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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Sep 17. 2020

미군정기

03. 우익 단체와 요인 암살

일제가 나가면 새나라의 주인이 되는 줄 알았더니,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차지했다. 이 무렵 세계 각국은 공산주의 나라인 소련과 자본주의 나라인 미국 뒤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한반도는 두 무리의 맹주가 서로 대립하는 최초의 현장이 되었다. 


북은 소련이 일본 관동군과 직접 전투를 하며 들어왔기 때문에 비교적 좌우 대립 없이 빠른 속도로 공산주의 국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남한은 좌우 대립으로 인해서 혼란에 빠진다. 좌, 우, 중립, 좌파 민족주의, 우파 민족주의, 중립 민족주의 등등 무려 400개에 가까운 정당이 생겼다. 미군정은 친미, 반공,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남한에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한민족은 해방과 광복이란 말이 어색할 정도로 또 하나의 비극의 장을 계속해야 했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상투적인 노동자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추구했다. 노동조합을 이용해서 파업을 하게 하고 군중 시위를 주도했다. 경찰력 만으로는 이를 진압하기 어려 웠다. 미군정은 여러 우익 테러 단체들을 동원하여 경찰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했다. 이틈에 우익 정치인들은 경찰과 테러 단체들을 정적 제거에 이용했다.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그리고 김구가 암살된 후에 남은 인물이 이승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선포했다. 분단을 확정 지은 날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통치 발표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미국, 소련, 영국의 외상들이 만나서 극동 문제 처리에 관한 안건들을 토의했는 데  한반도 독립도 중요한 안건 중에 하나였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제안한 한국 5년 4개국 신탁통치 안을 토의 했다. 소련이 이를 반대했으나 심의 끝에 12월 27일 3상이 모두 합의 한 한국 신탁 통 치안을 발표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신탁통치가 확정된다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조건부 신탁통치에 합의한 것이다.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 임시정부를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임시정부를 만들기 위해서 미소 공동위원회를 조직하고 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 조직 초안을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의 합의를 얻어서 임시정부를 조직한다. 한국 임시정부와 한국의 각 정당, 미소 공동 위원회는 4개국 신탁통치에 대한 안을 신탁 당사자인 4개국에게 제시하고 4개국이 합의하여 결정한다. 당시의 좌우 대립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실현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1945년 12월 25일, AP 통신은 미국 외상 로버트 번스(Robert Byrnes)가 한국을 즉각 독립시키기 위해서 러시아로 출발했다는 보도를 했다. 동아일보가 이를 그대로 기사화했다. 이로 인해서 한국사람들은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소련은 찬성했다고 믿게 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발표 직후에 좌나 우나 모두 신탁을 반대했다가  이듬해 1월 2일에 공산주의자들은 반탁으로 돌아 섰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의 오해를 고착화시켰다. 그러나 신탁을 제안한 장본인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였다. 


신탁 발표 이후 남한 정국은 좌와 우에서 신탁과 반탁 싸움으로 깊은 혼란에 빠지고 당시의 아까운 인물들이 암살되기 시작했다. 좌가 우를 우가 좌를 죽인 것이 아니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찬탁을 주장하는 우측 인사들을 민족주의 극우 반탁 세력이 제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백의사와 염동진


염동진

1934년 염응택(염동진)은 뤄양(낙양)에 있는 육군 중앙 군관학교 분교 한인 특별반에 신익희의 소개로 입학했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이후 장개석은 김구와 돈독한 관계가 되었고 국민당군은 한인들을 훈련시켜서 항일전선에 투입하려 했다. 한국 임시정부와 한국인 무장 부대는 남의사 소관이었다. 국민당군 안에 있는 일종의 비밀 정보기관이었으나 단순한 정보기관 이상의 기능을 담당했다. 


임시정부가 국민당이 준 자금을 학생들에게 쓰지 않고 유용한데 대한 학생들의 단체 항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학교를 도중하차해야 했다. 신익희는 그를 난징 헌병사령부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여기서 그는 남의사 요원이 되었고 염동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의사 첩보원이 된 그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지독한 고문에 견디다 못해서 관동군의 밀정이 되었다. 이때 고문으로 인해서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1943년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영화 암살에 나오는 변절자 염석진(이정재 분)의 실제 인물이 염동진이다. 


