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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Aug 30. 2020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

06. 1945년 중국, 만주, 한반도와 일본



연합국 정상들의 전후 처리 회담들


나는 "연합국이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 했다"는 이야기를 역사 시간에 귀가 아프게 들었다. 그러나 그 회담의 현실적인 중요성은 오늘날 역사기록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테혜란 회담과 얄타 회담이 분단이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소련군대의 만주 괸동군 공격은 북한에 소련군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악의 축 파시스트 3국, 독일, 이태리 일본은 패색이 짙어가고 있었다. 연합 4 대국은 전후처리에 관한 회담을 이어 갔다. 1943년 11월 22일에서 26일까지 미국 대통령 프랭틀린 루스벨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중국 총통 장개석이  전후 일본에 관련된 문제를 주제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초청되지 않았다. 1941년에 소련과 일본은 서로 중립조약을 맺은 관계로 당시에는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과 전쟁 중인 나라들만 모였다. 동년 12월 1일에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었다. 일본이 점령한 모든 중국 영토를 중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일차 대전 이후로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내놓을 것이며 일본이 강점한 모든 점령지에서 일본 군대를 철수시킬 것 약속했다. 세 정상은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데는 이의가 없었으나,  일본 항복 직후에 독립하는 것이 아니고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을 독립시킨다고 합의한 것이었다.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던 영국은 섣불리 한국 독립을 허락했다가 자기네 식민지를 독립시키지 않는 명분이 없어질 것을 우려했다. 영국 수상 처칠의 제안으로 "적절한 시기"라는 단서가 붙었다. 


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톤 처칠, 조샙 스탈린이 테헤란에 모였다. 세 정상은 독일이 항복한 후에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스탈린은 이후 만주 국경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1945년 2월 4일에서 11일까지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톤 처칠, 조셉 스탈린은 소련 영 크리미아에 있는 얄타에서 만났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공격할 것을 부탁했다.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한 후 3개월이 되면 만주를 침공하겠다고 약속하면서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몽고 독립 보장, 만주철도 관리권과 요동반도에 있는 항구 포트 아터의 조차권, 그리고 카라 푸토와 쿠릴 섬을 일본으로부터 소련이 돌려받는다는 조건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여 빼앗긴 이권과 영토를 찾는 수순이었다. 러일전쟁에서 두나라는 한반도를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다. 세상의 예상을 뒤집고 러시아는 한반도를 일본에게 내주었다. 스탈린이 그 원한을 잊어버렸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두정상은 세 가지 조건을 다 받아 주었다. 


1945년 5월 9일 독일이 항복했다. 이제 일본은 외톨이 신세가 되었다. 연합국은 일본만 굴복시키면 전쟁을 끝낼 수가 있었다.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연합국 정상들은 독일의 포츠담에서 회합했다. 7월 25일까지는 윈스턴 처칠이 영국을 대표했으나 28일부터는 처칠을 선거에서 이기고 새로 당선된 그레멘트 아틀리가 회담에 참석했다. 해리 트루만이 미국을 조셉 스탈린이 소련을 대표하여 회담에 참석했다. 7월 26일, 이들은 유명한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에게 마지막 경고를 했다. "무조건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일본은 완전히 잿더미가 될 것이다"라고. "새로운 폭탄" 이란 말은 쓰지 않았다. 그리고 트루만은 스탈린에게 은밀히 "미국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위력을 가진 폭탄을 개발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미 미국이 원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을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한다.   소련 스파이가 이 프로젝트의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 건국의 중심인물들

만주가 일본에게 점령되었지만 중국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군벌에 속해 있던 중국 군인들이 산발적으로 일본 관동군을 괴롭혔다. 1936년에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재 편성하여 동북 항일연합군을 조직했다. 만주에 근거를 두고 무력으로 항일 투쟁을 하던 조선 사람들은 만주가 일본에 점령당한 후로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동북 항일연합군은 관동군을 상대로 저항하기에 비교적 안전한 조직이었다. 조선사람들도 동북 항일연합군에 참여했다.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이 휘하의 장병들과 같이 동북항일연합군에 들어갔다. 모두 약 만 명에 달 했다. 그러나 1939년부터 관동군의 공격이 심해져서 1942년에는 부대가 와해되었다. 모두 소련으로 도주했다.  1941년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고 있어서, 소련은 조선사람들의 항일운동을 금지했다.  그들은 1945년 소련군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왔다.  소련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이들은 북한군과 새 정부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광복군과 독수리 작전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남경에 있던 국민당 정부가 일본군에게 쫓겨서 충칭으로 옮겨 있던 시절이었다. 국민당 정부의 원조를 받고 있던 상해 임시정부도 중국 정부를 따라 이동했다.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 또한 국민당 정부의 원조로 조직되었고 중국군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중국 정부 정보기관인 남의사의 감시를 받았다. 만주에서 무장 활동을 하던 지청천과 이범석이 지휘했다.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던 김원봉은 1942년에 합류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는 데, 부하 장재석이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중국 화북지방에서 중국 공산당군에 들어가 버리자 할 수 없이 잔류 병력과 함께 광복군에 들어왔다. 


