밝혔다. (P.110)


도덕 외교를 그렇게 강조했던 카터 행정부는 독재자 박정희를 숨 막히게 압박하더니 그가 암살되자 이제는 독재자를 비호하고 나섰다.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와 같은 일이 한국에서 일어날 까봐 과민해진 미국은 인권보다는 안보를 중요시했고 이는 전두환에게 호재였다. 15년 뒤 전두환은 재판정에서 “1979년과 1980년에 그가 취한 행동은 모두 미국이 인정했다”고하여 자신의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체포로 전두환은 군을 장악했다. 최규하는 대통령에 취임했고 그의 정부는 아직도 존재했지만 실권은 전두환이 가지고 있었다. 전두환은 원하면 언제든지 최규하를 밀어낼 수 있었지만 명분이 문제였다. 1980년 4월 14일, 사실상 전두환에게 복종하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다. 이일로 학생 데모가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났다. 신군부는 최루탄과 대규모의 경찰을 동원하여 몰로토프 칵테일을 던지는 학생 데모대를 진압했다. 5월 20일에 박정희 사망 후 처음으로 국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때 박정희 시대의 여당이었던 공화당이 야당과 연합하여 계엄령 해제를 의결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전두환의 합법적인 권력의 종말을 의미했다. 


1980년 5월 7일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전두환과 만나기 전에 본국에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경우에 군을 동원하여 경찰 병력을 강화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비상 대책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두환과의 대화 도중에 절대로 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비밀 전문을 보냈다. 다시 말하면 주한 미국 대사관 측은 신군부와의 대화에서 신군부가 시위진압을 위해서 필요한 경우에 군을 동원하겠다고 하면 이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다음날 워랜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 국무부 차관은 “우리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국정부의 비상 계획에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는데 동의한다”라고 답했다.  인권 담당 국무부 차관보였던 퍁 데리언(Pat Derien)은 후에 시사 기자 팀 쑈록에게 “이와 같은 미국무부의 태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생각하기에 신군부에게 (군을 사용하라고) 주는 청 신호였다” 그녀는 이어서 아시아 태평양지역 담당 국무 차관보였던 리처드 홀부루크(Richard Holbrooke)와 국가 안보에 미친 듯이 과민한 관료들이 “독재자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라고 비난했다. 


전두환은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과 을 만나 그의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한 다음, 1979년 12월 12일의 미완성 쿠데타를 끝내기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17일 늦은 밤, 전두환은 제주도가 제외되었던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대학에 휴교 조치를 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정지시키고, 수천 명의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전국 31개 대학과 36개의 중요 기관에 계엄군이 배치되었다. 김대중은 내란음모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고 김영삼은 가택 연금되었다. 어마어마한 힘에 눌려 전국은 시민들의 분노로 인해서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이 긴장되어 있었지만 조용했다. 그러나 김대중의 고향 광주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참어스 존슨은 광주 항쟁을 1956년 소련의 압제에 항거했던 헝가리 의거에 비유했다. 역사학자 도널드 클라크는 “한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정치적 폭력 사태”이고 전두환이 광주를 탈환하는 것을 미국이 적나라하게 지지한 것은 “미국이 광주학살에 동조했다”는 오명을 영원히 지울 수 없게 했다”라고 지적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내에서 1,2백 명의 데모대가 전두환의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검은 베레모(Black Berets)로 알려진 제7 특전사 공수부대가 이들을 진압했다.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어 잔인한 행위로 악명 높았던 부대였다. 당시에 광주에 투입된 이 부대 가운데는 민간인 옷을 입고 긴 머리를 하여 대학생으로 가장하고 있는 특수부대원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눈에 뜨이는 젊은 남자와 여자들을 총검을 찌르고 사람들에게 화염방사기를 던졌다. 5월 19일, 글라이스틴은 워싱톤에 보낸 케이블에서 “서울에서 들은 광주폭동에 대한 소문에 의하면 “특수부대는 총검으로 학생들을 찔러 많은 사상자를 유발했다. 광주에 있는 어떤 사람은 특수부대가 인민군(North Koreans)들 보다 더 악랄하다고 보고받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무고한 사람들이 특전사 병사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되는 것을 본 광주 시민들과 소문에 들은 인근 주민들은 분개했다. 5월 19일, 전 광주시민과 전라남도 26개 도시 중 16개 도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사실상 신군부가 원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공수부대를 광주에서 몰아냈고 향후 5일 동안 광주 시청을 점령했다. 시민들은 미국 대사관에 중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한 미군 사령관 위컴은 이미 광주시를 탈환하기 위한 병력의 이동을 전두환에게 허락한 후였다. 글라이스틴은 후에 “중재 요청을 한 합법적인 정체”를 확인할 수가 없어서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5월 21일, 계엄사령부는 광주 사태에 대한 통계 자료를 발표했다. 광주시민의 1/5인 약 150,000명이 광폭행위에 참여하여 3,505개의 무기, 46,400개의 총탄, 4대의 무장 차량, 89대의 지프, 50대의 트럭, 40대의 렉커 트럭, 40대의 버스, 10대의 덤프트럭, 8대의 최루탄 발사 지프를 탈취했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본국에 급전을 보냈다. “대규모 반란은 아직도 통제 불능이고 한국 군부를 바짝 긴장하게 하고 있다. 군부는 두 군데의 진지와 2000명의 좌파들을 수감하고 있는 감옥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 12.12 사태를 일으킨 장군들은 분명히 이 사태로 위협을 느끼고 있다.”


