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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Apr 14. 2024

백범 김구 암살

민족주의자들은 소련과 미국이 원치 않는 지도자들이었다. 

김구(peacewoods.com)


국부를 시해한 자가 세 치 혀를 놀리며 천수를 다하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었습니다.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의 심정으로 (안두희)를 처단했습니다. – 버스 기사 박기서가 1996년10월23일 안두희를 살해하고 나서(나무위키)


강대국은 약소국을 착취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강대국은 무력으로 약소국을 점령하여 통치권을 박탈하고 자국의 이득을 취했다. 이런 식의 강대국의 행패를 제국주의라고 한다. 2차 대전 후 냉전시대에는 이와 같은 노골적인 강대국의 지배가 사라졌다. 대신에 강대국은 “도와준다”는 말로 약소국에게 접근했다.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영국을 비롯해서 서유럽 국가들은 식민지였던 약소국을 독립시켜주었다. 패전국이었던 독일, 이태리, 일본의 점령지에는 승전국이 진주했다. 새로운 점령군은 이들에게 독립을 약속했다. 그런데 일부 약소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새로이 점령한 강대국이 순수하게 자국의 이익을 무시하고 약소국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냉전 시대의 새로운 강대국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두 나라는 옛 패전국의 식민지에 자기 나라에 협조하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미국과 소련의 정책에 반대하는 약소국의 지도자는 가차 없이 제거되었다.


겉으로 점잖은 것 같은 미국과 소련의 태도는 국수적인 약소국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완전한 독립을 고집하게 했다. 제국주의는 2차대전 전이나 후의 냉전시대에도 존재했다. 다만 강대국의 태도가 노골적인 강압에서 자발적인 협조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남한과 북한에도 미국과 소련이 각각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된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의 김구 북의 조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이해타산을 따지면 두 분다 현실성이 없는 노선이었지만 역사적인 교훈을 주는 훌륭한 희생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고당 조만식 (위키피디아)

조만식은 1883년2월1일, 평안남도 강서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82년에 임오군란,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그는 조선이 청나라의 직접지배를 받던 시절에 성장했다. 조선의 감국(총독에 해당)이었던 위안스카이가 고종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상인을 억압하고 청나라 상인에게 특권을 주었다. 부친 조경학은 백 섬 지기 농사에 물산 객주 일을 하는 상인이었다. 물산 객주는 위탁판매 외에 상거래에 참여하는 상인들의 숙식 등을 제공하여 상거래를 원만하게 하는 모든 일을 해주었다. 당시에 상인이었던 부친의 노고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897년, 15세 때부터 그는 포목상을 운영했다. 얼마 후 한정교와 동업으로 지물상을 열어 재산을 모았다.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끝 난지 2년 후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장사를 그만두고 대동강 중류 지방의 베기 섬에 있는 벽도지리 마을로 피난했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러일전쟁 중에 조선은 전쟁 터를 제공 했음은 물론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종과 민비의 가렴주구로 초근목피하던 백성들에게 전쟁 동원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조만식은 술을 잘 마셨다. 과음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동업자 한정교는 그에게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했다. 한정교를 따라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이 교회는 장로교로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이었다. 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교회였다.  


1905년초, 22세에 아버지를 설득하여 숭실 중학에 입학하였다. 설립자이며 교장이었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 배위량(W.M.Baird)은 한국인의 술 버릇을 좋지 않게 생각하여 금주령을 내렸다. 교장과 박자중 교사, 안창호, 이승훈 등의 감화를 받았다. 덕분에 놀기 좋아하고 대주가로 명성을 떨치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여생 동안 금주, 금연을 하게 되었다. 


숭실 중학교 재학 중에 안창호와 평양 태극서관 주인 안태국 등의 감화를 받아 일본유학을 결심했다. 1908년에 일본으로 가서 정칙영어학교(세이소쿠 가쿠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였는데 이때 인도의 민족해방운동가인 간디의 일대기인 간디전을 읽고 깊이 감명을 받았다. 간디가 주창한 인도주의, 무저헝주의, 민주주의에 공감하여 향 후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0년에 졸업하고 매이지 대학교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 송진우, 김성수 등과 친구가 되었다. 

1913년 3월, 31세에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15년 설립자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했을 때 교장으로 승진했다. 그후 8년 동안이나 봉급도 받지 못하고 교장으로 일했다.

3.1운동에 이승훈과 함께 참여했다. 상해로 망명하려 했으나 일경에게 붙잡혀 1년 동안 복역했다. 석방된 후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1921년에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가 되었고 산전현교회 장로에 선출되었다. 기독교청년회 안에 저축조합을 만들고 평양양말회사를 설립했다.

1923년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연정회 조직에 참여했다. 그들은 연전회를 통해서 조선민족대학을 설립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같은 해에 숭인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에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사퇴했다. 

그는 1921년에서 1932년까지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였다. 그는 그의 기독교 영향력을 이용하여 평안도 전역에 걸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풀뿌리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평안도 지역의 개신교계, 상공업계, 교육계, 여성계, 청년계를 총 망라하여 하나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도 참가했다. 평양신간회지부 회장에 추대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15일에 사회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집결해서 창립된 항일단체이다. 1931년5월까지 지속되었다. 좌우 합작 독립운동 단체였다. 국내와 해외에 지부가 있었고 회원 수가 3-4만명에 이르렀다. 

1932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직을 사직했다.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에서 그를 사장으로 임명했다.  경성부에서 활동하는 데 적응하지 못하고 9개월만에 사직했다. 

평양으로 돌아와서 조선물산장려회와 관서 체육회장으로 복귀하여 지역사회 활동에 전념했다. 


증산교의 일파인 보천교와도 관계를 가졌다. 종교자금 모금을 빙자하여 독립자금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조만식을 필두로 장덕수, 송진우, 조병욱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보천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제 말 태평양 전쟁 동안에 학병지원요청, 창씨개명 등에 일체 협조하지 않았다. 1944년 주기철 목사가 옥사하고 신정현 교회가 강제로 폐쇄되자 1945년 봄 그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 강서군으로 내려갔다.


1945년8월15일, 항복한 일본의 평안남도 도지사는 고향에 은거하고 있는 조만식에게 차량을 보내어 평양으로 모셔오려고 했다. 조만식은 이를 거절하고 오윤선이 보낸 차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왔다. 해방 직 후에 많은 청년들이 그를 찾아왔다. 만주에서 귀국한 백선엽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조만식은 백선엽을 그의 비서로 썼다. 그는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결성에 적극 참여했다. 8월16일에 평안남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유지하여 사회적 혼란을 막았다. 평양남도 도민의 지지를 받아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8월25일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왔다. 소련군은 조만식의 평남 건준 과 현준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을 통합하라고 했다. 양쪽에서 각각 16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조만식이 위원장에, 오윤선과 현준혁이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현준혁은 연희전문을 나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수재였다. 현준혁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조만식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만식의 대중적 지지는 대단했다. 소련군 25군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 메클레르 증좌는 ‘평양은 조만식 판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렇게 평양에서는 현준혁과 조만식이 좌우 합작을 이루어 내는 듯했다.

9월3일 현준혁이 극우 테러 단체인 대동단(후에 벡의사)의 염동진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9월8일 서울에서는 여운형과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고 조만식을 재정 부장으로 임명했다. 인공은 미군 진주 후 해체되었다.

9월12일 평양 산수소학교에서 인민정치위원회가 소련군 감시하에서 열렸다. 조만식은 그 날 사회를 진행하였다. 공산진영은 민족진영의 의견을 묵살하고 인신공격을 퍼부어 회의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9월30일 메클레르 중좌의 소개로 김일성을 만났다. 10월7일 조만식은 북조선 5도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한국인 고문 11명을 선정했는데 조만식도 그 중에 한명이였으나 참여하지 않았다. 


해방 직 후 공산주의자들은 소작인이 7할을 지주가 3할을 가지는 3-7제를 실시하겠다고 선전했다. 대다수의 농민이 소작인이었던 당시에 이 제도는 좌파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중요한 정책이었다. 남쪽의 한민당과 북의 조만식 등 우파들은 이를 반대했다. 


1945년 9월21일 소련은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을 모두 포함한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지시했다. 이 때는 이미 많은 민족주의자가 남하해서 조만식이 거의 유일하게 북에 남아 있는 우파 민족주의자였다. 소련군정은 김일성과 최용건에게 정당을 만들라고 권유했다. 


9월27일에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3-7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조만식은 항의하는 표시로2일 동안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본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 10월14일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10월16일-10월17일 평양의 요릿집 가선에서 김일성 가정을 위한 환영연을 주관하였다. 


소련정부와 소련군정은 38선 이북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하고 있었다. 조만식은 이를 정면으로 반대했다. 11월15일 김일성과의 대담에서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을 포함한 중앙정부 수립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자신이 서울에 가겠다고 김일성에게 제시했다. 

이에 반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참여에 기초하여 밑으로부터 정권기관을 수립해 나가고 나중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답했다. 선 북한 단독정부, 후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뜻이다. 조만식은 12월1일 이전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서 외국군대의 철수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김일성이 점령군의 철수를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조만식의 서울 방문은 소련군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20일 조만식은 김일성과 만났다. 김일성은 조만식을 깍듯이 대하며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정당 창당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지만 조만식은 통일정부 수립을 고집했다. 이것은 김일성이 공산당을 창당하기 위한 공식 절차에 불과했다. 


10월 하순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공산당에 대항 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1945년 10월28일 북조선5도 행정국이 설치되고 조만식이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11월3일, 조만식은 광주학생사건을 기념하는 뜻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우파 민족주의 계열이며 기독교 계열 최초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105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105명의 발기인을 두었다. 중앙상임위원은 33인으로 하였는데 이는 3.1운동의 33인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조만식은 당수가 되었다. 부당수에는 제자 이윤영과 최용건이 선출되었다. 조만식은 당이 반공노선임을 분명이 했다. 조만식은 즉각적인 친일파 청산을 당 정강에 포함하는 것을 반대했다. 

조만식의 지지 기반은 개신교 세력과 자산 계급에 있었다. 특히 평안남도의 미국식 장로교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면 단위 지구당을 만들어 11월의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약진했다. 창당 수개월 만에 50만 당원을 확보했다. 조만식의 인품과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순수한 염원에 감복하여 조선민주당은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조만식의 지지 기반인 기독교 세력과 자산 계급은 공산주의 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조선민주당은 소련 군정 그리고 공산주의자들과 점차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정은 대중의 인기가 높은 조만식을 회유와 압박으로 소련의 정책에 협조하도록 하려 했다. 


1945년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 신탁통치안이 통과되자 조만식은 김구 등과 함께 신탁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소련 군정 민정 사령관이었던 로마넨코 장군은 만일 조만식이 모스크바 산상회의 결정에 찬성한 다면 조선정부의 고위직으로 옹립하고 김일성에게는 군부의 임무를 맡기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소련 군정 청장 겸 소비에트 연방 극동 사령관 정치위원 스티코프는 조만식을 찾아와서 당장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지지 성명을 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그 말이 그 말’이라고 완강히 거절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말은 신탁에 찬성한다’는 말과 같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화가 난 스티코프는 권총을 빼들고 위협했다. 조만식은 한복 옷자락을 헤쳐 보이며 ‘그래, 쏘아라’라고 맞받았다고 한다. 스티코프는 얼굴을 붉히고 되 돌아갔다. 치스차코프 점령군 사령관은 신탁통치 결정서에 서명만 해주면 조선의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조만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1946년 1월2일, 4일, 5일 세차례 걸쳐 조만식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 자리까지 제시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김일성도 조만식을 여러 번 찾아가 모스크바 협정 지지를 요청했다. 제자 최용건은 19번을 찾아가서 설득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조만식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서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직에서 축출된 후 1946년1월5일부터 호텔에 연금되었다.  그가 연금 되기 전에 소련 군정 당국은 ‘일제가 항복 직전에 그를 석방한 것은 일본첩자 였기 때문’이라는 허위 사실을 언론이 보도하게 했다고 한다. 


1948년 5월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위해서 평양에 갓을 때, 그들은 조만식을 만날 수 없었다. 서울에 돌아와서의 공동성명에서 “양인 모두 그를 만날 수 없었는데, 그를 친일 반역자로 낙인 찍어 재판에 회부할 서류들을 마련중인 것으로 보였다”고 했다. 

1946년1월23일, 김일성은 조만식을 반동으로 규탄하고 조선민주당을 접수하여 다음날 최용건을 북조선민주당 당수로 임명하였다. 당을 접수한 최용건은 ‘조만식이 일본의 신민이 되는 것을 칭찬하고 격려한 사이비 민족주의자’라고 비난했다. 


1946년2월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조만식은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이 때 같이 선출된 대의원은 김구, 김규식, 이승만,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이었다. 

1946년2월9일부터 2월11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과 신탁통치에 대해서 논의했다.


1946년 4월 김구와 이승만은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보냈다. 김욱의 임무는 조만식으로부터 미소공동위원회 5호 성명에 서명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당시에 덕수궁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제1차 회담이 진행 중이었다. 소련은 반탁운동에 참여했던 단체와 정당을 협의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하여 난항을 겪고 있었다. 미국 편인 우익단체의 배제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측의 설득으로 소련이 조금 양보하여 4월5일, 과거에 반탁운동을 했더라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선언한 단체 및 정당’들은 협상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내용의 제5호 성명을 발표했다. 

이 제5호 성명에 근거하여 미군정은 우익 단체들에게 제5호 성명에 서명하도록 설득 작업에 나섰다. 김구와 이승만은 서명에 거절하다가 4월27일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5호 성명에 서명한다고 해서 곧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 결과 김구와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 단체와 정당 들이 제5호 성명에 서명했다. 

김욱은 조만식이 연금되어 있는 고려호텔을 찾아갔다. 조만식은 제5호 성명을 지지한다고 말은 했으나 직접 서명하지 않았다. 김욱은 조만식이 유고시에 그의 임무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김구와 이승만에게 제출하였다. 이윤형은 서명하면서 김구와 이승만 외에는 공개하지 많는 조건을 약속 받았지만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의 의견을 반박하는 자료로 사용되어 이 사실이 밝혀 졌다. 신분의 위협을 느낀 이윤형은 월남하였다. 


1946년 5월 조만식은 남한과 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국토의 분단이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밀사를 보내 아내 전선애를 연금되어 있는 고려호텔로 불렀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준비했다. 미리 잘라 둔 머리카락과 머리카락을 자른 일시를 적은 쪽지를 담은 흰 봉투를 면회 온 아내에게 주었다. 그는 아내에게 호텔의 피아노로 찬송가를 연주하게 했다. 그리고 세 자녀를 데리고 방에 들어가 기도했다. 아내에게 아이들을 서울로 데려가 공부시키라고 당부했다. 전선애는 조만식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고 세 자녀와 함께 월남했다. 


1946년10월 미군정 경제고문관 번스(Arthur C. Bunce)는 평양을 방문하는 중 조만식을 만났다. 번스를 초청한 소련군의 경제고문인 빌라사노프는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지지하지 않는 반동이라고 번스에게 말했다. 번스는 ‘조만식이 비교적 건강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는 우리를 떠나 보내기를 주저했다’고 회고했다. 

1947년 6월말 브라운 소장 등 미군정 대표단이 회담 차 특별열차로 평양을 방문했다. 6월30일 열차 안에서 조만식과 브라운이 두 세시간 동안 회담을 했다. 브라운이 월남을 권유했지만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 소”하며 거절했다.

조만식은 해방 초기에 여운형, 김규식 등이 서울로 오라고 권유했고, 김일성 세력과 갈등할 무렵에는 남한의 반공 세력, 미군정, 월남한 개신교인들이 월남 시키려고 노력을 지속적으로 했지만 북녘의 동포를 버리고 혼자 월남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48년 5월 김일성과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김일성 자신에게는 그렇게 할 권한이 없으며 소련 군정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거절했다. 


1950년6월10일, 북조선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이 김삼룡 및 이주하를 조만식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여 남한 정부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북측은 6월23일을 이 문제에 대한 협상기일로 제안했다. 6월16일 이승만은 북에서 조만식을 먼저 보내라고 요구했다. 6월18일 북한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문제는 유야무야되었다. 

1950년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퇴각했다가 9월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10월1일에 북진하여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1950년 10월15일, 조만식은 평양 함락이 목전에 있을 때 북조선 내무 성 안에서 일단의 내무서원들에 의해서 총살되었다. 민족주의자 조만식은 북에서 점령국 소련의 압박에 저항하다가 사망했다. 민족주의자 김구는 남에서 점령국 미국에 저항하다가 미군 방첩대 요원 안두희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1945년8월15일이 해방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독립운동의 연속이었다. 

김구는 천연두에 걸렸섰다.

김구는 1876년 8월29일 황해도 해주군 백운장 텃골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날 때 김구의 이름은 창범이었고 19세때 창수로 바꾸었다. 36세에 거북 구자 구를 아홉 구자로 했는데 보통사람들이 쓰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의 호 백범은 백정의 백과 범부의 범자를 따서 지었다.  


김구의 집안은 양반이 아니었다. 요지 음 한국사람들은 ‘상놈’이라는 말을 욕으로 곧잘 쓰지만, 조선시대에 평민을 상놈이라고 했다.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상민은 대다수의 보통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구는 상민 태생이었다. 

김구 집안 사람들은 텃골 금방의 양반이었던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에게 대대로 천대를 받았다. 김구는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라고 회고했다. 


김구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김구는 신분차별에 대한 불만이 컸다. 

집안에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다. 그 집 할아버지가 새 사돈을 만나려고 갓을 쓰고 나가셨는데 이웃 양반이 이를 보고 갓을 찢어버렸다. 이후 그 할아버지는 갓을 못쓰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린 김구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김구의 성장기는 대원군 수렴청정이 끝나고 고종과 민비의 가렴주구가 극심하던 시기이다.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중인과 상민이 뇌물을 주고 양반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과거시험은 부정행위로 엉망이 되었다. 심지어 난장판이란 말이 과거 시험장에서 비롯될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정한 반법으로 양반이 되어 병역의무 면제 등 특권을 누렸다. 따라서 상민들의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는 컸다. 

어린 김구는 과거에 급제하여 양반이 돼야겠다 고 마음먹었다. 아버지에게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어려운 살림에 선뜻 아들을 서당에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베를 짜서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여 서당에 보냈다. 김구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김구가 11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쓸어졌다. 그의 부모는 병치료를 위해서 전국의 명의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 동안 김구는 친척 집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병세가 어느정도 호전되어 부모님이 돌아왔다. 그러나 기울어진 가세는 김구의 학비를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 어머니 정씨의 6촌인 정문재의 서당에서 무료로 공부했다. 

5년동안 공부한 후, 17세에 스승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년 경과과거에 응시했다. 경과는 왕실이나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과거였다. 김구는 과거시험의 부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정문재에게 “이번에는 아버님 이름으로 답안을 지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기회가 많지 않겠습니까?”하고 부탁했다. 말하자면 완전한 대리 시험을 부탁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스승은 “글은 내가 지어 줄 테니 글씨는 네가 써라”고 대답했다. 김구는 글씨 쓰는 연습을 열심히 하여 과거에 응했다. 물론 둘이서 같이 과거 시험장에 가서 시험지에 아버지 이름을 적고 스승이 지어준 글을 베껴 김구가 답안을 써서 과거 시험을 마쳤을 것이다. 대단한 부정 행위였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냥 뇌물을 주고 합격하는 판국에 김구의 부정은 순진했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그에게 과거합격은 그림에 떡이었다. 다 때려치우고 아버지의 권유로 관상과 풍수를 공부했다. 관상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하나 하나 뜯어보며 장래의 운을 알아보았다. 김구는 크게 실망했다. 자신의 얼굴 어디에도 행운을 담은 부분은 없었다. 김구의 면상은 나쁜 운 밖에 보이지 않았다. 과거 시험에 낙방하여 양반이 되지도 못한데다 이번에는 관상까지 좋지 않은 것을 알게 되어 크게 절망했다. 

그러던 중 관상 책 마지막 구절을 보고 크게 고무되었다. ‘얼굴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고 했다. 이것을 본 김구는 얼굴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 겼다고 결심하였다. 


1893년에 동학교도가 되었다. 철이 든 이래 신붐차별에 몸서리를 쳤던 김구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동학에 매료되었다. 그는 열심히 동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맹렬하게 전도했다. 1년만에 김구가 거느리는 연비(신도)의 조직이 급속도로 커져서 18세의 나이로 수백명의 연비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가 되었다. 1894년 가을 2대 교주 최시형을 찾아갈 때 황해도 대표 접주로 선발되었다.  최시영은 각지의 접주 대표들에게 연비를 보고하라는 영을 내렸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충북 보은으로 접주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김구도 다른 14명의 황해도 대표와 함께 보은으로 갔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농민들의 생계가 말이 아니었다. 인내천을 교리로 하여 신분차별에 반대하고 만인의 평등을 가르치는 동학교는 양반계급에 커다란 도전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농사지어서 수확한 곡식을 양반 관리들에게 빼앗기는 농민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이었다.

보은집회는 선무사 어윤중의 중재로 민중봉기와 무력충돌 없이 해산되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김구는 최시형으로부터 접주 첩지를 받고 돌아가는 길에 한성에서 동학혁명군 봉기 소식을 들었다. 그도 황해도 팔봉에서 700여명의 동학군을 조직하고 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해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성안에서 일본군이 쏘는 대포에 놀라서 김구의 동학군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져 버렸다. 

김구의 동학군 부대안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1894년 12월 김구는 홍역을 앓고 있었다.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 3개월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부대안의 이동엽이 김구의 최측근 이었던 이종선을 처형했다. 김구의 동학군은 이동엽에게 넘어가고 김구는 혼자 몸이 되어 안태훈을 찾아갔다.