상당수의 조선 청년들이 일본군이 되어 중국에서 중국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이들 중에는 전투 중에 중국군에 투항하여 광복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준엽, 장준하, 윤경빈, 홍석훈, 김영록은 학병으로 끌려가서 일본군 장교가 되어 중국에서 전투 중에 탈영하여 무려 6 천리길을 걸러서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왔다. 이들도 광복군이 되었다. 중국군은 광복군에게 전투 임무를 주지 않았다. 라디오를 통한 일본군 선무 작전, 전단 뿌리기, 포로 심문 등이 광복군이 맡은 임무였다. 


광복군은 거창한 이름과 한국 역사에서 지극히 강조하는 것에 비해서 그 규모나 활동 면에서 너무나 미약하다. 초창기 병력은 400명이 조금 안되었고 1945년 3월 경의 병력은 중국인 65명을 제외하면 약 450명이었다. 광복군이 인도 버마 전선에서 활동했다고 무척 강조하는 데 알고 보면 괄목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9명이 영국군 총사령부 소속 장교로 일본군 대적 방송, 전단 살포와 포로 심문을 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광복군의 일본말 재능을 써먹은 것이었다. 


1944년 8월에 광복군은 중국군 지휘 하에서 벗어나 임정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로부터의 지원은 계속되었고 장계석의 통제 또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광복군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통수권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지자 미국도 한반도 수복 작전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CIA 전신이었던 중국 주재 OSS는 한국사람들을 대일전에 활용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광복군 또한 본토 지하공작과 미군과 같이 한반도 진주 작전계획을 가지고 오에스 에스와 접촉했다. 1945년 봄, 광복군은 OSS의 도움을 받아 중국 샨시성 시안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1945년 9월에 서울 탈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코드 내임은 Eagle Project 였다. 미군과 광복군은 4-5명이 한 조를 이루어 산동에서 잠수함을 타고 한반도 각 지역에 침투하여 선전, 파괴와 무장봉기를 선동한다는 작전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7일,  지부장 윌리암 도노반을 비롯한 OSS 책임자들과 김구 주석, 지청천 광복군 사령관, 이범석 제2지대장이 작전회의를 마치고 공동작전 수행을 선언했다. 그러나 독수리 작전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게 되어 실현되지 않았다. 김구는 백범 일지에서 한국의 해방이 조선사람들의 노력 없이 외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개탄하며 민족의 분열을 예견했다. 


임시정부는 일본이 항복한 다음날인 8월 16일 광복군을 서울로 출발시켜,  8월 18일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일본군에게 포위당했다. 저지하는 일본군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중국으로 되돌아 가야만  했다. 그때는 소련군도 미군도 아직 서울에 들어오지 않아서 일본군이 아직도 서울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광복군의 병력이 일본군을 상대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무모 한 발상이었다. 


소련의 만주 침공

1941년에 일본은 소련과 중립 협정을 맺었다. 소련은 안심하고 독일과 전쟁을 해야 했고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에서 전쟁하는 동안에 소련이 북쪽에서 침공하면 곤란했기에 서로 필요한 약속이었다. 일본은 5년 동안의 협정 기간이 만료에 가까워지면서 트랜스 사이 베리안 철도를 이용한 소련의 병력 이동을 상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철도와 도로에 적당히 배분하여 운반했다. 일본은 소련이 9월 이후에 침공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1945년 8월에 소련군 90개 사단이 만주 국경에 포진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1945년 8월 8일 오후 11시에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자정이 지나자마자 만주 국경 좌우와 중앙 세 곳에서 소련군 백 6십만 명이 일제히 만주로 쳐들어왔다.