5월 7일과 8일에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이 본국에 보낸 케이블을 보면 신군부가 특수부대를 광주로 보낸다는 사실과 이들이 가지고 있는 악명 높은 전투능력을 일반시민에게 사용할 경우에 어떤 피해가 가해질지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글라이스틴은 학생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서 군부가 서울과 김포공항 근처에 대기시킨 특수부대의 자세한 숫자를 보고했다. 5월 8일 미 국방부 정보기관은 펜타곤 합참의장에게 “한국 특수부대 전부가 비상에 걸려있다. 그런데 제7여단만 서울에 있지 않으며 아마도 청주와 광주의 대학 데모대 진압에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한미연합사는 구조적으로 한국군이 군 이동을 하려면 유엔군 사령관(주한 미군사령관)의 인가를 맡아야 한다, 그러나 특전사는 예외로 되어있다. 그러나 한국군은 관례적으로 모든 병력의 이동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알려 왔다. 글라이스틴은 5월 7일 본국에 보낸 케이블에서 “만약 한국군이 해병대 1사단의 차출을 원했다 해도 유엔군 사령관은 이를 인가했을 것이다.”라고 당시의 미국 정부가 신군부에 협조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5월 22일 케이블에서는 “광주와 다른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한국군의 노력을 우리가 얼마나 돕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한편 글라이스틴은 한국 외무부 장관에게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공공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 왜냐면 우리가 계엄 당국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고 이는 광주에 반미 정서를 퍼트리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5월 22일 워싱턴, 새로 조직된 한국에 대한 정책 리브유 위원회(안보회의)가 백악관에서 열렸다. 목적은 현재 한국의 소요 사태에 대해서 미국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토의하기 위해서였다. 위원회 멤버는 새로 임명된 에드먼드 머스키(Edmund Muskie) 국무장관, 카터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 즈비그뉴  브르제진스키(Zbignuew Brzezinski), 중앙정보국장 스탠스필드 터나(Stansfield Turner) 원수, 국방장관 해롤드 브라운(Harold Brown), 국무차관 워렌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 동아시아 태평양 국부차관보 리처드 홀부루크( Richard Holbrooke), 국가 안보회의 고위 정보요원 도날드 그레그(Donald Gregg)였다. 폴란드계 미국인인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브레제진스키는 회의에서 합의된 결론을 다음과 같이 요악했다. “단기적으로 (군부를) 지지하고 장기적으로 정치 개혁을 위한(군부에 대한) 압력”이라고. 글라이스틴에 전달된 회의록에 의하면 “ 한국 군부가 나중에 무질서가 크게 확산될 원인 제공을 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하여 광주에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 는데 모두 동의했다. 


5월 23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국무총리 직무대리를 만나서 “강력한 폭동 진압”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한미연합사 병력을 한국군 지휘하에 두어 광주 폭동 진압에 쓰는데 동의했다. 워커 주한미군 사령관은 DMZ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20사단을 한국군 지휘하에 두는 것을 허용했다. 이와 같은 주한 미군 사령관의 결정을 전두환은 미국이 남한 전역에서의 병력 이동을 용인한 것처럼 뉴스 방송을 통해서 발표하여 자신이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려 했다.  5월 27일 새벽 3시, 20사단이 광주에 들어왔다.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사살했다. 이 부대는 훈령을 잘 받은 군대였고 빠르게 광주를 탈환했다. 1956년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와 흡사한 현상이었다. 


