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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y 19. 2024

김대중 납치사건

한국, 일본, 미국의 검은 거래


유튜브: 역 TV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납치사건


“나는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김대중을 24시간 안에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에 청와대에 가서 내가 김대중을 누가 납치했으며 그가 어디 있는지를 말할 수 있으면 김대중을 살릴 수 있다”- 주한 미국대사 하비브


1968년 11월 리처드 닉슨이 3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9년 7월 25일 그는 괌에서 닉슨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이 그동안에 아시아 국가들을 위해서 전쟁을 하는 동안에 너무나 많은 지출을 했다. 아시아 지역에서의 출혈을 방지하기 위해서 핵무기를 제외한 다른 국방은 아시아 국가 당사국이 1차적인 책임을 지고 미국은 제한적인 군사 및 경제원조만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정도로 너무나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었고 전쟁이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역만리 타향에서 목적 없는 전투에 참여하여 생명을 잃어 가고 있었다. 반전 데모는 매일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고 언론에는 아무런 목적 없는 월남에서의 전투와 격렬한 시위에 대한 소식이 연일 보도되었다. 데모와 국방비 지출을 막는 방법은 조속한 종전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닉슨 독트린은 월남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근거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월남 군대를 강화시키고 미군이 철수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닉슨 행정부의 아시아 지역 군비축소 정책은 주한 미군에도 영향을 미쳤다.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우려했다. 인공과 대치하고 있고 한국전이 휴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안보는 주한 미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미군에 관한 닉슨의 의중을 타진하기위해서 1969년 8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 미국대통령과 만났다. 닉슨은 한국은 아시아 지역 군비감축 원칙에서 예외라고 말했다. 만약에 주한미군의 감축 또는 철수가 있을 경우에는 사전에 한국정부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베트남전 평화협상에 대해서도 한국과 긴밀하게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정희는 1968년 4월 존슨이 하와이에서 약속한 주한미군 강화가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박정희는 닉슨에게 미국정부나 베트남 정부가 주월 한국군 철수를 요구할 떼까지 한국군을 베트남에 주둔시키겠다고 말했다. 한국 언론은 닉슨 독트린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 한국 정책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박정희는 이 회담에서 닉슨에게 3선 개헌의 필요성을 설명했고 닉슨은 이를 묵인하겠다는 암시를 주었다. 그리고 닉슨은 박정희의 서울 방문 초청을 수락했다. ([뉴욕타임스] 박전희 닉슨 정상회담서 “대한안보공약후퇴, 3선 개헌 묵인암시보도; archives.kdemo.or.kr)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온 박정희는 1969년 9월 14일 국회에서 3선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켰다. 그리고 10월 17일 국민투표로 개헌안이 확정되었다.


한국 정부는 닉슨을 오해했지만 미국정부는 월남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동안 한국군 5만이 계속 월남에 남아서 월맹군이 미군을 추격하는 것을 얼마간 막아 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월남파병이 한국의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월남 파병을 가능한 한 계속하려 했다. 당시에 한국군은 북 베트남과 접하고 있는 비무장지대 일부와 베트콩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산악지대, 그리고 해변지역에 주둔하고 있어서 미군이 철수하고 있는 동안 월맹군을 막아 줄 수 있다고 미군은 판단했다. 


1970년 3월 20일 키신저는 주한미군 2만몀을 철수시킨다는 편지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1971년 4월 2일 동두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7사단 2만 명을 철수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남한의 안보를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박정희는 겨우 94만 표 차이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 부정과 관선 선거가 없었으면 김대중이 100만 표 차이로 이겼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했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권력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경제가 1971년 8월 15일 미국 발 닉슨 쇼크로 인해서 큰 타격을 받았다. 닉슨 대통령은 과도한 전비 지출로 악화된 경상수지를 해결하려고 대부분 수입품에 10%의 관세를 종래의 관세에 추가로 매기고 금태환제를 폐지하여 세계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를 닉슨쇼크라고 한다. 금태환제는 달러를 발행하려면 발행 액수에 해당하는 금을 확보해야 하는데 닉슨은 이를 폐지하여 달러를 사실상 얼마든지 발행할 수 있게 했다.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반으로 떨어졌고 수출 증가율은 10년래 가장 낮았다. 


