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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Aug 17. 2020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05. 일본의 영토 확장과 일제하의 한반도


유롭사람들 자신은 문화인이고 아프리카 사람들은 미개인이며 아시아 사람들은 비 문화인이라고 했다. 미개인들은 아예 나라를 만들 능력이 없으니 자신들이 국가를 만들어서 다스려야 한다고 하며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했다. 아시아 사람들은 나라는 만들었으나 아직 국민이 잘 살게 통치할 능력이 없으니  우리가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하며 약소국들을 점령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람들은 유롭사람과 똑 같이 되려고 무진 노력했다. 20세기에는 자신들은 옆 나라 조선, 중국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고 유럽 사람들과 대등한 민족임을 자부했다. 결국 문명 인대 비 문명국 구도가 성립된 것이다. 1940년 6월 20일,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발표했다. 일본이 전 아시아 국가들을 통합하여 문명인으로 만들어서 서양사람들의 침략을 막자는 정책이었다. 침략의 허울 좋은 대의명분이었다. 


난징 대학살 이후 구미 국가들로부터 전쟁물자 확보가 점점 힘들어 지자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 국가를 점령하려고 전선을 크게 확장할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41년 10월 8일, 도조 히데끼는 국무총리, 내무대신, 육군대신과 함참의장을 겸하여 누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장악했다.  일본 천황 쇼와 텐노의 인가를 받아 광기에 가까운 전쟁을 총지휘한 장본인이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과 동시에 필립핀, 인도 네시아, 버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을 공격했다. 이 지역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영국, 미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군은 뜻하지 않는 일본군의 급습에 속수무책이었다. 일본은 석유는 인도네시아에서, 고무와 주석은 말레 이지아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이 중국 동해안 항구와 인도 차이나를 점령한 후로는 구미 국가들이 중국 국민당 군에게 군수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육로는 버마에서 중국 유난 성을 연결하는 버마 로드 밖에 없었다. 일본은 영국령 버마를 점령하여 이를 차단했다. 영국은 유롭에서 독일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 전선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네덜란드는 이미 독일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진주만 공격 6개월 후인 1942년 6월 일본은 북쪽은 만주, 남쪽은 뉴기니아, 서쪽은 인도 아쌈에서 동남쪽으로는 남태평양 길버트 아일런드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연전연승의 승전보는 일본 국민을 열광하게 했다. 그러나 1942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진행된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미국 해군에게 패배했다. 이전투는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미드웨이는 하와이군도에 속하는 조그마한 섬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 군대의 패전 소식을 국민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일본 사람들이나 조선사람들은 일본이 항상 이기고 있는 줄 만 알 았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

한국사람들은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 들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불운하고, 불쌍한 민족이다. 어떤 때는 왜 사람들은 나라를 가지려고 하는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마음씨 좋은 대국에 속해 버리면 편하게 잘 살 텐데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해보았다. 고려말에 몽고 사람들에게 무려 80년 동안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이성계는 "사대"를 하기로 작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대국에게 미리 머리 숙이고 잘 지내면 평화스럽게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국사람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이 대륙세력과 싸우는 전쟁에 인명과 재산을 바쳤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동안에 조선은 노동력, 군수물자, 군사기지를 일본에게 제공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전쟁의 연속이었다. 한반도는 중국 침략의 전진 기지 였다. 한국사람들은 일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선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이야기이다. 조선사람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본을 위한 전쟁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일차 대전,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모두 일본이 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단순한 구경 꾼이 아니었다. 해방 후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는 1953년 휴전협정 때까지 전쟁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들어왔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에 이미 한반도에는 일본인 170,0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농부들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근대식 부동산 소유권 제도를 확립하는 과정을 통해서 조선사람들의 농토를 일본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당시에 조선에는  토지 소유권을 서류로 증명하는 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구전으로 아무개 땅이요 하면 그만이었다.  1932년에는 일본 사람들이 농토의 반이상을 소유했다. 지주는 일본 사람, 소작인은 조선사람인 경우가 다수를 차지했다. 농촌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진 조선 사람들은 도시의 공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1925년 일본은 한국역사편찬위원회를 조직했다.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만든 한국 역사는 왜 일본 사람들이 조선사람들보다 우수한 민족이 되었는 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한일 합방 직후에 일본은 경복궁 궁녀들이 쓰던 거처를 마구간으로 개조했다.  급기야는 경복궁의 대부분을 허물고 세계 박람회를 개최한 후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이 건물은 1993년까지 중앙청으로 사용되었다. 


한일합방 후에 조선사람이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었다.  조선사람과 일본 사람이 명확히 구별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쟁이 방대한 지역으로 확장되자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사람을 일본 사람과 똑 같이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소위 내선일체 정책이었다. 일본 국내 일본인과 조선 사람은 한 몸이라는 뜻이다. 1939년에 창씨개명을 시작했다. 1943년에는 조선사람의 80%가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연전연승하는 일본군, 방대한 일본 영토를 보는 한국사람들 중에는 점점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일본의 지배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협조하는 행위를 합리화하는 데 편리한 정황이었다. 합방 초기에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친일로 돌라서는 사례가 빈번했다. 


1938년 일본 정부는 국가동원령을 내린다. 정부가 전쟁을 위해서 아무것이나 빼앗아가고 누구나 다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젊은 남자들을 있는 대로 모두 전쟁에 내보냈다. 중국을 포함한 방대한 전선을 운영해야 하는 데 일본 남자 전부를 전선에 보내도 모자랄 판이었다.  공장, 광산, 공사장 등에서 일할 사람이 없었다. 무려 5백4십만 명의 조선사람들을 모집했다. 이들은 한국, 만주, 일본의 공장이나 광산에서 일했다. 약 6십7만 명이 일본과 사할린으로 보내졌다. 대부분이 탄광에서 일했다.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일했다. 1944년 9월부터는 강제징용이 실시되었다. 이들은 한반도,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 중국, 동남아시아 등 드 넓은 이역만리 타향에서 일해야 했다. 말할 수 없는 악조건이었다. 


