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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Sep 08. 2020

미군정기

02.  대구 10.1 사건

대구 10.1 사건




1945년 9월 8일에 남한에 들어온 미 육군 24사단은 태평양 섬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전투 병력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었다. 전혀 훈련과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일이었다. 행정능력이 없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이천만에 가까운 인구를 통치하기에는 어처구니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미국은 전후 유롭과 일본을 복구해야 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더구나 전략적 가치가 뚜렷하지 않은 지역에 전문 인력과 예산 그리고 물자를 보낼 여유가 없었다. 하지는 본국에 전문인력, 물자 그리고 자금을 요청 하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한국의 문화, 역사, 전통, 국민성 등등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우선 당면한 문제는 언어였다. 소통은 통역관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일본 관리들을 붙잡아 놓고 그들을 앞세워 통치하는 것이었다. 장자리는 미군 장교가 차지했으나 실무는 종래의 일본인 관리나 원래의 조선사람 관리가 맡았다. 그렇게도 미웠던 조선인 순사도 경찰이 되어 권력을 휘둘르고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 경위 이상 계급 경찰의 82%가 일제 강점기에 경찰 노릇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동안에는 강제 공출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강압적인 행위에 무척 분개하고 있었는 데 해방 후에 더 악질이 되어 못 살게 구니 얼마나 억을 했을까 가히 짐작이 간다. 


전후 일본 본토나 한국 모두 굶주림이 커다란 문제였다. 거기다가 전염병까지 겹쳐서 아비규환이었다. 일본에 있었던 극동사령부는 일본에게 만 총력을 기울였다. 남한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맥 아터는 본국에 대량의 식량 원조를 요청하여 빠른 속도로 일본의 기아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반면에 남한에게는 식량과 경제 원조가 크게 부족했다. 


일제 말엽에는 전쟁 총동원령으로 식량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이 배급제였다. 모두 거두어서 나누어 주는 제도였다. 죽도록 일해서 추수하면 다 빼앗아가고 배급으로 돌아오는 것은 한 끼 먹기도 힘든 양이었다. 

미군정은 배급제를 폐지하고 식량 수급을 시장에 맡겼다. 농민들은 쌀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쌀 생산 량이 수요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자연히 쌀 값이 올랐다. 거기다가 약삭빠른 중간 상인들은 잔뜩 사두었다가 값이 오르기를 기다려서 팔 았다. 쌀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조선총독부 관리들은 일본에 돌아가서 생활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막대한 지폐를 발행했다. 짧은 기간 동안에 통화량이 급증했다. 거기다가 미군정은 모자라는 통치자금을 메우기 위해서 많은 지폐를 발행했다. 생산이 없는 경제에 무작정 발행 한 지폐는 빠른 속도의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쌀 값이 불과 수개월 만에 10-30배로 치솟았다. 미군정은 배급제를 다시 부활했다. 강제 공출이 시행되었다. 그렇게도 미웁던 경찰이 다시 문전에 나타나서 애써 수확한 쌀을 내놓으라고 으름짱을 놓았다.  만약 요구하는 양의 쌀을 내놓지 않으면 폭력을 가했다. 


1946년 여름 콜레라가 퍼 저나 갔다. 전염이 심했던 대구가 봉쇄되었다. 대구를 넘나들 수가 없었다. 대구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돈이 있어도 쌀은 물론 다른 식품과 생활필수품도 사기 힘들었다. 쌓일 대로 쌓인 대구시민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미군정은 공산주의 활동을 사상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허용했다. 그러나 1946년 5월 정판사 사건 이후 공산당 활동을 금지했다. 정판사는 일제 때 조폐공사와 같은 곳이었다. 소공동 같은 건물에 남한 공산당 본부가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미회의로 바뀌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위해서 박헌영을 참여시키면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박헌영은 한국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박헌영 일당은 위조지폐를 발행했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척결하면서 공산당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은 이북으로 도주하고 남한의 공산당 활동은 더욱 과격해졌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가 발표되고 우파들이 이를 극열하게 반대하면서 신탁을 찬성하는 좌파와의 대립이 심각해졌다. 폭력과 요인 암살이 자주 일어났다. 


공산주의 혁명은 노동자 혁명을 원칙으로 해왔다. 기업주와 정부의 핍박으로 살기 어려운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기존 정권을 무너트리고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어서 권력을 장악하는 방법이었다. 남한의 상황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기에 딱 좋았다. 북한에는 소련군정이 실시되었고 남한의 하지에 해당하는 인물은 시티코프(Terenty Shtykov)였다. 그는 남한 공산당에게 파업 지령을 내리고 자금을 공급했다. 1946년 9월, 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전평)는 철도노동자와 운송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전국적인 파업을 하게 했다.  부산에서 시작한 파업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대구에서는 9월 23일부터 파업과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10월 1일 노동단체들은 메이데이(노동절)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저녁 대구 부청(시청) 앞에서 기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시민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노동자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로 인해서 시위는 경찰과 시위대 간의 전투로 변질되었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시민과 학생들이 참가하여 경찰을 공격했다. 당황 한 경찰은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17명이 사망했다. 군중들은 경찰을 구타하고 무기고를 털어 무장했다. 부잣집과 친일파의 집에 침입하여 생필품과 식량을 탈취했다. 10월 2일 7시에 미군정은 대구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투입하여 폭동을 진압했다. 그러나 경상북도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는 시민과 경찰의 충돌이 거의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시민과 공산당이 미군정과 경찰에 대항한 사건이었다. 진압에 못 견딘 공산주의자들이 산속으로 도망가서 야산대를 조직하여 활동했는 데 이것이 한국 빨치산의 시작이라고 한다. 