1944년 염동진은 대동단이라는 우익 단체를 만들었다. 일 년 후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오고 공산주의 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대동 단원 백관옥, 선우봉, 박진양 등은 조선공산당 평양지구 위원장이었던 현준혁을 암살했다. 10월에 소련당국의 추적을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낙원동에 백의사를 창설했다. 염동진은 백의사의 사령이었다. 곧 궁정동에 있는 적산 가옥을 인수하여 본부를 이동했는 데 이곳이 후에 유명한 궁정동 안가가 되었다. 대다수의 단원들은 김구의 추종자들이었다. 단원들은 종적인 관계는 알아도 힁적인 관계는 극비였다. 한반도, 만주, 중국 전역이 활동 무대였다. 연동진은 일부러 맹인처럼 행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력이 나빴던 것은 사실이다. 


신익희는 임시정부 중앙정치 공작대라는 지하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름만 다르지 백의사와 그 조직이 섞여서 움직였다. 1946년 3월 1일 김일성 암살 미수 사건이 터졌다. 백의사와 정치 공작대의 합작이었다. 백의사 대원 이성렬, 김정의, 김형집, 최기성, 이희두 등과 정치 공작대 선우 길영 등이 가담했다. 평양 역전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김형집은 연설 중이던 김일성을 향해서 수류탄을 던 졌다. 경비 중이던 소련군 소위 야코프 노비첸코가  단상에 떨어진 수류탄을 얼른 집어서 던지려는 손간 그의 손에서 폭발하여 김일성은 무사했고 그는 손을 못 쓰게 되는 부상을 입었다. 거사에 실패한 후 이성렬 등은 김책, 최용건, 강양욱 등 북한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백의사 요원이었고 염동진의 신복이었다. 그는 국회 똥물 사건으로 유명하다. 

신민당 총재를 지냇던 유진산도 백의사 간부였다. 유진산은 대한 혁신 청년단이라고 하는 우익 조직의 보스였다. 백의사는 서북청년단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좌익 노동조합은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였고 우익계 노동조합은 대한 노동조합 총 연합회(대한노총)였는 데 이조직의 간부직은 거의 다 백의사 단원들 몫이었다. 


백의사는 미군 CIC(방첩대)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보처 과장 장석윤, 방첩대 소속 이순용 중사, 도날드 위태커 소령이 백의사와 소통했다. 장석윤은 후에 내무장관, 이순용은 내무와 체신부 장괸을 역임했다. 위태커는 장면 정권의 정치고문이었다. 백의사 단원은 북한에 침투했고 이들이 얻은 정보를 방첩대에 보고 했다. 방첩대는 백의사의 횔동을 보호했다. 김일성 암살에 참여했던 이성렬도 방첩대에서 일했다. 

(*이상 월간조선 2016년 10월 남의사와 백의사 참조)


1945년 북한과 서북청년회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만주 일본 관동군 공격 작전 지역에 북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반도는 관동군의 후방이자 퇴로였다. 관동군의 좌, 중앙, 우를 동시에 빠른 속도로 공격(브리쯔)하여 완전 포위 삼멸 하는 작전이었다. 이  포위망의 우측이 북한이었다. 소련군은 8월 11일부터 웅기, 나진과 8월 13일에 청진에 소련군이 상륙했다. 일본 관동군의 저항 또한 치열하여 8월 15일 이후에도 전투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24일에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들어오고 26일에 소련군 제25군 사령관은 민정 관리총국을 설치하여 소련군정을 시작했다. 남한 미군정의 우두머리였던 하지 중장에 해당하는 인물은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이었던 테렌티 시티코프였다.  


여운형이 주도했던 건국준비위원회는 한반도 전역에서 조직되었고 평안남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는 조만식이 수권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신자였고 우파 정객이었다. 당연히 김일성의 숙청 대상이었다. 1946년 2월 8일 소련군정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건준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했다. 김일성은 소련이 지도하는 대로 소련과 대동소이한 지도체제를 만들어 갔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속도였다. 남한이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북한은 놀라운 속도로 안정을 찾아갔다. 단독정부 수립-무력통일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계획이 비교적 순조롭게 딘행되었다.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지주들의 땅을 빼앗아서 소작인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대부분이 소작인이었고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하고 있던 시절에 농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꿈이 현실이 된 거나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모든 산업을 국유화했다. 기업가들은 일생동안 공들인 기업을 을 하루아침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빼앗겠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다. 공산주의 자체가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일본은 소련의 적이었다. 러일전쟁의 원한이 있었을 것이고 일본은 싸우고 있는 눈앞의 적이었다. 일본과 협조했던 사람들은 설 땅이 없었다. 친일파 청산은 빠른 속도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새로운 정책에 동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와중에 소외 계급이 발생했다. 


