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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Sep 15. 2024

박정희 암살 사건과 전두환집권(I)

독재자들의 사활은 미국에 달려있었다. 

(I)

1. 박정희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 이북에서 갑자기 나타나다.

2. 5.16 쿠데타, 그 후 미국과의 갈등으로 인한 김종필과 박정희의 위기

(II)

3. 월남 파병과 존슨 대통령, 김신조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4. 닉슨의 월남 미군 철수와 주한미군 감축에 고전하는 박정희

(III)

5. 인권대통령 카터와 독재자 박정희: 김형욱 암살 그리고 10.26

6. 테헤란 미 대사관 인질 사태와 전두환의 집권; 카터 인권보다 안보를 우선으로



1.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 이북에서 갑자기 나타나다. 


박정희, 황태성(중앙일보 2015.04.19)


10월 폭동


경북일대 뒤집었다 폭동이요 민란이라

누구보다 큰피해를 이부자가 당했어라

큰집주인 찾는판에 낭군님이 나타나고

폭도들이 폭행할때 나도같이 당했어라

중구그날 아침부터 영천군수 타살한후

이부잣집 습격해서 파괴하고 방화할때

부형대신 붙잡혀서 맞아죽을 변을했네

나아니면 영낙없이 황천으로 갔으리라

악몽같은 그날아침 이런욕을 보았나니

폭도에게 끌려나가 몽둥이로 매를맞고

개죽음을 당하는임 참아볼수 없는지라

이내목숨 내어놓고 가장목숨 구하려는

아녀자의 일편단심 천지신명 도우셨다

피투성이 가장머리 얼사안고 울부짖어

넘어지는 낭군님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죽었다고 땅을치던 시월일일 십일사건

무서워라 무서워라 경북십일 폭동이라

불행히도 그날화를 이내혼자 당했으니

이씨가문 궂은일은 나혼자만 당할런가

남편목숨 건지려고 내목숨은 내던진날

요행이도 소낙비가 쏟아지고 천둥할때

폭도들이 난동하다 하나들씩 헤어진일

 

이 시의 작가 내방가사 시인 조애영은 시인 조지훈의 고모이고 경북 영천 만석꾼 이 씨 집안의 며느리였다. 이 씨 집안사람들은 대구 10월 항쟁 동안 폭도들로부터 조애영 남편 이담의 생명을 구한 인물이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라고 믿고 있다. 박상희는 여운형의 주도하에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에 적극 참여하는 등 대구 경북 지방의 좌파 지도자였다. 요지음은 공산주의자들을 무슨 괴물처럼 취급하지만 해방 직후에는 그리 낫 설은 존재가 아니었다. 공산주의자인 박상희가 만석꾼 지주 아들을 구해주었다. 아마 박상희가 잘 아는 지방 유지였을 것이다. 박상희도 인정 많은 한 시민이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혼란기에 북한의 책동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북의 김일성도 남의 새로운 세력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혁명주체 세력인 군부는 1961년 7월 육군첩보부대(HID)를 시켜 북한에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남북회담을 제안했다. 1961년 9월 28일 남과 북의 대표 각각 2명과 각각 속기사 한 명이 해주 앞바다에 있는 용매도 해안에 설치된 천막에서 만났다. 남측의 대표는 강성국 서울 시의원과 김석순 광주 시의원이었다. 이들은 육군첩보부에 선발되어 사전교육을 받았다. 남북 대표는 비공식 공관설치, 인사, 경제, 문화 교류 등을 토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박정희와 김일성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고 그들 자신이 의제에 합의하기는 너무나 낮은 계급이었다. 양측이 서로의 상황을 떠보기 위한 만남이었다. 김일성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공산주의자이면 통일을 할 수 있는 호재였다. 사실 4.19 혁명이 후 제2공화국 시절에 통일에 관한 논의로 남한 전체가 혼란스러웠다. 이승만 정권이 반공과 멸공을 앞세워 군사적 힘에 의한 통일을 주장했던 반면에 독재에 벗어난 남한 국민 특히 학생들은 대화를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학생들은 연일 거리에 나와 남과 북이 만나서 평화통일을 논의하자고 외쳤다. 상당수의 국민들이 이를 지지했다. 김일성은 이러한 남한의 평화통일 열기에 크게 고무되어 남북학생 회담, 남북경제교류, 정부 간 접촉 등을 제안했다. 당시에 북한은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남한 보다 잘살고 안정되어 있었다. 그는 적화통일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북한 주민의 통일 열기도 남한 못지않게 뜨거웠다. 그는 연방제를 제안하고 남한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은 이러한 통일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군부의 혁명공약 제1조와 5조는 반공체제의 강화를 명시하고 있다. 6조까지 있는 혁명공약에 둘이 반공에 관한 공약이었다. 제1조는 “반공은 국시”라고 했다. 그리고 1961년 7월 4일 반공법을 발표했다. 보안법과 반공법이 소위 용공주의자들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남로당에 가입했던 경력이 있는 박정희는 제2공화국의 평화통일 분위기를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신임을 얻기 위해서 반공을 강조했을 것이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는 “서울 시민이 쿠데타를 환영한다.” “쿠데타를 반대하는 미국에 대해서 내정 간섭이다”라고 하는 등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대남 방송도 중지했다. 김일성은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경력이 있고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대구항쟁을 주도했던 인물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쿠데타 세력이 좌익이라면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을 시도해 볼만한 일이었다. 

 

황태성은 경북 상주군에서 1906년 4월 27일 비교적 잘 사는 중농가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1년 해방 후 경기고등학교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24년 동맹휴학사건으로 중퇴했다. 이때부터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서울청년회 활동과 조선청년동맹결성에 참여했다. 1925년 4월 연희전문 상과에 입학했으나 10월에 퇴학당했다. 그 후 김천으로 내려와서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고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경상북도 위원회에 가입하고 조선일보, 중외일보 김천지국 기자가 되었다.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하고 경북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2년 징역살이를 했다. 출옥 후 박상희, 임종업과 함께 경북 사회주의자 3인방으로 불렸다. 임종업과 함께 조선공산당 경북 도당 창건과 당 재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김천그룹재건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1935년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일제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주요 좌익 인사 300여 명을 구속한 사건이었다. 출옥 후 1944년 여운형이 수권을 준비하기 위해서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의 전라도 책임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인 1945년 10월에는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에 선임되었다. 이 역시 여운형 주도로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가 박헌영이 참여하면서 인민위원회로 바뀌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항쟁의 배후로 활동하였다. 미군정이 그를 잡으려 하자 11월에 월북했다.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1954년 북한의 무역상 부상을 역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남로당이 배척되면서 그도 세력권에서 밀려났다. 

 황태성이 남에 가서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는 박정희를 만나서 통일하자고 설득하겠다고 김일성에게 자원했다.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그가 정권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올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김일성의 허락을 맡은 그는 1961년 8월 29일 평양을 출발하여 임진강을 건너 9월 1일 서울 우이동 중앙대 강사였던 김민하의 집에 잠입했다. 왜 하필이면 김민하였을까? 

 

김민하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였고 당시 28세였다. 김민하의 부친 김원출은 상주에서 양조장을 경영했다. 황태성의 집과 김원출의 집은 담장 하나를 두고 있는 가까운 이웃이었다. 황태성은 이웃에 사는 김민하의 부친과 가까이 지냈다. 김민하는 10남매 중 막내였고 황태성은 그가 자랄 때 이름만 들었지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다. 한국전쟁 후 김민하의 두 형과 누이 한 분은 월북했고 일본 유학 후 일본에 사는 형님들도 있었다. 황태성은 월북한 김민하의 두형이 북한에서 자리 잡도록 도와주었다. 황태성은 이들을 통해서 여동생 황경임의 딸 임미정이 권상릉과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 사는 형제가 이들의 결혼사진을 북한에 사는 형제에게 보내주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성은 또한 권상릉이 김민하의 처남인 것도 알고 있었다.

 

김민하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황태성이 유명한 독립운동가라는 소문이 동네에 자자했다. 김민하는 해방 후 대구 10월 항쟁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박상희와 황태성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황태성을 직접 만나보지 못해서 그의 얼굴을 전혀 몰랐다. 

1961년 9월 1일 황태성은 김민하가 강의를 하고 있는 중앙대학교로 찾아갔다. 수위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태성은 김민하가 강의를 마치고 나오자 “나 시골에서 올라왔네”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고향 사람들은 김민하가 대학 교수가 된 줄 알고 시골에서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민하는 그가 고향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김민하는 중앙대학교 부근 흑석동 산동네에 있는 판잣집에서 2년 전에 결혼한 임신 중인 아내와 아들 하나와 같이 살고 있었다. 그는 윗방 하나를 비워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노인을 기거하게 했다. 김민하는 그를 부친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노인이 돈을 주면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사다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노인은 통 말이 없었다. 서울 시내를 구경한다며 나갔다 오곤 하며 사흘째 되던 날 자신이 황태성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김민하는 독립운동가 황태성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황태성은 평양에서 왔다고 했다. 김민하가 간첩으로 의심하는 순간 황태성은 자신은 간첩이 아니고 김일성의 밀사라고 했다. “… 내가 내려온 것은 박정희 의장의 통일에 대한 속셈을 알아보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 나는 북쪽에서 폐병을 앓다가 폐 하나를 들어낸 사람이다. 거기서 무역 성 부상(차관급)까지 지냈지만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나하고 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양쪽에서 권력을 쥐고 있을 때 서로의사를 통케 해서 통일문제를 협의하게 해 보자 내 이렇게 내려온 것 아이가.”라고 자신이 밀사로 온 목적을 토로했다. 그리고 자신의 박정희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같이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등에서 같이 활동했다고 했다. 자신이 박상희를 조귀분과 중매를 시켜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린 박정희가 자신을 무척 따랐고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다고 알려 주었다. 박정희는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박정희가 문경 초등학교 교사를 할 때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진로를 묻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에 김민하는 중앙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대학원 졸업 후 뚜렷한 직업이 없었던 김민하는 고려대 교수 왕학수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왕학수는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기였다. 5.16직 후인 1961년 7월 25일부터 부평의 경찰전문학교 내에 설치된 재건운동훈련소에서 혁명정부이념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이는 왕학수-박정희 인맥의 덕이었을 것이다.  

 

황태성은 서울에 사는 자신의 조카딸 임미정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민하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자신의 처남 권성릉의 아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황태성의 여동생 황경임의 외동딸 임미정의 남편 권상릉은 김민하의 처남이었다. 김민하는 즉각 임미정과 권상릉에게 연락했다. 임미정은 외삼촌 황태성을 보자 얼싸안고 대성통곡했다. 임미정은 황태성과 같이 월북했었다. 임미정은 6.25 사변 중에 인민군 선무 공작대로 남으로 내려갔다. 그 후 처음 만난 것이었다. 황태성은 조카딸 임미정에게 손녀딸 황유경을 찾아 달라고 했다. 장남 황영옥의 딸이었다. 그는 대구 항쟁 때 사망했다. 당시에 창덕여고를 다니던 황유경은 아무것도 모르고 흑석동의 김민하의 집에 갔다. 횡태성은 방 안에서 손녀딸을 몰래 보며 흐느껴 울었다. 

 

김민하는 황태성이 간첩이 아니고 밀사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뒤를 항상 봐주는 고려대 왕학수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기였고 최고회의 고문을 지냈고 훗날에 부산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황태성 이야기를 듣고 왕 교수도 깜짝 놀랐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김총필 종앙정보부장에게 말을 전해 놓겠 노라고 했다. 

 

황태성은 권성릉에게 남북이 서로 체제를 인정하고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 만남 등 남북교류를 하며 통일의 길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 씨 부부는 불안했다. 남한이 북한보다 경제, 군사면에서 열세이고 무엇보다도 북한이 사회적으로 남한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군부의 혁명공약 제1조는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들은 외삼촌에게 이런 이유를 들어 그의 주장이 부당함을 지적했다. 황태성은 “이건 내가 죽든지 살든지 상관없이 민족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한다.”며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김민하는 왕학수 고려대 교수를 다시 찾아갔다. 왕학수도 의외였다. 그는 김종필의 직통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김민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무렵 김종필은 대만 쌍십절 행사에 참석한 후 10월 14일에 귀국했다. 