1972년 2월 21일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월맹이 월남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데 중국의 군사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은 월남전을 빠른 시일 내에 종식시키기 위해서 중국이 월맹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 주기를 원했다. 지금까지 미국은 중화민국 즉 타이완을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로 인정해 왔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본토 즉 중국인민공화국(중공)과는 정식 국교가 맺어지지 않고 있었다. 중국이 월맹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는 대가는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였다. 중공이 명실공히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공산국가를 대표하는 두 강대국 소련과 중공을 갈라놓는 효과를 노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에 소련과 중공은 국경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이 소식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미국과 전쟁을 했던 중공은 분명히 인공의 우방이고 남한의 적이었다.  1972년 2월 28일 중국을 방문 중인 닉슨은 상하이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중국과 미국의 국교정상화 추진과 중화민국(타이완) 주둔 미군의 단계적인 철군을 약속했다. 이른바 미중 데탕트 시대의 시작이었다. 


종래의 흑과 백이 분명한 냉전구도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도 하루아침에 중화민국 신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 긴장완화라는 명목아래 약소국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데탕트 위기론을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한국에게 중공은 인공에게 데탕트 지지를 희망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남북협상을 시작하여 1972년 7월 4일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데탕트 위기론은 “미국이 한국을 버릴 수 있다”는 한국 안보의 위기를 의미했다. 박정희는 안보의 위기를 정국 안정을 위한 장기 집권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기회로 삼았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안을 만들어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부쳐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 박정희 일인 독재의 시작이었다. 


1971년 1월 27일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에서 사재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경찰은 가정부 조행덕(22세)의 진술을 근거로 겨우 15세인 김대중의 조카 김홍준을 구속했다. 그는 장난 삼아한 일이라고 자백했으나 이틀 후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이 위협하고 가혹행위를 했기 때문에 허위 자백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김대중은 1971년 5월 25일 치러지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를 다녔다. 당시에 야당인 신민당은 열세였다. 신민당 총재였던 유진산이 영등포 갑구에 무명의 29세 청년을 공천했다. 상대는 공화당 공천을 받은 박정희의 처조카 사위였다. 누가 보아도 유진산이 공화당과 뒷거래를 하여 박정희 친척이 유리하게 만든 정황이 역 역했다. 신민당 내에서 항의가 빗발쳤고 야당의 지지도는 크게 하락했다. 이를 ‘진산 파동’이라고 한다. 


김대중은 다음 국회에서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할 것이라고 믿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지원 유세에 임했다.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가는 곳마다 청중이 구름 떼처럼 모였다. 후보자들 마다 그의 지원 연설을 원했고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유세 시간에 늦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김대중 일행은 5월 23일 해남과 진도 유세를 마치고 다음날 서울로 가는 항공기를 타기 위해서 목포 비행장으로 갔다. 그러나 목포 비행장 관계자가 비가 많이 와서 항공기가 뜰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광주 비행장은 레이더가 있어서 비행기 운항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김대중 일행이 탄 승용차는 지체 없이 광주로 향했다. 김대중 일행은 승용차 한 대와 목포에서 대절한 택시 2대에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승용차 뒷좌석 오른쪽에 김대중, 가운데에 경호실장 이명우, 왼쪽에 권노갑이 탔다. 그리고 승용차 뒤에 경호원과 비서진이 나누어 탄 택시 2대가 따라왔다. 3대의 차가 도로를 달리던 중 신혼부부 일행 5명을 태운 택시가 김대중이 탄 승용차와 경호원이 탄 택시 사이로 끼어들었다. 4대의 차가 일렬로 무안국도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맞은편에서 4톤 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승용차를 향해 돌진했다. 권노갑이 앞 좌석 운전사의 어깨를 탁 치며 “오른쪽으로 틀어”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운전사는 황급히 핸들을 돌렸다. 트럭은 승용차의 뒤쪽 트렁크를 쳤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승용차는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가 도로와 논두렁 사이의 개천에 처 박혔다. 승용차 뒤에 따라오던 신혼부부 일행이 탄 택시가 4톤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3명이 즉사했다. 김대중은 오른쪽 골반에 부상을 입어 오른쪽 다리를 잘 못쓰게 되어 항상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어야 하는 불구가 되었다. 오른손에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경호실장 이명우는 팔을 다쳤고 권노갑은 늑골에 금이 갔다. 