하루 아침에 재산과 가족을 잃고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모두 남쪽으로 탈출했다. 공산주의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었다. 지주와 그들의 가족, 사업가. 친일파, 기독교인들은 북쪽에서 살 수가 없었다. 이들은 남쪽에서 공산주의와 싸우겠다고 모임을 만들었다. 1946년 3월 5일부터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각 도별로 결성한 청년 단체들이 11월 30일에 통합해서 발족한 것이 서북청년회이다. 이승만, 김구, 한국 민주당 등이 자금을 지원했다.  대형 개신교 교회들이 이들을 지원했다. 미군정과 이들 간의 직접적인 거래는 아직 까지 찾아볼 수 없으나, 밝혀 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각종 파업과 시위 진압,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우파 정객 이승만과 김구 등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시위 조장이나 진압에도 동원되었다. 경찰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객들이 저놈들이 공산당이니 혼내 주어라 하면 주저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했다. 지나친 폭력, 잔인한 살인, 강간, 도둑질을 서습치 않고 저질 렀다.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고 잔류 세력은 1949년 10월 18일 단체 등록이 소멸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전통은 아직 까지도 극우 태극기 부대로 남아 있다. 요지음 전광훈 목사와 태극기 부대의 관계도 서북청년회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송진우 암살


송진우는 당시에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공산주의가 완전히 허구였음이 증명된 오늘날에 그가 더욱 그리워진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대세였던 시대에  보기 드문 친미 우파 정객이었다. 이승만과 일맥상통 하나 그에게는 사리보다는 나라의 장래가 우선이었다. 무작정 민족주의를 앞세우지 말고 미군정과 협조하여 정황을 순조롭게 풀어 나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국민당 정권의 보호를 받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여 새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만약 미국을 배척하면 한반도는 공산국가가 될 것이고 이것은 민족의 장래에 맞지 않는 제도라고 했다. 


전라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송훈은 일찍이 새 학문의 중요성을 알아서 그를 담양에 신설된  영어 서당에 다니게 했다. 김성수와 같이 일본 유학을 했다. 와세다 대학과 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했다. 김성수와 같이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또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동아일보 사장 시절에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에 우승하자 기자에게 손기정 사진에서 일장기를 떼고 보도하라고 지시 한 장 본인이다. 


조선총독부가 맨 먼저 수권을 부탁 한 인물이 송진우이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가 할 일이라며 거절했다. 그 후 여운형이 수권을 수락하자마자 그에게 같이 일하자고 했으나 똑같은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임정봉대론이라고 한다. 1945년 8월 16일 그는 서상일, 김준연, 장택상 등과 함께 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민들었다. 임정을 중심으로 새나라를 만들 목적이었다. 


남한의 기득권층 지도자들은 한국 민주당을 창당했다. 일본, 미국, 유럽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들 중심이었다. 당시에 이렇다 한 집안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연히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녹을 먹은 사람들이 많았다. 요지음 친일파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장덕수, 허정, 백남훈, 김도연, 조병옥, 윤보선 등이 중요한 당 지도자 들이었다. 1945년 9월 16일, 한민당은 송진우를 초대 당수로 추대했다. 


여운형과 안재홍으로 시작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우파 중도였던 안재홍이 떨어져 나가고 좌파 중도였던 여운형과 박헌영이 합처지면서 조선인민회의로 바뀌고 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그는 반역집단이라고 비난했다. 송진우와 한민당은 이승만과 김구 모두의 귀국을 환영했고 두 세력에게 자금지원도 해 주었다. 1945년 10월 31일 하지와 만나서 군정에 관한 깊은 토론을 했다. 그 후 하지는 송진우를 신뢰했고 하지는 그를 미군정과 한국 정계의 메슨저로 이용했다. 이날 하지는 송진우에게 신탁통치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위키피디아 송진우 참조)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날라 들어왔다. 좌우할 것 없이 온 국민이 반대했다. 송진우는 무조건 과격하게 반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안이 미국의 정책이라는 것을 알 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틀 후인 29일 저녁때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갔다. 김구는 이미 극한투쟁을 결심하고 있었다. 송진우는 미국과 대립해서는 안된다고 김구를 설득하려고 했고 김구는 송진우를 설득하여 자기와 같이 투쟁하게 하려고 했다.  김구는 애초부터 미군정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미군정 또한 김구와 임정이 눈에 가시였다. 미군정은 김구와 임정 세력의 쿠데타를 우려하고 있었다. (비치 보고서에서) 