 

이때 황태성은 박상희의 미망인 조귀분에게 김종필 중앙 정보부장을 통해서 박정희를 만나게 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황태성은 권 씨 부부에게 자신이 조귀분을 박상희에게 중매했고 그들의 딸 박영옥이 김종필의 아내임을 설명하고 자신이 쓴 편지를 구미에 살고 있는 조귀분에게 전하고 조 여사를 모시고 오라고 당부했다. 권 씨 부부는 구미로 가서 조귀분에게 편지를 전해주었다. 조여사는 편지를 읽고 나서 “시국이 이런데 내가 어찌 갈 수 있겠나? 즉시 돌아가 주게”하며 동행할 것을 거절했다. 

권 씨 부부가 떠난 다음 조귀분은 무척 당황했다. 하지만 알리지 않를 수 없는 일이었다. 몹씨 불안한 마음을 안고 상경하여 사위 김종필에게 황태성의 출현을 알렸다. 

 

또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권 씨는 황태성에게 다시 북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꿈적 도 하지 않았다. 

1961년 10월 20일 아침, 3명의 남자가 김민하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김민하가 나가 보니 그들은 권성릉의 집 주소를 물었다. 김민하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서 권성릉에게 누가 찾아왔다고 알려 주었다. 권 씨는 그들과 종로 금란다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권 씨와 김민하는 황태성에게 그만 북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황태성은 “오늘 가서 만나보고, 확실히 김종필이 보낸 사람이면 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게.”라고 말했다. 

 

김민하와 권성릉은 오후 2시 금란 다방으로 갔다. 3명의 남자 신분증을 확인해 보니 중정 요원이었다. 그들은 광교 부근의 중앙정보부 3국으로 자리를 옮겨 황태성의 소재를 가르쳐 주고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날 김민하와 권성릉은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 그 중정 요원 3명은 다시 흑석동 김민하의 집으로 가서 횡태성을 동대문 서울 운동장 맞은편 고양군청자리에 있던 중정 3국 3과 분실로 연행했다. 황태성이 서울에 온 지 50일 만이었다. 

 

황태성은 수사관들에게 자기가 남한에 온 목적을 말하지 않고 “나는 간첩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다. 박정희를 만나게 해 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박정희를 직접 만날 수가 없으면 김종필이라도 만나겠다고 고집했다. 이 보고를 받은 김종필은 자신이 직접 만나면 그가 무슨 계략을 꾸밀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와 비슷한 용모를 가진 K 씨를 대신 만나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박정희를 만나서 황태성에 대해서 물었다. “황태성이라고 잘 아십니까?” 박정희가 한참 김종필을 쳐다보고 있더니, “그놈을 어떻게 아나?” 하고 되물었다. 김종필이 ‘잡아 놨습니다.” 하니 박정희가 “어떻게 잡았어”라고 물었다. 김종필은 그동안 정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그 뭔 얘기를 해?”하고 박정희가 물었다. 김종필이 “만나 뵙잡니다.”하니 박정희가 “내가 알지만 만날 수 있나. 만나서 되는 일도 아니고. 그래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러나?”라고 했다. 김종필은 자기가 법에 따라서 처리할 터이니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다. 


중정의 김 과장은 치안국에서 중정으로 파견 나온 박경감을 가짜 김종필로 분장시키고 황태성을 10월 22일 오후 2시에 반도 호텔에서 만나게 했다. 김 과장도 같이 있었다. 가짜 김종필 박경감은 황태성에게 “내가 시간이 있었으면 선생이 하시고 싶다는 말을 다 들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곧 국무회의가 열립니다. 내가 참석해야만 국무회의가 열릴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김 과장에게 모든 걸 다 말씀하십시오. 김 과장은 내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입니다. 기탄없이 아무 말씀이고 다 하십시오.” 황태성이 그에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호텔 방을 나가 버렸다. 방금 나간 박경감이 김종필이었다고 믿은 황태성은 김 과장에게 서울로 잠입한 목적을 상세히 밝혔다. 그 내용은 김민하와 권상릉의 진술과 다르지 않았다. 1961년 10월 24일 김민하와 권상릉을 간첩에 편의를 제공한 혐의로 체포했다. 김민하는 횡태성이 간첩이 아니며 자신이 당국에 신고를 했는데 왜 자기를 체포 했느냐고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1961년 11월 말까지 취조를 받고 12월 초에 육군고등 군법회의에 송치되면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반도호텔에서 조사를 받던 황태성도 간첩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의 독방에 갇혀 재판을 받았다. 이런 일이 진행되는 동안 황태성 사건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황태성은 비공개 군법재판에 회부되었다. 1961년 12월 27일 육군보통군법회의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민하는 징역 10년, 권상릉은 15년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모두 항소하였으나 김민하와 권상릉의 형량만 감소하였고 황태성의 사형선고는 변하지 않았다. 1963년 7월 2일 원심 법원이 사형을 선고하자 다시 상고했으나 기각되어 사형이 획정되었다. 1963년 12월 14일 인천 근교 어느 군부대에서 총살되었다. 그리고 사흘 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는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참고

1.   중앙일보, 1971년 3월 12일: 현대판 <내방가사집> 낸 조애영여사

2.   아주 경제, 2016년 7월 7일:  목당 이활의 생애, 대구 폭동 발발, 영찬까지 번져

3.   한겨레 고나무 기자; 나를 꼭 죽여야 했소?, 비운의 밀사 황태성 미스터리 5일

4.   김영재 교수와 함께하는 블로그 대학 2015.11.24.: 황태성 간첩사건

5.   유튜브: 이제는 망할 수 있다 43회: 박정희와 레드 콤플렉스; 황태성 간첩사건

6.   조갑제 TV: 김종필이 박정희에게 “황태성이라고 아십니까?” 

 


2. 5.16 쿠데타그 후 미국과의 갈등으로 인한 김종필과 박정희의 위기 


박정희와 존 F. 케네디(정부기록사진집)

“내가 재임 중 중앙정보국 해외 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5.16 쿠데타이다” 알런 W. 덜레스 미국중앙정보국 국장 1964년 BBC 인터뷰


사학자 김상구는 그의 저서 <5.16 청문회>에서 5.16 쿠데타는 미 군부 정보기관의 지원 아래 진행되었고, 쿠데타 후에 미국 중앙정보부, 미 국무성과 백악관이 승인했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2018.5.31; 미국 외교문서에 없는 5.16 쿠데타 기록;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아직 구체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5.16 쿠데타를 미국 정보기관이 지원했다는 깊은 의심을 살 만한 방증은 산재해 있다. 이와 같이 미국의 도움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군정은 시작부터 미국의 압력에 시달렸다.  16년 동안의 박정희 통치는 미국과의 협력과 대립으로 점철된다. 미국의 도움으로 대권을 장악했던 박정희는 결국 미국의 버림을 받아 제거되었다. 


미국은 쿠데타 2년 후에 민정으로 이양할 것을 박정희에게 요구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국의 대한 원조를 종단하겠다고 협박했다. 목숨을 걸고 거사를 일으켰던 쿠데타 세력에게 2년이란 집권 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쿠데타를 기획했던 김종필은 쿠데타 세력이 모두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되어 다시 정권을 재 장출하는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1961년 5월 20일, 5.16 쿠데타 나흘 만에 시국정화단을 개편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이 되었다.  그의 정보장교 경력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중정이 수사권을 가지게 되어 개인 사찰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군사정변 혁명공약 제3항은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품을 진작시킬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구악 대신 새로운 악과 부패를 만들어서 권력 연장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 공작에 김종필이 앞장섰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민간인으로 옷을 갈아입은 군인들의 당인 공화당을 창당하는 데 사용했다. 물론 여기서 떨어진 떡고물로 부정축재를 했다. 


김종필은 막강한 중앙정보부의 권력을 이용하여 4 대의혹사건을 일으켰다.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빠찡코 사건이다. 이중 가장 덩치가 큰 사건이 증권 파동이었다.  

중정이 앞세운 세력이 주식 시장에서 대량으로 주식을 사들이면 주식 가격이 올라간다. 일반 개미 투자자들은 이것을 보고 덩달아 주식을 사들인다. 주식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얼마 후 중정이 앞세운 세력은 대량으로 주식을 팔아 차익을 챙긴다. 주식 가격은 폭락한다. 개미 투자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커다란 손해를 본다. 


1962년 2월 한국 중권시장의 총 거래 대금은 85.4억 환이었다. 두 달 뒤인 4월에는 1,184.5억 환으로 늘어났다. 상장 주 가격은 한 달 사이에 4.6 배가 되었다. 중정이 앞세운 작전세력은 발행 물량이 적었던 증권금융주를 사들였다. 주식 가격이 5개월 사이에 435배가 되었다. 주가는 끝없이 올라서 5월 거래 대금 2,510억 환은 연간 국세 수입 2, 210억횐을 능가했다. 드디어 주식시장이 5 월말 증권거래소가 부도에 빠지면서 얼어붙었다. 주식매매를 약속한 거래 당사자가 매매대금을 치르지 못할 경우 증권거래소가 대신 결재를 해주어야 했는데 거래소의 자금이 바닥이 난 것이었다. 주식 거래 규모가 감당을 할 수 없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었다. 증권거래소가 문을 닫았다. 군정은 화폐발행액의 16%에 해당하는 280억 환을 긴급 지원하여 5일 만에 개장하게 했다. 5,242명의 개미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었다. 많은 투자자들이 자살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정은 최소한 20억 원의 차익을 챙겼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약 2,000억 원에 해당한다고 한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린 한국정세 보고서에는 “김종필이 한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증권조작을 통해 2,000만-3,000만 달러를 벌었다”라고 되어있다. 


증권파동은 한국경제에 큰 손상을 입혔다. 군사정부는 증권파동 직후에 돈의 가치를 10분의 1로 줄이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서 경제는 더 나빠지고 물가가 상승했다. 쿠데타 전 쌀한가마에 1,540원 하던 것이 1963년에는 4,400원이었다. 이 시기에 미국은 김종필 정계 축출을 군정에 요구하면서 양곡과 약속한 자금 원조를 일 부 보류하고 있었다. 김종필은 주한미군에게 휴양지를 제공하고 외화를 벌어들인 다는 목적으로 워커 힐 호텔 건설을 추진했다. “워커”는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끈 월튼 워커 장군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정은 연인원 3만여 명의 병력, 죄수 등을 동원하여 공사를 진행했다. 군 장비를 무상으로 가져다 썼다. 노동력과 장비를 무상으로 쓰고 예산에 잡힌 인력과 장비 비용을 정치자금으로 돌렸다. 무대장비, 시멘트 등을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명의로 관세 없이 수입했다. 관세를 물고 수입했을 경우와의 차액 150만 달러를 착복했다. 이외에도 산업은행의 특혜 융자와 건설 커미션, 워커 힐 공사장의 자제를 공화당 당사 보수에 쓰는 등 비리는 끝이 없었다. 미국 언론은 워커 힐 공사 비리를 대서 특필했다. 덕분에 주한미군 워커 힐 출입 금지 령이 내려 기대했던 외화벌이가 당분간 좌절되었다.