이 사고는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경향신문 1단 기사가 유일한 신문기사였다. 살인혐의로 트럭 운전사를 조사하던 검사가 즉시 다른 검사로 교체되었다. 이 검사는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 세 사람이나 죽었는데 운전사는 구속조차 되지 않았다. 


트럭의 주인은 경기도 화물 유통회사 소속이었다. 소유자는 모 공화당 국회의원 아들이었다. 2002년 9월 16일 자 한국일보는 제8대 총선 목포지역 공화당 후보였던 강 모 씨가 71년 김대중 교통사고의 배후라는 진술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 진술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목포 선관위 직원이었던 ‘김창수 씨 의문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한다. 8대 총선에서 목포 지역 공화당 후보는 강기천이었고 신민당 후보는 김경인이었는데 김경인이 당선되었다.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차 사고 후유증을 치료받기 위해서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다.  1972년 10월 도쿄에서 유신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미국 망명을 결심했다. 국회가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신 선포 직 후 일본에서 참의원 의장 고노 겐소를 비롯한 주요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일본 언론과 회견하여 유신에 대한 반대 의견을 보도하게 했다. 그 해 11월에 미국 워싱턴에서 유신 헌법 국민투표가 무효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1973년 1월 3일 하와이를 경유하여 도쿄에 도착했는데 조윤형과 김상현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3월 24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주로 교포사회에서 강연과 시위를 통하여 반 유신 체제운동을 벌였다. 7월 6일 워싱턴에서 교포사회의 여러 중요 지식인들과 함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위원회(함민통)를 결성하고 초대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7월 10일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위하여 일본으로 들어왔다. 김대중은 8월 7일에 도쿄 팰리스 호텔 501호실에 투숙하고 있었다. 도쿄의 하비아 공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반 박정희 집회 참가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8월 8일 오전 택시를 타고 그랜드 팰리스 호텔로 갔다. 그때 양일동 민주통일당 대표가 이 호텔의 2211호에 묵고 있었다. 김대중은 양일동과 밀담이 약속되어 있었다. 대화의 내용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서 경호원도 물리쳤다. 양일동의 측근이며 김대중의 먼 친척인 김경인 의원만이 같이 있었다.  이 호텔에 도착한 김대중은 2212호에서 양일동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후 1시경에 대화를 끝내고 김대중이 김경인 의원과 같이 2212호실 문 밖을 나오는데 돌연 옆방(2210호)에서 3명 앞 방(2215호)에서 2 사람 약 5,6명이 김대중을 덮쳤다. 김대중을 강제로 2210호실에 감금했다. 김경인과 양일동은 2210호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10여 분 후 이들은 호텔 로비에 연락하여 마스터 키로 열어 보니 아무도 없고 마취약 냄새가 진동했다. 곧 호텔 로비에 대기 중이었던 김대중의 경호원들이 2210호로 들이닥쳤다. 


마취약을 적신 수건으로 김대중의 코와 입을 막아 기절하게 한 후 포박하여 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김대중은 약간 마취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는 일본인 호텔 손님이 타고 있었다. 김대중은 그에게 일본말로 “도와달라, 살인자다”라고 속삭였다. 그 말을 알아들은 일본인은 호텔 로비에 알렸다.  


범인들은 지하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주차비를 지불하지 않은 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호텔 측은 주차비를 내지 않은 차량의 번호를 기록해 놓았다. “품천 55모 2077”이었다. 승용차의 주인은 한국 총영사관 부영사 유영복이었다. 


