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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Sep 02. 2020

미군정기

01. 미국 점령하의 남한 1945-1948



미국 점령하의 남한 1945-1948

 미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미정부 공문서인

"South Korea Under United States Occupation, 1945-1948

Andrea Matles Savada and William Shaw: Washington, Government Publishing 

Office of Congress1990"의 번역


일제 강점기 직후, 삼 년 동안 계속되었던 미 점령기는 매우 혼란스럽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이었다. 그 원인은 명확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 부재, 점점 심해저 가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 한

국정치의 좌우 양극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82, 1905년에 미국과 조선이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 

한국은 소수의 선교사와 모험적인 사업가에게 만 알려져 있었지 미 정부에게는 그리 중요한 나라가 

아니 었다. 미국이 한반도를 38선을 그어 두 점령군을 갈라놓자고 제의한 당사자였지만, 미 정책 

수립자들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미-쏘 공동위원회가 아무런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 한 후에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더욱 불확실 해 졌다. 미 관리들은 소련과의 의견 

차이를 해결할 가능 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면 서도 신탁통치 후-독립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신탁 통치 계획은 중국을 포함한 연합 4개국이 1945년 모스크바에서 결정한 사안이었다. 그래서 장기적

인 시국의 변화에 따른 대안 마련이 지체되었다. 더구나 소련은 북한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에서는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패퇴하기 시작하자 미전략가들은 한국을 장기적으로 공산권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1947년에는 동북아시아 대륙에서 남한이 유일 한 공산주의 통 

치안에 있지 않은 나라였다. 한 고위관료는 "적군에게 노출된 위험한 군사적 위치에 있는 아무 쓸모없

는 지역"이라고 했다. 

미 한국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와 같이 불리한 조건 하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는 국제

적 분쟁이 해결될 때까지 점령 지역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인력과 물자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정부는 하지에게 남한에 자유 돕고 독립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를 기대했다.  


하지 장군은 적대적인 한국 정치단체들과 일해야 했다. 1945년 9월 미국이 남한에 진입하기 전에 한

국인들은 자국 통치기구인 *인민회의를 설립했다. 이 회의의 지도자들은 중앙인민회의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1945년 9월 6일에 한국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해외 망명객, 주로 중국 망명인사들은 1919

년에 상해에 한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1945년에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박헌영이 들어오면서 인민위원회로 재편성 되었다


미국은 인민공화국과 임시정부 둘 다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수장들은 1대 대통령이었던 이승

만, 총리 김구, 부총리 김규식이었다. 미국은 서방 연합국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 지기 전에는 이들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이었다.  망명 정치인들이 귀국 하자,  미군정 당국은 그들을 환대하여

 일단 안심 시켰다. 그러나 해산하라는 명령은 그들을 분노하게 했다. 미군정은 모든 지방 인민회의를 

해산시키고 군정 직접통치를 강행했다. 한국말도 할 줄 모르고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군인들을 

관료로 임명했다.  


1945년 10월에 다시 살아난 한국 공산당은 중앙인민회의와 한국 인민공화국 뒤에 있는 중요한 힘이 

었다.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공산당에 모여들었다. 1946년 1월, 공산당은 종래의 신탁 반대에서 신

탁찬성으로 정당의 입장을 바꾸었다. 당은 평양의 소련 사령부의 지휘 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정국은 더욱 나빠졌다. 일본 패망과 동시에 독립을 기대했던 한

국민에게 5년 신탁통지 결정은 모욕적인 것이었다. 미군 진입 시에 있었던 해방군으로 서의 환영 

분위기는 급격하게 식었다. 1946년 초까지 미군정은 지주나 재산가 같은 보수적인 인사들의 의견에

 치중하여 이를 통치에 반영했다.  


