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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Mar 31. 2021

한국은 왜 유일한 분단 국가일까요?제3부 한국전쟁

18장 휴전과 한국, 중국, 일본, 미국에 미친 영향

한국전쟁 결론; 휴전과 한국전쟁이 한국, 중국, 일본, 미국에 미친 영향




휴전 협정


1952년 11월에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루졌고 공화당 후보인 아이젠하워가 당선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에게 패퇴하고 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이 질질 끌면서 사상자만 나날이 늘어가는 전쟁을 계속하던 트루만 정부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다. 민주당 후보 스티븐슨이 이길 가능성은 애초 부터 지극히 희박 했다. 

아이젠하워는 선거 중  “당선되면 한국에 가 겠다” 고 공약 했다. 그리고 당선자 신분으로1952년12월4일-12월7일, 한국에 와서 전방을 시찰하고 돌아 갔다. 1953년1월20일 그는 34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 했다. 그에게는  한국전쟁의 조속한 종식이 최대 과제였다.


1953년3월5일 스탈린이 사망 했다. 냉전시대에 공산진영을 완성한 독제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러시아와 접경국가를 흡수하여 소련을 만들고 동구의 위성국가, 중국을 망라하는 방대한 지역과 수많은 인구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막강한 독재자 였다. 몽골의 징기스칸이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 한 것과 비슷한 영토 였다. 그는 제정러시아의 소원이었던 한반도도 공산권에 넣으려고 김일성을 앞세워 남한을 침공한 원흉이었다. 그가 이세상에서 사라졌다.


스탈린은 미국을 두려워 했다.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 한 것도 소련이 원폭 실험에 성공 한지 얼마 안되어서 였다.  전쟁 중에도 미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소련군이 직접 전선에 노출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자 스탈린은 인민군에 파견했던 소련군 고문관들을 모두 철수 시켰다. 소련제 공군기 미그기가 압록강 근처 이남에 출현하지 않은 것도 소련군 직접 개입을 숨기기 위해서 였다. 북한이 미 공군기 폭격에 의해서 초토화 되는 것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전쟁 중에 미국은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 했고 핵무기 면에서 소련은 미국에 비해서 크게 열세였다. 그러나 소련은 유럽에서 세력 확장을 하기 위해서 한국 전쟁을 계속하여 미국을 동쪽에 묶어 놓으려고 했다. 


1953년 미국은 전술적 핵무기(tactical nuclear weapon) 개발에 성공 했다. 소형원자무기 였다. 대량 살상을 하는 전략적 원자무기(strtegic nuclear weapon)은 선별적 파괴를 하는 데 아주 불편 했다. 민간인과 군사시설이 아닌 도시 전체를 파괴 하여 국제여론의 뭇매를 맞을 가능 성이 높았다. 그러나 전술적 핵무기는 작은 목표물을 선별적으로 완전히 파괴 할 수 있는 편리한 핵무기 였다. 미국은 이 무기에 대한 소문을 중공군과 인민군 사이에 터트렸다. 이에 과민해진 그들은 휴전회담에 좀더 적극적이었다. 


1952년10월8일 부터 휴전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전투는 계속 되었다. 양측은 참호속에 들어가서 대치하고 있으면서 대포만 쏘아 댔다. 하루에 무려 2500발의 포탄이 떨어 졌다. 1953년 동안에 발사된 포탄의 수는 이차대전 때 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파편에 맞은 사상자들이 속출 했다. 미군은 병사들에게 방탄조끼를 지급했다. 


1953년3월28일, 김일성과 중공군 사령관 팽으로 부터 회담을 속계하자고 유엔군 측에 연락이 왔다. 스탈린이 죽은지 23일 만이다. 1953년6월8일 휴전협정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포로 송환이 타결 되었다. 그러나 휴전을 반대 해 왔던 이승만은 6월18일 반공 포로를 미국의 동의 없이 석방하여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이에 화가 난 중공군은 국군이 방어하고 있는 지역에 집중 포화를 퍼부어 많은 전사자가 발생 했다. 