군사정부는 재일교포 재산반입을 명목으로 빠찡코 880여 대를 면세로 들여와 두 배 가격으로 도박업자들에게 팔아 이득을 챙겼다. 군정은 일제 승용차 2000대를 관세 없이 수입하여 두 배의 가격으로 택시 업자들에게 팔았다. 이를 새나라 자동차 사건이라고 한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희의 의장 박정희는 “혁명과업이 완수되면 2년 뒤 정권을 민간에게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 첫 수순으로 군사정부(군부)는 1962년 12월 17일 새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4.19 혁명 후 제2공화국 헌법이었던 내각제-양원제가 대통령 4년 중임제, 직선제와 국회 단원제로 바뀌었다. 5.16 쿠데타로 금지되었던 민간인들의 정치활동이 1963년 1월 재개되었다. 군부가 쿠데타 직후에 약속했던 민정이양의 절차를 밟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화대학 사학과 대학원 조한빛은 2022년 그의 석사 논문 ”1963년 군사정부의 민정이양과 미국의 개입”에서 미국은 군부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2년 뒤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을 약속받았다고 밝혔다. 


미국은 민정이양을 요구했지만 군정은 민정전환으로 장기집권을 하기 위한 준비에 바빴다. 권력의 사활이 걸린 판국에 국가경제나 민생은 2차적인 문제였다. 1963년 1월 5일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를 위해서 중정부장직을 사임하고 예편했다. 


김종필과 군정이 민간인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민간인이 되어 정권을 이어가려 하는 공작에 반대하는 세력이 군정 내에 생겼다. 따라서 이들은 군정 세력의 공화당 창당을 반대했다. 육사 5기 중심의 장군들이었다. 이들은 “창당 조직에 사상적으로 불순한 사람들이 있고, 창당 주도자들이 혁명 주체를 대우하는 자세가 안 되어 있으며, 창당에 불순한 자금이 사용되어 있다”라고 김종필 계를 비난했다. 반 김종필 세력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최고회의 국방위원장 김동하, 문교 사회위원장 김재춘, 교통체신위원장 김윤근 등이었다. 김동하는 공화당 조직이 공산당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최고위원직에서 사퇴했다. 


김동하는 쿠데타 당시에 서울을 장악했던 인물로 함경도 계 쿠데타 세력을 이끌었다. 김종필이 남한 출신 군부세력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 김종필 선언은 한경도 계의 남한 출신 군부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김동하의 사표가 수리되자 미대사관은 군부 세력의 분열로 인해서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의 보류, 계엄령 부활, 군의 무력 충돌 등을 우려했다.  일본 외무성 조사관 마에다 도시카즈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한국말에 능숙한 한국 통이었다.  주일 미국대사관은 그로부터 김동하가 자신의 계파를 리드할 정도로 군내부의 단단한 세력이라는 정보를 받고 있었다. 주한 미국대사 사무엘 데이비드 버거(Samuel David Berger)는 박정희에게 만약의 경우에 미 8군 사령관 멜로이(Guy S. Meloy Jr)도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에게 있었기 때문에 미군의 직접개입이 아니고 전방 부대를 제외한 한국군의 동원을 의미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미 8군 사령관 멜로이의 미군 합참의장 테이러(Maxwell D. Talyor)에게 보낸 편지는 수도방위 사령부의 역할을 거론하고 있다. 즉 두 세력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이 병력 동원 태세를 보여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비대해져 가는 김종필 계의 세력에 반기를 든 것은 군내의 세력뿐만이 아니었다. 야당 세력 또한 이에 합세했다. 이들은 미국 측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개입하여 김종필 세력을 제거하고 정국의 안정을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1963년 1월 8일 전 국무총리 백두진이 미 대사관 정치 담당 참사관 하비브(Philip C. Habib)와 2등 서기관(Gregory Handerson)을 만났다. 그는 미국의 원조를 레버로 군정을 압박하여 민정이양을 실시하게 하라고 종용했다. 백두진은 또한 당시 상공부 장관 유창순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미국 측에 알렸다. 그는 4대 의혹 사건이 멀어지고 있는 동안 한국은행 총재였다. 금융계의 질서를 무시하고 한국 경제를 망가트리는 김종필과 군정이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김종필의 중정은 산업은행 재조직을 추진했는데 그는 이를 반대했다. 그 후 유창순은 무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 1월 29일 당시 해군 참모총장 이맹기가 미 대사관 주재 무관 듀이(W. H. Dewey)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는 김종필이 반대파와 타협할 용의가 있으나 자신의 계파가 크게 반발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미국 측이 개입하여 군정의 민정 이양 개입을 말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난 사실은 김종필이 자기 계파를 완전하게 통솔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한국은행 조사국제부 국장 정원훈이 미 대사관 컨트리 팀장 로사(Joseph Rosa) 롤 만났다. 컨트리 팀은 대사관 국무부 분과의 장들의 모임을 말한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만나서 분과와 요원들의 정보와 활동을 조율한다. 이 자리에서 한국 경제의 당면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정원훈은 쌀부족과 쌀값의 급등이 가장 시급하다고 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 지만 요인은 쿠데타 이후 미국이 민정이양과 군정의 경제정책 수정을 관철하기 위해서 대한 원조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군정은 이미 미국에 추가 농산물 원조를 긴급 요청하고 있었다. 로사는 김종필 계와 반 김종필 계의 갈등이 해소되어 정국이 안정되고 민정이양이 이루어질 전망이 보이면 7,500만 달러의 원조와 70만 톤의 곡물을 한국에 보내 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 정원훈은 김종필의 형 김종락이 김종필의 권력과 유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쿠데타 후 한일은행 대리였던 김종락은 이사가 되었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김세련은 한국은행이 가지고 있던 외환업무를 한일은행으로 넘기려 한다고 로사에게 알렸다. 말하자면 한일은행을 외환은행 담당 국책은행으로 만들어 정부가 사실상의 외환업무를 당당하게 하려는 공작이었다. 

 

송효찬은 김종필과 같은 충남 출신이다. 송효찬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지원하여 육군상사까지 진급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1기로 졸업하고 5월 1일 육군소위에 임관되어 대한민국 장교로서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1948년 2월 소령으로 진급하고 1948년 7월 9 연대장으로 임명되어 4.3 사건 진압에 참여했다. 중장으로 진급한 그는 1959년 8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인한 반정부 시위로 사회가 불안해 지자 서울지역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19 혁명 당시에 미 대사관 측과 협조하여 이승만에게 하야를 종용하는 등 사태수습에 일조하였다. 1960년 5월 육군참모총장직을 사퇴하고 1년간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61년 5월 그가 워싱턴 D.C를 방문하는 중 5.16 쿠데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쿠데타 직 후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장, 외무장관을 거쳐 7월 3일 내각수석장관(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1962년 3월에는 경제기획원장이 되었다. 1962년 증권파동이 일어나자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대립했다.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에 반대했다. 이는 김종필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6월 17일 내각수석장관직과 경제기획원장관직을 사임하고 정당 창당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혁명공약 중 “정권을 민간 정치인에게 이양하고 군대로 복귀하겠다”는 조항을 이행하라고 군정에 촉구했다. 

1963년 1월 30일 송효찬이 하비브와 만났다. 송효찬은 박정희와 김종필이 공산주의적인 조직을 만들고 있다고 폭로했다. 당시에 김종필은 공화당 창당 준비 작업으로 재건동지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사실 재건동지회의 구조는 북한 공산당 조직과 비슷했다. 최고 결정기관은 15명으로 조직된 당 의회였다. 이들이 입안한 당 정책을 1,300명의 당 비서실 직원이 집행했다. 중앙 지휘부에서 훈련된 당원이 말단까지 배치되어 당무를 통제했다. 김종필을 반대하는 장성들은 재건동지회가 공산당식 밀봉교육을 받았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미국 측은 김종필계가 친공적인 배경을 가진 반미적인 강경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 김종필 계인 김재춘 등을 친미세력이라고 믿었다. 미국은 친미온건파 편을 들어 김종필을 제거하여 박정희를 친미적으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김종필계를 한국 정치 혼란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 불온한 세력으로 보고 있었다. 


김윤근은 황해도 출신으로 만주국 신경군관학교 제6기이다. 1947년 7월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지만 해방이 되어 졸업하지 못했다. 해방 후 해군사관학교와 미국 해병대학을 졸업하고 해병에서 경력을 쌓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에 해병 제1여 단장이었다. 그는 해병대 병력으로 동원하여 박정희와 함께 한강다리를 건넌 쿠데타 주역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교통체신위원장, 부정축재자 처리위원, 헌법개정 심의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중장으로 예편했다. 


송효찬이 다녀간 다음날 1963년 1월 31일, 김윤근이 하비브를 찾아왔다. 그는 이미 미대사관이 지난 몇 주 동안 군사정부 동향 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김종필이 한국의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혁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중앙정보부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중앙정보부가 김종필을 통해 혁명을 탈취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종필이 영구 집권을 위한 당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자신과 동료들이 너무나 군인  더워서 김종필과 대립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국가재건최고위원 이주일과 채명신도 박정희에게 김종필의 횡포를 직언했지만 이것이 김종필에게 알려져 그들이 오히려 위협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대사관은 김윤근의 폭로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이 김종필 주도로 움직이는 민정이양을 좋지 않게 보는 동안 정치활동정화법 규제가 풀리고 민간인 정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군부세력 반김종필계뿐만 아니라 야당, 민주진영의 민간인 인사들도 미 대사관을 찾았다. 


1963년 2월 4일 전 농림부 차관 주석균과 월간 사상계의 경제부 편집위원 김영록이 미 대사관 사람들과 만났다. 그들은 2웗에 군정이 개정한 선거법이 공화당에게 만 유리하게 되어있다고 주장했다. 무소속 출마를 허용하지 않고 모든 후보가 정당의 공천을 받도록 되어있었다. 또한 당선된 후에 당을 옮기거나 탈당하면 의원직을 내놓아야만 했다. 모두 소수당에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대사관측은 이러한 군부의 태도가 용공이나 비민주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동년 2월 6일 장면이 하비브를 찾았다. 그는 케네디의 이름으로 박정희의 정계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을 낼 것을 권고했다. 미국 측은 내정간섭이라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장면은 또한 김종필이 이승만 때와 같은 부정선거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년 2월 11일 하비브는 전 과도정부 수반 허정과 만났다. 박정희의 사퇴 선언 일주일 전이었다. 미국은 그가 윤보선과 경쟁할 야당 대권 후보가 되기를 원했다. 하비브는 두 달 전에 허정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 하정은 민간인에게 정권이양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그때 하비브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었다. 허정은 이를 상기시키면서 박정희와 김종필을 분리시켜서는 안정적인 정권이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동반 퇴출을 의미했다. 그는 김종필은 정계는 물론 나라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하비브는 허정의 말을 귀담아듣고 미국이 개입하여 군인들의 민간 정권 장출을 막아서 한국에 민주적인 민간 정권이 들어서게 해야 겼다고 결심한다. 이는 하비브 개인의 결심이 아니라 미국무부의 방침이 되었다. 미국은 드디어 김종필 제거의 수순을 밟기 위해서 비밀리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준비했다. 


1962년 2월 13일 허정과 하비브가 만난 지 이틀 후 박정희의 비서실장 이동원이 버거를 찾아왔다. 박정희가 14일 아니면 1일에 정계은퇴를 발표할 터인데 미국 측에서 박정희가 정계은퇴를 하지 않도록 나서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이미 최고회의에 민정 불참의사를 밝혔고 허정에게도 그렇게 말한 후였다. 

1963년 2월 18일 박정희는 정국 수습을 위한 9개 방안과 함께 민정 불참을 발표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1962년 2월 25일, 김종필이 모든 직책에서 사퇴하고 외유에 나섰다. 지금까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항간에 알려진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1963년 2월 17일 밤, 박정희의 민정불참 발표 하루 전날, 국방부 장관 박병권, 육군참모총장 김종오, 공군참모총장 장성환, 해군 참모총장 이맹기, 해병대 사령관 김두찬 5명의 대한민국 군 최고 지도자들이 박정희를 방문하여 민정에 참여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박정희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날 민정 불참을 발표했다. 김종필은 박정희의 민정 불참 발표 후 사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출국했다. 


