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나타나 나를 흔들고...
이 이야기 들에 나오는 분들은 내게 문화적 영향을 준 사람들입니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내 코드가 맞는 사람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내 영혼의 팬?
그냥 쉽게...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들은 나의 십 대 말부터 지금까지 내 감성의 심연에 들어온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내 감정, 내 마음대로 쓴 글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둡니다.
1977년 내가 고2 때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록밴드
김창완(보컬, 기타), 김창훈(보컬, 베이스), 김창익(드럼)의 삼 형제로 구성된 밴드로 당시 가요계의 주류는
'포크' 아니면 '트로트'였던 판에 '펑크 록' 느낌에 '프로그레시브' 성향도 보이는 하여간 좀(사실 이들이 프로그레시브 한 면이 무엇이 어떻다고 정확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평론가들이나 음악인들 사이에서 그렇다고 하니) 이상한 사운드를 들고 나왔는데 사실, 산울림은 그 이전의 그 아무것도 영향받지 않은 이상한, 독창적인 작법과 창법이어서 당혹스럽고 그만큼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라벌 레코드사에서 나온 싱글 앨범은 <산울림 새 노래 모음>이었고 정규 앨범이 같은 해 나온 산울림 1집이다. 여기에 "아니 벌써"가 타이틀 곡이고 이 앨범은 당시로서는 꽤 많은 판매량인 40만 장이 팔렸다고 한다.
뭔가 아마추어적인 소리에 이상한 앨범인데도 대중들은 열광했고 나 또한 열광했고 이후 나는 이들의
정규 음반을 모두 사는 건 물론 내 생애 최초의 라이브 공연을 보게 된 것 또한 이들의 공연이었다.
78년인지 79년인지 헷갈리지만 당시 정동에 있던 문화체육관에서 이들의 라이브 콘서트가 열렸는데 권투링처럼 무대가 중앙에 있었고 객석은 그 주변에 둘러 놓인 정말 권투링 같았었다. 문제는 소녀팬들의 아우성과 막무가내식 접근(?)으로 장내 정리요원(또는 경호요원)은 긴 대 막대기로 무대에 뛰어오르는 소녀들을 제지
하는(지금 같으면 SNS에 나오고 뉴스에 나올만한) 상황이 숱하게 벌어졌다.
김창완이 노래 부르다 뒤쪽 객석으로 몸을 돌리면 그쪽 여자 애들이 울고불고 아우성이고 난리가 났다.
휴식시간인지 공연도중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엔 없지만 여자애들이 집단으로 막무가내로 무대로 뛰어
올라와 김창훈에게 달려들고 김창익에게 다가가려 했고 그때마다 정리요원은 그 긴 막대기를 사정없이
휘둘러 댔다.
그렇게 강제로 무대에서 끌려 내려오고 맞으면서도 여자애들은 마치 좀비 떼처럼 무대에 기어 올라갔다.
그때 내겐 이 장면도 너무나 충격이었다. 그 후 80년인가에 '뉴키즈 온 더 블록' 내한 공연에서 여학생들이
기절하고 실려나가고 난리가 났었고 그 보다 앞선 70년대 초에 이화여대 대당당인지 유관순기념관인지에서 외국 남자가수 초청 공연에서 당시 여학생들은 소리 지르다 까무러쳐 기절하고 속옷을 벗어던지는 등의
일도 있긴 했었지만(아마 그때 그분들이 지금 70대가 되었을 것이다) 직접 내 눈으로 이런 광경을
본 건 처음이었다.
당시 70년대 가요계는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에 의해 대마초 파동으로(75년) 쟁쟁한 가수들은 다 구속되거나 퇴출되고 한국 록음악계는 황폐화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이 형제들의 음반은 후에 한국 최고 록 앨범으로 한국 대중 음악사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았다. 이들은 이후 동요음반도 내놓는 등 동요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박정희 정권하에 모든 문화는 검열에 의해 세상에 나오거나 묻히거나 했는데 가요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가 다 아는 양희은이나 김민기 같은 사람의 곡들은 거의 금지곡이었는데 '아니 벌써'도 둘째 김창훈이 작년 초 그에 대한 비화를 한겨레 신문에 밝힌 적이 있었는데...
