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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Feb 22. 2021

일본우파와 하버드 법대교수

역사는 통치자의 변이다.

Mark Ramseyer

역사는 통치자들의 변이다(History is written by the rulers). 


하버드 법대 교수 John Mark Ramseyer 교수는 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s 라는 잡지에 한국인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고 군인들에게 성을 팔아서 돈을 벌기위해서 자발적으로 

지원한 창녀라는 내용의 논문을 제출 했다. 이논문이 인터넽에 개제되어 물의를 이르키고 있다. 일본 우파 매체인 산케이 신문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 했다. 아직 정식으로 잡지에서 채택하여 출판되지는 않았다.

렘지어는 Mennonite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 났다. 메노나이트는 Amish와 비슷한 정식 그리스토교에서 벗어난 편향된 교리를 가지고 있는 교파이다.  부모는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규슈의 미야자키 현에서 18세 까지 자랐다. 그래서 일본말에 능숙하고 일본문화가 몸에 젖어 있는 미국인이다. Goshen College에서 역사학을 전공 하고 미시간 대학에서 일본학 석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법률 대학원에서 변호사 학위를 받았다. 


UCLA, 시카고 법률 대학원 교수를 거처 하버드 대학원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식 명칭은 미스비시 교수이다. 그의 연구비, 월급 등은 모두 미쓰비시 가 하버드 대학에 기증한 돈 백만 달러에서 지급되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대학에서 강의 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 훈장도 받았다. 


그가 자란 규슈 지방을 일본 서부라고 한다. 도쿄가 있는 일본에서  가장큰 섬이 혼슈이고 이섬의 남단에는 조슈 번과 일본 서쪽 남단에 있는 큰 섬인 규슈의 사쓰마 번은 일본 우파의 본고장이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죽고 조선에 있던 일본군이 철수 했다. 1592년에 시작 하여 7년동안 계속되었던 임진전쟁(임진왜란)은 도요토미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1953년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휴전협정이 타결 되었던 것과 흡사하다. 

1590년 도요토미 가 일본천하를 통일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를 굴복시키는 데는 실패 했다.  일본 에도(도꾜)지방에서 실권을 가지고 있던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와 싸우지 않고 기다렸다. 말하자면 평화협정을 맺고 서로 공존 했다. 도요토미가 조선정벌을 나섯을 때 협조하지 않았다. 


도요토미는 하급사무라이 출신이다. 그는 조슈번 나고야에서 태어 났다. 이지방 하급 사무라이 출신들이 도요토미의 심복이었다. 이지방의 번주(영주)들이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다. 조선과 명나라 까지 점령하려 했던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원군과 이순신의 해안 봉쇄로 완전히 실패로 돌아 갔다. 

 

그는 신하들에게 5살난 자기 아들의 승계를 인정할 것을 신신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두쿠가와는 복종하지 않고 도쿠가와 막부를 건설 했다. 그러나 조슈번과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은 도쿠가와에게 반기를 들었다. 도쿠가와는 1600년 세키가하 전투에서 도요토미의 충복들을 제압하고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연다. 260년간 지속 했다. 이동안에 도요토미(풍신수길)의 충복이었던 이지방출신 사무리이들은 찬밥신세였다. 


도꾸가와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조선과도 잘 지냈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어렵게 살던 민초들을 평화롭고 비교적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게 했다. 그러나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흑선을 끌고와서 개방을 강요 했다. 

친하게 지내던 화란(네델란드)사람들이 중국 소식을 전해 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크고 강한 나라라고 믿고 있던 중국(청)이 영국사람들에게 민신창이가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1840년 아편전쟁이었다. 일본은 개방이냐 쇄국이냐의 기로에 섰다. 


260년 동안 이를 갈고 있던 조슈번과 사스마번의 사무라이들에게는 재기할 기회였다. 막부시대에는 사무라이의 수장인 쇼군이 나라를 다스렸고 천황은 아무런 통치권이 없는 피규어 헤드에 불과 했다.  

막부는 일본을 60여개의 번으로 나누어 번주(영주)에 비교적 많은 권력을 나누어 주는 지방분권적인 통치 형태였다. 따라서 외적의 침략에 대비할 강력한 국가의 군대가 없는 취약 점을 가지고 있었다.

조슈번의 사무라이들은 막부를 없애고 천황을 권력의 중심에 앉쳐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만들고 나라의 빗장을 잠궈서 외적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 했다. 사스번의 사무라이들은  천황에게 보다 많은 권력을 주어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 부국강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일본은 5,6천개의 섬으로 된 나라 이지만,  보통 3개의 큰섬 섬, 홋카이도, 혼슈, 규슈가 잘알려저 있다.   그러나 4번째로 큰 섬이 있다. 바로 혼슈와 규슈 사이에 있는 시코쿠이다. 이섬에있는 고치라는 도시가 있다. 옛날에는 도사(토사)번 이라고 했다. 이 지방은 일본의 두 영웅을 나았다. 사카모토 료마와 이와사키 야타로 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막후에서 조슈 세력과 사스마 세력을 설득하여 삿초 동맹을 성사 시켰다. 막부를 폐지하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만들고 나라를 개방하여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서 부국강병을 하자는 데 두세력은 합의 했다. 그리고 8가지의 개혁 초안을 만들었다. 메이지 유신의 원칙이었다. 