당시에 4대 의혹사건과 화폐개혁으로 한국 경제가 어려웠다. 한국의 2월은 춘궁기였다. 양곡이 부족했다. 군정은 미국에 추가 원조와 추가 양곡 지급을 요청했다. 미국은 김종필계 축출을 담보로 이 두 가지 경제원조를 보류했다. 1962년 2월 한국의 경제는 더욱 나빠졌다. 군인들이 민간인이 되어 장기 집권하려고 저지른 불법적인 사건들이 나라의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는 반 김종필계의 주장을 뒷 받침 해 주었다. 그래서 미국은 내정 간섭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김종필계 축출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군 지도자들이 직접 나서서 박정희에게 민정 참여를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힘은 유사시 군 동원력이었다. 반 김종필계는 주로 김동하의 함경도계 군 장성들이었으며 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병력이 김종필계 보다 월등하게 많았다. 더구나 군내부에서 김종필에 대한 반감도 팽배해 있었고 육사 8기에 대한 신뢰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1963년 2월 17일 밤 국방장관 외 4명의 군 지도자들이 박정희와 만나고 있을 때, 박정희가 김종필을 체포하라고 명령할 것에 대비하여 방첩대에 비상이 걸렸고, 수도 방위사령부 부대 일부는 한강대교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김종필 체포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고 무력 충돌은 없었다.  


1963년 2월 18일 오후 박정희는 자신의 민정 불참과 4대 의혹사건의 진상 조사를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발표 중 눈물을 닦는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그의 진정성을 보였다. 미국 측은 이를 환영하는 논평을 했다. 

물론 김종필은 자신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에 저항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박정희와 상의하여 반대 세력인 죄고위원 몇 명을 제거하고 2월 22일까지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교체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주한 미국 대사 버거를 내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김종필은 1963년 2월 14일 버거가 자신과 만난 자리에서 유사시 원조 2,500만 달러와 추가 곡물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었다. 주일미국대사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가 일본 언론에 보도된 이 사실을 버거에게 알려 주었다. 크게 화가 난 버거는 김종필에게 항의했다. 김종필은 국민에게 자신이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그만이었다. 

김종필은 1963년 2월 20일 공화당 탈당을 발표했다. 2월 25일 그는 순회 대사 자격으로 혁명의 역사를 가진 8개국에 유명한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을 남기고 외유를 떠났다. 


1963년 2월 27일, 김종필이 한국을 떠난 지 이틀 만에 각 정당 및 정치지도자 27명과 국방부 장관을 비롯하여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 등이 모여 ‘정국수습선서와 선서식’을 거행하여 박정희의 2.18 성명을 수락했다. 박정희는 이 자리에서 민정 불참 약속을 재확인했다. 그는 “나는 대통령에도 출마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병권 국방 장관과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은 이를 확인하는 의미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2,322명의 구정치인이 정치정화법에서 해제되었다. 미국 측도 박정희와 군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환영했다. 경제적으로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물가 압력과 사재기가 완화되고 시장에서 쌀을 구 할 수 있었다. 시민과 언론은 박정희를 믿고 대환영했다.

김종필이 외국으로 나갔다고 해서 김종필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정권 연장을 포기한 박정희를 계속해서 압박했다. 한편 버거는 박정희에게 힘을 실어 주어 민정 이양이 순조롭게 이루 지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1963년 3월 11일 중앙정보부가 반 김종필계 군 요인들을 체포했다. 김동하를 비롯하여 전 건설부 장관 박임항, 전 육군 헌병감 이규광, 전 혁명검찰부장 박창암 등 20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구정치인 정치정화법 해제에 불만을 품고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쿠데타 음모를 했다는 혐의였다. 세칭 반혁명 사건이었다. 

그런데 미 대사관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전 육군 헌병감 이규광이 군정에서 군에 심어놓은 밀정이었다고 한다.  그의 공작에 의한 쿠데타 음모라는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1963년 8월 10일, 이규광, 박임항, 예비역 대령 정진 3명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4년 5.16 기념 특별 사면으로 감형되었고 1969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1963년 3월 14일 밤 춘천에서는 박정희의 출마를 요구하는 전단이 살포되었다. 3월 15일에는 최고회의 청사 앞에서 군인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자칭 혁명동지회 소속이라고 했다. 그들은 쿠데타 음모자들을 극형에 처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을 연장하고, 국방부장관을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미 대사관은 박정희가 2월 성명을 둘러엎기 위해서 사주한 관제 데모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후에 박정희 경호실이 조작한 시위였음이 밝혀졌다. 

박정희가 다시 군정연장을 획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관찰한 미국은 다시 원조 보류 카드를 만지작 꺼렸다. 1963년 3월 15일 저녁 버거, 하비브, 멜로이, USOM 처장 킬렌(James Killen), 김재춘, 김종오, 이동원이 모인 회합에서 박정희가 며칠 안으로 군정연장을 발표할 것이라고 비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버거는 원조 보류를 하려고 했다. 


1963년 3월 16일 오후 박정희는 군정 4년 연장을 국민투표로 묻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민 투표로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예정대로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임시조치법을 공포하여 정당활동을 정지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일 부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제야 정치인들과 언론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이때 김종필은 파리에 있었는 데 훗날 김재춘은 3월 초 그가 원격으로 매일같이 당문제를 조종했다고 말했다. 미 국무장관 러스크는 박정희의 3.16 성명에 크게 노했다. 

러스크는 주한 미국대사 버거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대사는 즉시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박의장에게 더음과 같이 알리라. 미국정부는 (A) 4년간의 군정 연장에 찬성할 수 없으며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있다. (B) 1961년 11월 14일에 발표한 케네디 대통령과의 공동성명은 물론, 박의장이 했던 반복된 약속을 어긴 것으로 간주한다. (C) 이런 식의 행동은 세계여론의 비난을 받을 것이다. … 한국인들의 비난이 예상된다. (D) 박 의장 정부에 대한 지원의 정도 및 내용을 불가피하게 매우 근본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E) 박 의장이 자신의 결정을 바꾸길 바라는 마음으로 당분간 공개 논평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버거는 러스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했다. 미국이 박정희에 대한 반대 입장을 섣불리 표명하면 거리의 데모가 심해질 우려가 컸다. 실제로 소요를 우려한 군 지도자들은 3.16 성명 직후 미대사관에 미국의 공식성명을 아직 내지 말라고 부탁했다. 

일본 측 또한 미국의 자제를 요구했다. 한국의 정국이 불안해지면 한일 회담이 지연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여러 야당은 공동 전선으로 군정 연장에 반대했다. 학생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사태가 심각해 지자 박정희는 3월 19일 구 정치인들이 사퇴하면 의견을 번복할 용의가 있으며, 3.16 성명을 월말까지 보류하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 발표에 야당은 물론 군정연장 지지 세력도 반발했다. 

외신에서는 박정희 암살 계획이 가동되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결코 낭설이 아니었다. 미 대사관은 많은 정보원을 통해서 박정희 암살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미국의 압력이 들어오고 국내에서 반대여론이 높아지자 박정희는 미국 대통령 케네디에게 “군정연장을 위한 국민투표 제안은 완전한 민정이양을 위해 혁명 정부가 불가피하게 취한 과도적 조치였다”는 내용의 공식 서한을 보냈다. 

미국은 이에 대한 공식성명을 발표하기 위해서 주한 미국 대사 버거와 국무부 장관 러스크 사이에 의견조율이 있었다. 러스크는 분명하게 미국이 원하는 것을 나타내고 듣지 않으면 경제제재를 강행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버거는 미국이 노골적으로 박정희에게 반대하고 야당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면 정국이 혼란해질 것을 우려하여 암시적으로 미국의 의견을 표현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반영된 미국의 공식 성명이 나왔다. 1963년 3월 25일, 미국무부는 박정희의 군정연장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4년의 군정연장은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정치에 위협이 될 수 있으며 수용이 가능한 민정이양절차가 강구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버거의 제안대로 미국이 받아들이기 힘든 민정이양절차는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정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암시적”인 표현을 썼다. 그러나 경제 제재는 러스크가 원하는 대로 강경했다. 춘궁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정이 요구한 2,500만 달러의 원조는 사실상 거부되었다. 케네디의 특별자문기관인 클레이 위원회는 한국군 20만 감축과 1967년까지 1억 2,000만 달러의 원조를 삭감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3월 6일 성명 발표가 미국, 야당, 국민의 반대에 부딪히자 박정희는 월말까지 성명을 보류하고 해결책 마련에 몰두했다. 그리고 궁여지책으로 발표된 안이 군민이 참여하는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군정을 2,3년으로 단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야당은 겉치레로 민정이양을 하는 척하면서 사실상 군정을 연장하려는 군정의 계략이라고 일축했다. 

버거는 야당과 박정희에게 막후에서 야당과 협상할 것을 권고했다. 제야 양대 당의 당수 허정과 윤보선, 박정희에게 시국 수습을 위한 예비회담을 제의했다. 3월 30일 박정희, 허정, 윤보선 3자 영수 회담이 청와대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박정희는 ‘부패한 정치인들의 사퇴와 과도정부’를 고집했다. 결국 두 번 이루어진 영수 회담은 아무 결실 없이 헤어졌다. 

그런데 3월 31일 케네디의 답신이 도착했다. 한국 정부와 지도자들이 민정이양 절차에 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 토의를 계속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답신의 주된 내용은 버거가 작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버거는 이미 이 답신을 가지고 있다가 2차 회담의 결과를 보고 공개했다. 


4월 1일 마지막 3차 영수 회담이 열렸으나 아무 진전이 없었다. 버거는 결국 군정이 군정연장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사태에 대해서 논의했다. 버거는 만약 군정이 국민투표를 강행할 경우에 군정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성명을 발표하지 않고 관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 자체적인 시위나 쿠대타로 국민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국무장관 러스크는 국민투표애 반대한 다는 분명한 미국정부의 강경한 입장을 담은 성명을 원했다. 


그런데 다행히 군정 내부에서 국민투표 강행이 무리라고 생각하고 국민투표를 시행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최고회의는 국민투표 대신에 다섯 가지 대안을 마련했다. 4월 2일 이동원이 이 대안을 가지고 버거를 찾아왔다. 5개 안을 두 개로 압축해 보면, 1963년 12월 26일이라는 헌법적 기한 내 민정을 구성하기 위해 1963년 말에 선거를 실시하는 것과 군정연장을 묻는 국민투표를 철회하지 않고 보류하는 것이었다. 

버거는 박정희가 국민투표를 철회하지 않고 영구 보류함으로써 민정이양의 과정에서 사태가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경우에 탈출할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하려는 술책이라고 믿었다. 미국 측은 국민투표 보류에 반대했고 연말 선거를 통한 민정이양을 선호했다. 국무성은 군정의 국민투표 보류에 대한 미국의 지지 여부 결정을 버거에게 맡겠다. 


1963년 4월 5일 내각 수반 김현철과 농림부 장관 유명현이 버거와 만나서 조만간 군정이 국민투표 보류를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현재 군정 인사의 대부분이 군정의 연장보다는 올해 말 선거 실시를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정 연장을 지지하는 일부 강경파들의 공세를 우려하여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버거는 박정희의 국민투표 보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만약 버거가 박정희의 손을 들어 국민투표에 찬성한다고 하면 군정의 군정연장을 인정해 주는 사인으로 오인할 수 있었다. 한편 야당에게는 민주적 선거를 통한 민정이양 약속을 어기게 된다. 

그렇다고 무조건 국민투표 보류를 반대할 수도 없었다. 미국이 박정희에게 압력을 넣는 다면 반박정희 세력에게 박정희 제거의 암시를 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의 손으로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서 박정희가 제거될 우려가 있었다. 버거는 침묵했다. 