안태훈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이다. 안중근의 집안은 황해도 해주에서400석을 하는 대지주였다. 안태훈은 미곡상을 했다. 동학란 동안에 농민군은 대지주와 양반을 공격했다. 그래서 상당수의 지주와 양반들이 군사를 일으켜 동학군과 싸웠다. 안태훈은 김홍집 내각의 고위 관리였던 김종한의 도움을 받아 군사를 일으켜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명을 크게 이기기도 했다. 

안태훈은 김구가 동학군 장수일 때 편지를 보내 귀순을 권유하기도 했다.  1895년 2월 신천군 청계동에 있는 안태훈의 산채에 기거하게 되었다. 안태훈은 김구의 부모까지 모셔다 같이 살게 했다. 김구와 안중근은 서로 만나기는 했지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락거리다가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동네 서당에서 배우던 학문을 당대에 이름있는 유학자로부터 평생 처음 체계적으로 배웠다. 그는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를 배웠지만 고능선은 당시 극 보수 노론의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는 성리학자였다. 그는 일본이 성장하여 조선이 망국의 위기에 처했다고 하며 조선은 청나라와 연합하여 왜적을 물리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스승 고능선의 말을 그대로 믿은 김구는 청나라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안테훈의 사랑채에서 만난 남원 출신 김형진을 길동무로 하여 백두산을 구경하고 만주를 돌아 북경으로 들어갈 요량이었다.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필두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는 빌미를 주었고 양 대국의 군대가 한반도에서 충돌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은 재빨리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를 장악하여 개화파 친일 내각을 앞세워 갑오경장을 밀어 부쳤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청은 10년 동안의 조선 직접통치를 마감하고 조선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조선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듯했으나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일본은 민비를 제거하여 친러 세력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민비 제거(을미사변) 이후 개화파는 다시 정국을 장악하여 좀 더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극우 세력이었던 노론 계열의 위정척사파들은 전국적으로 의병(을미의병)을 일으키는 등 개화파의 개혁에 반기를 들었다. 위정척사파는 옳은 것을 취하고 사악한 것은 버린다는 뜻이다. 그들은 바른 것은 성리학이고 사악한 것은 일본과 서양이라고 믿었다. 또 사악한 것 중에는 상 행위도 포함되어 이득을 챙겨 돈을 벌면 나쁜 사람으로 배척했다. 

김구는 신천을 떠나 평양 을밀대와 모란봉에서 휴식하고 강동 양덕 맹신을 거쳐 함경도로 들어갔다. 고원, 정평, 함흥, 단천, 혜산진에 도착했는데 백두산이 위험하다고 하여 백두산 구경을 포기했다. 그리고 만주 통화로 들어갔다. 

민비시해에 분개한 김이언이 강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이언는 만주 삼도구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가던 김구는 김이언이 강계성을 공격할 때 의병에 가담했다. 다음은 [춘천항일독립운동사]에 있는 김이언과 김구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을미사변 이후 문석봉의 유성의병과 때를 같이하여 거국토적에 뜻을 둔 또 다른 의병 전투가 평안북도 강계지방에서 김이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김이언이 만주의 삼도구에 거점을 두면서 초산군 이방을 지낸 김규현과 동학접주였고 주자학에 심취한 김창수(김구)와 더불어 압록강 양안 초산 강계 벽동 등의 포수와 중국 거주 동포 중에서 총을 가잔 300여명을 모집하여 의진을 형성하고 민비시해사건에 항거하는 격문(김규현 작성)을 띄우고, 1895년11월에 압록강을 건너 고산진을 점령한 뒤 무장을 강화하여 강계읍으로 진격하였다.’

강계는 당시 23부 중의 하나여서 관찰사가 있던 곳이었다. 더구나 국경을 수비하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의병의 선두가 읍내인 인풍루 밖 십리에 이르자 정보가 누출되어 관군의 기슴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인터넡: 지역N 문화, 국난극복, 국난극복 민중의 힘, 의병; 평안도 강계지역의 의병장 김이언; 이학주)

김구는 안태훈의 산채가 있는 신천군으로 돌아갔다. 관청에서 그를 체포하려 추적했으나 안태훈의 협조로 무사했다. 


21세 되던 해 1896년2월 다시 청나라로 가려 했다가 단발 정지령 시행 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1896년3월8일, 치하포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황해도에 있는 치하포는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평안남도 진남포를 마주 보고 있는 포구이다. 김창수(김구)가 묶고 있는 여관에는 성이 정씨이고 황해도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진남포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서울말을 썼다. 한복인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보였다. 김구는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하고 칼까지 소지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을미사변 주범인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아니면 그의 일당임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그리고 이자를 살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겠다 고 생각했다. 

다음날 3월9일 아침, 김구는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면서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그는 문기둥에 기대어 서서 여관 종업원과 밥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김구는 천천히 일어나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며 그를 발길로 차서 한길이나 되는 댓돌 밑에 떨어뜨리고 쫓아가 목을 힘껏 밟았다. 뜻밖의 소란에 네 개의 방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모두 결투 장면을 구경하려고 몰려나왔다. 김구는 그들에게 “누구든 이 왜놈을 위하여 나에게 덤비는 자는 나에게 맞아 죽을 것이다”라고 외쳤다. 왜놈이 갑자기 일어나서 칼을 뽑아 김구 얼굴 앞에서 휘두르니 새벽 달빛에 검광이 번쩍였다. 김구는 칼을 피하면서 그의 옆구리를 발로 힘껏 찼다. 그가 쓰러졌다. 김구는 검을 든 그의 팔목을 힘껏 밟았다. 칼이 땅에 떨어졌다. 김구는 그의 칼을 주어서 그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난도질을 했다. (인터넽: 백번 김구의 ‘치하포 사건’ 관련기록 검토; 양윤모, 인하대 인문과학연구소 상임연구원, 인하대 강사, 2002년 12월15일)  

김구가 살해한 일본인은 쓰치다 조스케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그가 일본 육군 중위인데 조선에 밀파된 간첩이라고 했지만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그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구는 현장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그를 살해했다는 사실과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식당 주인이자 동장인 이화보를 시켜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엽전 8백전 중 배 주인에게 배 삯을 떼어주고 나머지를 이화조에게 주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석 달 후에 김구는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1896년 9월 13일 인천항재판소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사형의 집행을 임금이 결정하는 조률처판을 받았다. 고종이 살해동기가 국모보수(국모의 원수를 갚음)이라는 것을 알고 사형집행을 정지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 … 이 칙명은 인천감리서의 이재벙 감리에게 전화로 신속히 전달되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 전화 개통이 사흘만 지체 되었 서도 나는 스물한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 라고 회상했다. 

사형은 면제되었지만 감옥 생활은 계속되었다. 감옥 안에서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서, 세계지리 등을 읽고 개화사상과 근대문명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위정척사의 성리학적 사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구는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감옥이 서당이 되었다. 이때 김구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 간수가 중국에서 발간된 세계역사, 세계지리 등을 김구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 책을 읽은 김구는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 (위키백과: 김구;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0-251)


김구는 1898년 3월, 동료 죄수들과 함께 탈옥에 성공했다.  이 탈옥은 강화도 사람 김주경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인천 감리서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고 있던 김구에 대한 소식이 감화도에까지 퍼졌다. 김구의 감옥에서의 생활과 제판에서 보여준 기개는 많은 사람들이 인천에 와서 그의 재판을 관람하게 했다. 강화도의 노름꾼 김주경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재판에서 김구의 태도에 감격한 그는 곧바로 김구 구명운동에 나섰다. 당시 법무대신 한규설에게 김구 석방을 탄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법원에 선처를 부탁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7,8개월 동안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김구 구명운동을 하다가 그 동안 모은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 그는 자금 마련을 위해서 관용선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어 블라디 보스토크로 도주했다. 배운 제주가 놀음 밖에 없었던 김주경은 골패에 자신 만이 식별할 수 있는 표식을 한 다음 강화도 인천 일대의 노름판에 유통시켰다. 그래서 다시 큰돈을 벌었다.  김주경은 그 돈으로 김구를 탈옥시키기로 결심하고 옷한벌을 사 들고 인천 감리서를 찾아 갔다.  그리고 탈옥을 암시하는 시 한 편을 건내 주었다.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믈을 떨치고 나가야 물고기가 아니라,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그리고 김주경은 간수를 매수하여 1898년 3월 김구를 탈출 시켰다. (café.daum.net/seojinam: 우리민족 바로알기; 백범 김구의 강화도 은인 김주경, 항상일로 2022.11.03; 출처 제물포 구락부)


관청은 그가 탈옥하자 부모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도망자가 된 김구는 초근목피, 걸식을 하며 민가에 숨어서 삼남지방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동년 가을 경에 공주 출신 이서방이라는 사람을 따라 공주 마곡사에 도착했다. 이서방의 권유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그러나 중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고 붙잡히지 않으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중이 되려는 학습에 적응하지 못하여 황해도 해주 고향으로 돌아왔다.

도망자의 신세로 삼남 지방을 방황하던 김창수(김구)는 1900년 2월 김두래로 이름을 바꾸고 강화도의 김주경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김주경을 만날 수 없었다. 김구는 김주경의 아들과 인근 동네 아이들에게 동몽선습과 천자문등을 가르치면서 3개월을 김주경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김구는 본래의 이름 김창수를 이곳에서 김구로 바꾸었다. 김구는 이때 김주경이 자신의 구명과 탈옥을 위해서 가산을 탕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붓장사를 하다가 객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과 계몽운동에 정진했다. 1901년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사망했다. 이때 김구는 예수교를 믿기로 결심했다. 1902년 1월 할머니 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친정 조카뻘인 최여옥과 약혼했으나 다음 해 1 월에 약혼여가 병사했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예수교에 입교시켰다.  아버지 3년상을 마치고 2월에 김구는 감리교에 입교하였다. 1903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를 설립해서 운영하다가 백남훈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공립학교 교원으로 일했다. 같은 해 여름에 김구는 농상공부 종상위원에 임명되었다. 1904년 19세 때 최준례와 혼인했다. 김구는 아내를 경성 경신여학교에 보냈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은 조선과 을사조약을 맺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하는 조약으로 사실상 한민족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조약이었다, 김구는 을사조약 무효 투쟁에 나섰다. 진남포 예수 교회 에버트 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을사보호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 이준, 전덕기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정부의 강제진압과 국민적 호응이 없어서 포기하고 교육사업과 계몽운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6년에 황해도 문화군에 있는 서명의숙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1907년에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으로 활동하였다. 신민회는 상동감리교회 부설 공옥학교 교사들과 상동감리교회 담임 목사였던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항일 비밀 결사단체이다. 1907년 이회영, 전덕기,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김구, 최광옥, 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조직이 확장 발전되었다. 


1909년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양산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재령 보강학교 교장직을 겸임했다. 그리고 김구는 학교가 없는 오지 마을을 찾아 다니며 환등기로 수업을 했다. 김구는 일본의 야욕을 주지 시키고 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09년 10월 김구는 환등기를 틀어 놓고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경찰이 들이 닥쳤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느데 김구가 안중근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혐의가 없다고 판정되어 풀려났다. 1910년8월29일 일본은 조선을 강점했다. 그해 11월 경복궁 옆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는 만주로 이주하여 무관을 양성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김구도 황해도 책임자로 참석했다. 그리고 한달 후 12월에 신민회 관련 애국지사들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이 군자금을 모으다가 발각된 것을 총독부가 서북지방의 신민회 관련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해서 기독교, 부호, 지식인 등의 항일세력에게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시타게 암살 모의 누명을 시워 대거 체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평안도와 황해도 독립운동가들 600명을 취조하여 105명을 구금했다. 

김구도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갖은 고문으로 고생하다가 5년만에1915년 8월 특별 가출옥되었다. 그의 나이 40이었다. 감옥에서 나온 김구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로 갔다.


궁긍 농장 감검,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 계몽운동을 하다가 3.1운동을 겪었다. 3.1운동 후 조선에서 독립운동 하기가 어려워 지자 그는 상하이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안동(단동)에 도착하여 배편으로 1919년 4 월 중순경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여운형이 조직한 신한청년당에 가입하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참여했다. 

9월에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서 임시정부 문지기를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김구는 기라성 같은 임시정부 지도자들에 비해 자신의 신분이 너무나 모자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구는 안창호의 천거로 경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정보, 감찰, 경찰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사법부가 없는 임정의 재판장 일도 했다. 국무위원보다 한단계 아래인 경무국장 직책을 맡은 김구는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밀정 선우 갑과 강인우가 김구에게 그들의 정체를 자백하자 추방했다. 일본 영사관의 첩자로 독립운동가를 따라 상하이에 온 17세 소년 김도순을 총살하였다. 그 후 일경은 김구를 납치, 암살하려고 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황학선이라는 사람은 병원을 차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은 후 한 번에 모두 약물로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김구는 그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1920년대 국제정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유리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파리평화회의는 모두 일본의 국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흘러 갔다. 세계공산주의의 등장과 레닌의 제국주의 식민지 약소국가 원조 전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호감을 샀다. 구미 국가들이 일본 편이었던 반면에 레닌은 약소국을 실질적으로 도왔다. 물론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산주의 확산이었다. 

파리평화 회의 조선 대표 파견과 3.1운동의 실패를 경험한 상하이 임시정부 인사들은 레닌의 원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임시정부는 레닌의 원조 없이는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왔다. 1922년에 어머니 곽낙원도 상하이에 있는 가족과 합류했다. 9월에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공산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 등 이념논쟁으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 지음 국무총리 이동휘는 한형권과 김립 등의로 하여금 레닌의 원조 자금을 수령하게 하였다. 김립은 원조 자금 200 만불 중 40만불을 임시정부에 가져다 주지 않고 자신의 소속 당인 한인사회당에게 주었다. 1922년 2월6일 김구는 노면직과 오종균을 시켜 김립을 사살했다. 김구는 김립이 그 돈을 횡령하여 호화로운 사 생활에 썼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하였지만 그런 증거는 없었다. 한국 외국어 대학 박병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정적들이 김립을 모함하여 깁립 레닌자금 횡령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무튼 김구는 그 돈이 임정으로 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여 정적이 만든 허위 소문을 믿고 김립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 이후 임정의 좌파들이 임정을 떠나고 레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 그리고 임정은 극심한 자금난에 빠지기 시작했다. 월급을 받지 못하는 임정 직원들도 하나 들 떠났다. 임정은 점차 빈집이 되어갔다.

1923년 4월9일 내무총장에 재임되고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다. 자금난과 그로인한 인력난에 허덕이는 임정을 운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구의 가정에 불행이 찾아왔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사망했다. 차남 김신을 낳은 후 얼마 안 되어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들고 층계를 내려오다가 글러서 가슴을 다쳐 늑막염이 되고 염증이 폐로 번져 폐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다가 사망했다. 아내가 입원해 있던 병원이 일본관활 지역에 있어서 일경의 수배를 받고 있었던 김구는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김구가 스물 아홉, 최준례가 열여덟에 혼인한지 20년만에 사별했다. 아내가 김구를 찾아 상하이에 온지 3년여만이었다. 김구는 둘째 아들 김신을 고아원에 맡겼다.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허덕이고 있는 판국에 생활력이 없는 김구는 그나마 임정의 높은 직책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염두도 낼 수 없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진 가정사정을 보다 못한 김구의 어머니는 아들의 종아리를 때리면서 돈벌이를 하라고 다그쳤지만 김구는 독립운동을 고집했다. 1925년 11월 결국 어머니와 둘째 아들 김신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1926년 9월 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이 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으로 취임 해달라고 권고 하자  한 동안 사양하다가 국무령 직을 수락하여 1926년 12월14일 국무령에 선출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1927년 4월10일, 국무령 제를 폐지하여 국무위원제로 바꾸고 주석을 맡았다. 1927년8월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내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1월 이시영, 이동녕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당무이사에 선출되었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운영 자금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다. 임시정부 사무실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서 건물주로부터 고발당했다. 청사의 각부 직원,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했다. 그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무국 직원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다른곳에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임정 일을 하기도 했다. 김구는 임시정부 운영자금 대부분을 재중국 한인 교민단체와 교포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모금, 중국인 기업체에 근무하는 한인, 시장 상인, 아편 장사 등이 내는 돈에 의존했다. 일부는 3인조 암살단 등 비밀조직을 만들어 일본군의 군자금을 탈취하여 운영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직원이 부족해서 김구 자신이 성금을 걷으러 다녀야 했다. 교포들 간에 김구는 “두상” 또는 “수상”으로 알려져 있었다. 망명정부의 수반이라는 위치 때문에 상공업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김구는 재미 교포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서 모금 운동을 했다.  많은 재미 교포들이 성금을 보내왔다. 1928년부터 이승만에게도 꾸준히 편지를 보네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은 자신도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약간의 자금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1924년 김구는 임시정부 무장 독립단체 대한통의부의 오동진 선생에게 남만주의 친일파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한통의부는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무장 항일 단체를 통일한 단체이다. 대한통의부는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으로 구성된 3인조 암살단을 조직하여 1924년 6월7일 만주 보민회 괴수 최정규의 집을 습격했다. 최정규는 책상 밑에 숨어서 겨우 살아 남았지만 장모 이씨는 총에 맞아 죽었고 부하 허균은 총상을 입고 며칠 후에 사망했다. 

1920년, 최정규는 일제의 도움을 받아 만주 보민회를 조직하여 만주에 사는 조선 사람들과 독립군을 괴롭힌 악질 친일파였다. 3.1운동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몰려 들었다. 한편 일제가 조선사람들의 만주 이주를 장려했고 일본 정부는 이주한 조선인들을 우대했다. 조선사람들에게 만주가 원래 조선사람들의 땅이라고 하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 보다 유리하게 도와주었다. 만주와 중국을 침략할 포석이었다.  만주사변 이전의 만주는 아직 중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남만주 철도의 운영을 빌미로 요동지방을 점령하여 관동이라 하고 관동군을 주둔시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 독립군은 만주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항일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일본 편으로 만드는 것은 중요한 사업이었다. 일진회 출신이었던 최정규는 만주의 조선 사람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조선 사람을 감시하고 그들의 동향을 일본 공사관에 알려서 항일운동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단체를 만들겠다고 일본 공사에게 건의했다. 남의 나라 영토에 들어가 항일 무장 단체를 제거하기가 불편하던 차에 조선인들 자신이 해결해 주겠 다니 그 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일제는 외무성과 관동군을 통해 최정규에게 자금을 주어 만주보민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무장까지 하여 독립군을 괴롭혔다. 독립군은 이에 저항하여 많은 보민회 회원들을 제거했다. 

3인조 암살단은 여순조선인회 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 배정자, 일진회 회장 이용구 등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같은 해 7월에는 봉천성 일본 영사관 폭파를 시도했으나 폭탄 불발로 실패했다. 같은 날 일본 장성이 드나들던 고급요정 금정관에 침입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탈취하여 도주하는 과정에서 김광추는 현장에서 사살되고 박희광과 김졍현은 체포되었다. 


1930년 8월4일 김구는 다시 국무령에 임명되었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1931년 김구는 의열 항쟁 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 김구는 작은 자금으로 큰 효과를 노릴 수 있는 항일 투쟁 방식을 모색하다가 일본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 결과였다.

김구는 용기 있는 조선인 청년 단원을 모집했다. 이봉창이 찾아왔다. 그는 일본 천황을 폭탄을 던져 죽이겠다고 장담했다. 1932년 1월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관명식에 참관한 히로히토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천황은 무사했다. 

30대 초반의 한 조선인 청년이 일본 천황에게 던진 폭탄이 천황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이 국내외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우선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넣어 주었다. 미국 교포들의 성금도 급격히 증가했다. 한인애국단이 단단한 단체가 되었고 그동안 임정의 존재가 미미해져 가는 추세를 멈추게 하여 그 존재감을 국내외에 알리게 되었다. 

만보산 사건 이후 중국사람들은 ‘조선사람과 일본사람들이 같은 편’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봉창의 일 황 폭탄 투척 사건은 조선사람들은 중국과 같은 편이고 일본은 두 나라의 적’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상하이에서 중국인의 항일 정서가 급격히 증가했다.

조선내의 신문이 총독부의 보도 관제 때문에 즉각적인 자세한 내용의 보도가 나오지 않았던 데 반해서 중국신문들은 일제히 이봉창 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만주 사변 직후 중국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 무척 격화되어 있었다. 의거 다음날인1932년1월9일 자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민국일보, 신보, 시보, 시사신보 남경의 중앙일보, 천진의 대공보는 “한인이 일황을 저격했는데 폭탄이 적중하지 않았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누가에 내각이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 사퇴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민국일보와 신보는 “한인이 일황에게 폭탄을 투척했는데, 불행하게도 그 부차에서 터졌다. 투척한 수류탄이 잘못되어 뒤따르던 마차에 떨어졌다.”고 보도했다. 이봉창의 폭탄이 천황에게 명중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논조였다.

중국신문은 이봉창 의거에 대한 한국독립당이 발표한 선언도 보도했다. 1월10일 ‘일황저격은 적의 괴수를 제거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 이봉창의 행동은 2천만 한인의 의지를 대신 실행한 것’이라는 제목의 선언을 발표했고 중앙일보(중국)가 이를 1월19일자로 보도했다. 

중국 신문들이 이봉창의 의거를 찬양하는 보도를 내자 청도, 복주, 상해 등 각지에서 항의와 함께 난동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서 중국과 일본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급기야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일본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킨 원인이 전적으로 이봉창 의거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음에는 틀림없었다. 

