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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Oct 02. 2020

대한민국

02.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1948년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도민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남한에 친미국가가 건설될 것이 거의 확실해질 무렵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시위와 폭동으로 이를 저지하여 한반도 전체를 적화하려고 했다. 특히 5.10 선거에 대한 방해 공작은 치열했다. 이 와중에 일어난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은 지금까지도 그 상흔이 지워지지 않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친일파를 중용하고 어설픈 식량정책과 경제 정책은 국민의 미군정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더구나 민족단체를 전혀 무시하고 행정에 서투른 전투 병단의 직접통치는 남한 전체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 군정 초기에 공산당 활동을 허용한 덕분에 이들의 조직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농업이 주 산업이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인인 구조에서 토지균둥분배를 내세우는 공산주의는 호감이 가는 사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 제주도에서 일본에 가기는 다른 지방보다 비교적 쉬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일 했다. 국내 직장보다 임금이 높았다. 여윳돈을 제주도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해 주었다. 다른 지방보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에 교육받은 사람들은 유행처럼 퍼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접할 기회가 많았다.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 패배한 이후 제주도가 일본 해군의 중요한 전략 기지가 되었다. 일본군 6만 5천 명이 제주도에 주둔했다. 한반도 전역의 일본군이 10만이었는 데 2/3가 조금 안되는 병력이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많은 제주도민이 기지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 생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된 그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많았다.


해방 후 공부한 사람들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자발적인 행정기관이었던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가 다른 어느 지방보다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미군이 11월에야 제주도에 들어왔다. 인민위원회가 충분히 정착할 시간이 있었다. 경찰과 행정기관이 들어 오지만 인민위원회와 병존해야 했다. 1946년 8월 1일 미군정은 직접 통치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껴 전라남도에서 분리하여 도로 승격시켰다. 


약 6만 명이 일본에서 제주도로 돌아왔다. 22만이었던 제주도 인구는 28만이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실정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주도민의 불만을 키웠다. 실직 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 만연과 미곡 정책의 실패 등으로 도민의 원성은 높았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 경찰들이 미군정 경찰로 변신하여 저지른 각종 부정과 도민에 대한 강압적인 행위는 주민들의 많은 분노를 샀다. 


1947년 3월 1일, 삼일 절 날이었다. 제주북초등학교 3.1절 기념식에서 어린아이가 경찰기마대 말발굽에 치어 죽었다. 군중들은 기마경찰에 돌을 던지면서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경찰서를 습격하는 폭도들로 생각한 경찰이 총을 쏘아 도민 6명이 사살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경찰과 도민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남로당은 도민의 반경찰 분위기를 이용하여 제주도청을 비롯한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가 참여하는 총파업을 주도했다. 심지어 제주 경찰 20%가 파업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서 파면된 경찰 66명은 서북 청년단원으로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70%가 좌익이라고 판단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라면 치를 떠는 서북청년단을 대거 제주도에 파견하여 무장대 토벌에 나서게 했다. 이들은 민간인 학살의 첨병이 되었다.


1948년 5.10 선거가 기정 사실화되고 남한에 친미 단독정부 수립이 눈앞에 다가오자 이를 방해하기 위해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당원 김달삼은 350명의 무장대들과 함께 12개 경찰지서를 동시에 급습했다. 미군정, 경찰, 우익단체와 남로당의 선동에 부응하는 폭도들의 대립으로 진행된 7년 동안의 살상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동족상잔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사건에 휩쓸린 진압군이나 무장대나 동쪽끼리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었다. 그러나 그중에 양식이 있는 지휘관이 있었다. 4월 28일 9 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김달삼을 만나 72시간 이내에 전투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은 강경한 진압을 고집했다. 5월 1일 서북청년단과 우익단체는 오라리에서 일부러 방화를 했다.  이를 꼬투리 잡아 잘잘못을 가리지않고 무차별 강경진압을 했다. 


이로 인해서 제주도에서 실시한  5.10 선거는 무효가 되었다.  6월 중순경 김달삼은 1948년 9월 해주에서 열리는 제2차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제주도를 떠났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동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1948년8월24일 한국정부와 주한미군은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했다.  미군임시고문단을 설치하여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미군고문단이 갖는 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고문단장이었던 로버츠 준장이 사건진압에 대한 모든 작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48년9월 미군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게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은 여전히 미군에 있다. 군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군 고문관을 거쳐야 한다"고 알려 한미협정의 내용을 상기 시켰다. 