1963년 4월 8일 박정희는 군정연장을 위한 국민투표를 9월 말까지 보류한다는 내용의 시국수습긴급조치를 발표했다. 국민투표를 할지 총선거를 할지는 9월에 회담하여 결정하겠다고 했다. 미 국무부는 정계의 명확한 반응이 나올 때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당분간 미국의 개입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박정희는 4.8 성명 발표 직 후 민정이양을 약속했다. 군정과 야당은 선거준비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5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7월 27일, 민정 이양일을 공식 발표했다. 대선은 10월, 총선은 11월에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박정희는 8월 30일 군에서 전역했다. 전역식에서 그는 “다시는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말을 하면서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8월 31일 정식으로 민주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10월 15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7명의 야당 후보는 단일화에 성공하여 윤보선 후보가 야당의 유일한 후보로 박정희와 대결했다. 대선 동안에 김종필은 미국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선 후 귀국하여 11월 총선에 출마 지역구인 부여에서 63%라는 전국 최고의 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 9월 22일 오후, 윤보선 후보의 유세가 여수에서 열렸다. 윤보선은 목포에서 첫 유세를 시작하여 그날 오전에는 광주에서 유세를 마치고 오후에 여수에 도착했다. 찬조연사로 윤제술 씨가 등단했다. 전북 김제를 지역구로 가지고 있던 국회의원이었다. 1963년 총선에서 서울 서대문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었다. 연설이 끝나갈 무렵 연단 뒤쪽에 있는 야산을 오른손으로 가리키며 “종고산아, 너는 알고 있다. 종고산아, 말해다오. 너는 분명 알고 있다. 종고산아, 말해다오”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아무도 그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몰랐다. 다음날 “종고산”이라는 말을 실은 신문은 하나도 없었다. 


유세팀은 그날 야간열차를 타고 전주로 향했다. 열차 안에서 기자들이 윤제술을 웨어 싸고 “종고산아 말하라”는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잘들 생각해 봐요”하고 답을 피했다. 

다음날 아침 10시, 돌연 윤보선 후보는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윤보선은 10여 명의 기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박정희 의장은 라디오를 통해 구정치인과 자기와의 대결은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의 대결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 운을 띄운 다음 약간 흥분된 어조로 “누가 민족주의자며 누가 비민족주의자란 말인가? 누가 민주주의 신봉자며 누가 민주주의 신봉자가 아니란 말인가? 누가 공산당이며 누가 공산당이 아닌가?”라고 반문한 다음, “이에 대한 해답은 각자의 경력을 캐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박정희가 알고 보면 공산당이라는 암시를 했다. 윤보선은 이어서 “어제 여수에서 강연할 때 여순 반란사건 관련자가 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여순반란사건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신봉자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윤보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의장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 ‘박의장이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그의 저서에서 ‘서구의 민주주의가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나 나세르를 찬양하고 히틀러를 쓸만한 사람이라고 추켜올린 것을 볼 때 그렇다”라고 박정희를 실낱 하게 비판하고 “여순반란 사건은 당시 정부와 애국하는 여수 시민이 진압했기 때문에 오늘날 군정 하에서 라도 부족한 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어제 윤제술의 ‘종고산아 말해다오, 너는 알고 있다.’의 종고산이 알고 있는 것은 박정희가 여순사건을 일으킨 공산당이었다는 뜻이었다. 박정희는 공산당이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여순사건 당시에 진압군은 여수 주위에 있는 구봉산, 장군산, 종고산에 박격포를 설치하고 시내의 반란군을 향하여 포탄을 퍼부었다. 

언론은 윤보선의 전주 폭탄선언을 톱기사로 보도했다. 이로 인해서 선거는 사상논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선거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유권자들이 드디어 흥분하기 시작했다. 


최고회의는 긴장했다. 긴급 소집된 최고회의는 이후락 공보실장을 통해 “윤보선 씨의 발언은 선거운동에 관한 발언이기보다는 국가안보에 관한 중대한 문제이니 만큼 최고회의는 비상한 관심으로 그의 발언내용의 진위를 파악하고 있다. 너무나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논평하지 않겠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공화당의 서인석 대변인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사가 매카시즘의 악랄한 수법을 쓰게 됐다는 것은 선거분위기를 극도로 해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최고회의도 공화당도 박정희의 여순사건 관련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윤보선 선거 본부는 박정희가 군내 남로당원으로서 여순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확보해야 했다.  공화당 측에서 증거 제시를 요구할 것은 뻔한 이치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윤보선 선거 본부 임시 대변인이었던 김준하 씨는 동아일보사에 가서 여순사건 관련 기사를 찾았다. 그런데 1949년 2월경 군법회의 기사는 보관지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시립도서관에 가서 여러 신문기사를 뒤졌다. 서울 고등 군법회의의 박정희 소령 판결에 관한 기사가 실린 지면은 모든 신문에서 한결 같이 없었다. 국립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군정은 용의주도하게 박정희 여순사건 관련 증거를 없애고 있었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모든 신문사를 찾아 여순사건 당시 박정희 군법회의 판결에 관한 기사를 찾았다. 결국 경향신문사와 서울 신문사에서 서울 고등 군법회의에서 박정희가 무기 징역을 언도받았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9월 25일 이리(익산) 유세에서도 윤보선은 ‘박정희 의장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봉을 의심한다’고 했다. 이에 격노한 공화당은 윤보선을 허위 사실 유포죄와 후보자에 대한 비방죄로 고발했다. 이러한 공화당의 위협에 야당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민정당의 김영삼 임시대변인은 “그러한 위협에 놀라지 않겠다. 그만한 정치적 발언은 선거 기간 중 대통령 후보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공화당이 이를 고발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반박했다. 민주당의 김대중 대변인은 “정부 안에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있다. 박의장의 사상을 의심한다는 내용은 중대문제로서 그 진상이 국민 앞에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서울 교동국민학교 교정에서 재야 6개 정당의 공명선거 투쟁위원회가 주최하는 시국 강연회가 열렸다. 자민당 위원장인 김준연 씨가 연단에 오르더니 1961년 5월 26 일자 미국 주간지 타임지의 박정희 관련 기사 내용을 폭로했다. 

“박정희 소장은 1948년 군 반란을 음모하는데 일부 관련된 사실이 있다. 그래서 …. 그는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 동료 상관들의 구명 운동으로 석방됐다. 지금 그는 … 반공주의자로서 육군의 작전참모직에까지 올랐다. 박장 군은 정부의 부패에 불만을 품고 지난해 일찍이 봉기를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학생 의거로 이승만이 추방됨으로써 그의 계획은 일단 좌절됐다.”


박정희 소령은 여순사건 당시에 육사 1 중대장이었다. 여순사건 토벌에 차출되어 광주에 내려갔다가 육사로 돌아온 직 후인 1948년 11월 11일에 체포되었다.  당시 숙군 작업의 실무를 담당했던 김창룡은 군내 남로당 조직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김태선 서울 시경국장이 이승만에게 넘긴 명단과 한국군내 남로당 구책 이재복의 비서 김영식에게서 얻은 명단이었다. 이재복은 12월 27일에 체포되었다.  항간에 알려지기는 박정희가 털어놓은 명단 때문에 군내 남로당원들이 일망 타진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박정희를 풀어 주기 위한 명분으로 마치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명단을 넘겨주어 군내 남로당을 다수 체포할 수 있었던 것처럼 포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하여 군내 남로당 활동을 하게 된 동기는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 이재복의 포섭이었다. 과연 이재복은 누구였을까?

이재복은 1906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안동 협동학교,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교토 도시샤 중학 4학년에 입학하여 1928년 3월에 졸업했다. 같은 해 5월에 일본 이와테현 모리오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가 부족해서 9월에 그만두었다.  1930년 4월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신학부에 입학했으나 1932년 2월 자퇴하고 귀국했다. 

고향에 돌아온 이재복은 좌익 노동운동에 몰입했다. 대구노동자협의회를 결성하고 서기장을 맡아 정리부, 종교부, 소년부를 담당하였다. 잡지를 발간하여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 자본주의 타도,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2월 대구노동자협의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았다. 

이재복은 목회 활동과 목사까지 지낸 일제 강점기의 중견 기독교인이었다.  1936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고, 1937년에는 대구기독교청년회 이사, 1942년 애락원 원목을 역임했다. 1944년에는 영천교회 목사였는데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영천지교구장이 되었다.  1945년 2월 24일 친일 조직인 조선전 시종교보국회 경상북도지부의 이사였다. 

그러나 해방 직전에 여운형이 광복 후 일본으로부터의 수권을 준비하기 위해서 조직했던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건국동맹이 건국준비위원회로 바뀌면서 이재복은 자연히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했다. 박헌영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바뀌면서 1945년 10월 경북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 보안부장이 되었다. 12월에는 조선인민당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6년 10월 항쟁에 참여했다. 여순사건 당시에는 남로당 특별공작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때 이재복은 17만 원의 현상금이 붙어 수배되었다. 이재복은 1948년 12월 28일 밤 3시에 서울 신당동에서 난투극 끝에 김창룡에게 체포되었다. 1949년 5월 29일 그는 국방경비법위반으로 총살되었다. 


박상희는 황태성의 중매로 조귀분과 결혼하여 큰딸 박영옥을 낳았다. 박영옥이 김종필의 아내가 되었다.  그 후 딸 넷을 줄줄이 낳았다.  1947년에 박상희가 10월 항쟁 때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후에 고대하던 아들 박준홍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준홍 씨의 본래 이름이 재복이었다고 한다. 이재복의 이름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박상희와 이재복은 분명히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까웠는지는 자료가 없어서 잘 알 수가 없다. 박상희가 갑자기 죽은 후에 이재복은 박상희의 집안일을 성심껏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박정희는 그를 숙질(삼촌)이라고 하며 따랐다. 


박정희는 경북 선산에서 1917년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8남 2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첫째는 두 살 때 사망했고, 둘째 박동희, 셋째는 박무희, 넷째는 누나 박귀희, 다섯째가 박상희, 여섯째 박한희(13세 때 사망), 다음이 박정희였다. 박정희 밑에는 여동생 박재희가 있다. 

박정희의 여동생 박재희는 아버지가 벼슬을 하려고 전답을 팔아서 한양에 자주 올라갔는데 이때 가산을 많이 날렸다고 증언했다. 매관매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성행했던 조선 말엽을 상기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박정희는 부친이 정 9품 효력부위라는 벼슬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박성빈은 20대에 동학교 접주가 되어 동학 농민운동에 참여했다. 관군에 체포되어 죽울 고비를 넘기고 석방되었다. 그 후 박성빈은 술로 세월을 보내는 한량이 되어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결국 가산을 탕진했다. 생계는 어머니 백남의 몫이 되었다. 백남의는 자신의 부모가 사는 구미 상모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경북 선산군 상모동의 집안 선산에 딸린 위토를 소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너무나 힘들었다. 이를 메꾸기 위해서 박성빈은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대지주 장승원의 집을 출입했다. 그 인연으로 아들 박무희가 장승원의 땅 다섯 마지기를 소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승원의 아들이 유명한 장택상이었다. 박정희 가족들은 둘째 무희가 지게에다 논밭 빌린 삯과 마름에게 줄 뇌물 씨암탉을 지고 장승원의 집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1932년 3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대구사범에 응시했다. 당시에 교사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업이어서 사범학교 들어가려면 무척 공부를 잘해 야했다. 셋째 형 박상희도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박정희는 합격하여 1937년 3월 25일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4학년 담임을 맡아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교사였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재학시절인 1936년 4월 1일 아버지의 강요로 3살 연하의 김호남과 결혼했다. 박정희는 김호남을 무척 싫어했다. 서로 거의 얼굴을 보지 않으며 지내다가 1950년에 이혼했다. 


