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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Sep 23. 2020

대한민국

01. 이승만의 승리,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과연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대권을 장악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 까? 그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정치 외교적인 수완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일본 패전의 낌세를 미리 알게 된 이승만은 맥아터에게 1945년 7월 27일부터 여러 차례 편지와 전보를 보냈다. 그는 맥아터와 만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한국인이 귀국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 사령부, 태평양지구 미 육군사령부와 국무부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귀국 허가는 도쿄를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왔다. (프러시안 2010.10.15, 맥 아터-이승만-하지, 무슨 음모를 꾸몄을 까?)


이승만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동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피값과 소모한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을 환영한다. 미국의 희생으로 흘린 피와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일본에게 승리한 것은 그 지역에 민주주의를 위한 평화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런데 왜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겠는 가?" 맥 아터의 마음을 읽은 절묘한 편지였다. (KBS 역사저널 그날; 이승만 대통령은 어떻게 김구보다 먼저 귀국했나, 2020.2.4)


맥 아터는 이 편지를 받아보고 숭고한 정신(splendid spirit)을 가진 사람이라고 극구 칭찬했다. 맥 아터는 소련을 끌어들여서 일본 관동군을 처리하는 데 반대했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일본 항복 당시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공산주의자와 스탈린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군정 초기에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관대했던 이유이다. 이승만은 1945년 10.10-16일 까지 도쿄에 머물렀다. 맥 아터는 서울에 있는 하지 중장을 도쿄로 불렀다. 10월 13일 이승만, 맥 아터, 하지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향후 남한 정책에 대해서 논의했다. 맥 아터는 반공과 친미에 대한 확실한 소신을 가지고 있는 이승만을 하지에게 소개해 주었다. 1945년 10월 16일 맥아터가 마련해 준 군용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는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전투 사단장이 혼란스러운 남한을 통치하는 데 어쩔 줄을 모르던 시기에 의지 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와 미군정은 이승만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입장을 고수했고 미군정이 추진하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참여를 거부했다. 신탁은 애초에 미국이 제안한 정책이었고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조선 임시정부를 만드는 것은 신탁의 초기 단계였다. 스탈린과 소련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던 루스벨트 행정부 정책은 남북을 아우르는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  참여에 찬성하는 여운형, 김규식, 장덕수를 지지했고 이승만과 김구를 배척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미군정이 추진하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5월에 아무런 합의 없이 무기 휴회된 후였다. 김구도 이승만과의 회동 후에 이에 동의했다.


38선 이북은 이미 1946년 2월에 임시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사실상의 단독정부가 운영되고 있었다. 미군정이 민족단체들을 모두 부정하고 직접 통치하려고 했던 것과는 달리 소련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인민위원회로 바꾸어서 한국사람들 자체적인 통치를 하게 했다.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내 세웠다. 소련은 김일성을 통하여 토지개혁 등 공산주의 정책을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 조직도 자체적인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독립된 나라의 방어체제를 갖추게 해 주었다. 소련의 미소공동위원회 참여와 신탁통치 찬성은 적화통일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에 당선되어 1945년 1월에 33대 대통령에 부임하였다. 그가 지병인 고혈압의 합병증으로 사망 하자,  러닝 메이트였던 트루만이 부통령에 부임한 지 82일 만인 1945년 4월 12일  대통령이 되었다.  원자폭탄 투하, 2차 대전 전후 처리, 마샬플랜을 비롯한 냉전시대의 정책을 수립하는 등 근대 세계사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 대통령이었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은 상하 양원 합동 회의에서 트루만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이 자유진영의 경찰 노릇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보존을 주도하겠다는 미국의 결심이었다. 미군정은 그동안 남한 내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을 허락했었으나 이후부터는 남한에서 공산주의는 불법이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좌우 합작을 위해서 노력했던 여운형이 7월에 암살되고 1947년 8월 17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Korea)을 신탁 통치하려는 미국과 소련의 노력이 끝났다고 이해하면 된다. 또 다른 말로 바꾸면 북쪽은 소련이 원하는 나라 남쪽은 미국이 원하는 나라를 건국시키기로 미소가 합의한 것이다. 한나라를 만드는 남은 방법은 남이든 북이든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수 밖에 없었다. 