미국은 처음에는 돌아온 임시정부 인사와 보수 정객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1946년 5월과 1947년 4월

사이에 미군정은 중도 좌파인 여운형과 중도 우파인 김규식의 연합 세력을 만들어서 이를 지지하려고

했다. 이 시도는 우파와 좌파 내의 새러 운 파벌 조성을 부추기만 했지 연합세력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신탁통치를 반대해야 한다는 중도파의 주장은 다른 파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5월에 

공산당은 위조지폐 발행을 획책했고 이로 인해서 공산당 지도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갔다. 이러는

동안 좌파와 우파의 폭력적인 충돌이 잦아졌다. 사상 대립 또는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입장을 명분으로

내 세웠다. 

1946년 12월, 미군정은 남한 임시국회를 조직했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개혁에 필요한  법을 마련하

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문제는 좀 더 고 단수의 해결책이 요구되었다. 남로당의 기치 아래 

뭉친 좌익 정치 단체들은  임시국회를 무시했다. 소상인과 지주들의 지지를 받은 보수 한국 민주당은  

자기당 중진들이 국회에서 제외 되었 다는 이유로 국회를 반대했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보수인사였지

만 임명된 의원 45명 거의 다가 김규식이 추천한 인물 들이었다. 하지는 김규식을 정치지도자로 내 

세우 려고 했다. 불행하게도 김규식은 진취성이 부족했고 광범위 한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경제와 사회>

당시의 위와 같은 상황은 남한의 경제를 완전한 대 혼란에 빠트렸다. 점령군이 조심스럽게 만든 경제

계획을 가지고 들어 왔다 하더라도 상황은 마찬 가지로 어려웠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일본 

본토, 한국, 그리고 만주를 총망라하는 경제 체제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적당히 그어 놓은 선으로 이루 어진 분할은 더욱 상황을 악화시켰다. 남쪽 만의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경제를 만드는 데는 많은 원천 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중공업은 소련이

점령한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농업에 필수적인 비료공장 또한 북한에 있었다. 남한에 집중되어 있

는 경공업은 전기가 필요 한데, 전기도 북한의 압록강에 있는 수력발전에 의존하고 있었다. 남한의 

발전소는 겨우 9%의 전력 수요를 공급했다. 철도와 공장들은 만주, 일본, 북한에서 수입된 석탄을 

사용했다. (남한은 북한에 무연탄을 수출했지만) 


한국의 광산과 공장은 대부분이 일본인들 소유였고 이들이 운영했다. 점령 한 달 만에 800,000 일본

인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 가자, 대부분의 광산과 공장은 관리인, 기술자, 자본금이 없는 상황이 벌어

졌다. 적군의 재산(적산)이 된 이것들은 군정 소유였으나, 유명무실했다. 실업자가 양산되었고 물자

부족이 심각했다. 


점령군이 도착한 후 몇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본국으로 들어왔다. 1945년에 일천 6백만이었던 남한의

인구는 일 년 사이에 21%나 증가했다. 1950년 까지, 일본으로 부터 일백만이, 중국과 만주에서 12만

, 북한에서 일백 80만이 남한으로 들어왔다. 출산율에서 사망률을 제한 인구증가율은 3.1% 였다. 밖에

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지방에서 정착하기가 어려웟기 때문에 도시로 몰려들었고, 전체의 1/3 이상이

서울에 정착했다.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부족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거기다가 인플레이션 까지

겹쳤다. 일본인들은 나가기 전에 많은 돈을 찍어서 통화량을 크게 불려 놓았다. 


이러한 정치, 경제적인 상황은 사회적인 불안정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1947까지 천만의 노동자

중 겨우 반이 고용되었다. 파업과 태업이 자주 일어났고 군정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많은 군중이

합류했다. 1946년 초기와 1947년 말기에 있었던 북측의 송전 중단은 남쪽을 어둠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민중을 절망에 빠지게 했다. 광복이라는 꿈에서 깨어 나 크게 실망한 민중은 

한국의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정치지도자들에게  날카로운 관심을 보였다. 