한편 미국은 박정희와 김대중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 CIA 한국 지부장은 2017년 재 방송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KT 공작의 실체,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우리는 박정희가 김대중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과 김대중이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특히 미국에서 박정희를 비판했기 때문에 박정희가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MBC는 같은 프로그램에서 당시 백악관 출입 기자였던 문명자 씨의 증언을 통해서 김대중은 일본에서 자신을 납치하여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 제보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정보기관이 가장 의심된다. 


당시의 일본 내의 정국은 탈 냉전의 국제정세 속에서 진보세력이 성장하고 극우파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었다. 일본의 극우파와 박정희 정권은 서로 사이가 좋았다. 따라서 일본에서 김대중이 활동하기에 좋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측근들은 김대중의 일본행을 말렸다. 자칫 납치나 암살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일본행을 감행했다. 1973년 8월 9일에는 일본 자민당 중도파 의원 70여 명이 회원인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소로부터 강연요청을 받았고 8월 13일에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제일교포들이 모여 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할 예정이었다. 


한편 김대중의 비서진은 김대중의 보안을 강화했다. 숙소를 수시로 옮기고 본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 이름으로 비서진이 체크인하고 김대중은 차로 지하실 주차장에서 직접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도쿄 하라다 맨션에 김대중 사무실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경호팀도 상근 5명 비상근무 5명으로 강화했다.  보통 4개의 방을 예약했는데 김대중이 투숙하는 방은 비서진 3명만 알게 했다. 납치 사건 4일 전에 김대중의 비서 조환준에게 전화가 왔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주일 한국 공관 관계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김대중을 납치해 갈 음모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김대중의 방문 고리를 철사로 동여 매고 방과 방사이 문으로만 통하도록 하는 등 경호를 강화했다. 


김대중이 하라다 맨션에 머무는 날에는 건너편 찻집에 낯선 남자들이 붐볐고 뒤쪽에는 같은 택시가 대기하고 있었다. 미행이 계속되었다. 일본 아사이 신문 정치부 고위 관계자는 김대중의 동선을 한국 중앙정보부원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일본 총리실 비서관도 한국 중정에 협조하여 동선을 알려주고 김대중이 일본정치인과 접촉하는 것을 방해했다.  우에도 코우이치로 의원은 일본 내에서 유력 정치인인 김대중 같은 인물을 납치하려면 일본 내에 협력자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증언했다. 