그리고 한달만에 1948년 10월 17일  토벌작전 지휘관 9연대장 송효찬 소령은 중간산 지대 소개령을 발표했다. 중간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해안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폭도로 간주하고 사살했다. 사는 집들은 모두 태워 없앴다. 해안 마을로 이주한 사람들도 좌파로 의심받으면 사살되었다. 많은 주민들이 한라산 속으로 숨어들어 도망 다녀야 했다. 그러다 잡히면 죽었다.


로버츠 미군고문단장은 제주 중간산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고 있던 1948년 12월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범석, 참모총장 채병덕에게 "송효찬이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 했다. 이 사실을 대통령 성명을 통해 알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송효찬에게 훈장을 수여할것"이라고 답했다. 


9연대장 송효찬이 지휘했던 중간산 초토화작전을 미군 비밀보고서는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중간마을 전 주민이 모두 게릴라 편이라는 가정아래 마을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는 작전" 이었다. 1948년12말 까지 송효찬의 9연대가 점령했던 기간동안에 가장많은 살상이 진행 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있던 14 연대 일개 대대에게 제주도 반란군 진압을 위해서 제주도 파견 명령이 떨어졌다.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여순사건의 시작이었다. 


1949년 5월 10일 제주도에서 재선거가 실시되고 6월에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되었다.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6.25가 터졌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들이 제주 계엄군(대한민국 국군)에게 대량 학살되었다.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 사건 관련자들도 모두 사살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되어 7년 7개월 만에 제주 4.3 사건은 막을 내렸다. 


30만 전 도민이 관련된 사건이었다. 확인된 사망자는 14,000이라고 한다.  이중 여자가 2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0세 이상 노인이 6.2%였다. 중간산에 살던 도민들은 사는 집, 농사짓던 토지를 버리고 하산해야 했다.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몰랐다. 그들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주했다. 말하자면 보트 피플이 되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원망했다. 많은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들이 조총련에 가입하여 북조선을 고국으로 택 했다. 제주도 사람 70%가 공산주의자라고 판단한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무차별 적인 진압의 결과였다. 


여순사건 이후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반포했다. 근대판 연좌제이다. 공산주의자의 가족이나 자손들은 항상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자신의 가족이 자국의 군인의 총에 맞아 죽은 것도 억울 한데,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는 많은 권리를 제약받아야 했다. 공무원, 경찰, 군 장교가 될 수가 없었고 외국 유학 등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들은 아픈 기억을 아무에게도 불이익을 당할까 무서워서 말할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건을 비밀처럼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이전까지는 제주도민은 아름다운 섬에서 사는 운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풀 수 없는 한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노무현정부는 처음으로 정부차원에서 진상조사를 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어떻게 관여 했는 가는 밝히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상 처음으로 제주도민에게 사과 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당시에 미군정이 저지른 과실을 알 권리가 있다. 미국정부는 진실을 밝히고 부당한 행위를 했다면 희생자에게 합당한 보상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박정희와 김창룡



"제임스 H. 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년 7월1일"

1981년 노태우 육군중장은 하우스만이 한국을 떠날 때 그 에게 위의 문구가 적혀있는 기념패를 주었다. 미완성 구테타인 12.12 사태와 광주 항쟁을 겪은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이다. 