교사 생활을 하던 박정희는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했다. 만 23세에 1차 지원을 했으나 나이 초과로 서류전형에서 탈락되었다. 2기에 재 지원할 때는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아라는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했다. 당시에 군에 지원한다든가 이와 비슷한 일에 젊은이들이 혈서를 쓰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1940년 1월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신경 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신경은 현재 장춘이다.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1932년 3월 1일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본은 만주를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대륙 침략에 필요한 모든 인력을 공급하기에는 부족했다. 만주에 사관학교, 행정학교 등 확장된 영토를 지배할 인력을 공급할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또한 조선인을 내국 일본인과 같은 황국신민화하여 전쟁에 필요한 인력 조달을 하려 했다. 1940년부터는 한국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은 숨이 막혔고 기회가 많은 만주가 그들의 희망이었다. 박정희도 개인적인 포부, 가난, 불편한 결혼생활에서의 탈피 등의 이유가 있었겠 지만 만주에 대한 동경과 군인 되고 싶은 욕망이 그를 만주로 가게 했을 것이다. 


만주군관학교 입학은 그가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반이었다.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봉천 군관학교와 신경 군관학교는 대한민국 국군, 군사정권, 보수세력 인맥의 원천이 되었다. 만주에 세워진 최초의 군관 학교는 봉천(펑톈)의 2년제 만주국 중앙훈련처였는데 흔히 봉천군관학교라고 부른다. 1932년에 설립되어 1939년 신징(신경)에 4년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신징군관학교)가 생기면서 해체되었다. 봉천군관학교 출신 중 괄목할 만한 인물은 4기에 김응조 육군준장(국회의원), 5기에 김백일 육군 중장, 김석범 해병대 중장, 김일환 육군 중장(교통부장관), 송석하 육군 소장, 신현준 해병대 중장, 정일권 육군 대장(국무총리), 6기에 양국진(육군중장), 8기에 석주암 육군소장, 9기에 백선엽 육군대장(교통부장관)이다. 신징군관학교는 1기에 김동하 해병대 중장, 박임항 육군 중장(건설부 장관), 방원철 육군대령, 윤태일 육군중장(국회의원), 이기건 육군준장, 이주일 육군대장(간사원장) 2기에 박정희 육군 대장(대통령), 이한림 육군 중장, 3기에 최주종 육군 소장, 강태민 육군준장 5기에 강문봉 육군 중장(국회의원), 6기에 김윤근 해병대 장군이 있다. 


1942년 3월 박정희는 신징 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생은 모두 240명이었다. 만주국 황제 푸이는 박정희에게 금시계를 하사했다. 1942년 10월 1일 박정희는 일본육사에 입학했다. 1944년 4월 졸업생 300명 가운데 3등으로 일본육사 제57기를 졸업했다. 1944년 7월 열하성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도 같이 근무했는데 이들은 5.16 쿠데타 동지가 되었다.  


박정희가 소속되었던 보병 제8단은 중국 공산당 군대인 8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상대로 싸웠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1944년에 만주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선독립군은 없었다. 화북지방의 조선독립군인 조선의용군도 8이로군 소속으로 전투에 임했다. 설령 8로군 속에 조선 사람이 있었더라도 박정희가 특별히 조선사람을 상대로 전투에 임하지는 않았다. 


1940년 여름 만주 군관학교 시절, 조선인 학생들을 호출하여 1주일 간 휴가를 주고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하고 오라고 했다. 박정희도 고향 구미에 가서 형 박상희와 상의했다. 고령 박 씨를 고목이라는 일본성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박상희는 다카키 소기(소목상희)가 됐고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고목정웅)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박정희는 소속 부대가 없는 군인이 되었다. 일본 패망 후 박정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청년들이 북경에 모여들었다. 임시정부는 동북반사처 최용덕 처장을 북경에 보내 일제 패망 후 일본군과 만주 군을 탈영한 조선인 병력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 중에 만주국 대위 신현준과 중위 박정희도 있었다. 이들은 김학규 광복군 3자 대장 휘하로 편입되어 신현준은 3 지대 1 대대장, 박정희는 2 중대장이 되었다. 1946년 5월 8일 신현준과 박정희는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일제 군대의 장교로 출세했던 박정희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일본 장교였던 사람을 고향 사람들이 반가워 할리가 없었다. 셋째 형 박상희는 “그냥 선생질이나 했으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1946년 9월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1946년 12월에 졸업했다. 그리고 국군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대한민국 군인 경력을 시작했다. 1946년 10월 5일 박정희가 사관학교 재학 중 평소에 따르고 존경하던 셋째 형 박상희가 대구 항쟁 중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박정희는 당시의 지배계급에 대해서 분노했을 것이다. 형이 좌익이었고 우익인 경찰에 의해서 희생되었으니 좌익과 우익 중 아직 어느 쪽이 옳은 지 확실히 모르던 시대에 그럴 만하다고 생각된다. 박상희 사망 후 이재복은 집안일을 성심성의껏 도와주었다.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의 첫 임지는 춘천에 본부가 있는 8 연대였다. 연대장은 원용덕이었고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이었다. 작전참모 박정희 소위의 직속상관이었다. 어느 날 박정희 소위가 김점곤 중위에게 “시골에서 산판(산의 나무를 베는 것)을 하여 돈을 좀 번 숙형(숙부, 삼촌)이 계시는데 저녁을 사겠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연대장 원용덕을 모시고 김점곤과 박정희가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이 술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이 이재복이었다. 김점곤은 여순사건 숙군 작업의 귀재 김창룡의 상관이었다.  그는 “춘천 시절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이 춘천까지 찾아와서 박정희를 만나곤 했습니다. 그때 박정희는 나에게 이재복을 숙부라고 소개했습니다. 박정희가 체포된 후 그의 자술서를 봤더니 이재복을 통해 입당했다고 돼있더군요.”라고 회고했다. 

당시에 8 연대에는 좌익 군인들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박정희와 신경 군관학교 2기생 동기이고 당시에 8 연대 부연대장이었던 이상진 소령이 연대 내 총책이었다. 박정희는 이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터졌다. 10월 21일 국군은 광주에 반란군 토벌사령부를 설치했다. 사령관은 육군 총참모장 송호성 준장이었다.  이때 박정희 소령은 육사 중대장이었는데 광주 토벌군에 파견 나가 토벌군 사령부 작전장교르 일했다. 박정희는 김점곤을 도와 상황판 정리, 작전관계 보고서 작성과 같은 업무를 착실하게 해냈다. 여순반란이 진압되자 서울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1948년 11월 11일 김창룡은 박정희를 체포했다. 


김창룡은 남로당 군사 책임자 이재복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의 비서 김영식이 먼저 체포되었다. 김영식은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과 그의 부하 이재복이 군에 잠입한 세포들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중간 고리였다.  김창룡은 김영식이 가지고 있던 비밀문건에서 프락치 명단을 알아냈는데 그 명단에 박정희가 있었다. 김창룡은 1948년 12월 18일 이재복을 1949년 2월 29일에는 이중업을 검거했다. 이들의 검거로 박정희가 이재복 바로 아래 조직이었음이 다시 확인되었다.


박정희는 1949년 2월 8일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날 박정희 외에 42명의 장교와 사병 27명의 선고가 있었다. 이들이 1946년부터 1948년 11월에 걸 처 서울 등지에서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이었다. 박정희에게는 병력 제공죄가 적용되었다고 한다. 

사형을 구형받았던 박정희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구제되었다. 김창룡, 그의 상관인 김안일, 당시 육군 정보 과장이었던 백선엽, 육군 항공사관학교 교장 김정렬, 한국 군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미군 정보 장교 하우스만(James Hauseman)이 박정희의 사면을 도왔다.  

박정희는 형을 살지는 않았지만 군의 모든 보직을 잃고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그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백선엽은 군속으로 육군 전투 정보과에 근무하게 했다. 


이와 같이 박정희가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사랑했던 여인조차 자신을 떠나는 비극을 겪게 된다. 박정희가 1948년 11월에 체포되어 감옥에 있을 때, 박정희는 사랑하는 약혼녀 이현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쪽지를 전해 달라고 김창룡에게 부탁했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주라. 7기생의 육사 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도 하고 국방부에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띔해 주더라. 내가 얼마든지 차 타고 도피할 수 있었는데,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건 나 한 테 얼마나 불리한 줄 아나?”(나무위키- 이현란)


박경원 대위는 8 연대 경리 장교였다. 박정희 보다 나이가 어린 그는 같은 연대에 근무하는 박정희를 무척 따랐다. 1947년 가을 강원도 춘천시에서 거행되었던 박경원과 고금옥의 결혼식에 박정희가 초대되었다. 이현란은 육촌 오빠 이효 대위의 권고에 못 이겨 고금옥의 들러리로 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신랑 박경원의 들러리는 김점곤 대위였다.  박정희는 결혼식장에서 이현란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이현란은 1925년 함경남도 원산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답과 임야뿐만 아니라 여러 대의 어선도 가지고 있는 부자였고 지방 유지였다. 개신교 미션스쿨 루시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이현란은 가족과 헤어져 루시고녀 스승의 부인 기쿠에 여사와 함께 서울로 왔다. 월남 직후 1947년 10월, 이현란은 이화여자대학 아동고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녀는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미인이었고 성격도 활달하고 외향적이었다고 한다. 

이현란의 육촌 오빠인 이효 대위는 단기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였다. 박정희는 이효 대위에게 이현란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1948년 6월부터 두 사람은 서로 만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가깝게 지내는 것을 알게 된 이효의 부인이 나서서 약혼을 종용했다. 박정희는 2학년 1학기 학비도 내주었다. 박정희는 명동의 한 식당에 약혼식 한다고 친구들을 모아 놓고 이대 기숙사로 이현란을 찾아갔다. 이현란은 피아노 책을 사려 가려고 막 기숙사를 나오는 중이었다. 화장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평상복 차림이었다. 박정희는 약혼하자고 하며 ‘이의 없죠?’하고 물었다. 이현란은 대답을 얼버무리고 그를 따라나섰다. 약혼식을 마친 둘은 박정희의 용산 군 관사에서 동거하기 시작했다.  이현란은 이후 학생에게 혼인을 허락하지 않는 이대 학칙에 의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박정희는 1936년 대구 사범 학생 시절 19세 때 부친의 강요로 16살 난 김호남과 결혼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장가가는 것을 봐야 겼다”며 친구의 딸과 결혼시켰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선택이었다. 박정희는 김호남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박정희는 이현란과 1948년 6월부터 교제를 시작했고 자신이 이미 결혼하여 딸까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현란에게 전적으로 숨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고향에 사람을 보내 김호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김호남은 서울에서 이혼서류를 들고 사람이 올 때마다 도망쳐서 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다. 


교제한 지 두 달이 지난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박정희가 근무하던 경비사관학교가 육군사관학교로 바뀌었다. 박정희는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서울 용산에는 옛날 일본장교들이 쓰던 관사가 있었다. 소령이 된 박정희는 이 관사를 배정받았다. 당시에는 꽤 좋은 집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던 이현란은 방학 때가 되면 갈 곳이 없었다. 돈도 떨어지고 의지할 곳이 없던 이현란에게는 박정희의 집이 큰 도움이 되었다. 

박정희는 이현란을 극진히 사랑했다. 8살이나 연하인데 꼭 존댓말을 썼다. 이현란이 술을 싫어했기 때문에 술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구미에도 데리고 갔다. 그러나 이현란은 기어들어가서  기어 나오는 오막살이 집을 보고 기겁을 하여 하룻밤 자고 곧장 상경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거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인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터졌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이었던 박정희는 광주에 주둔하고 있는 토벌군 작전참모로 차출되었다. 반란군 토벌을 마치고 귀대한 다음날 1948년11웡11일 남로당 군사부에서 활동한 사실이 김창룡의 수사망에 걸려 체포되었다. 

이현란은 아무것도 모르고 저녁을 해놓고 박정희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 육촌오빠 이효대위가 찾아와 돈을 얼마 쥐어 주며 ‘갑자기 출장 가게 되었다. 당분간 기다려라’라고 하고 갔다. 메모나 전화가 왔을 텐데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현란은 강문봉 대령 부인을 찾아갔다. 강문봉 대령은 박정희의 체포 사실을 이현란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외에는 의지할 때가 없는 이현란은 어쩔 줄을 몰랐다.  이북에서 공산당이 무서워서 이남으로 왔는데 빨갱이 마누라가 되어 있지 않은 가?