<대한민국 수립>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종전의 계획을 앞 당겨 5년에 걸쳐 남한의 발전을 위해서 500 밀리온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 후에 1947년 9월에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11월에 유엔 총회는 한

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정부 수립과 점령군 철수 준비를 했다. 1948년 5월 유엔 임시 한국 위원회가 총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서 한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소련은 유엔 한국문제 해결안을 반대했고  유엔 위

원회가 북한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한반도에 두 개의 다른 정부가 수립될 것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영구적인 분할이 예견되자, 많은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그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서 남한의 정치 형태는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들은 분할을 감수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하느냐

와  미국과 소련의 의견 차이를 해결할 때까지 독립을 연기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만 했다. 

1946년 6월부터 이승만은 전자를 주장했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 한 우파 인사들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북한과 대화를 통해서 미-쏘 의견 차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1948년 4월, 두 김은 

5월 총선을 반대하고 북한의 미래 수도인 평양으로 향 했다. 그러나 북한이 송전을 끝음으로서 그들의

노력은 신용을 잃게 되었다. 한국 민주당 외에는 전 국민의 지지가 부족 하기는 했지만 이후 이승만에게

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무렵 남한의 공산당은 많은 지지자들을 잃었다. 특히 1946년 10월 대구 폭동

이후에는 대부분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북쪽에 모여들었다. 1947년 7월 여운영이 암살되자 중도 좌파

들은 혼란에 빠졌다. 김규식은 미군정의 확실한 선택이었지만, 그를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할 평양 

행을 못 하게 설득할 수는 없었다. 



1948년 5월 선출된 국회는 4년 임기의 대통령 중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했다. 이승만은 그의

지지자들이 총선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남한)이 선포되었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사흘 후에 북한은 남한 송전을 중단 함으로 서 

남-북 관계 절단을 완료했다. 한 달도 채 안되어 북한은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인민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들은 북한과 남한 전역에 걸쳐서 실시된 선거에 의해서 김일성이 선출되었다고 주장했

다. 물론 남한의 유권자들은 지하로 잠적 한 사람들이다. 1950년 6월 북한이 남침할 때까지 이승만이

자기의 정치적인 기반을 다지기에는 부족 한 시간이었다. 


1948년 9월에 남한의 군대가 만들어졌다. 같은 해 10월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군내의 공산주의

자들이 주도 한 사건으로 군내의 많은 물자와 인력을 소모했고 대규모의 숙청은 군을 크게 약화시켰다.

한국의 불안정 한 장래와 중국에서의 공산주의의 승리는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을 전적으로 도와주지 못

하게 했다. 1949년 6월 29일 몇 명의 고문관만 남기고 미군은 남한에서 전면 철수했다. 그리고 한국을 

미국 방어선 밖의 나라로 취급했다.  


<추론>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된 후의 지도를 보면 빨간색으로 칠 해진 소련, 중국, 북한이 점처럼 보이는 파란 

색의 남한을 곧 집어삼킬 것처럼 보인다.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살아남은 것은

가히 구사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분단의 책임의 반을 미국에 돌리기보다는 그나마 남한을 대한민국으로

만들 어 준 미국의 공을 높이 사야 한다. 특히 미국에 정착하고 사는 교포들은 미국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엄연한 현실적인 공과 때문 에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 자주독립국가의 본질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의 한국의 상황은 해방-광복이라는 표현에 가려져서 외세에 의한 

점령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을 한국민은 망각하고 있다.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잃었다. 그리

고 한민족은 36 동안 일본 통치 하에 있었다. 1945년에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에게 태평양 전쟁

에서 패배하여 조선 땅을 내주었다. 받은 나라는 소련과 미국이었다. 그들은  승전국이 었기 때문에 

한 반도를 반반 씩 점령했다. 구 태여 해방과 광복 이란 말을 쓰자면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미국의 문서는 점령이란 말을 쓰고 있다.  


공짜 점심이 없듯이 미국의 힘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외국군대인 미군이 자국에 주둔하고 있고 군

전시 작전권이 외국군대인 미군에게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군 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전시작권권이 없는 군 통수권자가 제대로 그 권리를 행사할지 의문이다. 이와 같이 외국군대에게

의존하는 국방은 자국과 타국의 이해관계가 같을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 나, 다를 때는 보호를 받는

나라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그 역사적인 예는 임진왜란 때 명과 조선의 관계에서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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