청도에서 일본교민들이 대폭동을 일으켰다. 청도에서 발행한 민국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의사가 일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일본 교민들은 이 기사가 불경하다고 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1월12일에 시작하여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일본인 폭도들은 민국일보사에 난입하여 권총을 난사하고, 중국국민당 시당부를 습격하여 건물 전체를 불태웠다.  일본 군함 출운함과 팔운함에 있던 육전대 600여명이 1월12일 밤 상륙하여 이들은 일본영사관과 거류민단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만약 폭도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면 출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복건성 복주에서 청도 못지않은 일이 일어났다. 조일신보가 이봉창 의거를 보도했다. 복주의 읿본 영사관은 중국 당국에 ‘성정부 대표와 당대표가 일본영사관에 직접와서 유감의 뜻을 표할 것’ ‘신조일보의 주간은 중국형법의 조문에 의하되 최고형벌로 처벌하고 그 판결문을 영사관에 보낼 것’, ‘신조일보의 간행을 금지하고 다시 출판하지 못하도록 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상해에서도 일본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은 무력 충돌로 이어져서 상하이 사변으로 발전하였다. 상하이 민국일보가 이봉창 의거를 보도했다.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가 이에 대해 천황에 대한 불경이라고 항의했다. 이 기사에 대한 정정과 사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서한을 상하이 시장 오철성에게 보냈다. 그는 신문의 기사가 불손하기는 하지만 국가원수를 모독할 의사는 없었다고 하며 일본영사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반발하여 상하이 일본 교포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인들의 거주지였던 홍구를 중심으로 하여 일본인들이 교민집회를 열고, 공공조계의 길거리에서 중국인들을 타살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러한 폭력은 일본 낭인들이 주도했다. 1월20일 일본 낭인들은 삼우실업사 공장에 불을 지르는 등 폭동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를 보복하기 위해서 중국의 항일운동 세력은 일본공사의 집을 습격하여 방화했다. 1월28일에는 일본 육전데가 상륙하여 상하이를 공격했다. 이렇게 이봉창 의거는 상하이 사변으로 발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9권 한국애국단 II(보도기사))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 난지 보름만인 1932년 2월12일, 김구는 중국인 잠수부를 고용하여 상하이 주둔 일본군 사령부의 신형 잠수함 이즈모호 폭파를 시도했다. 잠수함 밑에 폭탄을 장치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했다. 


1932년 2월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이때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을 지냈던 김홍일은 상해 병공창 군기처 주임으로 중국군 소속이었다. 김구는 그에게 부탁하여 폭탄을 입수했다. 3월3일 윤봉길을 시켜서 상하이 부두에 있는 비행장 격납고 폭파할 계획을 세웠으나 중국이 상하이 사변에서 일본에게 패하여 비행장에 접근하기 어려워져서 포기했다. 

1932년4월24일, 김구는 한인 애국단원 이덕주와 유진식을 조선 총독 우카키 가즈시게 암살의 임무를 띄워서 국내로 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일경에게 체포되어 실패했다. 

1932년 4월29일 홍커우 공원에서 천장절(천황 생일 축하)기념식과 상하이사변 전승축하 행사가 열렸다. 김구는 윤봉길을 행사장에 보내어 행사 단상에 폭탄을 던지게 했다. 윤봉길의 폭탄은 단상에 있던 일본군 장성과 중국에 와 있던 일본 정부 요인들을 사망하게 하거나 중상을 입혔다.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그날 중상을 입고 치료 중 합병증으로 5월에 사망했는데 이는 상하이 사변에서 패배한 장제스를 가장 기쁘게 했다. 

중국신문들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을 자세히 대서특필했다. 해외 언론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사건 발발 후 김구는 상하이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 비서 엄항섭, 김철과 한께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의 집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냈다.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의 상하이 침공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다. 

안창호 등 한인 독립운동가 들이 속속 일경에게 체포되자 김구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배후가 한인애국단이며 이 단체의 수장인 자신이 사건들을 지휘 감독했음을 밝혔다. 일제는 막대한 현상금을 걸어 김구를 수배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장제스와 중국국민당 정부는 임정과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 장제스는 윤봉길이 중국군 백만이 못해낸 일을 혼자서 해냈다고 극찬했다. 그는 한국임시정부가 중국국민당과 함께 일본에 대항해서 싸울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1932년 5월,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일본의 만주철도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구는 한인애국단 단원 유상근과 최홍식에게 이 행사에 참석하는 일본인사들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주어 대련으로 파견하였다. 1932년5월26일 오후 7시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 조사단이 다렌역에 도착할 떼 유상근, 최홍식은 혼조 시게루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 투척을 계획했다. 그러나 의거 며칠전에 다랜 우체국을 통해 보낸 전문이 일본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 최홍식, 폭탄 운반책 이성원, 이성발 등 일당이 모두 체포되어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옥관빈은 상동교회 전국대회에 참석하는 등 신민회 초창기부터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는 1917년 11월24일 출옥해서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안창호 계열인 흥사단에도 관여했지만 그가 흥사단 단원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는 주로 상하이 대한교민단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1년부터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여 큰돈을 벌었다. 12월에 무역회사 합명회사배달공사를 개업하고 총경리가 되었다. 독일과 무역하는 삼덕양행과 의약품제조업채 불자약창을 개설 운영했다. 30만원 규모의 자산을 가진 거상으로 성장했다.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근대 한중 불교의 가교 역할을 했다. 1928년 중국으로 귀화한 후에는 주로 법명 옥혜관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제약회사 ‘불자약창’은 그가 “중악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 평가받게 했다. 

그는 임정과 교민 초등학교인 인성학교에 자금 지원을 했다. 그런데 그가 국내 신문에 자기를 과대 선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비방하는 말을 하고 다녔다. “독립 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살 것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 가마니나 나눠주고 돈 몇 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다. 

옥관빈은1923년 10월24일 김구 입회 하에 실시된 상해교민단 의원총회 선거에서 북구의원에 당선되었다.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떠나고 없는 상하이에서 가방 횔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독립운동 단체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인 남화한인총연맹이었다. 이 단체는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상하이로 집결한 무정부주의자들이 정화암, 유자명, 이강훈, 백정기를 중심으로 조직했다. 이 단체는 중국과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대하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행동대로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흑색공포단의 목적은 일본의 주요기관 파괴, 요인 암살, 친일분자 숙청, 배일선전 등이었다. 

당시에 김구는 중국국민당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고 있었고 흑색공포단은 인력은 있었으나 자금이 없었다. 옥관빈을 좋지 않게 보고 있던 김구는 정화암을 찾아가서 그를 제거하자고 제안했다. 김구의 자금과 항일구국연맹이 행동대를 동원하여 옥관빈응 암살하기로 합의했다. 이 일은 김구, 안공근, 정화암만 알고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1933년 7월22일 경 옥관빈이 읿본군대를 위하여 약 2만원 상당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 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밀정행위를 한 사실이 포착되었다. 적과 내통한 민족 반역자였다. 정화암의 지령을 받은 흑색공포단 소속 오면직과 엄형순은 옥관빈의 형 옥성빈이 사는 집 맞은편의 중국인 집 2층에 숨어서 옥관빈이 옥성빈의 집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김구의 자금 지원을 받은 정화암은 자전거 몇 대를 사서 옥관빈을 추적했다. 두 달 동안의 집요한 추적 끝에 그가 그의 형 옥성빈의 집 뒤쪽 정자칸 방에 사는 흥사단 단원 이 아무개의 부인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당시에 옥성빈은 프랑스 조계 공무국 경찰로 근무하고 있었다. 옥성빈은 이 아무개의 거처를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드나들었다. 이 아무개는 한구에서 작은 세발자전거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고 매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1933년8월1일 저녁 9시 무렵  옥관빈이 이 아무개의 처를 간통하고 옥성빈의 집에서 나왔다. 차 안에서 보고 있던 엄형순은 운전수에게 차를 그 쪽으로 움직이라고 명령했다.  차가 가까이 접근하자 엄형순은 그에게 권총 3발을 명중시켰다. 그는 즉사했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의 배후가 자신이라는 것을 발표한 후, 일제는 김구에게 6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부쳐 수배에 나섰다. 요지음 한국 돈으로 200억쯤 된다고 한다. 김구가 상하이에 남아 있기는 너무나 위험했다. 

장카이셐(장제스, 장개석)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중국군 백만이 해내지 못한 일을 단 한 명의 한국인 청년이 해냈다”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사실상 중국군은 상하이 사변에서 일본군에게 패했지만 윤봉길은 일본군 상해 파견군 사령관을 살해했다. 이는 국민당 정부가 일본의 침략을 막는데 한중동맹의 중요성을 장제스로 하여금 실감하게 했다.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적극적으로 김구와 임정을 일제로부터 보호하고 항일 투쟁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윤봉길의사 의거 직 후 천궈푸(진과부)는 김구를 자싱으로 피신시킬 것을 국민당 조직부 요원 샤오징에게 지시했다. 천궈푸는 장쑤성 주석을 지냈고 국민당 고위층이었으며 남의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비공식 정보기관 CC단의 총수였다. 임정의 외교 담당이었던 박찬익과 동북후원회 회장이었던 저보성은 절친한 친구였다. 박찬익은 그에게 김구와 임정요원들의 보호를 부탁했다. 자싱이 고향인 저보성은 손문과 함께 신해혁명에 참여했고, 상하이 법학 원장을 지냈으며, 국민당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웠다. 저보성은 자싱에 김구의 피신처를 마련했다. (나무위키, 저보성, CC단)

피신처가 마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구는 피치 목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를 탈출했다. 피치 목사는 여운형을 도와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게 했던 미국인 선교사이다. 윤봉길 의사 의거 직 후 김구와 임정요인들은 그의 집에 20여일 동안 피신해 있었다. 

일제의 수사관들이 피치목사의 집을 정탐하고 있었다. 김구는 신사복을 잘 차려 입고 피치목사의 부인과 같이 부부처럼 집 밖으로 나와 차 뒷자석에 앉았다. 피치 목사는 운전수가 되어 차를 몰아 상하이를 떠났다. 김구가 당도한 곳은 저보성이 마련해놓은 자싱의 저씨 집안에서 경영하던 종이공장 수륜사창이었다.  

얼마 후 김구는 저보성의 수양아들 진동생의 별채인 매만가 76번지에 은신했다. 자싱에는 김구가 도착하기 전에 이동녕, 엄항섭 등 임정요인들은 이미 현재의 일휘교 17번지에 와 있었다. 김구의 은신처가 100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김구의 소재를 전혀 몰랐다.  

 

자싱은 상하이와 항주 사이에 위치한다. 상하이에서 95 키로 떨어져 있고 차로 1시간 반 거리이다. 

자싱시는 호수와 강이 연결되어 수상 교통이 발달된 도시이다. 이태리의 베니스와 닮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저부성은 자싱시 메이완제 76호 남호 호수가에 있는 이층 목조 가옥을 김구에게 은신처로 제공했다. 이층 다락방을 김구가 숨어 살 수 있게 끔 개조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옷장으로 위장했다.  2 층 방에서 밖을 살필 수 있도록 작은 창을 여러 개 만들었다. 마루 바닥 한 쪽에 내모난 구멍을 뚫어 비상구를 만들었다. 평소에는 마루 바닥처럼 보이게 덮어 놓았다가 비상시에 뚜껑을 열고 내려가면 호수가에 항상 대기하고 있는 배를 타고 탈출할 수 있게 했다. 

김구는 은신처에서 관동사람 장징구 또는 장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인으로 행세했는데 중국말이 서툴어 많은 불편을 겪었다. 

저보성은 일경이 자싱 시내까지 김구를 추적해 들어오자 하이엔에 있는 며느리 집안 별장으로 김구를 피신시켰다.  아들 저봉장(추펑장)의 처(며느리) 주가예(주자루이)는 손수 나서서 김구를 남북호 안에 있는 별장 체정별서로 김구를 안내했다. 산후 얼마되지 않은 주가루이의 헌신적인 도움을 김구는 백번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저부인은 하이힐 구두를 신고 7,8월 염천에, 친정 여복하나에게 나의 식료와 각종 문품을 들려가지고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고개를 넘는 것이다… …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 부인의 용감 친절을 우리 자손이나 동포가 누가 공경하고 우러러 사모하지 않으랴.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글 로라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글을 쓰는 것이다.”


1933년 김구는 다시 매만가 76번지로 돌아왔다. 중국말이 서투른 그는 관동사람으로 행세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체가 탈로 날 뻔한 일도 있어서 좀더 완벽한 위장이 필요했다. 저봉장은 김구에게 중국 여인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의 친구 중 과부가 된 30대 중학교 교원을 추천했다. 김구는 중학교 교원은 유식해서 정체가 탈로 날 우려가 있으니 무식한 처녀 뱃사공 주애보(주아이바오)는 비밀을 지킬 것이라고 하여 그와 동거를 시작했다. 

주애보는 20세, 김구는 57세였다. 김구는 9년전에 아내 최중례와 사별했다. 김구는 주애보와 결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부처럼 지냈다. 주애보는 매일 배를 저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선상 생활을 했다. 주애보는 김구를 정성 지극 것 보살폈다. 그러나 그는 김구가 조선사람인지는 전혀 모르고 살았다. 

김구는 “두고 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 그녀에게 여비로 겨우 100위안을 준 일이다. 그녀는 근 5년 동안 나를 광저우 사람인 줄 알고 섬겨왔고 나를 보살핀 공로가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 노자 외에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고 회고하였다. 김구의 자손들이 주애보의 행방을 알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1932년7월 초, 국민당 정부 조직부 요원 샤오징의 부하 공페이청이 장제스에게 김구 지원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김구가 자신에게 무기소총을 지원해 준다면 봉북지역에서 한인독립군을 조직하여 중국 의용대와 협력, 공동항일작전을 전개할 수 있다고 하니 지원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한중이 항일공동전선을 펴기 위해서 임정의 외교통이었던 박찬익은 장제스와 김구의 회담을 주선했다. 1933년 5월, 김구와 장제스는 당시 중화민국(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교장 장제스의 관저에서 만났다. 장제스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을 겪고 나서 일제와의 전면전을 예상하고 준비 중이었다. 아마 장제스는 대일전에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동원을 염두에 두고 김구와 만났을 것이다. 

주위를 물리친 김구와 장제스는 독대하여 필담으로 이야기가 오갔다. 김구는 장제스에게 “당신이 나에게 100만 위안을 지원해 주면 2년내에 일본, 조선, 만주 지역에서 대폭동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위한 일본의 교량을 파괴하겠습니다.”고 제안했다. 장제스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소. 장래 독립하려면 군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 소.”라고 대답했다.  장제스는 윤봉길 의거와 같은 특무공작 대신에 한인들로 구성된 군대의 양성을 권했다. 그 결과 1932년 2웧, 뤄양에 있던 중국 중앙군관학교 뤄양 분교 안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었다. 장제스는 이미 김원봉을 지원하여 난징 근교에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 두 군관학교 출신들이 한국광복군의 근간이 되었다. 

천궈푸(진과부)는 김구에게 경상비로 매달 5000원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일년에 현재 달러로 7 백만블이 넘는 돈이다. 장제스의 김구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은 위기에 처한 임정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김구가 임정의 실권자로 군림하게 해주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원봉은 장쉐량 일파에게서 더 많은 자금을 지원받아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37년 7월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에 초대되었다. 김구는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에게 광복군 창설을 위한 원조를 요청해 왔다. 이에 대해 국민당 정부는 여러 한국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했다. 이 회의에서 중국 정부 대표자들은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복군 창설을 위한 거액의 원조가 결정되었다. 김구는 1940년 9월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한국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어 있었다. 김구는 광복군의 독립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장제스는 1944년 8월에야 광복군의 통제를 풀어주었다. 장제스가 김구를 도와준 궁극적인 목적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막는데 한국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고 김구의 그것은 한국의 독립이었다. 


일제는 김구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서 그를 체포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찾아 암살하려는 공작을 벌였다. 암살 공작은 3번에 걸쳐서 시도되었다. 1차 공작은 1935년 1월 조선 총독부 파견원 나카노가 조선인 밀정 오대근을 동원하여 실행하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2차 공작은 1935년 8월 이후 히토스키 파견원이 밀정 위혜림을 내세워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중 첩자인 위례림과 암살을 실행할 것이라고 믿었던 정화암이 히토스키의 계획을 역 이용하여 공작금 300원을 가로채고 암살은 무산되었다. 

3차 공작은 김구에게 중상을 입혀 김구가 사경을 헤맸으나 회생하여 미수로 끝났다. 1938년 5월7일에 일어난 이 사건을 “남목청 사건”이라고 한다. 


김구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고 있을 때 좌와 우의 독립운동가들은 제 각각 당을 만들었다. 1935년,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김원봉의 의열단은 난징에서 만나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원봉의 사회주의 계열 의열단이 당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조소앙과 지청천은 이에 반발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했다. 

김구는 김원봉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에 대항하기 위해서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인시정부를 재 정비했다, 김구의 한국국민당은 아마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에서 비롯된 당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연합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장제스는 대한 원조를 일원화하고 한인 군대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한인 세력을 통합하라고 김구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장제스는 김구와 김원봉의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의 연합은 여의치 않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시에 임시정부는 난징에 있었다. 난징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어 장제스는 충칭으로 수도를 옮겼다. 김구도 임시정부 식솔 100명과 같이 장강 2000리 길을 목선에 의존하여 거슬러 올라가서 1937년12월 창사로 임정을 이사했다. 창사는 후난성의 수도로 중국 남쪽 내륙지방에 있다. 

김원봉이 주도권을 장악한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은 자금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장제스의 지원을 받고 있는 김구는 재정이 좋은 편이었고, 김구는 그의 한국국민당과 그들의 두 당과의 연합을 원했다. 1938년 5월7일, 3당의 연합을 논의하기 위해서 김구를 포함한 당사자들이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당사가 있는 “남목청”에 모였다. 지청천, 유동열, 현익철, 김구 등이 참석했다. 

회의가 끝나고 연회가 한창일 때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이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했다. 김구, 현익철, 유동열이 중상을 입고 이청천이 경상을 입었다.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죽었고 김구와 유동열은 입원치료를 받고 회복되었다. 범인 이운환은 체포되었고 그의 배후로 지목되었던 박창세와 강창제 등도 체포되었으나 중일전쟁 중 중국이 패퇴하던 시기여서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체 모두 풀려났다. 그러면 이운환, 박창세, 강창제는 어떤 사람들이며 왜 김구를 암살하려 했을 까? 

 박창세는 평안북도 출신으로 상하이에 온 후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 병인의용대 대장, 한국독립당원 및 특무대장, 대한교민단 의경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35년7월, 김원봉, 지청천, 조소앙의 3 당이 합당한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다가 김원봉이 당의 주도권을 잡자 지청천, 조소앙과 함께 탈당했다. 이후 한국독립당 재건 운동을 하다가 조소앙과 장쑤성 주석 천궈푸(진과부)가 보내주는 지원금 문제로 갈등을 일으켜 1936년 봄 이창기, 문일민, 강창제와 한께 한국 독립당을 탈당했다. 이후 박창세와 강창제는 1937년4월 지청천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박창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박제도는 아편장사를 했고 일본경찰의 밀정이었다. 그리고 박창세는 그와 같이 살고 있었다. 김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둘째 아들 박제건은 유명한 권투 선수였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권투를 시작하여 18세 때인 1933년 무렵에는 20번 출전하여 무패의 기록으로 승승장구했다. ‘황색화살’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의 상대는 상하이에 정박하는 미국 또는 영국 등의 군인 권투 선수였다. 1935년 전 중국 밴턴급 선수권 보지자가 되었다. 그런데 국내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권투선수 서정권이 있었다. 박제건은 항상 국내에 들어가서 그와 경기를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비용이 문제였다.

히토스키와 일제 경찰은 이 점을 이용하여 박창세를 포섭했다. 둘째 아들이 조선에서 열리는 국제 권투 경기에 참전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김구 암살을 사주하자는 공작이었다. 

박창세가 한국독립당을 탈당할 무렵인 1936년4월3일 박제건은 형 박제도와 같이 상해를 출발하여 도쿄를 거쳐 12일 아침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5 월2일부터 그의 꿈이었던 서정권과 함께 국제권투경기에 참여했다.

이때부터 박창세는 김구 암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1937년4월 조선민족혁명당을 탈퇴한 지청천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결성했다. 그리고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김구의 한국국민당의 합당이 거론되었다. 김구의 한국국민당은 장제스의 원조로 인해서 재정적으로 비교적 안정이 돼있는 반면에 다른 두 당은 자금 부족으로 허덕였다.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김구 세력이 조선혁명당에 대해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차별대우를 했고 비서 격인 안공근도 그들을 독선적으로 대했다. 이로 인해서 조선혁명당 세력은 김구세력에 대한 불만이 컸다. 1937년1월 창사에서 김구 측에 불만을 품은 박창세, 강창제 등의 일파에 속하는 신기언, 이운환 등이 반 김구 파 청년을 결집하여 한국혁명청년단을 결성했다. 박창세는 이들중 이운환을 사주하여 김구의 암살을 시도했다. 남목청사건 이후 박창세는 일제의 재지나파견총사령부에 근무했다.  “지나”를 일본사람들은 “시나”라고 읽고 중국을 지칭한다. 박창세는 중국파견 일본군 총사령부에 근무했던 것이다.  그는 일제의 밀정이었다. 

왼쪽 아래 가슴에 총상을 입은 김구는 상아병원으로 즉시 이동되었다. 의사는 심장에 총상을 입었을 것으로 의심하고 4시간동안 관찰했다. 김구는 의식을 잃었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의사는 그때서야 살 가맘이 있다고 판단하고 4층 중요인사 입원실로 옮기고 치료를 시작했다. 김구는 기적같이 회복했다. 


1940년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충칭으로 이사했다. 19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장제스의 김구와 임정에 대한 원조는 급증했다. 그런데 충칭으로 이사한 임정과 그 가족들은 중국 정부의 지원금이 아니면 살길이 없었다.  김구는 광복군을 조직하여 대일 군사작전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김구는 장제스에게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더 많은 원조를 요청했다. 장제스는 원조의 조건으로 사회주의 계열인 김원봉과의 합작을 요구했다. 말하자면 중일전쟁 중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한 예를 따르라는 요청이었다. 


김원봉은 1919년 만주 간도 길림성에서 폭렬투쟁 조직 의열단을 결성하여 요인 암살과 주요기관 폭파를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원봉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장제스가 교장이었고 저우 엔라이가 정치부 주임이었다.  동기생에 등걸이 있었다. 등걸은 장제스의 측근이 되었다. 김원봉은 등걸에게 의열단의 지원을 요청했다. 등걸은 장제스의 승인을 받아 삼민주의역행사를 통해서 김원봉에게 매당 3000원씩 지원했다. 삼민주의역행사는 국민당 정부 비밀 정보기관인 남의사이며 등걸은 남의사의 서기였다. 김구가 매당 5000원을 지원받기 전이었다. 