송진우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립하지 말고 추이를 봐가면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김구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반탁도 신탁도 아니었고 지금은 미군정과 협조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주장일 뿐이었다.  합의를 보지 못하고 새벽 4시에 원서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6시에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6명의 괴한들이 나타나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들이 쏜 13발 중 6발이 명중하여 즉사했다. 범인은 평안도 출신 극우 민족주의자 한현우였다. 장택상, 조병옥, 미군정 모두가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여운형 암살

여운형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암살당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면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고 3.1 운동을 주도했고 상해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대중적인 인기 때문에 일본 국회의원들 앞에서 대한민국 독립의 정당성을 요지로 하는 연설을 했어도 일본 정부는 그를 어쩌지 못했다. 국내 유일한 수권 조직인 건국동맹을 만들고 총독부가 그에게 치안을 부탁하자 이를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수권 작업을 하던 중 미군이 점령하여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일단 그의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군정 초기에 군정의 정책을 남한 국민에게 전달하는 매체로 송지우와 한민당을 이용했으나,  신탁통치 발표와 송진우 암살 이후 군정의 정책 방향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은 여운형과 김규식을 도와서 한반도에 남북을 합친 한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고 남북 대표들이 참여하여 조선 임시정부를 조직한 후 미소공동위원회와 조선 임시정부는 신탁통치 4개국이 납득할 수 있는 신탁통치 안을 만들어서 최장 5년 동안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안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군정이 좌파와 우파를 모두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선택한 이유이다. 궁극적으로는 미군정은 김규식이 남한을 통치하기를 원했다.


좌충우돌이라는 말이 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여운형은 양쪽에서 공격을 받았다. 한때 같이 일했던 우파 안재홍은 좌파를 마다 하지 않는 그를 떠났고 공산주의 혁명을 하려고 드는 박헌영과도 갈라졌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하나의 정부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김규식과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을 만들었다. 일종의 임시국회와 같은 것이었다. 군정은 김규식을 의장에 앉혔다. 45명의 의원들은 대부분 한민당 사람들이었다. 보수우익 인사들이다. 친일인사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 3월 5일 부일 협력자와 민족반역자를 규정하는 법률을 상정하였다. 이 법안에는 친일경찰의 피선거권을 제안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로 친일파가 믾은 경찰들은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을 재거해야 한다는 포스터를 돌렸다. 


한편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신탁통치 절차의 첫 단계인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조선 임시정부 형성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동안 반탁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우파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지 않고 이의 실패를 선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남한 만의 정부를 김구는 남북한을 합한 정부를 원했다. 찬탁 세력이었던 여운형과 김규식은 1947년 봄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자 남과 북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조선 임시정부 수립을 크게 기대하고 이었다.  미군정의 지지를 받았던 이들은 이승만과 김구에게 커다란 위협이었을 것이다. 


1947년 7월 17일, 수도 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은 여운형에게 서울에 있으면 위험하니 지방으로 피신하라고 경고했다. 좌우 합작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던 그는 1945년 8월부터 무려 10차례나 테러를 당했다.  장택상의 충고를 받아들여 1947년 7월 19일 오후 한 시 집을 나서서 지방으로 가려고 혜화동 로터리를 통과하는 순간 한지근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바로 경찰서 앞이었다. 


과연 암살의 배후는 누구인가?

사건의 수사는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이 맡았다. 수사결과는 한지근의 단독범행이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7년 후 1974년 2월 유순필, 김훈, 김영성이 검찰에 나타나서 자기들이 한지근과 같이 여운형 암살에 가담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우파 테러리스트인 김영철로부터 권총 2개를 받아서 암살에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1985년 8월 31일 백의사 부사령관이었던 박경구의 녹취록에서 김영철이 백의사 집행 부장이었음이 밝혀졌다. 박경구는 백의사 보스였던 염동진이 여운형 암살을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백의사의 지휘명령체계는 김구-신익희-염동진이었다. 