김대중을 끌고 들어가 마취시켜 포박한 2210호 방에는 여러 가지 증거물이 나둥그러져 있었다. 김대중의 파이프, 길이 122 센티미터 정도의 대형 배낭 2개와 로프, 드링크 병에 담긴 마취약과 화장지, 담배꽁초, 북한 제 담뱃갑이 보였다. 김경인 의원은 오후 1시 30분경, 김대중이 평소에 가까이 지냈던 우쓰노미아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쓰노미아 의원의 비서 무라카미는 1시 35분경 국가 공안 위원장 에사키 마스키에게 김대중 납치를 알렸다. 그는 바로 경시청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무라카미는 1시 55분경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이미 경찰이 현장에 도착해서 조사를 시작했을 것으로 예상하고 현장에 갔으나 자신이 처음 도착한 일본 수사 기관 인사였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현장에 있던 김경인과 양일동이 그를 맞이했다. 오후 2시 45분 순경 한 명이 현장에 왔다. 그는 김대중의 비서로부터 110번 신고 전화를 받고 출동한 경관이었다. 뒤늦게 일본 경시청 경찰들이 와서 호텔을 검색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확보하지 못했다. 오후 2시경 김대중을 태운 승용차는 도쿄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당연히 도쿄를 봉쇄하여 김대중이 탄차가 도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고속도로에서 모든 차를 세우고 검문검색을 하지도 않았다. 일본 측의 방조를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방안에 남겨 놓은 여러 가지 물건들은 일본 야쿠자나 북한의 소행이라는 의심을 사게 하려는 공작이 뻔한 가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물컵에 남아 있는 지문은 아 주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도쿄 주재 한국대사관의 1등 서기관 김동운의 지문이었다. 그는 사건 이틀 전에 2210호 옆방에 투숙했던 인물이다. 일본 수사당국은 이 지문 감식이 끝난 지 15일 후 에야 지문의 주인공을 발표했다. 김동운과 김대중을 태운 차량의 주인 유영복을 제외한 12명의 주일 한국 대사관 직원이 김대중 납치에 관여했다. 총지휘는 도쿄 주제 한국 대사관의 한국 중앙정보부 책임자 김기환 공사가 맡았다. 본국 중정의 보고 라인은 이철희 중정 차장보였다. 물론 그의 상관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었다. 훗날 이철희의 증언에 의하면 1973년 봄에 이후락이 자기를 불러 김대중을 한국으로 대려 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김대중의 사무실이 있었던 하라다 맨션 앞 찻집에 모여 김대중을 감시하던 남자들은 밀이언 자료 서비스라는 사설탐정 사무소 직원들이었다. 이 흥신소는 한 달 전에 문을 열었다. 간판도 없는 이 흥신소의 첫 고객은 한국 대사관의 김동운이었다.  의뢰를 받은 사무소장 츠보야마는 일본 자위대 상좌였다. 그는 일본 CIA 요원이었다. 따라서 밀이언 자료 서비스는 일본 중앙정보부의 공작을 위한 위장 흥신소였다. 이곳은 퇴직한 전 일본중정요원들이 출입했다. 즉 김동운이 이곳을 출입하면서 한국 중정과 일본 중정이 긴밀하게 협조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김동운과 츠보야마의 결탁은 한국 중정과 일본 중정의 공모를 의미했다.  언론은 이 의혹을 보도했고 일본 정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김대중에게 호의적이었던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소 의원들은 다나카 수상을 면담하고 이 사건은 인권침해이며 일본에 대한 주권침해 이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월 말 까지는 다나카 내각과 일본국회는 한국정부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다나카 내각은 범인 김동운의 인도를 요청하고 한일 각료회담을 무기한 연기했다. 


그러나 갑자기 일본 극우파 의원들은 이 사건에 한국 중정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박정희 정권을 두둔했다. 일본 정부도 같은 입장이었다. 극우파 의원들은 반공과 안보를 중요시하는 박정희 정권에 우호적이었다.  한편 김대중을 초청한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소 의원들은 냉전 탈피와 화해를 주장하는 중도파였다. 그들은 친 김대중파로 분류되었다. 극우파 의원들은 경찰이 현장에게 오기도 전에 이 사건이 김대중의 자작극이라고 공공연하게 신문기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오후 7시경 납치 차량은 고베시 오사카 총영사관 안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집은 오사카 총영사관 영사 박종화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이 집에서 김대중의 옷을 갈아입히고 얼굴을 코만 남기고 테이프로 감았다. 그리고 1973년 8월 8일 밤 11시경에 니시노미아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항구에 미리 준비된 요트에 김대중을 태우고 한 시간가량 어둠을 뚫고 달렸다. 오사카 항에 도착하니 대형선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중정의 특수공작선 용금호였다. 1000마력짜리 500톤 급 쾌속선이었다. 김대중은 닻을 넣어두는 갑판아래 밀실에 감금되었다. 그들은 김대중을 넓은 판자 위에 올려놓고 몸 세 곳을 판자와 함께 묶었다. 그리고 양 팔목에 약 30 키로의 물체를 매달았다. 입에는 자갈을 물리고 눈은 테이프로 감게 했다. 그리고 약 3시간 후 김대중을 갑판 위로 옮겼다.  김대중은 자기를 바다에 던져서 상어 밥이 되게 하려는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조사 위원회 위원장 이또오 나리히코 교수는 미 국무부 한국 과장 도날드 레너드와의 1980년 인터뷰 육성 녹음을 공개했다. 사건 발생 11시간 후 “우리(미 국무부)는 김대중의 경호와 안전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우리는 김대중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왜냐면 그는 존경받는 한국의 정치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무부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김대중을 납치한 사람들과 일본 정부에게 미국이 김대중이 살아있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김대중이 납치된 지 2시간 후 당시 미 중앙정보부 서울 지부장 도날드 그레그가 용산 미군부대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주한 미국 대사 하비브로부터 즉시 대사관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하비브는 그레그에게 인력을 총 동원하여 24시간 안에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하비브는 “나는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김대중을 24시간 안에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에 청와대에 가서 내가 김대중을 누가 납치했으며 그가 어디 있는지를 말할 수 있으면 김대중을 살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레그는 다음날 아침까지 김대중이 누구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납치되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었다. 그 결과 한국 중앙정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다음날 아침 그레그의 보고를 받은 하비브는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대면하고 이 사건에 연루된 몇 명의 중정 요원의 이름까지 거명하며 한국 중정이 저지른 사건임을 지적하고 김대중이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미국의 입장을 표명했다. 김대중은 훗날에 1973년 8월 9일 아침 용금호 갑판 위로 비행기 소리가 들리더니 “평 펑 소리가 나고 가려진 눈이었지만 빨간 불빛이 번쩍번쩍 지나갔다” 고 증언했다. 이 비행기는 일본 방위청의 초계기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용금호로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는 메시지가 오자 모든 것이 변했다. 김대중의 포박을 풀어주고 음료수를 주고 몸을 씻고 복장을 단정하게 했다. 1973년 8월 12일 아침 용금호는 부산부두에 도착했다. 김대중을 배에 태운지 54시간 만이었다. 한 젊은이가 김대중에게 다가와서 자신들은 애국청년구국대인데 당신의 해외 반국가적인 활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본국으로 끌고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김대중에게 수면제를 먹여 차에 태우고 서울로 올라왔다. 1973년 8월 13일 오후 8시경 그들은 동교동 김대중 자택 부근에 김대중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사건이 발생한 지 129시간 만이었다. 5박 6일의 드라마였다. 