1938년 10월10일 김원봉은 한구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약 300명 규모였다. 운영비는 중국 국민당 군사위에서 지원했다. 


1938년10월 26일 충칭에 도착한 김구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김구 자신도 절실하다고 느꼈고 통합에 대한 장제스의 압력도 만만하지 않았다. 김구가 도착한 지 한달쯤 뒤 장제스가 김구를 불렀다. 김원봉과의 합작을 요청했다. 계림에 체류 중인 김원봉에게 충칭으로 오라고 전보를 치고 우선 김구가 먼저 민족혁명당과 조선 의용대 본부가 있는 아궁보 손가회원을 찾아갔다. 김두종과 김성숙 등이 김구의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 김구가 각 단체의 통합을 주장하자 모두 대 찬성이었다. 그리고 김구는 다른 여러 단체에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동의하지 않았다. 

마침내 김구와 김원봉은 충칭의 홍빈여관에 방을 잡고 날마다 만나 통합을 논의했다. 협의 결과로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신’을 발표했다. 

“우리 양인은 금후 신성한 조선민족해방의 대업을 위하야 동심 협력을 고백하는 동시에…중일전쟁 발발 이후 한중 연대를 통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야 일체의 독립운동 단채를 해체하고 공공의 혁명적 정강 아래 재편할 것을 제창한다.”

김구와 김원봉은 공동선언 뿐이었지 실제로 통합하려고 움직이지 않았다. 장제스는 주가화에게 통합을 추진하라고 명령했다. 7개의 단체가 모여서 토론했지만 주의가 다르다고 싸우기만 했지 진전이 없었다. 공산계열은 퇴장했다. 중국 실무자는 한국 독립단체들의 행태를 보고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한국인은 단결심이 없고 중심사상이 없어 외래사상(공산주의)에 쉽게 빠졌다. 구심적 역할을 해낼 지도자도 없다. 김구는 투지는 있으나 지도자의 지략이 없다. “ 

임정 원로들은 김구가 동의도 없이 중국 국민당에 추종하는데 불만이 컷다. “백범은 너무 충직해서 남에게 잘 이용당한다.”고 불평했다. 


중일전쟁 이후 화북지역에 한인들이 20만이나 몰려왔다. 화북지역은 북경, 천진, 산동을 포함하는 동북쪽 평야지대를 말한다. 김구는 광복군을 조직할 인적 자원이 풍부 해졌다고 생각하고 주가화에게 광복군 창설을 재촉했다. 그러나 김원봉이 반대했다. 그는 이미 조선의용대를 가지고 있었고 중국 군사위원회로부터 매달 활동비로 1만6천원을 받고 있었다. 등걸 등에게 광복군 반대 의사를 밝히고 중국 군사위원회에 광복군 승인 반대 이유서를 제출했다. 그는 “ 광복군은 일병일졸도 없는데도 늙은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협작적으로 만드는 것이며 아무 힘도 없는 아이들 장난 같은 것인데 혁명분규만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구는 주가화를 설득했다. 주가화의 보고를 받은 장제스가 “광복군과 조선의용대 모두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괄 아래에서 활동한다는 원칙”을 지키라고 하며 김구의 요구대로 광복군 창설을 허락했다. 

1940년8월4일 광복군 총사령부가 발족하였다. 다음달 충칭에서 가장 화려한 호텔 기릉빈관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주은래, 동필무, 오쳘성 등 중국 귀빈들과 각국 외교사절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장제스의 부인 송미령은 축의금 10만원을 냈다. 그러나 주빈인 광복군은 간부 10여명이 전부였다. 창설 작업을 맡았던 이범석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중국 군사위원회에 제출한 광복군 규모는 5,040명이었다. “이 숫자는 지원금을 타기 위하여 과시용으로 만든 것일 뿐, 만리 타국에서 우리 군대가 되어 줄 젊은이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한달을 두고 고심참담했지만 없는 사람을 구해 올 재주는 아무도 없었다”(이범석[광복군] 신동아, 1999 4월호)


같은 무렵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100여명이 중국 공산당 경내로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팔로군의 꾀임에 속은 공산주의에 세뇌된 부상병들이었다. 이후 조선의용대 병력의 대부분이 팔로군으로 탈출했다. 이 사건은 중국 국민당 정부로 하여금 한인 무장 병력의 통제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중국 군사의원회는 ‘한국 광복군 행동 준승’을 만들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임정은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별 수가 없었다.

중국 군사위원회는 광복군의 작전권, 운영권, 인사권을 모두 장악했다. 부하를 거의 다 잃은 1942년 김원봉은 겨우 20여명의 측근을 데리고 광복군에 합류했다. 김원봉은 광복군의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참모장 이범석이 해임되고 중국 고급참모 윤정보로 교체되었다. 사령부 간부 45명 중 중국장교가 33명이었다. 사상교육담당 정훈처는 전원이 중국인으로 채워졌다. 독자적인 일은 불가능 했고 병력을 채울 청년들도 없어서 부대 편성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임정은 사실상 중국 국민당 정부의 원조로 유지되었다. 김구가 그렇게 원했던 국가 건설에 없어서는 안 될 군대 또한 국민당 군대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임정이 대한민국의 모체라는 임정 법통론이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미국의 힘으로 탄생한 나라이다. 만약에 대한민국이 중화민국의 힘으로 건국했다면 임정법통론이 통할 지 모른다. 김구가 중국에 쌓아 놓은 공든 탑은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서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중국 국민당군이 한반도에 들어왔다면 김구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민족의 자존심이 허락하기 힘들겠지만 대한민국은 미국이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은 소련이 만들어 놓은 국가이다. 해방 전의 김구와 중국 정부의 관계는 해방 후 미군정과 김구의 관계로 계승된다. 김구는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에는 순응했지만, 하지와 미군정에 대해서는 대항했다. 그러나 들 다 김구가 어찌 할 수 없는 상대였다.  


1941년6월 김구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임시정부 승인에 관해서 논의했다.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12월10일 김구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미국의 프렝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중국은 이미1937년부터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중국(중화민국)을 4대 연합국 중의 하나로 승격시켰다. 미국, 영국, 소련 그리고 중화민국이 연합하여 일본과 싸우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악의 축이라고 하는 독일, 이태리, 일본이 동맹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2차 세계대전은 4대국이 연합하여 악의 축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아편전쟁 이후 구미국가에게 멸시당했던 중국으로 써는 대단한 명예회복이었다.   


전쟁이 연합군 쪽에 유리하게 진행되면서 루즈벨트는 적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 처리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반도에 연합국 4대국이 참여하는 신탁통치 안을 꺼내 들었다. 어느 한 나라가 어떤 식민지를 독식하면 그 식민지에 부당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4개국이 분할하여 신탁을 하고 식민지 국민이 성숙하여 통치할 능력이 생기면 독립시켜준 다는 논리였다. 

1943년3월24일, 루즈벨트는 워싱턴에서 앤서니 이든 영국 외상과의 회담에서 패전국 식민지 신탁통치에 관해서 논의했다. 루즈벨트는 이든에게 일본 식민지 코리아와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가 신탁통치에 적합한 지역이라고 말했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영국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든은 동맹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거론된 것을 우려했다. 루즈벨트의 코리아를 포함한 패전국 식민지 신탁통치에 관한 구상이 1943년4월29일 중국언론에 보도되었다. 이 기사를 읽은 임정 요인들은 분노했다. 임정 외무부장 조소앙은 충칭 언론을 통하여 “조선은 역사적으로나 문화,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독립국가를 세울 능력이 있으며 외세가 대신 관리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코리아 신탁통치 안은 해방 이전부터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가지고 있던 지론이었다. 

임정은 언론에 독립의 의지를 알리는 것 외에 중국 정부 고위 인사들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중화민국 요인들은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외무차장 신익희는 중국 외교부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 참석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정은 중국 조직부장 우테청에게 장제스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7월26일, 김구, 조소앙, 지청천 등 임정 고위층이 장제스와 만났다. 장제스는 비록 어려움은 있겠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임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943년 11월23일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카이로에 모인 첫날 대일작전에 대해서 토의했다. 그날 저녁 루즈벨트의 숙소에서 장제스와 루즈벨트가 저녁을 같이 했다.  장제스는 일본이 패전한다면 만주와 타이완 그리고 펑우열도를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조선의 독립에 힘을 실어 줄 것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그날 일기에 “조선 독립문제에 있어서 나는 루즈벨트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과 조선 민족이 독립을 얻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동조할 것을 요청했다.”고 적었다. 

장제스와 루즈벨트 사이에 논의된 사항이 처칠에게 전해졌다. 처칠은 “일본 패망 후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문구를 “일본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영국은 조선을 독립시켜 주면 자국의 식민지도 독립시켜야 하는 입장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며 조선의 독립에 동의하지 않았다. 

루즈벨트도 영국의 입장을 전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루즈벨트는 카이로 선언문에 조선의 독립은 포함시키되 “가능한 빨리(as soon as possible)”롤 “적당한 때가되 면(in due course)”로 바꾸었다. 영국의 비위를 상하지 않고 장제스의 의견도 존중해 주는 절충안이었다.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자 임정은 환호했다. 김구는 “3천만 동포를 대표해서 세 거두에게 감사를 표한다.”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적당한 때”는 신탁 통치가 끝나고 한국사람들이 통치를 할 능력이 있을 때”를 의미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코리아는 일본의 영토였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하는 마당에서 코리아가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 다면 코리아도 미국의 적이었다. 미국과 중국의 독립운동가들과 교포들은 한국이 일본에 저항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여 일본이 패전하면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이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은 세계의 최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많은 전비로 인한 국가 부채의 증가로 영국은 세계 경영을 미국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경제 공황을 해결하고 2차대전과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기록적인 4선을 했다. 세계 경영을 위한 정보기관의 필요성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1년7월11일 정보조정국(COI; Office of The Coordinator of Information)을 신설했다. 대통령은 도노반(William J. Donnovan)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도노반은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군인이었고 월 스트리트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법률가였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다음해 7월1일 COI는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로 개편되었다. OSS는 활동 영역이 넓어 짐에 따라 기구도 확장되어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4선에 당선되었지만 고혈압 합병증인 뇌출혈로 사망하고 부통령에 당선된지 83일만인 1945년4월12일 트루먼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트루먼은 OSS를 폐지하고 중앙정보국(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로 확대 개편했다. 

COI는 비밀첩보와 특수공작으로 나누어 임무를 수행했다. 1942년 1월, 비밀첩보는 데이비드 브루스(David Bruce)가, 특수공작은 프리스톤 굿펠로우(Preston M. Goodfellow)가 맡았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에서의 첩보 공작계획을 수립했다. 국공합작으로 일본과 싸우고 있는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영국, 미국, 소련과 함께 4대 연합국 증 한 나라였다. 1942년 당시의 중국은 일본이 사실상 전국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중국 동쪽 해안에 있는 중요한 항구를 모조리 점령했다. 그리고 인도차이나,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립핀, 남태평양 열도들을 장악했다. 따라서 중국 내의 중국군에 대한 보급로가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버마에서 영국군과 일본군의 격전도 보급로를 뚫기 위해서였다. 광복군이 영국군과 같이 이 전투에 참여했었다. 

COI가 중국내 대일본 비밀작전 계획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한다는 방안이 수용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한길수 등 재미한인 지도자들은 한인을 대일본전에 참여시켜달라고 미국 당국에 요청해 왔다. COI 장교들은 미국내 한인 망명 그룹을 주의 깊게 심사한 후 이승만이 한인 저항 활동을 조직하는데 최상의 후보라고 결론을 내렸다. 

1941년 9월, 비밀첩보 분야에서 먼저 중국을 통한 대일정보 수집 계획을 추진했다. 이 계획의 담담자는 Essen McDowell Gale(게일)이었다. 게일은 전형적인 한국 통이었고 이승만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9월에서 12월까지 이 계획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여러 번 열렸고 이승만도 이 회의에 참석 할 수 있었다. COI의 책임자 도노반의 오른팔이자 제2인자인 굿펠로우가 이승만을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이 회의에서 게일은 이승만을 “중화민국의 아버지인 손문 박사와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며 주위에 한국인 애국자들을 집결시킬 수 있는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게일 사절단은 1942년 2월8일 뉴욕을 출발해서 중경에 도착했다. 중경의 한인들을 이용하여 비밀정보 및 사보타지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게일의 계획은 이승만을 중국내 한국인들의 대리인으로 선정하여 중국이 지원하는 임정과 광복군을 배제했다. 말하자면 중국은 이미 게일이 계획하고 있는 김구의 재중 한인들로 구성된 항일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정보당국, 특히 조사통계국의 따이리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더구나 게일의 계획은 중국이 혐오하던 영국 정보기관 SOE와 밀착되어 있었고 주중 미대사관을 무시함으로써 Clarence  Gauss(고스)등과 반목했다. COI와 경쟁 관계에 놓여 있던 육군군사정보국(MID) 예하의 주중미군사절단 단장 John Magruder(메그루더)준장은 게일의 계획이 장제스 정부의 반대에 봉착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원래 COI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국무성과 합참 등은 매그루더의 경고을 근거로 게일의 계획을 방해했다. 결국 1942년 6월 이 계획은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COI의 특수공작 분야는 1941년 1월27일 Depass(드페스)가 제안한 오리비아 계획을 추진했다. 중경인근에 COI본부를 두고 한국인을 활용하여 한국, 만주, 화북, 양자강 등에서 정보 및 사보타지 그룹을 지휘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COI 최초의 특수 작전 부대인 101 부대가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중국, 한국을 거쳐 최종적으로 일본에 침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심복 장윤석을 101 부대 원으로 추천했다. 굿펠로우는 중국주둔 미군사령관 Joseph Stilwell(스틸웰)과 조율하여 Carl Eifler(아이플러)를 지휘자로 선발했다. 1942년3월 장석윤 등 20명이 소집되어 강도 높은 특수훈련을 받았다. 5월 말 극동으로 출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대의 공식명칭은 Task Force 5405-A였다. 

101지대는 7월8일 인도 뉴델리에 도착했다. 부대장 아이플러는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에 침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장석윤은 이승만의 편지를 가지고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가서 중경의 임정과 이승만의 한국위원부를 연계시킬 계획이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101 부대의 임무는 중국 중경에 가서 한국애국청년을 모집하여 교육훈련을 한 뒤 그들을 인솔하고 한국에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승만과 재미 교포들의 끈질긴 요구의 결과였다. 

아이플러는 중경에 들어가서 한국으로 침투할 가능성을 타진했다. 1942년8월 내내 아이플러는 중경에서 김구, 조소앙, 엄항섭을 만났다. 한국으로 침투하는 루트를 개척하는데 약 8천달러의 경비와 4개월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중국 정보 기관 실력자인 따이리의 반대에 봉착했다. COI와 경쟁 관계에 있는 SACO(중미협조기구)의 Milton Miles(밀톤 마일즈)의 막후 방해, 스틸 웰의 거부 등으로 중국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중국주둔 미군 사령관이었던 스틸웰은 중국내 미국 게릴라 부대 설립에 반대했고 COI는 인도에서 버마 북부로 침투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결국 101 부대는 버마 산중으로 들어가서 작전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 심리전, 정보전, 파괴, 선전전 등을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이 부대는 1944년 중반까지 버마와 중경을 오가며 OSS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01 부대의 아이플러, 장석윤과 미 14공군 소속 정운수 등은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중계역할을 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의 여러 정보기관은 경쟁적으로 중국에 진출했다. 그들은 주도권을 잡기위해서 서로 경쟁했다. 육군 정보국(MID: Military Intelligence Division)의 George Marshall(마샬)장군은 1941년 7월 COI 조직법안이 통과되자 John Magruder (매그루더)준장을 단장으로 하는 매그루더 사절단을 1941년10월에 중국으로 파견했다. COI는 게일을, 해군은 밍턴 마일즈를 옵서버로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일과 해군은 중국대륙에 진출했다. 그래서 육군, COI-OSS, 해군 정보국 간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육군 정보국 매그루더 사절단은 장제스의 처 송미령(쑹메이링) 집안의 부패를 워싱턴에 보고했다. 당시에 송미령의 오빠 쑹쯔원(송자문)은 중화민국의 제계와 정계의 막강한 실력자였다. 그의 비위를 건들인 그들은 1942년 초에 해체되었다. 그 후 에슨 게일도 실패했다. 기회는 주중미국해군단을 지휘하기위해 1942년 3월 중국에 파견된 밀턴 메리 마일즈에게 돌아갔다.  

마일즈는 1922-27년, 1936-39년, 중국에서 살았다. 중국에 대해서 잘 알았다.  해군과 장제스 정부 내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국민당 정부 조사 통계 국장이며 장제스의 측근인 따이리와 협조하여 중국내에서 정보 작전을 펴려고 했다. 따이리는 중국 내 미군정보기관의 활동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기를 원했다. 마일즈는 따이리의 의견을 존중하여 1943년3월 중미 합작 기구인 SACO(Sino-American Cooperative Organization)을 조직했다. 따이리가 총사령관을 마일즈가 부사령관을 맡았다. SACO는 미중협조기구, 주중미국해군단 또는 수전해군 등으로 불리워졌다. 따이리와 마일즈는 OSS가 발전하고 번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코우는 중국내의 OSS활동을 억제했다. 

이외에도 OSS는 중국내에서 주중미군 사령관 스틸웰장군과 제14공군의 Clare Lee Chennault(체놀트)의 견제를 받아 크게 활동할 수가 없었다. 1944년 장제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스틸웰이 Albert Wedwmeyer(웨드마이어)로 경질되었다. 신임 중국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는 도노반의 지원을 받아 중국내 OSS활동을 대폭 강화했다. 1944년 가을 그가 부임할 당시에는 중국내 OSS 요원 수가 겨우 106명이었는데 1945년7월에는 1,891명에 달했다. OSS 중국지부가 크게 성장했던 배경은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 전선이 정리되어 OSS의 물적, 인적 역량이 중국으로 집중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1944년 중반부터 OSS의 한반도 침투 계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44년 중반에 유럽전선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독일, 이태리와의 전쟁에서 OSS는 괄목할만한 전과를 내지 못했다. 조직의 위기였다. 태평양전쟁은 OSS의 마지막 남은 기회였다. OSS/워싱턴 본부는 한국, 일본의 침투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45년1월 OSS/워싱턴 본부는 <비밀정보수집을 위한 일본적진에 대한 요원침투 특수계획>을 세웠다. 이에 근거하여 중국 OSS가 한반도 침투작전을 추진했다. 한국인을 이용한 한국, 만주, 일본 본토 침투작전을 강력히 추진했다. 중국 OSS가 마련한 침투작전은 독수리작전, 화북작전, YENZIG4작전, 불사조작전, 칠리미션이었다. 워싱턴본부는 아이플러와 장석윤의 합작으로 냅코작전(Napko Project)을 추진했다. 

독수리 작전의 일차 목표는 첩보수집과 통신망 구축이었다. 광복군 2지대 등과 연대했는데 35명 이상의 한인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들은 무전훈련과 유격훈련, 폭파훈련을 받은 후에 낙하산으로 한반도 북부 산악지대에 투하되어 적절한 지점에 통신망을 구축하는 작전을 수행하기로 되어있었다. 이 작전의 마지막 목표는 일본 본토 진입이었다. 

재미 한인 교포들은 끈질기게 대일게릴라작전과 특수부대 창설을 미국 정부에게 요구해 왔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약 250명의 한인들이 미군이 되어 일본과 싸웠다. 미국의 전시 국방공채 모금운동에 참여하고 한인귝방경위대를 편성했다. 켈리포니아 민병대에 속한 한인경위대는 명칭을 맹호군으로 하고, 1942년 2월30일에 대한민국 군사위원회의 인준을 받았다. 재미한인들의 줄기찬 요구로 OSS 워싱톤본부는 한인들을 중심으로 미국 본토에서 냅코 프로젝트가 출범했다. 버마에서 횔동하던 101지대 요원 아이플러와 장석윤이 1944년7월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1944년 7월22일, OSS의 부책임자 굿펠로우는 1942년 추진되었던 올리비아 계획을 상기 시키며 OSS가 한인들을 훈련시켜 공중 혹은 장수함으로 한국에 침투시킬 방안을 모색하자고 도노반에게 제안했다. 19명의 한인들이 로스 안젤레스 앞 바다에 있는 카탈리나 섬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당시 50대의 유일한 박사도 이 작전에 지원하여 강도 높은 훈련에 참여했다. 유일한 박사는 당시에 한국에서 유한양행을 운영하고 있었다. 

1945년 2월과 3월 <비밀정보 수집을 위한 일본적진에 대한 요원침투 특수계획>의 관할권을 두고 OSS 워싱턴 본부와 중국지부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있었다. 중국 지부장 헤프너는 중국주둔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의 관할 내에서 이 작전이 총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OSS 사령관 도노반은 1945년3월29일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로써 중국지부가 일본침투 계획을 독자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4월9일 헤프너는 시안에 근거를 둔OSS 야전부대의 설립을 명령했다. Gustav Krause(구스타프 크라우제)소령이 새기지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OSS 중국 본부 곤명에 있는 46명의 요원을 이끌고 시안에 도착했다. 시안야전지휘부로 불리는 이부대는 침투팀을 조직하여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화북지역에 침투하여 점차 만주, 한국, 일본으로 침투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시안에 도착한 크라우제 부대는 국민당사령부의 후종난 장군과 접촉했다. 재7안식교 막사를 얻어 시안야전지휘부를 설치했다. 자칼, 스패니얼, 라이온, 레오파트 등의 암호를 쓰며 화북에 침투했다. 중국에서 야전에 침투된 최초의 OSS 야전작전 팀이었다. 