20 사단애 쫓겨서 주위 산속으로 도주한 폭도들을 전두환은 1982년까지 공비라고 하여 추적했지만 미국 정보요원들에 의하면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독재에 항거하던 선량한 광주 시민들이었다. 


서울에서는 재야 정치인 김대중을 북한과 내통했다고 선전하며, 그가 이미 감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월 22일 광주 폭동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계엄령하의 재판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1981년 1월 20일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40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같은 날 테헤란 미국 대사관에 인질로 잡혀 있던 미국인들이 석방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안보담당 보좌관 리처드 알렌(Richard Allen)은 전두환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전두환으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그의 백악관 초청은 레이건 행정부가 한국의 전두환 정권을 인정한다는 확인증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렌은 전두환에게 그 대가로 김대중의 사형 선고를 종신형으로 바꾸어 줄 것을 요구했다. 


 1981년 2월 전두환은 백악관을 방문했고 김대중은 그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82년 전두환은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것을 허락했다. 미국의 장기적인 목적이었던 한국의 정치개혁 즉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작업의 시작이었다. 7년 후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1980년 광주 항쟁때와는 정 반대로 전두환이 원하는 계엄령 선포를 허락하지 않고 시위대 편을 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민주화의 완성이라고 믿었겠기만 미국에게는 1980년 5월 22일 한국 정책애 관한 리브유 위원회(안보회의)에서 결정된 “장기적인 정치개혁을 위한 신군부에 대한 압력”의 성공이었다. 


1980년 5월 24일,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범 김재규를 교수형에 처했다. 1980년 8월 27일, 유신헌법에 따라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9월 1일에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카터 행정부는 전두환이 미국의 가장 오래된 위성국가중에 하나인 한국의 지도자로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이라고 만족해했다. 


미국은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지지했다가 미국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독재를 한다고 버리더니 독재자 전두환을 안보를 이유로 수많은 광주 시민을 재물로 바치고 집권하게 했다. 미국은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러 서야 한국민의 염원을 인정했다. 우리는 곧잘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소련의 위성국가라고 비난했다. 참어스 존슨은 소련 위성국가 항 거리에서 일어났던 1956년 의거를 광주 항쟁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전두환이 동원한 한국군은 항 거리 시위대를 깔아뭉갠 소련군에 해당한다. 그리고 한국군의 작전권은 미국에 있었다. 


기업 형태 중에 프랜차이즈라는 것이 있다. 프랜차이즈 사장은 프랜차이즈 점주가 분점을 잘 운영하지 못하면 점주를 갈아 치운다. 냉전시대에 자유진영 약소국가들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친미 독재자들은 프랜차이즈 점주와 같은 신세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차머스 존슨은 그의 저서 “블로로 백(Blowback)”에서 한국을 “미국의 가장 오래된 위성국가중의 하나”라고 규정하고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정권 시절에 미국의 한국에 대한 내정 간섭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은 25년에 가까운 군사 독재를 지지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약소국가의 독립을 존중한다는 미국의 이상에 어긋나는 정책이었다. 


미국은 한국에 안보의 위기가 증가하여 안보와 인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에 군사독재를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을 믿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주장하는 수많은 한국의 시민과 지도자들이 희생되었다. 미국은 전 세계를 운영하는 국가로서 한국을 전체의 일부로 간주하고 대했기 때문에 미국의 한국 경영은 그리 섬세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국 국민은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국국민이 부르짖는 것은 바로 미국의 이상이었다. 미국이 그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늘날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있다. 외세의 내정간섭을 배제하고 국가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첩경은 국민이 지지하는 지도자의 통치와 강력한 국력이다. 한국은 선거로 국민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선출하고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로 국력을 단단하게 하고 있다. 한국은 마치 아들이 키워준 부모 밑을 떠나는 것처럼 미국의 보호막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참고

1.      동아일보 2014.01.22: [김상운의 백투 더 퓨쳐] 서울의 봄 미국은 왜 전두환을 용인했나?

2.      주간한국 2000.02.02: [어제와 오늘] 두 회고록 속 ’ 10.26, 12.12’

3.      Blowback; The Costs and Consequences od American Empire with a new introduction on Blowback in the post-9/11 world; Chalmers Johnson; Owl Books 2001, reissued 2004, p10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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