1987년 9월 28일 이후락은 기자회견을 했다. 신동아가 김대중 납치사건을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지시하여 일어난 사건이라는 기사를 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지시는 물론 중앙정보부의 공작까지도 부인했다. 그러나 납치사건 진상조사위 시민대표 한승헌은 80년대 서울의 봄 당시에 이후락이 측근에게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김대중 납치 지시를 받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망설이고 있는데 다시 불러서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1975년 한국정부와 일본정부는 김동운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이는 한일 양국 간의 정치적인 협상으로 얻어낸 결론이었다. 1973년 11월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박정희의 친서를 들고 일본수상 다나카를 방문했다. 두 사람은 김대중 사건의 결말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문명자 씨는 두 사람사이에 뒷거래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종필은 대한항공 사장 조중훈의 일본 인맥을 통해 3억 엔을 두 세 차례 나누어서 현금으로 다나카에게 건넸다고 한다. 김동운을 비롯한 이 사건에 관여했던 중정 요원들은 사건 후 전혀 실질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1973년 8월 28일 북한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김영주(김일성의 동생)는 남북회담 중단을 선언했다. 김대중 납치 주범 이후락이 남측 공동위원장인 남북회담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락은 1973년 말 개각에서 중정 부장에서 해임되었다.


그야말로 재미있는 탐정 소설처럼 사건의 전개가 미스터리투성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강 이 사건의 내막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우선 사건의 공작은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다. 그리고 김대중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이 공작을 실행에 옮기려면 일본 정부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한국 중정은 일본 측의 협력을 미리 교섭했을 것이다. 다나카 일본 정부는 한국 중정의 비 공식적인 비밀 제안을 받아들이고 일본 중정을 앞세워 한국 중정의 공작을 도왔다. 


그런데 미국은 이 공작 자체뿐만 아니라 공작의 진행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렇지만 미국의 과거사 공개 문서에서 이 사건의 일본과 한국의 협조에 관한 대목은 모두 먹칠을 해 놓았다. 알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 추론할 수밖에 없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 하비브가 미 중정 한국 책임자 그레그에게 한 말 “나는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김대중을 24시간 안에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에 청와대에 가서 내가 김대중을 누가 납치했으며 그가 어디 있는지를 말할 수 있으면 김대중을 살릴 수 있다”를 상기해 보면 이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장악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하비브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을 그레그에게 할 수 있었을까?