스탈린이 약속한 대로 1945년 5월 9일 독일이 항복한 지 정확히 석 달만의 일이었다. 몇 시간 후에 나기사 키에 두 번째 원폭이 폭발했다. 관동군의 정예부대는 이미 태평양 전선으로 빼돌여서 미국과 싸우고 있었다. 많은 병력이 중국, 동남아 전선에 배치되었고 탱크 등은 1930년대 낡은 모델이어서 소련의 최신 무기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소련군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사용했던 최신 무기와 단련된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군수물자의 부족으로 이미 일본군의 사기 또한 지극히 저하된 상태였다.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몽고, 만주 그리고 북한으로 밀고 내려갔다. 소련군은 8월 9일에 북한에 들어가서 8월 11일 웅기, 12일에 나진, 13일에 청진, 23일에 개성에 들어갔다. 9월 2일에 미국의 요구로 38선에서 멈췄다. 같은 날 요동을 점령했다. 베이징이 목전이었다. 북한에 진입한 소련군은 저항하는 일본군과 싸운 반면에 남한을 미군이 점령할 때는 일본군이 이들을 영접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1945년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 조 대장이 항복하고 8월 30일까지 관동군이 무장 해제되었다. 관동군 60만 명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약 2만 명의 일본군과 소련군 일만 명이 전사했다. 소련은 몽고, 만주, 38 이북의 한반도,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를 차지했다. 


1945년 한국


김구, 김일성, 김원봉, 이승만 등이 중국, 만주, 러시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던 반면에 여운형은 국내에서 일본이 망할 때를 기다리며 새나라를 만들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로는 일본 정부의 철저한 보도관제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실상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운형은 일본 군대와 정계의 고위층과 접촉하면서 일본이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1942년 4월 18일, 미국은 진주만 폭격을 보복한다는 차원에서 도쿄를 폭격했다(Doolittle Raid). 도쿄 가까이 항공모함을 정박시킬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원위치로 돌아올 수 없는 거리에서 출발하여 폭격을 완수한 후에 중국 내륙에 착륙했다. 중국에 착륙한 미군은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한 전투기는 소련 영에 착륙했는데, 이란의 테헤란으로 탈출했다. 여운형은 이 폭격 광경을 도쿄에서 목격하고 일본이 패망한다는 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1940년부터 미국의 소리 방송을 청취하여 전쟁 진행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이 독립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수권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1943년 8월 10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해방 연맹이 결성되었다. 일 년 후인 1944년 8월에 조선 건국동맹으로 발전했다. 중앙 조직은 물론 지방 대표까지 선정하는 전국적인 조직망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감시 때문에 실제적인 활동은 어려워서 이름뿐인 직책도 많았다. 그리고 외국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하려는 노력도 진행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8월 8일 자정 소련의 만주 침공,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그리고 연일 계속되는 B29의 도쿄 폭격은 일본의 무릎을 꿇게 했다. 일본은 8월 10일 미국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통고했다.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뜻이었다. 항복이란 말을 쓰기 싫었던 모양이다. 조선총독부는 미국의 단파 방송을 통해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발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 재한 일본인 80만 명과 일본군 10만이 무사히 귀국해야 했다.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은 파시스트를 싫어했고 일본은 공산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소련은 관동군과 직접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서울을 점령하면 총독부와 일본인, 일본군대가 제대로 살아남을 리가 없었다. 


1945년 8월 11일, 조선 총독부는 경기지사 이쿠다를 통해서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송진우에게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치안유지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중칭에 있는 임시정부가 할 일이라고 거절했다. 8월 14일 김준연에게도 같은 요청을 했으나 송진우의 참여 없이는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한국 근대사 산책, 강준만 지음).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 시절에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한 인물이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7시 50분경,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 사쿠는 필동 자택에 여운형과 마주 앉았다. 그는 여운형에게 일본이 곧 항복할 것이라고 하면서 행정권 이양을 부탁했다. 여운형은 5가지 조건을 제안했다. 

1.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 3개월 동안의 식량을 보장할 것  3. 정치활동에 간섭하지 말 것

4. 청년과 학생의 훈련에 간섭하지 말 것  5. 근로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간섭하지 말 것

을 조건으로 총독부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여운형이 수권을 수락한 후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공동선언을 받아들인다는 요지의 방송을 했다. 포츠담 선언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조선사람들이 알아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다음 날에야 일본이 항복했다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되었다. 