키큰 미 육군대위 하우스만은 1946년에 한국에 들어 왔다. 한국에서의 그의 임무는 한국군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무려 35년 동안 한국군과 정계에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국군은 완전한 군대가 아닌 경찰 경비대 수준으로 만들어 졌다. 치안 유지의 기능 밖에는 할 수 없었고 전쟁을 하기에는 많이 부족 했다. 아마도 북한을 공격할 것을 우려 했을 것으로 짐작 된다. 하우스만의 인사 원칙은 전투 경험, 군사지식 그리고 미군정에 얼마나 충성 하느 냐 였다. 자연히 일본 육사, 만주군관학교 그리고 일본군 출신이 우선 순위였다. 이들은 친일 경력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친미-반공으로 충성 했다. 일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반공 정신이 투철 한 편이기도 했다. 반면에 독립군 출신들은 정규 군사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한국군 장교들은 대부분이 일본군 출신이었다.  백선엽, 정일권, 박정희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유명한 장군, 예편후에 정치인들이 일본군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군 편성보다 앞서 만들어진 경찰은 일본 경찰이 었던 사람들이 군정 하에서 경찰 조직을 장악 했다. 친일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군정에 철저히 충성 했다.  일반군인들을 모집하는과정에서 좌익인지 우익인지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수자 채우기 에 급급했다. 실질적으로 불가능 했는 지도 모른다. 건국준비위원회가 미군이 들어올 무렵 건국인민회로 바뀌고 여운형과 박헌영이 이를 이끌고 있었다. 좌익인지 우익인지 가리지 않고 오직 우리민족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이에 가입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미군정은 이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트루만 독트린(1947.3)이 발표되기 전 까지 사상의 자유가 보장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 진 군대는 경찰에 비해서 좌익 성향이 짙었다고 할 수 있다. 친일 성양이 강한 경찰과 군대의 충돌이 자주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다. 경찰에 비해서 군인들에 대한 처우는 열악 했다. 군복, 군화도 전 군인에게 지급이 안되어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군복을 입혔고, 총이 모자라 일본군이 버리고 간 총으로 무장 했다. 경찰과의 충돌에서 군대가 번번히 당했다. 당시에 미국은 폐허가 된 일본과 유롭 재건에 막대한 국가예산이 들어 갔기 때문에 미군정에 충분한 예산을 배당할 여유가 없었다. 


1948년10월19일 여순사건이 일어나던 시기는 미군정이 아닌 대한민국이 선포된 후 였다. 그러나 남한 군대의 사정은 크게 나아 진 것이 없었다. 이승만의 지속적인 군사원조 요청에도 불구 하고 미국은 원조에 인색 했다. 따라서 아직도 군작전, 군수등을 미군에 철저히 의지 하고 있었다. 


제주도민들이 인민위원회 운영에 적극적이었고 친일파로 구성된 경찰과 관리들에게 불만이 많았던 것 처럼 여수, 순천지역도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자연히 친일파를 기용한 미군정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 더구나 미군정이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서 소작인 들에게 식량 공출을 강요하자 대중들의 분노는 폭팔 직전이었다. 이로인해서 10월 대구항쟁, 4.3 사건의 여파는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인민회원회 지지 세력이 50%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징집이 이루어 졌기 때문에 군안에는 좌익, 사회 불만 분자들이 많이 있었다. 


1948년10월19일, 여수 14연대 1대대가 연병장에 집합했다. 제주 반란군 진압 출정식을 하기위해서 였다. 출정 연설을 하러 단상에 나타난 사람은 대대장이 아닌 지창수 상사였다. "경찰이 공격해 온다. 우리는 같은 민족을 죽일 수 없다. 곧 인민 해방국군이 북에서 진격해 오니 우리 모두 경찰을 공격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이를 말리던 장교들은 사살 되었다. 확실한 주모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김지회, 홍순덕 중위라는 설이유력하다. 


그리고 여수와 순천을 2,3일만에 점령 했다. 반란군은 점령지역의 우익인사, 경찰, 서북청년단, 지주, 고리대금업자등을 처형 했다. 약800명이 죽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 되었으나 군작전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10월20일,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주도하에 작전회의가 열렸다. 미군측에서는 하우스만(G-3), 존 리드, 광주 5여단 미군 고문 두 대위가 참석하고 국군측에서는 채병덕 국방부 총 참모장, 정일권 작전 참모부장, 백선엽 국방경비대 G2 책임자, 고정훈 국방경비대 정보장교가 참석했다. 송호성 이 진압군 사령관이 되었고 하우스만은 송호성의 고문으로 임명 되었다. 1948년8월24일 이승만과 하지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작전권이 미군에게 있었기 때문에 하우스만이 송호성의 우위에 있었다고 볼수 있다. 당시의 한국군은 미군으로 부터 무기, 군수물자 지원이 없으면 작전을 할 수 없었다. 하우스만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의 임무를  "내가 그 때 공식 명령으로 휴대한 임무서에는 토벌사령부가 효율적인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면 내가 직법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군사고문단장 로버츠가 하우스만에게 하달한 명령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한국군사령부가 사태진압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관장 할 것. 2. 기동 작전사령부를 구성하고 적절한 감독 행위를 할것. 3. 결과를 신속히 고문단 본부에 보고 할 것. 4. 면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 할 것. 이때 까지 한국군은 일본군대에서 노획한 일본식 소총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나, 진압군에게는 엠1 소총을 지급했다.


