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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Oct 18. 2020

결론

02. 왜 문재인을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문재인 대통령


남한의 진보와 보수


나는 1946년 9월 18일에 남한에서 태어났다. 미군정 시기이다. 말이 미군정 시기이지 당시에 남한은 미국령이었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후에 내 친구들을 만나면 "한국은 큰일 났어, 문재인이 남한을 통째로 김정은에게 바칠 거야."라고 이야기한다. 내 가슴이 철렁 내려 안는 것 같았다. 내 친구의 말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속으로는 참 한심한 친구라고 생각 하면서 "그러기 전에 미국이 문재인을 태통령 직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암살시킬 거야"라고 대답해 준다.  내 친구의 대부분은 문재인이 빨갱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아무리 역사를 들이 대고 그렇지 않다고 설명해주어도 소용없는 줄 나는 안다. 이 사람들은 왜 멀쩡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적화통일을 시도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까?


반민특위와 보도연맹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특별위원회였고 후자는 공산주의자들을 자수하게 해서 전환시키거나 제거하려는 민간단체였다. 일제 강점기의 기득권층은 해방 후에도 기득권 층이었다. 친일파 청산은 기득권층의 몰락을 의미했다. 이들은 재 빨리 반공 세력으로 둔갑한다. 이들이 반민특위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보도 연맹이었다.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하고 그들을 잡아들이면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일단은 보수세력인 반공 세력의 승리였다. 친일파 청산은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보세력으로 살아남아서 끈질긴 저항을 시작했다.


보도연맹 가입이 진행되고 북한 간첩의 누명을 쓴 반민특위 국회의원들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6.25 사변이 터졌다. 남한 국민들은 전쟁의 피해와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뼈골에 사무치도록 경험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악이었다. 정부가 야당 인사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그대로 믿었다. 오히려 그들이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했다. 건국 초기에 친일경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작한 뺄갱이 누명 씨 우기는 매우 편리하고 효과적인 정략이 되었다. 보안법이 위협적이기도 했지만 여론은 반공주의자 편이었다. 대구 10월 항쟁,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은 철저히 함구했다. 정부는 학생들에게 역사적인 사실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고 철저한 반공교육을 시켰다. 남한의 유권자들은 미군정 시기와 6.25전 대한민국의 역사를"해방의 기쁨"으로만 이해했다.


4.19 이후 진보 세력이 집권하여 1945-1950년의 숨겨진 보수파의 비리가 적나라하게 들어 나는 가 했더니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당시의 소위 혁명주체세력은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었다. 일본 군사 학교에서 교육받은 국군 장성 들이었다. 미군정이 한국군을 창설할 때 이들을 기용했고 자연히 국군의 중추 역할을 했다.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박정회는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 일본 관동군 장교였다. 해방 후 그는 국군 장교로 복부 하면서 남로당 당원이었다. 말하자면 친일파 경력공산주의 경력을 모두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의 반공주의는 각별했다. 여러 반정부 세력들이 빨갱이로 몰려 희생되었다. 굵직한 간첩 사건을 조작하여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했고 억울한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그가 경제개발의욕이 남다르게 강했던 원인이 과거 경력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친일, 친공, 독재라는 그의 흠집은 남한 국민을 기아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공적으로 한동안 치유되는 듯했다.  그러나 민족의 한은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5.16 혁명은 어느덧 쿠테 타로 바뀌고 그의 딸은 감옥에 있다. 


박정희가 암살되었다. 전두환은 광주 학살을 감행했다. 제주 4.3 사건이 1980년에 재현된 것이었다. 광주에서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민주화 데모가 일어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던 김대중의 고향이었다. 신군부는 광주가  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된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고 선언했다.  적군에게 점령당한 광주를 탈환하기 위해서 대한민국 군대가 광주로 쳐들어 갔다. 제주 4.3 사건도 똑같은 논리로 군대가 파견되어 양민 학살이 감행되었다. 해방 후의 빨갱이 누명 씨우기는 30여 년 후에도 끝나지 않았었다. 외국군대가 쳐들어오면 방어해달라고 국민 세금으로 만들어진 국군은 1947-1953년에나 1980년에나 마찬가지로 자국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이렇게 보수 세력의 빨갱이 누명 씨우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가짜 뉴스를 수많은 남한 국민들은 믿었다. 얼마 전까지 만 해도 내 친구들은 신군부의 가짜 뉴스를 내 앞에서 이야기했다.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의 주장은 소수였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으로 헌법이 개정되어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다. 반공과 빨갱이 프래임을 주 무기로 삼는 한국의 보수세력은 노태우, 김영삼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다수의 남한 국민은 보수세력을 반대하는 진보세력이 자신들을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 남한 국민은 반독재의 기수였던 그를 뽑아서 좀 더 자유로운 국가를 원했다. 그는 햇볕정책이라는 대북 유화 정책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고려연방제, 북방 개발정책 등을 쏟아 놓고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만났다. 국민의 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를 빨갱이라고 했다. 보수의 호재였다. 반독재 분위기로 인기가 상승했던 진보세력의 기가 꺾이기 시작했다. 


