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우리들은
#1. 은퇴한 친구 K
내 친구 K는 공무원으로 평생을 보내다 서기관으로 은퇴를 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3도 4촌 또는 4도 3촌의 생활을 하며 반귀촌을 했고 일주일에 두 번은 강의로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것과 가끔 서울집에 가는 걸 제외하면 주로 자신의 고향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서울에서 먼 곳도 아니고 강화도라는 가까운 곳이라 우리는 여름이면 강화도 그 친구집에서 모여 1박을 하며 옛이야기도 하며 그 친구가 밭에 일구는 작물들도 구경(?)하고 술도 마시며 하루를 보내고 온다. 이번 여름도 지난주 그 집에 모여(최강의 더위였을 날) 하루를 보냈다. 이 친구의 작물은 정말 다양한데 집 앞에 밭 조금만 직접 일구는데 그 밭에 호박, 오이, 참외, 수박, 피망 같은 덩굴류, 그리고 고추, 토마토 같은 대를 세워주고 지지대를 필요로 하는 것들과 그밖에 고구마며, 마, 콩, 옥수수와 뒷 텃밭엔 상추며 각종 쌈채류가 심어져 있고 버섯도 키우고(지금은 한 여름이라 그늘막에 세워져만 있고) 과실류 나무들에는 배와 복숭아, 감, 포도, 대추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원래 촌놈이라 이 정도 하는 건 뭐 일도 아니라는 그는 정말 농부처럼 얼굴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가 딴 푸성귀로 찬거리를 만들었지만 이 더운데 불을 펴서 고기를 굽는 건 하지 말자고 읍내 나가 족발을
사와서 술을 마셨다. 아... 이날 접경지역인 이곳에선 대남 방송이 재개되어 이곳 사람들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는데 하루 있었던 우리도 아주 괴로웠다. 북한의 방송은 우리 괴롭히기 그 하나로 확성기에 계속 경보음으로 왜왱~왜왱~~ 거리는 소리와 비행기 출발하는 것 같은 소음만 주야장천 틀어 댔다. 불안감을 조성하려는 것
같았다. 주민들이 아주 고역이란다. 물론 남한도 북한을 향해 몇 배는 더 성능 좋은 확성기로 방송을 해댈
테지만 말이다. 안타까웠다. 세월이 가며 서로 가까이 조금씩 문을 열고 다가가도 부족할 판에 다시 이런
구 시대로 돌아가다니... 내 친구 집에서 북한의 개풍군 까지는 직선거리로 2.8k로 멀리 한강 하구 건너 북한의 집들이 보이고 망원경이 있으면 사람들도 보일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 친정아버지가 시집간 딸 챙겨주듯 자신이 키운 것들을 종류별로 따서 바리바리 싸주는데 고구마순도 벗겨놓은 것이라며 싸주고 당뇨에 좋다며 말린 여주를 싸주면서 우리 나이엔 이런 것도 먹어야 한다며 잘 덕아서 차로 우려내 먹으라고 음용법까지
알려준다. 노각은 무쳐먹어야 한다며 그만의 레시피까지 알려주었다. 기특한 놈...
그렇게 우린 또 한 여름밤 하루를 그네 집에서 보내고 왔다.
#2. 은퇴한 나는
나는 33년을 다니던 일터에서 은퇴를 하고 그 계열사 격인 지방의 읍내에 있는 작은 일터로 4년 전에 내려왔다. 그러다 보니 은퇴 후 귀촌. 귀농도 아닌 어정쩡한 시골 살이를 하고 있다. 처음엔 텃밭을 일구고... 뭐 그러려고 했다가 일단 몇 해 전 실패한 기억도 있고 굳이 남의 집에 세를 살면서까지 땅을 일구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고(실은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다) 그저 마당가에 꽃이라도 가꾸고 화분이라도 잘 가꾸자로 돌아 섰다. 아무튼 나는 몸은 시골에 살지만 출퇴근하는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일터에선 한창 올해 노조와 임금교섭이 진행 중이다. 그래서 나는 사측대표로 이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마주 앉아 교섭을 해야 한다. 아주 고역인 날이다. 노조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는데 그 요구를 설득하고 받아내는 것도 고역이고... 무엇보다 37년 전 서울에 있을 때는 내가 노조 간부활동을 했고 당시 87년은 울산에서 시작된 노동자 대투쟁등으로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될 때였고 마치 이건 시대의 부름과 같은
느낌으로 곧 이은 사무전문직 노조가 태어나는 계기 이기도 했고 그로 인해 노조 활동을 했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고 간부가 되었고 또 세월이 흐르고 나는 은퇴를 하고 이곳으로 내려왔는데 이번엔 내가 사측대표로 노조와 교섭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일단 내 입장은 사측이니까 노조의 요구나 주장을 들어주거나 잘 논리적으로 설득하여야만 한다. 우리 일터의 이야기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대의적인 면에서는 이해가 되고... 그 입장이 지지가 되기도 하지만 이게 우리 일이 되어 자기주장을 하며 공격할 때는 현 상황이나 제반 어려움들을 설명해도 안 통하니 이럴 땐 정말 화도 나고 답답하기만
하다. 더욱이 요즘 노조는 그 시절 내가 노조활동할 때와는 사뭇 분위기도 다르고 일단 요구 조건도 다르고
요즘 노조 간부는 사실 구속이 된다거나 목숨 내걸고 하는 게 아니니 너무나 다른 느낌의 노조인데 이걸 MZ세대라고 다 뭉뚱그려 넘길 수는 없지만 예전과는 정말 다른 느낌이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예전과는
당연히 달라야 하고... 또 그게.... 딱히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다기보다는 다른 상황이라 다르게 보이는 것
말고 예전과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집회도 농성도 출퇴근을 딱딱 맞춰하는 것도 신기했고(예전엔 퇴근 후 밤샘 농성도 하고.... 몇 날을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했지만) 지금은 파업 집회도 퇴근 시간에 맞춰 칼같이 끝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신세대적이고 합리적인 노조 문화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건 신선하다. 문제는 이 교섭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교착상태에 빠지고 작년에는 파업으로 이어져 아주 고역이기도 했다는 것이고 올해는 파업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지만 빨리 잘 끝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사측교섭대표도 이젠 정말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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