봉급은 장부에 적어서 액수만 알려 주었지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위험한 작업환경 때문에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부상자와 아픈 사람을 치료할 의료시설도 없었다. 탄광 안에서 다이나 마이트를 폭발시켰는데, 폭발 후 생기는 흑과 돌 더미에 깔려 죽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작업 감독관들은 노동자들을 걸핏하면 구타했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 까지 매일 일해야 했다. 그러나 주는 식사는 콩깻묵에 쌀과 보리를 섞은 것이 전부였다. 소화가 잘 안되어 설사하기 일 수였다. 그나마 양이 충분하지 않아 시장기가 가시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피골이 상접했다. 거의 반이 죽어 나갔다. 


약 6만 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일본에서 사망했고 약 6십1만 명이 한국과 만주에서 사망했다. 사할린 탄광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 4만 3천 명은 해방 후에 한국으로 돌아 올 수가 없었다. 일본이 차지했던 남 사할린이 소련으로 넘어 가자, 소련은 이들을 본국으로 보내지 않았다. 


쌀을 비롯한 모든 것을 배급했다. 배급양이 전쟁이 진행되면서 점점 줄었다. 쌀이 전쟁 터로 너무 많이 빠져나가자, 국민들이 먹을 양식이 부족했다. 일본 정부는 하루 한 끼 죽 먹기 운동을 벌였다. 조금 지나자 들판의 풀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선전했다. 조선 말기에 양반 벼슬아치들의 가렴주구로 초근목피했던 조선사람들은 일본이 하는 전쟁 때문에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짚신을 신다가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는 전쟁에 꼭 필요한 원자제였다. 고무신 대신 게다를 신으라고 하고 고무신을 모두 거두어 갔다. 가정에 있는 모든 쇠붙이는  다 빼앗아 갔다. 놋그릇, 수저, 세수 대하 등등. 동상과 절과 교회에 있는 종도 남아나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에는 피마자(아주까리)를 심었다. 피마자 기름이 윤활유로 쓰이기 때문이었다. 


삼일운동 이후에 조선총독부는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다. 일본말도 배우고 한글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1938년부터는 한글 교육을 제안하더니 1943년에는 한글교육은 물론 한국말을 학교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전선이 확대되어 일본 사람으로 모든 병력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조선사람을 훈련시켜 일본군인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말을 하고 일본 글을 이해하는 조선사람은 많지 않았다. 해방직 후 글을 읽을 수 있는 국민이 22%-26%에 불과했으니 당시의 사정은 익히 짐작할 만하다.  말이 통하지 않아  조선사람 군인 만들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훈련시킨 조선사람 일본 장병들의 충성심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포로수용소 감시병과 같은 비전투 임무를 맡았다. 홍사익은 일본군 장군이 되었다. 그는 1944-1945년, 남 필립핀에서 포로 수용소장을 지냈다. 전후에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남자들 만으로는 부족한 인력을 채울 수가 없었다.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대 근무령이 발표되었다. 25세 미만의 여자를 동원하여 공장 등 전쟁에 필요한 노동을 시키려는 취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12세 이상 40세 이하의 여자로 연령 범위가 넓어졌다. 약 20만 명의 조선 여성들이 끌려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약 5만-7만 명이 위안부가 되었다고 한다.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더 좋은 직장을 찾아 일본으로 간 조선 사람들도 많았다. 1939년에 일본과 일본이 점령한 섬으로 이주한 조선사람들은 약백만명에 달 했다. 태평양전쟁동안에은 약2백만이 되었다. 일본은 거의 7천개의 섬으로 된 나라이다. 


일제하의 만주는 한국 보수의 산실이었다. 

일본 사람만으로 군 장교와 정부 관리 자리를 다 채울 수가 없었다.  현지 조달을 하기 위해서 만주에 군관학교와 정부 관리를 배출할 수 있는 대학을 세웠다. 만주 건국대학은 관리를 양성하는 대학이었다. 삼일운동 33인 중의 하나인 최남선은 이 학교의 교수였다. 박정희 암살 때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이 대학 출신이다. 박정희는 만주 군관 학교를 우수 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일본 육사에 입학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일본 헌병 소위로 만주에서 일본군 경력을 시작했다. 정일권은 일본 육사,  백선엽은 만주 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해방 후 남한의 참모총장을 지낸 10명 의 장군들이 일본군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광복군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은 5.16 쿠데타를 주도 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남한의 보수세력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주력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와 중국에서 모택통 군대와 협조하여 항일전쟁을 했던 독립군 출신들과  1945-1949년 까지 모택통을 도와 국민당군과도 싸웠던 북한군이었다. 남한의 장군들은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한국전쟁은 항일전쟁의 재 판이었지만 남한의 장군들은 일본이 아니고 새나라 남한에 충성하는 장군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 사람이라면 이를 가는 한국에서 친일파라는 낙인을 지워 버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한의 진보파는 이점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한국의 보수파는 반공으로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고 진보파를 공격하는 무기로 삼았다. 남한의 정치판은 반대파에게 빨갱이 덫 씨우기와 친일 경력 찾아내기로 비굴한 싸움을 계속해 왔다. 


1941년 12월 10일 김구는 광복군을 창설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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