반란군의 일부가된 1대대도 엠1으로 무장 되었다고 한다. 2000명의 반란군을 진압할려고 동원된 병력은 5개 연대였다. 미군이 불러들인 폭격기는 민간인과 반란군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여수항에는 군함까지 동원되었다. 여수, 순천지역을 반란군이 점령한 적지로 간주하고 작전을 수행 했다. 제주도와 똑같은 작전 원칙이었다. 

10월27일 여수와 순천이 탈환되고 반란군 약1400명은 지리산으로 퇴각하여 빨치산이 된다. 대장은 

김지회 중위였다. 진압군은 마을에 들어가서 가택 수색을 했다. 조금이라도 좌익 의심이 가면 사살 했다.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을 죄없이 죽이는 수가 많았다고 한다. 수복지역 마을 사람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았다. 나오기를 거절 하면 좌익으로 몰려 죽는 판에 나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판정관으로 선정된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일어나야 했고 이러나는 즉시 사살 되었다. 좌익 판정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교전중인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깍은 자, 힌고무신을 신은 자들 등이었다. 물론 원한관계에서 죽은 사람들이 허다 했다. 무려 만명이 희생되었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여순사건 진압 공로로 미국 국방부로 부터 4번째 서열의 훈장을 받았다. 

이승만은 여순사건으로 친미 남한 정부가 군내의 좌파 주도로 크게 위협을 받자 군내부의 좌익세력제거에 나선다. 이를 숙군작업이라고 하고 이 임무를 맡은 인물이 김창룡이다.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 직접 보고 했다. 김창룡은 일본헌병오장 출신이다. 그는 헌병보조원으로 출발했다. 만주에서 항일인사 감시가 그의 업무였다. 중국공산당 거물 왕진리를 검거하는 데 큰공을 세워 헌병오장이 된 것이다. 일찍이 공산당 잡는 정보원이라는 경력은 해방후 남한에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일본 패전후 고향인 함북 영흥으로 돌아 갔으나 친일경력 때문에 투옥 되었다. 당시에 이북은 쏘련군이 들어오자 마자 친일파 색출이 시작되어 그가 설 땅이 없었다. 탈옥을 거듭하면서 거지 꼴이 되어 남한으로 넘어와 사병 생활을 거듭하다가 박기병, 김백일 장군의 도움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 3기로 들어가서 국군 장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경력을 살려 일제경찰과 헌병출신을 모아 정보소대를 조직하여 공산당 색출에 나섰다. 


여순사건이 날무렵 김창룡은 육군정보국 방첩과에 근무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11월7일 김태선 경찰국장으로부터 군대내 좌익 상황을 보고 받고 로버츠 미군사고문단장에게 군내 좌익세력 제거를 요구 했다. 군대는 미군이 조직했기 때문에 이문제 또한 미군이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자기들이 담당하기는 힘들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응찬 육군참모총장에게 일임한다. 당시 정보국장이었 던 백선엽과 신상철 헌병대장이 수사 책임지휘관이 되었고 실무는 김창룡이 맏았다. 그는 로버츠의 부하인 제임스 하우스만에게 보고 했다. 


이승만은 국가안전위원회를 수시로 소집했는 데, 회의 참석자는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로버츠 고문과 하우스만이었다. 하우스만은 계급은 대위였으나 이승만을 예약 없이 아무때나 만날 수 있었다. 제1차 숙군 작업에서 박정희가 체포 되었다. 그는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었다. 김창룡, 그의 상관이었던 백선엽, 하우스만 모두가 박정희의 경력과 근무태도를 높이 평가 했다. 미군정과 하우스만이 한국군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친일경력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능력 본위로 평가하여 중용 했기 때문에 그의 해박한 군사 지식은 보물같은 것이었다. 김창룡의 집요한 설득으로 박정희는 남한군내 남로당원의 리스트를 넘겨준다. 많은 박정희의 동지들은 희생되었지만 그는 목숨을 부지하고 결국 석방되어 국군 장군이 된다. 이후에 하우스만은 박정희의 뒤를 5.16혁명이 성공할 때 까지 돌보아 준다. 