한국 중앙정보부 고위층이 미 대사관에 이 사건의 진행을 알려 주면서 미 대사관의 개입시기를 조율하고 있었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중정 고위층은 애초에 김대중을 납치하여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상부의 압력 때문에 이 공작을 실천에 옮기지 않을 수 없어서 일을 저질러 놓고 미국이 말려서 김대중을 수장하지 못하고 풀어주는 연극을 했다는 추측이다. 


한국 중앙정보부장과 미국 중앙정보부 한국 지부장이 서로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한국 중정 부장이 한국 정부 내의 정보를 미국 중정 한국 지부장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알려주기도 하고, 한국 측은 한국 정부의 중요한 사안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알아내기도 할 것이다. 

당시에 박정희는 3 선 개헌, 유신 등을 통한 일인독재 체재를 만들어 영구 집권의 토대를 다져가고 있었다. 미국은 이런 박정희의 태도에 대해서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의 일인 독재 체재를 예언하며 선전했던 김대중을 한국의 유망한 정치인으로 보았고 그의 파일을 만드는 등 그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1971년 대선 이후부터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전후까지 이후락 아니면 다른 중정 고위층이 박정희에 대해서 미국 측에 어떤 정보를 주었는지는 아무것도 알려진 사실이 없다. 그러나 당시 정세를 보아서 미국 측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첩보 라인을 강화했을 가능성은 높다.


 2020년 5월 16일 자 오마이 뉴스는 “김형욱이 폭로한 박정희”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당시 미국에 망명 중이던 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박동선 사건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박정희 비리에 대한 증언을 했다. 이 증언 내용이 조사 위원장 도널드 프레이저 하원의원의 보고서에 공개되었다. 김형욱은 김대중 사건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박 대통령의 김대중에 대한 감정은 심한 열등감에 기초를 둔 증오에 가까운 것이었다. 공화당 정권은 선거법 위반의 혐의를 날조하여 김을 기소했고 1963년 8월에 동경에서 김을 유괴하였다. 유괴작전의 지휘관은 이후락 정보부 부장이었다. 박대통령이 직접 이 작전을 지휘했다는 증거는 있지는 않으나 이 같은 중대한 계획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감행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1973년 초에 박정희의 지령에 의해서 이후락이 이 공작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정희 모르게 이후락 마음대로 이런 큰일을 저지를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후락이 미국 측으로부터 김대중을 보호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었다면 이후락은 어떻게 했을까? 


박정희의 명령대로 김대중을 납치하면서 극비리에 상황을 미국 측에 알려준다. 그리고 김대중을 배에 싫고 한국으로 향한다. 항해 도중 김대중을 수장시킬 준비를 하고 청와대로부터 김대중을 풀어주라는 명령을 기다린다. 미국 측과는 사전에 24시간 안에 아무런 연락이 없으면 김대중을 바다에 던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만약에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으면 박정희가 하비브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예상했던 대로 청와대에서 김대중을 풀어주라는 연락이 왔다.  이렇게 해서 이후락은 박정희 명령에 최선을 다했고 김대중은 무사히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박정희가 원했던 공작의 미완성은 미국의 방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한국 중정이 미국 측에 사건 전개를 알려주었다는 증거와 “사전에 24시간 안에 연락이 없으면 수장시키기로 미국 측과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나와야 한다. 



 참고:

1.      유튜브: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7회 – KT 공작의 실체, 김대중 납치사건

2.      글 쓰는 고길동 blog.naver.com/pyewa/221568880998 공무원 생태학 1970년대 “데탕트 위기론”이 주는 시사점

3.      한겨레; DJ 납치사건의 숨겨진 공모자들, 안병욱 칼럼 2024.01.21

4.      한겨레; 정치일반: 의문의 트럭이 쾅-구사일생 남편붕대 유세에 눈물이 핑, 길을 찾아서 이희호 평전, 제2부 만남과 동행-12회 71년 8 대 총선

5.      한국일보 사회;71년  DJ 교통사고 베일 벗나/의문사위 “당시 목포 공화당 후보가 배후”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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