시안 야전지휘부는 1945년 중반 이후 4개의 특수 공작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Eagle Project(독수리 작전)이었다. 한국 광복군 2지대와 연대해서 이루어졌다. 시안에서 15마일 남동쪽에 있는 투자오에 신설된OSS 북동사령부에서 훈련을 실시했고 이 조직의 유일한 목표는 한국 침투였다. 지휘관은 Clyde B Sargent(싸전트)였다. 

두 번째는 Phoenix operations(불사조 작전)이었다. 미국인 Thomas Megan(토마스 메간)주교 관할에 있는 반공카톨릭망을 이용한 작전이었다. 1945년 7월부터 8월초까지 5개의 정보팀을 야전에 투입하여 서안-북평-해주 삼각지점 내의 일본군 전투서열 정보 수집 작업을 했다. 종전 이후 이들은 호남 중부, 산동, 산서 남부, 호북, 만주로 침투했다.

세 번째는 Chilli mission(칠리)이다.  Leonard Clark(레오나드 클라크) 소령이 지휘했다. 14공군을 위해서 산시성, 안휘성 일대 일본군 전투서열과 부대 이동 정보, 방위 표적자료 수집업무를 수행했다.

네 번째는 R2S 미션이었다. John Birch(존 버치)대위가 시안 외곽에서 지휘했다. 미군사령부는 버치 대위를 우리 조직에서 가장 훌륭한 정보장교 중의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는 북경에서 황하유역을 포괄하는 무선교신망을 가진 12개의 정보망을 구축했다. 특히 산동반도에서 일본군 정보수집하는데 버취의 통신망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시안의 OSS 중국 지부는 한국 광복군을 참여시켜 독수리 작전을 수립했다. 1944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은 능력 있는 한인들을 미군이 훈련시켜 전략정보 수집임무를 부여하고, 장래 연합군 작전을 돕기 위한 한국 내의 지하세력을 조직화하고, 이들과 정기적인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서 훈련된 한인 집단을 한국에 파견할 것을 중국내 미군 당국에 요청했다. OSS 도 한인들을 이용하여 한반도에 침투하여 비밀 정보를 수집하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에 들어 가서 정보활동을 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1945년 1월 이범석은 Clyde B. Sargent(싸전트)와 한국계 미군 정운수 소위를 시안에 있는 광복군 제2 지대로 초청했다. 그들은 제2지대의 사기, 개인적 능력, 단결심 등을 조사하여 OSS 작전에 적합한가를 평가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OSS는 광복군 제2대 본부에 ‘한미합동지휘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범석과 싸전트가 양측의 지휘관이었다. 훈련장소는 시안 근처 투차오였다. 싸전트가 야전사령관으로 훈련을 직접 맡았다. 광복군 제2지대 원 125명 중 50명을 선발하여 5월11일 제1기 훈련을 시작하였다. 첩보공작을 위한 일반교육 후 5월21일부터 본격적인 훈련을 첩보훈련반과 통신반으로 나누어 실시했다. 하루 8시간 1주일 교육이 끝나면 시험을 치러 불합격자를 훈련에서 제외했다. 8월4일에 제1기 생38명이 수료했다. 제2기 훈련은 8월13일 시작되어 9월 말에 끝났다. 9월말에 제3기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원래 계획은 1기 생들이 3개월의 훈련을 마친 후1945년 초여름쯤 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침투시켜 각 지역 별로 해군기지, 병참선, 비행장을 비롯한 군사시설, 산업시설, 교통망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침투지역에 따라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한국인들의 지하운동, 한국인들의 의식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한국인들의 봉기를 지원하는 계획도 포함되었다. 

1기생 훈련이 7월말에 끝나고 8월4일에 38명이 수료했다. 이들 38명는 2기 훈련을 대기하던 11명과 함께 OSS 평가단의 평가를 받았다. 그 다음날 임정 주석 김구,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엄항섭, 이시영 등 10여명의 임정 시찰단이 시안에 도착했다. 

한편 OSS 수장 도노반은 1945년 8월6일 중국을 방문했다. 중경에서 장제스를 만나서 만주와 한국을 통해서 일본 본토로 침투하는 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이를 크게 반겼고 무조건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도노반은 그 다음날 시안으로 향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이었다. 

미리 시안에 와있던 김구는 8월7일 시안에 도착한 도노반 국장 및 OSS 중국 책임자 헬리웰, 독수리 야전사령부 지휘관 싸전트를 만났다. OSS 국장 도노반은 이번이 세번째 중국 방문이었다. 유럽전선에서 괄목할 만한 전공을 세우지 못한 OSS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중국을 거점으로 한 만주-한반도-일본침투 작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구는 도노반과 만난 자리에서 한미간의 공동협력을 강조하는 내용의 전문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해 달라고 도노반에게 주었다. 김구는 자신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라고 소개하고 “지난 몇 달 동안 중국에서 전개된 미국과 한국의 협력이 계속 진전되기를 바란다.”는 요지였다. 

이 편지를 전달받은 트루먼은 격노했다. 그는 도노반에게 “나는 당신이 당신의 요원들을 잘못지도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자칭 임시정부 대표들이 나에게 전문을 전달하는 창구로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로부터 25일 후, 1945년 9월20일, 트루먼은 OSS를 해체했다. 

도노반이 시안에 도착하여 김구를 만나던 날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쳐들어 갔다.  그 다음날 나가시키에 두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너무나 뜻밖의 급변이었다. 도노반은 주중국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에게 “소련군이 만주로 들어와서 우리가 북동지역으로 침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러시아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한국에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8월9일 아침에 일본의 항복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8월10일 저녁에 도노반은 곤명에서 워싱톤으로 가는 특별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륙 후 30분 만에 헤프너에게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2차 대전 중, 약 10여국의 임시정부가 미국의 승인을 얻으려고 미국정부에게 청원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미국정부는 이들을 모두 인정하지 않고 “당사국의 국민이 선출한 정부”만을 인정한다는 정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김구의 임정은 김구가 생각하는 만큼 미국이 알아 주지 않았다. 도노반 또한 김구가 도노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만큼 김구를 만나는 데 크게 관심이 없었다. 

두곡에서 도노반 일행과 회담을 마친 김구는 시안 주석 주사오저우(축소주)를 방문헸다.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수박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전화가 울렸다. 주사오저우가 전화를 받고 오더니 일본이 항복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김구는 크게 실망했다. 한국이 미국의 적이 아니라 일본의 적임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기회가 없어진 것이었다. 지프차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내게 이 소식은 희소식이라 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동안 준비한 참전준비가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을 비롯한 재미교포들 그리고 김구와 임정, 재 중국 교민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미국 정부에게 한국인들이 참여하는 비밀 첩보작전을 요청했지만 1945년 여름 이글프로젝트를 주도했던 OSS 중국과 냅코프로젝트를 추진했던 OSS 워싱턴 본부는 서로 주도권 다툼을 했다. OSS 중국은 한국선점의 공을 냅코가 빼앗아 갈 가봐 불안해하면서도 냅코가 실패하면 이글 프로젝트에 악영향을 미칠 가봐 걱정했다. 

1945년 1월부터 김학규가 지휘하는 광복군 3지대는 OSS와 미공군의 합작 기구, 공지자원기술단(AGFRTS)의 버취대위와 합동으로 22명에대한 훈련을 추진했다. 

독수리 작전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이후 목적이 바뀌었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8월10일 “천황의 지위를 유지한다면 항복”이라는 조건부 항복을 발표해서 엄밀한 의미의 포츠담 선언 수락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항복이었다. 광복군은 8월11일 이청천을 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을 편성했다. OSS측은 동북야전사령부를 편성하여 한반도에 들어가서 정보수집, 일본문서 압수, 연합군 포로 구호 및 송환 등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광복군 측의 이범석,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 4명이 OSS 책임자 Willis Bird(버드)대령의 지휘하에 국내 진공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8월18일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본국의 지시를 받지 못한 일본군의 위협속에 다음날 중국으로 돌아왔다. 

  OSS 중국 지부 총 책임자 헤프너는 1943년부터 중국 공산당과 협조하여 대일 전쟁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부임이후 그는 종래의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OSS 본부장 도노반도 William H. Bird(버드)를 연안으로 파견하여 중국공산당 지도부와 협정을 맺었다. 주중 미군사령부 고문 John Paton Davies(데이비스) 는 1943년 혜프너와 함꼐 중국공산당과의 협동작전을 추진했다. 헤프너는 포기했던 데이비스-혜프너 계획을 다시 부활시켰다. 워싱턴 본부의 도노반은 인도-버마 전구의 요원들에게 연안을 중심으로 OSS 첩보작전 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했다. 

도노반의 명령에 따라 OSS 뉴델리 지부는 북중국 첩보작전 계획안을 제출했다.  “중국공산당의 거점인 엔안에 대규모 첩보 조직의 본부를 둔다. 팔로군(중공산당군)지역 4 곳에 전진기지를 둔다. 그리고 17개의 첩보팀과 수많은 현지 요원을 가동한다”는 것이 이 계획의 골자였다.  북중국 지역이 첩보작전에 선택된 이유는 만주와 한국에 관한 정보가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만주와 한국은 일본에게 군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OSS는 북중국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정보능력을 국민당 정부의 그것 보다 높이 평가했다. 국민당 정부는 전방의 정보에 어두웠고 통신시설 또한 빈약하여 미국의 정보활동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OSS는 북중국 지역에서 중국 공산주의 세력과 같이 활동하던 한인 세력을 활용해서 산시 지역에 전진기지를 만들고 이들을 만주와 한반도로 침투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인 조직은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연안을 중심으로 하는 한인들을 이용한 북중국 첩보작전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계획에서 끝났다. 중국내의 다른 미국 기관의 견제, 국민당과 공산당관계의 악화, 중국공산당의 과도한 지원요구 등이 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945년8월18일 김구는 중경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9월3일 임정정국무회의가 결정한 새나라의 정부수립 계획을 발표했다. 임정이 한국에 입국하여 각계각층의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한 다음 전국적인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정식정부를 수립한다는 방침이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환국을 원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자격의 입국을 허락했다. 

11월4일 장제스는 귀국하는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전별식을 베풀었다. 김구와 임정 요인들이 충칭을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 장제스 총통과 그의 부인 송미령은 임정 요인, 한국독립당 간부 등  200여명을 초청했다. 장제스는 송별 연설에서 “조선이 독립하지 못하면 중국의 독립도 완성하지 못하게 되고 동 아시아와 세계평화도 확보하지 못할 것이므로… 국민당은 조선독립에 전력을 다해 원조하겠다.”고 말했다.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김구와 임정을 끊임없이 원조 했고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장제스의 복안은 새로 독립한 한국을 중화민국의 영향권 안에 두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장제스의 조선독립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중국이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지휘를 회복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임정과 장제스의 관계를 중화민국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세력 확장으로 이해한 미국정부의 입장은 미군정이 해방 후에 임정을 냉대하는 요인이 되었다. 

장제스는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에게 명하여 미화 20만 달러를 김구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요지음 달러로 약 3백5십만블이다. 장제스는 김구와 임정이 독립 한국의 정부가 될 것을 예상했고 그 때의 보은을 계산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군정은 임정이 합법적인 정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 돈을 찾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 김구가 중화민국이 임정에게 준 돈을 찾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1947년 6월 김구는 주한 중국 대사관에 부탁해서 10만 달러를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주화(중)대사관의 운영자금으로 지원하도록 했다. 나머지 10만달러는 유어만 주한 중국총영사에게 부탁해서 미국은행에 예치했다. 얼마 후 유어만이 김구에게 그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주라고 하면서 “만약 돈이 필요하면 이 박사에게 받아서 쓰면 된다”고 했다. 

김구에게서 연락을 받은 이승만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동반하고 주한 중국대사관으로 유어만을 찾아갔다. 김구가 허락했으니 자기네 들이 그 돈을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 총영사는 장제스가 김구에게 준 돈이기 때문에 김구 선생에게 직접 줄 의무 밖에 없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김구의 큰 며느리 안미생에게 이 사실을 연락했다. 그 때 임정 요인들은 자금난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김구는 이 돈을 찾아서 백범일지 발간에 쓰고 승용차 구입 등 경교장 살림에 긴요하게 썼다고 한다.


장제스의 환송 파티 다음날 1945년 11월 5일, 김구 일행은 장제스가 마련해준 항공기 편으로 상하이에 도착했다. 국내의 신문은 김구가 충칭을 떠나자 상하이에 잠시 머문 후 곧 귀국할 것이라고 대서 특필했다. 그러나 김구는 상하이에서 18일 간이나 머물게 되었다. 미군정이 김구와 임정요인들에게 개인자격으로 입국한다는 서약서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임정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그 요인들을 미군정의 자문기구로 편입하고자 했다. 11월19일 김구는 “임정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며, 귀국이후에도 정부로서 행세하지 않으며 미군정에 협조한다.”는 서약서를 하지 미군정 사령관에게 제출했다. 


1945년11월23일, 김구와 임정요인 1진 15명이 미군정이 제공한 C-47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를 출발 김포공항에 오후 4시경에 도착했다.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군정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이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미군 장교 몇 명이 비행기에 올라와 임정 요인들을 안내했다. 비행기 안에는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이시영 국무위원, 김상덕 문화부장, 엄항섭 선전부장, 유동열 참모총장, 김진동 비서, 유진동 의무관, 장준하, 이영길, 백정갑, 윤경빈, 선우진, 민영환, 안미생 수행원 등 15명이 타고 있었다. 비행장에는 국방색 세던 2대, 앰뷸런스 1대, 지프 10여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앰뷸런스에 짐을 싣고, 2대의 세단에 김구와 김규식이 각각 타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프에 나누어 타고 경교장으로 향했다. 일행이 한강 인도교를 지나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5시가 좀 넘어서 경교장에 도착했다. 경교장 현관에는 눈이 덮여 있었다. 미군 3명이 무전기를 가지고 대기하고 있다가 일행이 도착하자 철수했다. 


경교장은 금광으로 거부가 된 최창학의 별장겸 집이었는데 임시정부 시절 김구와 같이 일했던 김석황이 최창학을 설득하여 김구의 거처 겸 임정사무실로 쓰게 했다고 한다. 김구는 서대문 근처에 있는 경구교라는 다리의 이름을 따서 왜색이 짙은 건물명을 경교장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임정 요인들은 충무로의 한미 호텔에 묵었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오후 6시경 김구의 도착을 라디오 방송으로 “오늘 오후 김구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망명한 애국자 김구선생은 개인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라고 알렸다. 하지는 “개인 자격”임을 분명히 했다. 

김구의 귀국을 알게 된 많은 시민, 기자, 각계 각층의 요인들이 경교장으로 몰려왔다. 시민들은 “김구! 임시정부!” 하고 외쳤다. 이승만이 찾아왔다. 1921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상해에서 만난지 25년만의 재회였다. 서로 기뻐하며 포옹했다. 

다음날 오전 김구는 돈암장으로 가서 이승만을 만나고 둘은 미군정청을 방문하여 사령관 하지중장과 군정장관(국무총리 격)아놀드 소장을 예방했다. 

경교장 경비는 광복군 국내지대가 맡았다. 오광선 장군 지휘하에 본부가 태고사(현 조계사)에 있었다. 경찰 복장을 하고 경교장 현관 대문 옆에 있던 작은 집에 거처하며 초소를 지켰다. 

장제스는 김구가 떠날 때 중국군 연락 장교와 무선사 3명을 붙여 주었다. 귀국 후 이들은 중국과 무선 연락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정이 중국으로 무선연락을 하지 못하게 해서 중국과의 교신이 중단되었다. 장제스는 독립된 한국을 그의 영향권으로 두려고 했고 미군정은 당연히 장제스가 한반도에 개입하는 것을 배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날 오후8시 경교장 응접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들이 육성방송을 요청했다. 미군정은 이를 거절하다가 2분 동안의 육성 방송을 허용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 강산에 발을 들여 놓게 되니 감개 무량합니다. 나와 나의 각원 일동은 한갓 평민 자격으로 들어왔습니다……” 2분동안에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귀국하자 마자 김구는 1896년 3월 지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여 투옥되었을 떼 구명운동을 했고 탈옥을 하게 도와준 김주경,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가족을 찾았다. 윤봉길 의사의 아들 윤종씨와 이봉창 의사를 뒷바라지한 조카 딸 이은임씨를 만났다. 김주경의 아들 김윤태 씨는 이북에 있어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강화에 사는 친딸과 친척 몇 분은 만날 수 있었다.  김주영이 아니었으면 당시에 김구가 살아 있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마 김구는 김주영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김구는 항상 이봉창과 윰봉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구는 이은임에게 경교장 뒤 평동에 기와집 한 채를 사주었다. 남편이 그 집에서 이발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남편이 사망하여 생계가 어려워진 이은임을 김구의 차남 김신이 공군 문관으로 취직 시켜 주었다. 김신은 당시 공군 장성이었다. 윤봉길 의사 가족들에게는 중국 기독교청년회 총무인 미국 선교사 피치 박사를 통해 미 군정으로부터 건설회사를 불하 받게 했다. 


김구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나면 우리민족은 주권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조국은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점령하고 있었고 미군 점령지인 남한의 현실은 참담했다. 국민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지고 친일파들이 처벌을 받기는 커녕 다시 등용되어 권력을 잡고 있었다. 폭력이 난무하고 사회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귀국 직후 김구는 이승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11월24일 내외신 기자 회견을 했다. 김구는 “내가 이 박사보다 더 나은 수단을 갖고 왔다고 생각해서는 잘못이오. 다만 근 30년 동안 해외에 있다가 돌아온 터이므로, 현정세에 어둡고 정세를 모르고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소.”라고 했다. 

이승만의 초대로 12월2일, 김규식과 함께 돈암장을 방문하여 2시간 동안 회담했다. 1945년12월19일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가 열렸다. 15만영이라는 전대미문의 인파가 모였다. 한달 전에 입국한 이승만을 압도하는 인기였다. 우후 2시 20분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가 가운데 서고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령 등이 창을 열고 환영 행렬을 맞이했다. 

해방 후 김구, 이승만 등 민족 지도자들은 미군정이 일본 행정부와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본국으로 보내는 과도기가 지나면 한국 사람들에게 주권을 넘겨주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5년 12월28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영국, 소련 삼국의 외상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국을 5년 동안 신탁통치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은 “신탁통치를 무조건 한다”고 한 것이 아니고 신탁통치의 선행 조건에 “한국사람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의 수립이 명시되어 있었고 이 임시정부와 미소가 상의해서 한국 신탁통치에 관한 제반 문제를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자세하게 읽고 이해했던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 등은 반탁운동에서 이탈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신탁통치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민중은 단순하게 찬탁은 매국노요 반탁은 애국자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반탁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반역자로 매도되었다. 


김구는 신탁통치를 극렬 하게 반대했다.  12월29일 임정주최로 경교장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좌, 우, 중간파 예외 없이 참석했다.  그들은 모두 격앙되어 있었다. 

27년간 중국에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일제와 싸웠는데 고국이라고 돌아와 보니 또 다른 주인이 나타나서 이래라 저레라 하고 있었다. 그래도 할 수 없이 참았다. 잠간 있다 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5년 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니, 김구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김구는 이 대회에서 울분을 토했다. “우리가 왜 서양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 버리자”.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는 피를 흘려 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 손으로 세워야 한다”고 절규했다.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규정했다. 

반탁은 미군정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한반도 신탁통치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처음 제안했으며 소련은 이에 찬성하지 않았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의안은 미국 측의 신탁통치 안과 소련의 의견을 절충한 것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 한국인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만드는 것이 그 첫 수순이었다. 

12월29일 송진우와 김구가 마주 앉았다. 송진우는 신탁안에 반대하여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진우는 김구에게 미 군정이 중경 임시정부의 통치권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미군정과 대립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김구는 송진우가 미군정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김구는 오히려 송진우를 설득하여 반탁운동을 하게 하려 했다. 밤새 토론이 계속되었으나 두사람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송진우는 12월30일 새벽 4시에 경교장을 나와 원서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막 잠이들은 새벽 6시에 한현우 일당의 총에 맞아 절명했다. 

해방 후 첫 요인 암살 사건이었다. 한현우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과장을 지냈던 브루스 커밍스, 조병옥, 하지 중장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다. 


송진우가 암살되던 날 1945년 12월30일, 김구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하지에게 보냈다. 반탁운동을 기반으로 임정 법통론을 앞세워 미군정을 임정이 접수하여 통치권을 장악하려는 운동의 시작이었다. 김구와 임정은 ‘신탁통치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위원회의 9개조 행동 강령에는 임정의 절대 수호와 외국 군정 철폐 요구가 들어 있었다. 12월31일 열린 반탁 시위 대회에서는 “3천만 전 국민이 절대 지지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우리의 정부로서 승인함”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미군정이 ‘우익 시위의 날’로 규정할 정도로 12월31일 반탁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날 국민 총동원 위원회는 전국 총파업을 결의했다. 신익희 임정 내무부장은 국자 제1호와 제2호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문에는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정부 지휘하에 예속하게 함’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의 경찰관 대표들이 김구의 지휘를 받겠다고 약속했다. 미군정청의 한인 직원들도 이에 따르겠다고 했다. 

미군정은 대단히 당황했다. 하지 중장은 이를 미군정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1945년 12윌31일 경무국 국장 내정자였던 조병옥을 미군정청으로 불렀다. 하지는 “군정을 접수하려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즉시 처치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날 저녁 방송할 원고 전문을 보여 주었다. 


“원래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33명은 한국에 입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질서 유지에 복종하겠다는 맹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빙자하여 미군정을 접수하고 미군을 축출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획책과 접수 운동의 여파로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 하므로 오늘밤10시를 기해 인천 소재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


하지는 물리적인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조병옥은 너무나 놀랐다. 그는 임정요인들은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나는 3.1운동 이래 자유독립의 혁혁한 경력을 가진 분으로 민족의 자유정치운동의 봉화를 든 민족운동의 투사이므로 이 애국자들의 국외 추방은 미군정에 협조하는 한국인의 민심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동시에 미군정은 한국에서 실패로 끝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니 그런 조치는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지 중장을 달랬다. 

