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최승희

- 춤으로 날아올라 이념의 덫에 걸린 여자

by James 아저씨

이 이야기 들에 나오는 분들은 내게 문화적 영향을 준 사람들입니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내 코드가 맞는 사람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내 영혼의 팬?

그냥 쉽게...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들은 나의 십 대 말부터 지금까지 내 감성의 심연에 들어온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음악, 미술, 문학, 혁명가, 대중예술, 스포츠, 건축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글들입니다

그래서 깊이 없는 그저 내 감정, 내 마음대로 쓴 글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둡니다.


22번째: 최승희

image.png 1911~1969(추정)

나는 그녀의 춤사위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다. 그저 빛바랜 흑백 사진의 속에서, 혹은 오래된 다큐멘터리의 화면 속에서 재구성된 생애를 봤을 뿐이다. 불운한 시대의 천재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녀 또한 일제 강점기라는 혹독한 세월 속에서 '춤'이라는 눈부신 날개를 달고 세상을 날아다녔다. 그러나 그 가냘픈 날갯짓이 당도한 끝은 좌와 우, 이념의 서늘한 낭떠러지였다. 결국 그녀가 택한 길은 우리와 영영 멀어지는 고립으로 이어졌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남긴 춤의 궤적은 남과 북 모두의 무용계에 지워지지 않는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고 여기서 나는 그녀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기묘한 지점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결과론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최승희는 '친일'과 '친북'이라는 양극단의 오욕을 동시에 짊어진 희귀한 예술인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반도의 무희'로 불리며 전 세계를 매료시켰던 그녀가 어째서 그토록 위태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는지, 그 비극적 서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내가 최승희라는 이름을 처음 주의 깊게 본 것은 1995년의 이었고 당시 시사 월간지 <말>에서 그녀를 다룬 특집 기사를 본 것이 시초였다. 분단 이후 금기시되었던 이름이 세상 밖으로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그 후 나는 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굴곡진 생애와 북한에서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다룬 미스터리한 기록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겨울, 그녀의 전기를 읽으며 비로소 한 인간의 삶에 대해 조금 다가갈 수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책장 너머로 마주한 그녀의 성품이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예술가 특유의 결벽에 가까운 자의식이었을까, 아니면 생존을 위한 처절한 본능이었을까. 주변의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그녀는 결코 '안온하고 선한' 인성을 지닌 이는 아니었던 듯싶다. 하지만 그 인간적인 호오(好惡)를 떠나, '춤' 하나만큼은 그녀가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몰두했던 유일한 구원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피카소와 장 콕토 같은 거장들이 그녀의 공연에 매료되어 찬사를 보냈다는 일화는—비록 매체마다 사실 여부가 분분할지라도—그녀의 예술이 이미 국경이라는 틀을 넘어섰음을 짐작게 하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최승희의 시작은 찬란한 축복과도 같았다. 고종 때 진사시에 합격했던 아버지 최준현의 막내딸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신식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녀는, 소학교 시절부터 월반을 거듭할 정도로 총명함이 유별났다. 그러나 이 영특함은 외려 비극의 서막이 되었는데 가세가 기울고 생계를 위해 응시했던 사범학교에서 '나이 미달'이라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을 때, 명석한 두뇌 덕에 해냈던 조기 졸업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 좌절의 끝에서 만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는 그녀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그의 제자가 되어 건너간 일본에서 최승희는 곧 '동양의 보석'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구의 현대무용에 한국적인 호흡과 곡선을 결합하여 '보살춤'과 '장고춤' 같은 전무후무한 양식을 창조해 냈고, 서구인들에게 동양적 신비와 현대적 세련미를 동시에 선사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무용가에게 평온한 예술가의 길은 허락되지 않았다. 전쟁의 선전 도구로 동원되어 국방헌금을 내기도 하고 전선으로 위문공연을 다녀야 했던 행적은 훗날 그녀에게 '친일'이라는 낙인을 찍었고, 광복 이후 돌아온 고국에서도 사상 검증의 파도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남편 안막과 함께 선택한 월북의 길에서 그녀는 권력의 정점에 다가가는 듯했으나, 1960년대 후반의 북에서의 숙청 바람은 그녀를 역사 속에서 철저히 지워버리고 말았다.


가장 화려한 무대 뒤편에는 한 가문의 몰락이라는 서글픈 풍경이 서려 있다. 4남매 중 셋이 월북을 택하면서 명문가였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홀로 남겨진 늙은 아버지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자식들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무용가의 아버지가 산야에 먼지처럼 흩어지는 동안, 딸은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삶을 반추하다 보면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녀를 기회주의자라 비판하고 누군가는 시대의 희생양이라 변호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발끝으로 그려낸 춤사위만큼은 그 모든 오욕을 덮을 만큼 강렬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정립한 무용 체계는 오늘날 남북한 무용계의 근간이 되어 맥맥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그녀의 삶이 온화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기구한 삶의 무게와 예술을 향한 지독한 집념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역사는 흐르고 이념은 부패하지만, 고통의 심연에서 피어난 예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 자명하고도 서늘한 진리 말이다.


#최승희 #춤 #월북 #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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