10월 폭동


경북일대 뒤집었다 폭동이요 민란이라

누구보다 큰피해를 이부자가 당했어라

큰집주인 찾는판에 낭군님이 나타나고

폭도들이 폭행할때 나도같이 당했어라

중구그날 아침부터 영천군수 타살한후

이부자집 습격해서 파괴하고 방화할때

부형대신 붙잡혀서 맞아죽을 변을했네

나아니면 영낙없이 황천으로 갔으리라

악몽같은 그날아침 이런욕을 보았나니

폭도에게 끌려나가 몽둥이로 매를맞고

개죽음을 당하는임 참아볼수 없는지라

이내목숨 내어놓고 가장목숨 구하려는

아녀자의 일편단심 천지신명 도우셨다

피투성이 가장머리 얼사안고 울부짖어

넘어지는 낭군님을 무릅위에 올려놓고

죽었다고 땅을치던 시월일일 십일사건

무서워라 무서워라 경북십일 폭동이라

불행이도 그날화를 이내혼자 당했으니

이씨가문 궂은일은 나혼자만 당할란가

남편목숨 건지려고 내목숨은 내던진날

요행이도 소낙비가 쏟아지고 천둥할때

폭도들이 난동하다 하나둘씩 헤어진일


은촌내방가사집(시조시인 조애영지음)에서 *조애영은 시인 조지훈의 고모, 영천 만석군 이씨 집안의 며느리였다.



박상희, 박정희, 황태성, 김종필



황태성

1961년 9월 황태성으로 부터  조귀분에게 연락이 왔다. 박정희를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조귀분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아내였다. 박정희의 형수이다. 황태성은 1946년에 월북했던 사람이었다. 자기 남편의 절친한 친구였다. 박상희와 조귀분 사이에서 난 딸이 김종필의 아내 박영옥 이다.  김종필은 박정희 조카사위이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군부는 육군 정보기관을 통해서 북한에게 남북 대화를 요청했다. 4.19 혼란기에 남로당원이었던 박정희가 남한을 지배하 자게 되자 김일성은 적화 통일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남쪽에 보낼 밀사를 찾고 있었다. 마침 황태성이 옛 박정희와의 친분 관계를 앞세워 자원하자 이를 수락했다.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옛 친구의 부인 조귀분을 찾아갔다. 10월에 그는 체포되었다. 조귀분은 자기 딸 김영옥에게 연락했을 것이고 김영옥의 남편 김종필이 체포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는 1963년 비 공개 육군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 졌다. 


황태성은 190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경기고에 들어갔으나 일본 교장 배척운동으로 3년 만에 퇴학당했다. 연희전문에 다니다가 항일운동을 이유로 퇴학당했다. 학생운동을 하는 동안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김천에서 신간회, 청년동맹 간부로 활동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항일운동으로 3년 6개월 동안 옥 사리도 했다. 



박상희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는 황태성과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였다.  신간회와 청년동맹 지방 지도자로 활략 했다. 신간회는 사회주의자 독립운동 단체였다.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대구지국장을 지냈다.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수감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구를 창설했다. 구미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다고 한다. 1946년에 조선공산당 선산 군당 총책이 되었다. 황태성은 교사였던 조귀분을 박상희에게 소개하여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이 박영옥이고 후에 김종필의 처가 되었다. 


박상희와 황태성은 대구 10.1 사건 동안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박상희는 10월 6일에 경찰 총에 맞아 사망했다. 황태성은 이무렵에 월북했다. 이북에서 무역상 부상 등을 지냈으나 1959년에 모든 관직에서 물러 났다. 박정희는 형이 경찰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남로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박상희보다 11살 아래이다. 박상희가 대구사범에 낙방 한 반면에 박정희는 합격했다. 박정희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박상희는 동생이 일본군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만주군관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일본 육사 입학 자격을 얻었다. 일본 육사를 1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관동군 헌병 소위로 임관되었다. 관동군 장교로 근무하던 중 소련군에 의해서 관동군이 패퇴 하자 베이징에 있는 광복군에 합류했다. 이북은 이미 소련군이 점령하여 일본군이었던 그에게는 들어갈 수 없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1946년 5월 박정희는 미군 수송선을 타고 구미로 돌아왔다. 박상희는 박정희를 "선생질이나 하지 일본군이 되더니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다"라고 나무랫 다고 한다. 그는 해방된 한국에서 일본군 경력은 치명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그 해 9월에 조선 경비 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12월에 졸업한 후 한국군 장교가 되었다. 



황유경

박정희는 적화통일의 희망을 품고 돌아온 황태성을 만나지 않았다. 조카사위이며 혁명동지인 김종필은 그를 사형시켰다. 황태성의 손녀 황유경은 미국에 살고 있다. 황유경은 박정희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김학민, 이창훈 지음)이라는 책에서 어색한 만남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고2 때 가을이었을 겁니다. 그때 제가 꽃씨회라는 청년봉사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는 데,  요즘의 사랑의 열매, 같은 것을 달아주고 성금을 받아 그 돈으로 불우 이웃 돕기를 하는 단체였어요.... 회원 10여 명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에게 인사하고, 그중 제가 대통령 앞으로 가 열매를 달아 주면서 돌연 "제가 황태성 씨 손녀입니다"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박 대통령은 순간 얼굴이 굳어지고,... 행사는 허둥지둥 끝났지요.


일제 강점기에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던 도시였다. 경상도는 독립운동가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방이었고  이들은 대부분이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박상희, 황태성, 박정희가 예외적인 인물이었다기 보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남한 국민들이 지금은 친미와 반공을 중요시하는 보수의 본고장이 된 대구를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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