하지 중장은 조병옥의 충고를 받아들여 임정요인 추방에 대한 방송을 취소했다. 그리고 하지는 조병옥에게 김구를 면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조병옥은 하지 중장에게 “나에게 김구와 협상할 전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 중장은 이를 쾌히 승낙했다. 12월31일 저녁 조병옥은 경교장에서 김구와 마주 앉았다. 조병옥은 김구에게 진언했다. 


“주석께서 입국하실 때에 독립군 한 명도 대동하지 못하고 정치자금도 한푼 없이 미군정에 협력하겠다고 맹약한 이상 현재의 임정이 계획하고 있는 미군정 접수 운동은 포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북한은 공산주의 치하에 붉은 물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한반도 전역에 걸쳐 공산주의 철제에 휩쓸려 갈지도 모르는 이 역사적 단계에 있어서 우리민족은 미군정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는 도저히 자유독립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 오니 주석께서는 그 점 심사숙고하시어 한번 하지장군과 만나 기탄 없는 의견교환을 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조병옥의 말을 들은 김구는 하지 중장과의 면담을 수락했다. 
다음날 1946년 1월1일, 김구는 이시영, 신익희, 조소앙, 엄항셥 등 다른 임정 요인들과 함께 하지에게 호출되었다. 하지가 “나를 속이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김구는 이 자리에서 자살하겠다고 대 들었다.  그러나 결국 김구는 ‘반탁 시위가 미군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신탁통치에 반대하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방송하라’는 하지의 요구에 동의했다. 다음날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은 김구를 대신하여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에게 파업을 중지하고 일 터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고 임정의 운동은 신탁통치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지 미군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발표하였다. 

김구는 반탁에 반대하는 민중의 힘을 빌려 미군정을 축출하고 독립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것은 또 다른 김구의 독립운동이었다. 나라가 없고 군대가 없는 민족의 또 다른 정복자에 대한 항거는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는 김구에게 누가 통치자 인지를 분명히 했고 임정의 대한민국 주권에 대한 법통성을 완전히 부정했다. 


1946년2월1일 김구와 임정은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를 발족했다. 임정중심의 과도정부 수립이 목적이었다. 2월13일 비상국민회의는 28명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28명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 미군정은 1946년 2월14일 이들을 종용하여 최고정무위원회를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전환하고 민주의원이라고 했다.  의장은 이승만, 부의장은 김구와 김규식이었고 원세훈 등 도합 28으로 구성되었다. 목적은 미국 군 총사령관이 한국의 과도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노력에 자문 자격으로 협조할 것과 한국의 완전 독립을 실현하는 데 공헌하는 것이었다. 


1946년 3월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수순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표와 한국의 각 정당 및 사회단체가 참여하여 한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이승만이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 김규식 부의장이 의장대리로 민주의원을 운영했다.  10월4일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한민당의 영수 제안과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제안을 거절하고 10월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인사들을 이 조직에 참여시키고 임정을 해산하려고 계획했다. 이승만 주도의 건국 기관이었다. 1946년 2월8일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신탁통치 반제운동이라는 기치아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국민회)로 통합했다. 이승만이 총재, 김구가 부총재로 추대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중앙조직을 끝내고 전국적인 지부 조직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국민회가 정당은 아니었지만 제헌국회의 다수당이 되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민주의원들과 미군정 당국은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3월20일부터 열리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하기 위해서 미 국무성의 양해를 얻어 민주의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김구와 민주의원, 임정 등 민족진영은 정권인수를 위한 국민대표기관으로 인식하고 체제를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3월18일 발표한 임시정책 대강 27개조는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토대로 한 건국원칙이라고 할 수 있어서, 임시정부의 법통이 강력한 명분이 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1946년 5월6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다. 소련과 미국이 과도정부 수립에 참여할 정당과 단체의 자격문제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46년 2월8일 북한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과 선업시설 국유화를 시작했다. 1946년4 월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벌리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946년6월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남한 단정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남한에 우선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 주도의 통일기관을 설치하여 북의 소련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자는 주장이었다. 6월10 일 정동 교회에서 대한국민촉성국민회 전국대회가 열렸다. 이틀째인 6월11일에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참석했다. 이승만은 “소련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하자!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답하여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 고 외쳤다. 


1946년 6월12일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에 취임하였다.  이승만은 이날 ‘가까운 시일내에 민족통일 사령부를 중앙에 설치하고 국민운동의 최고영도로서 독립전취운동을 조직적으로 강력하게 전개하겠다’고 천명했다. 6월29일 새로운 민족통일기관 설치 구상과 단독정부 수립준비 및 지지기반 확보를 위하여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였다.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 

1946년7월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형태로든지, 선출된 실행위원회로든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촉구했다.  미소동동위원회를 통해서 한국사람으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수림 하려는 미군정과 미국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이 정부는 선거가 실시될 때 까지의 과도정부이며 신정부는 외세가 아닌 우리 손으로 수립 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남한정부가 주도하여 북의 소련을 축출하고 통일을 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에 김구도 일단은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7월25일,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이 좌우 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좌우합작운동를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극우와 극좌를 배제하고 중도세력을 망라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꾀하는 동시에 박헌영 등 극좌 세력을 고립시켜 우익 주도의 정국을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좌와 우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 좌우 합작은 커녕 중도세력의 위축을 초래했다. 이듬해 여운형의 암살로 좌우 합작운동은 막을 내렸다.


1946년 10월 대구 항쟁은 미군정으로 하여금 좌파를 포함한 정부는 좌파 정부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게 했다.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 쪽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1946년 12월2일,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유엔에 호소하기 위해서 동경을 거쳐 미국으로 출발했다. 김구는 김포공항으로 가서 이승만을 환송하였다. 김구는 일단 이승만의 도미 계획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조속히 미국측으로부터 이승만과 김구의 과도정부 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하면 국내에서 김구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겠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김구는 또 다시 임정을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1947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리려고 하자, 우익 진영은 김구의 주도로 1947년1월18일 전국반탁학련 반탁궐기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반탁 데모를 계획했다. 경향신문에 이 사실이 보도되어 미군정도 알게 되었다. 하지 중장은 김구에게 경고를 내렸다. 이 소식을 국내에서 보낸 전보로 알게 된 이승만은 김구, 전국반탁학련, 민주의원에게 과격시위를 중단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과격시위는 이승만의 외교 노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국학련 주도의 대규모 시위는 취소되었다. 1월18일, 대신에 경성천도교 강당에서 전국학련은 학생들 2찬여명이 모여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 대회가 열렸다. 김구는 김성수와 함께 격려사를 하였다. 김구는 학생들에게 데모를 하지 말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종용하였다. 이승만 주도의 독립촉성중앙회, 김구 주도의 반탁투쟁위원회가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비난하였다. 

1947년 2월14일에서 2월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 독립촉성국민회를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국민의회를 바탕으로 3.1전후로 임정 중심의 정부수립을 계획했다. 그러나 김구의 정부수립 계획은 누설되어 세상에 모두 알려지고 말았다. 일부 신문은 ‘아이들 장난’이라고 조롱했다. 이승만의 도미 외교 성과를 기다리지 않고 이승만이 국내에 없는 동안 저지른 성급한 행동이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 라 고 했다. 김구가 겉으로는 이승만을 존경하고 그의 정책을 따르는 것 같았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없는 동안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속셈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군정은 김구,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을 호출했다. 3월5일 김구는 임정 요인들을 데리고 미군정청으로 갔다. 미군정 측은 그들을 잡아넣겠다고 위협했다. 미군정의 압력에 못 이겨 중경 임정세력의 미군정을 대신하는 두번째 대한민국 정부수립 계획은 무산되었다. 


한편 이승만은 1947년 2월7일 미국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6가지 제안을 했다. 1. 총선거에 의하여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남조선의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2. 이 과도정부는 미소 양국간의 교섭을 방해하는 바 없이 점령군과 기타 중요문제에 관하여 미소 양국과 교섭할 것 3. 조선의 경제 재건을 위하여 일본에 대한 조선의 배상 요구를 속히 고려할 것 4. 평등한 지위에서 조선에 통상권을 행할 것 5. 국제 환제도를 설치하고 통화를 안정시킬 것 6. 미군을 미소 양군이 동시 철퇴할 때까지 주둔할 것. 그러나 미국무성이 이승만의 의견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7년 4월21일 이승만이 귀국했다. 김구는 김포공항으로 그를 마중 나갔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연설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자칫 국민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김구의 말을 들어 단정에 관한 연설을 하지 않았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김구와 이승만은 반탁 투쟁으로 이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많은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여 우리 민족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성수와 장덕수가 이끄는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소공위에 참가할 것을 주장했다. 한민당은 6월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롤 구성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임시정부 구성에 대한 대책을 말한다. 김구와 이승만이 수립하려고 하는 임시정부 또는 과도정부는 미소와 상관없이 한국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정부를 의미한다. 김구와 중경 임정세력의 당인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공위 참석에 동의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탈당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창당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김구와 이승만은 고립되었다. 그들은 미소공위 참석 청원서 마감날인 1947년6월23일, 전국 곳곳에서 반탁 시위가 열리도록 선동하였다.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전국각지에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이승만과 김구는 시위대를 격려했다. 그러나 대규모 군중 동원에는 실패했다. 우익 신문들은 시위군중이 10만이라고 보도했지만 3,4천명에 불과했다. 국민은 반탁운동 보다는 좌우합작운동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1947면 7월3일 조선일보가 24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반탁시위는 ‘독립의 길이다’ 651표, ‘독립의 길이 아니다’ 1,736표를 받았으며, 미소공위에서 제외될 사회단체로 한민당 1,227푶, 한독당 922표, 독촉국민회 309푶, 남로당 174표 등이 나왔다. 


1947년3월12일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냉전시대의 시작이었다. 소련이 차지하고 있는 38선 이북과 남한이 점령하고 있는 이남이 한나라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다. 미국은 좌우 합작운동을 포기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어떤 합의가 나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947년9월17일 미군정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한다고 발표했다. 미소공위를 통해서 한반도에 통일된 민주국가를 건설할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더구나 좌우합작운동의 중도 좌파의 대표자였던 여운형이 1947년7월19일 암살되면서 좌우 합작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구는 한국독립당으로 우익진영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 참여에 이견이 생겨 난항을 겪었다. 안재홍의 조선국민당 계열, 권동진의 신한민족당 계열이 미소공위 참여를 주장했기 때문에 한독당에서 분리되었다. 김구는 한독당과 한민당의 합당을 강력히 추진했다. 한민당 당수 김성수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한민당이 한독당에 흡수될 것을 우려한 장덕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서 김구는 장덕수를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1947년7월10일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이승만과 김구가 공동영수로 추대되었다. 김구의 한독당 선전부는 “자율적 법통임시정부 수립”과 “미소공위도 유령상태를 버리고 3천만 총의의 자율적 민주주의임정수립 대업성취를 원조 승낙하기 바란다”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1947년8월12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다.


1947년 9월5일 이승만은 김구가 주도한 국민회의 주석으로 보선되었으나 9월16일 주석 유임을 거절했다. 그리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주장하며, 그 배경을 “내가 총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남북을 영영 나누자는 것이 아니오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국제상 발언권을 얻어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촉성할 통로를 열자는 것이며 만일 이 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다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지마는 아무 다른 방식이 없는 경우에는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니 전민족이 다 합심해서 이것을 촉진하는 것이 가 할 것입니다.”라 고 설명했다.


1947년9월17일 미 국무부 장관 조지 마셜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유엔 한국 위원회 감시하의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을 철수하고 그 정부의 권능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안을 제2차 유엔총회에 상정하였다.

1947년 11월, 김구가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이승만은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동의했다. 1947년11월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가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승만이 주장하는 남한 선거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 12월30일 이화장에서 이승만과 회동을 마치고 나와서 ‘자신과 이승만 사이에서 근본적인 의견차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1주일 전의 주장을 반복하였다. 12월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라 고 번복된 주장을 확인했다. 


1947년12월2일, 장덕수가 제기동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12월4일 범인 박광옥과 배희범이 체포되었다. 용의자 6명은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임정을 절대 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렬 단원들이었다. 1947년 6월에 발족했는데 김구를 총재로,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박광옥은 종로경찰서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독당 당원이었다. 수사를 지휘했던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하고 경교장에 대한 수색영장을 내려고 하였다. 김구계열의 단체가 연루되어 있는 것이 확실했고 배후로 김구가 의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지 중장이 이을 중지시켰다. 

12월4일 김구는 “국민의회와 민대(이승만 주도의 민족대표자회의)와의 완전합작은 민족단결 공작에 기초를 주는 것이며 심히 경하할 일이다. 나와 이승만 박사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실현하자는 목적에 완전한 합의를 보았다”고 하였다. 


12월12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국민의회측의 간부 몇사람이 장덕수 피살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 있다는 이유로 김구의 국민의회와 이승만 주도의 민대 합동회의에 대한 집회금지 조치를 내렸다. 12월14일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하여 장덕수 피살사건에 한독당 당원들이 구속된 문제에 관해서 요담했다. 12월20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맞이할 한국민족대표단의 공동고문으로 김구와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장덕수의 피살 사건은 김구와 한민당,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만약 김구를 체포하면 거족적으로 군정에 대항하겠다”고 선언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가 김구 세력임이 드러나서 한민당과 김구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이승만이 김구를 두둔하고 나오자 한민당은 이를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12월21일 이승만의 민대가 김구 주도의 국민의회를 무시하고 한민당과 연대하여 독자적으로 한국문제 유엔대표단을 맞이할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였다. 말은 이승만이 김구를 도와주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궁지에 몰린 김구를 고립시키려는 수작이었다. 김구는 대 노했다. 12월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했다. 원래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었단 한민당에게는 호재였다. 김구의 항의로 이승만 주도의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한국민족대표단 구성을 위한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48년1월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했다. 1월12일 서울에서 열린 한국 임시위원단회의에 이승만과 김구가 참석했다.  이승만은 단장 크리슈나 매논이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즉각 대회장을 떠났다. 이 무렵부터 김구와 이승만의 노선이 분명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고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추진이었다. 1948년 1월16일, 언론은 그때의 상황을 “… (김구)국민의회 측에서 임정 법통을 고집하고 (이승만의)민대측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함이 부동한 쌍방의 근본주장…”이라는 요지의 보도가 나왔다. 한편 한민당은 1948년 1월21일 임정수립대책위위원회(미소공동위원회에서 거론되는 임정)를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하여 자신들의 당론이었던 임정봉대론을 철회하고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 합류하였다. 


1948년 1월23일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부했다. 김구는 1월28일 유엔위원단에게 ‘미소 양군이 철수하여 군정의 간섭없이 유엔치안하에 자유스러운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 남북지도자 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가 사라진 마당에 남은 대권 경쟁자는 김구와 이승만이었다. 장덕수 피살 사건의 경위는 김구 배후가 크게 의심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승만에게는 김구를 제거하거나 최소한 그의 영향력을 크게 손상시킬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였다. 이승만은 경찰이라는 커다란 무기가 있었다. 장택상은 이승만을 위해서 경찰력을 움직였다. 장택상의 수사는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이승만은 뒷짐지고 기다리면 만사 해결이었다. 


재판과정에서 장덕수 피살 사건의 배후로 밝혀진 김석황은 김구 세력의 행동대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장택상 수사팀은 그를 경기도 광주에서 체포했다. 그런데 그의 소재를 추적하는 경찰에게 알려준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체포 당시에 그의 주머니에서 아직 부치지 않은 편지가 한 장 나왔다. 김석황은 이 편지를 장택상에게 보내려고 했다고 한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님께서 대권을 잡으실 때까지 소생은 유리개걸하기로 하였습니다. 복원 선생님은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대권은 반드시 선생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선생님은 천명을 받으셨으나 소생은 잡힐 리가 만무합니다. 이 박사와 한민당 찬역배가 음모를 하오니 선생님은 특별히 신병을 조심하십시오. 대권이 이 박사에게 가면 인민이 토탄에 빠지고 애국자의 살상이 많이 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대권을 추호도 사양치 마시고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운운”(페리스코프; 해방일기 1948.1.16/김구가 과연 장덕수 암살의 배후?)


이 편지는 김석황이 김구에게 보내는 편지로 알려져 있다. 장택상은 수사중에 이 편지의 내용을 언론에 흘렸다. 김석황의 체포 과정, 편지의 내용, 김구가 아니고 장택상에게 보내려 했다는 김석황의 주장 등은 그 진실이 의심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김석황의 체포와 그 편지는 김구의 위상을 떨어트리고 미군정이 김구를 미국이 추구하는 한반도 정책에 반대하는 과격한 민족주의자로 낙인 찍기에 충분했다. 장덕수는 껄끄러운 이승만과 김구 외에 유일한 미군정이 믿을 만한 지도자였다. 


미군정은 남한에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워놓고 떠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찰, 관료, 자산가들을 보호해야 했다. 이들 중에는 많은 친일파들이 있었다.  김구는 친일파 청산을 주장했다. 

따라서 미군정이 떠난 후의 남한을 김구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미군정은 할 수없이 장덕수 암살 후 이승만을 선택해야 했다. 1948년1월22일 자 버치보고서에는 경기도 경찰 청장 장택상이 김구가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김석황의 편지를 ‘이승만을 위해서’ 언론에 공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 10. 김구의 권위를 떨어뜨려라) 


버치 보고서는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를 로마의 삼두정치와 같은 관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은 친구가 아니다. 그들의 목표도 다르다. 그들은 개인적, 정치적 애정이 없이 제한적으로 연합해 있다. 그들은 상대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고 서로 믿고 있다. (박태균의 버치보고서; 10. 김구의 권위를 떨어뜨려라)

1948년 1월초, 김구는 단정수립론과 남북통일정부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였다. 이전까지는 이승만의 단정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승만과 틀어졌다는 소문이 파다해 지자, 그는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지난 1월 기자 회견 때 선생님은 이승만 박사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밝히셨는데 지금의 심경은 어떠하신지?’하고 물었다. 김구는 “그 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소. 이승만 박사에 대한 나 김구의 충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요. 만고 남산위의 소나무가 그 빛을 갈 지 언정 나의 이 같은 마음은 추호도 변 할리 없소. 그러나 그분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그 분에게 맹종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통일된 독립정부의 수립에 대한 나의 신념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라 고 대답했다. 이승만은 단정,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승만은 “한국의 소나무가 시들어가고 있다.”며 김구의 단정 반대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의 심경을 들어내었다. 


2월9일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한국 임시위원단의 크리슈나 매논에게 남북한 동시 총선거 실시를 위한 남북협상을 재차 제안했다. ‘남한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부를 수립한 후 압도적인 득표율을 근거로 소련을 북한에서 축출하고 통일을 이룬다’는 이승만의 계획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제안이었다. 냉전이 이미 시작되어 소련과 미국이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갈라지고 북한이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부가 정착하고 있는 마당에 언론과 대다수의 사회 단체들은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김구는 2월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2월16일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상임위원 김두봉에게 보냈다. 


1948년2월26일 유엔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결했다. 3월1일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는 조선인민대표의 선거에 관한 포고를 통해5월9일 선거를 실시할 것을 공포했다.  같은 날 김구는 김규식, 김창숙, 조완구, 조소앙, 조성환, 홍명희 등과 함께 남한총선거 불참을 선언하였다. 


3월4일, 미군 검찰은 권총, 사진 등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하였다. 트루먼 대통령 명의의 소환장에 따라 3월12일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출두하였다. 대위, 소위, 중령급의 미군 법무관들은 김구를 심문했고 김구는 배후 관련을 극구 부인했다. 아무런 혐의가 입증되지는 못했지만 김구의 법정 출두는 그의 명예와 위상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김구와 김규식이 서한을 발송한지 40일이 지나서 북로당, 조민당, 천도교청우당 등 6개 정당과 사회단체가 3월25일 평양방송을 통해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남한의 17개 정당과 사회단체에게 남북연석회의를 4월14일 평양에서 갖자는 제의를 했다. 3월27일 김일성은 밀사를 통해서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김구와 김규식에게 전달했다. 

냉전이 고착화되고 북한이 소련 주도의 공산주의 국가로 안착되어 가는 정세는 통일정부론이 힘을 잃어가게 하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유엔 간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패 등은 소련과 미국의 대립이 낳은 결과였다. 


많은 지각 있는 인사들이 김구의 북한 행을 만류했다. 신익희, 조소앙, 이철승이 간곡히 만류했으나 김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광복군 3지대 장이었던 측근 김학규도 반대했다. 남한 단독 선거에 참여하라고 권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김구는 이것도 마다 했다. 정덕수 피살 사건 배후로 의심을 받아 재판정에 나가 심문을 받고 있는 김구는 정국의 전환이 필요했던지 현실을 외면한 선택을 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제안한 연석회의는 김구와 김규식이 원하는 요인회담과는 성격이 달랐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에 당황했다. 미군정은 물론 유엔임시위원단, 독촉(이승만), 한민당이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성공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조국의 운명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으며 민족 통일을 얻을 때까지 제2, 제3, 또는 제10의 회의라도 열 생각을 가져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전혀 우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4월18일 문화인 108명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4월19일 김구 일행이 남북협상을 위해서 북으로 가려고 하자 이철승은 전국학련  학생 수백명을 이끌고 경교장 앞에 나타나서 ‘못가십니다’를 외치며 들어 누었다. “이승만 박사의 노선이 분열되면 안 된다” 고 하며 김구의 북행을 막았다.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라 고 외쳤다. 김구는 학생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나 학생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김신과 선우진이 학생들 앞에 나와 북행길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이철승과 청년들이 해산했다. 그리고 김구일행은 석탄이 들어오는 지하 통로를 빠져나와 허술한 쪽의 담을 넘어 승용차에 타고 북으로 향했다. 4월20일 김규식 일행도 김구의 출발을 확인한 다음 곧바로 뒤를 따랐다. 