이 난리 통에 박정희의 인적 사항이 적 나나 하게 들어 났다. 이현란은 김호남과 박재옥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박정희가 석방되어 같이 사는 동안에 이현란은 박정희로부터 떨어지려고 가출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박정희는 온 동네를 뒤져 다시 잡아다 놓았다. 이현란은 온갖 미운 짓을 해서 박정희가 자신을 싫어하게 하려고 했다. 그래도 박정희는 꿈 쩍도 하지 않았다.  가출했다 돌아온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박정희는 아침밥을 해놓고 “식사하세요”라고 친절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현란은 박정희를 미워하기보다는 무서워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이현란이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화장실 문 앞에서 감시할 지경이 되었다.

1950년 2월 6일, 이현란은 박정희가 술에 취해 잠든 틈을 타서 “그동안 고마웠고, 맘이 돌아서질 않으니 날 찾지 말고, 날 찾으면 투신 자살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 와중에 박정희의 체포 소식을 들은 어머니 백남의 씨가 사망했다. 


이현란이 떠 난지 4개월 만에 6.25가 터졌다. 박정희는 소령으로 군에 복귀했다. 박정희는 후퇴하는 정부를 따라 대구로 내려갔다. 이때 대구로 피난 왔던 이현란을 박정희가 우연히 발견하고 지프차에서 내려 이현란에게 접근하려 하자 이현란이 도주하여 다시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이현란은 교사 직업을 가진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임신 2개월이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구에 머물던 시절 육영수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이번에는 육영수에게 서류상 아내와 딸이 있음을 실토했다. 김호남은 박정희가 중령 시절에 이혼에 동의했다. 1950년 12월 12일 계산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선거 운동은 윤보선이 박정희의 여순 사건 관련 폭로로 인한 사상논쟁이 공화당과 박정희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때 엎친데 덮친 격으로 드디어 황태성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9월 25일 서울 교동국민학교 교정에서 재야 6당 공동투쟁위원회 주최로 강연회가 열렸는데, ‘구국청년위원회’ 명의로 된 전단이 뿌려졌다. 전단에는 황태성 사건에 대한 여러 의문점이 적혀 있었다. ‘세칭 북괴 간첩 황태성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혀라’ ‘황태성은 대구 10.1 폭동 당시 박정희의 실형과 같이 활약했다는데 그에 대한 진상을 밝혀라’ ‘황을 박정희의 형수가 수차례에 걸쳐 면회했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황태성 사건의 관련자로 실형을 받은 자를 형 집행 중에 석방한 이유는?’ ‘박정희 씨의 형식상 이끄는 공화당 내에 6.25 당시 부역자 및 그의 가족이 월북한 자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가?’ ‘공화당 중견 간부인 김 모 씨가 6.25 당시 부역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가?’등등이었다.


9월 28일 영남의 정치 수도 대구 수성천에서 윤보선 후보의 선거 유세가 열렸다. 여기서 윤보선은 ‘여순 사건에 박정희 씨가 관련됐다고 볼 수 있다’고 하여 처음으로 박정희의 군내 남로당 활동을 직접 언급했다. 청중들은 박수로 응답했지만 몹시 놀라는 표정이었다. 


10월 6일 박정희가 대구 유세에 나섰다. 박후보는 10만 청중 앞에서 ‘자신이 당선되면 공산주의자나 반국가적 행위를 한자를 제외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겠다’고 선언했다. 찬조연사로 나선 이만섭은 “박정희 후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 느니 또는 여순사건에 관련이 있다 느니 하는 윤보선 씨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관제 빨갱이로 몰아치는 한민당 식 수법의 재연이다”라고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 공산주의 경력을 부인했다. 박정희는 10월 8일 마산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자신의 여순사건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당시 여순지구에 주둔한 국군은 14 연대이고 자신은 육사 생도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동 반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고 했다. 


10월 9일 안동종앙국민학교에서 열린 유세에서 윤보선 후보는 폭탄선언을 했다. 황태성이 20만 달러를 가지고 월남했는데 중앙정보부가 이를 압수하여 공산당식 점조직으로 공화당을 창당하는데 썼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이를 전면 부인했다. 황태성이 가져왔다는 20만 불은 9월 28일 치안국장이 발표한 이만희 간첩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일축했다. 이만희가 가져온 20만 불을 압수하여 서울 텔레비전 방송국 시설 기금으로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황태성이 20만 불이라는 거금을 가져왔다는 기록은 아무 데 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같은 날 박정희는 부산 유세에서 “가령 내가 빨갱이라면 어째서 그들 밑에서 육군 소위에서 소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며 전방 사단장도 하고 야전군 참모장도 할 수 있었겠는 가? 내가 사단을 몰고 이북에 넘어가면 어떻게 할 뻔했나?  또한 그러한 위협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혁명을 했는데 왜 대통령으로 앉아 그것을 비호했는가?”하고 윤보선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황태성 사건으로 인한 유권자들의 박정희 사상에 관한 의구심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박정희는 유세하기 위해서 안동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황태성 사건의 전모를 털어놓았다. 1963년 10월 10일 동아일보는 박정희의 황태성 사건에 대한 해명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일제 때부터 황(항태성)과 형(박상희)은 친구였다. 해방 후에 보니 황은 빨갱이였고 그가 북에 갔다는 말을 들었다. 5.16이 나던 해 9월경 당시 정보부장 김종필이가 황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간첩으로 남하해 온 것을 채포 했다고 보고해 왔다. 황은 나를 만나면 이야기하겠다고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나중에 김종필이라도 만나면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할 수 없이 치안국 직원을 시켜 김종필로 가장해 조선호텔에서 만나게 했더니 자기가 이북 괴뢰 무역 부상이며 나를 만나면 남북협상문제를 충분히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리해 일당을 모조리 잡았다. 처음 단서는 대구에 있는 나의 형수를 만나려고 사람을 시켜 보낸 것을 형수가 김종필에게 연락해 잡게 된 것이다. 그 뒤 재판을 하고 법에 의해 처리했다. 이밖에 야당에서 떠드는 이야기는 모두 허위 날조이다.”


이에 대응하듯 1963년 10월 13일 윤보선 후보 측은 20여 일 전에 입수한 1949년 2월 18일 자 경향신문 기사와 동년 2월 17일 자 서울 신문기사를 민정당 이름으로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했다. ‘여순사건 자료를 공개’ ‘당시의 주 신문 보도를 제시’라는 큰 제목하에 작은 제목으로 ‘49년 2월 13일 군법회의에서’ ‘박정희 씨에게 무기 언도’ ‘심판관은 김완용 중령 등 7명’ 등으로 되어 있었다. 


당황한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은 기관원들을 동원해서 동아일보 호외를 회수했다. 그 일부가 시민들 손에 넘어가기는 했지만 대부분 기관원들이 회수했다고 한다. 공화당은 박정희 후보가 여순사건에 관련하여 재판을 받은 적이 없다고 재판 자체를 부인했다. 이를 증명하듯 서울신문기사에 재판관으로 나와 있던 김완용 당시 중령이 자신은 박정희를 재판한 적이 없다고 공표했다. 


선거 이틀 전인 1963년 10월 13일 밤부터 기관원 10명이 안국동 윤보선 후보 자택을 포위했다. 윤보선 씨 부부는 자택에 없었다. 선거 날인 10월 15일 윤보선 씨 부부는 건강을 체크한다고 백병원으로 향 했다. 내외 신문 기자들이 그들을 따랐다. 기관원이 탄 지프들도 뒤 따라갔다. 윤 씨 내외가 병원을 들어가자 기자들과 기관원들은 현관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윤 씨 부부가 원장실에 갔더니 원장은 자리에 없고 간호사가 그들을 병원 후문 쪽으로 안내했다. 후문 밖에는 폴크스바겐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미군 캐디 중령의 부인이 앉아 있었다. 윤 후보 부부는 캐디 중령의 자택으로 향했다. 그들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 캐디 중령의 집에서 신병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1963년 10월 15일 선거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되었다. 텔레비전이 없는 시대였다. 라디오 방송과 신문 호외가 개표 중간발표를 알렸다. 윤보선은 개표 초반에 우세를 보였다. 서울, 강원, 경기, 충남, 충북에서 박정희 보다 많은 득표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남, 경북, 전남, 전북에서 박정희가 압승하여 전세를 뒤집었다. 결국 15만 6028표 차이로 박정희가 대한민국 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해방 후 박정희의 운명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서 암살될 때까지 미국에 달려있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인 5.16 쿠데타와 박정희 암살사건에 관련된 미 중앙정보부 비밀 문건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두 사건에 미국이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방증은 많이 있으나 아직 확증이 없다. 


2013년 4월 29일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 웬트워스 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는 미국정보자유화법에 근거하여 이 두 사건에 관련된 미 중앙정보국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건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미국 연방법원에 냈다. 그는 2001-2002년 전남대 5.18 연구소 교환교수를 지낸 한국민중운동사 전문연구자이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미육군대위로 1946년에 한국에 와서 1981년에 한국을 떠났다. 그는 미 육군 정보장교로서 한국군과 미군 사이에서 레이장 역할을 했다. 한국군을 창설해서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예약 없이 아무 때나 만날 수 있을 정도로 한국군과 한국 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1년 3월 1일, 실제 쿠데타가 있기 45일 전 나는 한국군내에 쿠데타 기도가 있음을 상부에 보고했다.”

“바로 그날 오전(1961년 5월 16일) 혁명 위 소속한 대위가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하우스만 씨, 나를 도와줄 수 없겠는가?’라는 쪽지를 내게(하우스만) 줬다. 그는 박이 내가 혁명위원회에 나와 주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혁명위원회에 나갈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한미간의 대화통로가 끊어진 지금 기꺼이 그 중재자로 나설 것을 결심했다.”


5.16 쿠데타 이틀 후인 5월 18일 박정희가 강문봉을 통역자로 대동하고 미 8군 캠퍼스 안에 있는 하우스만의 집을 방문했다. 하우스만은 그날 박정희가 자신의 공산당 전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신을 방문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혁명 위 측은 5월 18일 일주일 전부터 연락관 대위를 통해 구두 또는 서면으로 하우스만에게 쿠데타에 수반하는 많은 문제에 관한 의견을 물어 왔고 하우스만도 그 연락장교들 편해 몇 가지를 강력히 권고했다고 하우스만은 증언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가 “미 8군의 입장은 어떤 가?” “미국의 시각은 어떤 가?”물어 왔고 그는 “당신네 들이 진정 미 8군과 친하고 싶으면” 또는 “당신네들이 미국의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면” “제발 완장 두른 혁명군을 8군 캠퍼스 주위에 들여보내지 말라” “완장을 떼라”등의 충고를 했다고 증언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에게 색안경을 벗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박정희는 색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혁명 위는 하우스만 당신 친구들이 거의 전부이니 당신네들 혁명이요”라고 했다. 

박정희는 여순 사건 직후 공산당 연루 혐의로 체포되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하우스만은 그의 말을 중간에서 막았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우스만은 이승만에게 직접 박정희를 석방해 줄 것을 건의한 장본인이었다. 하우스만은 그를 희생시키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재라고 믿었다. 하우스만은 여순사건 진압작전 때 처음 박정희를 만났고 육본 작전참모 시절에 서로 잘 알게 되었다. 하우스만은 그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능력 있고 애국심이 강한 훌륭한 군인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절대로 더 이상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박정희는 하우스만에게 “나를 위해 미국에 좀 갔다 오지 않겠소?”라고 부탁했다. 하우스만은 빙긋이 웃으면서 일어나더니 방에 들어가 미국행 비행기 표를 들고 나와 박정희에게 보여주었다. 