이승만은 장택상을 통해서 경찰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정세는 경찰을 포함한 극우 세력과 여운형이 서로 적대관계로 치닫고 이었다. 이승만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대가이며 펜실베이니아 대학 명예교수인 이정식 교수는 2007년 9월호 신동아에서 박헌영을 암살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여운형의 딸 여연구 씨가 "아버지를 암살한 이는 종파분자(공산주의자)들"이라고 한 것을 유일한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구 소련 비밀문서에서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았다고 했으나 무엇을 찾았는지는 제시하지 않았다. 여운형과 박헌영의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좌파보다는 우파가 더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미소공동위원회-조선 임시정부-신탁의 시나리오를 행할 인물은 여운형 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여운형 없이 김규식 혼자 이일을 해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운형 암살 후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포기하고  남한 단독정부 쪽으로 정책을 바꾸어 가는 수 박에 없었다. 


장덕수 암살

장덕수는 일본 유학생 시절, 김성수, 송진우 등과 친분을 쌓았다. 그들과 같이 동아일보를 창간했고 동아일보 재직 시절에 미국에 무려 13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공부를 했다. 영국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말과 영어에 능숙했다. 상해에서 여운형과 같이 일했고 그가 아끼던 후배였다. 장덕수가 하의도에 연금되어 있을 때, 여운형이 일본 국회의 초대로 일본 국회의원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장덕수를 풀어 주면 연설 초대를 수락하겠다고 하여 장덕수를 풀어 주고 그로 하여금 통역을 맡게 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친일로 돌아 섰다. 해방 후에는 한민당에 가입하여 정치활동을 했다. 그는 미소 강대국에 점령당한 현실을 인정하고 강대국과 협조하여 새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판단하고 있어서 김구와 이승만을 비롯한 여러 정객들이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장덕수는 여운형 암살 이후 미군정이 의지하고 싶은 지도자였다. 여운형 암살 이후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남북한 통일정부를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암암리에 유엔 감시하에 남한 만의 총선거를 실시하고 친미 남한 정부 수립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김구가 신탁반대로 미군정과 대립하고 있는 마당에 장덕수와 한국 민주당이 가장 믿을 만한 대안이었다.


암살 사흘 전인 1947년 11월 29일 저녁, 김성수, 백남훈, 장덕수는 이승만과 회합을 했다. 한민당 간부였던 이들은 이승만에게 한민당은 이승만을 지원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승만은 걷잡을 수 없이 분노를 터트렸다. 문을 잠그고 국가의 반역자라고 악을 썼다. 11월 30일 김구의 집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그들의 측근을 대동하고 만났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장덕수가 암살되기 이틀전에 장덕수를 달갑지 않게 여기던 그들이 회동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 까?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반대했다. 장덕수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공식적으로는 전자는 반탁이요 후자는 친탁이었다. 특히 김구와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놓고 크게 의견 대립을 했다. 김구가 주도하던 한국독립당과 한국 민주당 합당 문제가 대두되었다. 장덕수는 이를 반대했고 김구는 합당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한민당 당수였던 장덕수는 합당하면 당을 임정(한독당)에게 헌납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성수는 합당을 찬성했다. 그러나 장덕수는 자신이 아니고 누군가가 김성수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왜 그랬는 지는 모른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7시, 장덕수는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경찰관 박광옥과 초등학교 교사 배희범 외 5명의 권총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박광옥과 배희범은 모두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다. 한국독립당은 김구가 당수였다. 당연히 암살의 배후로 크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김구는 법정 증언을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트루만이 증언을 촉구하는 친서를 보내자 할 수 없이 증언대에 섰다. 물론 암살 관련을 극구 부인했으나 정치적인 타격은 컸다. 


장덕수를 마지막으로 미군정이 희망을 걸었던 거물 정치인들은 모두 제거되고 남은 인물은 이승만 밖에 없었다. 남북협상을 고집하는 김구와 김규식은 미군정이 추구하는 남한 단독정부와는 거리가 먼 정치인들이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법정에 서지 말게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응답을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 선거를 주장했고 김구는 남북협상으로 나라의 분열을 막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적이 되어 갔다. 두 사람이 반탁을 주장했고 미소공동위원회에 협조하는 찬탁 세력이 무두 제거되자 이승만 앞을 가리는 인물은 김구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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