김구와 김규식의 북행은 남한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서 각종 시위를 선동하고 테러를 일삼고 있는 남로당과 북한의 음모를 돕는 꼴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시점에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은 김일성에게 대단한 호재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정부 수립을 상의하기 위한 회담을 기대했지만 김일성과 김두봉은 원래 계획했던 ‘연석회의’ 를 일방적으로 진행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를 항의했다. 4월26일 밤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4자 회담이 이루어졌다. 4월27일에는 남북인사 15인의 회담이 이루어졌다. 김구와 김규식은 4자 회담에서 무엇인가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논의하려 했으나 김일성과 김두봉은 연석회의가 끝난 후의 피로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5월1일 남북한의 56개 정당과 사회단체가 서명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첫째,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동시에 철수할 것. 둘째, 외국군대가 철수한다 고 하더라도 내전은 발생하지 않으며, 어떠한 무질서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 셋째, 외국군대가 철수한 이후 전조선 정치회담을 소집하여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즉시 수립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조선의 입법기관을 구성하여, 헌법을 제정하여 통일된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 넷째, 남조선의 단독선거결과를 승인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합의내용은 외세를 배제하고 우리 민족끼리 상의하여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좌익이 우세한 한반도의 여론을 고려하면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외세가 없는 판국에서 김일성은 한반도에 통일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5월5일 평양에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회담의 결과가 비교적 만족스러웠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번회의에서 남한의 단선과 단정을 반대하며 미소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데 동의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북한 지도자들이 단정을 절대로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회담에서 송전문제의 해결과 연백  등 저수지 개방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북행의 성과를 강조했다. 

그러나 공동성명에서 발표한 대부분의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반도 문제는 미소냉전의 한 가운데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합의 없이 우리 민족끼리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였다. 김일성과 김두봉은 북한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에서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김일성은 남한에서 명망 있는 정치지도자들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노선을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려고 할 뿐 통일정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남북 통일 문제는 오늘날에도 외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48년 3월부터 미군정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 실시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원래 선거날을 5월9일로 했는데 일요일이어서 기독교인들이 반발하자 5월10일로 정했다. 김구의 당인 한독당 소속 정치인들도 김구가 북한에 있는 동안 후보자로 등록했다. 김구는 북한에서 돌아오자 마자 ‘나 없는 동안에 총선거니 머니 해서 입후보한 사람은 다 탈당해라’ 고 했다. 한독당 입후보자들은 대부분 후보를 포기하지 않고 탈당했다. 

선거는 미군정이 주관했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참관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남로당은 폭력으로 선거를 방해했다. 제주도 4.3 사태가 가장 큰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에서는 선거가 시행되지 않았다.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단독 선거 불참 세력이었다. 이들에게 동조하는 국민이 많았다. 단선 참여 세력은 남북협상을 “총선을 파괴하려는 북한의 모략”이라고 비난하였다. 미군정당국은 ‘남북협상의 허구성’을 홍보하는데 선전 홍보활동의 중점을 두었다. 


5월10일 선거는 198명의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당선자 스스로가 밝힌 소속 정당에 따라 분류한 당선자의 수는 (이승만)대한독립촉성국민회 54명, 한민당29명, 대동청년당 12명, 민족청년당 6명, (김구)한국독립당 1명, 조선민주당 1명, 기타 군소단체 10명, 무소속 85명 등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정파별 구성을 반영하지 못한 자료였다. 보다 정확한 통계는 85명의 무소속의원을 정파별로 분류한 국회선거위원회의 발표였다. 한민당 76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61명, 한국독립당 17명, 대동청년당 16명, 민족청년단10명, 조선민주당 0명, 중도계10명 기타 10명이었다. 

1948년7월21일 국회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 9월7일, 제헌국회는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 특위법을 통과시켰다. 친일파 청산은 김구와 임정 세력의 오래된 숙원이었다. 친일파 청산에 앞장섰던 국회내의 소장파의원들은 이러한 김구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김상덕, 신성균, 오택관, 이문원 등은 임시정부 계열이거나 한독당 출신이었다. 그런데 김구 계열이 추진 중인 친일파 청산은 이승만 세력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장관 4명과 차관 14명이 일제 관료 출신이었고 경찰과 군 장성은 친일파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친일파 청산은 이승만 정부를 와해 시키는 정책이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을 저지해야 했다. 


1948년9월9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38선 이북은 공산주의, 남은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어 남북 분단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이 대표하는 냉전이라는 이념 전쟁은 한 민족이 적대관계를 형성하는 비극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김구와 소장파 의원들의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추진은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 남로당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한 나날을 보냈다.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해 왔으나 거절했다. 1948년7월21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자 촉진회를 결성했다. 남북협상으로 좌파라는 비난을 받은 김구는 친북인사들의 참여를 단속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라고 단죄하여 좌익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어느 기자가 김구에게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감회를 물었다. 김구는 “오직 비통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 12월7일에서 12월12일 까지 한국 문제가 다루어졌고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았다. 이때 김구는 김규식 박사를 수석대표로 하는 대표단을 구성하여 유엔총회에 보내서 대한민국 정부의 유엔승인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김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미래한국: 김구와 대한민국 2014.11.20, 양동안 한국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남한의 단독정부인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김구의 행위는 이승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눈에 가시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1948년10월 중순 여순사건이 터졌다.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 2,000명이 중위 김지희,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은 1948년 10월21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10월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는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라고 하여 극우정객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김테선 수도 경찰청장도 10월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 사건 수사발표를 하여 이범석을 거들었다.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김구에 대한 이승만의 음흉한 모략이었다. 김구는 분개했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반박 성명을 냈다. 극우가 김구라고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김구를 흠집내기에는 충분했다. 남로당과 북한도 단독선거를 반대했고 김구도 반대했다. 김구는 김일성을 만나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고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했다. 얼핏 생각하면 좌파와 부화뇌동한 것처럼 보인다. 이승만 정권은 이점을 십분 이용하여 김구를 대한민국의 정치판에서 매장하려 했다. 


1948년12월1일 여순사건으로 공산당의 책동을 막기위해서 일본제국의 치안유지법과 보안법을 기준으로 하여 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남로당을 제거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1949년1월5일 중앙청 205호실에 반민특위 사무실이 설치되고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1월8일 화신 백화점 사장 박홍식, 일본 밀정이었고 대동신문 사장 이종형을 비롯하여 이광수, 최린, 최남선, 김영수 등이 체포되었다. 1월26일 친일 경찰이며 독립운동가들의 고문으로 유명한 노덕술이 체포되었다. 그는 일제 때 독립운동가 고문과 체포로 악명이 높았는데 해방 후 장택상 밑에서 공산주의자들 잡는데 큰 공을 세워 이승만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이승만은 노덕술이 해방 후 미군정 경찰로 치안 확보에 공이 크다며 석방을 요구했으나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대통령이 직접 관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부결되었다. 


친일파가 대부분인 이승만 정부와 경찰은 계속해서 반민특위 활동을 저지하려는 공작을 끈임없이 벌렸다. 서울시경 정보과장 최운하 등은 반민특위 간부들의 뒤 조사를 벌려 폭로해서 반민특위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특히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이 일제 때 마포구 서교동 총대(통반장)을 하면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보급에 협조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반민특위의 위상이 크게 손상되었다. 반민특위 관계자들을 암살하려는 시도도 계속되었다. 1948년 10월 하순 친일 경찰은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매수하여 반민특위 요인 암살을 획책했다. 그러나 암살 대상에 백민태가 잘 아는 인물이 끼어 있었다. 백민태는 암살 음모를 폭로했다. 이 공작의 주모자인 최난수와 홍택희가 체포되었다. 1949년 3월25일에는 특위 강원도 지부 사무실에서 반민특위 요원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로당과 남로당은 반민특위와 이승만 정권의 암투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와 국회 내 소장파 의원들의 언행은 서로 죽이 맞았다. 김구의 노선도 소장파 의원들과 대동소이 했고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을 위험하게 하는 이적행위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하고 9월9일에 인공이 건국한 후와 전의 민족주의자들을 보는 세상의 눈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외국 군대를 남북한에서 철수하게 하고 남북협상을 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은 단독정부 수립이전에는 새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이 후에는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하는 이적행위로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면 남로당이 아직 남한에서 갖은 공작을 하고 있었고 이러한 노선은 그들의 포섭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2월, 전남 진도 출신 무소속 국회의원 김병희를 비롯한 71명이 남북평화통일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미소 양국군이 철수하고 우리민족끼리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내용으로 남로당의 주장과 다른 바 없었다. 소련군은 북한에서 1948년 12월에 완전 철수했다. 미군은 1948년 9월15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949년 6월30 일에 500명의 고문단 만 남기고 전면 철수했다. 그러나 소련은 북한에 자체 방어력이 있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철수했던 반면에 미군은 경찰경비대 수준의 국군을 편성해 놓고 철수했다. 당시에 인공은 사회, 정치, 경제, 군사 모든 면에서 남한 보다 우세했다. 철수한 소련군은 시베리아에 대기하고 있어서 육로로 언제든지 필요하면 북한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중공군 또한 압록강 건너에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바다 건너에 있어서 한번 나가면 신속하게 진입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이승만은 미군 철수를 반대했고 방어조약을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국가의 종주국인 소련과 접경하고 있고 중국의 공산화가 목전에 있던 1949년의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 미국은 대륙의 2대 공산주의 국가로부터 남한을 보호하려면 막대한 병력과 경비가 필요한데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소련은 미국보고 우리가 철수했으니 너희도 철수하라고 촉구했다. 

국회의원들의 어이없는 제안에 크게 당황한 이승만이 국회로 달려갔다. “지금 당신네들이 이 나라를 파괴하려는 것이냐”고 질타하며 “가뜩이나 미군이 다 철수하고 7천여명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들까지 다 철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미군이 얼마라도 남아있어야 소련군사가 내려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의안은 찬성 37, 반대 95표로 부결되었다. 


여순사건 이후 숙군작업과 보안법제정으로 남로당은 남한내에서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서 투쟁하는 방법을 택했다. 국회 소장파가 그들의 타겟이 되었다. 남로당 국회 공작 책 이삼혁은 소장파 국회의원 노일환과 이문원을 포섭했다. 그는 하사복이라고도 불리웠다. 이삼혁은 1949년 2월27일 서울 삼각동 보원관에서 이들과 만나 “국회에 미군 철퇴 안을 상정하라, 상정이 어렵거나 부결되면 즉시 유엔한국위원회에 미군 철퇴를 주장하는 진언서를 제출하라, 미군 철퇴안에 찬성하는 연판자 100명을 확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남북평화통일에 관한 결의안이 부결되자, 노일환과 이문원이 규합한 소장파 의원들이 1949년3월3일 서울 서린동 평화옥에 모여 두번째 지령대로 유엔한국위원단에 미군철수를 요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3월16일까지 62명의 국회의원 서명을 받았다. 


1949년3월22일, 소장파의원들은 서울 안국동 음식점으로 기자들을 불러 “미군주재 하에서는 진정한 민주적 통일은 없고, 미군주재하의 통일은 새로움 분열을 내포하고 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1949년 4월, 서울 시경 사찰과 수사진이 서울 충무로 2가 55 번지 남로당 특수조직부를 급습했다. 많은 비밀문서 중에 주주총회 보고서라는 서류를 발견해서 암호를 풀어 보니, 그 내용은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원내 활동 상황과 발언 평가였다. 국회의원 30여명의 이름도 발견되었다.  오제도 검사는 5월18일 전북 익산 출신 이문원 의원, 강원도 정선 최태규 의원, 경남 고성 이구수 의원을 체포하고 6월20일 국회가 폐회하자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하여 노일환, 김옥주, 박윤원, 김옥중, 황윤호 의원 등 국회의원13명을 검거하여 수사가 시작되었다. 수사진은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김옥주 의원이 남로당 중앙위원 이삼혁과 접촉하고 있었고 이삼혁은 박헌영의 비서 박시현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박시현의 애인 정재한이라는 중년여성을 심문했다. 정재한은 포목장사로 가장하여 개성을 지나 평양을 오갔다. 그는 남로당 레포(연락원)이었다. 장재한은 암호문서를 음부에 감추어 북에 있는 박헌영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암호문서를 3일만에 해독해 보니 이삼혁이 박헌영에게 보내는 보고서였다. “미군철수을 위한 지령을 이문원, 노일환 의원에게 하달 헸음. 미군철수안 국회 통과가 좌절되어 유엔 위원회에 진언서를 제출했음”등을 보고하고 있었다.  

1949년6월17일 오전 9시에 소장파 의원들은 서울 청진동 김약수 국회부의장 집에 모였는데, 한시간 후 10시에 김약수와 노일환 등 6명의 국회의원이 덕수궁에 있는 유엔한국위원회 하이만 사무국장을 찾아가 미군 고문단 한국 잔류를 원치 않는다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미군이 6월 29일까지 남한에 있는 전 병력을 철수하고 500명의 고문단만을 남긴다는 발표가 있는 후였다. 


이들은 검찰이 레포 정재한의 집을 압수 수색하여 국회공작에 관한 지령문 등 다수의 증거 자료를 확보한 후 6월20일에 대거 구속 기소된 것으로 보인다. 검찰총장 권승렬이 국회에 보고한 지령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외국군을 완전 철수시킬 것 2) 남북의 정치범을 석방할 것 3) 남북 정치 사회단체로써 남북정치회의를 구성할 것 4)남북 정치회의는 일반, 평등, 직접, 비밀의 4대 원칙에 입각한 선거로써 최고입법회의를 구성할 것 5) 최고입법기관은 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6) 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할 것 7)조국방위군을 재 편성할 것 등이었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의 고문이었다. 이승만은 그를 가까이 두고 속내를 들어내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 무렵 이승만이 올리버에게 몰래 보낸 편지에는 “한독당이 공산당과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국회 안의 몇몇 친공분자와 반미분자들은 한편으로 한국독립당에,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당 조직 남로당에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정부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별러왔다. …”

한국독립당(한독당)은 김구와 임정계열의 정당이다. 한독당이 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면 김구가 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1949년 김구의 행보를 추적해보자. 


4월19일은 1948년 평양에서 김일성과의 남북협상 1주년이었다. 김구는 ‘북행1주년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1차 남북협상은 시작에 불과하다. 남북의 통일에 대한 협상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미-소 양군 철퇴는 우리의 주장이 부분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4월20일, 군산의 ‘건국실천원 ’개강식에 참석하여 기자회견을 했다. “평화통일을 위하여 조직적 국민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양군이 철퇴함으로써 급속히 추진시켜야한다.”


5월9일, 한독당 창당 19주년 기념식에서 김구는 “본당은 앞으로 반봉건적 반제국주의 적인 브르주아식 민주주의 민족혁명의 큰 기치 하에서 평화적 방법으로써 모든 민족역량을 통일 단결시킬 결심을 갖고 나갈 것이다. 무엇보다 선결 조건은 강력한 민족주의 민족혁명세력이 조성됨으로써 조국통일의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고 고수해야 할 것이다.”


5월21일, 임시국회의 개회에 맞춰 국회의원들을 편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국회의원들은 한편의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겠다는 이유 하에서 선거에 출마하였다. 선거민에게 굳게 약속한 것들을 아직까지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심각한 반성과 새로운 투쟁이 없으면 민중의 기대를 만족할 길이 없을 것이며…”라고.


대한민국 건국 이전만 하더라도 남북협상을 통한 평화통일 정부의 수립 주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38선 이남과 이북에 각각 친미 자유민주주의 정부와 친소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주장이 되어 갔다. 김구의 노선은 민족주의 적 관점에서는 정의 로운 주장이었지만 냉전 구도의 국제정세에 도전하는 발언이었고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국회 소장파와 김구가 이끄는 임정세력은 친일파 청산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반민특위도 소장파 의원들이 주도했다. 1949년 6월, 프락지 사건에 연루된 소장파 의원들의 체포는 반민 특위의 활동을 급격하게 위축시켰다. 한편 반민특위 활동으로 위기에 처했던 친일파 경찰은 6월6일 새벽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했다. 경찰은 출근하는 반민특위 요원 35명을 체포하여 중부 경찰서르 끌고 가서 감금하고 가혹행위를 했다. 각도 지부 사무실 전화선도 모두 절단되었고, 경기도 지부 사무실은 경찰에 의해 봉쇄됐다. 사건 직 후 이승만은 국회발언과 기자회견을 통해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자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친일파 청산으로 위기에 처한 집권세력이 프락치 사건을 이용하여 반정부 세력을 “공산주의자와 내통하여 국가의 존립”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제거하고 있었다. 프락치 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조작한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반민특위로 위기에 처한 경찰과 정부의 친일파 고위층에게는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김구는 신생 친미 정권을 위협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지도자였다.


포병사령관 장은산은 서울 대학병원에 환자로 가장하여 입원했다. 그는 그의 병실에서 백범 암살 행동대를 지휘했다. 암살 행동대는 5명의 포병 소위들과 5명의 서북청년단원, 도합 1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우이동 여운형 묘소 근처에서 사격훈련을 했다. 


장은산은 황해도 출신으로 만주 신경군관학교 4기생이다. 박정희의 2년 후배이다. 졸업 후 만주국 육군 중위로 복무했다. 해방 후 남하하여 서북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군사영어학교를 1946년5월1일에 졸업했다. 졸업 후에 포병 병과를 지원하여 1948년 12월 포병사령관이 되었다. 영어를 아주 잘 했고 자연히 미군과 인맥이 두터웠다고 한다.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이북에서 잘 사는 집안의 자제들이어서 비교적 높은 학력이 요구되는 포병에 많이 지원했다고 한다. 


정치 정보 브로커였던 김지웅은 장은산이 입원하고 있는 서울대학병원에 들려 월 3,4만원을 행동대원들에게 지급하고 야간 통행증을 발급해 주는 등 이들에게 필요한 보급을 해주었다. 서울시 경찰 국장이었던 김태선도 이들에게 매달 위로금을 전달하는 등 작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다. 그도 함경도 고원군 출신이다. 

김성주는 서북청년단 부단장이었다. 그는 평안북도 출신으로 평안청년회를 결성했다. 안두희의 직계라고 한다. 1949년 6월26일, 김구 암살 사건 후 그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자랑하고 다녔다. ‘이승만의 지시를 받아 내가 안두희를 시켜 백범을 죽였다.’ 안두희 공판이 열리고 있을 때 회원들과 같이 볍원에 몰려가 ‘안두희는 민족의 영웅’이라는 전단을 살포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그는 김구 암살을 모의 한 사람들의 모임을 ’88 구락부’라 고 했다. 그 사람들은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참모총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특무대장, 김태선 서울 시경국장, 정치 브로커 김지웅이었다. (서울신문 2020.8월30;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누가 ‘서청’의 망령을 불러내는가)                                                                                                           김성주가 서북청년단안에서 안두희를 설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의심은 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장은산은 대한민국 국군 포병사령관이었다. 그는 행동대를 직접 지휘했다. 그의 명령 체계는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국방장관 신성모로 올라간다. 채병덕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일본육사를 졸업, 일제 포병 장교가 되어 해방 당시 일본군 소좌로 부평 육군 조병창 3공장장이었다. 해방 후 장은산 보다 먼저 군사 영어학교를 1946년 1월15일에 졸업했다. 그도 영어를 잘했다. 


1949년 6월23일 암살 행동대는 김약수 국회부의장의 체포를 빌미로 경교장을 습격하여 김구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리 정보가 유출되어 실패했다. 6월25일 김구가 건국실천원양성소 10기 개교식에 참석하려고 공주르 가믐 데 길목인 수원병점 고개에 잠복하고 있다가 살해하려고 했으나 경찰이 집회허가를 취소하여 김구는 공주로 가지 않아서 이 또한 실패했다.

두 차례의 김구 암살시도가 불발하자 장은산은 자신의 부관 안두희에게 내일 단독으로 김구를 해치우라고 지시했다. 만약 또 실패하면 우리 모두가 다 죽는다고 거사의 필연성을 강조했다.  


안두희는 평안북도 용천 출신이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과 3년 중퇴한 학력을 가지고 있다. 서북청년회의 다른 젊은이들과 같은 전형적인 경력의 소유자였다. 아버지의 재산을 탈취한 공산당을 혐오했다. 38선이북에 소련군이 들어오고 인공이 정권을 장악하자 토지개혁으로 지주의 토지를 압수해서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친일파 청산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지주, 자산가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을 탄압했다.  이들의 자식들은 월남하여 서북청년회를 결성하고 극우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했고 “아무개가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물어보지 않고 제거했다. 


한편 신생 한국의 경찰과 군대는 친일파가 장악했다. 그들의 큰 약점은 과거의 ‘친일’행적이었다. 그들은 이 허물을 벗기 위해서 공산당 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자연히 서북청년회는 이들이 필요한 때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가 되었다. 김구 암살 행동대가 서북청년회와 만주 군관학교 또는 일본 육사 출신 장교로 구성되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서북청년회와 김구는 해방 초기에는 둘 다 좌파를 싫어했기 때문에 서로 협조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김구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적대관계로 변해 갔다. 친일파 반공 세력은 반민특위를 통해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김구를 공산주의자라고 모략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주위의 극우 세력은 서북청년회 사람들에게 김구 노선이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하여 적화통일을 획책하는 분자들임을 각인시키려 했다. 


김구 암살 행동대원이 였던 홍종만은 안두희 옆집에 살았고 안두희와 같이 서북청년단 단원이었다. 홍종만은 안두희를 정보 정치브로커 김지웅에게 소개시켜주었다. 김지웅은 안두희를 종종 만나 용돈을 주고 서북청년단 단원으로 써는 접근할 수 없는 고급정보를 주는 등 안두희와 신뢰를 쌓았다. 그리고 김지웅은 점점 안두희에게 김구와 한독당에 대한 유언비어를 각인시켰다.