1949년.12.1. 국가보안법이 선포 되었다. 이 법을 바탕으로 김창룡은 일사불란하게 총 4차에 걸친 숙군작업을 진행 했다.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진급했다. 군801명, 민간인 526명이 희생되었다. 이과정에서 출세에 어두운 김창룡은 사건을 만들거나 부풀려서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희생 시켰다. 자신을 비판하거나 출세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 하기위해서 사건을 조작 하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원한을 사게 되었다 결국 군내부 반대 세력에 의해서 1956년 1월30일에 암살 되었다. 김구 암살의 배후로 김창룡이 크게 의심 받고 있다. 암살범 안두희가 미국 정보기관 요원이었다는 의심이 짙은 것을 감안 하면 김창룡이 미정보기관의 사주를 받지 않았나 의심해 본다. 국가보안법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동안에 반대세력 제거를 위한 간첩 사건 조작, 반혁명사건 등등에 십분 이용 되었다. 좌익 경력이 있는 가족들을 옥죄는 데도 쓰였고 한국 정보기관이 권력을 휘두르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법은 지금도 살아 있다.  "빨갱이 프레임"을 당략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법이기도 했다. 


미군들 사이에서는 하우스만을 "무서운 사람" 이라고 했다. 김창룡이 "스네이크" 였다면 , 하우스만은 이 뱀이 활개 치고 놀수 있는 공간과 담력을 키워준 "대사형"이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Nation Building) 이라는 임무를 띠고 들어운 미군정의 첨병은 하우스만이었고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사람이 김창룡이 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출세의 기회로 생각하여 무릿수를 두다가 반대파에 의해서 피살 되었다.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이라는 말은 부시 행정부 때 이락 사담 후세인을 제거 하는 과정에서 우리들 귀에 익은 말이다.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 는 옳은 것이기 때문에 세계 모든 나라를 미국과 같은 나라로 만들겠다는 공화당 보수파 중에 소위 네오콘들이 부시 행정부의 군사-안보를 담당 하면서 내세운 정책이다. 아직 결판 났다고 하기는 좀 일러도 우선은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알쿠이다와 아이시스를 만들 었고 이락 정부는 무척 취약하며 안정된 정부라고 하기는 힘들다. 


1945년 한반도는 대륙에서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공산주의 바람에 휩쓸 렸다. 당연히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 했어야 할 국면이 었다. 러시아는 이미 쏘련으로 변했고 세계 최강의 공산주의 국가 였다. 그리고 일본 관동군을 물리치고 민주와 북한을 점령 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은 국공 내전이 일어 났고 점점 장개석 군이 모택통의 공산군에게 몰리고 있었다. 국내는 연해주 시베리아, 만주에서 활동 하던 독립군, 독립 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했다. 활동 하던 지역이 공산 권이 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주의-공산주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었다. 국내에서도 독립운동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공산주의자 들이 었다. 따라서 남한의 민족 수권 기관이었던 건국준비위원회(인민회의)도 사회주의의 적인 경향이 강 했다. 미군정이 일제 강점기 때 활동 하던 경찰, 관리들을 해방후에 다시 기용 한 것은 만족 감정을 크게 건들이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미군정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 했다. 민중은 자치 수권 기관인 건국 준비위원회를 지지 했다. 


이러한 지극히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 해야 했다. 유일한 수단은 강압이었다. 마치 불도저가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땅을 밀어 버리 듯 앞에 걸리는 반대 세력이라고 의심 되는 사람들은 모두 제거 했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무고 한 사람들이 희생 되었다. 오직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수 많은 무고 한 생명을 희생 시키는 사건을 조작한 악마와 같은 사람들 도 있었다. 민초들은 밤낮으로 바뀌는 좌와 우에게 희생 되지 않고 살기 위해서 안간 힘을 써야 했다. 이러한 부조리에서 살아 남기 해서는 오직 "순응"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죽는 사람들이 허다 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사치였다. 여순사건, 숙군작업, 보안법제정, 보도연맹사건으로 이어 지는 공산주의 토벌은 국가건설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수많은 억울한 생명을 빼앗아 갔다. 전쟁이 아닌 사상문제로 사망한 사람이 약 백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커다란 부작용이 있었지만 미국이 국가건설에 성공한 세계에서 보기 드문 유일 한 국가인 남한을 탄생 시켰다.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분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말과 해방후의 정국은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되는 것이 당연 했다.  그러나 미군의 38이남 점령은 그나마 반이라도 건진 행운이라고 생각 한다. 아무 준비없이 들어 온 미군이 국가건설 과정에서 많은 실책을 저질렀지만 그 결과는 세계 7위의 국민소득과 10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자유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오늘날의 남한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의 독립국가로 써 미국의 지난날의 실책을 모르고 지나가서는 안된다. 사과 받을 것은 받고 피해에 상당한 보상도 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반미 감정이 촉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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