현재 가사는 '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인데
원래 가사는 ' 아니 벌써... 밤이 깊었나... 이 친구 벌써 취했네...' 였다고 한다.
당시 유신정권의 서슬 퍼런 검열하에 '온종일 술 먹다 벌써 밤이 깊었나'라는 가사가 경쾌하게 아침을 그린 노래로 바뀐 것이라고... 그런데 일부에서는 당시 그런 서슬 퍼런 시절 동요나 부르고 저항의 상징인 록
음악이 서정성 짙은 록으로 연주되는 것에 대해 시대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도 했는데 당시 민중가요등도 자유롭게 유통되거나 하는 건 아니었고 대개는 다 은유적인 가삿말로 불려지는 때였다. 나중에 9집과 10집에서 환경오염에 대한 곡을 발표하는 등 사회문제등이 나오기도 했었다. 그 후 막내 김창익이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삼 형제 그룹활동은 끝이 났고 김창완은 김창완 밴드를 결성하고 또 후배들의 프로듀싱에도 참여하고 화가 및 라디오 DJ와 무엇보다 연기자로 활동을 하는 등... 여러 행보를 보이고 있다.
(선 한 옆집 아저씨 같은데 악역으로 나오는 파격~)
산울림은 1977년 1집으로 시작해서 1997년 13집까지 정규 앨범을 냈으며 기타 동요 앨범등과 편집 앨범과 영화음악등을 발표했다. 그런데 2008년에 나온 CD전집(그간의 모든 음반을 담은)이 문제가 생겨 난리가 났었다. 이전에 나온 전집 음반도 문제가 있었는데 십 년이 지나 새로 나온 음반이 이런 기술적인 문제로 최악의 음반으로 오명을 쓴 채 리콜이 되고 암튼 난리 부르스였다. 사실 활동기간은 77년부터 80년 중반까지니 별로 긴 기간은 아니었고 정규 음반 13집에 비하면 너무 짧은 기간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마니아 들은 일본에 더 많아서 그 인기는 일본에서 더 하다고 하니... 참 신기하기도 하고 진짜인지 모르지만 산울림 음반은 유럽에서 '아트 록' 부분에 희귀 음반으로 고가의 명반으로 취급되고 있다니...(이건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튼, 그래서 내 맘대로 우리나라 가요사를 정리하자면...
산울림 이전과 이후, 그리고 서태지 이전 이후로 나뉠 것 같다. 내 문화적 감수성의 대부분이 포크 통기타
가수들이었다가 이 산울림이라는 충격의 사운드가 나를 덮치고 그러다 90년대 초 서태지가 나오면서 또
한 번 획을 긋게 된 것 같다. 나는 이후 서태지 이후 곡들을 듣지 않고 가요와 담을 쌓게 되었다.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건 분명한데 그의 음악 이후 댄스곡과 랩과 빠른 비트의 곡들이 나오면서 나는 귀를 닫고 말았는데 90년대 잠깐 김광석에게 열광하다 그가 가고 난 후 나는 가요 듣기를 접게(?) 되었고 한류열풍으로 수많은 걸 그룹, 보이 그룹이 명멸했어도 나는 아는 곡 하나 없다. BTS를 모르면 역적일 것 같아 그네들이 몇 명인지 정도는 아나 무슨 곡을 불렀는지는 모른다. 도무지 빠르고 비트 강한 댄스곡들은 눈에도 안 들어오고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TV 음악프로그램이나 모든 요즘의 음악은 내게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노래방에서도 나는 김광석 노래 아니면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없고
(요즘 다시 유행하는 트로트는 예전부터 좋아하지 않는 장르여서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다)
결국 나는 문화적 꼰대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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