김지웅은 홍종만과 안두희에게 한독당에 입당하라고 지시했다. 1949년 1월 그들은 김구의 측근 김학규를 찾아가 친분을 맺고 서청 단원들의 한독당 입당을 요청했다. 김학규는 서청 단원 10명을 한독당에 입당시키고 4월14일자로 당원증을 발급하였다. 

김지웅은 안두희에게 경교장을 찾아가 김구와 종종 만나 친해지라고 지시했다. 김구와 그 측근의 안두희에 대한 경계심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안두희는 김지웅의 세뇌 공작이 주효하여 한독당을 ‘공산당 보다 미운 당이며 무서운 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오병순 소위는 백범 암살 행동 대장이었다. 그는 김구를 죽인 다는데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친구인 육군 소령 김정진에게 김구 암살음모를 털어놓았다. 김정진 소령은 은사이며 김구의 측근인 대광중고교 교장 박동엽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한독당 당원 홍종만도 행동대의 한 사람이라고 귀띔했다.

김정진 소령이 전한 음모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49년 6월23일 밤 11 시30분경, 서대문 충정로 동양극장 앞 경교장 어귀에서 속도를 줄인 주 지프차가 무엇을 노리다가 사라졌다. 그 이튿날 밤 행동대원들은 계동 중앙학교 앞 아지트에 모여 다음날 김구의 공주행 때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인 6월25일, 행동대는 수원의 병점 고갯마루 길목에서 김구 일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공주에서 열릴 건국실천원양성소 개교식이 경찰에 의해서 집회허가가 없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김구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밤 장은산은 행동대원들에게 어떤일이 있어도 내일 김구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1949년 6월25일 이른 저녁, 황급히 경교장으로 달려간 박동엽과 김승학은 김정진에게서 들은 김구 암살 음모를 김구에게 전했다. 그리고 입원하여 피신하시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김구는 “내전에 유언(떠도는 말)을 한두 번 듣지 않았네. 나는 왜놈이라면 몰라도 동족에게 해를 당할 일을 하지 않았네. 멀쩡한 사람이 왜 입원하나? 괜히 내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 나라 잘 될 일이나 연구해 보시게.”하고 일축해 버렸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아들 김신에게도 김정진의 제보를 그대로 전하고 아버지의 신변을 신신당부했다. (오마이뉴스: 암살음모, 백범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김구 암살사건의 진상1]소문을 듣고 태연했던 선생. 2013. 04.02. 박도)


1949년6월26일 오전 10시, 안두희는 장은산의 지프차를 타고 경교장으로 갔다. 오전 10시 45분, 헌병사령부에 비상이 걸렸다. 당시 헌병사 당직사령이었던 오성만 중위가 상관에게 무슨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경교장에서 김구선생이 총에 맞았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대원을 집합시키라는 명령이었다. 

박동엽이 11:50분에 경교장에 도착했다. 응접실에 앉아 있는데 낮 설은 군인이 눈에 띄었다. 안두희였다. 김구의 비서 이국태에게 누구냐 고 물었다. 김정훈(?)님이 소개한 군인인데 그전에 몇 번 왔 섰고 폭탄 껍질로 만든 꽃병을 선물하기도 했다고 알려주었다. 박동엽은 그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사이 김구의 비서 선우진은 안두희를 이층에 집무실에 있는 김구에게 안내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불과 몇 분만에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1949년 6월26일 오후 12시37분경이었다. 김구는 집무실 옆 창가 책상에 앉아 있었고 안두희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창가에 앉아있는 김구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머리, 목, 왼쪽 가슴에 총상을 입은 김구는 많은 피를 흘리며 책상에 업 드려 쓸어졌다. 그러나 현장에는 김구와 안두희 단 둘 이외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현장의 상황은 아무도 모른다. 


김구의 비서 선우진의 증언를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복기해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선우진이 김구에게 안두희가 왔다고 알리자 김구는 스스럼없이 들어오라고 허락했다. 12시 30분경 그가 안두희를 이층으로 안내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데 응접실 라디오에서는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곧장 지하실로 가서 선생의 점심 준비를 살폈다. 식모는 만두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위 층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고 소동이 일어났다. 급하게  1층으로 뛰어 올라가서 2층 층계로 막 올라가려 하는데 안두희가 2층에서 내려오며 권총과 계급장을 내던지고 “내가 선생님을 쏘았 소”하고 외쳤다. 선우진이 황급히 2층으로 올라가 보니 김구가 유혈이 낭자한 채 책상에 업 들여 쓸어져 있었다. 그는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김구를 집무실 다다미 바닥에 뉘어 놓으며 빨리 인근 적십자 병원에 연락하여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 동안에 격분한 김구의 비서진들은 그를 사정없이 구타했다. 경비실의 연락을 받은 경찰이 응접실 바닥에 쓸어져 있는 그를 연행하려 하고 있는데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나타나서 “범인이 군인”이라는 이유로 재빨리 안두희를 쓰리쿼터에 태우고 사라졌다. 비상이 결려 대기하고 있던 헌병들이었다. (미래한국: 안두희, 김구를 쏜 까닭은?, 김용삼, 2015, 06.26)


헌병사령부로 연행된 안두희가 침대에 누워있는데 헌병대 부대장 전봉덕이 찾아왔다. 그는 큰일 잘해냈다고 칭찬하며 앞으로 누가 무엇을 물어도 일절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음날 헌병대장 장흥이 안두희가 편하게 침대에 누어 있는 것을 보고 지하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했으나 시행되지 않았고 안두희는 김창룡이 대장인 특무대로 이관되었다. 김창룡은 안두희를 애국자라고 칭찬하며 우대했다. 김구의 측근이었던 장흥 헌병사령관은 다음날 전방 사단으로 좌천되었고 전봉덕이 사령관이 되었다. 


1992년4눨21일 MBC는 육군헌병사령부 제2과가 김구 암살음모의 계획부서였고 그 책임자가 헌병 부사령관 전봉덕이었다는 당시 육군1연대 헌병대장 한필동씨의 증언을 보도했다. MBC LA 특파원 정동영이 LA에 살고 있는 한필동씨를 인터뷰해서 밝혀진 사실이었다. 전봉덕은 백범신변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수집해서 장은산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그는 전봉덕과 장은산이 한독당을 전복하고 김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살해하는 계획을 추진했다고 증언했다. 


전봉덕은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다.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본고등문관 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한 수재였다.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있다가 경기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의 일제 경찰에 대한 우대로 승승장구했다. 장택상의 우대로 경무부의 공안과장,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 겸임, 군정청 경무부 감찰관, 경무부 교육국 부국장 겸 경찰전문학교 부교장 등을 역임했다. 반민특위로 친일 경찰이 위험해지자, 친일파 조직 88구락부 회원이었던 신성모 국방장관의 추천으로 육사를 졸업하고 1949년 중령으로 임관되어 헌병 부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헌병조직은 친일 경찰의 도피처가 되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전봉덕에게 친일파 청산을 주도하고 있는 국회소장파의원들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헌병대 안에 특별수사본부를 두고 본부장이 되어 소장파 의원들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이승만은 김구 암살 직후 그를 헌병 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그는 안두희를 보호했고, 사건을 축소하여 배후를 은폐했다. 안두희와 마찬 가지로 그도 김구 암살 이후 비교적 잘 나갔다.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거쳐 변호사일을 했다. 변호사 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법조계 원로로 활동하였다. 김구 암살 진상 규명이 끝임없이 이루어 지자 한국에 살기가 힘들었던지 1980년대 이후에는 미국에서 살았다. 

장은산은 사건 직후 1949년7월에 미국 포병학교로 유학을 같다가 6.25전쟁 중에 귀국했다. 장은산이 미국에 있는 동안 전쟁이 일어났고 포병사령부가 개편되어 신용균이  포병사령관을 하고 있어서 그는 보직을 못 받았다. 보직을 기다리던 중 전쟁을 피하려고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군법회의에 넘겨져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10년으로 감형되어 군형무소에서 복역중이었다. 1951년 부산 육군형무소에서 복역 중 병사했다고 한다. 포병 부하들에 의해서 살해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신용균 전 포병사령관등 군 관계자들은 이를 부인했다. (1992년4월17일 동아일보)


수많은 정보원을 거느렸던 정보 정치브로커 김지웅은 4.19 후 김구 암살 사건의 진상규명이 강력하게 진행되자 일본으로 가서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으나 일본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며 살다가 1988년에 사망하여 한국에 묘소가 마련되었으나 비석에 이목이 두려워 가명을 사용했다.

 안두희 재판이 한참이었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검찰관 홍영기를 불렀다. 안두희에게 얼마를 구형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래서 사형이라고 했더니 10년을 구형하라고 요구했다. 못하겠다고 하고 나왔다. 채병덕은 그를 다시 불러 사형을 구형하겠다고 하는 그에게 또 10년 구형을 지시했다. 

안두희는 무기형 언도를 받았으나 그해 가을15년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6.25 사변이 일어나 무죄 석방되었다. 백범 암살 당시 소위였던 그는 두 달 뒤에 옥중에서 대위로 진급하여 퇴역했다. 그러나 그는 6.25가 나자 군에 복귀하여 1951년에소령으로 진급한 후 퇴역했다. 민간인 안두희는 군납업체 사장이 되었다.


6.25사변 동안 한국 정부는 대구와 부산을 오갔다. 부산에서 국방장관 신성모가 안두희를 불렀다. 그는 ‘말 많이 들었고 수고했다’고 하며 금일봉을 주었다. (안두희 증언)

포병사령관 장은산의 명령체계인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과 국방장관 신성모가 사건에 관여했다는 증언이다. 그러나 물적 증거는 없다. 이 두사람이 이승만의 승인없이 이렇게 큰 사건을 진행했을 리는 없지만 이승만이 이 사건에 어떻게 관여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이승만이 사건 배후의 정점으로 보이나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여러 사람들의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호기심은 가시지 않고 있다. 


1949년7월5일 백범 김구선생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루어졌다. 전 국민이 애도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이 겨레 이 강산이 이 미친 듯 우는 소리를 임이어 듣습니까?” 라는 가사의 노래와 함께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매웠다. 상가는 철시하고 집집마다 조기가 계양되었다.  53년 동안의 구국운동을 했던 김구는 분단된 나라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향년 74세로 유명을 달리 했다. 


1949년6월28일 수사결과가 발표되었다. “김구와 한독당이 공산당과 결탁한데 대해서 분노한 반공청년 안두희가 한독당 비밀당원이 되어 저지른 단독범행”이라는 내용이었다. 재판정 주변에는 애국자 안두희를 석방하라는 반공청면들의 격문이 나 붙었다. 재판정 안의 안두희의 변호인들은 안두희의 행동은 표창 받을 일이라는 변론을 폈다. 

그러나 국민은 김구가 공산주의자라고 믿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애국자라고 생각했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많은 김구 같은 노선은 종북 세력 또는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제거되었고 다수의 국민이 그것을 믿었다. 아마 김구 암살 사건이 일부 소수 극우 세력을 제외한 국민 대다수가 김구의 노선은 애국 충정에서 나온 행위라고 믿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친일파의 생존전략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생존이 반공에 있던 시절에 친일 기득권 층의 공산당 제거 공작은 그들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래서 친일파 = 매국노의 공식이 반공=애국의 공식으로 둔갑하고 친일파 청산 노선은 “종북 세력”으로 되어 갔다. 

1949년 8월5일 중앙고등군법회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3개월 후에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의 추천으로 국방방관 신석모가 징역15년으로 감형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인1950년 6월27일, 잔형 집행정지 처분으로 가석방되었다. 7월10일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검 국방장관은 특별명령 4호로 그를 육군 소위로 복위 시켰다. 그리고 9월15일에 중위로 진급했다. 1952년2월15일 신성모의 명령으로 잔형이 면제되었다. 그리고 대위로 진급했다.  1953년 12월2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그에 대한 예후와 보호는 계속되었다. 그는 1956년 10월부터 강원도 양구에서 신의기업사라는 식료품 군납업체를 경영했다. 그는 1군사령부 11개 사단에 식료품을 공급하여 집터안에 작은 호수를 파서 배를 띠우고 군 장성들과 파티를 할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퇴출하자 그의 좋던 시절도 끝장이 나고 그를 찾아서 응징하고 배후를 규명하려는 여론이 급등하였다. 양구 농고 학생들이 4.19에서 희생된 선배들의 영령에 보답할 목적으로 성금을 모금하던 중 안양기업사 대표 안두희를 찾아 갔다. 그는 겨우 600환을 내놓았다. 이에 화가 난 양구 농고 학생 30여명이 1060년4월29일 새벽1시에 안두희의 집을 습격했다. 집은 전파되었고 가구 일체가 불에 탔다. 


1960년 6월26일, 백범 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검찰이 안두희를 지명 수배했으나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김용희 조사위원장이 우연히 길가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약 4시간동안 안두희를 면담하여 암살사건의 배후에 대한 자백을 받아 감찰에 넘 겼으나 공소시효가 지났고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벗어난다고 형사처벌 불가의 판정을 받았다. 검찰은 테러의 위험이 있다 고 판단하여 안두희를 보호하고 있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 난지 15일만에 귀가했다. 4.19로 인한 위기를 모면한 안두희는 5.16 후에도 한동안 군납업을 계속했다. 


1965년12월 중순 국학대학 정치학과 학생 곽태영이 수소문 끝에 양구에 잠입하였다. 그는 안두희의 사진을 간직하고 행상차림으로 안두희를 찾아 나섰다. 그는 안두희 공장이 환이 내려다 보이는 집에 하숙을 얻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양말과 장갑 등을 팔아 장사꾼처럼 보이게 하면서 공장내를 살피며 안두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12월22일 아침, 근처에 사는 안씨 공장의 중역 부인들이 안씨에게 찬 거리를 갖다 주느라고 집 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 틈새로 안씨가 세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곽태영은 안두희에게 접근하여 할 이야기가 있으니 조용한 데로 가자고 했다. 안두희가 미적거리는 동안 간직하고 있던 칼을 그의 목에 들이대고 백범암살의 배후를 대라고 협박하자 안두희가 그를 업어치기로 넘어뜨리고 넥타이를 잡아당겨 목을 조였다. 거의 숨이 넘어가려고 했으나 안간힘을 다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안두희 배에 올라 앉아 돌로 그의 머리를 치고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 곽태영은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연행되었다. 안두희는 서울 성모병원을 이송되어 2차에 걸쳐 뇌수술을 받고 회복했다. 1966년7월30일, 곽태영은 징역3년에 집행유예5년을 받고 풀려났다. 

안두희가 병원에 있는 동안 회사 중역들이 거액을 힁령하여 회사가 망했다. 안두희는 부도를 내고 잠적했다. 1974년, 곽도희는 백범 암살 행동대의 일원이었던 홍종만을 찾아내어 양심선언을 하게 한 다음 신문기자와 함께 안씨의 집으로 가서 안두희와 그를 대면시켰다. 1981년12월에는 안두희가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도피하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저지하였다. 안두희는 부인과 5남매를 미국에 보내 놓고 자신도 출국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곽태영은 광복회장 이광훈과 함께 미대사관에 가서 항의하여 참사관으로부터 앞으로 안두희에게 절대로 비자를 발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시사저널: 백범피살, 집념의 추적자들. 문정우 기자) 


사회운동가 권중희는 무려 50년 동안 김구 사건의 배후를 추적했다. 사건의 배후를 밝히라고 1950년부터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는 1982년부터 몸소 그를 추적했다. 1987년 마포 구청 앞에서 그를 폭행하여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서 전국적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안두희는 추적자들을 피하기 위해서 무려 12번씩이나 이사를 했다. 그러나 권중희는 그가 이사를 갈때마다 찾아내어 배후를 말하라고 압박했다.1992년6월, 권중희는 안두희를 효창공원 내에 있는 김구의 묘소로 끌고가서 사죄하게 했다. 그는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사죄의 눈물이었는지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서 울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1992년9월23일 그는 안두희의 집을 습격하여 안두희를 자루에 넣어 가평으로 납치했다. 그때 안두희는 미국 첩보 활동에 협조했고 채병덕의 권유로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을 만났다고 진술했다.  이때 극방장관 신성모가 자신도 이승만을 만날 일이 있다고 하며 따라 나서서 채병덕, 신성모, 자신 세 사람이 이승만을 면담했다고 진술했다.  그때가 1949년 6월20일이었는데 이승만이 암살을 암시하는 말을 했다고 안두희가 증언했다고 한다. 권중희은 그의 증언을 녹음하여 국회 진상 위원회에 제출했다.


1993년3월, 백범사상선양회장이며 서점을 경영하고 있던 김석용은 안두희을 찾아가서 죽기전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증언을 남겨 배후를 밝히라고 회유했다. 그리고 녹음기와 녹음테이프를 남기고 집을 나왔다. 안두희는 1년여에 걸쳐 121개의 녹음 테이프를 채워 증언을 남겼다. 그 중에 일부가 국회진상조사위원회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승만의 관련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증언하지 않았다. 


버스기사 박기서는 1995년 초 백범일지를 읽고 감복했다. 그리고 권중희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책을 읽고 안두희을 처단하갰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경기조 부천 소신여객 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거사를 결행하기 위해서 휴가를 얻었다. 부천시장에있는 한 그릇가계에서 홍두깨 비슷한 40cm 크기의 몽둥이를 구입했다. 안두희의 소재를 잘알고 있는 권중희에게 전화를 걸어 안두희를 죽이겠다고 하니 아직 배후에 대한 증언을 받아내야 한다며 말렸다. 그러나 그는 1996년10월23일 오전 11시30분,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 있는 안두희 아파트에 침입했다. 안두희의 부인을 포박한 후 옆방에 있던 안두희를 장난감권총으로 위협하고 나일론 끈으로 그의 손을 묶어놓고 안두희를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땀을 흘리며 목이마르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면서 안두희가 숨을 거둘 때까지 몽둥이를 휘둘렀다. 박기서는 안두희가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하고 심곡본동 성당에가서 고해성사를 한 후 경찰에 자수했다. 안두희 나이 78세였다. 1997년 박기서는 징역5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되었다. 1998년3월13일 김대즁 대통령의 대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다.


2001년 9월4일, 재미 사학자 방선주와 편사연구자 정병준에 의해서 발굴된 실리보고서를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했다. 실리보고서는 1946년에서 1948년까지 미군 방첩대(CIC)요원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던 조지 E. 실리(George E. Cilley)소령이 김구 암살사건 직후 상부에 올린 A4용지 5장 분량의 첩보보고서이다.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실리 소령은 본국에 돌아가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운영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김구 암살 소식을 듣고 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안두희가 사건 당시 미군 방첩대 정보원 또는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백의사 특수대원이었다고 폭로했다. 실리는 안두희가 처음에는 미군 방첩대 정보원으로 활동하다가  방첩대 요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안두희가 백의사 소조원(특수대원)으로서 수장 염동진에게 ‘민주한국과 한국 민족주의 부활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암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면 상대를 죽이고 애국자로 죽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적었다. 


실리는 광범위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영동진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세우기 위한 군사 쿠데타 음모였다. 제4연대 장교들이 참모회의에서 이런 유형의 정부가 수림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여러 번 논의되었다고 하면서 이를 뒷 받침 하는 1948년11월11일자 서신을 보고서에 첨부했다. 

제4연대는 전남 영암에 주둔하고 있었다. 원래 4연대 소속 소수 장병들이 14연대로 전출되어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정기에 군인과 경찰은 구별하기 힘들었다. 군대를 경찰 경비대라고 했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경찰을 우대했다. 그들은 미제 무기와 보급을 받았던 반면에 군인들은 얼마간 미국의 원조를 받기는 했지만 많이 부족하여 일본군대가 남기고 간 무기와 보급품, 심지어 군복까지 입어야 했다. 2급 경찰로 취급 받았던 군인들은 우대 받는 경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경찰 또한 군인들을 천대했다. 서로 충돌이 잦았다. 군인들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컸던 상황이었다. 실리 보고서의 구테타 설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어떻게 김구 암살로 이어졌는지는 앞으로 밝혀 져야 한다. 

 

김구는 여러 번 미군정에 도전했다. 그는 미군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미군정을 그의 임시정부로 대체 하려했다. 2차 대전 후 여러 약소국의 민족주의자들의 행보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과 소련이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김구 제거에 직간접으로 미국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아직은 이승만의 공작을 팔잔 끼고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앞으로 더 놀랄만한 증거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김구와 그의 노선은 지속적으로 이승만의 존재를 위협했다. 김구는 통일정부와 친일파 청산을 주장했다. 그런데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과 냉전은 김구의 입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북한과 협상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용공 주의자, 심지어는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세상이 되어 갔다. 일제에 항거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활동하던 사람들을 애국자라고 하던 세상이 반공하는 사람을 애국자라고 하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김구와 그의 지지자들이 친일파 청산을 외치면 이승만과 그의 친일파 지지자들은 그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갔다. 그런데 당시에 아무개가 공산주의자라고만 하면 알아서 제거하는 극우 테러 단체가 있었다. 서북청년단이다. 

만주 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누가 봐도 친일파였다. 김구의 적이었다. 그들도 반공 투사가 되어 살아 남아야 했다. 


민족주의자 김구는 미국의 박수와 묵인 아래 이승만의 공작에 의해서 제거되었다고 생각한다. 신성모와 채병덕의 지휘로 공작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아직 이승만이 직접 관여했다는 확증은 없다. 그렇지만 국방장관과 육군참모 총장이 대통령의 인가 없이 이러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냉전시대의 민족주의자들은 미국과 소련이 원치 않는 지도자들이었다. 북의 조만식과 남의 김구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소련과 미국에게 바람직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은 미국이 지배했다. 미국이 원하지 않는 한국의 지도자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참고

1.      유튜브: 정치암살의 희생자들 백범 김구[추억의 영상] KBS 1994.2.27 방송

2.      유튜브: KBS 다큐멘터리극장 – 정치암살의 희생자들 4부, 백범 김구/ 1994.02.27 방송

3.      유튜브: 백범 김구 – KBS 다큐;  1 부 나의 길, 2부 나의 소원, 2019

4.      위키백과: 김구, 이승만, 안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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