미 국무장관 마샬은 1947년 9월 17일 한국 독립 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했다. 1947년 11월 14일에 열린 유엔총회는 한국에 유엔 임시 위원단 감시하에 한국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가결하였다. 말이 한국 전역에서 이지 소련의 반대는 예상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남한 만의 총선거를 의미했다. 그해 12월에 이승만의 경쟁자였던 장덕수가 암살되었다. 그동안 이승만과 같이 활동했던 김구는 장덕수 암살 이후 유엔 감시하의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 하기 시작했다. 


유엔 임시 위원단이 1948년 1월에 한국에 들어와서 북한에 들어 갈려고 했으나 소련은 이를 거절했다. 동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 따라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실시가 확정되었다.


김구와 김규식 등은 1948년 4월 19일부터 4월 28일까지 평양에서 김일성 등 북한 공산당 요인들과 남북한 총선거를 위한 협상을 했다. 그러나 서로 설득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해 있는 정국을 전환할 수는 없었다. 


남한만의 총선거가 발표되자 남로당은 사회 불만층을 책동하여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나게 했다. 제주 3.1절 행사를 기점으로 일어난 4.3 사건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미군정, 우익 폭력 집단 특히 서북청년회와 경찰 그리고 군대가 동원되어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양민학살이 있었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 있었으나 미군정 측은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묻지 마 식의 만행을 저지르게 방관하거나 방조했다. 1948년 4월 3일에서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30만 제주도민 전체가 피해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망자는 3만 명으로 추산된다. 제주도민 대다수가 주거지와 재산을 잃었다. 많은 제주도민은 보트 피플이 되어 일본으로 가서 초총련에 가입했다. 조총련은 북조선 재일교포 단체이다. 그 후 반공 정책으로 제주도민은 억을 한 과거를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건에 관련된 가족들은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살아 야 했다. 정부는 남한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저 제주도는 삼다도요 관장지로 신혼여행이나 가는 곳으로 알고 지냈다. 한국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한중의 하나이다. 일본에게 당한 위안부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직도 남한 정부는 미군정 측의 비밀은 알아보지도 않고 보상은 요구할 생각도 하지 않는 다. 일본에게 아우성치고 미국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48년 5월 10일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북한의 100석은 유보하고 남한의 200석만 채웠다. 5월 31일 제헌의회가 열려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가 선출되었다. 한민당은 내각책임제를 주장했으나 이승만이 원하는 대통령제 헌법이 1948년 7월 17일에 공표되었다. 7월 20일에 국회의원 다수의 지지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24일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48년 8월 15일 그는 대한민국을 선포했다. 


38선 이북에서는 1946년 2월에 만들어진 북조선임시인미위원회를 1947년에 북조선인민위원회로 확정하고 1948년 9월 9일에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북한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에 박헌영, 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선출하였다. 물론 거의 100%가 지지해야 하는 강제적인 선거였다. 


한반도에 38선 이북은 소련식 공산주의 정부가 이남에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냉전의 현장이었다. 두 제도의 명암을 명확히 보여 주기 시작했다. 당장은 이북이 훨씬 빨리 안정되었고 사람들의 생활도 남한보다 좋았다. 반면에 남한은 두 사상의 대립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공산주의자들의 책동과 이를 진압하려는 정부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었다.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세력과 보호하려는 세력간의 갈등 또한 심각했다. 북한은 소련의 적극적인 원조로 군사력이 빠른 속도로 신장했던 반면에 미국은 남한에게 군사원조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경비대식의 군대만 허락했다. 남과 북의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국사람들의 한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염원이 고조된 마당에 유일한 방법은 무력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법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다음 수순이었다. 분단은 되었으나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한판 승부를 해야 했다. 신생 대한민국은 혼란의 소용 도리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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