미국은 극동담당 미 국무부 차관보 였던 월터 로버트슨을 한국으로 급파 했다. 김일성이 남침 한지 딱 3년 되는 1953년6월25일 이었다. 한국과 미국이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는 대신 이승만이 휴전에 찬성하게 위해서 였다. 미국은 방위조약을 약속 했고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양보 했다. 휴전에 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지만 그 동안 결사 반대에 대한 체면치레 였다. 방위조약으로 국군은 20개 사단을 가지게 되었고 한국은 미국으로 부터 $9,500,000의 경제원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53년7월27일, 유엔군 사령부 윌리암 해리슨 중장과 인공의 남일이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 문서에 조인 했다. 서명하는 데 12분이 걸렸다. 두 사람은 말 한디 하지 않고 서명이 끝난 다음 건물을 걸어 나갔다.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되어 있는 18 페이지의 휴전협정 문서는 후에 김일성, 팽 터 후에이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 웨인 클락이 서명 했다. 남한 측에서는 아무도 사인하지 않았다. 아마 이승만의 대국민 시위를 위한 술책이었을 것이다. 


*(파커 만년필 회사는 클라크 장군에게 협정문서 조인에 쓰라고 자 회사 만년필을 보내 주었다. 내가 자랄 때는 파커 만년필을 가지는 것이 소원 중에 하나 였다. 아마 요즈음 한국의 학생들은 만년필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파커는 만년필의 대명사 였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만년필 이었다.) 


서명 후에 클라크 장군은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축복할 기분이 나지 않는 다... 이 조인식에서 희망이 얻어졌다면 그 것은 우리가 이루어 낸 구제(남한)는 앞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감시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희석 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휴전이 되었어도 남한을 보호 해야 하는 미국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This Kind of War)  그렇다.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실질적인 전쟁 일년은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고 국토를 초토화 시켰지만 밀짱 도로묵이 였다. 원상복귀한 중공과 미국은 2년여 동안 협상을 계속 하면서 아무런 영토의 확장 없이 서로 사람만 죽이고 다치게 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그 동안에 중공군과 미군의 대포는 전방에서 국토를 쑥대 밭으로 만들고 미공군은 하늘에서 북한 전역을 초토화 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이것이 사람이 할 짓인가? 


 결론; 한반도, 중국, 일본, 미국에 미친 영향


미국사람들은 한국전쟁을 잊어버린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명예 스럽지 못한, 다른 사람이 알면 창피한 과거의 경험 또는 너무나 아픈 경험은 쉽게 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험한 세상을 견디고 살아 간다. 아마도 그들은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이겼는 가 아니면 졌는 가?  전쟁의 목적이 북한이 점령한 남한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었다면 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을 없애는 것이었다면 미국은 중공에게 졌다. 

왜냐면 중공의 목적은 미국이 점령한 북한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1840년 아편전쟁이후 부터 1950년 10월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와서 미군과 싸울 무렵의 중국의 역사는 “100년 동안의 능멸”로 묘사 된다. 구미 백인들이 중국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동물과 동일 시하는 정도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방불하게 하는 군벌시대를 손문과 장개석이 평정하고 나니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일본의 항복으로 끝나서 한숨 돌리나 싶었는 데, 국공내전이 시작되었다. 4년동안의 싸움은 모택동의 승리로 끝나고 그는 1949년10월1일 중국 인민 공화국을 선포했다. 딱 일년 후에 그들은  미국과 싸우겠다고 압록강을 건넜다. 


인천상륙 작전으로 유명한 맥아더장군이 중공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 가는 가히 짐작 할 만 하다. 트루먼이 확전을 우려하여 중공군 개입이 없다는 것을 확인 한 후에 북진 하라는 경고를 무시한 이유가 개입 가능성 자체가 희박하고,  개입해도 문제 없을 것이라고 확신 했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해 본다. 외관 상 형편 없는 나라였고 그나라의 군대가 미군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중공군을 얕잡아본 맥아더는 어처구니 없이 패퇴 했다. 서울을 다시 내주는 굴욕을 당했다. 자존심상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대만을 끼어 넣고 원자폭탄을 사용하여 중공과 전쟁을 벌려 북한을 망하게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전쟁 발발 몇개월 전에 이미 원폭 실험에 성공해서 미국에 대항 할 수 있는 유일한 핵 국가가 되어 있었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 난다면 핵 전쟁이 될 형국이었다. 위험한 장난 이었다. 그리고 그의 패전은 국내 여론을 완전히 반전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미국사람들은 쓸데 없는 전쟁 하지 말고 빨리 돌아 오라고 했다.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승리하고 북한 본래의 영토 회복에 성공 한 중공은 축제 분위기 였다. 100년 동안 무시 당해서 땅에 떨어졌던 중국사람들의 자존심을 되 살려 주었다. 마오와 주을레의 국민적 지지를 굳혀 주었다. 그동안 마오를 무시했던 스탈린은 그를 인정해 주었다. 중공은 세계 강국으로 등장했다. 