노무현이 가까스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친일파 인명사전을 만드는 등 친일파 청산을 누구 보다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자신들의 약점을 공격당한 보수세력은 진보세력이 빨갱이 임을 집요하게 선전했다. 역대 대통령 누구 보다도 민주적이었던 그를 언론은 무능으로 보도했다. 김대중의 햇볕 정책을 계승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북과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보수가 진보에게 빨갱이라고 하면 국민의 다수는 믿었다. 실제로 그들은 북한과 친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의 햇볕정책에 대한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보수의 빨갱이 프래임 전략의 성공이었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이 전략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때만 해도 많은 남한 국민들이 광주 항쟁이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이라고 믿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빨갱이 프래임을 믿는 사람들이 줄어 갔다.  해방, 미군정, 6.25를 격은 세대는 점점 사 라저 가고 평화스러운 시대에 성장 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인터냍에 쏟아지는 정보는 과거의 쓰라린 역사가 세상에 쉽게 알려지게 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보수의 빨갱이 프래임 전략이 허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정희의 후광으로 당선된 박근혜는 70년대의 통치철학으로 실정을 거듭하던 중 최순실 사건이 터졌다. 촛불 시위로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이 당선되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인권 변호사였다. 전두환 정권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를 근절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빨갱이 누명을 씌워서 처벌했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이들을 변호해 주었다. 왠만 한 용기를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수를 지지하는 유권자들 중에는 빨갱이들을 보호하려는 사람은 틀림없는 공산주의자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김정은의 남한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는 남한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남한 국민은 김정은 핵포기, 경제제재 완화, 남북한 종전과 평화 협정, 남북교류, 북방 경제 정책이 눈 앞에 닦아 온 것처럼 느꼈다. 보수의 빨갱이 프래임 전략은 완전히 맥이 빠졌다. 늙은이들의 문재인은 빨갱이라는 생각도 흔들리는 듯했다. 남한 보수 정당의 지지도는 25% 정도에 불과했다. 


남한의 진보정당은 대통령,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모두 압승을 거두었다. 보수 정당이 전략의 핵심이었던 "빨갱이 프래임"을 국민 대다수가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남한에서는 빨갱이 프래임을 팔아 먹는 정당은 존재 가치가 없게 되었다. 종래의 한국의 보수정당은 와해 직전에 와 있다. 


진보세력은 친일파 청산을 주장했고 기득권층으로부터 빨갱이 프래임에 시달렸고 독재에 항거했다. 독재에 항거하여 시위에 나섯던 학생들과 시민의 편에 서서 민주화의 주역이 되었다. 반면에 보수세력은 친일파가 주역이었고 빨갱이 프래임으로 반대세력을 압박했고 독재로 정권을 유지했다. 독재는 많은 적패를 양산했다. 


진보는 정의이고 보수는 불의 라는 국민감정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다.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거대 진보정당은 적폐 청산을 정권의 핵심 정책으로 삼았다. 요지음 친일파 청산의 대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 가지이고 국민에게 실감 나는 이슈도 아니다. 국민이 새 정부가 정의로운 일을 해 낼 것이라는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적폐를 청산하기보다는 적폐를 양산하고 있다. 조국 사태가 가장 좋은 예이다. 새 정부 관리와 여당 국회의원들의 부동산 투기나 재산 축적이 보수 기득권 층과 많이 다르지 않다. 자식들의 입시 부정과 군 관계 특혜 또한 마찬가지이다.  요지음 터지고 있는 투자 기관 부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이다. 큰 기대는 큰 실망을 불러올 것이다. 친일파 청산의 약발이 떨어진 가운 데 여당 정부와 진보 인사들의 부정은 전통적인 한국의 진보위협하고 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 만들어진 어설픈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고 선진국형의 양당체제로 거듭날 채비를 하고 있다. 내 친구들은 문재인을 빨갱이라고 하지만 경제와 문화의 발전에 걸 맛는 세계적인 정치판이 한국에서 짜이고 있다. 그들의 아들과 손자들은 큰정부와 작은 정부, 시장경제와 정부가 필요에 따라 개입하는 경제, 유교의 청산과 전통의 유지, 유화적인 대북 정책과 강경 정책, 미군철수와  유지, 중국이냐 미국이냐 등을 놓고 뜨겁게 토론 할 것이다. 이는 해방동이가 무대에서 퇴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대한민국은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통일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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