사카모토 료마 전기를 극화한 연속극에서는 야타로와 료마가 동네 친구로 묘사 되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료마가 만든 해운 회사의 경리와 감사역을 맡으면서 친분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타로는 해운업으로 부를 축적하여 일본 국가 재벌 미쓰부시를 만들었다. 1871년의 이야기 이다. 일본제국을 탄생시킨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 부터 1872년 까지 경복궁을 중건 했다. 사카모토 료마와 이와사키 야타로의 꿈이 일본을 서양국가들과 같은 강한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던 반면에 흥선의 꿈은 권력을 김씨로 부터 빼앗아 이씨 왕조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경국대전이 그의 교본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개방하는 동안 쇄국을 했다. 

국제정세에 까막눈이었던 조선은 1910년 일본에게 먹혔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이 이루어 진 것이었다. 한반도는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했다. 한국사람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조선은 미국의 적이었다. 


일본은 미국에게 항복 했다. 승전국인 미국은 일본과 남한을 점령했다. 북한은 미국과 한편이 되어서 일본과 싸웠던 소련이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과 한국에 새 나라를 만들어 놓고 나갔다. 미군정은 새나라 일본을 일제 전범들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다 죽을 것으로 생각했던 전범들이 다시 권력의 중앙에 섰다. 그들은 미국의 충복이 되었다.  자민당이  장기집권하는 이유이다. 남한에서도 일제에 협조하던 기존의 권력 층이 새 나라를 만들었다. 미국은 남한의 존폐에 없어서는 안될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두 나라를 자기편으로 확실하게 하는 데 성공 했지만 한국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배가 되었다. 


미쓰부시는 일본3대 재벌중의 하나이다. 2차 대전 동안에 각종 무기를 생산하여 크게 성장 했다. 대표적인 일본 우파 기업이다. 전투기, 잠수함 등 각종무기와 군수품을 생산 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빠져나가자 노동력이 부족 했다. 조선사람들을 공장에서 일하게 했다. 임금을 착취하고 강제 노동을 시켰다. 여자들도 공장에서 일하게 해준다고 모집했다. 그리고 이중에서 일부를 위안부 일을 시켰다. 


미쓰부시는 일본국가 기업이다. 이들은 극우 정치가를 후원 한다. 극우 언론 산케이 신문도 미쓰부시가 뒤에 있다. “제국주의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도 지원한다. 일본 극우 세력은 한국에 있는 학자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지원하여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조선을 도왔다”는 논리로 바꾸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작년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이영훈 교수의 “반일 종족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일본의 자민당은 딱 한번 야당에게 정권을 내주고 1945년 이후 계속해서 집권하고 있다. 승전국 미국이 용서해준 일제의 전쟁범죄자들로 만들어 진 당이다. 한국 여자들을 동원하여 일본군대의 성노예로 만든 일제 통치자들의 전통을 이어 받은 극우 세력들이 현재의 일본을 다스리고 있다. 


히틀러와 같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던 나치는 완전히 범죄자로 처벌 되었다. 현재 독일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나치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 죄과를 인정하고 스스럼 없이 사과 했다. 왜 그럴까?

일본의 통치자는 범죄를 저지른 장본인들의 전통을 이어 받은 세력이고 독일은 범죄자들을 처단한 사람들이 다스리기 때문이다. “내가 나쁜놈이요” 라고 할 정치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역사는 통치자들의 변이다(History is written by the rulers)”.


2차대전 후, 특히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국-일본-남한의 삼국 동맹을 동북아 정책의 기조로 삼아 왔다. 대항마는 러시아-중국-북한이다. 한국전쟁 동안에도 일본은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이 쑥대 밭이 되는 동안 일본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살아 났다. 남한 사람들이 일본을 아무리 미워해도 차디 찬 현실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남한보다 훨씬 중요하다. 


일본 우파들은 미국이 죽으라면 죽고 엎드려 기라면 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에는 일본 사람특유의 앙심이 있다. 그들은 미국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다. 여느 나라와 똑 같은 군대를 가지고 욱일기를 사용하고 일제 전쟁 영웅들을 모신 신사에 참배하고 싶어 한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그들의 등에서 미국을 털어 내면 그들의 정권 장악력은 약화 될 것이다. 일본에 진보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 질 것이다. 그들은 전범세력이 아니다. 극우세력의 거짓말도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지배자는 또 다른 역사를 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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