하우스만 부부는 다음날 공무겸 휴가로 본국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박정희는 “잘 부탁한다” 고 말했다. 하우스만은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정부의 요인들에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정확히 알리고 새로운 한국의 지도자로 부상한 박정희가 미국이 원하는 지도자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부각하는 일에 착수했다. 특히 그들의 뇌리에서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불식시켜야 했다. 

미 합참의장 렘니처 장군에게 한국사태를 자세히 설명했다. 박정희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그가 미국과 가까이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알렸다.  이어서 육군참모총장 조지 H 데커 장군에게도 같은 보고를 했다. 미중앙정보국, 국무부, 그 외에 여러 관계 기관을 찾아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박정희를 소개했다. 그의 보고는 불확실한 쿠데타 세력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우스만은 정일권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5.16 때 장면 정부의 주미대사였다. 5.16 쿠데타로 면직된 정일권은 러스크 국무장관의 소개로 하버드 대 강의를 듣고 있었다. 박정희는 6월 초에 그를 주미대사로 부임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우스만은 워싱턴에서 정일권을 만났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진보적인 민주당 출신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썩 좋아 할리가 없었다. 둘은 한미 정상회담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하우스만은 6월 중순이 조금 지나 한국으로 돌아와서 박정희와 케네디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상 참고; 제임스 하우스만 미군대위 짐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한국문원]


1961년 10월 10일경, 일본 도쿄에서 6차 한일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서 겨우 2주 전에 일본에 와있던 배의환 회담 수석대표와 정일영 서울대 교수에게 급거 귀국하라는 명령이 외무부로부터 날아왔다. 귀국 사유는 비밀이었다. 

둘은 장충동 동국대 입구에 있던 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을 만났다. 박의장은 “미국에서 통지가 왔는데 케네디 대통령이 좀 만나자고 한다. 미국에 오는 길에 도쿄에 들려 이케다 총리와 이야기 좀 하고 오라 한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케네디와 박정희가 만나는 조건으로 이케다 총리와의 회담을 요구했던 것이다. (연합뉴스; “JFK 박정희 방일 요구했다”2012.11.05)

박정희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1961년 11월 11 일 도쿄에 도착하여 11월 12일에 이케다 총리와 회담을 했다. 케네디를 만나러 미국에 가는 길이었다. 


“우리에게는 회피할 수 없는 의무가 있다. 그것은 자유진영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지혜로운 지도자 그리고 좋은 이웃으로서의 도덕적 의무, 대부분이 가난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국민으로서, 그 옛날에 우리의 경제를 발전시켰던 외국으로부터의 빚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나라로서의 경제적인 의무, 그리고 자유의 적에 대한 가장 큰 저항 세력으로서의 정치적인 의무.”이다. 

 – 존 F. 케네디 


냉전시대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가 어느 제도가 더 효과 적으로 민생을 보살피느냐가 문제였다. 1960년 초반의 상황은 공산주의 국가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특히 남북이 갈라져 있는 한반도에서는 그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경제 사회적으로 북한이 남한보다 잘살고 안정되어 있었다. 


자유진영 국가들의 리더인 미국은 저개발국가들의 경제를 살리지 않으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1963년 11월 3일 여러 외국 원조 기구와 프로그램을 하나로 통합하여 USAID(the 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를 조직했다. 보통 에이 아이 디라고 한다. 케네디는 평화봉사단을 만드는 등 저개발 국가 원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은 일본을 강하게 만들어 소련과 중국의 태평양으로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려고 했다. 한국전쟁 전 1940년대 말에는 미국은 일본에서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는 지역을 하나의 경제구로 만들어 일본을 동아시아의 공장으로 육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으로 일본이 이차대전의 전화에서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확실해졌다.  남한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일본을 방위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지로 인식되었다. 한국은 동남아 대신 일본 경제의 배후지가 되었고 한국, 일본, 미국은 소련, 중국, 인공에 대항하는 밀접한 군사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유럽과 세계 여러 나라에 원조를 하고 있는 미국은 항상 예산이 모자랐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전쟁으로 경제가 부흥하고 있는 일본에게 한국 경제 원조 부담을 덜기 위해서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요구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미군 수송기와 민간 항공기를 이용하여 일본을 거쳐, 앵커리지, 시애틀, 시카고를 경유 워싱턴에 1961년 11월 13일 오후 4시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11월 14일과 15일 두 차례 케네디와 회담했다.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 일행을 대 환영했다. 케네디는 가능한 모든 경제적 원조와 군사원조를 계속하고 북한이 침공할 때 미군을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다. 케네디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에 큰 관심을 보이고 이 계획의 성공을 위해 미국은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1963년 여름까지 민정으로 이양하겠다고 케네디에게 밝혔고 케네디는 이에 만족해했다.  오는 길에 도쿄에서 이케다 수상을 만난 데 대해서도 케네디에게 이야기했다. 케네디는 박정희의 한일 회담이 잘 될 것이라는 말에 기뻐했다. 박정희는 댈러스 국무장관과도 만났다. 박정희는 미국기자 클럽에서 연설하고 기자들의 질문도 받았다.


박정희의 첫 미국 방문은 성공적이었다. 케네디 정부의 박정희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의구심을 완전히 씻고 미국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박정희와 케네디는 1917년생 동갑이었다. 케네디는 2년 뒤에 댈러스에서 오스왈드의 총에 암살되었다. 1963년 11월 24일 박정희는 케네디 장례식에 참석했다.


박정희가 1961년 11월 방미 중에 딘 러스크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군 월남 파병을 처음 거론했다. 케네디는 월남에 미군을 보내서 월남전에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 대통령이다. 그러나 당시에 케네디 행정부는 아직 본격적으로 월남전에 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중요한 관심사는 한일 회담이었다. 동북아시아에 일본을 중심으로 한 반공체제를 구축하여 미국의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부담을 줄여 보려고 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부통령이었던 존슨이 승계했다. 1963년 12월 박정희는 선거를 통해서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고 월남전은 전면전으로 확전 되었다. 존슨 행정부는 8월 4일 두 번째 북베트남 함정의 미해군 함정에 대한 공격이 실제로는 없었는 데 있었던 것처럼 조작하여 미국 측의 공격을 정당화하고 이를 의회에 보고하여 통킹만 결의를 통과시켜서 존슨 대통령이 북 베트남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후 존슨 대통령은 대규모의 미군을 파병하여 월남전을 힘으로 끝내려고 했다. 


1884년 프랑스는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청의 조공국이었던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1927년에는 국민당을, 1930년에는 공산당을 조직하는 등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해왔다. 세계 제2차 대전 동안에는 일본이 베트남을 지배했다. 호지민이 1941년 5월 19일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일본에 저항하여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호지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그 헤 9월 2일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옛 주인이었던 프랑스가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풍 항구를 공격하여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남쪽 사이공에 바오 다이 황제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앞세웠고 북에는 하노이에 호지민 정부가 있었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어 1950년에 미국은 남쪽의 사이공 정부를 원조하기 시작했고 북의 하노이 정부는 소련과 중공이 받쳐주고 있었다. 


호지민 독립군(베트민)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 피엔푸를 점령하고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손을 떼었다. 그 해 7월 제네바 회의에서 중공의 제 이인자 저우엔 라이의 노력으로 북위 17도선에서 베트남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중공(중국인민공화국)은 1950년 7월부터 군사 고문단을 북 베트남에 파견하여 호지민을 돕기 시작했다. 중공은   무기를 공급하고, 군사전문 지식을 전수하고 , 숙련된 노동자들을 파견하여 베트민을 게릴라에서 정규군으로 바꾸어 놓았다. 미국은 1950년 9월부터 군사 지원과 고문단(Military Assistance and Advisory Group)을 파견하여 프랑스 군을 돕고 남 베트남 군대를 훈련시켰다.  1954년 프랑스가 베트민에게 패배했을 즈음 미국은 이미 1천만 달러를 프랑스가 하고 있는 전쟁에 쏟아부었다. 이는 전 전쟁 비용의 80%에 해당했다. 


중국 공산당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장제스를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차지하여 1950년 10월에 중공을 선포했다. 그리고 1년도 채 안 되어 베트민을 원조하고 딱 1년 만에 한국전에 뛰어들었다.  


미국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끝낸 대통령이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본고장인 아시아에서 미국은 중국의 공산화를 막지 못했고 중공은 한국 전쟁에서 북한에 들어온 미국을 패퇴시켰다.  놀랍게도 신생 중공은 베트남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결국은 베트남에서 미국을 밀어내고 중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베트남을 통일하게 했다. 이러한 미래의 결과를 알기나 한 듯 아이젠하워는 베트남 개입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 중 선거를 실시한다면 80%의 베트남 사람들이 호지민에게 투표할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지도력과 추진력이 없는 바오 다이를 위해서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남 베트남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1960년에 대선에서 케네디는 부통령 리처드 닉슨을 이기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소련의 흐루시초프와 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61년에 미국은 한국에 50,000 병락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케네디는 4개의 위태로운 사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1961년 4월에 훈련된 쿠바 망명자들로 하여금 쿠바 피그스 만에 상륙하여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작전에 실패한 것, 베를린에 소련이 장벽을 쌓은 것, 5월에 있었던 라오스의 친 서방 정부와 피테트 라오 공산주의 운동 사이의 협정, 10월의 쿠바에 설치한 소련 미사일 위기 등이었다. 케네디는 더 이상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일에 실패하면 우방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베트남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 미국의 힘을 증명하려 했다. 케네디는 미군을 직접 파견하는 것보다 월남군을 훈련시켜서 자체적으로 베트콩과 싸워 이기게 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렇지만 월남 지원에 있어서 아이젠하워 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아이젠하워는 겨우 900명의 군사 고문관을 월남에 파견했는데 1963년 11월 케네디 암살까지 16,000명의 미군이 월남에 있었다. 


응오 딘 디엠 월남 정부는 극도로 부패했고 월남군은 베트콩에게 무력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한 응오 딘 디엠 정부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CIA의 협조를 얻은 월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1963년 11월 1일 디엠을 제거했으나 이 후로 쿠데타가 연속으로 일어나 월남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북의 월맹은 더 많은 게릴라(베크콩)를 남에 보낸다. 


참고

1.      신동아, 2004.11.15: 김준하; 박정희 좌익 시비로 사상논쟁 불붙다.

2.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조한빛, 2022년: 1963년 군사정부의 민정이양과 미국의 개입

3.      서울경제, 2017.03.06: 권홍우 논설위원; 부정부패로 출범한 제3공화국…4대 의혹사건

4.      유튜브: 역대 가장 치열했던 1963년 대선

5.      오마이 뉴스, 2004.08.09: “형님친구 꾐에 빠져 남로당 가입”[실록 ‘군인 박정희-진보파 좌익의 기록 2’] 춘천 8 연대 시절

6.      조선일보, 1998.03.22: [박정희의 생애]”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39) (17) 김형 고맙습니다

7.      이슈 토론방, 2011.08.06: 오마이 뉴스 정운현기자, 대통령 해 잡수신 남로당 간첩 박정희, bemil. Chosun.com

8.      매일노동뉴스(labortoday.co.kr), 이창훈, 2020.0615: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62] 박정희 셋째 형, 경북사회주의 운동가 박상희

9.      오마이뉴스: 2020. 04.10, 박도: 박정희는 왜 민주군관학교에 갔을까? [대한민국 대통령이야기(19)]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4

10.   나무위키: 이현란 2024.07.18 수정  존슨의 힘에 의한 월남전 승리 정책은 박정희 정권에게 기회였다. 

11. 한국을 움직인 미군대위; 한국문원, 짐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1.      

12. 자유일보: 2024.01.07, 류석춘 전연대 교수; 김창룡, 여순반란 한 달도 안 된 1948.11.11 박정희검거

13.  조선일보 1998.12.06: 조갑제, 이동욱;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 개조(25) <336>

14.   Sunday Journal: posted 2022.10.06; 미국 비밀문서 해제로 본 멀고 먼 미국 방문길

15.   World Korean:[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 15]; 케케디 한국에 모든 원조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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