한편 미국은 대만을 중공에 대항 하는 세력으로 키워 주었다. 미국은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는 장개석의 중화민국이라고 천명했다. 한국전쟁이후 미국과 정식 국교가 맺어지지 않은 중공은 

요지음의 경제 제재에 가까운 국제 무역에서 많은 불이익을 감당 해야 했다. 중국사람들은 가난의 늪에 빠졌다. 100여년 동안의 굶주림은 계속되었다. 


한국의 영토는 유라시아 대륙에 매달려 있는 조그마한 반도 이다. 일본이 강한 나라가 되기 전 까지는 한반도는 전 적으로 대륙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바다 건너에 또 다른 세력이 성장 했다. 일본이었다. 일본을 포괄적으로 태평양 세력이라고 한다. 대륙과 태평양 사이에 끼어 있는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태평양 세력의 각축장으로 바뀌어 갔다. 


한동안 유일 한 태평양 세력이었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대륙세력이었던 명나라와 충돌 했고 19세기 말에 청나라와 20세기 초에 러시아와 싸웠다. 그리고 드디어 일본은 대륙세력을 물리치고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었다. 


또 하나의 태평양 세력, 미국은 일본을 개방시키고 키웠으나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었다. 진주만을 공격 하여 미국에 덤벼 들었던 일본은 원자 폭탄 세례를 받고 미국에 항복했다. 패자 일본의 영토 였던 한반도는 승자 미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 순리였다. 


20세기 초반의 유라시아 대륙은 두개의 커다란 공산주의 국가로 인 해서 위압적인 붉은 색으로 도색 되어 있었다. 지도를 쳐다보고 있으면 한반도는 붓 한번의 터치로 적화 될 기세다. 1945년8월 소련의 남하는 우리의 상상이 현실화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의 전리품을 송두리 채 내주지 않았다. 서울이 있는 38선이남을 택 했다. 대륙세력과 새로운 태평양 세력이 반 씩 나우어 가지기로 한 것이었다. 커다란 두 공산주의 국가의 위력을 고려 할 때, 미국이라는 강력한 태평양 세력이 아니었다면 38선 이남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정기에  한반도는 전국토가 공산화 될 가능성이 농후 했다. 소작인이 대부분이었던 농업 구조는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기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만주, 중국, 러시아 등 대륙에서 활동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의 영향을 톡톡히 받았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미국은 38선 이남에 대한민국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한국전쟁 전 까지 남한의 전략적인 가치에 확신이 없었고 뚜렷한 정책적인 목표가 분명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확산 저지와 일본방어라는 남한에 대한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게 했다.  미국과 한국은 동맹국이 되었다.  전쟁중에 미국은 일본을 병참기지화 했다. 한국이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는 동안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으로 만들어진 잿더미를 딛고 빠른 속도로 일어 났다.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의 국교정상화를 촉구 했다. 미국은 일본에게 남한을 도와 줄것을 요구 했다. 이로 인해서 박정희 정권은 한일 국교 정상화와 대일청구권을 성사 시킬 수 있었다.  철천지 원수 일본이 준 돈은 한강의 기적의 첫 단초가 되었다.  그 후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한국은 미국의 보호아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경제성장을 일구어 냈다. 미국의 가치와 문화를 받아 들여 서구 어느 나라에 못지않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2021년의 한국은 자타가 공인 하는 선진국이다. 


한국전쟁은 해방후 한민족이 한 나라를 만들려는 마지막 시도 였다. 그러나 반대로 전쟁은 분단을 고착화 시켰다. 남한에서는 철두 철미한 반공의식이 전국민의 머리 속에 각인 되었고 집권층은 이점을 십분 이용 했다. 남한에서는 북한을 소련의 괴뢰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남한을 미국의 허수아비라고 하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 되었다. 그러나 냉전은 평화를 보장 해 왔다. 


남한 사람들은 오산전투에서 싸운 스미스 중령, 대전을 방어하다가 인민군 포로가 되었던 딘 소장,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워커 장군, 한국전 참전과 인천 상륙작전을 을 주도 했던 맥아더, 직업군인을 희망 했던 뮤노즈 대위, 3년동안 중공군 포로가 되었던 쉴리치터 상사와 이억만리 타향에서 꽃다운 청춘의 생명을 바친 미군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이 많은 영혼들이 한국의 눈부신 발전과 행복하게 사는 한국사람들을 볼 수 있다면, 생전에는 잘 몰랐던 한국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를 알아 차리고 흡족 해 하는 미소를 지을 것이라고 믿는 다. 한국전쟁은 적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잊어 버린 전쟁이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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