여운형은 송진우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충칭 임시정부를 내세워 거절했다. 여운형은 8월 15일 밤, 자신이 일 년 전에 조직했던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은 자신이 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었다. 남한에서만 만 6천 명이 자유를 찾았다. 8월 16일 자택에서 가까운 휘문고등학교 운동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여운형은 새나라 건설을 위해서 단결할 것을 요지로 하는 연설을 했다. 


아마 여운형이나 운집한 국민들은 일본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나가면 한반도를 조선이 차지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항복 의사를 전달받은 미국 정부는 일반명령 제1호 작성을 시작했다. 일본 항복 후의 정책에 관한 문서였다. 이중 한반도와 극동지역에 해당하는 부분은 촬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이 맡았다. *딘 러스크는 국무장관, 촬스 본시틸 주한 미군 사령관을 지냈다. 소련의 남하가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잘못하면 한반도가 몽땅 소련에게 넘어갈 판이었다. 그들은 30분 만에 서울이 포함된 38선 이남을 미국이 점령하는 것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은 8월 14일에 이를 소련에게 통고했고 소련은 하루 만에 아무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소련은 후한 대접이었다고 생각했고 미국은 소련의 응락이 의외였다. 러일전쟁 전에 러시아가 39도선 분할을 일본에게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 38도선에 만족한 이유 일지도 모른다. 


조선총독부는 몇십만 명의 관동군이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휩싸였다. 한편 건준은 전국적으로 조직이 강화되어 갔다. 곳곳에서 관공서, 경찰, 학교 등을 일본인들 손에서 빼앗아 갔다. 겁에 질린 총독부는 자진해서 천황의 사진을 소각시키고 신사에 불을 질러서 없앴다. 건준이 행정과 치안유지만이 아닌  건국 준비를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재조선 일본인들은 몰래 감추어 두었던 설탕과 밀가루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전쟁동안에 그렇게 귀하던 사치품들이 시장에 넘처 났다. 일본으로 가지고 갈 수 없는 가구도 팔았다. 



건준의 새나라 건설에 대한 꿈도 5일 만에 끝이 났다. 8월 20일  극동사령관 맥아터는 조선총독부에게 총독부를 미군이 인수한다고 통보했다. 총독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은 상극이었다. 파시스트는 공산주의 혁명의 대상이었다. 소련이 남한에 들어오면 조선총독부 괸리들은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공사주의자는 일본과 미국의 공동의 적이었다.  총독부는 80%나 감소한 경찰 인력을 군을 동원하여 메우고 빼앗긴 행정기관, 학교, 경찰을 다시 점령했다. 일본 사람들은 가구를 다시 사 갔다. 총독부는 여운형과 건준을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미군에게 보고 했다.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들이어서 테러를 할 우려가 있으니 치안을 우리에게 마껴야 한다고 충고했다. 미군은 이들의 말을 믿고 오키나와에서 비행기를 동원하여 만약 일본인에게 테러를 하면 엄중히 처벌하겠다는 전단을 살포 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정식으로 미국에 항복했다. 일본 미군정은 신과 동격이었던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인간으로 격하시키고 전쟁에 대한 죄과를 용서해 주었다. 그 대가로 일본 사람들에게 미국은 일본 사람들의 적이 아니고 전쟁의 참화에서 그들을 구해 주려고 일본에 왔다는 홍보 대사의 임무를 맡겼다. 9월 8일 하지 중장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24사단을 이끌고 조선총독부의 환영을 받으며 인천에 도착했다. 총독부에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휘 날렸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보에 성조기가 꽃친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9월 9일 일본은 정식으로 중국에게 항복했다. 1931년 만주사변부터 시작한 두나라의 전쟁은 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중국은 청일전쟁에서의 고배를 설욕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에게 빼앗겼던 만주와 내몽고는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대만은 중국이 확실하게 돌려받았다. 중국은 곧바로 내전에 휩싸였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장개석과 모택통의 싸움이었다.  소련은 모택통을 미국은 장개석을 지원했다. 4년 동안 계속된 내전은 모택통의 승리로 끝나고 1949년 10월 모택통은 중공(People's Republic of China)의 탄생을 선언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싸웠다.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는 것이 확실해 저 가고 있는 데, 한국민은 해방이 되었으니 나라를 찾았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민(Korean)은 일본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한국(Korea)은 패전국 일본이 가지고 있던 영토였고 전쟁에서 이긴 그들에게는 전리품이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향후 미군정 시기에 미군과 남한 국민 사이에 커다란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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